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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릭스 버팔로즈/역대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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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e751f><colcolor=#ffffff> 모기업 관련 정보 <colcolor=#000019,#fff>모기업 파일:오릭스 로고.svg 오릭스그룹
일본시리즈 우승
★★★★★
1975 · 1976 · 1977 · 1996 · 2022
리그 우승
(15회)
1967 · 1968 · 1969 · 1971 · 1972 · 1975 · 1976 · 1977 · 1978 · 1984 · 1995 · 1996 · 2021 · 2022 · 2023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9회)
1973후기 · 1974전기 · 1975전기 · 1976전후기 · 1977전기 · 1978전후기 · 1979후기
클라이맥스 시리즈 2008 · 2014 · 2021 · 2022 · 2023
시즌 문서 2019 · 2020 · 2021 · 2022 · 2023 · 2024
현역 선수 경력 모리 토모야/선수 경력 · 니시카와 료마/선수 경력 · 야마자키 소이치로/선수 경력
경기장 1군 교세라 돔 오사카 · 홋토못토 필드 고베 · 2군 마이시마 베이스볼 스타디움 · 지방 홈구장 와카사 스타디움 교토
홈 중계 채널 파일:J SPORTS 3 로고.svg
주요 인물 감독 키시다 마모루 · 선수회장 스기모토 유타로 · 주장 공석
구단 상세 정보 역사 ·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버팔로 벨 · 10.2 결전 · 칠석의 비극 · 오릭스-라쿠텐 분배 드래프트
틀 문서
코칭스태프 투수 포수 내야수 외야수 육성선수 역대 감독 | 역대 1라운더(한큐-오릭스) | 역대 1라운더(킨테츠)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한큐-오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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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영구결번3. 준영구결번4. 투수5. 포수6. 내야수7. 외야수8.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1. 개요

오릭스 버팔로즈의 역대 선수들에 대해 서술한 문서.

2. 영구결번

3. 준영구결번

4. 투수

5. 포수

6. 내야수

7. 외야수

8.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1] 정확히는 최다탈삼진을 1956~57년 2년 연속으로 기록한 적이 있었으나, 당시엔 탈삼진 타이틀을 시상하지 않았다. [2] 다만 카지모토 본인이 타이틀에 욕심을 가지는 성격이 아니었던 점도 있었다. 실제로 시즌 막판에 감독이 카지모토에게 다승왕을 주기 위해 이기는 경기에서 구원 등판을 시키려고 했으나 "남의 승리를 가로채는 짓은 참아 주십시오"라고 등판을 거부한 적도 있었고, 본인이 승리투수가 되는 것에도 별 집착이 없었기 때문에 은퇴 시즌인 1973년에는 자신의 통산 승리가 통산 패전을 웃돌 수 있게 마찬가지로 이기는 경기에서 구원 등판을 시키려는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의 제안에도 이를 거부한 적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선 카지모토 본인이 어느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10대 0으로 이기는 것보다는 0대 1로 지는 게 좋다. 승패보다는 충실한 투구를 했는지의 여부가 나한테는 더 중요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성격 때문인지 현역 시절이나 지도자 시절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많이 존경을 받았다. 심지어 경쟁 상대였던 노무라 카츠야는 "투수가 아니라 부처님 같은 성격이다"하고 했을 정도(...) [3]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킨테츠 버팔로즈에게 패배해 킨테츠의 첫 리그 우승을 허용했다. [4] 애니 다이아몬드 에이스를 보면 타키가와 크리스 유우의 아버지가 있는데 그 분 모델이 이 분으로 추정된다. 현역시절 일본에서 좋은 성적을 낸 후 은퇴 뒤에 연기나 예능계에서 활약했다는 점이 유사하다. [5]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그 선수가 맞다. 심지어 한화 시절보다 훨씬 잘 던졌다! [6] 다만 판정 자체는 옳았다. 다음 날 신문에 도이 쇼조의 발이 에 닿은 사진이 올라온 것. [7] 오 본인의 언급에 의하면 일본시리즈에서 자신이 타석에 설 때마다 나카자와가 뜬금없는 타이밍에 이상한 구호를 외치는 등의 기행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통에 집중을 하기 힘들어서 계속 흔들리게 되었다고 한다. [8] 이쪽은 파나소닉(당시엔 마츠시타) 사회인 야구팀 동기이기도 하다. 후쿠모토는 아예 카토 덕에 프로 데뷔가 가능했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 [9] 입단 당시 히라노는 자유획득제도(상위지명 후보가 희망 팀 선언 후 우선 교섭을 하던 제도로, 이전의 역지명 제도와 비슷하다. 2006년 폐지)로 입단한 사실상 1라운더였고, 고토는 같은 해에 10라운더로 입단한 하위픽이었다. 하지만 입단 후 히라노가 못한 건 아니지만 고토가 예상 외로 잘하는 바람에 거의 동급의 선수로 평가 받게 되었다. [10] 아오키 노리치카에게 밀려 수위타자 수상엔 실패했다. [11] 메이저리그 22라운드 지명자로 지명 때부터 동생이랑 사촌동생보다 기대치가 낮았고 트리플 A가 최고기록이었다. 2015년에는 멕시칸리그에 입단하였으나 두 달 만에 방출. [12]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3라운드 출신으로 10년 동안 724경기에 출장. 일가들 중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냈다. [13] 메이저리그 드래프트 8라운드 지명. 현재 2년차인데 싱글 A에서 멘도사 라인의 타격을 보여주고 있다. 아버지 엘리 마레로와는 한글 표기법은 같지만 알파벳이 달라서 주니어가 아니다. [14] 1978년까진 나가이케 토쿠지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79년부터 개명. [15] 경기 관련 문제 때문에 경기 직전 설사를 해서 화장실로 달려갔던 경우가 많았다. [16] 그러나 성장세가 느려서 유망주라고 하기엔 나이가 꽤 많았다. 그래서 메이저리그 콜업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의견도 있었다. 뭐 약쟁이로 밝혀진 지금이야... [17] KBO 리그에서 뛰었던 "캐넌" 김재현이 앓았던 그 병이 맞다. [18] 경기에서도 4타석 3타수 2안타 1볼넷으로 프로출신 어디 안 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뛰는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수비를 할 수 없는 탓에 지명타자로 출전했고 출루시에는 특별규정을 적용해 주루 플레이만 대신 해주는 대주자를 따로 두고 경기를 치렀다. 어느정도로 한계가 있었냐면 4번째 타석에선 우익수 키를 넘기는 큰 타구를 치고도 1루에 겨우 도착하는 수준이었다. 해당 영상 [19] 2016년 기준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마지막 현역 선수였고 2019년 은퇴하며 오릭스 블루웨이브의 모든 선수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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