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프랑스어 교사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났으나 2살 때 부모가 이혼했다. 이후 어머니와 외조부모 밑에서 자랐으나 조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신 데다가, 바이울이 13세 되던 해엔 어머니마저
난소암으로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야말로 고아가 되었다. 다행히 현역 시절 코치였던 갈리나 즈미에브스카야와 사위인
빅토르 페트렌코의 도움을 받아 피겨 스케이팅 훈련을 계속 할 수 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낸시 케리건을 제치고 만 16살의 나이에 금메달을 땄음에도 이러한 뒷이야기 때문에 미국 언론에도 크게 주목을 받았으며 바이울의 이야기가 미국에서 드라마로도 만들어지기도 했다.[3]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테크니컬 프로그램(現 쇼트 프로그램)에서
블랙 스완을 연기했다.[4] 그런데 프리 스케이팅 연습 도중, 독일의 타나 슈첸코와 큰 충돌로 인해 다리를 꿰메야 하는 큰 부상을 입었고[5] 경기 진행에 큰 지장이 생겼다. 하지만 출전이 불가능한 정도의 부상까지는 아니었기에, 프리 스케이팅을 문제 없이 출전해 쇼트에서 선두였던 낸시 케리건을 누르고 우승을 차지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 후 자국의 첫 올림픽 금메달 수상자로서 의미있는 기록을 남겼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땄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생활 동안 누적된 심각한 부상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피겨 스케이팅 지원 중지로 인한 극심한 생활고가 겹쳐서[6]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 곧바로 은퇴를 한 다음, 무릎 수술까지 연기하고 미국 아이스 쇼에 출연하여 프로 선수로 전향하였다.
은퇴 직후에는 엄청난 출연료로 미국 아이스 쇼 러브콜을 받았다. 그러나 상술한 어린 시절과 가족 같았던 지인의 죽음, 어린 나이에 이른 성공이 합쳐져
1997년 알콜 중독과 함께 음주 운전에 적발되어[7] 방황하던 시기도 있었다. 이후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은 바이울은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중요한 경험이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또한 자신의 13년 후배 격인
김연아와 같이 찍은 사진들도 있으며
2014 소치 동계올림픽 판정 논란 당시 김연아가 금메달을 땄어야 했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현재는 결혼하여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 중이며, 슬하에 딸이 1명 있다. 미국 영주권을 지닌채 우크라이나 국적을 유지중이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우크라이나 피겨 스케이팅은 바이울이 올림픽 금메달을 딴 이후 그녀의 뒤를 이을 만한 유망주 선수가 한 명도 나오지 않고 있다.[8]
[1]
우크라이나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데,
1992년까지는 우크라이나 선수가 메달을 따도 소련(1992년 동계올림픽 한정으로
독립국가연합)에 합산되었기 때문이다.
[2]
직전 대회인
1992 알베르빌 동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다.
[3]
에드워드 펄롱의 現 여자 친구이자
프레디 vs. 제이슨의 주인공 로리 캠벨을 연기했던 모니카 키나가 바이울을 연기했다.
[4]
당시 이 작품은 "클래식 발레 피겨 스케이팅"으로 많은 선수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조니 위어가 선수가 된 계기였다.
[5]
바이울의 올림픽 갈라를 자세히 보면, 다리에 큰 반창고를 붙힌 상태로 갈라 연기를 한 모습을 볼 수 있다.
[6]
당시 막 독립한 우크라이나는 경제가 좋지 않아 대부분의 스포츠의 지원을 중단하였다. 연습장에 잠보니가 없어서 선수들이 직접 정빙을 해야 할 정도였다.
[7]
롱 아일랜드 아이스 티를 무려 4~5잔을 마시고 메르세데스를 몰다가 적발되었다. 당시 만 19살이었으며 법적으로 음주가 가능한 나이보다 2살 아래였다.
[8]
그나마 유망주라고 얘기할수 있는 선수라고는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로 귀화한
아나스타샤 샤보토바가 있었는데,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옹호하는 행위를 해 우크라이나 국가대표 자격이 박탈되어 은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