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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커리/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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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오하이오 애크런 출생으로[1],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슈팅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이와 관련 르브론 제임스가 종종 고등학교 경기를 보러 가는 등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케빈 듀란트는 초등학교 때 처음 그를 봤던 기억을 회상하며 경기를 하러 샬럿에 갔을 때 웬 백인 녀석이 있는데[2] 그 녀석이 말도안되는 득점력을 보여줘서 기억에 남았고 10년 후에 스테판 커리란 이름으로 다시 보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180cm, 72kg이라는 농구선수 치곤 빈약한 신체 조건 때문에 유명한 대학의 오퍼를 받지 못했다.[3] 그는 부모가 졸업한 버지니아 공과대학교 진학을 희망했으나[4] 버지니아텍에서는 워크온을 제안했고, 결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있는 무명의 데이비슨 칼리지에 진학하게 된다. 데이비슨 칼리지는 사실 남부에서 공부 잘하는 대학교 중 하나지만 스포츠와는 그다지 인연이 없었고, NBA 리거도 당시 5명밖에 배출하지 못했다.

2. 대학 시절

파일:external/3.bp.blogspot.com/steph-curry.jpg

그는 밥 맥킬롭[5] 감독의 지도를 받으며 대학 첫해 1학년 플레이어 중 2위에 해당하는 득점(21.5)을 기록하며[6] 팀을 서부 컨퍼런스 1위로 끌어올리고,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에 진출시켰다(이후 1라운드에서 패배). 1969년 이래 NCAA 토너먼트에서 1승도 거둬본 적이 없는 약체였던 데이비슨 칼리지는 커리가 재학 중이었던 2008년에 NCAA Division I 남자농구 챔피언십 8강까지 진출하는 등 슬램덩크를 보는 듯한 활약을 펼쳤고[7] 커리는 데이비슨 칼리지의 득점 관련 대부분의 기록을 갈아치우며 전미 최고의 득점력을 갖춘 선수로 인정받게 된다.

8강에서 캔자스 제이호크스에게 57 : 59으로 아깝게 졌다. 캔자스와의 경기에서 종료 직전에 커리가 공을 잡았는데, 던질 곳이 마땅히 없어서 동료에게 패스했지만 득점에 실패하고 말았다. 캔자스는 4강에서 노스캐롤라이나 타 힐스를 84:66으로, 결승에서 멤피스 타이거즈를 75 : 68로 이기면서 우승한다. 만약 데이비슨이 캔자스를 이겼다면 1960년대 이후로 토너먼트에서 1승도 못했던 무명 학교가 우승할 수도 있었다.

그의 대학 3학년 성적은 평균 28.7득점, 4,5리바운드, 3.7어시스트, 2.1스틸.

커리가 뛰어난 슈터라는 사실은 이미 모두가 알고 있었으나, NCAA에서 탁월한 득점력을 보이던 슈터들이 NBA에서 신장, 체중, 운동 능력 등 피지컬 측면의 한계를 보이며 추락하는 예는 많았고 특히 커리는 대학 2학년 때 키가 187cm까지 자랐지만 여전히 포인트 가드의 신체와 슈팅 가드의 능력을 가진 전형적인 트위너였기 때문에 상위 픽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그러나 블레이크 그리핀, 하심 타빗, 제임스 하든, 타이릭 에반스, 리키 루비오, 조니 플린에 이어 1라운드 7픽이라는 괜찮은 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된다. 이후 드래프트 동기중 현재 커리보다 높이 둘수 있는 선수가 없으니 골든스테이트의 선택은 탁월했던 셈이다. 뉴욕 닉스가 특히 커리를 엄청 탐내고 있었고 심지어 커리 본인도 뉴욕에 가길 원하면서 다른 팀과의 워크아웃을 거부하고 뉴욕이랑 워크 아웃을 진행했을 정도로 서로 서로 뉴욕행을 원하고 있었지만, 바로 앞에서 골든스테이트가 채가는 바람에 이유야 어찌 되었든 간에 현 시점에서 뉴욕 팬들의 심정을 짐작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골든스테이트가 커리를 지명하자 야유하는 뉴욕 팬들. 머리를 감싸쥐고 좌절하는 뉴욕 팬들도 보인다.[8]

그러나 후에 알려진 뒷이야기에 의하면 골든스테이트가 커리를 지명하지 않았더라도 뉴욕에 가는 일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골든스테이트는 전통적으로 항상 좋은 빅맨을 원했고 당시 드래프트에 쓸만한 빅맨이 없던 것을 노려 피닉스 선즈에서 무려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카드로 써서 커리를 지명권을 얻을 계획이었기 때문. 여담으로 당시 피닉스의 GM은 지금의 MVP 커리를 만들어낸 스티브 커였다. 양 팀은 드래프트에서 서로 어느정도 합의를 마친 상태였는데, 이 합의에는 한가지 선결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5픽, 6픽을 가지고 있던 미네소타가 커리를 뽑을리가 없다는 것. 미네소타는 일단 5픽으로 리키 루비오를 뽑을 것이 거의 확정된 상태였는데, 리키 루비오를 뽑게 된다면 6순위에서 또 다시 언더 사이즈 가드인 커리를 지명할리가 없을 것이라 본 것이다. 그렇기에 7픽을 가진 골든스테이트와 트레이드를 진행한 것인데, 거기에 무려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라는 빅 카드가 거론된 것은 이유가 있었으니....

당시 골든스테이트는 몇 년째 쓸만한 빅맨이 없어서 빅맨에 혈안이 되어 있던 상태여서 피닉스의 제안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는 골스 내부에서 커리에 대한 평가 역시 굉장히 높았다는 것이다. 훗날 디 애슬랜틱 지의 골스 담당 기자 마커스 탐슨에 따르면 당시 골스의 단장이었던 래리 라일리가 커리가 1학년일 때부터 커리, 커리하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애초에 골든스테이트는 애초에 커리가 7픽까지 내려올 가능성은 없다고 생각했었다, 피닉스와의 거래에는 '골스가 운좋게 높은 순번, 4,5 픽 이내로 커리를 데려올 수 있는 겅우'라는 골스 내부의 암묵적인 전제조건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드래프트 픽 추첨일에 7픽에 당첨됐을 때는 커리를 데려오는 것을 반쯤 포기한 상태가 되다시피했고, 자연스레 피닉스와의 거래도 거의 흐지부지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었다. 그런데 드래프트 당일 뜻밖에도 커리가 7픽까지 내려왔다. 그 결과 골스 쪽에서는 어마 좋아라하며 커리를 뽑았고 피닉스의 제안은 허공에 날아가버렸다. 사실 골스가 아닌 다른 팀이었더라도 커리가 7픽으로 뽑힌 이상 7픽 신인과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라는 빅 카드를 바꾸는 일은 아마 하지 않았을 것이다. 픽 순위에 따라 루키 계약 액수가 달라지기에 두 선수의 샐러리가 아예 들어맞지를 않는 상황에서 심지어 스타더마이어는 FA가 코앞이었기 때문. 간단히 말해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게 된 것이다.

한편 뉴욕은 다른 꿈을 꾸고 있었다. 훗날 JJ 레딕의 팟캐스트에 출연한 댄토니에 의하면, 닉스와 댄토니는 골스는 곧 죽어도 빅맨을 뽑을 것이라 생각해서 다음 순위에 당연히 커리를 뽑으려고 준비하고 있었고, 만약의 불상사를 대비해, 자신들의 8픽 + 선수 몇몇으로 구성된 트레이드 패키지를 미네소타에 제시해서 5픽으로 바꾼 다음 커리를 5픽으로 뽑을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팀버울브스, 워리어스 모두 커리를 뽑지 않을거라 확신했기에, 굳이 그렇게까지 승부수를 띄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골스가 커리를 해킹해가며 닉스의 운명은.........

그러니까 결론을 내리자면, 당시 선즈, 워리어스, 닉스 세 팀 모두 내부적으로는 커리의 가치를 높게 매기고 있었고, 물 밑에서는 커리를 데려올 나름의 계획을 짜두고 있긴 했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다른 팀은 커리를 어느 정도로까지 평가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기에, 결국 선즈와 닉스는 워리어스가 커리를 데려가는 것을 눈 뜨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선즈와 닉스는 나름 억울한게, 그래도 이 두 팀은 나름 계획이란 게 있었고 노력이라도 하긴 했었다. 커리 드래프트 당시 진짜 삽질을 한 것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였다. 5픽에서 루비오를 뽑은 것이야 당시 루비오에 대한 기대치와 평가가 높았으니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었는데, 문제는 6픽에서 커리를 거르고 조니 플린을 뽑는 희대의 병신짓을 저질렀다는 것. 훗날 밝혀진 이유는, 커리는 워크아웃에서 거른 반면, 플린은 워크아웃에 참석했는데 거기서 보여준 리더십이 맘에 들었다나 뭐라나.... 심지어 포지션 중복을 고려해서 커리나 플린를 안 뽑겠다면 더마 드로잔이라는 차선책까지 있었음에도 말이다. 어쨌거나 팀버울브스 이 어리석은 선택은 드래프트 당일부터 욕을 들어먹었고, 결국 10여년간 하위권을 머물러야했다는, 그야말로 참혹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2021-22 시즌 우승 이후, 커리의 대학 시절을 회고하는 기사가 나왔다. # 당시 대학 진학을 압둔 커리가 듀크대를 가고자 했으나 듀크대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이에 데이비슨으로 입학했고 1학년부터 좋은 활약을 보이자 그제서야 관심을 보이고 전학생으로 받고 싶어했다는 내용. 이에 커리는 '그때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으면 이젠 내가 필요없다.'며 듀크대의 영입제안을 거절했다고 한다.

3. 선수 시절

3.1. 2009-10 시즌

커리는 루키 시즌 평균 17.5득점 5.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루키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으며 166개의 3점 슛을 넣어 루키 최다 3점 기록을 경신한다.[9] 하지만 신인왕은 루키 시즌에 무려 20-5-5를 찍은 타이릭 에반스가 차지했다.[10] 골든스테이트가 워낙 약체팀인 관계로 플레이오프는 근처도 못 갔지만(2009년 26승 56패), 달랑 6명의 로스터로 강팀 포틀랜드를 잡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
시즌 종료 후엔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합류, 경기당 10분정도를 소화하며 FIBA 세계 선수권 대회 우승에 일조를 하였다.

3.2. 2010-11 시즌

이 시즌에 골든스테이트 소속 루키였던 제레미 린의 2022년의 회상에 의하면 이 시즌에 부임했던 키스 스마트 감독은 지난 루키 시즌에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던 커리를 좋지 않게 봤는지 커리에게 고함을 지르는 등 좋지 않은 대우를 했다고 한다. #

3.3. 2011-12 시즌

3.3.1. 거듭된 발목 부상

이전에도 부상 경력이 있긴 했지만, 커리의 발목 문제는 2010년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심화되었으며, 대충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0년 8월, 미국 대표팀 훈련 중 왼쪽 발목 부상
2010년 12월, 오른쪽 발목 부상으로 무기한 결장, 이후에도 같은 부위에 계속해서 부상을 입음
2011년 5월, 계속된 부상으로 오른쪽 발목 수술
2012년 1월 샌안토니오 스퍼스와의 경기에서 부상
2012년 2월 피닉스 선즈와의 경기에서 부상
2012년 4월, 오른쪽 발목 재수술
2013년 1월, 오른쪽 발목 부상

여기에 자잘한 발목 부상은 기재되어 있지 않지만, 이것만으로도 2011년, 2012년 시점에서는 사실상 인저리 프론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부족함이 없는 부상 경력이다.

이때만 해도 앞으로의 커리의 전망이 상당히 암울했던 게 사실인데, 2012년 시점에서 이미 오른쪽 발목만 두 번이나 인대수술을 경험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제대로 된 원인을 알 수 없어 타인의 인대를 이식받을 계획도 있었지만, 고해상도 카메라로 부상 부위를 촬영한 결과 아주 미세하게 파괴된 조직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이것을 제거한 후 봉합하면서 겨우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데드리프트 등으로 코어 근육을 강화하기 시작한 것이 이 재활 기간으로, 발목에 부담을 덜 주는 움직임을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엄격하게 실시했다고 한다. 더불어 잠스트 발목보호대를 새롭게 사용하면서 부상 위험을 줄이는 데 매진했다. 데드리프트를 180kg이나 들어올린다는 무지막지한 웨이트는 이때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에도 자잘한 부상이 없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만장일치 MVP를 받았던 2015-16 시즌에만 해도 페넌트레이스 기간 동안 2번, 플레이오프 기간 동안 2번으로 총 4번의 부상을 당했고 그에 따른 경기 결장이 있었다.여전히 부상이 위험 요소인 선수 중 하나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2017-18 시즌 정규 시즌을 발목부상으로 인해 51경기밖에 출전 못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2라운드 2경기에 복귀했다. 커리의 선수생활을 위해서는 발목을 잘 관리해야 한다.

2021-22 시즌에도 마커스 스마트에게 깔린 것이긴 하지만 마지막 18경기를 모두 뛰지 못 하는 부상을 당했다.

3.4. 2012-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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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2013-14 시즌

2012-13 시즌의 활약으로 명실상부 슈퍼스타의 대열에 합류했으며, 2014 올스타전 백코트 부문에서 부상으로 쉬고 있는 크리스 폴 코비 브라이언트를 제치고 서부 백코트 득표 1위로 커리어 첫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데릭 로즈, 크리스 폴, 드웨인 웨이드, 코비 브라이언트, 제임스 하든, 데런 윌리엄스, 라존 론도, 러셀 웨스트브룩, 토니 파커 등 여러 강팀, 명문 팀의 쟁쟁한 주전 가드들이 널려 있는 현실을 봤을 때 올-NBA 팀 진입이 언제 가능할지는 약간 의문이 들기도 했으나, 상기 리스트 선수들의 무려 절반이 부상으로 골골대고 있고 커리의 순조로운 성장세를 봤을 때 올-NBA 팀 진입은 생각보다 빨리 이루어질 듯하다. 정규 시즌이 거의 끝난 시점에 적어도 올-NBA 세컨드 팀에는 오를 것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올-NBA 퍼스트 팀 2자리를 놓고 하든, 폴과 경쟁한 끝에 하든에게 13점 뒤진 489점을 획득하며 올-NBA 세컨드 팀에 입성했다.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는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와 만나 7차전까지 물고 늘어졌지만 부상 때문에 허전해진 골밑의 공백을 극복하는 데 실패하며 탈락했다.

이후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에 또다시 합류, 경기당 20분 정도를 소화하며 팀의 우승에 공헌하였다.

3.6. 2014-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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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2015-16 시즌

"나는 한 번도 현재에 안주한 적이 없고 계속 나아지고 싶다."
-스테판 커리[11]

역대 최초 만장일치 MVP 선정, 역대 최고의 정규 시즌인가를 두고 갑론을박을 일으킬 정도로 엄청난 성적을 찍는다.
자세한 내용은 스테판 커리/선수 경력/2015-16 시즌 문서 참조.
2015-16 시즌 스테판 커리 성적
최종성적
TS% 필드골 필드골 시도 필드골 성공률 2-PT 2-PT 시도 2-PT 성공률
.669
(1위)
805
(1위)
1598
(2위)
.504 403 712 .566
(8위)
3-PT 3-PT 시도 3-PT 성공률 자유투 자유투 시도 자유투 성공률 어시스트
402
(1위)
886
(1위)
.454
(2위)
363
(15위)
400 .908
(1위)
527
(8위)
스틸 턴오버 득점 경기당 득점 경기당 어시스트 경기당 스틸 경기당 블럭
169
(1위)
262
(6위)
2,375
(2위)
30.06
(1위)
6.7
(10위)
2.14
(1위)
0.2
PER 공격 레이팅 수비 레이팅 OWS DWS WS WS/48
31.5
(1위)
125
(2위)
103 13.8
(1위)
4.1
(10위)
17.9
(1위)
.318
(1위)
코트 마진 공격시 온코트 마진 수비시 온코트 마진 VORP BPM OBPM 분당 볼 점유율
12.4
(1위)
12.4
(1위)
0.1 9.8
(1위)
11.94
(1위)
10.35
(1위)[12]
32.6
(2위)
각종 기록들에 대한 내용은 농구의 기록 계산법 항목 참조 PER, WS, WS/48, VORP 등은 개별 항목 참조.

3.8. 2016-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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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2017-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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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2018-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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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 2019-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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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20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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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 2021-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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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2022-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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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 2023-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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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 2024-2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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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 2024 파리 올림픽

커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올림픽이 유력한 대회. 평가전에서는 무난한 활약을 해줬으나 본선 부터는 수비에서 큰 약점을 노출하고 있다. 덩달아 2차전에서는 3점 0/6, 야투 단 하나만 성공시키는등 공격에서도 최악의 활약으로 팀의 구멍이 되고 있다.

하지만 미국의 우승을 저지할 수 있는 국가라 거론되던 난적 세르비아와의 4강전에서 귀신같이 부활하였다. 경기 내용은 충격적이게도 4쿼터 초반까지 세르비아가 미국을 압도했고, 10여점 차의 점수차가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커리가 이번 경기에서 제대로 활약했는데, 무려 36득점 3점슛 9개를 기록했다. 커리의 활약에 힘입어 기어이 미국팀은 세르비아팀에게 역전승하였다.[13]

한국시간으로 11일 프랑스와의 결승에서는 4쿼터 막판 프랑스의 추격을 저지하고 승부에 쐐기를 박는 4연속 3점을 기록하며 미국의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미국팀은 10점 이상의 점수차를 유지하면서 프랑스팀을 압도해 나갔지만 3쿼터부터 실수가 잦아지더니 4쿼터 종료 3분 전 3점차이로 따라잡히는 위기의 순간이 왔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커리가 만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활약을 함으로서 프랑스의 추격을 멀리 뿌리치고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 날 커리는 3점슛만으로 24점(8/12)을 폭격하였고, 특히 4쿼터 종료 직전에 스티브 커 감독의 허락 하에 르브론과 여러가지 종류의 투맨 게임을 선보이며 4연속 3점 슛 성공은 프랑스 추격에 결정적으로 찬물을 끼얹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종료 36초를 남기고 비하인드 크로스 드리블을 하며 두 명의 프랑스 수비수들을 달고 자세가 망가진 상태로 성공시킨 3점 슛은 서커스를 방불케 하는 신기였다. 커리에게 더블팀이 붙느라 외곽에서 케빈 듀란트와 르브론 제임스가 완전히 오픈된 상태로 공을 요구하고 있었는데도 커리는 자신의 핫 핸들을 믿고 고각 3점을 던졌고 시원하게 들어갔다. 오픈된 자신에게 공을 달라고 요구하던 르브론과 듀란트가 말도 안되는 3점이 들어가자 정말 찐으로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고, 성공 후 커리는 Night Night 세리머니를 동료들과 나눴다.

이번 파리 올림픽에서 커리는 평균 득점 14.8점으로 미국 국대 평균 득점 1위로 자신의 생애 첫번째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올림픽을 마감하였다.[14] 참고로 마지막 두경기인 준결승, 결승 두경기 평균 스탯이 30득점 (8.5 3PM, 62.5 FG%, 65.4 3P%) 이다.

준결승, 결승에서의 엄청난 활약으로 인해 2024 파리 올림픽 베스트 5로 선정되었다.[15][16] 동료 르브론 제임스와 더불어, 왜 자신이 농구의 심장부에서 700억대의 연봉을 받는 슈퍼스타인지 이번 올림픽 무대에서 제대로 증명했다고 볼 수 있다.


[1] 아버지 델 커리가 스테판이 태어난 1988년 당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기에 오하이오에서 태어났지만, 델이 클리블랜드에서 한 시즌만 보내고 샬럿 호네츠로 이적하면서 스테판은 아버지가 선수 생활을 했던 샬럿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태어나기만 브루클린에서 태어나고 노스캐롤라이나에서 자란 조던과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언론에서 커리를 지칭할 때는 '샬럿 출신'이라고 한다. 르브론 제임스와 같은 병원 출생이라고 한다. [2] 원래 커리는 흑백혼혈인데 사람들이 생각하는 흑인치고는 피부색이 밝기 때문에 백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3] 이때 커리는 충격을 받고 3점 슛을 본격적으로 연마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부친 델 커리는 버지니아텍 명예의 전당에 올라 있다. [5] 1950년 7월 13일 뉴욕 주 퀸즈 출생. 대학 시절 이스트 캐롤라이나 대학교와 호프스트라 대학교를 거치며 농구선수로 뛰었고, 학업 수행 시에는 역사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NBA 팀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FA로 영입되었으나 조기 탈락했고, 1973년 뉴욕 주 낫소 카운티 힉스빌의 '홀리 트리니티 고등학교' 농구부에서 감독 생활을 시작했다. 1978년부터 1년 동안 데이비슨 칼리지의 코치로 몸담다가 1979년부터 10년 동안 롱아일랜드 루터런 고등학교의 감독을 맡아 빌 웨닝턴을 육성했다. 1989년부터 데이비슨 칼리지로 옮겨 임기 33년 동안 NCAA 토너먼트 진출 10회에 최고성적 8강(2008), NIT 진출 8회, CBI 진출 1회 등의 업적을 지녔다. 커리 외에 또 다른 제자로는 브랜던 윌리엄스(현 새크라멘토 킹스 부단장) 등이 있으며, 2022년 아들 맷 맥킬롭 코치에게 감독직을 넘겨주고 지도자 일선에서 은퇴했다. [6] 당시 1위는 텍사스 대학교 농구부 케빈 듀란트. [7] 그는 2학년 당시 토너먼트 기간 동안 무려 평균 29득점을 올렸고, "자신이 출전한 NCAA 토너먼트 첫 네 경기"에서 모두 30득점 이상을 기록한 역대 네 번째 선수가 되었다. 아버지 델 커리는 이때 활약에 대해 "제 와이프와 저는 종종 경기 끝나고 차 안에서 아무 말도 안 하고 돌아가곤 했어요. 도저히 믿을 수 없었거든요"라는 반응을 보였다. 또한 커리 일가는 토너먼트에서 탈락 이후 샬럿 밥캣츠 경기를 보러갔는데, 경기장 관계자들이 "경호를 붙여줄까요?"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델 커리는 "무슨 소리냐. 지금까지 몇 번이나 경기 보러왔는데, 경호가 필요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라고 일축하고 그냥 입장했는데, 수많은 팬들이 스테판 커리에게 달려들었고, 이에 델 커리는 기겁해서 경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토너먼트 맹활약 이후 갑자기 인기선수가 된 것이다. [8] 현 시대 수많은 농구 전문가들도 커리가 이런 대선수가 될 거라 예측 못했는데, 농알못으로 소문난 뉴욕 팬들이 왜 그랬는가라는 이유는 속사정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가장 설득력 있던 가설이 르브론 제임스 때문이라는 설, 르브론은 커리의 고교, 대학시절 때부터 시즌 중에도 쉴 때 커리의 경기를 직관할 정도로 커리빠였고, 직관적으로도 르브론과 조합이 잘 맞는 이타적인 캐치 앤 슈터였으며, 당시 감독 디앤토니 스타일에도 잘 맞는 슈터 유망주였다. 이 때문에 한참 뉴욕이 FA를 앞둔 르브론 제임스 영입작전을 벌일 때, 르브론을 꼬실 수 있는 카드로 커리를 일찌감치 내정한 데다, 그나마 앞선 상위 5팀(미네소타가 5픽, 6픽을 둘 다 보유)이 커리를 지명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지명을 확신했던 것. 그런데 예상 외로 3점 슈터에 대해선 중복자원이 많았으며, 이미 몬타 엘리스를 차세대 주전 1번으로 낙점한 돈 넬슨의 골든스테이트가 전격적으로 앞 영상에 나오듯 팀의 주전급 식스맨 가드 자말 크로포드를 처분하면서 커리를 지명해버린다. 그러니 뉴욕 팬들 입장에서는 커리를 놓친 입장이 되어버린 것. 골든스테이트 팬들도 "엘리스 쓴다면서 커리는 왜 지명함?"이라는 의아한 반응이 더 많았다. [9] 이 기록은 2012-13 시즌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 데미안 릴라드가 185개로 경신한다. 물론 둘의 효율성 차이는 크다. 당시 커리의 성공율은 43.7%, 릴라드의 성공율은 37.7%였다. [10] 루키 시즌에 20-5-5를 찍은 것은 역대 4명뿐이다. 오스카 로버트슨, 마이클 조던, 르브론 제임스, 타이릭 에반스. [11] 2016년 3월 15일 뉴올리언스 펠리컨스와의 경기이자 본인의 생일날 홈경기 연승을 이어가며 인터뷰에서 남겼던 말. [12] 역대 유일한 두자리수 기록이자 티맥과 조던을 넘은 역대 1위 기록이다. [13] 선수 경력 내내 치열한 경쟁을 벌였던 르브론 제임스도 트리플 더블을 기록하며 역전극에 크게 기여했는데, 커리와 르브론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포효하고 그 앞에서는 듀란트가 포효하는 모습을 보이며 NBA 팬들을 감동시켰다. [14] 2위는 14.2점의 르브론, 3위는 13.8점의 듀란트. [15] # [16] 나머지 4명은 데니스 슈뢰더, 르브론 제임스, 빅터 웸반야마, 니콜라 요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