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서(晉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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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虞悝(? ~ 322)
동진의 인물. 자는 불명. 형주 장사군(長沙郡) 출신. 우망(虞望)의 형. 《 자치통감》 음주에 따르면 "悝"자는 흔히 쓰이는 "리(lǐ)"나 "회(huī)"가 아닌 "괴(kuī)"라 발음해야 한다.
2. 생애
우괴와 그 동생 우망은 형제가 나란히 지조가 있었고, 효와 우애가 깊기로 명성을 얻으니, 주군(州郡)에서 두 형제를 불러 각각 치중, 별가로 삼았다.영가 5년(311년) 6월, 영가의 난으로 인해 중원이 혼란에 빠지고 수많은 유민들이 혼란을 피해 강동으로 내려왔다. 낭야왕 사마예는 사마 왕도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방에 격문을 널리 띄우고 현준한 이들을 초빙하니, 당시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106연(百六掾)"이라 하였다.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던 우괴, 우망 형제 역시 부름을 받았으나, 형제는 자신들을 부끄럽게 여기고 응하지 않았다.
태흥 3년(320년) 12월, 원제 사마예는 병권을 쥔 대장군 왕돈을 견제하기 위해 초왕(譙王) 사마승을 상주자사(湘州刺史)에 임명하였다. 상주에 부임한 사마승은 우괴 형제의 명성을 전해듣고는 우괴를 장사로 삼았으나, 그가 관직을 받들기도 전에 어머니가 사망하여 일단 사마승에게 가는 것을 미루고 상부터 치렀다.
영창 원년(322년) 정월, 대장군 왕돈이 마침내 조정에 반발하여 무창(武昌)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왕돈은 참군 환비(桓羆)를 보내 사마승에게 유세했는데, 사마승은 바로 환비를 체포하고 한창 모친상을 진행 중인 우괴의 집을 찾아가 문상하였다. 우괴 형제를 만나게 된 사마승은 지금 상 중인 것은 알고 있지만 국가 비상 사태인 만큼 힘을 빌려달라 청했고, 우괴와 우망 또한 국가의 일이 위중하다 여겨 사마승의 청에 승낙했다. 사마승은 그 자리에서 우괴를 장사, 우망을 사마에 임명하고 각각 독호제군을 더하였다.
용릉현령 이웅이 왕돈의 반란군을 막고자 하는 사마승의 뜻에 동조하여 멀고 가까운 곳에 왕돈의 죄악을 나열한 격문을 뿌리니, 왕돈의 매형인 상동태수 정담(鄭澹)을 제외한 모든 군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사마승은 우망에게 정담을 토벌할 것을 명하자, 우망은 일족을 거느리고 상동군에 입성하여 정담을 참수한 후, 그 수급을 사방에 돌렸다.
수도 건강(建康)을 향해 진격하던 왕돈은 사마승이 거병하여 자신의 뒤를 노린다는 소식을 듣고, 남만교위 위예(魏乂), 장수 이항(李恒)에게 갑사 20,000명을 주어 사마승의 치소가 위치해 있는 장사군 임상(臨湘)을 치게 했다. 우망은 매번 먼저 성벽 위에 올라 적군과 필사적으로 싸우다가 전사했고, 사마승의 세력은 왕돈군에 비하면 약소한 나머지 수십일 간의 공성전 끝에 결국 패하여 초왕 사마승을 비롯한 우괴, 이웅 등이 전부 사로잡히고 말았다.
위예가 포로로 잡힌 우괴를 처형하려 하자, 우괴의 자제들이 소리내어 울부짖었다. 그러자 우괴가 그들을 위로하며 말했다.
"인생에 죽음은 반드시 있기 마련이거늘, 온 집안이 충의로운 귀신이 되었으니, 무엇을 한스럽게 여기랴!"
이윽고 우괴는 처형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훗날 왕돈의 난이 평정되고 왕돈에게 살해당한 충신들을 추증할 때, 조정에서 우괴를 양양태수, 우망을 형양태수로 추증하였다. 그리고 알자(謁者)를 그들의 묘소로 파견해 소뢰(少牢)의 예로써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