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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 팔레스타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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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관계에 대한 문서다. 양국은 언어, 문화, 종교 등에서 공통점이 존재하며 아랍연맹, 이슬람 협력기구의 회원국들이다. 그리고 시리아는 팔레스타인만을 인정하고 있다. 시리아 내에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존재한다.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모두 세속주의 성향이 강하다. 시리아는 아사드 정권은 헌법상 국교도 정하지 않았으며 이슬람 근본주의를 탄압하는 세속주의 정책을 추구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은 웨스트뱅크 일대의 파타당이 세속주의를 추구한다. 다만, 가자지구는 하마스 세력이 강하며 파타당과는 차이점이 크다.
2. 지리적 관계
시리아는 메소포타미아의 연장선상에 있는 지역으로 고대 이래 가나안 지역에 상당한 수준의 문화적 영향을 주었던 바 있다. 고대 아람 왕국에서 사용되었던 아람어는 레반트 일대에서 메소포타미아 일대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던 언어였고,[1] 로마인들은 레반트 지역 전체를 싸잡아서 시리아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3차례에 걸친 유대-로마 전쟁 이후 로마 제국에서 유다이아 속주의 명칭을 시리아-팔레스타니 속주로 변경한 사례를 들 수 있다. 이미 로마인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남부와 레바논 일대를 시리아-포이니키아 속주로 명명하였고, 튀르키예 동남부에서 시리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은 시리아-코일레 속주로 명명한 바 있었다.한 편 헬레니즘 제국 시대 그리고 고대 로마 시대 당시 일부 시리아인들과 그리스인들은 고대 지중해 세계 기준으로 유별났던 유대교의 특수성에 상당한 호기심을 느끼고, 유대교로 개종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2] 유대교 사회에서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들을 어떻게 처우할 것인가 라는 주제가 상당한 논란으로 떠올랐다. 보수파들은 이들을 유대인으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반면 이들을 대상으로 적극적으로 선교했던 유대인들도 있었다. 양 측의 이러한 갈등은 기독교의 등장으로 인해 일단락되었다. 유대교가 민족 종교였다면 기독교는 보편 종교였기 때문이다.
초창기 기독교 교회사에서 안티오크, 다마스쿠스 등이 차지하는 비중은 결코 적지 않았던 바, 시리아 일대는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기 이전 제국 내에서 가장 기독교도 비율이 높은 지역이었다. 이러한 위상을 반영하듯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화하는 과정에서 로마 제국에는 다섯 개의 총대주교구가 들어서는데, 이 중 한 곳은 시리아-팔레스티나 속주의 아일리나 카피톨리나, 그리고 다른 한 곳은 대시리아를 대표하는 도시였던 안티오크에 위치했다. 한 편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매김하는 과정에서 유대교는 로마 제국 각지의 전통 다신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로 대체되어야 할 구습 취급을 받게 되었다. 이미 율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을 방문했던 시점에서 유대교 사회는 현지 기독교 사회로부터 상당한 수준의 박해를 받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서기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팔레스티나 지역에 잔존해 있던 유대교 사회에 대한 박해를 강화한다. 유대인 농민들과 양치기들은 박해를 피해 하나둘씩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 기독교인들의 직계 기원이 된다.
동로마 제국의 쇠퇴와 이슬람 제국의 발흥 과정에서 시리아 그리고 팔레스티나 지역은 아랍 무슬림들에게 정복되었고, 이 지역은 급속히 아랍-이슬람화가 진행되었다. 정통 칼리파 시대 이후 들어선 우마이야 칼리프조는 다마스쿠스를 제국의 수도로 삼고 예루살렘을 자주 순시하곤 했다.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서 널리 사용되던 아람어와 아랍어는 다소 유사한 언어였고, 한동안 이 두 지역이 이슬람 제국의 중심지라는 이유까지 겹치며 지역 주민들의 모어는 아람어에서 아랍어로 급속히 대체되기 시작했다. 우마이야 칼리프조와 압바스 칼리프조 시대를 거치며 팔레스타인 일대의 유대인, 기독교인 원주민들은 지즈야 등등의 부담을 피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팔레스타인인 무슬림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3. 역사적 관계
3.1. 20세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양국은 제1차 세계 대전 오스만 제국이 패망하는 과정에서 각각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로 넘어갔다. 시리아에는 잠시 시리아 아랍 왕국이 들어섰으나 프랑스에 패배하고 프랑스의 시리아-레바논 위임통치령이 들어섰으며,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이른바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들어섰다.시리아는 1946년 4월 17일부로 독립하고,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경우 팔레스타인인들과 유대인들의 첨예한 대립 끝에 이웃 국가들에 비해 독립이 늦추어지다 결국 1948년 5월 14일 다비드 벤구리온이 이스라엘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제1차 중동전쟁이 일어났다. 당시 시리아 공화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건국을 막는 목적보다는 요르단의 압둘라 1세와의 밥그릇 싸움에 집중하던 상황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전쟁에 소극적으로 참여하였다. 하지만 시리아인들은 기독교인이나 무슬림 할 것 없이 유대인들이 원주민 팔레스타인인들을 구축하는 상황을 보고 경악하는데, 이 당시 시리아 국민들의 트라우마는 후일 시리아의 내정과 외교 모두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었다.
1963년 3월 8일 시리아에서 바트당이 군사 쿠데타를 통해 집권하였다. 바트당은 아랍 사회주의 계열 정당이었지만, 미셸 아플라크 같은 초창기 핵심 멤버들의 성향에서 보듯 아랍 민족주의 성향도 강했다. 바트당의 지도부 상당수는 시리아의 소수종파 알라위파가 채우게 되었다. 시리아의 알라위파는 본래 1970년대까지만 해도 순니파와 시아파 양측 모두에게서 이슬람의 다른 종파가 아닌, 기독교나 유대교 비슷한 아예 다른 종교 신도로 취급을 받던 상황이었고 이 상황에서 시리아의 정권을 잡은 알라위파는 시리아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순니파 무슬림들이 자신들에게 칼날을 겨누는 상황을 우려하여, 아랍 민족주의에 기반한 팔레스타인 해방을 국민 통합의 이데올로기로 삼게 되었다.
하지만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은 자국민 통합과 내정 안정을 목표로 한 것이었고, 현실 정치는 그렇게 마냥 단순하지는 않았다. 1964년 들어선 팔레스타인 해방 기구가 들어서서 요르단에 자리를 잡자, 시리아의 하페즈 알아사드 정권은 야세르 아라파트를 적극 견제하였던 바 있었다. # 검은 9월 사건으로 PLO가 레바논으로 쫓겨가자 시리아는 PLO 편을 들어 요르단을 침공했지만, 레바논 내전에서 PLO가 시아파의 아말 민병대와 대립하자 아말 편을 들어[3] PLO 난민촌을 습격해 수천명의 팔레스타인 사망자를 내는 등 국익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였다.
3.2. 21세기
3.2.1. 2000년대
2004년 12월 6일, 마흐무드 압바스 팔레스타인 자치수반이 시리아를 방문했다. #2009년 2월 21일, 시리아 측이 팔레스타인 거국정부 수립 지원을 시사했다. #
7월 10일, 시리아 측이 억류중이던 팔레스타인 기자를 석방했다. #
3.2.2. 2010년대
2012년 8월 2일,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 폭탄이 떨어져 사망자가 발생했다. #11월 5일, 시리아 내전이 시리아 내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에게도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
12월 16일, 시리아 정부군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급습했다. #
12월 18일, 시리아 사태의 여파로 팔레스타인 난민촌에도 교전이 일어났다. #
12월 20일, 압바스 수반이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 난민 보호를 촉구했다. #
2013년 1월 8일, 시리아 다마스쿠스 인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교전이 일어났다. #
3월 2일, 시리아 반군이 팔레스타인인 2명을 처형한 사실이 알려졌다. #
10월 10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식량부족을 호소했다. #
2014년 1월 12일, 시리아 정부군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장기간 봉쇄하면서 굶어죽는 사망자가 속출했다. #
6월 23일,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에서 휴전협정이 체결됐다. #
2015년 4월 4일, 다에쉬가 시리아 다마스쿠스 인근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대부분 장악하자 대부분의 난민들이 피난을 갔다. #1 #2
4월 9일, 팔레스타인의 정치 지도자들이 시리아 남부의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장악한 다에쉬 격퇴 작전에 합류하기로 했다. #
9월 7일, 팔레스타인인들이 사망한 시리아 출신 소년 아일란을 추모하는 모래상을 만들었다. #
2016년 7월 20일, 시리아 북부의 반군이 알레포 지역에서 팔레스타인 소년을 참수하자 논란이 일어났다. #1 #2
3.2.3. 2020년대
2022년 10월 18일, 하마스가 시리아 아사드 정권과 관계를 회복한다고 밝혔다. #2023년 2월 8일,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지진으로 인해 사망한 사실이 알려졌다. #
2월 12일, 팔레스타인 적신월사가 튀르키예와 시리아에서 일어난 대지진 생존자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
4. 문화 교류
팔레스타인의 상징적 장소이자 랜드마크이기도 한 동예루살렘의 바위의 돔은 다마스쿠스가 수도였던 우마이야 왕조 때 지어졌다.양국은 아랍어가 공용어이고 아랍 문화권에 속해 있다.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슬람교를 믿으며 종파에서 순니파에 속해 있다. 양국 모두 아랍계 기독교인들이 존재하는 등 기독교 비중도 높은 편이다.
4.1. 스포츠
2006년 2월 8일, 시리아 축구팀이 팔레스타인 축구팀과의 경기에서 승리했다. #2019년 1월 7일, 팔레스타인 축구팀이 시리아 축구팀과의 경기에서 무승부로 끝냈다. #
5. 관련 기사
- 시리아·팔레스타인 난민 곳곳서 식량부족 호소 - 연합뉴스
- “시리아 팔레스타인 난민캠프 봉쇄로 수십명 아사” - KBS
- IS, 시리아 내 팔레스타인인 난민캠프 90% 장악 - 연합뉴스
- 팔레스타인, 시리아 난민촌 내 IS 격퇴작전 합류키로 - 연합뉴스
- 하마스, 시리아 아사드 정권과 관계 복원…'反이스라엘 연대' - 연합뉴스
- 튀르키예·시리아 지진에 팔레스타인 난민도 수십명 사망 - 세계일보
- 팔레스타인 적신월사, 시리아 생존자 정신건강 지원 시작 - 뉴시스
6. 관련 문서
- 시리아/외교
- 팔레스타인/외교
- 아랍연맹
- 이슬람 협력기구
- 시리아/역사
- 팔레스타인/역사
- 시리아인 / 팔레스타인인 / 아랍인
- 아랍어 / 아랍어 방언 / 이슬람교 / 순니파 / 아랍계 기독교인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서아시아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