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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 팔레스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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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간 관계를 서술하는 문서.2. 상세
두 국가의 사이는 증오의 연쇄로 얼룩진 불구대천의 원수관계로 요약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오슬로 협정을 통해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를 자국 내 자치정부 비슷한 존재로 인정하고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자치 영역으로 인정해 주었지만 그것이 팔레스타인을 독립국으로 인정한다는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 역시 오슬로 협정을 받아들였지만 스스로를 독립국이라 주장하고 있다.
이스라엘인 입장에서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시도 때도 없이 까삼 로켓을 날리고 군사도발하는 골칫거리이자 안보 위협으로 인식하는 반면, 팔레스타인인들 입장에서는 이스라엘은 자기 나라를 빼앗고 학살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이 때문에 서로 간의 사이가 매우 나쁘며, 양 국민들이 서로를 해하는 악순환이 70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팔레스타인은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스라엘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지 못하다. 국제적인 체육대회 같은 행사에 참가하는 것조차 이스라엘의 승인이 필요할 정도이며, 기업조차 이스라엘 정부가 허락해 주지 않고, 설령 허락한 기업들조차 이스라엘 정부가 대기업으로 성장하지 못하게 각종 규제를 걸어놨고, 세금도 유대인보다 더 많이 물린다. 이 때문에 팔레스타인의 물가는 대한민국보다 높으며, 소득 대비 세계 최고 수준이다.[1]
뮌헨 올림픽 참사를 일으킨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은 테러 과정에서 네오나치의 지원을 받았으며, 네오나치의 지지를 꽤나 받고 있다. 이것은 네오 나치에게는 이이제이, 팔레스타인에게는 적의 적은 나의 친구라는 진영논리의 한 예이다.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 충돌론 같은 이슬람 vs 서구세계라는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는 거대 담론에서 조금만 벗어나 현지의 직접적인 역사와 각 세력들의 역학 관계를 살펴 보면 팔레스타인 문제는 아랍권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정치적 이슬람주의의 부상과 접점은 있어도 근본이나 주된 성격은 전혀 다른 분쟁이란걸 알 수 있다.
2015년 10월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과의 유혈 충돌이 격렬해진 가운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가 "홀로코스트는 팔레스타인의 아민 알 후세이니가 히틀러에게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알 후세이니가 친나치 활동을 벌인 것은 맞고, 홀로코스트에 동조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나, 홀로코스트의 계획과 책임은 엄연히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독일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장을 하였다. 당연히 이스라엘 내에서도 네타냐후의 이러한 주장에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2.1. 대 하마스, 헤즈볼라와의 관계
먼저 가자 지구를 장악한 하마스, 팔레스타인, 레바논에 위치한 헤즈볼라는 국제법상 인정된 정치 정당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PLO와 이스라엘이 합의를 보았던 자치정부안에 반대하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2006년 팔레스타인 의회 선거에서 승리하고 특히 가자지구를 석권하다시피 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하마스, 헤즈볼라만 멸망시키면 모든 문제는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가자 주민들이 점점 하마스의 광신도적인 통치에 싫증이 나고있는 바람에 하마스의 지지율은 썩 좋지 않다. 그리고 세계적으로도 하마스의 무자비한 전략(민간인을 향한 무분별한 미사일 발사 및 인간 방패[2])과 인권 침해를 점점 알아가면서 아랍권을 제외하곤[3] 하마스에 대한 지지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4]. 그러나 하마스가 자발적으로 정권을 포기할 리도 없고[5]
오히려 이스라엘도 하마스를 때려잡는 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6] 이스라엘은 하마스로 인해 당분간은 괴롭힘을 당할 것은 명백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유대인들도 끝이 안보이는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의 전쟁, 팔레스타인인, 아랍인들의 테러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평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극우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이스라엘 정계도 큰 문제라서 그저 폭력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들어 이 또한 원인이 되고 있다.[7] 그러다 보니 이스라엘이 하마스를 악역으로 삼아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사진과 미디어로 홍보해도 전혀 먹히지 않고 오히려 국제여론은 팔레스타인의 피해만 보지 이스라엘의 피해는 자업자득이라며 비웃음만 당하는 실정이다.
하마스뿐만 아니라 헤즈볼라는 더욱 이스라엘이 고전 중이다. 헤즈볼라는 레바논에서 깊숙이 자리를 차지하고 합법적인 선거를 통해 국회에 진출한 정당이다. 게다가 하마스와는 달리 교리적으로 세속적인 모습을 보이며 미디어 전에서도 이스라엘에게 덤벼들고 있다.[8]
2.2. 가자 지구 봉쇄와 충돌
가자 지구 봉쇄 정책은 이스라엘의 대 팔레스타인 정책으로 가자지구의 주민들까지 함께 봉쇄당하게 되었다. 하마스가 아닌 파타가 집권한 이스라엘인과 팔레스타인인이 같이 살기까지하는 서안지구와는 대조적이다.감시탑을 설치하고 저격수를 배치하여 수많은 하마스 대원들을 사살하였고[9] 그중에 일부 민간인들도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10] 거주구의 건물들이 하마스의 엄폐물이 된다는 이유로 불도저로 모조리 밀어버리기도 했다. 이를 저지하던 소수 팔레스타인 사람들 및 하마스 지지자들이 피해를 입고 미국인 여성 레이첼 코리는 불도저에 압사당했다. 하마스 요원 암살을 위해 차량을 미사일로 파괴하기도 했다.[11] 참고로 금지된 무기와 신무기 실험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2008-2009년 가자 전쟁 때 가자 지구가 폭격 당하는 장면을 TV 프로그램에서 경기 스코어에 비유하면서 중계를 하고 이를 이스라엘인들이 술 먹고 즐기는가 하면 길거리에서 뛰면서(jumping) 환호하는 모습이 알려지기도 했다. 이 모습을 본 덴마크 언론인이 ‘ 스데롯 시네마’라 부르며 이스라엘판 악마를 보았다라고 트위터에 적었다.
가자 지구에 대해 지원하려고 하면 국적과 목적을 불문하고 일단 검역하려고 드는데 왜냐하면 하마스로 무기가 공급되는 것을 철두철미하게 막으려 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과도한 공격으로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 사망하기도 한다.
2009년 1월 9일에는 하마스로 유입되는 무기를 막기 위한 조치였지만 국경선 근처를 지나가고 있던 UN의 팔레스타인 난민 기구 구호 트럭에 공격을 하는 대형사고를 쳐서 UN이 항의하며 아예 지원 중단을 결의한 사례가 있으며, 2010년 6월 4일 벌어진 가자 지구 구호선 총격 사건도 국제적인 비난을 샀다. 결과적으로 9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총격을 받고 숨지면서 UN은 물론이고 국제 사회에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매서운 비난을 쏟아냈으며 주요 동맹국인 터키조차 등을 돌려버리면서 이스라엘에선 난리가 벌어졌다.
이집트에서도 이스라엘 대사관이 가자지구 공격에 항의하는 이집트 민중들에게 공격받아 진압 당시 3명이 사살당하자 반이스라엘 감정이 터지면서 이집트 현 임시 정부까지도 위기에 빠져 터키와 이집트라는 막대한 군사 강국들이 적이 되는 거 아니냐는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정작 유엔 보고서에 따르면 책임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터키에 있었다.
가자 지구 사람들은 이스라엘 정착촌이나 도시에 출입이 불가능하며 용역업 등의 일로 통행시에도 공항의 몇 배에 달하는 검문을 받는다. 가자 지구를 제외하고는 무장한 팔레스타인 사람이 들어온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서안 지구 사람들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이런 가운데 2011년 10월 17일, 5년 동안 헤즈볼라에 납치되어 억류되었던 사병 길라드 샬리트가 석방되었는데 이스라엘 측은 샬리트 이 1명의 석방 조건으로 120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포로들을 석방시키기로 했다. 이는 이스라엘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일이라 화제가 되었고 이스라엘 극우세력들의 반발 속에 결국 강행되었다.
2012년 11월 가자지구에 선전포고하여 또 한 번 폭격을 갈겼다. 이때 공격 예보는 여러가지 방식으로 하는데, TV 방송 외에 SNS도 범위에 들어간다. 예를 들면 트위터에 "가자 지구를 폭격할 예정이니 대피하라 #가자 지구" 라는 식이다.
이 2012년 가자 전쟁은 별다른 성과가 없었고 되려 이스라엘에 대한 반발만 불러와 결국 11월 29일 UN 총회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비가입 참관국 인정을 이끌고 말았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지만 이제 팔레스타인은 UN 전쟁범죄 제소권을 가지게 되어 이스라엘로선 골아프게 되었다. 독일이 기권하긴 했지만 마지못해 기권했을 뿐이며 반대 분위기는 없었을 정도. 물론 제소권이 생겼다 해서 바로 무슨 큰 변화가 생길 거라는 기대는 아무도 안한다.
이후 2014년 7월에 가자지구를 폭격했는데 너무나 막나가는 이스라엘 정부와 그걸 좋아하는 이스라엘인들에게 분노한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반 이스라엘 시위가 곳곳에서 열리는 등 반발만 불러왔다. 프랑스에서는 유태인 가게들이 습격받아 약탈되어 프랑스 경찰이 출동하고 지나가던 골수 유대인 하레디들은 프랑스 사람들에게 나치 새끼들이라는 욕을 대놓고 들어야 했다. 미국조차도 유태계 정치인인 존 캐리가 "우선 이스라엘의 정당방어이긴 한데 이건 너무 심하다. 민간인 피해가 크니 이스라엘도 좀 물러섰으면 한다."라는 태도를 밝혔다. 해외 유대인들도 저놈들 때문에 우리만 피해본다며 비난을 가했다.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스라엘 공보처 아시아언론 담당관이 직접 한국인에게 보내는 특별기고문을 작성하여 연합뉴스에 송부했다. # 이에 연합뉴스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양측의 입장을 비교할 수 있도록 팔레스타인 활동가겸 정치분석가로부터도 특별기고문을 받아 나란히 게재했다. # 이스라엘측 기고문은 제목을 포함해 이스라엘측에서 한국어로 보내온 것을 그대로 실었고, 팔레스타인측 기고문은 영어로 보내온 것을 연합뉴스가 한국어로 전문 번역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서로를 어떠한 시선에서 보고 있는지 직접 비교해볼 수 있다.
2016년에도 4월에 이스라엘의 계속된 봉쇄로 발생한 버스 폭탄테러와 계속된 하마스의 로켓 공격을 받자 다시 공군과 포병으로 가자지구를 공격했다.
2021년 5월 10일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있는 무장정파 하마스를 공습해 최소 20명이 숨지고 65명이 부상했다. #
2022년 8월 5일부터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공습하여 최소 10명이 숨졌다. 이스라엘은 또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팔레스타인 이슬라믹 지하드'(PIJ) 고위급 지도자를 체포했다. #
2023년 10월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2.3. 중동전쟁 시기의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간의 물리적 충돌
“내 나이 열 두 살이었던 1948년의 비극은 나와 내 가족에게 여전히 아픔으로 남아있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집과 영토를 빼앗기고 내쫓긴 후 오랜 세월동안 망명자로 살아야 했고, 소멸된 과거와도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다.
나는 이집트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고 사고를 체계화 했던 법을 배우면서 보냈던 학생 시절이, 팔레스타인 망명 1세대로 아랍 세계 전역에 흩어져서 빌어먹을 법률 때문에 귀화도 할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고 여행도 할 수 없고 매달 경찰에 의무적으로 등록과 재등록을 반복해야 하고, 대량학살의 현장으로 변한 베이루트의 사브라와 샤틸라 같은 끔찍한 캠프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 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축하할 땐 분노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
나는 이집트에서 보낸 나의 유년 시절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말하고 사고를 체계화 했던 법을 배우면서 보냈던 학생 시절이, 팔레스타인 망명 1세대로 아랍 세계 전역에 흩어져서 빌어먹을 법률 때문에 귀화도 할 수 없고 일도 할 수 없고 여행도 할 수 없고 매달 경찰에 의무적으로 등록과 재등록을 반복해야 하고, 대량학살의 현장으로 변한 베이루트의 사브라와 샤틸라 같은 끔찍한 캠프에서 살아야 했던 우리 동포들이 겪어야 했던 것처럼 고통스러웠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나 역시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승리를 축하할 땐 분노의 눈물을 삼켜야 했다.”
― 에드워드 사이드
영국의 위임통치령인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서 유대인들이 독립 선언을 하며 제1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였으며, 그 결과 팔레스타인 지역의 아랍인들 중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을 학살하거나 추방하고 이스라엘 측은 팔레스타인 땅을 강탈하였다.
이 과정에서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100~120명 학살)과 알다와이마 마을 학살 사건(여성과 아이들을 포함해서 80~200명 강간살해 등 학살), 아부 슈샤 마을 학살 사건(60~70명 강간살해 등 학살) 같은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 벌어졌으며 이외에도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강간살해 등 수없이 많은 잔학행위와 학살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출처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여성과 노인, 아이들의 경우에는 학살하거나 추방하였지만 젊은 남성들은 이스라엘 각지의 수용소에 잡아가서 1955년까지 강제노동을 시키기도 하였다. 출처1 2 전쟁 기간 통틀어서 1만 5천명 정도의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이 중에는 학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도 많았지만 식량과 물자도 없이 추방되어 사망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대부분의 팔레스타인 아랍 주민들이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나 난민이 되었다. 이스라엘이 공식적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영국군이 완전 철수하며 영국의 위임통치가 공식적으로 종료되기 이전에 이미 유대인 민병대인 이르군과 슈테른갱이 팔레스타인 중부에 위치한 데이르 야신 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이 발생한 날짜가 1948년 4월 9일로 아직 아랍 군대가 팔레스타인에 들어오기도 전이다. 아랍 군대는 1948년 5월 15일에야 팔레스타인에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절대 아랍 국가들이 평화로운 상태에서 먼저 전쟁을 벌인 것은 아니다. 팔레스타인은 이미 1947년 유엔 분할안 통과 이후부터 전쟁 상태였다.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과 같은 유대인 민병대에 의한 팔레스타인 아랍인 민간인 학살 사건들이 아랍 국가들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아랍 국가들 내에서도 아랍 군대를 팔레스타인에 파병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데이르 야신 마을의 유지들이 당시에 이미 유대인들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아무런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고 이후 들이닥친 공격대에 최소 107명의 마을 주민들이 사망하거나 처형되었다. 민병대 장교 한명이 학살을 중지하도록 명령한 뒤에야 포로로 잡힌 마을 사람들은 유대인 주민들의 공개적인 모욕과 욕설을 들으며 예루살렘의 아랍인 거주지역까지 강제로 걸어간 뒤 풀려날 수 있었다. 이 데이르 야신 마을 학살 사건에 대한 소식은 아랍 세계 전역에 빠르게 퍼졌고 이후 팔레스타인 북부 항구도시인 하이파가 유대인 민병대에게 점령당한 뒤에는 위임통치령 전역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시작했다. 이후로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학살과 잔학 행위는 꾸준히 빈번하게 계속되었고 1차 아랍-이스라엘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이스라엘이 점령한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 85%에 달하는 70만명 이상이 가자지구나 서안지구 등지로 쫓겨나 난민이 되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이들 난민들의 귀환을 막기 위해 400개에서 600개에 달하는 팔레스타인 아랍 마을들을 거의 완전히 파괴하였다. 팔레스타인 문제는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점령지를 떠나서 가자지구, 요르단강 서안에 정착하게 된 난민들을 기원으로 한다.[12][13]
다만, 한명도 남김없이 모조리 추방하지는 않았고 1차 중동전쟁이 끝날때까지 추방을 면하거나 난민이 되더라도 이스라엘 영토 내에서 난민이 된 소수의(대략 전체 인구의 15%)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이스라엘 시민으로 귀화해서 살아가는 상대적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추가적으로 조금 더 덧붙이자면 이스라엘에 현재에도 소수지만 팔레스타인계 아랍인들이 시민권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추방한 것은 아니라는 주장도 있는데 이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현재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주로 서안 지구와 인접한 삼각 지구(Triangle Area)와 북부 갈릴리 중앙부에 거주하고 있는데 이 지역의 경우 기독교인 수도 적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을 전부 추방하는 것은 기독교 국가들을 자극하거나 아니면 갈릴리 지역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인 나자렛의 경우 이 지역의 교회들이 바티칸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어서 일부를 추방하지 않거나 추방하더라도 귀환을 허용한 것이다. 또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아랍인들 중 다수는 고향이 이스라엘에게 점령당해 서안지구와 가자지구를 차지한 이집트,요르단으로 떠났지만 이스라엘 국내에서 난민이 된 국내 난민(internally displaced Palestinians)들이다. 당장 이스라엘 내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인 나자렛 같은 경우에도 전체 인구의 60%가 자신들의 원래 고향에서 추방당한 국내 난민들이다. 이들 역시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지는 못한 상태이다. 이스라엘의 경우 이미 대부분의 유대인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해야 한다는 조기의 목적은 달성되었고 따라서 일부 팔레스타인 아랍인 정도는 남겨도 큰 문제는 없었다. 이 경우 지역 경제를 유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일부나마 남기거나 돌아올 수 있게 허용해 주는 면도 있었다. 이스라엘의 영토가 된 지역 중 앞서 말한 팔레스타인 아랍 시민들이 밀집해 거주하는 일부 지역들을 제외한 다른 지역들은 거의 대부분 아랍인들이 완전히 추방당했으며 현재까지도 아랍인 거주민의 수는 극히 미미하다. 출처
또한 이스라엘은 1966년까지 자국 내의 모든 아랍인 시민들을 혹독한 군사 계엄령에 따라 통치하였다. 이에 따라 이스라엘은 자국 내의 모든 아랍인 시민들의 토지를 자신들 마음대로 압류하거나(실제로 이스라엘에서 쫓겨난 아랍인들 뿐만 아니라 잔류한 아랍인들까지 대부분의 토지를 빼앗겼다. 이스라엘이 세워지기 이전에 아랍인들은 위임통치령 팔레스타인 전역에서 94%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현재 이스라엘 내에서 아랍인 소유의 땅은 1%밖에 되지 않는다.) 아랍인 시민들의 자본 투자와 취업과 같은 경제기반을 모두 통제할 수 있었으며 아랍인 시민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가능성 또한 거의 완전히 차단하였다. 이 기간동안 아랍인 시민들은 허가증 없이는 여행조차 할 수 없었으며(이 통행 허가증마저도 거의 발급되지 않았다) 통행 금지령과 강제 구금, 강제 추방과 같은 일들을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이스라엘이 군사 계엄령을 해제하는 1966년까지 지속되었다. 출처
이스라엘 내에 잔류한 모든 아랍인들이 이스라엘 시민권을 즉시 획득한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에 잔류했지만 이스라엘 국적을 즉시 획득하지 못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은 1980년이 되어서야 모두 이스라엘 국적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수많은 이스라엘 내 아랍인들이 무국적자로 살아야 했다.[14]
이스라엘이 1차 중동전쟁이 끝나자마자 자국 내의 아랍인들의 추방을 중단한 것도 아니다. 이스라엘은 1차 중동전쟁 종전 이후로도 1950년대까지 내내 자국 내에 잔류한 아랍인들을 지속적으로 국외 추방하였다.[15]
현재의 팔레스타인은 명목상으로는 이슬람 국가들과 반미국가들 그리고 스웨덴과 같은 중립을 표방하는 선진국들에게 독립 국가로 승인을 받았지만 대한민국, 영국을 위시로 하는 친미, 친서방 국가들과 이스라엘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으며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와 가자지구에 대해 봉쇄와 경제 제재, 정착촌 건설, 강제 추방, 토지 압류, 군사 점령 등을 계속하며 팔레스타인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16]
3. 역사적 관계
3.1. 오스만 제국 시대
아랍 민족주의의 선봉에 서있던 것이 서구와의 접점이 많았던 아랍계 기독교인 지식인들이었고, 오스만 말기에 간행되어 팔레스타인이라는 말을 널리 확산시키며 지역민들을 이어주고 시오니즘을 비판하던 대표적 근대신문 ' 팔라스틴(بلستين)'도 기독교 신자가 만든 언론이었다. 팔레스타인의 경우 원래 동로마 제국의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였던데다, 예루살렘의 상징성 때문에 기독교인 공동체도 많았다.3.2.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자세한 내용은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 문서 참고하십시오.자세한 내용은 팔레스타인 내전 문서 참고하십시오.
1940년대 팔레스타인에 유입되는 유대 난민들. '독일인들이 우리 가정과 집을 파괴했다. 우리의 희망을 파괴하지 말라'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3.3. 이스라엘 독립 이후
자세한 내용은 나크바 문서 참고하십시오.그리고 팔레스타인 민족의 역사적 시조라고 불리는 아민 알 후세이니는 나치즘에 동조하며 나치 독일에 부역하였던 바 있다.[17] 전후 프랑스 측에서 그를 석방한 이후 알후세이니는 이집트로 망명하였고, 그곳에서 다시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를 이끌었다. 알후세이니의 행적은 인도의 찬드라 보스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다른 조직이 저지른 짓이지만, 팔레스타인 독립운동가가 여기에 협조했다는 점과 비록 소수이기는 하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이 협조했다는 점, 그리고 팔레스타인이 테러리스트들을 대외적으로 영웅이라고 선전한다는 점과, 대부분의 팔레스타인인들이 거기에 동조 혹은 방조한 점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의 주류는 세속적 아랍 민족주의, 사회주의의 영향력을 받으며, 여성 인권이나 다른 종교, 민족과도 훨씬 더 유화적이었던 PLO나 PFLP 산하의 지원병(fedayeen, فدائيون)들이었으며, 하마스의 부상은 이들이 오슬로 협정 이후 부정부패로 심각하게 지도력에 금이 간 아라파트 체제가 무너지면서 생긴 일이다. 팔레스타인 대통령 마흐무드 압바스도 2018년 인터뷰에서 팔레스타인이 이슬람과 기독교의 땅이며 예루살렘은 이슬람과 기독교의 수도라고 말했다. 물론 이스라엘의 압제를 아라파트와 자치정부가 대항할 수 없었던 것도 있다. 당장 대중 문화에서 체 게바라 같은 팔레스타인 저항의 아이콘으로 떠오른 유명한 여성 페다이 레일라 칼레드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고, 하마스의 부상 이전 명실부공한 두번째 팔레스타인 저항 단체였던 팔레스타인 해방인민전선(PFLP)의 경우 아예 기독교 신자인 조지 하바쉬가 창설하고 지휘했던 집단이다.
3.4. 2010년대
2012년 11월 29일 팔레스타인이 이스라엘과 미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유엔에서 '비회원 옵서버 국가' 지위를 얻는데 성공했다. #3.5. 2020년대
이스라엘 정부가 동예루살렘에 새로운 유대인 정착촌 건설을 추진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그러면서 팔레스타인 정부는 이스라엘과의 대화를 재개한다고 전한다. # 이스라엘 측도 압류해뒀던 팔레스타인 측 세금 11억 달러를 넘겨줬다. #
2021년 2월에는 이스라엘측에서 팔레스타인측에 코로나19 백신을 제공했다. #
2021년 7월 1일에 팔레스타인의 슈크리 비샤라 재무장관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거두는 각종 세금들과 관세 등의 정책들로 인해 팔레스타인 정부가 공공수입의 60%에 대한 관할권을 박탈당하고 있다고 밝혔다. #
8월 29일,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고위급 인사들이 2010년 이후 처음으로 직접 만났다. 이번 회담은 나프탈리 베네트 이스라엘 총리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한 직후에 성사됐다. # 이스라엘 국방부는 이날 회담 후 발표한 성명에서 “양측이 최근 요르단강 서안 지구와 가자 지구 내 치안과 재무상황 등을 논의했다”고 밝혔다. 이날 회담에서 간츠 장관은 팔레스타인의 경제활성화를 위한 다수의 조처를 실행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했다.
8월 31일, 팔레스타인과 고위급 회담을 한 이스라엘이 1억5천만 달러[18] 규모의 차관을 제안했다. #
2023년 1월 3일, 이스라엘의 한 정치인이 예루살렘의 알아크사 모스크를 방문하자 사우디, 아랍에미리트, 팔레스타인 등이 반발했고, 요르단은 주 요르단 이스라엘 대사를 초치해 항의했다. #
1월 12일,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는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민간인에 대한 강경정책을 규탄했다. #
결국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하였다.
4. 교통 교류
가자 지구를 제외한 팔레스타인 영토 중 유대인 정착촌과 이스라엘을 잇는 도로가 존재하나 유대인 정착촌이 아닌 곳의 경우는 도로나 항공 노선이 없다.5. 관련 작품
6. 관련 문서
- 이스라엘/외교
- 팔레스타인/외교
- 이스라엘/역사
- 팔레스타인/역사
- 이스라엘/문화
- 팔레스타인/문화
- 팔레스타인인
- 가나안
- 이스라엘 왕국, 유대 왕국
- 중동전쟁
- 팔레스타인 내전
- PLO
- 오슬로 협정
- 이츠하크 라빈, 야세르 아라파트
- 하마스, 헤즈볼라
- 텔아비브야파, 예루살렘, 라말라
- 이스라엘의 가자 지구 철수
- 가자 전쟁
- 보이콧, 투자철회 및 제재
- 일국 방안, 양국 방안, 삼국 방안, 영국 방안
- 이스라엘-팔레스타인-아랍권 관계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
[1]
'울지마 팔레스타인' 책에서 드러난다. 책을 지은 작가도 팔레스타인에 가서 높은 물가에 놀랄 정도였다고 술회하였다.
[2]
공정하게 애기하면 이스라엘측 역시 팔레스타인 민간인이나 아동을 인간방패로 쓰는경우가 일상적이고 민간지역에 무차별 폭격이나 총격으로 인명살상을 허구헌날 발생시키고 있다 고의적인 주택이나 도로등의 인프라 파괴작전역시 그렇다
[3]
아랍권은 이스라엘이 그 꼴 당해도 싸다며 하마스를 감싸준다.
[4]
다만 2024년 이-팔전쟁에서 세계각지에서 발생하는 친펄-반이스라앨 종전시위등에서 보듯 비서벙 국가들에서는 하마스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호의적이라는 게 나왔고 서방국가들 역시 하마스에 대한 지지나 평가는 낮으나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에 댜한 지지나 호의 역시 지속적으로 안 좋아지고 있다
[5]
이스라엘에 항복해도 숙청 또는 감옥에서의 고문과 학대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많은 팔레스타인인들 역시 이스라엘의 노예로 사느니 싸우다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만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싸우는 하마스를 지지하고 있다.
[6]
하마스를 때려잡으려면 몇 년 아니면 몇 십년을 각오해야 하는 장기전으로 가야 하는데 이스라엘은 인구가 적고 경제력도 한계가 있어서 장기전에는 약점이 있다. 이스라엘을 심하게 괴롭히던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페다이를 멸망시키는 데에도 8년이나 걸렸다. 그런데 페다이보다 더 조직적이고 강한 하마스는 30년 가까이 이스라엘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하마스 말고도 여러 무장 단체가 골고루 조직되어서 하마스를 멸망시킨다 해도 다른 무장단체들이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있기에 이스라엘에게는 더더욱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하마스 항목에 이들 세력과 하마스가 모여 찍은 사진이 하나 올라와있다.
[7]
하마스가 제시한 협상 조건을 보면 하마스 입장에서 많은 양보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제대로 지켜진다는 가정 하에 나름 평화로운 조건이다. 하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이를 거절하며 힘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다.
[8]
이미 이스라엘은 2006년 레바논 침공으로 헤즈볼라와 정면 승부를 벌였다가 사실상 패배하고 철수한 전적이 있다
[9]
하마스도 저격수를 양성하여 상당수의 이스라엘 군경과 민간인들을 죽였다. 하마스 저격수의 저격 실력은 전차 위에서 장갑판으로 보호받아 기관총 공격하는 전차병에게 헤드샷을 맞출 정도로 뛰어나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하마스 저격수가 자폭테러범, 로켓공격만큼 공포의 대상이다.
[10]
이스라엘은 하마스만 사살했다고 주장했지만, 소수 민간인 및 외국인도 소탕에 휘말려 피해를 당했다.
[11]
이스라엘측 의견은 '하마스가 타고 있다고 추측하는 차량에 공격을 가함'이었다
[12]
영문 위키백과 출처 페이지 링크 1,
2,
3,
4,
5
[13]
유진 로건, 이은정 옮김, 『아랍: 오스만 제국에서 아랍 혁명까지』 (까치글방, 2016;개정판 2022)
[14]
https://en.m.wikipedia.org/wiki/Israeli_citizenship_law
[15]
https://en.m.wikipedia.org/wiki/1949%E2%80%931956_Palestinian_expulsions
[16]
https://en.m.wikipedia.org/wiki/Israeli_occupation_of_the_West_Bank
[17]
아민 알후세이니는
세르비아계 학살에 가담하기도 했다. 이에
티토가 그를 잡아 죽이려 이를 갈았다.
[18]
약 1천735억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