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법인 성지학원 | |||
대학 | 전문대학 | 고등학교 | 중학교 |
부산외국어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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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지고등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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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명 | 성지중학교 |
영문명 | SeongJi Middle School |
한문명 | 盛智中學校 |
개교 | 1968년 3월 5일 |
폐교 | 2010년 2월 28일 |
유형 | 일반계 중학교 |
성별 | 남자중학교 |
운영형태 | 사립 |
소재지 | 부산광역시 남구 유엔로 39 ( 우암동) |
1. 개요
부산광역시 남구 우암동에 위치한 폐교된 중학교. 이 학교가 폐교되고 나서 성지학원 소속 중등교육시설로 성지고등학교 단 하나만 남게 되었다.2. 역사
2.1. 연혁
- 1968년 3월 5일 : 개교
- 1971년 9월 29일 : 체육관, 박물관 개관
- 1988년 11월 11일 : 컴퓨터실 개관
- 2001년 10월 12일 : 급식소 개소
- 2007년 11월 ??일 : 폐교 승인(폐교 확정)
- 2010년 2월 28일 : 폐교
3. 상징
- 교표 -
- 교훈 - 성실, 협동, 창조
- 교목 - 은행나무
- 교화 - 철쭉
3.1. 교가
- 1절
이름없는 골짝에도 꽃이 피어나듯이
엎드려 고운젊음 슬기고 빛내노니
남쪽바다 한기슭에 기약도 보람차다
드높은 뜻이 있어 몰래 굽어 보시니
애오라지 가꾼 씨앗 열매 맺어라
애오라지 가꾼 씨앗 열매 맺어라
엎드려 고운젊음 슬기고 빛내노니
남쪽바다 한기슭에 기약도 보람차다
드높은 뜻이 있어 몰래 굽어 보시니
애오라지 가꾼 씨앗 열매 맺어라
애오라지 가꾼 씨앗 열매 맺어라
- 2절
아스라이 소스라쳐 다시 깨어나는 날
숨겨온 벅찬자랑 나누어 가지시리
남쪽바다 한기슭에 기약도 보람차다
드높은 말씀으로 몰래 깨쳐주시니
등터오는 그 아침에 거듭 나리라
등터오는 그 아침에 거듭 나리라
숨겨온 벅찬자랑 나누어 가지시리
남쪽바다 한기슭에 기약도 보람차다
드높은 말씀으로 몰래 깨쳐주시니
등터오는 그 아침에 거듭 나리라
등터오는 그 아침에 거듭 나리라
4. 학교 시설
- 본관
- 운동장 - 학교 자체가 산을 깎아서 지은 곳이다보니, 운동장 부지를 확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고, 그나마 확보한 운동장도 상당히 협소하여 제 구실을 못하였다. 어느정도였냐면 웬만한 초등학교 운동장 규모보다도 못했으며, 축구를 할 경우에도 거의 풋살 수준으로 밖에 못할 정도의 규모였다. 심지어 골대도 핸드볼 골대였다. 게다가 산 언덕에 위치한 관계로 축구를 하다가 실수로 공이 펜스 밖으로 벗어났을때는 회수 자체가 불가능했다.[5]
- 주차장
5. 출신 인물
가나다순으로 정렬해주시기 바랍니다. |
나무위키에 등재될 정도의 저명성 있는 인물만 기록 가능합니다. |
- 공윤권 :전 경남도의회 의원
- 권순찬 : 성지중학교 배구부출신 1988년 입학 1991년 졸업, 2023년 1월까지 흥국생명 감독역임
- 권준형 : 성지중학교 배구부출신 2002년도에 입학하여 2005년도에 졸업을 하였다.
- 김보언
- 박주형(배구선수) : 성지중학교 배구부출신 2000년도에 입학하여 2003년도에 졸업을 하였다.
- 박찬(1971)
- 이경규 : 가장 잘 알려진 출신 인물. 1973년도에 입학하여 1976년도에 졸업을 하였다. 이때도 코미디언의 기질을 보여 학생들을 잘 웃겼지만, 학업성적도 상당히 우수했다고 한다..
- 이동호(1960)
- 정성현(배구선수) : 성지중학교 배구부출신 2004년도에 입학하여 2007년도에 졸업을 하였다.
6. 기타
- 학년당 7개 학급이 존재했다가 이후 5개 학급으로 줄어들었다.
- 2000 ~ 2002년도 기준으로 이 학교에는 한문 전문 교사가 없었다. 그래서 그나마 한문을 잘 아는 타 과목 교사들끼리 로테이션 체재로 한문 과목을 담당했었고, 거기다 영국 혹은 북아메리카 출신 원어민강사도 있었다. 반면에 모든 과목들을 죄다 담당하는 교사도 있었는데, 이건 엄연히 쥐어짜는 행위인 것은 둘째치고 불법이다. 해당 교사가 복수전공으로 관련 과목을 같이 전공하지 않았으면 자신이 전공한 과목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다.[6] 허나 한 교사가 무려 3 ~ 4과목을 담당했다는 것은 교육법상 불법이며, 파행운영을 일삼았다는 말이다.[7] 학교가 운영되던 말기에는 재단에서 학교를 제대로 운영할 의지도 전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이 부분만 읽어 봐도 학교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 2006 ~ 2009년 기준으로 여전히 한문 전문교사는 존재하지 않았다가 그나마 2008년도에 국어를 담당했던 교사가 한문을 겸했다. 다른 과목의 경우에는 두 세 과목을 담당하는 경우는 여전히 허다했고, 여전히 영미권 원어민강사의 수업도 존재했다. 국적은 영국 → 캐나다 → 미국으로 바뀌었다.
- 2007년도에 전교 5개 학급밖에 되지 않아 같은 해 11월에 시교육청으로부터 폐교 승인이 났고, 2008년도부터 더 이상 신입생을 받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된데에는 저출산 문제가 도래된데다가 우암동의 인구 감소[8]와 2001년도에 감만동 소재인 감만여자중학교가 동항중학교로 교명이 변경되고 남녀공학으로 전환되면서 감만동 학생들을 더 이상 받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9] 당시 정관신도시가 조성되던 만큼 성지중학교를 성지고등학교와 함께 정관신도시로 이전했더라면 충분히 살릴 수 있었고[10] 또 다른 선택지로 명지오션시티도 있었으나, 재단에서는 부산외국어대학교 이전 사업에 주력할 목적으로 부지를 매각하여 그 대금을 부산외국어대학교에 보태기 위해 더 이상 운영할 가치가 없어진 성지중학교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 한마디로 토사구팽 당하고 만 셈.
- 2010년 2월 28일, 제40회 졸업식을 마지막으로 성지중학교는 개교 42년 만에 폐교되었다.
- 교포가 존재하지 않았다가 2002년도에야 겨우 만들어냈다. 허나 그마저도 거진 만들다 만 수준이었는데, 성지의 직사각형 안에 초성을 딴 ㅅㅈ라는 문구만 세겨 넣은 것.[11]
6.1. 문제점
-
후술하겠지만 상당히 문제가 많은 학교였다. 가장 먼저 이 학교는 성지학원 답게
개신교 정신이 투철했다. 심지어
교목(전도사)[12]이 따로 존재했고 전교생을
강제로강당으로 모아 채플을 드리기도 했다. 1학년때는 전도 수업이 따로 존재했을 정도. 이게 문제가 되는게 대학교 같이 본인이 가고싶어서 간 학교도 아니고 무작위로 추첨해서 간 곳에서 강제로 타 종교를 전도당하는 기분이란 정말 말로 표현이 불가능하다. 심지어 부조리가 만연하는 군대에서 조차도 종교 활동을 존중해주는 것을 보면 이게 얼마나 잘못된 만행인지 알 수 있다. 그야말로 불교 혹은 천주교 신자 학생들은 눈꼽만큼도 배려하지 않았고 이런 만행을 직접 겪은 피해 학생들 사이에서도 기독교 대한 인식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 동항중학교 개교 이전에는 동천초등학교, 동항초등학교 출신 감만동 거주 학생들 대부분이 이 학교에 편성되었는데, 감만동 거주 학생들 입장에서는 통학에 큰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교통편이 열악했었다. 우암동의 경우에는 1동과는 거리차가 없고(신연초등학교 인근지역 제외) 2동은 남구3번이 다이렉트하게 꽂아줘서 차비가 든다는 점을 제외하면 크게 불편한 건 없었지만, 감만동 학생들은 바로가는 버스노선이 없어서 우암자유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해서 걸어서 올라가야했다. 하교시에는 걸어가야하는 점 외에는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등교시에는 한참 걸어갸아하는 것도 모자라 산 언덕도 올라가야하니 그야말로 고역 그 자체였다고 한다.[13]그래서 성지중학교행 남구6번 지선노선이 신설되었다.[14]
-
교내 근린시설 또한 상당히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2001년도 하반기까지는
급식실이 없어서 집에서 도시락을 직접 싸오거나 매점에서 판매하는 컵라면으로 점심을 떼워야했는데, 정작
급식실이 생기니 이번엔
매점이 없어져서 큰 불편을 겪었다.[15] 거기다 개인
사물함도 없었다. 사물함이 없는게 왜 불편했냐면, 학교가 산 언덕에 있다보니 무거운 책가방을 메기 싫어서 빈 손으로 등교하는 학생들이 상당수였다. 그런데 사물함이 없다보니 책상 밑 서랍에다 교과서를 넣고 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교과서 도난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거기다 학교 측에서는 학생들의 고충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웃 학교들은 대부분 에어컨을 설치했는데 여긴 그런게 없었기에 여름철인 6월의 교실내부는 찜통이나 다름이 없었기때문에 재학생들에게 원성을 사기도 했다. 결국 2000년대 중반에 사물함이 도입되었다.
결국 에어컨은 끝끝내 설치 안해줬나보네?
- 학교 측에서는 박사학위 출신 교사들이 있는 걸로 생색내고 다녔는데, 문제는 인성이 좋지 못하거나 자질이 의심되는 교사들이 상당수 였으며, 일부 선생들의 직, 간접적 체벌이 아주 심했다. 심한 정도가 아니라 특정 교사는 학생에게 대놓고 주먹질을 해 고막이 나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야구배트, 죽도, 장구채, PVC파이프, 당구채, 각목, 꽹가리, 채 등등 체벌도구도 창의적이고 다양했다. 또한 직접적인 체벌을 하지는 않았지만 간접체벌을 일삼았던 교사들도 많았는데 중학생에게 무려 원산폭격을 자행하였던 선생들도 있었고[16] 엎드려뻗쳐, 오토바이, 기마자세 등등의 가혹행위나 책상위에 올라가 걸상 들고 무릎꿇고 손들기나 책상위에 무릎꿇려놓고 앞허벅지나 발바닥을 때렸던 선생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당시 인근 중학교에서 폭염에 오리걸음이나 토끼뜀을 하다가 학생이 사망하는 사고가 있어 오리걸음을 자주 하던 학생들은 앞으론 하지 않을거란 기대에 내심 기뻐했는데, 다른 나라 일이라는 듯 일주일 뒤 오리걸음을 시킨 일도 있다. 이 학교는 2010년에 폐교되었는데, 폐교 이후 교사들은 같은 재단의 성지고등학교로 재배치 되거나 일부 과원교사들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는 공립 중등교원 특채를 통해 공립학교로 전환배치 되었다고 한다.
- 개신교 계열 미션스쿨답지 않게 교내 흡연 및 학교폭력이 상당히 만연했다.[17] 싸움 역시 교실 내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할 정도로 선생들이 교내 치안에 관심이 없었고, 인근 야산, 별관 화장실 등에 숨어 담배를 피는 학생이 다수 있었다.
- 전반적으로 1990년대 당시의 성일중학교와 교사 및 학생의 수준이 동일한 학교였다. 차이점은 성일중학교는 그래서 맨날 경찰이 돌아다니고 있는 반면 성지중학교는 아예 방관이었다. 그 결과 성지중학교는 폐교되었고 성일중학교는 교사들을 싹 물갈이 하고 주변에 치안센터를 2개나 세우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현재까지 유지중이다. 문제는 그 성일중학교 역시 주변에 치안센터를 2개나 세우고도 학교 폭력 수준이 별반 차이가 없다는 점이다.
- 상술했듯이 운동장이 제 구실을 못하는 수준이었기때문에 교외 활동이 잦았다. 그나마 체력장은 바로 옆에있는 성지고교 운동장을 빌려서 실시했다.[18] 문제는 학기마다 열리는 체육대회였는데, 정 반대편에 있는 금정구 남산동(!!) 외대 운동장[19]까지 가서 했다. 물론, 찾아가는건 알아서. 심지어 학교 측에서는 전세버스를 대절해주기는 커녕, 교통비 조차도 지원해주지 않았다.[20]
- 2001년도에는 토요일 격주마다 시행하는 특활 발명부에서 일어났던 사건으로 연산8동 토곡, 연산경찰서[21] 바로 뒤에 있는 부산과학교육원에서 체험학습이 있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해당 담당교사[22]는 자기도 가는 길을 잘 알지 못한데다 먼저 알아낼 생각은 전혀하지 않고 토곡이라는 지명만 알려주고 그 뒤로는 흐지부지하게 알려주는 바람에 이날 발명부 학생들 대다수가 51번을 타고 신리삼거리 정류장에서 하차한 뒤,[23] 그 이후로 찾아가는 방법을 몰라서 수십분을 발을 동동 구르며 해매었다. 그러다 인근에 연산7치안센터를 발견하고 해당 학생들이 경찰관들로부터 57번[24]을 타면 바로 갈 수 있다는 친절한 안내 덕에 겨우 토곡까지 갔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학생들이 지각을 하였고 해당 교사는 길을 잘 알려주지 못해 괜한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는 말을 해주기는 커녕, 도리어 역정을 내며 학생들을 꾸짖는 등의 자질없는 행동만 일삼았다.
[1]
실제로 지하에 위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학교 측에서는 행정실이 있는 쪽부터 1층으로 인정하였다.
[2]
옥상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탓에 공간이 협소했었는데 신관 2층으로 이전된 것으로 추정. 최소한 2006년~2009년에는 펌프잇업이 딸린 노래방기기가 신관 2층 음악실에 위치해있었다. 2009년 졸업생 증언.
[3]
원래 본관 맞은편에 있었고 성지공고와 함께 쓰는 공용건물이였으나 현재는 철거되었다. 성지고등학교 신관으로 이전한 것으로 추정. 성지중학교가 사용했던 맨 윗층은 아랫층과 연결되는 통로(계단)가 없었다.
[4]
무려
Pump it Up이 딸린 노래방 기기가 학교에 있었다.
[5]
운동장 밑이 낭떠러지라서 사실상 공을 다시 주워갈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맨아랫쪽이 바로 유엔로 도로가 인접해있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유엔로까지 내려가서 공을 주워서 돌아오는 용자들이 존재했다.
[6]
또한 웬만하면 하나의 과목만 전공하는 것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임용고시의 경우
교육학+자신이 전공한 하나의 과목만 응시할 수 있기 때문.
[7]
공립학교 같았으면 이런 짓은 애시당초 불가능하다. 그나마 사립이라서 파행운영이 가능하였던 거다.
[8]
약 14년 사이에 약 7,000명이나 되는 인구가 감소되었다.
[9]
이렇게 된대에는 거주지에서 성지중학교까지 너무 먼데다 단 번에 갈 수 있는 대중교통도 제대로 구축되어 있지 않은 점을 문제삼은 감만동 학부형들의 불만이 꾸준히 제기되었던 결과이다.
[10]
실제로 성지고등학교를 정관으로 이전하려고 계획까지 했었다. 허나 무산되어 정관신도시에는 공립고등학교인
정관고등학교가 2015년에 개교하였다.
[11]
실제로 감만중학교의 것과 비교당할 정도였다.
[12]
대연동에 있는 산성교회 목사다.
[13]
감만2동 국제아파트 기준으로, 우암동 자유4차아파트 → 뉴서울아파트 → 우암자유 1/2차 아파트를 거쳐 학교 정문에 도착하는 시간이 약간 빠른 걸음으로 약 15~20분 정도였다. 여기서 끝이라면 다행이겠지만 열심히 걸어왔더니 앞서 언급한대로 이 학교는 산을 깎아서 지었다.
[14]
감만중학교는 본선노선이 등교시간 한정으로 운행되었다.
[15]
학교 측에서는 성지공업고교(현재는 성지고교로 전환되었다.)의 매점 이용을 장려하였는데, 이게 문제가 되는게 성지공업고교 학생들의 텃세가 우려되었고 실제로 일부 질이 안 좋은 성지공고 학생들이 이를 아니꼽게 여겼고 시비를 거는 사례들까지 여러 존재했다.
[16]
상의를 절반정도 까고 등짝에 지우개 던지던 선생도 있었다.
[17]
개신교에서는 원칙적으로
흡연을 금지하고 있다.
[18]
남산동 운동장을 사용할 수 없을시 성지고교 운동장에서 체육대회를 실시하기도 했다.
[19]
현.부산외국어대학교 남산캠퍼스. 당시 부산외대는 우암자유 4차 아파트(근데 4차 아파트는 주소가 감만2동이다.) 바로 옆에 위치했으며, 이 당시의 남산 캠퍼스 부지는 성지학원의 소유지이긴 했으나, 아무 것도 없는 허허벌판의 공터였다. 같은 재단인 성지중학교가 체육대회 장소로 이용하거나 그 외에 일반 단체의 야유회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20]
거기다 찾아가는 방법을 엉터리로 알려줘서 찾아가는 학생들을 더욱 헤매게 만들었다. 범일동에서
80번으로 갈아타면 외대운동장 입구까지 다이렉트로 갈 수 있다. 그러나 교사들은 지들은 자차나 친한 교사의 차를 얻어타고 왔으면서 학생들에게는 범일동에서 도시철도 1호선을 타고 남산역에서 내려서 그 경사 가파르고 먼 거리를 도보로 오라거나 심지어 두실역에서 내려서 걸어서 오라는 식으로 안내했다. 이쯤되면 교사들이 평소에 학생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다녔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21]
현.연제경찰서
[22]
전공은
물상이다.
[23]
사실 신리삼거리까지 온 것도 한 참 지나친거다. 문현교차로, 못골시장, 경성대학교 중에 아무 정류장에서 42번(당시에는 좌석버스였다.)을 타고 망미주공아파트 정류장에서 하차하여
배산 방면으로 걸어가면 된다.
[24]
2001~2002년도 기준, 사직운동장이나 부산아시아드경기장에 경기를 관람하기 위해 사직동으로 가는 일이 많았는데 57번 버스는 성지중학교 학생들에게 이상하다시리 인기가 많았다. 물론 57번 버스 자체가 인지도가 높은 점도 한 몫하지만 사직운동장에서 남구까지
10번이 최단거리이나 일부로 시간을 때우며 빙빙 돌아가고 싶어서(...) 일정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 갈때 57번 버스를 이용하는 사례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