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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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易雄(? ~ 322)
서진 및 동진의 인물. 자는 흥장(興長). 형주 장사군(長沙郡) 유양현(瀏陽縣) 출신. 춘추전국시대 중산국 왕족의 후손.
2. 생애
젊은 나이에 현의 관리로 임관했는데, 스스로를 비천하다 여기고 능력 또한 미치지 못한다 여겨 금방 사직하였다. 이후 율령을 익히고 여러 호족들과 교류하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에 장사군에서 이웅을 불러 주부로 삼았다.태안 2년(303년) 5월, 장창이 안륙(安陸)에서 유민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강하(江夏)를 점령했다. 장창은 팔왕의 난으로 혼란스러운 정세를 틈타 형주, 강주, 예주, 양주, 서주에 걸쳐 수많은 군들을 함락시켰다. 이때 장사군도 반란군에게 점령당하고 이웅과 장사태수 만사(萬嗣)가 사로잡혀 참수당하기 직전이었다. 이웅은 장창을 똑바로 마주보고 논쟁하기 시작하자, 장창은 분노하여 당장 끌어내 죽일 것을 명하였다. 이웅은 끌려가면서도 두려운 기색 없이 장창을 꾸짖으니, 장창은 그의 절개에 감동하여 이내 그를 풀어주었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웅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효렴에 천거되어 주의 주부에 임명되었으나, 함께 잡혔던 만사는 오히려 그와 비교당하면서 면직당했다. 주에서 이웅을 별가로 승진시키자, 이웅은 자신의 가문이 한미하여 맡을 수 없다 여기고 사직한 뒤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얼마 뒤 다시 관직에 나아가 용릉현령에 부임하였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무창(武昌)에서 조정에 반기를 들고 거병하자, 상주자사, 초왕 사마승은 조정의 편에 서서 반란군을 막기 위해 각지에 격문을 돌렸다. 이웅은 사마승의 뜻에 동조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왕돈의 죄악을 나열한 격문을 뿌리니, 상주의 대부분의 군들이 호응하였으나 왕돈의 매형인 상동태수 정담(鄭澹)만이 따르려 하지 않았다. 이에 사마승은 사마 우망(虞望)을 파견해 정담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사방에 돌렸다.
이웅은 용릉현에서 병력 1,000여 명을 모집하고 임상(臨湘)에 도착해 사마승과 합류하였다. 그때 왕돈이 남만교위 위예(魏乂), 장수 이항(李恒)에게 갑사 20,000명을 주어 임상성을 습격케 했다. 당시 상주는 수많은 반란으로 인해 황폐했기에 사마승은 물자와 병력 모든 면에서 왕돈군에게 밀리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사마승과 이웅은 좌절하지 않고 힘써 적은 병력을 통솔하여 수십일간 항전하니, 양측은 서로 죽고 죽이면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하지만 왕돈이 친히 이끄는 본대가 수도 건강(建康) 인근에서 황제의 군대를 전멸시켰고, 안남장군 감탁마저 미적거리면서 원군을 보내지 않자,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불리해져만 갔다.
영창 원년(322년) 4월, 사마승 측의 병력이 모두 소진되면서 임상성이 함락당했다. 이웅은 비록 사마승과 함께 반란군에게 붙잡혀 함거에 갇혔으나, 강개한 기상을 펼치며 두려운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후 이웅의 함거가 무창에 이르자, 왕돈은 사람을 보내 이웅에게 그가 쓴 격문을 펼쳐 보이게 하였다. 이웅은 그 상황에서도 담담하게 말했다.
"이 내용은 모두 사실이나, 애석하게도 나의 세력이 약소하여 나라를 능히 구하지 못하였다. 왕실이 무너진 마당에 내 어찌 안위를 꾀하고 살기를 바라겠는가! 오늘 죽어 충귀(忠鬼)가 되더라도 그 또한 내가 바라던 바이다!"
이웅의 말을 들은 왕돈은 매우 꺼림칙하게 여겨 죽이지 않고 풀어주었다. 이웅의 주변인들이 모두 석방을 축하해주었으나, 이웅은 웃으며"어젯 밤 꿈에서 마차를 탔는데, 고기가 그 옆에 걸려 있었소. 사내의 고기에는 반드시 힘줄(筋)이 있고, 힘줄이 있는 자는 곧 도끼(斤)를 의미하며, 결국 마차 옆에 걸린 것은 도끼니, 나는 곧 죽을 것이오!"
라 하였다. 과연 왕돈은 마음을 바꾸고 사람을 보내 이웅을 살해하였다. 당시 식견 있는 자들은 이웅의 사망 소식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