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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이스라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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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이스라엘
1. 개요2. 역사적 관계
2.1. 고대2.2. 근현대2.3. 현대
2.3.1. 수교 이후부터 무바라크 몰락까지2.3.2. 무슬림 형제단 집권기2.3.3. 무슬림 형제단 몰락 이후
3. 군사 교류4. 여담5.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현대 이스라엘 탄생 이후 4번이나 전쟁을 벌였을 정도로 앙숙이지만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으로 수교하면서 일단 외교관계는 맺고 있다. 플래툰에서 소개한 이집트 영화도 있는데 이집트 군악대가 이스라엘 가서 연주하는 코믹영화도 있다.

그래도 일단은 잠잠하게 지내는 중이지만 아직까지도 이집트인들에게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은 나쁘기에 함부로 이스라엘 이야기 하지 않는게 좋다. 이집트인 대부분이 무슬림이자 아랍인들이라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에서 팔레스타인을 압도적으로 지지하기에 이스라엘 표지판 달린 차 끌고 이집트 국내를 돌아다니는 것은 날 좀 죽여줍쇼라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라 불가능하다.

시나이 반도의 휴양지, 이집트내 유대교 성지 방문을 위해 양국 국경이 열려있다.

여러번에 걸친 전쟁도 그렇고, 시나이 반도같은 지역 피서지로 오는 이스라엘인 관광객들의 손놈중의 손놈 짓거리가 이스라엘 혐오증을 부채질한다고 한다.

2. 역사적 관계

2.1. 고대

이들은 최소한 3천 년 이상이나 되는 악연을 가지고 있다. 이스라엘의 형성 배경조차도 이집트를 빼놓고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출애굽 사건 또는 그 모티브가 되는 민족 이동이 이집트 제2중간기부터 이집트 신왕국 시기 사이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이며, 이집트 제21왕조(BC 1077~BC 943)가 들어서며 이집트가 쇠락할 때 가나안의 유대인이 이스라엘 왕국을 형성했다.

리비아 출신인 셰숑크 1세(시삭 왕)가 이집트 제22왕조를 세운 이후 분열된 이스라엘을 공격해 재물을 약탈한 적이 있으며, 아시리아가 강성해지자 이집트와 이스라엘 모두 아시리아에 복속된 적이 있다.

이후 신바빌로니아가 아시리아를 무너뜨리고 유다 왕국을 위협하자 유다 왕국은 바빌로니아의 편에 서 과거 아시리아가 세운 이집트 제26왕조를 막아섰으나, 이집트를 다스리던 네코 2세는 유다의 요시야를 죽여버렸다. 유다 왕국은 시드기야 때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하고, 이집트는 바빌로니아와 대립각을 세운 채로 버티고 있었다. 이때 바빌론 유수를 당하지 않은 유대인들은 이집트로 도망쳐 정착해 살았다.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 제국에 의해 이스라엘이 키루스 2세 때 먼저 편입되고, 이집트는 페르시아에 대항하다가 캄비세스 2세에 의해 멸망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둘 다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이집트가 기원전 404년 이집트 제28왕조로 독립한 이후 떨어졌으나 기원전 343년 페르시아군이 가나안을 거쳐 이집트 제30왕조를 무너뜨리고 재복속시킨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 3세 헬레니즘 제국이 페르시아를 무너뜨리자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둘 다 헬레니즘 문화권에 편입되었고, 디아도코이 전쟁 이후 이집트에 세워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이스라엘을 지배했다. 프톨레마이오스와 셀레우코스 왕조가 전쟁을 벌이던 곳이 가나안 땅이었고, 프톨레마이오스가 패배한 이후 셀레우코스에 편입되어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다시 떨어졌다.

이스라엘에서는 마카베오 전쟁이 일어나 셀레우코스로부터 독립했으나, 고대 로마가 부상하면서 이집트와 이스라엘 모두 로마의 영향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집트는 클레오파트라 7세 안토니우스의 편을 들었다가 악티움 해전에서 대패하고 기원전 30년 멸망당해 속주가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1세기까지 로마에 대항하다가 73년 제1차 유대-로마 전쟁에서 패전해 파괴당했다.

2.2. 근현대

19세기가 되자 이집트는 메흐메트 알리의 지배를 받은 것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실질적으로 독립했다. 이집트가 팔레스타인 농민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팔레스타인 지역 사회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한 편 프랑스는 예루살렘 내 가톨릭교도 보호, 러시아 제국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정교회 신도 보호를 구실로 오스만 제국의 예루살렘 산자크에 간섭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이집트의 부상으로 오스만 제국의 팔레스타인 지방 장악력이 약화된 것에서 기인한다.

이집트는 수에즈 운하 건설 과정에서 진 막대한 채무로 인해 대영제국 보호국이 되었고, 1918년 오스만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하자 팔레스타인 일대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으로서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이때 영국이 유대인 및 아랍인과 이중으로 가나안에 국가를 세워주겠다고 조약을 맺어버린 것이 하술할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분쟁으로 번지게 된다.

2.3. 현대

오늘날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외교 관계의 핵심 즉 현대 이스라엘과 현대 이집트 사이의 외교 관계를 다룬다.

2.3.1. 수교 이후부터 무바라크 몰락까지

처음으로 이스라엘과 대화를 시도했던(캠프 데이비드 협정)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전 대통령은 1981년에 암살당했다. 또 1981년부터 집권한 대통령 호스니 무바라크는 사다트의 후계자. 즉 2011년이면 집권 30년이 될 터였는데, 하필이면 그 때 혁명이 터졌다(...). 결국 2011 이집트 혁명에 따라 무바라크는 실각하여 혼수상태에 빠졌다.

1980년 6월 12일에는 유적지 치안을 맡던 이집트 사병이 갑자기 이스라엘 관광객들을 마구 쏴 여러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다. 그래서 또 이슬람 과격파 짓인가 말도 많았으나, 법정에서 그 군인은 아버지가 6일 전쟁 당시 사병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했는데, 이제 자기가 군인이 되어 복무하는데 아버질 죽인 나라 놈들이 조국에 와서 웃으면서 유적지에 사진찍어대는 꼴을 보니 너무나도 화가 나서 저절로 쏴 죽였고 자신은 이슬람 과격파 어디에도 들어간 적 없다고 증언했다. 조사 끝에 이 군인이 과격파와 접촉한 것도 없음이 드러나서 이집트에선 이 병사를 무기징역으로 복역하게 했다. 이스라엘과 전쟁으로 이가 갈리는 이집트 사람들 마음을 대표한다고 하면서, 이스라엘 극우들이 울컥했지만 그를 사형시키면 이집트 민중들이 더 폭발한다고 이집트에서 하소연했을 정도였다.

2.3.2. 무슬림 형제단 집권기

이집트가 원체 가난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원자재가 들어간 이집트제 공산품은 미국에 수출할 때 관세가 전혀 안붙고 이집트는 원가 이하의 가격으로 이스라엘에 천연가스를 팔고 있다. 물론 손해분은 미국이 충당해주는 중. 덕분에 이집트는 이걸로 아랍세계에서 반은 왕따가 돼버렸지만 사우디에 이어서 미국을 등에 업고 중동 문제에 큰 소리를 칠 수 있게 됐고 실제로 쭉 그래왔다. 하지만 무바라크의 파멸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2011년 무바라크가 물러나고 무슬림 형제단이 12월 하원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뒤 이스라엘 정책을 다시 세울 것이라고 뜻을 밝히면서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비상이 걸렸다. 그리고 2012년 6월,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무슬림 형제단의 무함마드 무르시가 당선되었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똥씹은 반응. 이제 이스라엘과 친했다가 관계 끊고 이스라엘을 국가로 인정하던 것도 취소한 어느 나라처럼 되는건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은 하마스 헤즈볼라와 매우 친한 사이라서 이스라엘은 더더욱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스라엘을 인정한다며 온건한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이집트 야당 살리피스트 누르당의 총재 알 가드 아이만 누르는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은 부당한 것이라고 발언하는 등 5차 중동 전쟁이 터지는 거 아닌가 불안에 시달렸는데 앞서 말한 대로 2011년 12월 하원 선거 및 총선 1차에서 무슬림 형제단과 와하브파 극우 성향의 알누르당이 선거에서 높은 지지율로 압승을 거뒀다. 팔레스타인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그야말로 반이스라엘 여당이 당당히 선거로 집권하며 이스라엘을 포위하는 일이 벌어지는 셈이다.

결국 2011년 12월 이집트 하원의원 선거에서도 상당한 강경파인 무슬림 형제단과 그보다 더한 극우 이슬람 근본주의 성향의 알 누르당이 선거에서 높은 지지율로 선전하면서 이스라엘은 비상이 걸렸다.

...인줄로만 알았지만...혁명 후 풍요를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슬람주의 정권의 집권과 실책들로 인해서 경제가 파탄나자 민중들은 다시 신정권의 퇴진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2.3.3. 무슬림 형제단 몰락 이후

결국 보다 못한 이집트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 무르시 대통령과 무슬림 형제단 세력을 축출하고 대신 헌법재판소장에게 대통령 직무를 이양시키는 과도정부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본것같은 그림인데? 이 사건으로 이집트 내부의 반응은 엇갈렸고 국민들은 군부의 행동에 찬성하는 친군부 세력과 반쿠데타+친무르시, 무슬림 형제단 세력으로 갈리어 국론이 분열되는 양상으로 이르게 된다. 그리고 2013년 이집트 정부에서 무슬림 형제단을 테러단체로 규정했다![1] 물론 이스라엘, 팔레스타인과의 관계는 나쁘지 않아 양측과 잘 지내고 있다. 그러나 국가간의 관계와는 별개로 이집트 일반국민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감정은 여전히 험악한 상태이다. # 다만 이슬람문제에 지쳐서 팔레스타인 문제때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한다. 일단 현재까지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요르단과 함께 사이가 원만한 나라가 이집트이다.

그리고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안보에 이어 경제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

2020년 1월 15일에 이스라엘이 이집트에 천연가스를 수출하기 시작했다고 이집트투데이 등 이집트 언론이 보도했다. # 게다가 트럼프판 중동평화구상안에 대해서도 사실상 미국을 지지했다. #

11월 7일에 이집트 외무부는 이스라엘이 서안지구에서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마을을 파괴한 것은 국제법 위반행위라면서 강력히 비난했다. #

2021년 10월 4일에 이집트 항공 소속 여객기가 이스라엘 공항에 공식적으로 처음 착륙했다. #

2023년 4월 이슬람 국가는 물론 신도들에게 있어 가장 신성한 라마단 기간 도중 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성지에서 기도하던 이들을 폭도를 잡겠다며 이스라엘 무장경찰이 들어닥쳐 과잉진압을 하자 이례적으로 불쾌하다는 성명을 내면서 이집트와의 관계가 살짝 냉각되려 한다.

2024년 5월 27일, 국경에서 소규모 교전이 일어나 이집트 군인 1명이 사망했다. #

3. 군사 교류

한때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전략적 위협을 가했던 이집트이다. 1970년대 이집트는 소련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이런 결정은 1978년 캠프-데이비드 평화 조약으로 이어졌고 시나이 반도는 비무장 지대가 되었다.[2] 이로써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측 군대는 서로 충돌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게 되었다. 이집트의 군사적 위협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안전하다. 왜냐하면 시리아는 단독으로는 이스라엘에 결정적인 위협을 가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집트-이스라엘 사이의 평화는 언제든지 붕괴될 수 있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사실 그것은 대단히 강력한 지정학적 힘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지정학적이고 기술적인 이유들 때문에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패배시킬 수 없다. 이스라엘을 패배시키기 위해, 이집트는 시나이 반도를 통과하는 군수 체계를 구축하여 수십만의 병력을 지원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와 같은 군수 체계는 구축하기도 어려울 뿐더러 방어하기도 힘들다.

이스라엘 역시 이집트를 패배시킬 수도, 장기적인 소모전을 치를 수도 없다. 애초에 이집트의 군사력은 아프리카 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도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국가로 유명하며 인구부터 이집트가 이스라엘 인구의 약 10배 이상 차이나며 이스라엘 상비군은 규모가 작아서 민간 예비군으로부터 인력을 충원해야만 하는데, 예비군을 장기적으로 동원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승리를 하려면 신속하게 적을 제압해야만 한다. 심지어 불과 6일만에 승리를 거두었던 1967년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에도 이스라엘이 전투에 동원된 병력을 수많이 부어서 이스라엘 경제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설령 이스라엘이 이집트 군대를 패배시킨다고 해도 이집트의 핵심부인 나일 강 유역을 점령할 수는 없다. 이 지역에는 1억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으며, 이스라엘 육군은 이들을 상대로 승리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착 상태 때문에 이집트와 이스라엘은 서로 싸워봤자 잃을 것만 많고 얻을 것은 없다. 또한 양 국 정부는 동일한 이슬람 세력과 싸움을 벌이고 있다. 오늘날의 이집트 정권은 여전히 나세르의 세속적이고 사회주의적이며 군국주의적인 혁명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집트 정권은 기존 이슬람교에 비해 세속적이었기 때문에[3] 언제나 독실한 이슬람들, 특히 아랍 세계의 기존 정권들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인 수니파 무슬림 형제단이 중심이 된 이슬람의 도전을 받아왔고 이집트는 이들을 억압했다. 그들은 정권의 안정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하마스의 승리를 두려워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한 불평과는 별개로 이집트는 하마스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감을 공유했고, 가자 지구의 하마스를 봉쇄하는데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와 맺은 협정은 사실상 이스라엘이 가진 가장 중요한 관계다. 이집트가 이스라엘과 같은 편으로 남게 된다면 다른 이웃 국가들의 어떤 조합도 이스라엘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며 양국의 국가 안보도 보장된다. 심지어 세속적 나세르주의 정권이 붕괴하더라도 이집트가 다시 위협이 될 때까지는 한 세대가 걸릴 것이고, 그것도 강대국의 후원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4. 여담

오늘날 이집트의 콥트 정교회 신도들은 모세를 최초의 콥트교인으로 보고, 자신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인의 후손이며[4] 출애굽기 역시 이스라엘 유대인의 역사가 아닌 콥트 정교회 콥트 기독교인들의 역사로 보고 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국가 대 국가를 떠나서 유대인과 이집트인과의 역사적 관계는 고대 이집트 가나안 지배, 모세오경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집트의 영향,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공동체의 70인역 번역, 살라흐 앗 딘의 주치의 마이모니데스, 등등 한도 끝도 없이 많다. 한 편 이집트에서는 오늘날 이스라엘을 중세 십자군 국가의 일환으로 보기도 하나, 정작 이스라엘 유대인 측에서는 십자군들이 유대인들도 학살하고 적대시했기 때문에 십자군 국가 관련한 미련이나 환상이 없는 편이다.[5]

5. 관련 문서



[1] 이집트 무슬림 형제단, 집권 1년반만에 테러단체 전락 [2] 이 협정에 참가한 이집트의 안와르 사다트와 이스라엘의 메나헴 베긴은 그 해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3] 현 엘시시 정권까지 군부출신 이집트 대통령은 5명이며, 현재 이집트군은 이집트 경제활동의 30% 가까이를 담당하고있다. [4] "우리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손이다."라는 식의 계승의식은 사실 콥트교도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슬림들 사이에서도 무슬림들이야말로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손이라는 계승의식이 있기 때문이다. [5] 대표적인 사례로 이스라엘 정부가 텔아비브를 개발하면서 야파(Jaffa)의 중세 십자군 시대 유적을 깔끔히 밀어버렸던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