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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인 이씨(영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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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고종의 후궁
귀인 이씨 | 貴人 李氏
<colbgcolor=#403F95><colcolor=#ffd400>
조선 고종의 후궁
파일:서삼릉후궁묘역.jpg
서삼릉 빈·귀인 묘역 전경
출생 1843년 3월 14일[1]
사망 1928년 12월 17일[2] (향년 85세)
경기도 경성부
(現 서울특별시)
능묘 귀인이씨지묘(貴人李氏之墓)
재위기간 조선 궁인
1868년 이전 ~ 1880년 1월 29일
조선 숙원
1880년 1월 29일 ~ 1895년 1월 12일
대조선국 숙원
1895년 1월 12일 ~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 숙원
1897년 10월 12일 ~ 1906년 5월 27일
대한제국 귀인
1906년 5월 27일 ~ 1928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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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403F95><colcolor=#ffd400> 성씨 (李)
배우자 고종 태황제
자녀 슬하 1남
장남 - 완친왕(完親王, 1868 ~ 1880)
봉작 궁인(宮人) → 숙원(淑媛) → 귀인(貴人)
당호 영보당(永保堂)
}}}}}}}}} ||
1. 개요2. 생애3.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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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고종 후궁. 고종의 서장자이자 훗날 완친왕으로 추증되는 완화군 이선의 어머니다. 제2의 희빈 장씨, 숙빈 최씨, 영빈 이씨를 꿈꾸었으나 결국엔 화무십일홍의 삶을 살다 간 인물.

명성황후 순종을 낳게 되면서 완화군과 함께 출궁당하기 전까진 희빈 장씨와 행보가 비슷했다. 왕비가 들어오기 전부터 총애를 받던 연상의 궁녀, 왕비를 제치고 먼저 왕자를 낳은 점, 심지어 우연히도 둘 다 왕비가 여흥 민씨 집안 출신이었다. 다만 중인에 소문난 거부 집안의 딸이던 장씨와는 다르게, 이씨는 아예 평민 출신이다.

2. 생애

본래 궁녀였는데 고종의 눈에 들어 승은 상궁이 되었다. 승은을 입을 당시 고종은 명성황후와 혼례를 올리기 전인 15세였고, 그녀는 9살이나 많은 24세였다. 명성황후와 가례를 올린 첫날부터 고종은 왕비의 처소엔 들지 않고 귀인 이씨의 처소에 들만큼 이씨를 총애했다고 한다. 1868년 운현궁에서 고종의 첫 아들을 출산하는데, 이 아들이 바로 고종의 장자인 완화군이다.
전교하기를, "오늘 진시(辰時)에 궁인 이씨가 아들을 낳았다. 산모를 보살펴주는 등의 일을 운현궁(雲峴宮)에서 대령하라." 하였다.
고종실록》 고종 5년 윤4월 10일
그러나 아들을 낳고도 이씨는 정식 후궁으로서의 봉작을 곧바로 받지 못했다. 1871년 왕녀를 낳았으나, 이때도 후궁 봉작을 받지 못하였으며 아들도 1876년(고종 13년)에 8세가 되어서야 군으로 책봉받았고, 본인은 1878년(고종 15년)에 관례를 치를 때까지도 봉작 받지 못했다.

1880년(고종 17년)에야 비로소 최하위 말단 품계인 숙원에 책봉되었는데,[3] 불행히도 그해에 완화군이 13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남은 평생을 홀로 보냈다. 비록 신뢰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 매천야록》에서는 명성황후가 한때 원자로 거론되었던 완화군을 죽였는데, 일설에는 젓갈항아리에 빠트려 죽였다고 하고 또는 방망이로 때려죽였다고 하는 말도 있었다고 기록했다. 또 다른 야사에는 명성황후가 홍역을 앓고 있는 완화군에게 인삼탕을 보내 열이 오르게 하여 죽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한 야사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당대의 신문기사를 참고하면 "민비의 미워하심을 받아" 같은 언급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너나 할 것 없이 명성황후를 범인으로 의심한 듯 하다.[4]

1906년(고종 43년)에 귀인으로 책봉받았고, 1928년 12월 17일에 사망했다.
李貴人別世
순종의형님되시는이를나흐신 완왕궁 리귀인(完王宮 李貴人)은 팔십세의로령으로 지난십칠일 정오에 별세하얏더라

(현대어 버전) 이귀인 별세
순종의 형님 되시는 이를 낳으신 완왕궁 이귀인이 80세[5]의 고령으로 지난 17일 정오에 별세하였다.
1928년 12월 19일자 〈동아일보〉 기사
현재 묘소는 서삼릉 귀인 묘역에 있다.

3. 대중 매체


[1] 음력 2월 14일. [2]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 나오며, 음력 기준으로는 11월 6일이다. [3] 고종실록》 17권, 고종 17년 1월 29일 정유 1번째 기사. # [4] 매일신보〉 1913년 12월 7일자 기사에는 "이태왕전하의 왕자를 탄생하매 당시에 외외한 세력이 날아가는 새도 능히 떨어칠 민비(閔妃)의 미워하심을 받아 모자를 한가지로 궐내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라고 기재되어 있다. [5] 실제로는 85세였다. [6] 애초에 간택후궁이 아닌 궁녀 출신이라 뒷배를 봐줄 친정세력도 없었고, 훗날 엄귀비의 황후 책봉이 논의된 것을 보면 조선 왕실 말기에선 아예 불가능한 얘기는 아니었으나, 결정적으로 이미 왕비 소생의 적자가 태어난 마당에 광해군 영창대군 정도의 나이차가 아니면 불가능에 가까운 얘기였다. [7] 처음에는 "완화군이 혼인도 하지 않았는데 궐 밖에서 살라고 하는 게 말이 되냐"고 항의했다. 도저히 방법이 없자 "그럼 모자가 떨어지지 않고 같이 살게 해달라"고 명성황후에게 울고 빌어서 완화군과 같이 살게 되었다. [8] 그리고 순종 7년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순종 재위 햇수로 4년째인( 융희 4년) 1910년에 나라가 망했기 때문이다. 저기서 말하는 순종 7년은 1914년으로, 이왕 시절 순종의 행적을 적은 《 조선왕조실록 - 순종실록부록》을 보면 1914년을 순종 7년으로 표기했다. # 그때 사망해 완왕 묘역에 묻힌 귀인 이씨가 있긴 한데, 영보당이 아니라 내안당 이씨라는 또 다른 후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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