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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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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한 초대 황제
유비 | 劉備
파일:Liu_Bei_Tang.jpg
출생 161년 7월 9일
후한 유주 탁군 탁현
(現 허베이성 바오딩시 줘저우시)
즉위 221년 5월 15일 (59세)
촉한 익주 촉군 성도 무담산 남쪽
(現 쓰촨성 청두시)
사망 223년 6월 10일 (향년 61세)
촉한 익주 파동군 영안현 백제성
(現 충칭시 펑제현 바이디진)
능묘 혜릉(惠陵)
재위기간 후한의 의성정후(宜城亭侯)
196년 ~ 219년 7월
후한의 한중왕(漢中王)[1]
219년 7월 ~ 221년 5월 15일
촉한의 황제
221년 5월 15일 ~ 223년 6월 10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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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8000><colcolor=#ece5b6> 성씨 유(劉)
비(備)
부친 유홍
배우자 소열황후,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자녀 3남 2녀(양자 1남)
현덕(玄德)
신장 178cm[3]
작호 의성정후(宜城亭侯) → 한중왕(漢中王)
묘호 열조(烈祖)[4]
시호 소열황제(昭烈皇帝)
제호 선주(先主)
연호 장무(章武, 221년 ~ 22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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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이름과 칭호3. 생애4. 평가5. 혈통6. 가족 관계7. 무덤8. 여담9. 창작물10.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중국 후한 말의 인물이자 삼국시대 촉한(蜀漢)[5] 창업군주이며 초대 황제.[6]

2. 이름과 칭호

널리 알려진 '유비 현덕'이라는 표기는 일본 이외에서는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를 한국에서 쓰는 것도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다. 《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7]가 60~70년대 한국으로도 번역되어 들어왔는데 한자로 성 2자+이름 2자를 기본으로 쓰는 일본인답게 유비 현덕, 관우 운장으로 4글자를 맞추어 이름을 풀어 써 표기하는 등의 오류를 저질렀다.[8] 《연의》 본문에서는 유비, 유현덕, 현덕, 유황숙, 한중왕, 선주, 소열제 등의 호칭으로 그를 가리킨다. 이런 모습이 미디어에서 드러나는 것이 과거의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삼국지2 ~ 공명전)과 《범우사판 삼국지》인데, 전자는 일본식으로 4자에 맞춰 표기하고 후자는 대만판의 번역이라 유현덕, 관운장, 관 공(公) 등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화권에서는 자와 이름을 다같이 소개할 때는 성은 유, 이름은 비, 자는 현덕이라고 각자 하나씩 쓰거나, 줄여서 부를 때는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지 한 번에 이름과 자를 같이하며 유비 현덕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9] 단적으로 중국의 삼국지 드라마에서는 아예 자막에 이름을 넣고 자는 따로 표기한다. 즉 유비를 소개한다면 유비 자(字) 현덕이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예컨대 유비를 부를 때는 헌제처럼 윗사람은 유비라고 부르고[10], 동급인 다른 군주들은 '현덕'이라 부르며[11], 아랫사람은 유예주, 유좌장군(예주 자사 및 좌장군을 제수 받은 적이 있으므로)등 관직명으로 부르고 현덕공이라고 자에 높임말을 쓰는 것은 오류이다. 그냥 현덕이라고 부르든가(윗사람 또는 동격, 친구), 직책 이름인 유예주 내지는 그냥 유 공(아랫사람)으로 부르는 것이 맞다. 편지를 쓸 때는 족하라고 부른다.

고대 중국에서는 성인이나 부모, 조상, 군주 등의 이름과 같은 한자를 쓰지 않음을 예로 여겼고, 발음도 하지 않았다. 이를 피휘(避諱)라고 부른다. 피휘할 대상은 아니더라도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무례한 짓이었다. 대놓고 면전에다 이름을 부르면 모욕도 그런 모욕이 없다고 했다.[12] 자(字)를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부르는 이름이고 실제로 그렇게 아는 사람이 있는데 자야말로 친하지 않은 사람들끼리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한 또 다른 이름이었다. 요컨대, 이름이야말로 친한 사람들끼리 부르는 것이다. 여기서 친한 사람이라고 함은 친구 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가족 등 그야말로 혈연관계에 있는 가까운 사람이다. 또한 공식적인 문서에는 인물의 이름을 쓴다. 다시 말하자면, 벼슬과 자는 같이 쓰지 않는다.

그리고 성+자를 하면 존중의 의미이고, 그냥 벼슬 이름을 부르기도 하지만, 성+벼슬 이름을 부르면 그 사람을 존중하는 지칭이라고 한다. 이는 현대 한국에서는 좀 다른 부분으로 김 사장님, 김 교수님보다는 김철수 사장님, 김철수 교수님 쪽이 더 격식있게 느껴지는 편이다.[13]

유비의 이름인 (備)에는 근신하며 준비한다는 뜻이 있다. 《대대예기》(大戴禮記) <소변>(小辨) 편에는 "일을 경계해 근심하지 않는 것을 '지비'(知備)라 한다(事戒不虞曰知備)."라고 기록되어 있다.[14] 또 다른 의미로 《역경》(易經)<계사>(繫辭)에 "역(易)의 글됨이 광대해(우주의 모든 문제를) 그 속에 전부 갖추고 있다(易之爲書也, 廣大悉備)에서 볼 수 있듯이 '완전하다, 모두 갖추고 있다'는 뜻이 있다.

유비의 자(字)는 더 특별하고 무게감도 있다. 유비의 자는 현덕(玄德)이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서는 현덕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낳고도 소유하지 않고,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으며, 길러도 주재하지 않는 것을 이르러 '현덕'이라 이른다(生而不有, 爲而不恃, 長而不宰, 是謂玄德)

간단하게 해석하면 현덕에는 세 가지 상태가 있다. 첫째, '낳고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생이불유(生而不有)이다. 즉 자신이 심은 사과라도 혼자 소유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뜻으로, 자신이 깨달은 이치를 혼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눈다는 것이다. 둘째, '행해도 그 공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위이불시(爲而不恃)이다. 즉 내가 한 일이라 해도 자랑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겸허하게 행동하며 과장해 늘어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셋째, 장이부재(長而不宰)이다. 여기서 '재'(宰)는 주관을, '장'(長)은 장년을 뜻하는 말로 권위 있고 존귀한 위치에서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고 권한을 이양하고 부여할 줄 안다는 뜻이다.

유비의 다양한 호칭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3.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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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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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vs 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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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혈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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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가족 관계

조부는 유웅이며 부친은 유홍이다.

유비의 아내로는 소열황후 감씨, 미부인, 손부인, 목황후 오씨 등이 있다.

유비의 자식들 가운데 행적이 알려진 이는 양자 유봉, 장남 유선, 차남 유영, 삼남 유리 이렇게 4명이다.

유영과 유리는 유선과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으로 유선의 후손은 영가의 난 때 몰살당했으나 유선의 동생인 유영(劉永)의 손자 유현(劉玄)은 살아남아 성한(成漢)으로 도망가 황제 이수(李壽)로부터 안락공의 칭호를 받았다. 따라서 지금까지 내려오는 유비의 후손은 모두 유영의 후손이다. 또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이 유선의 사위였기에 제갈씨에 유비의 피가 섞여있는 것도 맞다.

유리의 후손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유비의 후손은 아래 단락에 나온 청두 유비혜릉 앞에서 조상님이 거병하기 전에 했던 같은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21]

이외에는 딸이 둘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위서》 <조순전>의 ' 장판파에서 유비의 두 딸과 군수품을 획득했다'는 대목이다. 그 이전에도 이후에도 관련 기록이 없고 저 기록이 전부다. 고대에 여성들은 금수저가 아닌 이상 전리품 취급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다른 이도 아닌 조조의 숙적 유비의 딸이었으니 조조 본인이 분풀이로 취했거나 조순에게 내렸을 가능성이 있다.

양자 유봉에 대해서는 유비가 시종일관 친자식으로 여기고 아끼며 좋아했다. 유봉이 죽은 이유는 겉으로는 관우를 구원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유봉이 주둔 중이던 상용은 원래 위나라의 땅을 점령한 것이었기 때문에 군대를 움직이면 반란을 걱정해야 한다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제갈량에게 상소를 올리기도 했었다. 중국의 역사학자 심백준의 유비에 대한 비판에서도 나오지만, 유봉의 죽음에 대해서는 제갈량의 독단이 아니라, 유비의 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는 지나치게 유봉에게 좋게 언급한 것인데, 번성의 포위가 풀리기까지는 두 달이 걸렸다.[22] 두 달이면 지원을 가기에 충분한 기간적 여유가 있었으며, 형주자사와 상용 동쪽 남향군 태수가 위군을 지원했다가 관우에게 토벌당해서 상용 동쪽은 공백지라 지원이 가로막힐 가능성도 없었다. 오히려 상용에서 지원을 오지 않아 보급 문제도 있던 관우는 어쩔 수 없이 장기전에 돌입하고 만다.

내부의 반란이 우려됐으면 유봉이나 맹달 중 한 명은 반란에 대비할 병력만 남기고 남은 한 명이 갔어도 됐다. 애초에 유비가 유봉과 맹달을 파견한 이유가 상용에서 관우를 언제라도 지원할 것을 염두에 뒀으며, 실제로도 신속히 지원이 가능하다고 판단한 배치인데 반란 우려를 핑계로[23] 서로 주도권 싸움이나 해대며 결국 관우와 남군, 강하, 유강구, 번성, 양양, 맥성들을 잃었으며, 후에는 유봉, 맹달이 지키던 상용도 결국 빼앗겼으니 후계자 문제 이전에 큰일을 그르친 것만으로 처형당할 이유는 충분했다.

7. 무덤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청두 유비혜릉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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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여담

신장은 7척 5촌[24]에 손을 아래로 내리면 무릎에 닿았고 눈을 돌려 자신의 귀를 볼 수 있었다.
<선주전>
유비가 말했다.
'안 됩니다. 명공은 여포가 정건양(정원)과 동태사(동탁)를 섬기던 일을 보지 못하셨습니까?'

조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포가 유비를 노려보며 말했다.
'귀 큰 놈(大耳兒)이 가장 믿지 못할 놈이로구나.'
《후한서》 <여포 열전>
이후 선주(유비)가 돌아가자 공(조조)은 사람을 풀어 선주가 어찌하고 있는지 살피게 하였다. 선주는 그러한 사정을 알아채고는 밭에서 파를 뽑으며 하인에게 돕게 하였는데, 파가 단정치 않은 모양을 하고 있던 고로 하인을 몽둥이로 후려팼다. 이를 조조가 듣자 말했다.
'귀 큰 녀석(大耳翁)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군.'
《화양국지》 <유선주지>
유비에게는 수염이 없었기 때문에 장유는 이런 방법으로 그를 깨우친 것이다.
<주군전>
제갈량은 유비의 웅자(雄姿-웅대한 자태)가 걸출함을 보고 마침내 해대사성(解帶寫誠-출사하여 성심을 다함)하고 서로 두텁게 결납(結納-결탁)했습니다.
<제갈량전>

9.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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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칭. [2] 음력 기준 221년 4월 6일 ~ 223년 4월 24일. [3] 전한 때는 1척이 23cm이었으므로 172.5cm였겠지만, 유비가 살았던 후한말 당시에는 1척이 23.7c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유비의 키는 177.8cm(정확히는 177.75cm)에 가깝다. 현재 중국 성인 남성 키보다 더 큰 편인데 거의 1800년보다 더 오래된 저 때 당시에는 매우 큰 키였다. 180 후반에서 190 초반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4] 촉한에서 붙여준 정식 묘호는 아니고, 후세에 추증한 묘호다. 전조의 유연은 흉노는 한 황실의 동생이라며 한나라의 계승을 칭하고, 한왕에 올랐는데 한고조, 광무제, 소열제(유비), 한문제, 한무제, 한선제, 한명제, 한장제를 모셨다. 이때 앞의 세 명, 즉 서한의 창건자 고조, 동한의 중흥자 광무제, 촉한의 건국자 유비까지 3조(三祖)로 두고 뒤의 다섯 황제는 5종(五宗)으로 모셨다고 한다. 대체적으로는 이때 '열조'의 묘호를 올리지 않았나 보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열조가 유비의 묘호라고 쓴 기록이 있다. [5] 계한(季漢), 혹은 유촉이라고도 한다. [6] 유비와 촉한이 스스로 내세운 촉한정통론에 따르면 초대 황제가 아닌 한나라의 제30대 황제이다. [7] '오늘도 황하는 도도히 흐른다'라는 구절로 시작하며 유비가 황하를 바라보다가 장비와 만나는 《삼국지》이다. [8] 별개로 제갈량을 '제갈 공명'으로 표기하는 것은 오류가 아니다. 성인 제갈과 자인 공명을 합쳐 제갈 공명이라고 부르는 것은 옳은 표기이기 때문. '유비 현덕'은 굳이 따지자면 '제갈량 공명'이라고 쓴 것과 같다. 실제로 일본에서 나온 코에이의 삼국지 영걸전, 공명전 등에서 제갈량 공명으로 등장한다. [9] 신삼국에서 유비 휘하의 부하들이 자신의 소속을 밝힐 때 주공의 이름을 "유비 유현덕"이라고 부르긴 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성+이름+자의 구조로 말하는 경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10] 라고는 하지만 실제로는 유비가 헌제와 항렬을 비교했을 때 아재비 뻘이므로 보통은 이름이 아니라 황숙이라고 부른다. 사실 부모 정도가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이름을 직접 부르는 일은 거의 없다. [11] 사실 그냥 현덕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꽤 친근하게 부르는 것이며 보통은 성과 직위를 붙여서 유예주나 좌장군 등으로 부른다. [12] 드라마 대군사 사마의 후반부에서 흑화한 사마의의 모습에 실망한 백령균이 딥빡친 목소리로 '사마의'라고 부르자 사마의도 당황해서 지금 날 뭐라고 불렀냐고 화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이유에서다. [13] 과거에는 중국과 마찬가지로 이름은 거의 부르지 않았고 대부분 자나 호, 직위를 붙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현대는 자, 호 등이 사라지고 이름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게 되니 남의 이름을 생략하는 것이 더 비격식이라고 여겨지는 것일 뿐이다. [14] 기존 문서에서는 출처가 《소대예기》(小戴禮記) 라고 나와있었는데 이것을 잘못된 인용이다. 아마도 《사람을 품는 능굴능신의 귀재 유비: 속내를 감추고 은밀히 지배한다》라는 책에서 소대예기가 출처라고 되어 있어서 소대예기가 출처라고 적은것 같은데 대대예기 원문을 본다면 (https://ctext.org/da-dai-li-ji/xiao-bian/zh) 대대예기가 출처임을 알 수 있다. [15] 여기서 더 낮추면 '귀 큰 놈'이라든가 '돗자리 짜던 촌놈' 하는 식의 욕설로 호칭하게 된다. [16] 《연의》에서는 툭하면 적들에게 "돗자리나 짜던 천한 놈이"라면서 출신 문제로 욕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황족인 동시에 하류층인 미묘한 사회적 위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7] 사실 연의에서 유황숙유황숙하니 유비가 혈통팔아먹고 다니는 인물로 여겨질 때도 있는데, 사서에서 유비의 혈통에 대한 얘기는 그가 중산정왕 유승의 아들 유정의 후예란 게 짧게 언급되는 정도다. 황실에서 전한대에서 갈라져나온 유비와 달리 후한대에서 갈라져나온 유엽같은 인물도 딱히 혈통 덕을 본게 없다는 걸 감안하면, 당시 평민 출신인 유비가 이걸로 딱히 대접받았을 확률도 희박하다. 헌제가 의대조 사건 때 그를 포섭한 이유는 그가 조조에게 대적하는 실력자여서였지, 촌수를 따지기도 힘들만큼 희미한 혈통 때문이 아니다. 물론 나중에 유비가 칭제할 정도로 세력을 키운 이후엔 유씨 성이 명분 면에서 엄청난 도움이 되었다. 아무리 먼 방계라고 해도 확실한 유씨고, 확실히 한 고조의 후예긴 하니까. [18] 면류관을 의자에 비유한 것이기 때문에 황제의 지위를 모욕했다는 이유로 이 농부는 관청에 잡혀갔지만, 황제가 무지렁이 시골 농민이 장난친 걸 가지고 진지 빤다며 풀어주게 했다. [19] 참고로 진수는 서진의 관료였으므로 조위 정통론자의 입장이었고, 따라서 위나라는 통상적인 본기의 서술을 따라 <무제기>, <문제기> 등으로 호칭했다. 오나라의 황제였던 손권에 대해서는 <오주전>이라고만 쓰고 본문 첫머리부터 "손권은 자가 중모이다." 라며 이름을 언급하는데, 유비는 제목은 비슷하게 <선주전>이지만 그 이름을 말할 때 "선주의 성은 유이고, 는 비이다." 라며 나름의 존칭을 사용했다. 여담으로 사마의는 선제라는 추존 명칭이 있었는데도 그냥 진나라가 왕국이던 시절의 추존명인 사마선왕이라고 적었다. [20] 소열은 시호이고, 연호는 장무다. [21] 그런데 일설에서는 짚신 장사는 일종에 마케팅이고, 실제로는 관리인이라는 말이 있다. 이게 사실이면 유비의 후손이 선조의 무덤을 돌보는 격이다. [22] 8월에 도착하여 지원병을 충분히 받은 서황 만총과 연계해 10월에 번성 포위를 풀었다. [23] 맹달은 상용이 지키기 유리한 곳이라고 언급까지 했다. [24] 전한 때는 1척이 23cm이었으므로 172.5cm였겠지만, 유비가 살았던 후한말 당시에는 1척이 23.7cm였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유비의 키는 대략 177~178cm(조금 더 구체적인 수치로는 177.8cm)에 해당한다. 2020년대 동아시아에선 평균 보다 조금 더 큰 정도(한국 기준 약 3~4cm, 중국 기준 약 6~7cm)지만, 당대에는 현대의 190대 이상에 해당하는 장신에 속한다. [25] 《용비어천가》 29장. "한덕(漢德)이 비록 쇠하나 제주(帝胄, 황제의 자손)가 중흥하실 것이라, 귀 큰 아이(大耳兒) 와룡(臥龍)이 도왔나니. 세란(世亂)을 구하러 나시어 천자(天姿, 하늘이 내린 자질)가 기이하고 크시기에 귀 큰 관상(大耳相)을 중국 사신(詔使)이 일컬으니." 조선 태조도 용 같은 얼굴과 큰 키, 유별나게 큰 귀로 독특한 인상을 주었다고 한다. [26] 현대에도 마초성을 강조하는 기준 중 하나가 인상적인 수염인데, 고대 당시에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삼국시대로부터 1000년이 지난 뒤의 얘기지만, 몽골 사신단이 호라즘의 대빵에게 수염이 깎인 채 돌아오자, 칭기즈칸이 대노하여 직접 전쟁을 일으켰을 정도였다. [27] 보통 만화에서 유비는 의형제 관우나 장비보다는 젊게 그려지는 편이다. 대표적으로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의 황건적의 난 부분을 보면 풋풋한 느낌을 주는 청년장수 유비와 산전수전 다겪은 듯 수염이 덮수룩한 관장은 묘한 대비를 이룬다. 다른 삼국지 만화 매체들도 시간이 흘렀다는 장치로 유비도 어느 순간부터 수염을 달고 나오지만 수염이 풍성하고 파격적인 관장보다는 숱이 확실히 적게 그려진다. 별명 자체가 수염인 사람 밤송이 돼지털이 아이덴티티가 되어버린 사람과 비교하면 누구 수염이 밋밋하지 않겠냐만은. [28]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29] 이런 정통성 보강의 일환이었는지 전조의 국명은 본래 한나라로, 촉한처럼 한의 후신을 자처했고, 이는 유총은 물론 4대 유찬 때까지 쭉 이어졌다. 그러나 이후 5대 황제 유요가 국호를 조로 바꾸면서 흉노의 후예임을 공고히 하였고, 한나라 삼조오종에 대한 제사도 끊었으며, 남교와 북교를 설치해 묵돌선우에게 제사를 올렸다. [30] Idema, Vernacular Fiction, 97. [31]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32] 관우, 장비, 조운, 황충, 마초, 제갈량 등. [33] Rafe de Crespigny, Imperial Warlord:A Biography of Cao Cao 155–220 AD [34] 한나라는 중간에 한번 망했다가 광무제가 재건했기 때문에 후한을 중건한 광무제의 후손들의 계승권이 우선되었는데 유비는 전한 초기에 이미 갈라진 방계 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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