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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전문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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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전문대학
仁川專門大學
Junior College of Incheon
파일:인천전문대학 엠블럼.svg
<colbgcolor=#f4d17d><colcolor=#fff,#000> 개교 1969년[1]
이사장 백인엽
분류 사립 시립[2]
교훈 건전한 신체와 정신의 함양
개개인의 적성기술의 연마
인류문화에 공헌
국가 대한민국
상징 사자
통폐합 2010년 3월 1일[3]
위치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 235[4]
인천전문대학 위치

1. 개요2. 주요 시설3. 역사
3.1. 시립화3.2. 통폐합
3.2.1. 언쟁
3.3. 통폐합 이후
4.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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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9년 1월 선인학원 이사장 백인엽이 설립한 공업계전문대학교.

2. 주요 시설

3. 역사

처음에는 1958년 백인엽이 성광학원을 인수하여 '선인학원'으로 개칭하고, 11년뒤인 1969년에 5년제로 인천공업고등전문학교로 설립되었다. 총 6개 학과에 320명 입학이라는 순조로운 시작을 하였다.

2년 뒤 1971년, 생활미술과, 건축과를 신설하고, 4년 뒤 1975년에 2년제 인천공업전문대학으로 개편함과 동시에 인쇄과를 신설하였다. 다시 2년 뒤인 1977년, 6년 전 신설하였던 생활미술과를 공예과로 개편하였고, 1978년에 학생들의 수가 꾸준히 늘어나자 야간 강좌를 시작하면서 설립되었던 시절부터 있었던 자동차과를 폐지하였다.

1979년에는 인천공업전문대학인천전문대학으로 개편하고, 1981년에 인천체전, 즉 인천체육전문대학을 통합해 우리가 아는 인천전문대학이 만들어졌다. 또한 실업계 학과 6개를 신설하여 공학부, 실업학부, 체육학부로 편성하였다.

3.1. 시립화

하지만 이사장 백인엽이 선인학원의 온갖 비리와 실체들이 퍼지면서, 1981년에 '국민에게 속죄하는 뜻'으로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하였다. 그러나 1985년 10월, 백인엽이 선인학원 건설 고문으로 복귀해 선인학원 운영에 다시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6]
<colbgcolor=#f4d17d> 파일:선인학원 시립화 요구 사진.jpg 파일:선인학원 시립화 요구 사진2.jpg
이를 알아차린 선인학원 산하 대학교 대학생들은 백인엽에 대고 선인학원에서 물러나라는 시위를 이어나갔다.[7] 1986년 10월에는 인천대학에 무기한 휴교령이 내려지고 당시 청와대에 선인학원 개편 요청을 하는 등 사태는 점점 심각해지기 시작한다.

시위는 점차 흘러가 신문에 나올 정도로 퍼져버렸고, 선인학원 학교 운영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때마침 1992년에 인천시 관계자들과 주민들이 서명운동을 하기 시작하며 인천시에 선인학원 시/공립화를 요구하였다. 각종 서명운동과 압박이 계속되자 결국 백인엽 1993년, 인천시에 선인학원의 14개의 학교를 시립화 또는 공립화를 하는 조건을 건 다음 모든 권한을 주고 떠나버렸다.

권한을 가지게 된 인천시는 곧 교육부와 함께 선인학원 산하 학교의 시/공립화를 추진하였다. 마침내 1993년 12월 교육부는 '선인학원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는 공립으로 전환하고, 인천전문대학과 인천대학교는 시립으로 전환' 이라는 내용으로 공식으로 발표를 했다. 소식을 들은 인천대학교 대학생들은 인천대학교 시립화 기념으로 대축제를 벌였다.[8]
<colbgcolor=#f4d17d> 파일:인천대학교 시립화 기념 대축제.jpg
인천대학교 시립화 기념 대축제
이로써 1994년 3월 1일 선인학원이 해산됨과 동시에 선인학원 산하 14개의 학교들은 시/공립화 되어 문제는 완전히 끝이 난다.[9]

의의를 논하자면 해당 사건은 단순 재단만의 문제가 아닌 학생들과 인천 시민, 각종 사회단체들이 힘을 합쳐 소망하는 것을 이룬 일이므로 꽤 훌륭하고 뜻 깊은 업적일 것이다.

3.2. 통폐합

선인학원 산하 학교들이 시/공립화된 이후 학생들은 순조로운 학교생활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2000년대에 들어, 한국에는 재개발 열풍이 불었고 인천에도 재개발 이야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colbgcolor=#f4d17d> 파일:인천전문대학 캠퍼스 재배치 프로젝트 자료.jpg
당시 캠퍼스 재배치 조감도
처음에는 인천전문대학 캠퍼스 재배치를 계획해 위의 사진처럼 진행될 예정이었다. 바로 옆에있는 인천대학교는 송도캠퍼스로 이전할 계획이었고, 인천대학교 본관, 선인체육관, 인문사회관, 이공관, 동북아통상학부 건물은 철거하고 재개발을 이어나가는 것이 원래의 계획이었다. 몇몇 건물들은 리모델링해서 재활용하고, 몇몇 건물들은 아예 새로 짓는 걸로 결정을 하려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뜬금없이 인천시 측에서 통합안이 결정될 때까지 캠퍼스 재배치 사업을 중단한다 라는 말이 나오면서 재배치 사업은 급히 중단이 되어버렸다.

통합안의 내용은 '인천전문대학을 인천대학교에 통폐합 시키고 송도캠퍼스로 옮긴다' 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인천전문대학 측이 엄청난 손실을 보게 된다는 결과도 나오기도 했다. 이를 보고 전문대학 학생들은 건물에 인천전문대학 통폐합을 반대하는 현수막을 걸어놓거나 시위를 벌이는 등 활동들을 이어나갔다.

처음에는 개발사업이 중단되는 등 효과가 보였지만 결국 인천전문대학 통폐합이 계속 추진되었고, 결국 2009년 2학기에 인천대학교가 송도로 이전, 몇달 뒤 2010년 3월 1일 인천전문대학이 인천대학교에 통폐합 되어버려 인천전문대학의 역사는 끝이 난다.

3.2.1. 언쟁

해당 문서도 참고하면 좋음.
대중들은 통합안의 내용을 확인하고 즉각 비판에 나서기 시작했다. 어느 날은 인천전문대학/인천대학교 관계자 및 교수, 인천시 관계자들이 인천전문대학을 인천대학교에 통폐합시키자는 주제로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그 회의장소에서 사람들이 인천전문대학 통폐합을 찬성하는 교수들을 건물 밖으로 내쫓는 등 강한 통폐합 반대 의견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멀쩡하게 있는 대학을 갑자기 왜 통폐합을 시키는가", "이건 인천시만의 이익을 위한 행동이다" 라는 등 각각의 비판들이 나왔고, 이를 반론하는 사람들은 "인천대학교를 경쟁력 높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다. 인천시는 그 당시 재정난을 실제로 겪고 있었고, 비판하는 쪽에서는 인천시 재정난을 해결하려는 의도로 밖에 안보인다는 의견을 내었다.

3.3. 통폐합 이후

<colbgcolor=#f4d17d> 파일:선인체육관 발파직전.jpg
발파해체 당일 모습
재개발로 인해 없어지게 되는 선인체육관에 대한 도화동 주민들의 아쉬움도 있었다.[10] 참고로 선인체육관은 완공 당시인 70년대에는 한국이 꿈꾸고 있었던 '동양 최대' 라는 타이틀을 딴 몇 안되는 건물이었고, 인천의 상징이라 불리던 체육관이었다. 나아가 강의동 해체 당일 사람들이 폭파 해체를 구경하는 진풍경도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인천전문대학이 통폐합 된 이후로 현재 인천전문대학 건물들은 10년도 더 된 현재에도 흉물로 남아있다.[11] 인천전문대학 통폐합 내용은 더 이상 거론되지 않고 있고, 전망은 아직도 불투명한 상태이다.

4. 관련 문서



[1] '인천전문대학'이라는 이름으로는 1981년에 나왔다. 인천체육전문대학인천공업전문대학을 통합해서 나온 이름이다. [2] 1994년 3월 1일부로 시립화되었다. [3] 인천대학교에 통폐합되었다. [4] 지도 등록상의 위치이다. [5] 현재는 인천대학교 제물포캠퍼스 본관으로 지정되어 있다. [6] 실제 사례를 들어 전문대 본관 앞에 있던 천연잔디 운동장(현재 지도상 명칭으로 대운동장)을 동양 최대 공원인 '교육공원'이라는 공원으로 바꿔버렸다. 물론 교육과 전혀 상관없는 시설이었고, 나중에서는 사망사고까지 벌어졌다. [7] 해당 시위의 주요 인물들은 인천대학 학생들이었다. [8] 참고로 1988년에 인천대학은 종합대학교로 승격되면서 인천대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9] 위에서 각주로 서술했던 교육공원 이라 불린 곳은 철거되고 다시 운동장으로 만들어졌다. 전처럼 잔디가 깔리지는 못했다. [10] 네이버에 당장 선인체육관을 검색해도 블로그 글이 나온다. [11] 특히 인천전문대학 본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