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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프 슈트레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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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000000><colcolor=#fff,#dddddd> 구스타프 슈트레제만
Gustav Streseman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9-040-27%2C_Gustav_Stresemann.jpg
출생 1878년 5월 10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베를린
사망 1929년 10월 3일 (향년 51세)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재임기간 제16대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1923년 8월 13일 ~ 1923년 11월 30일 (109일)
제8대 바이마르 공화국 외무장관
1923년 8월 13일 ~ 1929년 10월 3일 (2243일, 6년 51일)
국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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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령
바이마르 공화국
]]
종교 개신교
직업 정치인
최종 당적

서명
파일:구스타프 슈트레제만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정계 입문2.3. 제1차 세계 대전2.4. 바이마르 공화국 태동기 (1920년~1923년)2.5. 짧았던 총리 기간 (1923년)2.6. 외무장관 (1923년~1929년)2.7. 죽음
3. 평가4. 여담

[clearfix]

1. 개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16대 총리이자 외무장관.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특성상 총리로는 단명했지만, 1923년부터 1929년까지 외무장관으로 활약하면서 1차 세계대전 후 국제적으로 고립무원의 처지였던 독일의 지위를 크게 끌어올리는 데 기여한 인물. 그 공로로 1926년 프랑스의 외무장관 아리스티드 브리앙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1878년 베를린 루이젠슈타트에서 맥주 양조와 숙박업을 겸하는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17살의 나이로 어머니를 여의어서 낭만주의에 빠지고 우울한 청년기를 보낸다.

16살에 안드레아스 김나지움으로 진학하고, 역사에 대한 큰 관심을 보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프리드리히 2세를 가장 좋아했던 역사적 인물이라 한다. 사실주의 작가인 프리드리히 스피엘하겐나 루트비히 울란트, 프라일리그라트, 테어도어 폰타네, 괴테 등 시인을 즐겨 읽는다. 1897년 베를린 대학교로 진학한 그는 "네오게르마니아"라는 부르센샤프트 [1] 소속 학생 단체에 가입해 잡지에 글을 쓴다. 그는 프리드리히 나우만를 추종하는 자유주의 학생단체를 창설한다. 역사와 독일 문학에서 특히나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교사가 될 지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려를 했지만, 정작 그가 교원 자격증을 얻은 분야는 크게 관심이 없던 외국어와 자연 과학 분야였다.

결국 그는 교사의 길을 포기하고, 국제 정치학을 자신의 전공으로 삼았으며 나중에는 라이프치히 대학교로 학적을 옮겨 박사학위을 수여받았다.[2]

2.2. 정계 입문

박사 학위를 수여받은 뒤, 슈트레제만은 베를린 출신의 부유한 유대계 실업가의 딸인 케이트 클레펠트와 결혼했다.[3] 1901년에 "독일 초콜릿 제조자 연합"이라는 제조업자 길드에 가입해서 카카오 열매에 부과되는 관세를 줄이고 설탕 카르텔과 협상해 싼 가격을 얻어내려 한다. 경제적으로 안정을 얻게 된 슈트레제만은 본격적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다. 1903년에 친(親) 기업 중도보수 국민자유주의 정당인 국민자유당(Nationalliberale Partei)에 입당했다. 1906년 드레스덴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된 것에 이어서 1907년에는 제국의회 의원에도 당선되었다. 하지만 이후 슈트레제만은 사회복지 정책의 확장 문제를 둘러싸고 당 내 우파계열과 갈등을 빚으며 1912년 의원직을 모두 상실했다.

선거에서 낙선한 슈트레제만은 해운 재벌 알베르트 발린을 만나서 경제계에서 활동을 재개하였다. 슈트레제만은 경제 국가안보의 연장선으로 보았다. 예컨대 그는 외교부를 장악하고 있던 귀족들을 언론인과 재계 인물들로 교체하고 대사관들이 독일 상업의 교두보 역할을 하게 하는 개혁을 주장했다. 이 점에서 북미, 미국을 모방해야 하는 표본으로 보았고, 발린의 도움을 받아 1909년부터 독일-캐나다, 독일-미국 경제 협회와 같은 조직을 창설하고 이끌었다. 1913년에 그가 색슨 상공인 연합회를 위해 작성한 미국 경제 보고서에는 미국의 대기업과 대량생산에 큰 영감을 받았다는 점과 미국이 독일의 남미 진출에 장애물이 될 것이라는 우려를 엿볼 수 있다.

이즈음부터 슈트레제만은 당시 독일 엘리트들에 팽배했던 사상을 수용해서, 영국, 프랑스가 식민지를 독점한 것이 독일 경제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하게 된다. 1910년까지도 그는 평화적인 협상으로 경제적 공존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영국이 독일이 아닌 프랑스의 1912년 모로코 점령을 지지하는 사건이 터지자 환멸을 느끼고 전쟁을 지지하게 된다. 또 대학 시절 신봉했던 자유주의는 점차 민주주의보다는 "협상과 실용이 우선인 법치주의"로 탈바꿈한다. 그는 열렬하게 민족주의, 범게르만주의 군주주의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는 "우중들이 지배하는 전제주의"라며 비판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가 세계대전의 촉발에 기여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2.3. 제1차 세계 대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징병검사에서 그레이브스병 때문에 병역 의무를 면제 받은 슈트레제만은 같은 해 12월 제국의회 의원으로 다시 선출되었다. 1차 대전 시기에 슈트레제만이 보여준 정치적인 변화는 꽤나 극적이었다. 슈트레제만에게 이 전쟁은 방어전이었으며, 독일 민족의 안위를 위한 생활권(Lebensraum)을 벨기에, 폴란드, 발트, 스칸디나비아 전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보다 경제적으로 열등한 영국이 독일의 평화적 팽창을 저지했으며, 전쟁의 원흉이라고 주장했다. 또 전쟁의 전망에 대해 상당히 낙관적이어서, 프랑스 점령할 경우의 국경 변화, 관세 협정에 대하여 글을 쓰기도 했다. 나폴레옹을 인용하면서, 중유럽(미텔오이로파) 관세 동맹을 맺어 영국을 상대로 대륙봉쇄령을 통한 경제전쟁을 개전하고, 프랑스를 점령한 후 대서양을 향한 항구를 확보해야 한다 주장했다. 또 독일의 약점인 소모전에 대한 해결책으로써 잠수함을 대거 도입해 미국발 물자 운송을 저지할 것을 주장했다. 결국 잠수함이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했음에도 슈트레제만은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았고, 오히려 종전 이후에는 잠수함을 너무 늦게 도입하여 패전했다고 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에리히 루덴도르프와 같은 군부 인사들과도 관계를 유지하며 사회복지제도의 확충 같은 정책도 논의하고는 했는데 이 시기 비스마르크가 사민당 견제수단으로 복지 정책을 도입한거나 빌헬름 2세가 처음에 노동자들에게 친한 모습을 보여주며 '노동 황제'라는 별명을 가지는 등 독일 보수주의도 복지정책에 관심을 가지긴 했다.

내부적으로는 베트만 홀베그의 "온건한" 정책에 반대하여, 에른스트 바서만과 함께 야당을 지휘했다. 전쟁 기간의 야당 경험은 그로 하여금 엘리트주의적이던 생각을 수정하여, 대중 민주주의에 호의적인 자세를 취하게 했다. 그는 참정권을 늘리고, 의회의 권한을 신장하는 정치 개혁을 요구했다. 슈트레제만의 행보를 보면, 본인의 정치적 목표와 진실한 정치 철학적 사유가 수렴하는 패턴을 볼 수 있다. 의회주의를 지지하는 것에는 베트만 홀베그 정권을 엎으려는 기회주의적 목표가 있었지만, 그는 일기장에 의회주의의 이로움을 확신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결국 1917년에 그는 베트만 홀베그를 상대로 정치 공작을 펼쳐 내각을 전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국민자유당 출신임에도 사회민주당과 진보당의 연합당인 젠트룸이 집권하는데 도움을 준다. 같은 해 7월 사망한 바서만을 이어 슈트레제만은 국민자유당의 당수가 된다.

2.4. 바이마르 공화국 태동기 (1920년~1923년)

전쟁은 독일의 패배와 빌헬름 2세의 퇴위로 끝났다. 여전히 심정적으로는 왕당파였던 슈트레제만이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뒤바뀐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 환경에 적응하고자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는 저명한 사회학자였던 막스 베버가 창설을 주도한 중도 좌파계열 독일민주당에 입당했지만, 우파와의 관계로 인해 금방 축출되었다. 그러자 슈트레제만은 개신교 신자와 중상류층의 지지를 배경으로 하는 독일 인민당을 설립하고 스스로 당수에 오른다. 독일 인민당은 자유주의 우파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관세 인하, 세속주의적 교육, 기독교 가족관 진흥을 목표로 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 단호히 반대했다.

그렇지만 심정적 왕당파 성향을 숨길 수 없었는지, 극우 왕당파의 카프 반란이 일어나자 마치 이 반란을 옹호하는 듯한 미적지근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독일 사회민주당- 독일 민주당- 가톨릭 중앙당이 연정을 이룬 바이마르 정권에게 반 공화주의자로 찍히고 만다. 그러나 정치적 암살, 반란, 폭동 등이 연이어 일어나며 혼란이 가중되자 마침내 바이마르 공화국을 주도하던 중도좌파 계열과도 타협하는 모습을 보인다.[4]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제헌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슈트레제만은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에 대해 단호히 반대하는 모습을 보였고, 이 기간 뿐만 아니라 죽는 날까지 베르사유 조약의 개정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였다.

2.5. 짧았던 총리 기간 (1923년)

1923년 8월, 독일 내부에서는 초인플레이션이, 외부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보상금 지불 이행을 요구하며 프랑스 벨기에 군대가 독일 최대의 산업 지역 루르지역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는 위기의 상황에서 슈트레제만은 사회민주당·중앙당·독일민주당·독일인민당으로 구성된 대연정의 수반인 총리가 되었다. 연합군의 루르 지역 점령에 대해 전임자였던 쿠노 내각은 루르 지역 독일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지시하는 소극적 저항을 시도했지만, 프랑스와 벨기에가 자국의 노동자들을 이 지역으로 데려오는 방법으로 대응하면서 이러한 소극적 저항은 오히려 독일 내부의 인플레이션과 정부의 재정 위기만을 가속화시켰을 뿐이다. 외무장관 겸 총리직을 겸하고 있던 슈트레제만의 방침을 요약하자면, 베르사유 조약을 성실히 이행하면서 협상국의 신뢰를 얻고, 이러한 신뢰를 바탕으로 독일에 유리하게 조약을 개정하는 것이었다.

한편 초인플레이션에 대한 대응으로 휴지조각이 된 기존의 마르크를 폐기하고 대신 렌텐마르크를 발행하는 통화 개혁을 단행하였고, 이것이 성과를 거두어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은 마침내 잦아들었다. 이는 슈트레제만 내각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눈새 당시 쾰른 시장이었던 콘라트 아데나워 라인란트 지역의 자치권을 요구하면서 라인란트가 독일에서 분리되어 완충지역으로 독립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정국을 뒤흔들었고[5], 작센 튀링겐의 공산당을 탄압하면서도 같은 시기 나치가 일으킨 맥주홀 폭동에 대해서는 동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분노한 사민당 장관들이 내각에서 탈퇴하면서 그대로 대연정은 붕괴하고 불신임 안이 가결되면서 슈트레제만은 100일하고도 3일이라는 짧은 총리직 임기를 마친다.

2.6. 외무장관 (1923년~1929년)

비록 그의 내각은 무너졌지만 여전히 중도우파의 주요 지도자었던 슈트레제만은 연립내각에서 외무장관 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총리 항목에서도 써놓았지만, 슈트레제만의 외교방침은 베르사유 조약을 현실적인 한계 안에서는 가능한 성실히 따르면서 회복한 신뢰를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을 점진적으로 개정해나가는 것이었다. 평가는 엇갈리지만 적어도 서방 측과 슈트레제만의 협상은 성공적이어서 독일의 배상금 액수 삭감을 허용하는 도스 안이 통과되었고, 독일-프랑스간의 국경을 인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그에게 노벨평화상까지도 안겼다. 그리고 마침내 1926년에는 루르 지방에서 연합군이 철수했으며,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가입이 거부됐던 국제연맹에도 가입했다.

2.7. 죽음

하지만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 이상 진척되지 못한 채로 답보 상태에 놓였고, 그가 속한 독일 인민당은 당시 부상하던 나치당에 지지자들을 빼앗기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좌절한 슈트레제만의 건강은 악화되었고, 그는 새로운 중도우파 정당을 창설하기 위해 고심하던 와중에 1929년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3. 평가

7년에 걸쳐 외무장관 직을 역임하면서 슈트레제만은 신생 바이마르 공화국이 대내외적으로 정착해 뿌리를 내리는 차원에서 크게 기여했다. 정작 본인부터가 처음엔 바이마르 공화국을 거부했던 것은 아이러니 또한 유럽의 안정과 평화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모습은 그의 후임자들과는 대비되면서 오늘날 학계에서는 그를 유럽 연합의 선구자로 보는 시각까지 존재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사고와, 영국-프랑스-소련 사이의 다툼을 이용한 기회주의적인 처사, 서방에게 유화적이었던 태도와는 정반대로 1차 대전 패전으로 인해 폴란드에 양도한 폴란드 회랑을 되찾으려는 시도 등으로 인해 비판받기도 한다.

다음은 R. Morsey의 슈트레제만에 대한 평가이다.
슈트레제만의 이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많아 통합 유럽의 기수로 인식되었던 1945년 이후에는 영웅 대접을 받았으나 1950년대에는 점차 비판받게 되었다. 특히 이 비판 작업은 슈트레제만의 방대한 문필 작품이 발견되고 주로 미국의 역사가들이 이를 임의대로 분석하면서 시작되었는데, 이에 따라 슈트레제만은 자신의 야망과 시대적 요구를 교활하게 일치시킨 민족주의 열정을 품은 변덕스럽고 기회주의적인 정치가로 묘사되었다. 사람들은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없고 오히려 원칙적인 수준에서 '술책'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의 변덕스러운 성격, 획일성과 전통에 대한 감상적인 집착도 강조되었다. 반면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독점자본주의의 대변자이자 히틀러의 선구자로 평가했다. 최근의 한 전기작가는 슈트레제만을 독일의 부(富)와 권력 회복, 독일의 전통적인 사회·경제 질서 유지라는 국가적 목표를 추구하는 한편 그 정치적 수단을 선택하는 데는 융통성을 보여준 ' 실용주의적 보수주의자'로 규정하고 있다. 또다른 사람들은 유럽인의 시각에서 그가 독일의 '애국자'였음을 강조했으며 독일의 역사가들도 한때 이와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결론적으로 슈트레제만은 다양한 정치적 변신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의 진짜 정치가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여담



[1] 자유주의를 지향하던 독일 학생 단체 [2] 그의 박사논문은 대기업들의 카르텔로 인하여 몰락하고 있는 소규모 양조업자들을 주제로 삼고 있었는데, 이 박사논문은 추후 그의 정적들이 그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수단으로 활용된다. [3] 그리고 당연히 나중에 외무장관으로 활동하던 시절에 이 점으로 인해 나치한테 씹혔다. [4] 다만 죽을 때까지 왕정주의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5] 실제 이 시기 아데나워는 프랑스 사령관과 라인란트 자치에 관해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