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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사회민주당 당수 | 기독교민주연합 당수 |
|
|||
출생 | 1884년 1월 31일 | ||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브라켄하임 | |||
사망 | 1963년 12월 12일 (향년 79세) |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슈투트가르트 | |||
재임기간 | 초대 대통령 | ||
1949년 9월 13일 ~ 1959년 9월 12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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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707070><colcolor=#fff> 배우자 | 엘리 크나프 | |
자녀 | 슬하 1명 | ||
학력 | 뮌헨 대학교 | ||
종교 | 개신교 ( 독일 개신교회)[1] | ||
정당 |
[[자유민주당(독일)| 자유민주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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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독의 초대 대통령으로, 콘라트 아데나워 초대 총리와 함께 전후 독일 사회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에 크게 기여한 인물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2. 생애 전반기
1884년 뷔르템베르크와 슈바벤 지역 경계의 브라켄하임(Brackenheim)이라는 소도시에서 태어났다. 이후 뮌헨과 베를린의 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언론을 전공한 이후, 언론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 시기부터 자유주의적인 성향을 보여주면서 진보인민당(Fortschrittliche Volkspartei, 약칭 FVP)에 가입한 호이스는 1차 대전 이후에도 <독일 민족(Die Deutsche Nation)>가 같은 잡지를 출판하면서 활발히 활동하는 한편 FVP를 계승한 독일 국가당[A](Deutsche Staatspartei, 약칭 DStP) 소속으로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의원으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한 차례,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또 한 차례, 총 두 차례 선출되기도 한다.하지만 독일국가당[A]은 1933년 나치당의 집권과 수권법의 실행으로 인하여 해산되었으며 이후 제3제국 기간 내내 언론인 겸 재야정치인으로 지낸다. 다만 호이스 본인 역시 제국의회 의원으로 수권법에 동의표를 던졌는데, 호이스 본인에게는 일종의 흑역사. 호이스의 수권법 찬성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호이스가 나치에 대해 개인으로 품고 있던 반감을 바탕으로 수권법에 대해 기권표를 던지려고 했지만 당 내 지도부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찬성했다고 보고 있기는 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신있게 반대표를 던지거나 불참했어야했다고 대차게 까는 사람들 역시 적지 않은 편.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미군에 의해 뷔르템베르크의 교육부 장관으로 임명된 호이스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을 규합해서 자민당을 창당하였으며, 1948년에는 제헌위원회의 위원으로, 독일연방공화국의 헌법을 작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자유주의자들이 우파와 좌파로 분열한 반면, 호이스는 이 둘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데 성공했던 것.
3.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초대 연방하원 의원 중 한명으로 당선된 호이스는 1949년 9월 대통령직을 놓고 연방의회에서 열린 간선 선거를 통해 사민당의 쿠르트 슈마허 대표를 제치고 독일연방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는 영예를 누리게 된다.[4]제왕적 대통령직이 바이마르 공화국의 파멸을 불러왔던 만큼 호이스는 신생 서독에 민주주의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리는 것을 돕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까지 대통령에게 쓰이던 '각하(Exzellenz)'라는 권위적인 호칭 대신에 '호이스 씨(Herr Heuss)'라는 호칭을 사용했으며, 실질적 수반인 총리에게 정치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국무회의에는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단 한번도 참가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명예는 있되 실권은 없는 독일 대통령의 현재 모습을 사실상 호이스가 정착시킨 것.
호이스의 임기 말년에 콘라트 아데나워가 후임 총리인 루트비히 에르하르트를 견제하고자 자신이 직접 대통령 직에 출마해 상왕 노릇을 하려 했는데, 이러한 아데나워의 시도는 자신이 일관되게 추구했던 '제왕적 대통령직 탈피'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것이었기에 호이스는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결국 아데나워가 자기 뜻을 꺾고 대통령 선거 출마를 포기하는 쪽으로 정리되었다. 10년 가까운 대통령 재임 기간 동안 그가 유일하게 보인 정치적 입장 표명이라고 봐도 무방한 사건.
이러한 민주적인 행보 중에서 단연 압권인 사건은 1959년에 있었는데, 야당 사민당조차도 호이스의 3선에 반대하지 않는 상황이었음에도 초대 대통령부터 헌법을 개정할 수는 없다며 깨끗이 3선을 포기하고 대통령직에서 내려왔던 것. 심지어 재선투표가 있던 1955년에도 사민당은 호이스를 지지해서 자신들의 대통령 후보조차 내지 않을 정도였다.
기존의 국가였던 독일인의 노래 중에서 국가주의 성향이 있는 1절과 2절은 버리고 3절만 부르도록 한 것도 호이스의 재임 중 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