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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심정수의 선수 경력을 다룬 문서.2. OB- 두산 베어스
신인 시절 |
두산 시절, 특유의 기마자세 타격폼 |
고등학교 때부터 시작한 웨이트 트레이닝이 제대로 빛을 발한 1999년[1] |
공포의 클린업 우동수 시절[2] |
학창 시절에는 동대문상고에서 유격수로 뛰었다. 이 때 보디빌딩을 하는 친구들로부터 근육 만드는 법을 배워서 일찍부터 감자, 달걀 흰자, 우유 등을 먹으며 몸을 키웠다고 한다. [3] 덕분에 미래의 거포 감으로 OB 베어스에서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접촉했고, 한양대학교로의 진학과 프로 입단 사이에서 최종적으로 프로 입단을 선택했다. 이 때가 1994년. 같은 연도에 데뷔한 김재현과 라이벌로 보지 않고 김동주를 라이벌로 엮으며 오히려 조인성과 엮는 팬들이 종종 있었다. 실제로도 김재현은 강한 2번타자론에 부합하는 호타준족형 타자인 반면, 김동주나 조인성은 전형적인 클린업에서 타점 쓸어담는 거포이니 들어맞는 편.
데뷔 첫 해인 1994년에는 1군과 2군을 오가다가 2년차인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1군에 자리잡았다. 포지션 역시 데뷔 초기에는 주로 3루수를 봤지만 1루 송구시 대부분 내야 그물로 빗나가는 등 수비가 매우 불안했고 결과적으로 주전 3루수로 안경현이[4] 버티고 있었다 보니 김인식 감독과의 면담 끝에 외야수로 전향한다. 이 때 별명이 소년장사[5], 공포의 8번타자. 김인식 감독의 배려로 부담감 없이 장타력을 마음껏 발휘해 보라는 차원에서 8번에 들어갔다. 심정수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김인식 감독은 예의 믿음의 야구를 시전, 10경기 연속 무안타를 쳐도 서너번 연속 삼진을 당해도 심정수를 계속 내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는 삼진 먹어도 되니까 니 마음껏 돌려."였다고.
결국 1995년 주전 우익수로 뛰면서 .282의 타율과 21홈런 59타점이라는 8번타자로서는 가공할 만한 성적을 내며 1군 데뷔시즌을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당시 장타율(.508)은 팀 선배이자 그 해 홈런왕이자 MVP였던 김상호보다도 높은 팀 내 1위. 물론 이것은 김상호의 타격 정확성이 나쁘기 때문이기도 했다. 잠실더비
이후 2년 동안의 조정기를 거쳐서[6] 본격적인 활약은 1998년 타이론 우즈, 김동주와 함께 우동수 트리오가 구축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우동수 트리오의 5번 슬롯에서 활약하던 3년(1998~2000) 동안 심정수의 성적은 .311 79홈런 274타점 OPS .935. 이 기간 동안 심정수보다 좋은 성적을 낸 타자는 타이론 우즈와 이승엽 둘 뿐이었다. (동기간 중 둘의 바로 밑급이던 김기태, 양준혁, 마해영과 동급) 특히, 2000년 LG와의 라이벌전인 플레이오프 4, 5, 6차전에서 연속으로 결승 홈런을 날려 팀을 한국시리즈에 올리는 1등공신이 되었다. 해설자 모두들 함성을 짓게 만든 덕아웃 시리즈였다.[7] 당연히 플레이오프 MVP도 그의 몫이었다. 이 활약으로 심정수는 한국판 '미스터 옥토버'로 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2001년 현대에서도, 2005년도 삼성으로 넘어가서도 심정수는 가을야구 때 큰 거를 쳐준다. 그리고 또 얼굴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긴 먼 후배뻘 정수빈도 가을에 펄펄 뛰고 다닌다.[8]
바야흐로 본격적인 잠실 거포 시대를 여나 했는데...
OB-두산에서의 7년간 성적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볼넷 | 삼진 | 병살타 | 도루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679 | 2327 | 673 | 128 | 10 | 126 | 418 | 360 | 249 | 431 | 47 | 18 | 0.289 | 0.364 | 0.515 | 0.879 |
3. 현대 유니콘스
2000년 말의 제2차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사태에서 마해영, 양준혁, 송진우, 김재현 등과 함께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9] 선수협 건은 결국 공정거래위원회의 중재로 잘 마무리되었지만, 선배들이 맞은 트레이드 후폭풍을 그 역시 비켜갈 수 없었다. 2001년 초 두산은 심정수보다 나이가 많고 공격력은 떨어졌던 외야수 심재학을 현대 유니콘스에서 받는 대가로 심정수를 트레이드 처리한다.[10] 이 때 정들었던 두산을 떠난다는 생각에 펑펑 울었다고 한다.[11]
그리고 이 때부터 그의 본격적인 각성이 시작되었다. 현대에서의 4년 동안 521안타와 133홈런이라는 클래식 스탯과 0.301-0.417-0.584에 OPS 1.001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만들어내며 현대 유니콘스의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새로 옮겨간 현대 유니콘스는 심정수가 딱 좋아할 만한 연습덕후(…) 분위기였다.[12] 김용달 타격코치의 조언을 받아 타격자세를 수정한 심정수는 2001년 시즌 초 무서운 성적을 냈으나, 그 해 6월 롯데 자이언츠 투수 강민영의 투구에 얼굴을 맞는 바람에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당하고 좋았던 페이스를 잃어버리게 된다. 당시 시즌 아웃이 유력했으나, 1달 만에 복귀하였고, 이후 심정수가 1군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때 쓰고 있던 헬멧이 안면부를 보호해 주는 이른바 검투사 헬멧. 그에게 있어서 선수생활때 팬들은 헬멧을 중요시 여겼다. 참고로 심정수는 2003년 초에 롯데와의 경기에서 투수 박지철의 공[13] 에 같은 부위를 맞고 또 부상을 당해서 검투사 헬멧을 다시 써야 했다.[14] 안 그래도 롯데가 심정수를 3번씩이나 맞히면서 사태가 더 커졌다.
2002년 이후 심정수는 타격 폼을 일반적인 기마자세에서 다리를 모아주는 폼으로 확 바꾸면서[15] 홈런을 40개 이상 기록하는 등 홈런개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다. 당시 김용달 타격코치는 정말 집요하게 심정수에게 자신의 말대로 타격폼을 바꿀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16] 심정수의 방까지 찾아와서 괴롭힐 정도였다고. 심정수는 자기 나름대로의 야구 철학이 있었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김용달의 의견을 처음에는 외면하다가, 정말 집요하게 자신에게 매달리는 코치의 모습을 보면서 딱 한 번만 믿어보자 싶었다나. 결국 그 결정이 대박을 냈다. 김용달 타격코치는 늘 자신의 의견을 지나치게 선수들에게 강요한다는 악평이 따라다니는데,[17] 그의 고집이 빛을 발한 드문 케이스. 여하간 2002년, 2003년 두 해에 46홈런과 53홈런을 연달아 쏘아올리면서 이승엽과 본격적인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두 해 다 아쉽게 홈런 2위에 머물렀다. 2002년에는 정규시즌 마지막 날에 이승엽이 연장전에서 홈런을 쳐서 공동1위는 아쉽게 무산되었다.
자신의 라이벌인 이승엽과 함께 홈런왕 경쟁을 하던 2003년 |
2003년 골든글러브 수상 당시 |
특히, 2003년은 심정수 본인뿐 아니라 한국야구 역사에 남을 기록을 작성한 해였는데, 연초에 이승엽과 함께 "초청선수" 자격으로 참가한 플로리다 말린스의 스프링캠프에서도 당시 스카우트들에게 "지금 당장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에 와도 좋을 선수"라는 평을 받았으며 "MLB닷컴" 메인에도 올라가는 등 화제를 뿌렸고, 정규시즌에서는 53홈런뿐 아니라 .335 / .478 / .720 OPS 1.198이라는 말도 안 되는 높은 생산성을 과시했다. 삼진은 63개였는데 볼넷이 124개인데다가, 이 해의 4사구 개수는 133개로 역대 KBO 단일시즌 1위의 기록이다. 그야말로 타석에서 공포의 존재였다. 지금 저렇게 친다면 홈런왕 따위는 기본적으로 따놓은 당상이겠지만 하필 이 해에 또 이승엽이 홈런을 56개 치는 바람[18]에 또다시 2인자로 남고 말았지만, 그 해 소속팀의 승리에 가장 많은 공헌을 한 선수는 명실공히 심정수였다. 이 해 WAR은 11로, 야수 단일 시즌 3위의 기록이며 우타 외야수로는 압도적인 역대 최고 기록이다.(이승엽 .301 / .428 / .699, 심정수 .335 / .478 / .720)
실질적인 타자의 득점공헌도를 판단하는 WRC(weighted runs created)는 이승엽이 139.3, 심정수가 153.6[19] 또한 이승엽이 1루수였던 반면 심정수는 우익수였으며 심정수의 소속팀은 그 해 정규시즌과 한국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끝내 홈런왕, 타점왕, MVP를 이승엽이 가져가자 심정수의 아내는 속상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대신에 타율, 출루율과 장타율은 이승엽보다 높아서 출루율과 장타율 부문 1위. 타율은 2위.[20] 그리고 외야수 부문 골든글러브도 2002~2003 2년 연속 수상. 그리고 한국시리즈 우승은 덤, 팀내에서 정민태와 함께 최다 연봉인 7억을 찍었다. 당시만 해도 정민태의 7억은 김광현과 양현종이 경신하기 까지 투수로는 장기간으로 남아있던 기록이였다.
여튼 2003년은 이승엽도 대단하지만 심정수같은 성적이야 말로 충공깽 같은 성적이다.[21] 단순 홈런 수치로만 봐도 현대에서 4년 간 통산 133홈런을 쳐내 OB-두산에서의 7년간 통산 홈런 121개를 월등히 뛰어넘는다. 이 시절이 심정수의 진정한 리즈시절.
타이틀보다 각종 질적 수치를 강조하는 팬들은 2003 MVP는 이승엽보다 심정수에게 더 자격이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2014년도에 WAR, WRC+ 1등이던 강정호도 200안타 서건창에게 밀렸고 2018년도에는 박병호가 WRC+ 1위였지만 약물 시비를 받던 홈런/타점왕 김재환에게 MVP를 내주고 말았다. 김태균도 2012년도에는 박병호보다 타율, OPS, WAR, WRC+ 모두 앞섰지만 박병호에게 골글, MVP 모두 내주었다. 이승엽은 2015년도에도 최준석보다 성적이 밀렸지만 골글을 탔다. MVP라는 것이 wRC+ 1위라든가 WAR 1위같은 기준을 정해 놓고 뽑는 것이 아니다 보니 주요 기록의 가치나 타이틀 같은 것을 고려할 수밖에 없다. 지금 2003년도 MVP를 투표해도 당시의 기록이 한국(+아시아) 최고 기록이었음을 감안하면 심정수가 56홈런 타이 기록이나 타율 4할이라도 기록하지 않는 한 MVP는 이승엽이 수상할 가능성이 크다.[22][23]
그리고 이 화려한 세월이 지나가면서 그의 몰락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몰락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부상, 또다른 하나는 라섹수술. 특히 무릎과 어깨가 문제였다. 지나치게 송구 연습을 열심히 한 탓에[24] 심정수의 어깨 회전근은 2003년 시즌 이전부터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고, 바꾼 타격 폼을 정착시켜서 장타를 늘리기 위해 무리하게 스윙연습을 하는 통에 무릎에 무리가 갔던 것이다. 김용달 타격코치의 조언에 따라 바뀐 타격폼이 기존보다 무릎을 많이 사용하는 폼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장종훈과 비슷하게 지나친 훈련이 도리어 해가 된 케이스.
결국 2004년 시즌 심정수는 우익수와 지명타자 자리에서 뛰며[25] 전 시즌보다 1할 가까이 낮은 타율을 기록했고, 이러한 부진 때문에 평소 갈망하던 메이저리그 진출을 완전히 접게 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2004년 초 라섹 수술을 받았는데, 이후 밤에 움직이는 물체의 빛이 번져 보이는 야구선수로서는 치명적인 후유증을 약 1년여 간 겪었다고 한다. 그 결과 타격 정확성이 저하되고 말았던 것이다.
현대 팬들에게 심정수의 활약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라면 527 대첩 대첩과 04 한국시리즈가 있다.
그리고
현대가 만약 돈이 많고 팬들이 많이 있었더라면, 심정수를 물론 잡았을 것이다.
게다가 신인 1차 지명권 박탈, 유망주 농사 폭망[30]이 겹치면서 그렇게 현대는 멸망했다.
현대에서의 4년간 성적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볼넷 | 삼진 | 병살타 | 도루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475 | 1710 | 521 | 71 | 4 | 139 | 409 | 342 | 328 | 380 | 50 | 16 | 0.305 | 0.430 | 0.595 | 1.025 |
4. 삼성 라이온즈
2005년 올스타전에서 친정팀 두산 동료 박명환, 정수근, 홍성흔과 함께.[31] |
홈런왕에 오른 2007 시즌 | 2008 시즌. 저 유니폼이 출시된 지 1년만에 은퇴한다. |
라섹 수술을 받은 후 시력 저하의 후유증을 겪고 있었던 심정수는 시력 검사로 인한 메디컬 테스트 탈락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눈을 문제 삼는 구단과는 얘기 안한다는 선언을 했고, 마침 이승엽과 마해영의 이적[32]으로 인해 약해진 타선을 다시 보강할 겸 우타 거포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삼성 라이온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최대 60억원[33]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이며 심정수를 영입했다.
이후 그가 먹튀로 전락했기 때문에, 팬들은 심정수의 메디컬 테스트 거부가 정당하지 못한 행동이었다고 비판했다. 이는 기본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문제는 삼성에서도 심정수의 부상을 알면서 영입했다는 점이다. 심정수의 은퇴 즈음하여 삼성 구단 관계자들은 심각한 부상이 있더라도 심정수는 성실한 선수이기에 재활에 쉽게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삼성 프런트에게는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다.
계약 첫 해였던 2005년에는 롯데와의 개막 2연전에서 2년차 신예 장원준을 상대로 만루홈런을 뽑아내는 등 5월까지는 엄청난 활약을 보였으나 6월부터 부상이 악화되며 부진을 거듭했고 7번타자로 내려가는 등 수모를 겪었으나 후반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이며 타율 0.275, 28홈런 87타점 OPS 0.903, sWAR 4.885(10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게다가 시즌 홈런 2위, 타점 3위에 랭크됐으며 삼성에서 기대하던 장타율도 5할 이상을 찍었기 때문에 기록만 따지고 보면 상당히 좋은 기록이다. 특히 이 당시 시력 저하 후유증을 앓고 있었음에도 이 정도의 기록을 낸 것이라 사실은 대단한 것에 가깝다. 이 시기부터 어깨 부상과 수비 범위 감소로 인해 좌익수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리고 2006년 초 수술을 결심, 왼쪽 무릎과 오른쪽 어깨를 독일에서 수술하고 그 해를 통째로 재활에 날리게 되었지만[34] 한국시리즈에는 정상적으로 출장했다. 다음 해인 2007년에는 안경을 스포츠 고글에서 옛날의 뿔테로 바꾸고 타석에 등장, 31홈런과 101타점을 기록하며 53홈런을 칠 때도 해보지 못했던 타점왕과 홈런왕 타이틀을 함께 거머쥐었다. 1995년 한 때 팀선배였던 OB 베어스의 김상호가 세운 25홈런, 타율 0.272를 뛰어넘는 0.258라는 최저타율 홈런왕과 타점왕[35][36] 기록을 수립하였다. 당해 시즌 초반에 극심한 타격 슬럼프가 원인이기도 했고, 거기에 이 해 심정수는 단 한번도 3안타 이상을 기록한 경기가 없었다. 그러나 출루율이 무려 .381로 타율보다 1할 2푼가량이 높았고 OPS는 0.896이었으며 거기에 2007년은 2006년에 이어 투고타저가 여전한 해였다. 덕분에 WAR은 5.15(8위)에 wRC+는 153.8이라는 대단한 스탯을 기록했다.[37] 낮은 타율로 인해 생산성이 저평가받은 케이스.[38] 팬들은 심정수의 정확도 하락에 대단히 아쉬워하면서도 여전히 장타력은 살아 있음을 확인했고, 2008년에는 더 나아질 거라며 기대했다.
그러나 2008년이 돌아오자 왼쪽 무릎 부상이 재발했다. 결국 시즌 아웃. 역시 한 시즌을 통째로 날리며 재기와 명예회복을 노렸지만, 그의 커리어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바로 라섹 수술이었다.[39] 안경을 쓰는 것이 불편했던 탓에 한 안과 의사를 소개받아서 라섹 수술을 받았는데, 그 수술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그로 인해 발생한 두통과 어지럼증 등의 후유증 때문에 야구를 하기 어려워졌던 것이다. 결국 이 때문에 너무나도 이른 33세의 나이에 갑작스러운 은퇴를 선언했다.[40] 다음 시즌에 부활하리라는 보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삼성 팬들에게는 안 좋은 기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팬들 입장에서도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이 남는 선수.
삼성에서의 4년간 성적 | |||||||||||||||
경기 | 타수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볼넷 | 삼진 | 병살타 | 도루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296 | 1013 | 257 | 32 | 0 | 63 | 202 | 157 | 200 | 262 | 30 | 9 | 0.254 | 0.384 | 0.472 | 0.856 |
5. 연도별 주요 성적
-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진한 글씨는 리그 5위 내 입상 성적. 푸른 글씨는 KBO 리그 역대 최고 성적
역대 성적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4 | OB | 32 | 61 | .164 | 10 | 4 | 0 | 3 | 9 | 4 | 0 | 4 | .377 | .215 |
1995 | 116 | 362 | .282 | 102 | 19 | 0 |
21 (4위) |
59 | 63 | 4 | 37 |
.508 (4위) |
.344 | |
1996 | 107 | 371 | .248 | 92 | 15 | 3 | 18 | 54 | 51 | 4 | 48 | .450 | .331 | |
1997 | 40 | 122 | .246 | 30 | 5 | 0 | 5 | 22 | 17 | 2 | 22 | .410 | .359 | |
1998 |
126 (1위) |
477 | .294 | 140 | 29 | 4 | 19 | 73 | 71 | 4 | 39 | .491 | .346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1999 | 두산 |
132 (1위) |
480 |
.335 (5위) |
161 |
35 (4위) |
1 | 31 |
110 (5위) |
79 | 1 | 61 | .606 | .408 |
2000 | 126 | 454 | .304 | 138 | 21 | 2 | 29 | 91 | 75 | 3 | 79 | .551 | .400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1 | 현대 | 107 | 381 | .294 | 112 | 19 | 1 | 18 | 70 | 67 | 8 | 71 | .491 | .404 |
2002 |
133 (1위) |
502 |
.321 (4위) |
161 (4위) |
22 | 1 |
46 (2위) |
119 (2위) |
101 (2위) |
2 | 72 |
.643 (2위) |
.404 (5위) |
|
2003 |
133 (1위) |
460 |
.335 (2위) |
154 | 16 | 1 |
53 (2위) |
142 (2위) |
110 (3위) |
6 |
133 (1위) |
.720 (1위) |
.478 (1위) |
|
2004 | 102 | 367 | .256 | 94 | 14 | 1 | 22 | 78 | 64 | 0 | 81 | .480 | .385 | |
연도 | 소속팀 | 경기수 | 타수 | 타율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타점 | 득점 | 도루 | 4사구 | 장타율 | 출루율 |
2005 | 삼성 | 124 | 433 | .275 | 119 | 14 | 0 |
28 (2위) |
87 (3위) |
77 (3위) |
3 | 93 |
.501 (5위) |
.402 (4위) |
2006 | 26 | 85 | .141 | 12 | 1 | 0 | 1 | 7 | 8 | 0 | 10 | .188 | .229 | |
2007 | 124 | 427 | .258 | 110 | 17 | 0 |
31 (1위) |
101 (1위) |
64 | 6 | 86 | .515 | .381 | |
2008 | 22 | 68 | .235 | 16 | 0 | 0 | 3 | 7 | 8 | 0 | 20 | .368 | .409 | |
KBO 통산 (15시즌) |
1450 | 5050 | .287 | 1451 | 231 | 14 | 328 | 1029 | 859 | 43 | 856 | .533 | .387 |
[1]
그 해 30홈런 100타점 이상을 기록하며 두산 시절의 최고 성적을 냈다.
[2]
위의 사진이 원래의 타순이고 아래의 사진은 원래 타순의 역순이다.
[3]
두산에서 뛰던 외국인 타자 케세레스는 심정수가 몸을 키우려고 계란을 서른개씩 먹는다는 증언을 했고, 별명도 '에그맨' 이라고 불렀다.
[4]
실제로 안경현은 1997년까지 3루수를 보다가
이명수가 현대로 이적하고
김동주가 입단하자 1998년부터 2루수로 포지션을 전환한다.
[5]
이 별명의 기믹은
최정이 이어 받는다.
[6]
밑에 통산 성적에도 나와 있듯 1996년에는 18홈런을 기록하며 여전히 장타력은 살아 있었지만 타율은 .248에 그치며 전년도에 비해 성적이 소폭 하락했다. 1997년에는 겨우 40경기밖에 출장하지 못했는데, 군 문제(결국 면제가 되었다)와 부상이 겹치면서 출장 경기수가 적었고 2000년이 되어서야 밝혀졌지만 가정적인 문제(
이혼을 했다)도 겹쳤다.
#
[7]
당시 플레이오프에서 심정수가 기록한 안타는 이들 3개의 홈런이 전부였는데, 그게 모두 결승홈런이었던 것. 특히 마지막 6차전의 결승 홈런은 연장전 승부에서 쳐낸 것이어서 더욱 두산 팬들의 환호를 이끌어냈다.
[8]
다만, 2009년에는 활약이 저조했으나
2015년 한국시리즈에서 정점을 찍는다.
[9]
심정수 본인은 후의 인터뷰에서 이 때는 후배로서 동기이자 라이벌팀 친구 김재현과 함께 주로 선배들의 결정을 따르는 쪽이었다고 말했다. 저 사람들 중 송진우만 한팀에서 존속하게 살아남았으나 나중에는 삼성으로 팔려갈뻔한 썰이 있었다고 한다.
[10]
심재학이 저평가받는 ops형 타자이기는 하지만 급이 안 맞는 트레이드여서 현금 트레이드 의혹도 있었다. 근데 당시 현대의 경우 돈을 예년처럼 쓰기는 커녕 쓰지 못하는 사태라 진실은 저 너머에...였는데 심재학 본인이 선수협 현대 총무를 맡았는데 구단의 탈퇴 종용을 거부해 트레이드 상대로 지목되었다는 발언을 했다.
[11]
이때 두산 베어스의 팬 카페인
곰들의 대화에서 두산 구단에게 당장 트레이드를 철회하라는 비난을 했었다.
[12]
왜냐면 두산 시절에도 저 큰 몸집을 불리기 위해
감자,
달걀,
닭고기 같은 몸에 좋고 벌크업하기 딱인 음식들을 먹으며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근육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13]
국내로 복귀한지 1년 밖에 안된
이종범을 상대로 맞춘 전력이 있다. 이종범은 후에 검투사 헬멧 땜에 성적 좀 까여서 계륵 같은 존재 라고 비유 했다.
[14]
이 때 심정수를 위해서 급하게 검투사 헬멧을 제작한 사람이 당시
현대 유니콘스
운영팀 과장이었던
염경엽이다.
[15]
낮은 스탠스에서 순간적인 힘을 극대화시켜 공에 임팩트를 가하는 메커니즘을 지닌 타격폼이다. 이전 타격폼이
제프 배그웰과 흡사(
송지만이 한화 이글스에서 선수생활 할때 타격자세가 배그웰과 비슷했다. 현대로 트레이드 되고나서는 매년 타격폼을 조금씩 가다듬어 수정을 하고 또 반복을 했다고 한다.)했다면, 이 때 바뀐 타격폼은
마크 맥과이어와 유사했다.
[16]
현재
박병호도 넥센으로 트레이드 된지 얼마 안되어 이듬해 박흥식 전 타격코치가 집요하게 쫓아다닌 적이 있었다. 두 사람의 호흡이 닿았는지 박병호는 이승엽 이후 전인미답 4년 연속 홈런왕 + 2년 연속 50홈런이라는 대기록의 타이틀을 만들었다.
[17]
현재 LG의 레전드인
박용택과 한화에서 뛰고있는
이성열인데 박용택은 김용달의 스윙을 배웠지만 전혀 맞지 않아 자신만의 루틴으로 해법을 찾았고, 이성열의 경우 라식수술로 인한 후유증도 있고 거기에 김용달이 멋대로 타격까지 뜯어고치다 망했다. 나중에 기자에게 하는 말이 가관인게 "아무리 해도 안될 놈은 안된다." 라고 말을 해버렸다. 허나, 그는
라이벌 팀으로 트레이드 되며
20홈런을 치게 된다.(...)
[18]
이는 당시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레전드인
왕정치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넘었기 때문이다. 왕정치는 55개를 때렸다. 이후 정확히 10년 뒤인
블라디미르 발렌틴이 60개 홈런을 치며 현재의 신기록이 되어있다.
[19]
파크팩터 보정도 같이 판단하는
wRC+는 스탯티즈 기준 210.7.
[20]
그해에 심정수의 3관왕을 저지했던 선수는 .342를 기록한 두산시절의 친구
김동주였다.
[21]
사실 이승엽의 2003시즌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시즌이기는 하지만, 세이버 스탯으로 따지면 오히려 99이승엽과 02이승엽이 더 고평가를 받는다. 베이스볼 랩
wRC+기준(타격 스탯만 보는 지표로 수비는 평가하지 않고, 리그 평균을 100으로 잡는다.) 03이승엽, 99이승엽은 190, 02이승엽은 197이다. 그러나 03심정수는 208로 이승엽의 어떤 해보다 더 높다. 참고로 14
강정호가 185, 18
박병호가 190, 10
이대호가 192(07이대호 194), 12
김태균이 195, 94이종범이 198, 15
테임즈가 219(...), 83
장효조가 215, 82
백인천이 225(...)
신들의 전쟁
[22]
당장 2002년 AL MVP가 10.0 fWAR, 8.9bWAR의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아닌 4.5fWAR, 5.6bWAR의
미겔 테하다한테 돌아간 것만 봐도 메이저리그 MVP도 이 때까지는 공정하지 못했다. A로드의 소속팀
텍사스 레인저스는 포스트시즌에 탈락한 반면 테하다의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AL 전체 승률 1위와 20연승을 했기 때문에 팀빨 수상의 예로도 꼽힌다. 물론 둘 다 약쟁이라 의미 없지만
[23]
메이저리그에도 이런 경우는 꽤 있다. 그 예가 바로 2012년 AL MVP 투표인데, 당시 세이버메트리션들은
마이크 트라웃을 MVP로 밀었으나, 그 해 MVP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확실한 타이틀과 임팩트를 가진
미겔 카브레라가 가져갔다. 또한 2017년 AL MVP 역시 세이버 및 클래식 스탯 모두
애런 저지에 비해 밀렸던
호세 알투베가 압도적인 차이로 수상했다. 하지만 타격 성적만 크게 밀렸을 뿐이지 포지션이 알투베는 2루수, 저지는 외야수라는 것을 간과한 것으로 실제로 fWAR은 저지의 우위지만 bWAR은 알투베의 우위였다.
[24]
심정수는
심재학,
심성보와 함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까지 KBO 최고의 강견 중 3심의 한 명이었다.
[25]
대신 현대에서는 외야수를 볼 수 있던 선수들이 많았다. 같은해 팀에 들어온 송지만도 원래 한화 소속때는 우익수가 주포지션 이였고, 팀에 사정에 따라 중견수/좌익수도 이따금씩 봐줬었다. 거기에 노장이자 도루왕 출신인
전준호, 1루수 겸 외야도 하던
이숭용도 있었기에 사실상 심정수가 지명타자로만 봐도 괜찮았다.
브룸바도 있었으니 안될것이 전혀 없었다.
[26]
2004년 한국시리즈 진출은
양준혁과
배영수 단 둘이서 멱살잡고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7]
이 때 삼성에서 나온 명언이 그 유명한 "구단이 돈이 없잖아요". 이 때문에 삼성은
거지성이라는 별명으로 조롱당했다. 근데 ㄹㅇ
2016년부터는 진짜 거지성이 되었다.
[28]
더군다나 현대가 임시 연고를 두었던
수원시는 한동안
축구가 강세였지만, 훗날
kt wiz가 들어오고 나름 정착하는 것을 보면 야구의 암흑기 와중에 현대의 정착 의지가 없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29]
현대가 망하지 않고 팬도 적당히 있고 역사까지 존속했다면 박진만의 은퇴 이후 등번호 7번은 아마도
영구결번이 되지 않았을까 라는 그런말도 있었다.
[30]
다만, 멸망 직전년도인
2006년의 유망주들은 현재도 뛰고 있는데 현대 유니콘스 역대 드래프트 중 1996년, 1998년과 함께 가장 좋게 볼 수 있다.
[31]
여담으로 익히 알다시피 이 짤방에서 두산 유니폼을 입고있는
두
사람 모두 본인과 그
옆에 있는 사람처럼 FA로 유니폼을
갈아
입게 된다.근데
맨 오른쪽 사람은 다시 두산으로
돌아왔다(...)
[32]
마해영은 당초 협상에서 양준혁보다 높게 대우를 요구하거나 조금 낮게 요구했으나 결렬되자
KIA 타이거즈와 28억원에
FA 계약을 맺었고, KIA에서의 모습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33]
이 계약에는 계약금 20억, 연봉 7억 5000만×4년, 플러스 옵션 10억, 마이너스 옵션 10억(연간 2억 5000만원)이 걸려있었다고 한다. 플러스 옵션은 매년 타율 0.300 이상 시 1억, 100타점 이상 달성 시 1억, 출루율 0.400 이상 시 5,000만원을 추가 지급하고, 반대로 일정 목표 달성 실패 시 연봉이 삭감되는 마이너스 옵션의 경우 규정타석 미달 시 1억, 110경기 미만 출장 시 1억, 출루율 0.400 미만 시 5,000만원이 삭감되는 조건이었다. 다만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할 경우 마이너스 옵션이 실행되지 않는다는 조건이 추가로 걸려 있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무릎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날려 먹튀의 정점을 찍었던 2006 시즌의 경우 위에 서술된 마이너스 옵션 조건이 전부 걸리게 되었으나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한 덕분에 단 한 푼도 삭감되지 않았다. 하지만 반대로 다음해 2007년에는 홈런왕과 외야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했지만 출루율 4할을 넘기지 못해 마이너스 옵션이 발동되면서 5,000만원이 삭감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써 있는 조건을 토대로 계산을 해보면 그의 실제 계약 총액은 4년 49억이 된다. 물론 49억이라고 해도 당시 기준으로도 역대 최고액이지만, 60억이라는 거액에서 나오는 충격 때문에 나름 홈런왕을 차지했음에도
진필중,
홍현우급으로 까이는 걸 생각하면 심정수나 심정수를 지지하는 팬들 입장에서는 조금은 억울하다고 볼 수 있다. 이후 2012년
이택근과 2013년
김주찬이 초대형 계약을 터트리면서 은퇴했던 심정수의 근황이 궁금하다는 팬들이 허다했다.
[34]
에피소드로, 독일 재활 당시
2006 독일 월드컵 직전이라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최종 훈련을 하고 있던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들을 만나며 선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35]
하지만 득점권 타율은 4할대였다. 당연히 밥상은 3번타자
양준혁 혼자서 차릴 때가 많았다.
[36]
라식수술의 부작용으로 인하여 해가 긴 여름에는 많은 홈런을 쳐내지만 해가 짧은 봄과 가을에는 낮경기가 아니면 빛이 번져보여 심봉사가 되었다.
[37]
다만 출루율 4할을 달성하지 못해 위에 상기한 마이너스 옵션 조건에 걸리면서 5,000만원이 삭감되었다.
[38]
반대로 높은 타율과 출루 생산성을 갖췄음에도 홈런이나 타점 갯수가 낮아서 저평가받는 케이스도 있는데, 타점보다 득점 기여도가 높은 KIA 시절의
장성호가 이런 케이스. 당시 2005년~2008년의 투고타저가 심했던 KBO 수준으로 보면 장성호의 활약은 어딜가나 A등급이지만, 야구계는 이 당시까지도
투승타타가 지배하던 때였고, 하필 또 장성호의 포지션이 1루수라 당대에는 저평가를 많이 받았다. 장성호는 현역 은퇴 이후에야 세이버메트릭션들에게 재평가를 받아 높은 점수를 받았다.
[39]
40주년 레전드 발표 시즌때 언론 인터뷰에서 심정수 본인이 밝힌 바로는 무릎 부상 정도는 3~4년 정도 더 참고 뛸 수 있었다고 한다.
[40]
그보다 한살 어린 라이벌 이승엽이 2017년까지 현역으로 뛰고 42세에 은퇴한 것을 생각하면 심정수의 은퇴는 꽤 이른 은퇴다. 게다가 그의 은퇴 전까지의 누적 성적을 고려하여 7-8년 정도 더 뛰었더라면
이대호나
박병호를 가볍게 능가할 정도의 우타자 넘사벽 스탯을 쌓았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