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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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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e751f><colcolor=#ffffff> 모기업 관련 정보 | <colcolor=#000019,#fff>모기업 오릭스그룹 | |
일본시리즈 우승 ★★★★★ |
1975 · 1976 · 1977 · 1996 · 2022 | |
리그 우승 (15회) |
1967 · 1968 · 1969 · 1971 · 1972 · 1975 · 1976 · 1977 · 1978 · 1984 · 1995 · 1996 · 2021 · 2022 · 2023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9회) |
1973후기 · 1974전기 · 1975전기 · 1976전후기 · 1977전기 · 1978전후기 · 1979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8 · 2014 · 2021 · 2022 · 2023 | |
시즌 문서 |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 |
현역 선수 경력 | 모리 토모야/선수 경력 · 니시카와 료마/선수 경력 · 야마자키 소이치로/선수 경력 | |
경기장 | 1군 교세라 돔 오사카 · 홋토못토 필드 고베 · 2군 마이시마 베이스볼 스타디움 · 지방 홈구장 와카사 스타디움 교토 | |
홈 중계 채널 | ||
주요 인물 | 감독 키시다 마모루 · 선수회장 스기모토 유타로 · 주장 공석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버팔로 벨 · 10.2 결전 · 칠석의 비극 ·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선수 |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더(한큐-오릭스) |
역대 1라운더(킨테츠)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한큐-오릭스) |
1. 개요
오릭스 버팔로즈의 역대 선수들에 대해 서술한 문서.2. 영구결번
3. 준영구결번
-
51.
스즈키 이치로
1990년대 중후반의 퍼시픽리그를 평정하고 메이저리그로 건너가서 미일 통산 최다 안타뿐만 아니라 메이저리그에서만 통산 3000안타를 친 전설의 타자. 퇴단 이후 이 팀에서 51번을 단 선수가 1명도 없어서 사실상 준영구결번으로 남아 있다. 구단에서는 51번을 달아도 된다고 했지만 당연히 전 주인의 존재감이 존재감이다 보니 오릭스 선수들이 꺼리고 있다.
4. 투수
- 카지모토 타카오 (1954 - 1973)
- 요네다 데쓰야 (1956 - 1975)
- 아다치 미츠히로 (1959 - 1980)
- 야마다 히사시 (1969 - 1988)
- 이마이 유타로 (1971 - 1990)
- 이나바 미츠오 (1977 - 1983)
- 주니치와의 3:4 트레이드로 넘어온 커브가 주 특기인 오른손 투수. 이적 첫 해 17승을 기록하며 좋은 모습을 보여줬었다. 1983년에 출장 횟수가 급격하게 줄어든 후 팀을 퇴단, 이후 한신에 입단했지만 단 한번도 등판하지 않았다. 2012년에 주니치에서 코치를 역임하던 도중 경기 중간에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지만 당일 사망했다. 사인은 뇌출혈.
- 사토 요시노리 (1977 - 1998)
- 김성길 (1978 - 1986)
- 야마오키 유키히코 (1982 - 1994)
- 호시노 노부유키 (1984 - 1999)
- 브래드 레슬리 (1986 - 1987)
- '애니멀'이란 별명이 있고 아예 등록명부터가 애니멀이었다(...). 마무리 투수로 활약했지만 그보다도 역대 최강급의 쇼맨십으로 기억되는 외국인 선수. 은퇴 후에는 미국과 일본을 오가며 풍운! 타케시성의 고정멤버로 활동하고 영화에도 출연하는 등 예능인, 배우로 활약했다.[4] 2013년 4월 28일에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 하세가와 시게토시 (1991 - 1996)
- 노무라 타카히토 (1991 - 1997)
- 하기와라 준 (1992 - 2007)
- 니시모토 다카시 (1993)
- 마키노 루이 (1993 - 2003)
- 고바야시 히로시 (1993 - 2004)
- 카네다 마사히코 (1993 - 2004)
- 노다 고지 (1993 - 2000)
- 정규이닝 19 탈삼진이라는 일본프로야구 기록을 보유한 포크볼러 선발 투수.
- 히라이 마사후미 (1994 - 2002, 2013 - 2014)
- 스즈키 타이라 (1995 - 1999)
- 미즈오 요시타카 (1995 - 2000)
- 카세 토시히로 (1995 - 2004)
- 오타니 쇼헤이 이전 마지막으로 일본프로야구 무대에서 투타겸업을 시도했던 선수. 좌투좌타의 외야수로 입단했으나 1997년 오기 감독의 제안으로 투수와 외야수 겸업에 도전했다. 2000년 투수로서의 첫 승을 외야수로 선수 등록이 된 상태에서 거둔 진기록을 가지고 있다. 2000년을 마지막으로 타자 출장은 없었고 2001년 리그 최다인 70경기에 등판하는 등 중간계투로 짧게나마 활약했지만 2004년 블루웨이브의 긴테츠와의 합병과 함께 방출되었다.
- 오구라 히사시 (1997 - 2004)
- 에드윈 후타도 (1998 - 1999)
- 가와고에 히데타카 (1999 - 2009)
- 가토 신이치 (1999 - 2001)
- 이와시타 슈이치 (2000 - 2005)
- 야마구치 가즈오 (2000 - 2009)
- 구대성 (2001 - 2004)
- 오쿠보 마사노부 (2001 - 2010)
- 2000년 드래프트 2위로 입단한 투수로, 데뷔 첫 해인 2001년에 중간계투와 마무리투수를 오가며 53시합 94이닝 7승 14세이브 ERA 2.68로 리그 신인왕을 수상했으나 그 해 시즌 종반에 키타가와 히로토시에게 그 유명한 '대타 역전 끝내기 만루 리그 우승 홈런'을 맞아버리는 바람에 본인의 활약과는 상관없이 대기록을 허용한 투수라는 이미지가 박혀버린 비운의 투수가 되었다(...) 데뷔 시즌 이후엔 여러 차례 부상으로 이탈한 탓에 누적 기록을 많이 쌓지 못하고 2010년을 끝으로 은퇴했고, 은퇴 후 구단 직원으로 전임했다. 상술한 키타가와와는 이후 킨테츠-오릭스 합병으로 팀메이트가 되었고 2015년엔 상술한 홈런을 기념하는 이벤트에서 서로 포지션을 맞바꿔 대결하는 이벤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 아이키 타카시 (2001 - 2005)
- 모토야나기 카즈야 (2002 - 2010)
- 타나카 유키 (2002 - 2008)
- 요시이 마사토 (2003 - 2007)
- 스즈키 마코토 (2003 - 2005)
- 카토 다이스케 (2003 - 2011)
- 카토 타츠오 (2004 - 2008)
- 타카기 야스나리 (2005 - 2009)
- 키쿠치하라 츠요시 (2005 - 2010)
- 야마모토 쇼고 (2005 - 2010)
- 카츠키 료타 (2005 - 2012)
- 콘도 카즈키 (2005 - 2016)
- 팀 최후의 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즈 출신 선수. 오릭스에선 계투로 나름 자리를 잡았지만 노쇠화로 입지가 줄어들다 아래의 사카구치가 방출당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2016년 시즌 도중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이로서 오릭스 버팔로즈에 긴테쓰 출신 선수/원년 멤버는 단 한 명도 남지 않게 되었다.
- 카네코 치히로 (2005 - 2018)
- 제레미 파웰 (2005)
- 호세 파라 (2005)
- 톰 데이비 (2006 - 2008)
- 키시다 마모루 (2006 - 2019)
- 2020년 시즌부터 오릭스 2군 투수 코치. 2025년부터 감독.
- 코마츠 사토시 (2007 - 2016)
- 오릭스 1군 투수코치 (2020년 8월 21일 감독 및 코치 인사 이동으로 인함. 이전에는 2군 코치)
- 니시 유키 (2010 - 2019)
- 박찬호 (2011)
- 알프레도 피가로 (2011 - 2012)
- 차승 백 (2012)
- 알렉스 마에스트리 (2012 - 2015)
- 이가와 게이 (2012 - 2015)
- 돈 로치 (2018)
- 타일러 에플러 (2019)
- 아델린 로드리게스 (2020)
- 앤드류 앨버스[5] (2018~2020)
통산 254승 255패를 기록한 일본프로야구 통산 승리 9위의 명선수이자 요네다 테츠야와 함께 요네카지 콤비로 활약한 한큐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러나 200승 이상 투수 중 유일하게 승리보다 패배가 더 많은 투수이기도 하며 1956년 베스트나인에 오른 걸 제외하면 타이틀 수상 경력이 한 번도[1] 없는 무관의 제왕이기도 했다.[2] 선수 은퇴 후엔 코치로서 우에다 토시하루를 도와 한큐의 일본시리즈 V3와 1978, 1984년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우에다가 1978년 일본시리즈에서 항의 소동으로 물러나자 1979~1980년에 후임 감독을 맡아 1979년에 후기리그 우승을 거두었지만[3] 다음 해인 1980년에 팀이 하위권으로 떨어져 우에다에게 감독직을 다시 넘겨주고 코치로 재취임했다. 2006년 호흡 곤란 증세를 보여 고베시 병원에서 사망했고, 다음 해인 2007년 야구전당에 헌액되었다.
5. 포수
- 오카무라 고지 (1961 - 1971)
- 한큐의 첫 퍼시픽리그 우승 당시 주전포수. 그러나 난카이 호크스의 노무라 카츠야 때문에 베스트 나인과 골든글러브와는 인연이 없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1969년 일본시리즈 4차전에서 도이 쇼조의 홈스틸에 대한 애매한 세이프 판정에 극대노, 구심에게 죽빵을 날려 일본시리즈 1호 퇴장이라는 흑역사로 전국에 이름을 알린다(...).[6]
- 나카자와 신지 (1965 - 1985)
-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 당시 주전포수. 현역 시절엔 출중한 수비력으로 이름난 선수였으며 1978년 시즌에 다이아몬드 글러브를 수상한 바 있다. 노무라 카츠야의 집요한 트래쉬 토크조차 소용없던 철벽 멘탈의 오 사다하루를 농락한 몇 안 되는 포수이기도 했다.[7] 은퇴 후엔 닛폰햄, 오릭스 등에서 코치를 역임했고 이후 해설가로 활동 중.
- 후지타 히로마사 (1983 - 1991)
- 1984년 신인왕. 이해 주전 포수로 뛰면서 22홈런을 치는 등 한큐 최후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지만, 이후엔 은퇴 때까지 다시 신인왕 시즌만큼의 임팩트를 보여주지 못하였다.
- 나카지마 사토시 (1987 - 1997)
-
최후의
한큐 브레이브스,
오릭스 브레이브스 멤버. 2015년까지 무려 29년간 현역으로 뛰었다. 은퇴 후에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코치로 있었으며 2019년부터 오릭스에 2군 감독으로 복귀하였다. 2020년 8월 20일 경기종료 이후 니시무라 감독의 사임
해임으로 인해 8월 21일부터 오릭스 1군 감독대행으로 취임한다. - 미와 타카시 (1994 - 2004)
- 히다카 타케시 (1996 - 2012)
- 마에다 다이스케 (2003 - 2011)
- 스즈키 후미히로 (2005 - 2012)
- 마토야마 데쓰야 (2005 - 2007)
- 요코야마 데쓰야 (2005 - 2013)
- 사이토 토시오 (2011 - 2016)
- 현재 1군 배터리코치 (2020. (2020년 8월 21일 감독 및 코치 인사 이동으로 인함. 이전에는 2군 육성코치.))
- 비니 로티노 (2013)
- 이이다 다이스케 (2017 - 2020)
- 야마자키 카츠키 (2014 - 2020)
6. 내야수
- 래리 레인즈 (1953 - 1954, 1962)
- 로베르토 바르본 (1955 - 1964)
- 타카이 야스히로 (1964 - 1982)
- 프로 통산 27개의 대타홈런을 기록한 세계 최다 대타 홈런 기록 보유자. 1975년 지명타자 제도가 도입되자 주전 지명타자로 활약하며 1977년 지명타자 부문 베스트나인에 뽑히고 2년 연속 규정타석 3할을 기록하기도 했다.
- 대릴 스펜서 (1964 - 1968, 1971 - 1972)
- 30홈런을 3차례 기록했던 거포 내야수. 1965년엔 노무라 카츠야와 타격 3관왕 경쟁을 했지만 외국인 선수에게 타이틀을 넘겨줄 수 없다는 투수들의 기피와 교통사고로 인한 골절이 겹쳐 최고출루율 타이틀만 획득했다. 이때 타이틀 견제가 목적인 8연타석 고의사구를 기록하기도 했는데, 항의 차원에서 방망이를 거꾸로 잡고 타석에 서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또 같은 해에 사이클링 히트를 기록했지만 당시 일본프로야구는 이 기록에 대한 인식은 커녕 개념도 아예 없어서 이걸 언급하지 않은 기자들에게 의문을 제기해 이후 사이클링 히트가 공식 기록에 반영되는 계기가 되었다. 1968년을 끝으로 퇴단 후 개인 사업을 하다 주식투자 실패로 빈곤해진 생계를 지탱하기 위해 1971년에 선수 겸 코치로 복귀했으나 당시 나이가 이미 43세였던 탓에 한큐에서의 2번째 선수생활은 별 활약 없이 2년 만인 197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 독립리그 감독 등으로 활동하다 2017년에 사망했다.
- 카토 히데지 (1969 - 1982)
- 같은 해에 함께 드래프트 지명을 받았던 후쿠모토 유타카[8], 야마다 히사시와 함께 한큐 브레이브스의 70년대 황금기를 이끌며 1975년 퍼시픽리그 MVP, 수위타자 2회, 타점왕 3회, 최고출루율 3회 수상의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 강타자 1루수. 노무라 카츠야의 뒤를 잇는 통산 희생 플라이 2위(105개) 보유자다. 다만 은퇴 때까지 한큐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남았던 후쿠모토와 야마다와는 달리 카토는 저 둘보다 다소 빨리 기량 하락이 시작되면서 말년엔 한큐를 떠나 히로시마, 킨테츠, 요미우리, 난카이 4개팀을 떠도는 저니맨 생활을 했다. 다만 저니맨 생활을 했음에도 완전히 하락하진 않은 기량을 뽐내며 꾸준히 뛴 결과 현역 마지막 시즌인 1987년에 통산 2천안타를 달성하며 유종의 미를 거두고 은퇴했다.
- 오하시 유타카 (1972 - 1982)
- 바비 마르카노 (1975 - 1982)
- 베네수엘라 출신 야구선수로 한큐의 일본시리즈 3연패 당시 주전 2루수. 1978년 타점왕. 한큐에서 8년간 뛴 뒤 1983년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해 3년간 뛴 후 은퇴했다. 랜디 바스, 부머 웰즈 등처럼 화려한 플레이를 보여준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일본에서 긴 시간 동안 꾸준히 활약하면서 통산 1418안타, 232홈런, 817타점이라는 훌륭한 스탯을 기록했다. 은퇴 후 불과 5년 만인 1990년에 폐암으로 39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증조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설이 나돌았었지만 진상이 확인된 건 아니다.
- 마츠나가 히로미 (1978 - 1992)
- 유미오카 케이지로 (1981 - 1991)
- 후쿠하라 미네오 (1982 - 1992)
- 부머 웰즈 (1983 - 1991)
- 한큐의 80년대 주전 거포. 1984년 일본프로야구 최초의 외국인 타격 3관왕을 달성했다. 한신 타이거스의 랜디 바스, 롯데 오리온즈의 레론 리 등과 더불어 일본 프로야구 역대 최고 외국인 선수 논쟁에 반드시 들어오는 선수이다. 1992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해 그 해 타점왕 수상 후 노쇠화를 이유로 퇴단하며 은퇴.
- 범프 윌스 (1983 - 1984)
- LA 다저스의 레전드 모리 윌스의 아들. 메이저리그 통산 831경기 출장, 196도루의 나름 준수한 성적을 올려 4년 4억엔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에 계약했지만 워크에식이 좋지 않았던 탓에 일본에서는 폭망했다. 여담으로 당시 흥행 문제로 고심하던 한큐가 야구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이벤트로 후쿠모토 유타카와 함께 말과 그라운드에서 60m 달리기 경주를 한 에피소드가 있다. 결과는 경주마가 인조잔디의 감촉에 당황해 기수의 지시를 듣지 않고 우왕좌왕한 끝에 윌스가 승리.
- 후쿠라 준이치 (1985 - 1997)
- 2016~2018 오릭스 1군 감독. 2019년 중반부터 GM(단장 및 팀 편성부장) 역임 중.
- 오가와 히로후미 (1989 - 2000)
- 마츠야마 히데아키 (1990 - 1998)
- 트로이 닐 (1995 - 2000)
- 이치로 등과 함께 오릭스의 중심타선을 이루며 1996년 일본시리즈 MVP를 수상했으나, 우리나라에선 2001년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가 폭행사건으로 퇴출된 먹튀로 유명하다(...)
- 바바 토시후미 (1994 - 1997)
- 원래는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백업 내야수였으나 1994년 트레이드로 오릭스에 이적했고, 이후 출중한 수비력을 바탕으로 주전 3루수로써 오릭스의 퍼시픽리그 2연패 및 1996년 일본시리즈에 공헌하며 2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은퇴 후인 2016년엔 한화 이글스의 코치를 역임한 바 있다.
- 오시마 코이치 (1996 - 2004)
- 시오자키 마코토 (1997 - 2010)
- 시오타니 가즈히코 (2002 - 2005)
- 고토 미츠타카 (2002 - 2013)
- 히라노 케이이치 (2002 - 2007, 2013 - 2015)
- 팀 최후의 오릭스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 중 하나. 괴짜스러운 언행과 성격으로 컬트적인 인기가 있던 선수로, 키는 작았지만 평균 이상의 컨택과 수비력을 가졌다. 2004년부터 주전 2루수를 차지했지만 2006년 수비 도중 부상당하면서 몰락했고, 한 수 아래로 평가받던 고토에게 밀려버리면서[9] 결국 한신으로 이적했다. 한신 이적후에 타격포텐이 다시 터지면서 2010년에 타율 .350[10]을 기록하기까지 하는 등의 교타자로 활약했고 내외야를 오가며 호수비를 보여주다 FA로 친정팀에 금의환향했다. 그러나 FA 이적 후 또다시 부진한 성적을 거두면서 타니 요시토모와 같은 해 은퇴했다.
- 야마사키 타케시 (2003 - 2004)
- 큰맘 먹고 1995~1996년 리그 2연패에 공헌한 히라이 마사후미를 내주며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해왔으나, 감독과의 불화 등으로 좋지 못한 성적을 거두며 2년 만에 방출되었다. 그러나 토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에서 다시 부활에 성공한다.
- 호세 오티스 (2003 - 2004)
- 시마무라 잇키 (2004 - 2010)
- 미즈구치 에이지 (2005 - 2007)
- 아베 마사히로 (2005 - 2009)
- 키타가와 히로토시 (2005 - 2012)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문서에 나오는 9회 말 3점차로 뒤진 상황에서 터진 세계 유일의 '대타 역전 만루 끝내기 리그 우승 홈런'의 주인공.
- 클리프 브룸바 (2005 - 2006)
- 기요하라 가즈히로 (2006 - 2008)
- 나카무라 노리히로 (2006)
- 그렉 라로카 (2007 - 2010)
- 알렉스 카브레라 (2008 - 2010)
- 호세 페르난데스(1974) (2009, 2013)
- 아롬 발디리스 (2010 - 2013)
- 이승엽 (2011)
- 이대호 (2012 - 2013)
- 코지마 슈헤이 (2012 - 2020)
- 윌리 모 페냐 (2014)
- 오쿠나미 쿄 (2013 - 2017)
- 코야노 에이이치 (2015 - 2018)
-
크리스 마레로 (2017 - 2019)
일본프로야구 10만호 홈런의 주인공인데, 일본에서 첫 홈런을 쳤을 때 누의 공과를 저질러 그 홈런이 무산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누의 공과 덕분에 10만호 홈런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러나 첫 해 이후론 공갈포 먹튀에 그친채 2019년을 끝으로 방출. 메이저리그에선 드래프트 1라운더에 뽑힐 만큼 기대를 받은 유망주였지만 일본에서도 성공하지 못했다. 사촌동생 데븐 마레로도 똑같이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1라운더인데 이쪽 역시 메이저리그에선 성공하지 못했고, 형 크리스찬 마레로[11], 삼촌 엘리 마레로[12], 오촌 조카 엘리 마레로[13]도 야구선수. - 시라사키 히로유키 (2018 - 2020)
-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즈에서 포수 타카조 슈토와 함께 2018년 트레이드로 입단했다. 오릭스에서는 포수 이토 히카루와 투수 아카마 켄을 보냈다.
- 아델린 로드리게스 (2020)
- 2019년 시즌 전에 치바 롯데 마린즈의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메이저리그에 도전하겠다는 이유로 탈락시켜줄 것을 요구하고 중도귀국한 흑역사가 있다. 다만 2019년에도 트리플 A에서만 뛰면서 일본행.
오릭스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로는 가장 오랫동안 버팔로즈에 남았던 선수이자 마지막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 한국에서는 이대호의 일본 진출 첫 해의 3번 타자로 기억될 것이다. 장타력은 센터 내야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나름 준수했으나 선구안이 나쁜 탓에 출루율이 낮았고 부진한 와중에도 중심타선에 배치되다보니 이대호의 팬들에게는 갖은 욕을 얻어먹었다. 아무튼 블루웨이브 출신으로는 오릭스에서 마지막까지 트레이드되지 않고 주전으로 남아 오랫동안 활약한 프랜차이즈 스타였으나 기량 저하로 츠치야 텟페이와 트레이드되어 라쿠텐으로 이적했고, 2016년을 끝으로 방출되어 은퇴한 뒤 2020년까지 오릭스에서 코치를 맡다가 2021년부터 독립리그 구단인 이시카와 밀리언 스타즈에서 지도자를 맡고 있다. 이시카와에선 2022년부터 선수 겸 감독으로 현역에 복귀했다.
내, 외야를 두루 보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였으나 타격이 나빠서 백업에 머무르다 2020년을 끝으로 전력외통보를 받고 은퇴. 이후 코치로 전임했다.
구단의 흑역사. 2017년 5월 17일 속도위반 운전으로 적발되어 면허정지 30일에 처해졌는데, 불과 5일 만에 오사카 시내에서 면허정지 상태에서 접촉사고로 2명을 경상에 빠트린 바람에 무기한 근신 처분을 받고 결국 동년 8월에 방출되었다. 방출 이후 야구선수로서 재기를 모색하는 듯 했으나 여고생 성매매 혐의로 2019년 3월 14일 경찰에 체포되는 것도 모자라, 같은 해에 경찰로 가장하여 현금이나 카드를 갈취한 혐의로 5월 30일에 다시 경찰에 체포되었고 끝내 9월 24일 성매매 혐의, 사기 혐의에 대해 고베 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6개월이 선고되며 빨간줄이 그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실 야구 선수로서의 재기 자체도 본인의 불성실함으로 무산시켰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멘탈레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시즌 후 FA를 선언해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에서 오릭스로 이적했으나 크게 활약하진 못하고 2018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이후 라쿠텐 코치를 거쳐 오릭스에 코치로 복귀했다가 2024년 시즌 종료 후 사임.
7. 외야수
- 나가이케 아츠시[14] (1966 - 1979)
-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 시대의 한큐 브레이브스를 상징하는 프랜차이즈 스타로 홈런왕 3회, 타점왕 2회, MVP 2회를 수상하며 한큐의 전성기를 이끈 강타자였다. 공교롭게도 1975년 이후 부상으로 인한 급격한 기량 감퇴로 인하여 통산 1500안타에도 미달한 채 은퇴했지만, 그래도 통산 338홈런 969타점의 뛰어난 기록을 남기며 현재도 한큐 브레이브스 시대의 프랜차이즈 스타 강타자로 존경받고 있다.
- 후쿠모토 유타카 (1969 - 1988)
- 리키 헨더슨이 경신하기 전까지 통산 1065도루로 통산 도루 세계기록 보유자였다. 물론 현재도 일본 기록 보유자. 1시즌 106도루를 기록한 적이 있는 세기의 도루왕.
- 미노다 코지(1976 - 1987)
- 30-30 클럽 2회 가입자.(1980, 1983) 1983년은 3할 타율까지 찍으면서 '트리플 스리'도 달성했다. 1980년에는 그보다 더 진기한 기록인 30홈런-30도루-30희생타(...)를 기록하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선수. 쉽게 설명하자면 박건우 상위호환이 되시것다. 하지만 85시즌 헤드샷을 당한 직후 노쇠화기미가 보인데다가, 어느 프런트 직원의 설사 유망주 발언으로[15] 프런트와도 불화가 심해지면서 87시즌 직후 본인이 트레이드 요구했던 고향팀 히로시마 도요 카프가 아닌 저 멀리 도쿄에 있는 요미우리로 쫓겨났다. 요미우리에선 1989년 일본시리즈 역스윕때 4차전에서 포문을 여는 홈주루를 시전하고 5~7차전도 4차전처럼 1번타자로 선발출장하면서 고향팀에게 털렸던 1984년 일본시리즈의 한을 풀었다. 담해 은퇴하고 코치까지 지냈다.
- 코바야시 신야 (1978 - 1987)
- 야마모리 마사후미 (1979 - 1994)
- 이시미네 가즈히코 (1979 - 1993)
- 통산 269홈런, 베스트나인 3회(외야수 1회 - 1983, 지명타자 2회 - 1986-87), 1990년 타점왕 등의 기록을 남긴 우타 거포로 오키나와 출신으로서는 최고의 성적을 남긴 타자다. 2014년 고양 원더스, 2015년 kt wiz의 타격코치를 지냈다.
-
쿠마노 테루미츠 (1985 - 1991, 1994)
1985년 신인왕. 하지만 이쪽도 전년도 신인왕이었던 같은 팀의 후지타 히로마사처럼 그 해 이후론 신인왕 시즌만큼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 채 1992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되었다가 1994년 복귀해 그 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 모토니시 아츠히로 (1987 - 1997)
- 후지이 야스오 (1987 - 2002)
- 카도타 히로미츠 (1989 - 1990)
- 타구치 소 (1992 - 2001, 2010 - 2011)
- 스즈키 이치로 (1992 - 2000)
- 타니 요시토모 (1997 - 2006, 2014 - 2015)
- 히라노와 함께 팀 최후의 오릭스 블루웨이브 출신 선수 중 하나. 암흑기 블루웨이브의 자존심과도 같았던 선수로 정교한 타격과 빠른 발을 앞세워 전성기 리그 정상급 외야수로 활약했다. 2000안타를 얼마 안 남기고 요미우리에서 기량저하로 방출된 뒤 친정팀에서 2000안타를 노렸으나 노쇠화가 완연한 탓에 이 기록을 달성하지 못하고 히라노와 같은 해 은퇴했다.
- 하비 풀리엄 (1998 - 1999)
- 로베르토 페레즈 (1999)
- 아이카와 료타 (1999 - 2010)
- 하야카와 다이스케 (2002 - 2006)
- 무라마츠 아리히토 (2004 - 2008)
- 블루웨이브 최후의 FA 영입 선수.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에서 도루왕을 1차례 차지한 준족의 외야수였다.
- 사카구치 토모타카 (2005 - 2015)
- 팀 최후의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 타자.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 연속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빠른 발과 정교한 타격을 자랑했던 교타자로 오이시 다이지로-오카다 아키노부 감독 시기의 부동의 리드오프 중견수로 활약했다. 하지만 2012년부터 타격 침체와 잦은 부상 등으로 성적이 저하되면서 2015년 시즌 종료 후 방출되었고, 이후 이적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리드오프의 한 축을 맡아 재기에 성공하며 제2의 전성기를 열어가다 2022년 은퇴했다.
- 시모야마 신지 (2005 - 2011)
- 카림 가르시아 (2005 - 2006)
- 터피 로즈 (2007 - 2009)
- 오제 히로유키 (2008 - 2009)
- 오릭스 버팔로즈 시즌 항목에 언급된 2010년 스프링캠프 기간 도중 사망한 젊은 외야수. 세상을 떠난 시기가 2010년 시즌 전이라 활동 기간을 2009년까지로 서술했다.
- 오무라 나오유키 (2009 - 2010)
- 스테판 로메로 (2017 - 2019, 2021)
- 2017년에 입단한 용병으로 2017년에는 잘 했으나 2018년부터 2019년 시즌 초반까지 엄청난 부진에 빠져있었다. 2019년 시즌 중반부터 미친듯이 몰아치면서 완벽한 먹튀였던 2018년과는 달리 2019년에는 꽤 괜찮은 성적을 냈지만 결국 방출. 이것은 방출이라기 보다는 로메로 대리인의 연봉협상 실패라고 보는 게 맞다. 이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가 주워가면서 2020년에도 일본에서 뛰게 되었다. 2021년 친정팀에 복귀했으나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시즌 도중 방출.
-
조이 메네세스(2019) - 2018년 트리플 A IL 홈런왕, 타격왕. 사실 트리플A 첫 시즌이 2018년이라 존버하면 메이저리그 콜업 가능성은 꽤 높았음에도 불구하고[16] 2019시즌에 바로 일본행을 택한 케이스. 그러나 2019년 5월부터는 부진에 빠져 2군에 가 있었다가, 금지약물 복용 사실이 적발되어 6월에 퇴출되었다.
- 마츠이 유스케 (2019 - 2020)
- 니시우라 하야토 (2018 - 2021)
- 2018년 드래프트 6순위로 입단한 수비가 강점인 고졸 외야 유망주로, 2020년 11월 경기 도중 통증을 느껴 병원 검진 결과 왼쪽 대퇴골 골절 진단을 받았는데, 추가 정밀 검진 결과 난치병인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17] 판정을 받은 뒤 2020년 12월에 왼쪽 대퇴골두, 2021년 2월에 오른쪽 대퇴골두 이식 수술을 받고 당해 육성선수로 전환되어 재활에 매진하다가 결국 버티지 못하고 2021 시즌 막바지 즈음에 1999년생(만 21세)이라는 한창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했다. 2022년 1월에 야구 유튜브 qooninTV를 통해 오랜만에 그라운드에 복귀하여 연식야구 데뷔전을 가졌다. 스윙에는 크게 문제가 없을 만큼 상태는 갈수록 호전되는 모양.[18]
8.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하세가와 시게토시 ( 애너하임 에인절스 - 시애틀 매리너스)
- 기다 마사오 (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 오릭스 복귀 -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 시애틀 매리너스 - 일본 재복귀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 -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 이시카와 밀리온스타즈(독립리그))
- 스즈키 이치로 ( 시애틀 매리너스 - 뉴욕 양키스 - 마이애미 말린스 - 시애틀 매리너스)[19]
- 다구치 소 (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 필라델피아 필리스 - 시카고 컵스 - 2010년 오릭스로 복귀, 2012년 시즌 후 은퇴)
- 노무라 다카히토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밀워키 브루어스 - 닛폰햄 파이터즈 - 2003년 시즌 후 은퇴)
- 구대성 ( 뉴욕 메츠 - KBO 한화 이글스)
- 이대호 (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시애틀 매리너스 - KBO 롯데 자이언츠)
- 히라노 요시히사 (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 - 시애틀 매리너스)
- 요시다 마사타카 ( 보스턴 레드삭스)
- 야마모토 요시노부 ( LA 다저스)
[1]
정확히는 최다탈삼진을 1956~57년 2년 연속으로 기록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엔 탈삼진 타이틀을 시상하지 않았다.
[2]
다만 카지모토 본인이 타이틀에 욕심을 가지는 성격이 아니었던 점도 있었다. 실제로 시즌 막판에 감독이 카지모토에게 다승왕을 주기 위해 이기는 경기에서 구원 등판을 시키려고 했으나 "남의 승리를 가로채는 짓은 참아 주십시오"라고 등판을 거부한 적도 있었고, 본인이 승리투수가 되는 것에도 별 집착이 없었기 때문에 은퇴 시즌인 1973년에는 자신의 통산 승리가 통산 패전을 웃돌 수 있게 마찬가지로 이기는 경기에서 구원 등판을 시키려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제안에도 이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선 카지모토 본인이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0대 0으로 이기는 것보다는 0대 1로 지는 게 좋다. 승패보다는 충실한 투구를 했는지의 여부가 나한테는 더 중요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현역 시절이나 지도자 시절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경쟁 상대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투수가 아니라
부처님 같은 성격이다"하고 했을 정도(...)
[3]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패배해 킨테츠의 첫 리그 우승을 허용했다.
[4]
애니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보면
타키가와 크리스 유우의 아버지가 있는데 그 분 모델이 이 분으로 추정된다. 현역시절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낸 후 은퇴 뒤에 연기나 예능계에서 활약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5]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그 선수가 맞다. 심지어 한화 시절보다 훨씬 잘 던졌다!
[6]
다만 판정 자체는 옳았다. 다음 날 신문에 도이 쇼조의 발이
홈에 닿은 사진이 올라온 것.
[7]
오 본인의 언급에 의하면
일본시리즈에서 자신이 타석에 설 때마다 나카자와가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상한 구호를 외치는 등의 기행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통에 집중을 하기 힘들어서 계속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8]
이쪽은
파나소닉(당시엔 마츠시타) 사회인 야구팀 동기이기도 하다. 후쿠모토는 아예 카토 덕에 프로 데뷔가 가능했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
[9]
입단 당시 히라노는 자유획득제도(상위지명 후보가 희망 팀 선언 후 우선 교섭을 하던 제도로, 이전의 역지명 제도와 비슷하다. 2006년 폐지)로 입단한 사실상 1라운더였고, 고토는 같은 해에 10라운더로 입단한 하위픽이었다. 하지만 입단 후 히라노가 못한 건 아니지만 고토가 예상 외로 잘하는 바람에 거의 동급의 선수로 평가 받게 되었다.
[10]
아오키 노리치카에게 밀려 수위타자 수상엔 실패했다.
[11]
메이저리그 22라운드 지명자로 지명 때부터 동생이랑 사촌동생보다 기대치가 낮았고 트리플 A가 최고기록이었다. 2015년에는 멕시칸리그에 입단하였으나 두 달 만에 방출.
[12]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3라운드 출신으로 10년 동안 724경기에 출장. 일가들 중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13]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8라운드 지명. 현재 2년차인데 싱글 A에서 멘도사 라인의 타격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 엘리 마레로와는 한글 표기법은 같지만 알파벳이 달라서 주니어가 아니다.
[14]
1978년까진
나가이케 토쿠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79년부터 개명.
[15]
경기 관련 문제 때문에 경기 직전 설사를 해서 화장실로 달려갔던 경우가 많았다.
[16]
그러나 성장세가 느려서 유망주라고 하기엔 나이가 꽤 많았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콜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뭐 약쟁이로 밝혀진 지금이야...
[17]
KBO 리그에서 뛰었던 "캐넌"
김재현이 앓았던 그 병이 맞다.
[18]
경기에서도 4타석 3타수 2안타 1볼넷으로 프로출신 어디 안 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뛰는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수비를 할 수 없는 탓에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출루시에는 특별규정을 적용해 주루 플레이만 대신 해주는 대주자를 따로 두고 경기를 치렀다. 어느정도로 한계가 있었냐면 4번째 타석에선 우익수 키를 넘기는 큰 타구를 치고도 1루에 겨우 도착하는 수준이었다.
해당 영상
[19]
2016년 기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현역 선수였고 2019년 은퇴하며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모든 선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