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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7-08 12:36:23

페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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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2. 발단3. 피의 보복
3.1. 1955년 2월 28일
4. 페다이의 결성5. 이스라엘의 반격
5.1. 몰락의 징조, 무스타파 하페즈의 죽음
6. 페다이의 몰락7. 2차 중동전쟁 : 페다이의 종말8. 참고 문헌

1. 소개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50년대에 주로 활동한 팔레스타인의 민족 게릴라. 페다이는 아랍어로 민병대란 뜻이며 훗날 사담 후세인의 친위대도 페다이라고 불렸다.

2. 발단

시작은 누가 뭐라해도 1948년의 1차 중동전쟁이다.[1] 팔레스타인 자체 무장세력, 이집트, 이라크,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이 주축이 되고 아랍 각국에서 의용대까지 몰려와서 수적, 화력으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아랍군이었으나 사분오열된 지휘체계와 서로 다른 이해관계로 인해 단합이 안되었기에 지지부진했고 결국 패배했다. 자세한 정황은 제1차 중동전쟁 항목 참조.

전쟁 이후 가자 지구는 이집트 왕국에 소속되었다.[2] 이에 이스라엘의 총칼과 전쟁을 피해 20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가자 지구로 몰려들었고 가자의 인구는 순식간에 3배로 불었다. 당연하지만 가자 지구는 원래 팔레스타인의 중심지역 따윈 아니었고 한꺼번에 몰려든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감당할 여건이 전혀 안되어 난민들은 잠잘 걱정에서 식량 부족, 전염병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다.[3]한동안 움집을 세우고 거의 원시인처럼 생활했으나 곧 도움의 손길이 오기 시작했다. 유엔과 국제 퀘이커 교도 협회에서 천막과 텐트를 지원해줬고 밀가루를 분배해주었다. 이집트 군인들은 싼값에 빵을 팔기도 했다.[4]

그러나 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은 힘겹게 살아갔는데, 고철을 팔아 돈을 벌었으며 물을 긷기 위해 수킬로미터 씩 걸어야 했고 기생충들로 인해 고생해야 했다.

1949년말 UNWRA가 설립되어 퀘이커 교도들을 대신했다. 그들 덕분에 상수도와 수도관이 설치되었고 화장실도 세워졌다. 이 무렵부터 텐트들이 아랍 전통 방식으로 지은 진흙집으로 대체되었고[5] 난민캠프는 거대한 도시로 변모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현재 가자 지구의 시초다. 하지만 이들의 생활이 열악한 것은 여전했는데 1949년 이스라엘 외무부의 보고서를 보면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자연선택 과정에서 생존한, 적응력이 뛰어난 일부 난민들은 잘해 나갈 것이고 나머지는 도태될 것이다. 일부는 사망하고 대다수는 인간쓰레기와 사회부적응자가 되거나 아랍 국가의 극빈곤층에 편입될 것이다."

난민들은 빈약한 원조와 껌값 수준의 수입에 의존해야 했고, 특히 땅을 잃고 일자리를 잃은 남자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하고 종일 놀아야만 했다.[6] 그런데 그들의 애간장을 태우는 것이 있으니 불과 몇시간이면 닿을 거리에 그들이 대대손손 일구어 온 땅과 살아온 집이 있으며 밭에는 작물이 익고 있고 집에는 식량과 석유가 있다. 특히 그 당시에는 이스라엘과 가자 지구의 경계가 허술하기 그지 없었고 철조망 따윈 구경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난민들은 너도나도 할것없이 이스라엘로 잠입해서 농작물과 가축 등을 데리고 가자 지구로 돌아왔다. 일부 대담한 난민들은 이스라엘 군 초소를 습격해서 식량과 설비를 약탈하기도 했고 일부는 이스라엘을 횡단하여 웨스트뱅크까지 가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난민들은 '감시도 허술하네.'하면서 이스라엘에 눌러살기도 했다.[7]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엔 엄청난 숫자의 이민이 쏟아지고 있었다. 홀로코스트의 반동으로 살곳이 절실해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땅으로 몰려들었는데 이들과 난민들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스라엘 정부는 난민들이 자꾸 자신들의 영토로 오는것이 싫었기에 국경 수호부대에게 월경자를 무조건 죽일 것을 지시했다. 결국 1949년에만 1000여명의 난민이 살해되었다. 1951년 여자, 아이들, 항복하는 자들은 쏘지 않도록 규정이 수정되었으나 아니 이건 당연한 것이 아닌가? 난민에게 무자비한 이스라엘군이 제대로 지킬리가 없었다. 그후로도 1956년까지 2700명에서 5000명의 난민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의 사격과 그들이 심어놓은지뢰를 비롯한 부비트랩으로 죽었다. 당연하지만 이들은 비무장이었다.
하지만 일부 예외도 있어 무장한 난민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반감을 품고 이스라엘로 잠입해서 식량을 훔치는 과정에서 마주친 이스라엘 정착민들과 군인, 경찰을 우발적으로 죽이고 돌아오곤 했는데 죽은 유대인의 숫자가 300명에 달했다. 그러다보니 이스라엘 정부는 가만놔둘수가 없어 더욱 궁극적이고 강력한 대책을 강구하게 되었다.

당시 모셰 다얀 육군 소장의 보좌관 바온 모르데하이 전 국장은 이스라엘의 작전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보복 작전의 핵심은 재발을 막는 것입니다. 주된 고려 사항은 상대방이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치는 것입니다. 뭘 해서든 상대편 군을 압박하고 침입자를 단속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야 자신들의 생사와 존망이 걸린 일이니 유들유들하게 대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그렇지만 이들은 아랍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고 아랍국가들에게 국경단속 좀 잘하라는 의미로 팔레스타인 민간인들을 보는 데로 때려잡았다. 최악의 사건은 1953년 퀴비야 마을 학살 사건으로 아리엘 샤론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가 유대인 여자 한명과 아이 두명이 살해된 일을 보복하기 위해 웨스트 뱅크로 진입하여 42명을 죽이고 마을을 모두 폭파시켰는데 희생자 중 38명이 여자와 아이들이었고 모두 저항한 흔적이 없이 잠을 자다가 총을 맞았다. 세계 여론이 들끓자 이스라엘의 반응은 "쳇, 민간인을 죽이면 시끄러우니까 군인과 경찰을 죽이면 되겠군"이었다. 애당초 전쟁 상태도 아닌데 상대방 군인을 죽이는게 잘하는 일이라곤 못해도 이딴 생각을 왜 진작에 못한 걸까?

그런데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애들을 조지거나 말거나 의외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스라엘 측이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단속해 달라고 해도 듣은척도 안했다. 트히 누구보다도 무관심했던 사람들은 놀랍게도 그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었던 나세르였다. 바온 모르데하이의 말을 인용하자면 "신경 쓸 필요도 없다."라는 것이 나세르의 반응이었다. 나세르에겐 아랍 전체를 묶어야 할 판에 그까짓 가자 지구나 웨스트뱅크 따윈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1955년 2월 28일까지는.[8]

3. 피의 보복

페다이의 주축이 된 사람은 2차 세계 대전 당시에 영국군에 복무했던 어느 군인인데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보복을 두려워 하여 끝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것을 거부했다.[9]

그는 1948년에는 이스라엘에 맞서 싸웠고 전쟁 이후 16일간 선생을 하다가 고작 쌀에 옥수수 얼마를 주는 월급을 받던 중 열받아서 펜을 집어던지고 이집트 군대에 입대했고 1953년 이집트 군 산하의 팔레스타인 민병대로 편성되었다. 그의 임무는 이스라엘의 정보를 수집하는 것도 있었는데 이를 위해서 월경이 필요했고 이 남자는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가서 총을 들고 유대인들의 가축을 약탈하고 이스라엘에 매우 호전적으로 굴었는데 무슬림 형제단에 연루되었단 이유로 수십명의 군인들이 예편된 사건에 휘말려 군복을 벗었는데 그가 첫빠따였다고 한다. 하지만 허술했던 이집트 행정 덕분에 4개월 만에 다시 군인이 되었는데 변화가 있었다.

원래 국경 수비를 맡았던 팔레스타인 민병대는 이스라엘을 자극한단 이유로 뒷전으로 물러났고 이집트 국경 수비대가 배치되었는데 이들은 술과 마약에 찌들고 방에 틀어박혀 잠만 잤다. "이스라엘이 계획만 세웠다 했으면 죄다 골로 갔을걸"이라고 노인은 회고했다. 이 남자가 다시 초소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이 썩은 기강을 완전히 갈아치웠다. 이 남자의 휘하에 36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그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권익을 최대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고 이스라엘과 충돌을 빚었는데 이 때문에 이집트 정부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을 자극하길 원하지 않았고 월경자들을 족족 감옥에 보내는 한편 국경 수비를 강화할 것을 지시했으나 팔레스타인 민병대가 주축이 된 국경수비대가 자신들의 고향에 가는 난민들을 막을 리 만무했고 이집트 정보부의 가자 지구 국장인 무스타파 하페즈가 "팔레스타인 병사들이 월담을 부추기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유대인들을 자극한다"라고 분통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러다가 사건이 터졌다.

3.1. 1955년 2월 28일

이 남자는 베두인 족의 양떼가 휴전선에서 풀을 먹는 것을 허락했는데 이스라엘 지프가 다가오자 그는 베두인들을 황급히 불러들였으나 이스라엘은 가만히 있지 않았고 결국 총격전이 벌어져 양 두마리가 죽었다. 이집트 군대는 이스라엘의 도발에 매우 불쾌해했지만 오히려 남자에게 이스라엘에 총알값을 물어내란 명령을 내리고 그의 승진이 취소시켰다. 그래서 남자는 보복을 결심했다.[10] 그는 이스라엘 국경을 넘어 이스라엘 지프 두대를 파괴하고 탑승자들을 모두 죽인 다음에 무기를 약탈해서 돌아왔다. 그런데 두번째 지프를 파괴했던 사건에 국제 감독관이 나타나 그의 사진을 찍었고 이스라엘 기관총을 맨 체 무슨 일인가 싶어 돌아본 사내의 얼굴이 정면으로 찍혔다. 이스라엘은 얼씨구나를 외치면서 이스라엘의 도발에 항의하는 이집트를 몰아세웠고 UNTSO가 남자의 사진을 증거물로 제출하자 이집트는 궁지에 몰렸다. 분노한 이집트는 남자를 칸 유니스 감옥에 가뒀는데 당시 이스라엘에선 일이 아주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전 총리 다비드 벤구리온이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는데 참모총장 모셰 다얀은 아랍이 이스라엘을 우습게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손을 봐줄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때마침 1955년 2월 25일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이스라엘 민간인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자 둘은 의기투합하여 온건파 총리 모셰 샤레트를 찾아가 보복 작전을 요청했다.

다얀은 공격이 통상적인 수준으로 이집트인들의 사상자는 최대로 잡아봐야 10여명에 그칠 것이라고 주장했고 샤레트 총리는 공격을 승인했다. 그런데 이 공격은 워낙 타이밍을 맞추지 못한 공격이었다. 1954년 말부터 55년에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이스라엘에 트집 잡힐 빌미를 주기 싫었던 이집트는 가자 지구의 국경 단속을 철저히 하여 허구한 날 이스라엘로 넘어가서 약탈을 벌이는 팔레스타인 군인은 물론 난민들까지 통제하는데 성공했고 UNTSO의 캐나다 대표 번스 중장이 "역사상 이렇게 조용한 시기를 전에도 후에도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1955년 2월 28일 이스라엘 공수부대가 이집트를 쳤다. 소규모 군부대와 기차역을 파괴하고 조용히 물러날 생각이었는데 사건이 크게 터졌다. 이집트 군대가 격렬하게 저항하면서 공수부대원 8명과 이집트 수비대 16명이 죽었고 애꿎은 민간인 두사람이 지나다가 휘말려서 죽었다. 한편 지원병력을 막기 위해 매복해 있던 이스라엘 군인들은 마침 근처를 지나던 트럭을 습격해서 22명의 이집트 군인을 죽이고 13명을 부상시켰다. 이들 대다수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아랍 공습 사건이다.

4. 페다이의 결성

가자 지구 전체가 폭발했고 보복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군부대를 포위했다. 이집트 군대는 시위를 진압하던 중 몇 사람의 시위자를 죽였는데 분노한 시위대가 군인들을 끌어내서 린치를 가했고 이집트의 여론도 굉장히 나빠져서 나세르의 지위가 흔들릴 지경이 되었다. 당시 나세르는 소련제 무기를 사들여 이집트 군대를 현대화하고 있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불안을 산 것은 물론 아랍 전체의 구도를 흔들고 있었다.

나세르는 이스라엘을 너무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아랍 민중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보복을 할 필요가 있었고 이 작전의 책임자로 이집트 정보부의 가자 지구 책임자 무스타파 하페즈가 다시 나섰다. 하페즈는 이 작전을 지휘할 군인으로 감옥에 갇혀 있던 사내를 지목했고 그는 1955년 3월 13일 밤 10시에 석방되어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부대와 함께 보복 작전을 감행했다.[11]

그 후 몇 달동안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게릴라, 즉 페다이의 핵심 조직원들을 모았는데 이들 대다수가 살인자, 월경자, 좀도둑 등 범죄자들이었고 고생 끝에 명령이라곤 안듣는 그들을 군인들로 만들었으나 조직원들이 하나같이 이스라엘을 증오하고 있었고 지휘관들 역시 그들에 물들어 광기에 휩싸였다. 1955년 8월부터 페다이는 작전에 나섰다. 이 작전은 당연하지만 화력에서 이스라엘에게 상대가 될리가 없어 상당한 출혈을 요구하는 것이었고 피해는 오히려 페다이들이 더 크곤 했다. 오죽했으면 페다이의 지휘관은 "우리 100명이 죽고 유대인 둘이 죽으면 우린 만족했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들은 이스라엘 수비대를 습격해서 군인들을 죽이고 이스라엘 군대의 무기를 노획하곤 했는데 당연하지만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입은 피해를 곧이곧대로 보도하진 않았고 이집트 군부는 남자가 보고한 전과가 거짓말이라고 의심했다. 이에 남자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유대인 정착촌을 건설하는 노동자 캠프를 습격해서 노동자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귀를 잘라 왔는데 이집트 정부는 매우 흡족해했다.

5. 이스라엘의 반격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났는지 확실치 않으나 페다이가 결성되고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간 이후 이스라엘은 다섯명의 군인과 10명의 민간인이 살해되었다고 발표했다. 일련의 사건들은 이스라엘을 흔들어 놓을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데는 충분했고 이집트 국경지대의 정착민들이 겁을 먹고 이사를 떠나서 일부 정착촌이 텅 비어버리기도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페다이를 그냥 둘 수가 없었다. 1955년 8월 31일 이스라엘은 보복으로 가자지구의 칸 유니스 경찰서를 폭격했다. 이스라엘의 맹폭으로 경찰서 전체가 무너져내렸고 이집트는 72명의 군경이 사망했다고 주장했으며 유엔 감시관은 그 중 36명의 사망을 확인했다.

놀란 나세르는 페다이들의 출격을 유보했다. 하지만 그는 이집트가 이스라엘보다 강하단 생각을 버리진 않았다. 1955년 9월 나세르는 체코, 소련과 군사 협약을 맺었고 위기의식이 고조되던 이스라엘은 온건파 샤레트 총리가 강경파인 벤구리온 총리로 교체되었고 벤구리온은 총리 겸 국방장관으로 강경파의 선두주자가 되었고 모세 다얀을 비롯한 고위층은 예방 공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벤구리온은 강경파이긴 해도 멍청한 사람은 아니었고 섣불리 이집트를 공격했다가 미국, 영국, 프랑스가 반발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 신중하게 행동했다.

이 부분에서 바온 모르데하이 전 국장이 진술했는데 벤구리온은 확전될 가능성이 있는 선제공격에 대해서는 반대를 분명히 했지만 보복만 강화하면 나세르가 쳐들어올 수도 있고 그러면 이스라엘이 명분상 우위에 있는 것으로 보이며 최소한 누가 전쟁에 책임이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게 된다는 다얀의 주장을 받아들여 웨스트뱅크와 가자 지구 전체에 보복 작전을 감행했고 수십명의 아랍인이 죽었으며 이집트와 상호방위조약을 맺은 시리아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음에도 나세르는 침묵을 지키고 상태를 방관했다.
예상외로 신중한 나세르 때문에 일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긴 이스라엘은 프랑스에서 대량으로 신형 무기를 주문하는 한편 소강상태를 유지했다.

1956년 4월에 이집트인 1명과 이스라엘군 4명이 죽은 불상사를 빼고는 전선은 조용하게 유지되었는데 1956년 4월 5일 이스라엘 군이 이집트 군부대로 박격포를 쐈는데 이집트가 반격하면서 분쟁이 터졌다[12]. 이집트는 군부대 뿐만 아니라 키부츠를 목표로 포격을 하여 피해를 입혀 이스라엘을 극도로 분노하게 만들었다. 모셰 다얀은 길길이 날뛰었고 가자 지구에 대대적인 포격을 감행했다.

그의 전술은 모든 주요 도로에 군중이 밀집한 때에 쏜 다음에 몇분 후 군중이 다시 모이면 다시 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사상자를 많이 내는 옛날 수법'이라는 것인데 이 공격으로 150명이 넘는 팔레스타인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고 그중 3분의 1이 사망자였다. 이번에는 나세르도 열받았고 즉각 페다이들을 투입할 것을 명령했다. 병원에서 죽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시신을 목격하고 극도로 분노한 페다이들은 이스라엘로 잠입하여 56년 4월 7일부터 12일에 이르는 기간동안 10여명의 민간인들을 죽였고 샤피르 협동농장을 습격해서 어린이들도 모조리 죽였다. 하지만 페다이들의 잔혹함에 시작은 이스라엘이 먼저 시작했음에도 이집트는 세계의 비난을 받았고 페다이들을 도로 불러들일 수 밖에 없었다.

5.1. 몰락의 징조, 무스타파 하페즈의 죽음

사실 이집트는 페다이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페다이들은 이집트가 어디까지나 자신들의 보복을 위해 이용하고 있는 것 뿐이지 절대 이집트에 충성하는 부대가 아니라는것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페다이가 필요 이상의 공격을 하여 이집트 입장에선 이스라엘과의 마찰만 불러일으키는 골칫덩이들이었다. 이스라엘은 페다이의 계속된 게릴라전에 화가 나 페다이를 잡기 위해 전차, 장갑차까지 동원해서 맹렬하게 나섰다. 페다이는 대전차 무기를 지원해달라고 했지만 이집트 정부는 생까버렸고 페다이들은 이스라엘의 기갑부대에게는 속수무책으로 당해야 했다.

이집트에서 유일하게 페다이들에 우호적인 사람은 그들의 책임자인 무스타파 하페즈 뿐이었는데 자신의 부하들이 공격받는 것을 보고 열받은 그 역시 몇번이나 상부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나세르는 그 요청을 모조리 무시했고 그는 이집트 정부와 자신의 부하들 사이에 끼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게 그런 사정 따위는 알바가 아니었고 이스라엘은 1956년 7월 11일 소포폭탄을 보내 그를 날려버렸다. 페다이들은 그를 카이로로 이송하여 장례식을 치렀는데 자신의 부하들을 아꼈던 하페즈라서 자례식장은 통곡하는 페다이들로 인해 울음바다가 되었다고 한다. 사내는 하페즈의 어머니보다 더 울어서 하페즈의 어머니가 그를 진정시키려 했었다고...

6. 페다이의 몰락

하페즈 말기에 신임 페다이들이 많이 들어왔었는데 하페즈가 그들 중에 숙청할 놈을 숙청하고 될놈을 군인으로 단련시켜야 했지만 그가 갑자기 죽으면서 그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못받고 그대로 방치되었고 이들의 군기는 문란하기 그지 없어 여자들을 덮치고 당연하다는 듯이 물건을 약탈하여 페다이에 대한 팔레스타인 난민과 이집트 민중들의 감정도 매우 나빠졌다. 사실상 책임자가 된 사내는 이집트 상부에 지속적으로 경고했다. 이스라엘은 56년 4월 습격에 대해 보복할 것이라고.

하지만 참모총장 압둘 하킴 아메르를 시작으로 이집트 군 전체는 썩을 대로 썩어 있었고 사내가 뭐라고 떠들든 간에 알바가 아니었다. 한편 이스라엘은 당연하지만 페다이를 토벌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1956년 4월의 어느날 모셰 다얀과 그의 부관인 바온 모르데하이는 가자 국경 지대의 나할 오즈 키부츠를 방문하여 그 키부츠의 젊은 지휘관인 로이 로스버그와 만나서 차를 마시고 돌아왔는데 그 다음날 로이 로스버그가 살해되었다.
이에 모셰 다얀은 유명한 연설을 했다.
오늘은 살인자들을 탓하지 맙시다. 우리를 향한 그 무서운 증오를 뭐라고 비난할까요? 그들은 지금까지 8년동안 가자에 난민캠프를 지어왔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땅과 마을을 우리의 집으로 바꾸는 일도 목격했습니다. 국경을 넘어서 증오와 복수의 바닷물이 밀려옵니다. 잠잠해서 우리가 경계를 늦추면 그들은 보복할 때라 여깁니다. 우리가 총을 거두라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외세의 말에 귀를 기울인다면 말이죠. 우리 주변의 아랍인들의 삶을 가득 채우고 있는 증오를 바로 보는 일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것이 우리 세대의 운명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준비하고 무장하여 강하고 맹렬하게 그렇지 않으면 칼이 우리의 손에서 떨어져 우리의 삶을 두동강낼 것입니다.

다얀은 팔레스타인의 보복에 명분이 있음을 깨달았고 단순한 손봐줌으로 그들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가자 지구 전체를 이스라엘의 손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속을 끓이고 있던 영국, 프랑스와 죽이 맞았고 셰브르에서 그들은 합의를 보았으니 그 결과는 수에즈 전쟁 항목 참조.

7. 2차 중동전쟁 : 페다이의 종말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시나이 반도와 가자 지구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했고 11월 2일 가자 지구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가자 지구에 주둔한 이집트 경찰과 군인들은 대비가 하나도 되어 있지않다보니 혼비백산하여 죄다 풀밭으로 달려가서 군복을 벗고 총을 버린 다음에 민간인 복장을 입고 숨었다. 이들은 보급이 죄다 끊어져서 난민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할 지경이었다. 이스라엘 해군이 밤낮으로 포격을 가했고 공습도 이어졌다. 저항한 부대들도 있었으나 탱크와 전투기를 앞세운 이스라엘의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기껏해야 리엔필드 소총이나 칼구스타프 소총으로 무장한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군대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한편 페다이들은 국경지대에서 저항했으나 철수명령을 받고 칸 유니스로 철수했다. 그런데 그들이 칸 유니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모든 방어선이 무너지고 있었다. 남은 페다이는 고작 11명이었는데 고작 소총이 전부였고 이스라엘 탱크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후일을 도모하여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 이집트와 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로 모두 달아났다. 그리고 그것이 페다이의 최후였다.

한편 가자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은 페다이에 이를 갈고 있었고 보복으로 가자지구의 칸 유니스, 라파, 가자 시티에서 아랍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악명높은 칸 유니스 학살 사건[13] 라파 학살 사건[14] 그 예다. 하지만 페다이가 망했다고 팔레스타인의 저항이 끝난게 아니었다. 오히려 더 많은 수의 무장단체들이 결성되어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싸우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무장단체인 하마스는 페다이의 전철을 밟지 않고자 리더들을 팔레스타인과 해외에 무수히 두어 누굴 죽여도 전혀 위축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스라엘에 대한 증오로 분노한 팔레스타인 및 이란, 시리아의 반이스라엘 지원으로 이스라엘을 엿먹이며 페다이와 차원이 다르게 이스라엘을 골아프게 하고 있다. 국제 전문가들도 페다이와 차원이 다르게 하마스는 없애는게 불가능하다고 입모아 말할 정도이다. 거기에 팔레스타인의 온갖 중소 무장단체들까지 따로 국밥으로 이스라엘에 테러를 가하며 그 중에는 다에시 알 카에다를 지지하고 후원을 받는 세력까지 있다. 특히 이스라엘은 끝까지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책으로만 나가려해서 상황은 해결될 기미가 안보인다. 이때문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평화는 결국 영원히 멀었다는 평이다. 무엇보다 이스라엘도 사막화로 인한 수자원 고갈과 내부의 온갖 문제들이 터져나오고 있어 미래가 암울하다.

8. 참고 문헌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비망록, 조 사코 저, 글논그림밭(2012)


[1] 팔레스타인의 일부 역사가들은 이게 다 1897년의 바젤 시온주의자 회의가 만악의 근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 4년 후 쿠데타로 공화국이 되었다. [3] 현재도 가자지구는 척박하고 좁은 땅인데 거주인구가 지역보다 더 많아 인구포화상태다. 특히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봉쇄로 인세지옥이다. [4] 하지만 조 사드의 기록에 따르면 곰팡이 난 먹지못할 빵을 팔았다고 한다 [5] 왜냐면 난민들은 현대식 건물로 지을 돈이 없기 때문이다. [6] 왜냐면 이집트도 이 당시에 어려웠기에 난민들을 위한 일자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현재도 이집트는 경제사정이 어려우며 이집트에 사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은 빈곤하게 살고 있다. [7] 현재 이스라엘 아랍인들도 이스라엘에 살게된 것이 이런 사유가 많다. [8] 당연하겠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집트에 대한 감정은 나쁘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이 가자지구를 봉쇄하고 가자지구 주민들의 땅굴을 파괴하여 넘어오지도 못하게 하며 제한적으로만 거래하게 하는것 때문에 팔레스타인 내에 반이집트 감정이 굉장하다. [9] 조 사코가 그를 인터뷰하러 가자 '유대인 놈들이 날 그 독일인 아돌프 아이히만처럼 잡아서 죽일거야! 유대인놈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어! '라면서 치를 떨었다. [10] 총알값은 양 주인이 갚았다고 한다. [11] 그 보복 작전의 내역에 대해서 남자는 "아주 성공적이었다. 죽은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라고 자화자찬했고 그 내용을 묻자 "난 작전을 자세하게 말해줄 수 있지만 그럴 필요는 없다."라면서 답변을 거부했다." [12] 정확하게 말해서 누가 먼저 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스라엘 - 이집트ㅡ 휴전 연락 위원회의 위원장인 바야드 미군 중령은 포를 쏜 것은 이스라엘이 먼저이나 민간인을 쏜 것은 누가 먼저인지 알 수 없다고 증언했다. [13] 공식적으론 275명이 학살되었는데 팔레스타인측 주장으론 523명이 학살당했다고 한다. [14] 111명이 학살되었는데 팔레스타인의 주장으론 197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