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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03 23:26:54

안내양

여차장에서 넘어옴
1. 개요2. 버스 여차장
2.1. 고속 및 관광버스 안내양2.2. 해외 사례
3. 엘리베이터4. 미디어에서

1. 개요

案內孃

서비스업에서 손님을 안내하는 여성 직원을 말한다.

2. 버스 여차장[1]

파일:안내양.jpg



1980년대 초의 시내버스 승객과 버스 여차장의 근무 장면. 명동에서 출발해 서울역과 신촌을 거쳐 김포공항을 오가던 김포교통 소속 42번 버스의 모습이 보인다.

흔히 안내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직업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61년 6월 17일, 김광옥 교통부장관이 여차장 제도를 도입하면서 시작되었고, 1980년대 말까지 존재했던 직업이다. 1982년 "시민자율버스" 운행제의 실시와 더불어 정류장 자동 안내방송 하차벨(콜부저), 자동문[2] 등의 자동화 시스템이 도입되면서 1983년부터 안내양은 점차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고, 1989년 12월 30일 자로 자동차운수사업법 제33조 6항의 "대통령령이 정하는 여객자동차운송사업자는 교통부 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안내원을 승무하게 하여야 한다"는 법 조문이 삭제되면서 1990년부터 모든 지역에서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었다. 마지막 안내양은 서울 김포교통에 있던 38명이라고 한다.

버스 안내양의 역할은 버스에서 승객에게 하차지를 안내하고 버스 요금을 받으며 출입문을 열고 닫는 역할이었다. 물론 남자 차장도 있었으나, 국내에서는 흔치 않았다. 안내양, 여차장이라는 명칭이 붙은 이유가 이 때문이다. 정류장에 가까워 오면 항상 "다음 정류장은 ○○○입니다. 내리실 분은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을 하고, 출발하기 전엔 버스 옆 차체를 탕탕 두드리며 "오라이~"(←オーライ; all right)라고 외쳤다. 푸시맨 역할도 했는데, 만원버스에 사람들을 밀어넣고서 출입문에 매달려 다니다 추락하여 사망하거나 부상을 입는 사고가 안내양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곤 했다.

당시 버스 기사나 승객에게 많은 편의성을 제공해 주던 직업이었다. 현대의 버스 기사는 운전부터 승객 승/하차 확인까지 본인이 일일이 다 맡아야 하지만, 안내양이 있으면 이런 관리적인 부분들은 안내양이 보조해주기에 오로지 마음 편히 운전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현재 버스는 문이 두 개이고 타는 문과 내리는 문이 따로 구분되어 있는데, 당시는 문이 하나였거나 설령 두 개일지라도 승차 전용 입구에서 안내양이 돈을 받고서 태워 줬기 때문에 요금 징수를 기사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안내양 폐지 직후에는 버스 운전기사들이 적응을 힘들어하며 피로를 하소연하는 일이 많았다. 승객에게는 안전한 하차를 보장해 줬는데 아무리 출입문에 거울과 중문 안전 센서가 있어도 인간이 육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는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객이 내리기도 전에 출입문 막대 개폐 레버부터 내려 문부터 닫고 출발하려는 막장 기사들도 있지만, 이 때는 안내양이 상술된 "탁탁 오라이~"를 하기 전에는 절대로 냅다 문 닫고 출발하지 않았다.

제복은 위 영상에서 보듯 세일러복 형태인 것, 단색에 흰 칼라를 달아 여학생 교복과 비슷하지만 바지를 입는 것 등이 있었다. 색상은 진한 감색 또는 연푸른색, 회색 등 회사마다 케바케였으며, 원색 도는 근무복과 같은 옷감의 베레모, 빵모자를 쓰는 경우가 많았다. 옷감은 대개 저렴한 합성섬유 혼방이었다. 헤어스타일은 풀어헤치는 긴생머리는 대개 금지였고, 단발을 하거나, 정 길다면 땋아서 말거나 꽁지머리 혹은 양갈래 머리를 하기도 했다. 대략 당시의 여고생 두발, 복장 규정과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어차피 나이대도 여고생들과 별 차이도 나지 않았으며 그리고 귀걸이, 목걸이, 반지, 머리핀 등의 장신구, 진한 화장은 대부분 금지였다. 어차피 당시 버스는 냉난방이 없거나 부실했고, 몸을 쓰는 열악한 노동 환경 탓에 화장을 해 봐야 유지도 안 되었고, 귀걸이 등 장신구는 어딘가에 걸려서 다칠 수 있기에 위험했다. 눈썹도 립글로스 바르는 정도만 허용되었다. 그럼에도 예쁜 나이대이다 보니 종종 미모의 안내양도 있어서 그 근무 시간대에 맞춰 일부러 버스를 타는 남학생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겨울에도 따뜻한 장갑을 낄 수가 없었다. 잔돈을 받고 거스름돈을 세어 줘야 했고, 버스표( 토큰)로 바뀐 뒤에도 세는 건 같았던 데다가 장갑을 끼면 문 여닫는 핸들을 잡기가 불편하며, 버스 외부의 손잡이에서 손이 미끄러져 차에서 떨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장갑을 끼었다 벗었다 하거나 돈(버스표)를 받는 손(주로 왼손)만 얇은 장갑을 끼고, 나머지 한 손은 맨손으로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한 손에만 장갑을 낀 모습은 위 동영상 30초 부근에 나온다.

1960/70년대 안내양은 여러모로 애환이 서린 직업이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여성 인권은 낮았고, 여성들의 교육 수준이나 이에 대한 사회 인식은 매우 미흡했으며, 이 시절 여성이 사회에 진출해 돈벌이를 할 수 있는 길이라곤 극소수 전문직 종사자를 제외하면 안내양, 식모, 여공 정도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특별한 기술과 전공과 자격증이 필요없고, 초졸 정도의 저학력으로도 가능하며, 돈 말고도 숙식을 별도로 제공받았다는 점. 이 때문에 가족들의 생활비나 형제들의 대학 학비를 보태기 위해 시골에서 상경한 아가씨들이 적은 연봉과 빡빡한 노동 시간에 시달려 가며 일했다. 요금함도 없었던 시절이라서 버스 요금을 받으며 현금을 손수 징수하다 보니 계산이 안 맞으면 돈을 먹튀했거나 횡령했다는 혐의(속칭 삥땅)를 뒤집어 쓰기 쉬웠고, 이 때문에 버스 회사 사장이나 직원에게 알몸 수색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 했었다. 승객에게 성추행이나 성희롱[3], 심하면 물리적 폭행을 당하거나 욕설이나 험담 같은 폭언을 당해도[4] 누구에게도 하소연 못하는 정도는 그냥 일상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승차 거부 등의 파업/농성이 잦았는데,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에서 '안내양 농성' 등을 치면 그 사례가 꽤 많이 나온다. 이 기사를 참조하면 당시 버스 안내양의 근무 환경이 어떤 수준이었는지 가늠할 수 있다. 1980년대 안내양의 애환을 그린 "기름밥"이라는 실화를 근거로 한 소설이 있었는데, TV 드라마로 각색되어 젊은 시절 김보연이 주연으로 방송된 적도 있다. 드라마판에서는 내용이 삭제되었지만 알몸 수색은 기본이고 안내양을 관리하는 젊은 중간 관리자의 별명이 "진시황"일 정도로 여러 소녀들을 희롱했다.

안내양이 하던 역할은 현재는 전부 기계화가 되었다. 수동문은 전부 기사가 스위치로 조작하는 자동문으로 바뀌었고, 요금 징수는 요금함 및 교통카드 단말기가 맡으며 정류장 안내는 방송으로 하고 하차 요청은 벨이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게 1980년대를 끝으로 안내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던 2006년 충청남도 태안군 농어촌버스에서 안내양을 부활시켰다. 주민과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으며[5] 뒤이어 2010년에는 충청남도 보령시에서도 안내양을 부활시킨 ‘행복버스’를 도입했다. 옛날과는 업무 형태가 바뀌어서 특히 농어촌 지역에 많은 고령 승객의 승하차를 보조하고, 동네 시장에 농작물을 팔러 나가는 노인들의 짐 옮기기를 돕고 있다. 그리고 노인 못지 않게 농어촌에 많이 위치한 초등학교엔 학생들 거주지가 매우 넓게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교육청에서 지원하는 통학버스엔 어린이들의 동승 보호자의 개념으로 특별히 어른 1명이 탑승하게 된다. 그리고 2017년 도로교통법 제53조 제3항 개정에 따라 2017.1.29(일)부터 ​“15인승 이하 통학버스에도 동승 보호자를 의무적으로 탑승”해야 하는 제도가 시행되었다. 동승 보호자가 되기 위해서는 소정의 안전 교육을 이수해야 하며, 성범죄 전과도 없어야 한다.

2.1. 고속 및 관광버스 안내양

관광, 고속버스에도 안내양이 있었다. 보통 주의사항이나 여러가지 안내를 해주기도 했고, 음료수 등을 직접 나눠주기도 했다. 이들은 시내버스 안내양과 이미지가 완전히 정반대였다. 복장부터가 미니스커트 등 시내버스 안내양보다 훨씬 세련된 제복을 입었다. 당시 고속버스 안내양은 땅 위의 스튜어디스로 불리웠고 많은 여성들이 선망하는 직종이었다. 그만큼 선발 기준도 매우 엄격했으며 고졸 이상 학력[6]에 외모, 신장 160cm 이상[7] 등이 요구되었다. 동양고속에서는 미스 동양고속이라는 미인대회로도 승무원을 선발하였을 정도였다.[8] 대략 1986년경까지 존재했다가 1987~1989년 사이에 인건비 문제로 폐지 절차를 밟았고 1992년 10월 우등고속이 도입되면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와 함께 음료수 서비스는 사라졌고, 주의사항 및 안내는 방송으로 대체되었다.

관광버스에선 아무래도 가이드 등 안내양이 할 역할이 더 있었기 때문에 2000년대 초까지도 볼 수 있었다.

스튜어디스처럼 사고가 났을 때 아주 위험한 직종이기도 하였다. 자리는 승객과 달리 입구와 운전석 사이에 있는 접이식 간이 의자였는데, 이게 안전벨트가 있긴 하였지만 부실했고 정면 충돌시에 바로 밀리는 위치인 데다가, 운전사는 충돌 또는 추돌 직전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본능적으로 왼편으로 꺾게 되는 일아 많아 바로 처박게 되는 쪽이 안내양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그 위험성이 알려져서 자리가 문 옆 맨 앞자리, 즉 바로 앞에 차량용 냉/온장고가 있는 자리로 바뀌기도 했는데, 이후 안내양이란 직종이 사라져서 의미 없이 되고 말았다.[9]

요새는 고속버스 모니터에 출발할 때 나온다.

2.2. 해외 사례

인건비가 비싼 선진국에서는 보기 드문데,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이미 1970년대부터 인건비가 상승하고 버스들에 (반)자동안내방송송출기, 운임징수기와 같은 여러 운행보조장비가 장착되면서 버스 안내양이 사라졌다.

인건비가 비싸지 않은 나라들에는 버스 안내양이나 버스 차장 같은 직업이 남아 있는 곳이 은근히 많다. 가령 중동엔 웬만한 시내버스나 시외버스에 차장이 딸려 있는데, 물론 여성이 험한 일 하기를 꺼리는 사회분위기상 차장은 거의 다 남자긴 하지만 하는 일은 비슷하다. 요금을 받아주고, 길을 안내해주고, 시외버스에선 물이나 주스나 차같은 것도 서비스한다. 차장이 존재하는 버스의 기사는 손님에게 전혀 신경쓰지 않고 운전에만 집중한다. 그 외 동남아시아에도 안내양이 남아 있다. 파키스탄의 삼미대우고속

대만에도 있었다. 미국의 한 중국어 교재를 보면 타이베이 시먼딩에서 시내버스를 잘못 타서 다시 안내를 받는 회화 내용이 있었는데, 여기서 버스 차장이 나온다. 중국에는 현재도 있으나 점차 없어져가는 추세다. 고수요 굴절버스 노선 같은 일부 노선에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기사 혼자 승무하는 시내버스가 늘어나고 있다. 단 남성 보안요원은 심야버스를 제외한 전 노선에 있다. 베이징 버스 문서 참고.

그러나 미국이나 멕시코의 초장거리 대륙횡단버스에선 운전기사의 근무가 끝나면 교대해 운전할 운전기사가 이 역할을 하는경우도 있다. 이 버스들엔 대륙횡단노선 특성상 간단한 음료와 심지어 식사, 차내 화장실까지 있기 때문에 승객에게 서비스를 해줄 인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3. 엘리베이터

엘리베이터 안내양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사실 이 '엘리베이터 걸'은 서양에서 먼저 나온 직업이며 엘리베이터 보이, 즉 남자도 이 일을 맡았다. 코넬 울리치가 쓴 1930년대 소설을 봐도 엘리베이터 보이라고 하여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객이 가는 층수를 눌러주고 엘리베이터 관리하는 직업이 나온다. 당장 영화 타이타닉을 봐도 타이타닉 호 선실 엘리베이터에서도 엘리베이터 보이가 나오는 장면이 있으며, 1947년의 로스앤젤레스를 배경으로 한 실사/애니메이션 하이브리드 영화 누가 로져 래빗을 모함했나에서도 드루피 캐릭터를 엘리베이터 보이로 묘사했다( #). 중국에서는 중상급 정도 규모의 아파트가 시설이나 편의성은 한국의 임대 아파트보다 못한 경우가 많지만 엘리베이터 층수를 묻고 눌러주는 안내양만큼은 한 명씩 꼭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웬만한 금수저 동네나 호텔이 아닌 곳에서는 관리비 절감을 이유로 없어지는 추세다.[10] 한국에서도 주거용 주택에는 없었지만 백화점 같은 상업용 건물에는 1990년대까지 엘레베이터 안내양이 있는 곳이 꽤 있었다. 층수를 눌러주는 것은 물론 몇 층에 뭐가 있는지까지 전부 알고 있어서 사려고 하는 품목이나 브랜드를 물어보면 어디로 가면 되는지 안내해줬다고 한다. 그래서 1990년대 만화를 봐도 엘리베이터 걸이라고 부르면서 백화점이나 고급 빌딩에서 이런 직업이 나온다.

2018년 기준으로 동대문 원단시장에 아직도 남아 있다. 이쪽은 워낙 거대한 원단을 대량으로 직접 들고 다니다 보니 버튼을 누르기 어려워서 대신 눌러주는 사람이 필요해서 그렇다. #

북한에도 조선중앙방송의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 엘리베이터 안내양이 여전히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북한은 전기가 없어 엘리베이터가 제대로 운영될 때가 없어도 엘리베이터 안내양은 있는, 공산주의 국가 중에서도 좀 심한 막장성을 보여주는 곳이라 무슨 희한한 것들이 있어도 이상할 것은 없다. 다만 한국의 엘리베이터 안내원과는 달리 북한과 중국에는 '전 인민에게 직업을 배분해 주는 사회주의' 개념이 좀 강해서, 한국 입장에서 보면 정말 쓸데없는 곳들까지 사람을 붙여 관리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다.

4. 미디어에서

개그우먼 이영자가 1994년 SBS 코미디 프로그램 기쁜 우리 토요일의 한 코너인 영자의 전성시대에서 안내양 역할을 맡아 "안 계시면 오라이~"라는 유행어로 인기를 끌기도 했다.[11]

조정래의 소설 〈 한강〉에도 이 일을 하는 그 시대 여성들이 등장인물로 나온다. 상사들의 갑질과 몸수색을 빙자한 성추행이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1] 한자로 이다. 은 관장·관리·주관하다의 뜻. [2] 1970년대 후반부터 전, 중문 사양 시내버스가 등장했는데 앞문은 운전기사가 막대식 개폐 레버(혹은 BF101 같은 차량에 쓰이는 회전식 개폐 레버)로 여는 자동문 방식이었지만 중문은 안내양이 열고 닫는 수동문 방식이었다. 안내양 제도가 폐지되면서 중문은 수동문에서 자동문 방식으로 개조되었으며, 리어 엔진 버스인 대우 BV101(1983년 출시)이나 현대 RB520L(1984년 출시) 같은 시민자율버스 운행 제도에 맞게 생산한 모델임에도 초창기 도입분엔 중문 사이의 안내양 전용 좌석과 중문 막대 스위치가 있었다. [3] 만원 버스에서 몸으로 밀어 승객을 태우는 일도 했기 때문에 그냥 손만 올리면 되니 안내양 몸 더듬기 따위는 일도 아니었다. [4] 여담으로, 이 사례는 1985년 초반 MBC 뉴스데스크 카메라 출동 코너에서 "말투 거친 버스 승객"이라는 제목으로 보도 된 적이 있었다(MBC Archive에 있는 영상인데, 아쉽게도 1984년 ~ 1986년 당시 뉴스데스크 방송분 전체가 아닌 카메라 출동 코너만을 모은 클립 영상으로 되어 있다.). [5] TV에도 나왔다. [6] 당시 여성들의 고등학교 진학률은 상당히 낮았다. 21세기 기준으로 대졸 이상 학력이라 보면 얼추 맞는다. [7] 21세기에도 대한민국 전체 여성 평균 키는 160cm가 채 안 된다. 현재 20~30대 여성 한정으로 161cm 정도이니, 당시 160cm는 21세기의 165cm 이상에 해당된다. [8] 지금 와서는 이해가 안 갈수도 있지만, 1970년대만 해도 고속버스는 지금의 대형 항공사 그 이상의 위상을 가졌던 교통수단이었다. [9] 그 맨 앞자리는 요즘도 관광회사의 가이드나 모임의 총무가 앉는 자리이기도 하다. 차량용 냉/온장고에서 뭘 꺼내 주기 쉽고, 두 자리 중 한 자리에는 음료 김밥 수건 등 필요한 여행에 물건을 쌓아 두고 지급해 주기 편한 자리였다. [10] 지금은 엘리베이터에서도 안내방송이 나오며(안내양이 사라지기 전후로 안내방송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백화점 같은 곳은 그 층에 무엇이 있는지도 나오므로 불편하지 않다. [11] 1994년이면 여객용 버스에는 안내양이 사라진 이후이다. 다만 안내양이 존재하던 과도기 시절의 버스 차종은 소수 남아 있었다. 이러한 버스들은 하차벨을 추가로 달거나 자동문으로 개조하고 '시민자율버스'라는 문구를 붙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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