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설민석의 논란 및 사건 사고를 정리한 문서.2. 전문성 논란
설민석의 논란과 문제는 전문가의 자격 논란과 지식 수준으로 요약되는데, 근본적으로 학문에 대한 접근 방식이 가볍기 그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이는 설민석 본인과 이미 여러 차례 같은 문제를 일으킨 방송사 제작진의 공통된 책임이다.논란이 된 대다수의 오류들이 구글링으로도 사실 확인이 되는 수준이다.
2.1. 전공 관련
설민석은 널리 알려진대로 학부전공이 연극영화과이고, 교육대학원에서 역사교육을 공부한 전공자다. 그런데 교육대학원의 교과교육 전공은 원래 그 교과의 현직 교사가 재교육을 위해 진학하거나, 아니면 학부 졸업생이 자신이 전공한 분야의 중등교육 교과목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데에 필요한 교원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진학하는 곳으로, 그렇게 학부 수준의 전공과목을 1회 이상 복습 완료한 전공자들이 학부 레벨에서의 내용을 간단히 복습한 후 이를 교과교육에 어떻게 써먹을지를 논하는 교과교육론과 교육학으로 커리큘럼이 구성되어 있다.[1]게다가 특수대학원들이 으레 그렇듯이 수업도 과목당 1주일에 80분만 하는 등, 학부 사범대학 수업보다도 밀도를 낮춰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학부에서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 가서 교육대학원 수업을 듣는 것만으로는 역사 전문가 수준의 역량을 기르기 어렵다. 일반대학원도 아니고 특수대학원인 교육대학원의 5학기짜리 커리큘럼은, 교육대학원의 과목당 수업 시수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밥 먹고 공부만 하며, 임용시험 합격을 지상의 목표로 삼는 사범대학 역사교육과의 8학기짜리 학부과정보다도 학습의 강도가 낮은 수준이다.
그 때문에 교육대학원 입학 당시의 설민석과 같은 '비전공자'는 교육대학원에 입학하여 해당 교과교육 석사학위를 취득한다고 해도 교원 자격증 취득이 불가능하며,[2] 자기가 학부에서 전공하지 않은 분야로는 학비가 비싸디 비싼데 교원 자격증조차 받지 못할 교육대학원 입학을 시도하지도 않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이런 설민석과 같은 '비전공' 교육대학원생의 경우는 교육대학원을 준비하면서 미리 편입이나 복수전공, 여의치 않으면 학점은행제나 독학학위제 등의 수단으로라도 해당 전공과목의 학위를 따거나 최소한 입시요강에서 (보통 36학점 이상으로) 요구하는 만큼은 학점을 이수한 뒤 교육대학원 원서를 쓸 때부터 교원 자격증 취득을 희망한다고 적시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교원 자격증을 취득하는 인원은 역사교육 외에도 중등교육과정의 주요 3과목인 국어, 영어, 수학을 비롯한 다양한 과목에 걸쳐 매년 적잖이 배출되며, 그들 대부분은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임고생이나 설민석과 같은 사교육계 종사자들이고 그들 중 설민석처럼 사교육계에서 스타 강사로 발돋움하는 이도 여럿이 있다. 본 위키의 교육대학원 문서에서 출신 인물 목록만 봐도 대부분 사교육계의 스타 강사들이다. 교육대학원 학생들끼리 서로 '선생님'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
그러나 이런 졸업생들은 학부에서의 역사 전공과목 이수 이력이 알려진 바 없는 설민석과 달리 사교육 업계에서 수강생들에게 공개하는 프로필이나 구직활동시 제출하는 이력서에서 2급 정교사라는 타이틀을 걸어놓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교육대학원을 다녔거나 준비하는 사람들은 교육대학원에 입학할 때는 이렇게 학부 전공과 일치하는 교과교육 전공으로 입학하고 교육실습 과정을 포함한 5학기에 걸쳐 투자함으로써) 교원 자격증을 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다보니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설민석 또한 연극영화과 전공 외에 따로 학사편입이나 시간제 학점이수를 거쳐 교육대학원에 가고 교원자격증을 땄을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경향마저 있지만, 설민석의 이력에서 그런 사항은 명확히 알려진 바 없다.
독학학위제는 아예 사학 전공이 없으며, 학점은행제 역시 현실적으로 미술사 같은 극히 일부 과목만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사학 전공의 전공학점을 30학점 넘게 채우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따라서 위의 설명은 역사교육 전공으로 입학한 설민석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 또한 학사편입을 해서 사학과를 나왔다면 역사 강사로서의 자격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공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그러지 않았다.[3]
그러므로 설민석은 어쨌건 역사교육으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므로 형식적으로는 아예 비전공자로 보기는 어려우나, 실질적으로 학부 과정에서 사학 및 역사교육 전공을 이수하며 단련된 전공자들에 준하는 역량을 갖추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할 여지는 있다. 이에 대하여 사학과 교수 중에서 학부 때 다른 전공을 한 사람도 많으니 설민석 또한 문제될 것은 없다는 옹호론이 있으나, 그런 타전공 출신 교수들도 대개 일반대학원 사학과에 진학해서 오랜기간 연구해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4] 아니면 인접학문의 학과에서 법제사, 정치사,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외교사, 교육사, 철학사, 역사교육학 등 역사 관련 학제간 연구로써 학위를 취득한 케이스이므로[5] 설민석의 경우와는 다르다.
학원 업계에는 ' 특수대학원을 통한 (본인 강의 분야로의) 학력 세탁'은 종종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쪽 업계는 해당 학문의 깊은 전문성보다는 강의력 좋고 학생들 잘 다루며 수능 동향 파악 더 잘 하는 강사가 필요한 업계라고 봐야 한다. 설민석의 전공 문제는 그가 계속 수능 강사로만 머물렀으면 이렇게까지 논란이 되지 않았을 수 있다. 수능의 문제풀이는 대학생이 과외를 해도 어느 정도 가르칠 수 있는 수준으로, 해당 학문에 대한 탐구와 사료조사보다는 정해진 교과서 내에서 답을 명확하게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치는 일이다. 교과서 밖의 역사까지 연구하고 조사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수능을 넘어 TV에 나오고 대중 앞에서 고등학교 교과서 이상의 내용을 소재로 강연을 하는데 캐보니까 사실관계도 불분명한 강의가 수두룩한 와중에 학부 전공자도 아니고 심지어 석사 논문은 표절이라는 것에서 문제가 시작한다.
따라서 그의 전공 문제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단순히 역사 전공을 하지 않았다는 것 자체의 문제라기보다, 거기서부터 붙기 시작하는 의문부호가 사실상 아래의 여러 비판 단락에까지 큰 줄기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의 역량을 평가하는데에 그가 관련 전공을 했느냐 안했느냐 하는 문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부차적인 사항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비전공자라 할지라도 상당한 경력 또는 실력을 갖춘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전공자들에게까지 존경을 받는 전문가로 대우받는 경우도 있다. 아마추어로서 학계에 크게 공헌했던 인물로는 아마추어 고생물학자 그레고리 폴이 유명하다. 이외에도 동물, 식물, 버섯들을 다루는 생물학계에서는 마니아들과 학자들의 협업이 많이 일어나는 편으로 학자들의 논문에 마니아들이 찍은 사진들을 게시하거나 같이 생태 탐사를 가기도 한다. 또한 학자들은 비전문가 생물 유튜버들에 대해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며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한다.
그러나 설민석이 활동한 업계는 역사학, 즉 학계이다. 학계는 어느 대학에서 어느 교수에게 어느 정도 전문성 있는 교육을 받았는지, 그 사실 자체가 곧 그 사람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나타낸다. 설민석은 정통 역사 전문가라기보다 강의를 잘 하는 것으로 인기를 얻은 사람인데, 이런 사람에게 세계사의 그랜드 마스터 따위의 명칭까지 붙여대며 방송에 대거 출연시킨 시점부터 발언의 공적영향력이 상당한 인물이 역사적으로 논란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연쇄적으로 이어간 것에서부터 논란의 싹이 튼 것이다.
2.2. 단편적인 해석 및 오류, 포퓰리즘적 경향
역사적 사실을 단순화하고 왜곡하거나 엉뚱하게 설명하는 경우가 있고, 강의 내용을 사전에 검토하지 않았다가 잘못 말한 적도 여러 번이다. 인터넷에 돌아다닐 법한 낭설을 진짜처럼 말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심지어 전문가 자문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방송을 내보내는 경우가 있다. 대략 1990~2000년대쯤의 역사적 통념에 MSG를 가미해서 전달하는 식인데, 학자가 아니니 독자적인 연구까진 바랄 수 없지만 선행 연구 검토조차 안 하는 건 문제라는 시각이 대두되는 중. 게다가 내용의 적절함과는 무관하게 말솜씨를 앞세운 전달력이 좋아서, 사학이 상대적으로 낯설 수 있는 문외한 대중들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쉽게 말하자면 <먼나라 이웃나라>를 비롯한 이원복 학습만화가 비판받는 점들과 비슷한 셈.게다가 많은 이들이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준비를 위해 그의 강의를 듣다 보니 친숙해져서 실더가 많아진 것도 문제. 강의력과는 별개로, 사실 관계에서 틀리는 건 분명히 비판받아야 할 점이다. 수능이나 공무원 시험 위주의 강의는 국사 교과서에서 나온 내용만 제대로 전달 해주어도 논란이 일어날 거리가 없어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고, 시험문제 이의신청할 때도 문제지문의 오류가 교과서와 어긋 나는 경우 이의 신청을 받아주는 경우가 많다. 방송에서 주된 논란이 많았던 이유는 교과서 밖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면서 벌어진 일들이다.
결국 설민석 강의로 역사를 배운 사람이 가짜뉴스나 루머를 믿듯 이상한 주장을 하다 망신당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하고 있다. 이 점에서 관련 커뮤니티에서는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 관계를 무시한다는 점에서 역사 선생 자격이 없다는 말도 많이 나온다. 문제는 앞서 이야기한 실드들이 "역사에서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라는 주장을 양산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주로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며 해석의 각자의 몫이다"라는 주장을 펼치며 설민석의 해석을 옹호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주장하면서도 정작 실더 본인들은 설민석의 해석이 아닌 다른 사람의 해석에 대해서는 역사왜곡이라고 비난하고 있다.[6] 역사 커뮤니티에서도 이젠 포기했는지 강사는 비즈니스적인 관계일뿐 스승이나 전문가로 봐선 안 된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주류를 차지했다.
그리고 포퓰리즘적 경향이 있다는 비판이 있는데, 정확하게는 흥미를 끌기 쉽도록 대중의 선호를 받는 자극적인 내용 위주로 말한다고 보는 게 적절하다. 유명한 EBS 간도 강의때도 마찬가지고 민족주의 사관이 들어간 말을 꽤 하는 편이지만, 3.1 운동의 민족대표 33인 비하 논란에서는 그 반대의 주장을 펼치기도 했다. 김구에 대해서는 민족주의 사관이 들어간 잘못된 사실을 강의하였다. 당시 시대적 흐름에 따라 대중이 원하는 것을 따라 말하는, 다시 말하면 사학 전공자라기보다는 연예인같이 보이는 포퓰리즘적 성격이 강하다.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 역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영화 광해와 연관이 있어보인다.
뿐만 아니라 역사를 학문적 분석이 아니라 감성 중심의 해석을 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자신이 역사 부문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감명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중전 민씨가 역사상으로 많은 잘못을 저지른 인물이지만, 단지 일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중적인 동정을 받고, 항일과 애국의 화신처럼 과분하게 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2020년 12월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방송이 비판을 받으면서 이 문제가 크게 불거지고 본인이 직접 사과하게 되었다.
3. 사실 오류 및 왜곡 논란
3.1. 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논란
사실 이전부터 설민석의 전문성과 정확성 논란은 많았다. 하지만 역사 전문가나 역덕들 사이에서나 논란이 되었지 대중들에게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고, 오히려 설민석은 더 많은 방송에 출연하고 더 많은 책을 출판하는 등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덕들 중에서 특히 팬층이 두터운 제2차 세계 대전, 고대 로마, 삼국지 시대를 잘못 건드리면서 그 논란도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다.하나의 사건을 가지고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게 아니고 흥미와 자극적인 요소들로만 이루진 사건들로만 구성을 했다. 문제는 같이 참여하는 제작진들도 시청률에 얽매여 서로 보완해 주지 못할 망정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점이다. 우려되는건 현대사에서 사건의 흐름에 대한 배경설명이 중요한데 생각보다 너무 빈약한 편인데다 편집 때문인지 빠진 부분도 너무 많다. 논란이 된 소재부터 MBC " 신비한TV 서프라이즈" 수준의 조악함을 보여주었다. 유대인 비누, 레벤스보른(아기 공장) 모두 "서프라이즈" 소재였으니 정말 아류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황교익 논란, 그외 숱한 쇼닥터와 마찬가지로 방송국은 전문성과 정확성보다 흥행성, 대중성, 편의성만 따진다는 또 하나의 사례로 남았다. 제작총괄인 김형오 PD가 " 렛츠고 시간탐험대"를 연출한 역사 덕후인데 의외인 점이다.
3.1.1. 나치 독일편 관련
1회 히틀러 편에서 제2차 세계대전 도발 등 히틀러의 실정 전반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유대인 학살에만 너무 치중했고, 너무 잔혹한 내용에 초점을 맞춰 선정적으로 다루지 않았느냐는 비판이 있다. 첫회부터 흥미와 자극에 매몰된 프로그램 제작진의 패착을 여실히 보여주었다는 것.한마디로 역사도 아닌 미스터리 블로그 수준의 총체적 난국을 보여주었다.
- 홀로코스트 관련 낭설들을 가져와 진짜인 것처럼 말했다. 전공까지 가지 않더라도 인간 비누 같은 경우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을 비판하는 전문가들조차도 사실이 아니라고 누차 말한 바 있다. 오히려 역으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 이런 낭설을 들먹이며, 아리아인들이 열등인종이라 생각하는 유대인들로 비누를 만들었을 리 없잖나? 유대인 학살은 후대의 과장이자 선동이다! 라는 주장을 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낭설이다. 심지어 홀로코스트 센터에서도 90년대에 이미 부정한 이야기이다. '유대인 비누'는 이미 B급 도시괴담 미스터리 프로그램으로 확고히 자리잡은 신비한TV 서프라이즈에서 이미 다뤘던 역사이다. 심지어 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이스라엘 정부조차 거짓말이라고 대대적으로 지적한 사실을 정사로 강의한 것. 구글링만 해도 다 나오는 도시괴담이고 거짓이다.
- 평범한 독일인들이 나치에 물든 악의 평범성을 설명하기 위해 이르마 그레제를 예로 들었으나 설명하면서 '아름다운 여자만 골라 고문했다' 등 실제보다 선정적으로 과장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 사례가 적절하지 않다. 차라리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인용하면서 아돌프 아이히만을 악의 평범성의 예시로 설명하는 것이 낫다. 정치외교학과나 철학과 학부에서 배우는 내용으로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에서 과연 악의 평범성을 알기나 하는지 의문이다.
- 가스 트럭을 고정식 가스실을 효율적으로 개량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노동자와 죽일 사람을 나누고 옷 벗기는 행정적 처리를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해서 좀 더 효율적인 처리를 위해 수용소에 수용하기도 전에 죽일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냥 가스실의 시작이 가스 트럭이며 이것이 유명한 S트럭이다. 오히려 고정식 가스실이 나중에 생겨 정착되었다는 점에서 가스 트럭의 효율성 운운한 것은 그냥 아무 근거가 없다. 가스 트럭을 만든 이유는 처음에는 특수작전집단대원들이 현지인, 무장친위대, 국방군의 협조를 받아서 학살대상자들을 일일이 총으로 사살했는데 특수작전집단 대원들이 PTSD를 호소하고 심하면 처형대상자들을 몰래 풀어주는 경우가 생겼다. 그 대안으로 점령지역에서 지원자들을 모집했지만 가면 갈수록 지원자가 없자 내린 결론이 가스 트럭이다.
- 아돌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민중들에게 대대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데, 단순히 1920년대 초중반에 있던 극심한 인플레이션을 든다. 물론 1920년대 초중기에 나타났던 극심한 인플레이션이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히틀러의 집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세계사적인 사건은 1929년에 시작된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었다. 또한 1920년대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은 독일 재건에 착수했고, 설민석이 방송에서 예시로 든 제1차 인플레이션은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상당 부분 회복했었다. 심지어 이 당시 여당은 우리가 잘 아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이끄는 보수 정당인 국가인민당이였고 굳이 극우 깡패당을 지지해줄 이유가 없던 독일인들이 등을 돌리면서 히틀러의 나치당이 잠시 존재감을 잃기도 했었다. 그러나 1929년에 시작된 미국의 경제 대공황으로 미국에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공산화를 막기 위해 지원해주던 자금이 끊기게 되면서 경제위기가 닥쳐오자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독일인들에게 주목 받으며 나치당의 지지율을 올릴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났고, 그로 인한 여파를 통해 1933년에 집권할 수 있었다. 심지어 히틀러가 총리로 지명 받았을 때에도 나치당에 대한 독일 민중의 지지율은 40%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리 압도적이지 않았다. 히틀러와 나치당이 내각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사실 국가인민당이 나치당의 지지율로 이득을 보려는 속셈으로[7] 1933년 히틀러의 내각은 나치당인사들보다 국가 인민당 인사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히틀러는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을 빌미로 10%가 넘는 지지율을 기록하던 공산당을 제거하였고 이후 수권법을 통과시키며 사민당을 소탕하고 자신들을 활용하려고 했던 국가인민당과 당 내 좌파세력이던 에른스트 룀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제거하면서 권력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불과 몇 년 사이 히틀러와 나치당의 지지율이 급상승했는데, 그 이유는 나치당이 경제 대공황으로 인한 실업 극복과 독일 민족 공동체라는 이름 하에 상당한 복지 정책과 그 토대를 마련했기 때문이었다. 즉, 설민석은 이 부분을 완전히 생략하고, 1920년대 초 인플레이션에서 바로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넘어갔기에 역사적 사실을 크게 생략하는 오류를 초래했다. 정작 본인의 유튜브 채널에서는 대공황과 같이 언급하면서 설명한 것을 보면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진측 또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
3.1.2. 이집트편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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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이집트 편에서 알렉산드리아 시가 중심이었을 당시 이집트가 내륙 깊숙한 곳에서 로마로 가는 것처럼 묘사하는 등 지도도 정말 엉터리이다. 또 프톨레마이오스나 클레오파트라 같은 성, 이름이
칭호라며 단군과 비교했는데 프톨레마이오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를 개국한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이름에서 유래된 왕조의 이름, 즉 성씨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는 부분. 클레오파트라 같은 경우도 서너가지 중 해당 이름을 돌려쓰는 경향성은 있지만 절대 단군처럼 최고지도자를 말하는 칭호는 아니다. 이집트와 별 관계없는 필리포스 2세의 후처 이름 중에도 클레오파트라가 있었다. 단군과 같은 칭호는 파라오에 더 가깝다.
더군다나 일반인들이 알 정도로 널리 알려진 "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의 격언마저 이집트 원정 이후에 한 말이라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다. 또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알렉산드로스가 세웠다는 낭설을 주장하였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알렉산드로스 3세 휘하의 장군이자 그의 사후 제국을 분할통치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초대 파라오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1세가 건립을 시작했으며, 당연히 이때는 그의 사후였다. 또한 알렉산드리아는 현대까지 남아있는 이집트의 그 도시만을 일컫는게 아니라, 당시 알렉산드로스 3세가 지배활동을 하며 만든 신도시들을 일컫는 이름이었다. 즉 도서관의 이름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워서 붙은게 아니라,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세운)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기 때문에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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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한 것이 폼페이우스라고 단정짓는 오류를 범했는데 폼페이우스는 잔당을 토벌하긴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진압한 건 크라수스이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에 대한 설명을 배제하고 선후배 관계 정도로 단순화하는 데에 그쳤다. 갈리아 전쟁 9년간 멀리 떨어져있던 탓에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관계가 멀어졌다고 설명했는데 먼저 BC 58년에서 51년간의 8년차 전역이었기에 이것부터 오류다. 그리고 BC56년 겨울에 이탈리아 루카에서 삼두가 만나 정치적 합의와 화의를 다졌던 루카 회의의 예에서 보듯, 카이사르는 겨울이나 휴식기에는 이탈리아에 돌아와 본국의 정치 이해관계에 관심을 기울였다.
정치적 라이벌인 두 인물의 대립 과정을 설명하기에 세월을 내세운 건 지나치게 1차원적인 설명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삼두정치가 깨진 이유는 카이사르가 갈리아 원정을 성공함으로써 삼두의 균형이 깨진 것, 크라수스가 죽어서 삼두의 한 축이 무너진 것,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에게 시집보낸 딸이 사망한 것(그리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 의원의 딸과 재혼했다.), 원로원의 이간질, 그리고 근본적으로 카이사르는 민중파고 폼페이우스는 원로원파였던 점(술라의 부하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등 매우 다양한 이유가 존재한다. 그러고 남아있는 사료가 단편적이라, 역사학자들도 이런저런 추론들만 제기할뿐 확실한 답은 내릴 수 없다고 신중하게 접근하는 편이다.(Southern 2018)] 덧붙여 집정관과 독재관에 관한 설명도 오류가 있다.
- 이러한 오류에 대한 논란은 일부 시청자들의 지적이 아니라, 해당 프로그램 감수를 맡았던 국내 이집트 고고학 전문가 곽민수의 반박글로 촉발되었다. 반박글에 따르면 프로그램이 자문 내용을 하나도 반영하지 않음은 물론 제작진이 감수자의 이름을 스태프롤에서 빼려고 했다거나, 자문료를 후려치려고 한 등의 행위도 있었다고 한다.
- 설민석 측은 드릴 말씀 없음이라는 입장을 내 놓았다. # 이후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진 측에서 '일부 오류가 있었다'며 사과문을 게재했으나, 다음날 결국 설민석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하지만 전문가가 대놓고 지적한 이집트 편만 언급했다. 이집트학이 국내에서 소수의 학문이란 말로 표현이 안될 정도로 작은 규모라 곽민수 소장은 현재 국내에 두명 밖에 없는 이집트학 전공자이다. 즉 해외에 가서 외국 전문가에게 자문이라도 받아오지 않는 이상 반박할 방법이 거의 없는데, 기본적인 팩트 자체가 틀린 거라 반박할 거리도 없다. 국내에 거의 없는 이집트학 권위자의 말을 무시하면 신뢰도가 땅에 떨어지기 때문에 애초에 무시할 수가 없는 지적이었던 것.
- 그런데 이집트편 편과 달리 독일 편에 대한 오류에 대한 사과는 언급도 없다. 프로그램이 시작한지 얼마 안 된 데다 강의 스타일 상 다음 편에도 오류가 다시 나올 가능성이 높지만 전문가가 대놓고 지적하지 않으면 유야무야 넘어갈 가능성이 높다. #
3.1.3. 일본 전쟁 범죄 편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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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와
쇼와 덴노(히로히토)의 전범재판에 관련하여
더글라스 맥아더를 부정적으로 언급했다. 맥아더의 정책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선언 이후 미국정부에게서 통치권한을 부여 받았어도 당연히
미국 정부의 허가와 승인 없이 불가능하며, 전범재판도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는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보다 맥아더의 인지도가 더 높아서 '맥아더가 했다는 걸로 언급'해야 집중도가 높아지기 때문에 그 방향으로 편집을 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당시
일본 정부도 이미 몇개월 전부터 항복하는 조건에 대해서 논의하고 있었으며, 군부가
포츠담 선언을 '덴노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이라면서 거부한 결과가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 투하였다. 외교관들은 무조건 항복이 덴노의 신성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석하여
포츠담 선언을 즉시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 측은 인간선언의 후폭풍이 심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공개 범위를 최대한 축소하려고 물밑에서 접촉을 자주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예 중 하나가 실무자인 맥아더의 성향을 잘 파악해서 극진히 대접한 것이다. 제국대학(현 도쿄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 엘리트 코스로 외교관을 거쳐 외교관의 수장인 외무대신까지 지낼 정도로 영어를 잘했던 시데하라 기주로 총리가 알아서 평화헌법과 인간선언의 초안을 영어로 써서 맥아더에게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극우들이 가장 많이 떠들어대는 "현행 헌법은 외세의 강요로 만들어졌으므로 무효다!" 식의 논리도 이걸로 반박 가능하다. 미국이 강요한 게 아니라 총리가 먼저 써주고 합의해줬기 때문. 미국도 일본인들의 정신문화를 연구하여 국화와 칼이라는 서적을 편찬했으며, "일본인들한테 일본 황실을 없앤다고 하면 죽을 때까지 싸우려 들 것"이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였다. 맥아더 역시 덴노의 입지를 알고 있었기에 인간선언을 하면서 일부러 자신과 히로히토가 같이 서 있는 사진을 찍었으면서도 일본 황실 자체를 없애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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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가 쇼와를 접견하기 며칠 전에
미국 정부에서 맥아더에게 '히로히토에 대한 어떠한 제스쳐도 취하지 말라'는 공문을 보낸 걸로 보면 미국과 맥아더가 같이 움직인 것으로 언급해야 하지만, 강의 내용에서는 이런 공문에 대한 언급이 없고 마치 맥아더가 독단적으로 사건을 처리한 것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나치 독일도 없어진 이상 전쟁이 길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본의 항복 이후
중국 본토에서 제2차
국공내전이 발생하자 미국은
중국국민당 정부에게 자문 및 군사 장비만 지원해주었을 뿐 전쟁 내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나중엔
중국공산당이 전쟁의 주도권을 잡게 되자 국민당 정부가 부패했다는 이유로 손절하게 된다.
제1,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지만 그 시기의 미국은 전쟁을 피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즈음 관계가 냉각되는 소련을 견제할 필요성이 있었다. 전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과 비교했을 때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의 경우 그의 외교적 정책들이 반공주의가 색채가 강했고 그의 결과물은 트루먼 독트린으로 나오게 된다. 여기에 일본 정부의 물밑작업이 잘 먹혀들어갔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옳은 설명이었다.
3.2. 민족대표 33인 룸살롱 발언 / 주옥경 열사 비하
과거 그는 저서와 강의 중에서 " 3.1 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이 '룸살롱'인 태화관 링크에서 낮술을 마셨고 손병희는 마담 주옥경과 사귀었다."라는 발언을 한 적 있다. 링크 게다가, 민족대표 33인은 대부분 친일로 변절했다고까지 하였다. 링크 이 일로 인해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설민석 측에 발언 내용 시정과 사과를 요구하는 공개 질의서를 띄웠다. 추진회는 첫째로 "민족대표들의 회합장소에 대한 폄하를 바탕으로 민족대표의 역할을 축소하고, 그분들을 비난하기 위해 왜곡한 것"이라며 "태화관이 ‘요릿집’이었다고 해서, 거사의 의의가 축소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둘째로 주옥경 열사는 손병희 선생의 부인으로 민족대표들 간의 연락과 안내를 맡은 분이며 독립선언의 주역인데 이를 마담으로 폄하하였다는 비판을 했다. 천도교 여성회 역시 주옥경 여사는 3.1운동 3년 전에 손병희와 결혼해 태화관에 업무한 것도 아닌데 모욕적 허위사실을 나열한 설민석의 의도가 의심스럽다며 비판했다. 실제로 주옥경은 당시 천도교 여성들의 사회운동단체인 내수단을 조직한 여성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 출신의 인물로 민족대표 33인이 만난 당시에 태화관에서 업무를 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모은 역할을 했다.
이 일로 인해 민족대표 유족들은 진실을 왜곡했다면서 설민석을 상대로 사자명예훼손죄로 고소했다. 하지만 조사 결과 검찰은 "룸살롱과 마담은 현대식 표현으로 말한 것이며, 낮술 운운한 것은 다소 과장되어 말한 것이므로, 고의성이 없다"라는 이유로 고소를 기각했다. 그 후 2018년 11월 14일 민족대표 33인 유족회에서 설 강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대해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25부(부장판사 이동욱)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2017가 합 526348). 유족회 측은 "설 씨가 지난 2014년 민족대표 33인에 대한 명예를 훼손했다"라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다.
재판부는 당시 상황을 기술한 일부 역사서 중에선 당시 민족대표들의 처신에 대해 일부 비판적 관점을 가진 경우도 있어서 그런 취지 발언이 설민석만의 독자적 역사 인식이라고 단정 짓기도 어려운 만큼 부득이 허용할 수밖에 없는 범위 내에 있다는 것이라고 판단을 하지만, 민족대표들이 1920년대 대부분 친일로 돌아서게 된다고 언급한 데 대해선 명예훼손이라고 보았다.
당시 33인 중 3명을 제외하곤 3.1운동 가담으로 인해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각자 나름대로 독립운동을 펼쳐 나갔거나 적어도 친일반민족 행위라고 평가할 만한 행위는 하지 않았다. 거사 당일 이완용 단골집인 룸살롱에 갔다고 표현하는 등 새롭게 건설한 대한민국으로부터 건국훈장까지 추서, 수여받은 인물에 대해 심히 모욕적 언사로서 필요 이상으로 경멸, 비하 내지 조롱하는 등 역사에 대한 정당한 비평의 범위를 일탈해 그 후손들이 선조에게 품은 합당한 경외, 추모 감정을 침해하는 행위라고 지적하였다.
재판부는 설 강사가 손 아들에게는 200만 원, 손자에게 150만 원, 증손자에게 100만 원, 현손자(증손자의 아들)에게 50만 원, 그 밖의 민족대표 유족들에게 위자료를 1인당 25~100만 원으로 해서 총 1,400만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하였다. 링크 정확하게 이 판결은 형사가 아닌 민사이며, 형사건은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어쨌든 재판부가 설민석에게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한 것은 33인의 행동에 대한 비판 문제가 아니라, '이완용의 단골집인 룸살롱에 갔다.', '술에 취해 난동을 부렸다.', '33인 대부분이 친일파로 돌아선다' 등 과격하거나 과장하여 표현한 부분을 명예훼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3.3. 5.16 군사정변 혁명 발언
2020년 선을 넘는 녀석들 리턴즈 방송에서 5.16 군사정변을 군사정변과 군사혁명을 혼용해서 사용해 논란이 되었다. 예전 국정 교과서에서는 당시 박정희 정권의 영향으로 군사혁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고, 그때 배운 사람들은 아직도 그 이미지가 남아 있어서 군사혁명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최소한 강의를 하는 입장에서는 혁명, 정변, 운동, 쿠데타 등에 대한 용어 정의는 학생들이 많이 보고 듣는 만큼 교과서를 기준으로 최소한 정확하게 사용했어야 하는 게 맞는 말이다. # 정치적 입장에 따라 서술이 자주 바뀌는 단어들이기에 설민석이 제대로 접근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지만, 5.16 군사정변은 엄연히 군사정변이라는 정식 명칭이 존재한다. 군사혁명이라는 용칭은 이미 학계, 교과서에서 대개 쓰이지 않으며 현재 중·고등 교과서에는 군사정변으로만 표현되어 있다. 이는 네이버 정도에 검색만 해봐도 나오는 내용이다.3.4. 히틀러 영상 노무현 합성물 사용 논란
히틀러에 대해 다룬 영상에서 과거 히틀러가 연설하는 장면을 사용했는데, 이 영상이 노무현 대통령의 목소리가 들어간 합성물이라는 것이 밝혀져 논란이 되었다. 해당영상설민석 채널의 원본영상에서는 현재 해당 부분을 삭제하고 재업로드하였다.
3.5. 《설민석의 삼국지》 오류
- 2019년에 출간된 저서 《설민석의 삼국지》에서 유비가 공손찬을 ‘손찬 형님’이라고 부르는 오류가 있다. 공손찬은 성이 '공손'이고, 이름이 ‘찬’이다. 이런 오류는 역사적 고증이라고 부르기도 뭐한 수준이고, 삼국지를 좋아하는 일반인도 웬만하면 아는 사실이다. 사실 삼국지에는 성씨가 진짜 많이 나오는데 그 중 2글자 성씨 역시 공손, 관구, 모용[8], 황보, 사마, 제갈, 하후, 태사, 순우 등 꽤 나온다. 볼드 친 4개는 삼국지를 조금만 알아도 거의 알 만큼 대표적인 복성들이다.[9] 나머지도 대부분 유명한 대표 인물 1명 정도는 존재한다.[10] 이후 이 '손찬 형님'이라는 단어는 설민석을 조롱하는 표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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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이
유비,
관우,
장비 3인에게 인사를 하면서 스스로를 조자룡이라고 부르는데
자 항목에도 있지만 자는 타인이 예의를 갖춰 불러주는 일종의 존칭이지 자칭할 때 쓰는 이름이 아니다.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도 사용할 수 없는데 하물며 자신의 주군 앞에서 사용하는 건 매우 무례한 행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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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하자면, 작가의 말에 친숙함을 위해 일부러 자룡으로 써 놓았다고 쓰여 있다. 실제로 조운의 경우 많은 사람이 자룡을 이름으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본명인 운(雲)은 팔아먹고 자룡이라 쓰인 곳도 많고 삼국지 게임을 하기 전에는 조운이라는 본명을 잘 모르는 사람도 많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엄연히 사서를 기반으로 하는 책을 집필하는 입장에서 그런 오류는 바로잡아야 하는 거지 써먹는 게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 알고 있다고 기존의 관습을 답습하면 역사가는 연구를 할 필요가 없다.
더욱이 같은 글에서 조운이 본인은 조자룡이라고 칭하면서 관우와 장비를 자가 아닌 관우, 장비 형님이라며 본명으로 부른다. 손아랫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자로 칭하고 손윗사람(심지어 주군의 의형제)의 본명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당시라면 엄청난 실례인 점을 생각하면 그냥 아무 생각없이 책을 썼거나, 다른 사람이 쓴 책에 이름만 빌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3.6. 음악 장르까지 진출한 오류
전술했듯이 설민석의 역사 사실 오류는 이미 차고 넘친다. 이번 오류의 문제는 이러한 안일한 접근이 여타 비전공 역덕, 사이비 전문가처럼 전문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경계를 초월해 "입담"으로 넘나들다가 그 바닥을 드러냈다는데 있다.2020년 12월 자신의
"흑인 음악이 기반인 재즈가 백인이 즐기는 백인 음악으로 진화하자, 흑인들이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르네상스를 일으킨게 R&B다"라고 설명을 했는데, 이에 대해 음악 평론가들이 일제히 비판에 나섰다. 유튜버 '재즈기자'는 기자 출신으로서 재즈계 소식을 다루고 플레이리스트 영상을 올리는 채널로, 2021년 기준으로 10만 이상의 구독자를 확보하고 있는 유튜버인데 "남부의 흑인들이 대거 북부로 이주하는 과정(The Great Migration)에서 정통 블루스가 북부의 대도시에 유입됨에 따라 '리듬앤블루스'로 지칭되게 되었고, 여기에 재즈의 흑인다움의 상실이나 백인의 개입에 의한 맥락은 없다"고 댓글로 이의를 제기했고, # 뒤이어 배순탁 작가가 "재즈, 블루스, 일렉트릭 블루스, R&B, 초기 로큰롤에 대한 역사를 다룬 원서 한 권이라도 읽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할 수가 없다"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재즈피플의 김광현 편집장은 "원초적 블루스들이 흑인이 모여 있는 대도시에서 불붙어 좀 더 춤곡으로 정리된 게 R&B"라고 지적했다.
여기에 힙합에 대한 설명도 너무 단편적이었는데, 힙합을 단순히 사회 비판적인 음악 장르로 치부했다. 하지만 힙합 최초 싱글로 평가받는 Rapper's Delight가 보여주듯 힙합의 시초는 클럽 음악이다. 이 역사가 이어지면서 랩을 하는 사람들 중에 사회 비판 가사를 쓰는 사람이 있어왔고, 이런 랩을 컨셔스 랩(conscious rap) 내지는 폴리티컬 랩(political rap)으로 보통 일컬어진다. 한국에 힙합이 들어오던 1990년대 말에 미국에서 컨셔스 랩이 유행했었고, 이 영향으로 한국에서도 컨셔스 랩을 하는 래퍼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로 MC 스나이퍼나 DJ DOC, 싸이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미 컨셔스 랩이 한국에서조차 주류가 아니게 된 지는 2020년 기준 거의 10년이 됐다. 보통 2011년 일리네어의 등장부터가 컨셔스 랩 하향기의 시작으로 평가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한 무지로 역사적 사실과도 맞지 않은 설명을 해놓고, 한국에도 힙합이 있었다며 사설시조와 연결 짓는 소리는 덤. 의도를 굳이 파악해보자면 어느 나라나 사회적 약자들이 강자를 풍자하고 반항의식을 지닌 노래나 시를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히 일어나는 일이고, 시/노래에 운율과 라임이 있는 것 또한 지극히 당연한 소리다. 이 부분은 그런 의도로 한 말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썸네일부터 "국힙의 시작은 선덕여왕 때?"라며 황당한 어그로를 끌어버린 것. 일부 겹치는 속성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설시조와 힙합을 저렇게까지 동치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장르에서 나타나는 큰 특징들을 간과한 채 어느 나라, 어느 음악에서나 모두 찾아볼 수 있는 특성만 가지고 둘을 비교했기 때문. 이렇게 비교하자면 사설시조는 락도 될 수 있고 팝도 될 수 있다. 심지어 이번 영상은 사과문을 올린지 며칠이 지나지도 않았는데 올린 것이었고, 지적 후 별다른 해명없이 바로 영상을 비공개 처리했다.
3.7. 그 외의 왜곡·오류 사례
* 그의 저서 '역사 읽어주는 남자'에서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땅에는 술, 숲에는 고기'라고 해석했는데, 원래 의미는 '연못에는 술, 숲에는 고기'라는 뜻이다. 연못 지(池)와 땅 지(地)를 혼동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위에서는 못을 정확하게 적었기 때문에 교열하는 중에 실수한 것으로 짐작된다.
- 안시성 전투의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이라 말하였다. 고려 시대에 편찬된 삼국사기에서조차도 "안시성주의 이름이 전해지지 않아서 안타깝다"는 투로 쓰여있고, 양만춘이라는 이름은 명나라 시기에 새로이 등장한 이름이다. 이투스의 최태성은 "양만춘이라는 기록이 있었지만 정확하지 않다"고 한다. 2020 수능 강의에서는 이를 의식했는지 야사 기록이라고 미리 말해준다. 90~00년대만 해도 교과서와 학습만화 모두 '안시성=양만춘'으로 거의 공식화되어 있었던 것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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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석굴암을 복원하였을 때 의도적으로 훼손을 위하여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민족적 정기를 끊으려 들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하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목적이라면 복원이 아니라 완전히
부숴버리는 게 일반적이다. 사실은 콘크리트 접합이 당시로서는 최첨단 기술이라는 시대적 한계 때문에 훼손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의도적으로 훼손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12]
석굴암 문서 참고. 기사 석굴암 문서에도 나오지만, 원래는, 보물이 산중에 있는 건 아깝다며 해체 후 경성 내지 일본으로 반출하길 원했다고 한다. 물론 지역여론 악화로 이전하기 보다 기존 자리에서 복원하는 쪽으로 입장을 변경하였다. 그러나 현지인 1907년 일제 통감의 경주 초도순시 당시에도 크게 훼손돼 있어서 일제도 복원에 어려움을 겪었다. 지금이야 문화재 복원에 대한 고고학적, 기술적 진전이 많이 됐지만 복원한 1910년대 당시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다.
결국 미처 조립하지 못한 석재들이 석굴암 주변으로 즐비한 와중에 1930년대에 개보수를 완료하여 개소식을 열었다. 다만 반출과 관련해 석굴암 본존불 말고 앞에 배치됐던 5층소탑의 경우에는 탑신을 반출했을 개연성이 상당히 높다. 가령 어떤 책에서는 이렇게 적고있다. “작지만 빼어난 5층석탑이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는데, 풍문을 빌자면 모씨의 저택으로 운반돼갔다”(나카무라의 <조선 경주의 미술>, 192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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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에 대해서 강연하면서
"선조를 비롯한 조정각료들이 명나라의 군사적 지원을 기대하여 군사적인 대비를 안 하였다"(9분 25초부터)는 뉘앙스로 발언하였는데, 실제로는 1555년
을묘왜변 이후부터 일본의 침략위험을 느껴
경상도와
전라도의 성곽과 요새들을 전면 개보수하면서 동시에
이순신과 같은 지휘관의 재능을 알아보고 나름 이름있던 일선 지휘관들을 전부
한반도 남부로 배치하고 군비도 확장하는 등 40년 가까이 전쟁 대비를 하였다.
그러나 전쟁 초기의 고전은 많아야 수 만명일 것으로 판단하여 침략 규모를 오판한 것, 여진족과의 국지전 경험만으로 전면전 교리를 준비한 군사적 경험부족, 그리고 결정적으로 건주여진과 누르하치의 급성장으로 인해 양면전선에 준하는 전쟁 준비가 요구되었기 때문에 생긴 문제였지, 대비를 아예 안 해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발해가 공중분해된 이래로 한민족 전통의 천적이자 원수로 자리잡아온 것이 북방 기마민족이다. 또한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고작 10년 전에 니탕개의 난이 일어나며 이들의 위협이 뼈에 사무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조선은 자기 딴에는 합리적으로 행동해 군사 제원을 둘로 갈라, 기술과 자본집약적 제원(대형 화포와 판옥선 등)을 남쪽으로, 숙련되고 용감한 정예 병사 자원을 북쪽으로 배치하는 등 복잡한 대비를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는 건주여진은 그 시점까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조선과 전면전을 벌일 만한 역량까지는 갖추지 못했었고 당장은 싸울 의사도 없었으며, 일본의 원정군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라는 것이 드러나 북쪽에 배치된 병사들이 낙동강 오리알이 되어버린 것.
이는 한국 국사 교육과정의 문제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국사 교육과정에서는 임진왜란과 누르하치- 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갈라서 순서대로 설명하고 누르하치의 급성장이 명나라와 조선이 임진왜란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이루어진 것이라는 인과관계로 설명하기 때문에 오해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다. 실제로는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이전에 건주여진을 통합하고 상당히 위협적인 존재로 급부상했기 때문에 그 절묘한 처세술에도 불구하고 굉장한 어그로를 끌었고,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조선에 원군을 제안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설민석은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의 실질적 전군이 전멸했다"고 설명하는데, 조정이 신립군에 거는 기대가 컸고, 그들의 궤멸로 혼란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중앙군 총 병력은 아니다. 이후 북관 대첩처럼 기병까지 갖춘 북방의 정예병들이 야전에서 왜군과 전투를 치른 적도 꽤 있다.더불어 같은 영상에서 조총은 훈련이 쉬워 농민출신 병사들에게 보급하기 수월한 무기이지만, 활에 비해 명중율이 낮고, 사거리가 적어서 기록에서나 널리 알려진 것처럼 엄청난 무기는 아니었으나 단지 당시 현장 증인들이 자신들의 실책과 부족함을 무마하기 위해 그 위력을 과장하였다는 식으로 설명하였다.
그런데 전투나 전쟁이 조총 하나만으로 이긴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타당하지만, 반대로 이를 설명하기 위해 총의 위력을 너무 간과하였다. 초기형 소총이 사거리와 연사력이 딸릴지언정 짧은 사거리 내에서는 당연히 활보다 화력과 운동 에너지가 월등히 뛰어나서 갑옷을 무력화시키고, 상대가 조선군의 화포가 왜군을 놀래킨 것에 비하지 못하지만, 조총도 조선의 개인화기인 승자총통처럼 상대를 그 굉음으로 놀라게 했다.[13]
조총이 전쟁 무기로서 유용함은 화력도 나쁘지 않지만 안정적인 화력을 지속적으로 낼 수 있고 궁병과 달리 근접전 특화 보병을 따로 운용해서 보호해줄 필요 없어 병력 운용에서 더욱 유연하기때문. 승자총통은 산탄총 같은 개념으로 위력은 조총의 몇 배지만 탄을 5~10개씩 한꺼번에 쏘아 화력을 지속할 수 없고 사거리도 짧다. 승자총통은 점점 갑옷 입고 말 타고 다녀서 화살로 죽이기 어렵고 화포로 죽이기 너무 날랜 북방 오랑캐들을 용도로 제작된 무기다. 임란 직전까지 북방 오랑캐가 조선의 주적이었으니까.
이런 이점으로 인해 조선이 임란 개전 1년만에 얼른 조총 생산 시설을 갖추었고, 임란 당시 일본과 명나라의 조총병 비중이 임란 당시 25% 내외였지만, 임란 이후 정조 때는 조총병이 조선군 70% 수준으로 비중이 늘어난다. 게다가 총은 사거리와 연사력이 떨어지던 초기 화승총 시절부터 민간의 사냥 도구로서도 활을 밀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동학농민운동 때도 민간인 대부분은 총, 특히 조총을 들고 봉기를 일으켰다.
게다가 조총의 사거리가 활보다 짧다는 말 부터가 사실 잘못된 소문에 가깝다. 화살은 곡사로, 총탄은 직사로 날아가기는 한다지만 애당초 조총탄의 운동에너지는 현대 소총에 비해도 부족하지 않은 수준인데 사거리가 짧을 리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최대 사거리 자체가 아니라 초기 총기류의 조준장치 부재로 인해 조총류의 개별적인 유효 사거리가 활보다 부족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총의 운용법을 안다면 개별적인 유효 사거리의 부족이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생각해 볼 수 있다.
조총의 기본적 운용법은 현대같은 각개 소총수의 사격이 아니라, 조총수들이 대열을 이루어 단체로 화망을 구성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주로 사격에 도가 튼 산포수들로 이루어진 경보병 부대들은 예외적으로 각개조준 방식을 자주 사용했다. 독일의 예거, 프랑스의 샤쇠르 등. 조선에서도 나선 정벌 당시 파병된 포수들이 각개 사격으로 뛰어난 명중률을 보여 루스 차르국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적이 있다. 이런 각개사격을 주로 하는 경보병 부대들이 나중에 라이플의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다.
즉 조준하고 제대로 쏘는 대신 대충 겨누고 수십명이 한 번에 발포하므로서 명중률 부재를 만회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러한 운용법과 함께라면 개별적 유효 사거리 훨씬 밖에 있는 적에게도 조총은 강력한 화력 투사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며 이러한 조총 운용에 도가 터 있었기에 조총의 강력한 위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에 조선군에게 큰 충격을 줄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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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영유권 주장 다만 요즘은 간도 영유권 주장은 별 의미가 없으며, 국민들의 반응도 부정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이와는 별개로 대마도(
쓰시마 섬)가 조선 땅이었다는 주장을 꾸준히 하고 있다.
물론 이쪽도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한데다가 현실성 없는 주장인건 똑같다.
- 김구가 벌인 치하포 사건이 김구가 일본 중위를 살해한 것이라 설명하였다. 백범일지에서도 김구가 살해한 일본인은 장교라고 나오고 일반 대중들도 그렇게 알고 있지만, 실제로 스치다는 민간인이었다. 90년대 후반에 돌배개 출판사를 통해 백범일지를 풀어서 펴낸 도진순조차 각주에다가 대고 "김구에게 죽은 스치다는 군인이 아닌 일반 상인"이라고 써놓았다. 그래서 대한제국 시절에도 이 일을 우리나라가 배상한 적도 있다.
- 봉오동 전투에 대해서 설명 #하면서, 1920년 3월부터 일제관공서를 습격해오던 무장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일본군이 두만강을 넘어 삼둔자 마을을 수색하며 학살을 벌이자 이에 1920년 6월 4일 독립군이 반격해 일본군을 섬멸했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전투 경과를 보면 반격은커녕 일본군의 추격에 도망치기 급급했고, 김명오 노인의 집에 머물다가 후퇴, 최진포라는 사람의 집에 머물다가 그 집을 수색하려 들어온 일본 병사 1명을 쏴 죽이고 뒷문으로 후퇴하며 총격전을 벌였다는 게 전부다. 양측 모두 피해는 거의 없었다. 또한 삼둔자 전투 이후 신민단원들이 민간인을 사전에 대피시켰다고 설명하였는데, 실제로는 봉오동 하촌에 있는 민가에서 민간인들은 대피하지 못하였고 초반 일본군의 수색과정 중에서 민간인 17명이 일본군의 총격에 사망하였고, 이후 일제의 강압적인 수색에 못이겨서 주민들의 피난이 시작되었으며, 다시 피난을 가지 못한 민간인 다수가 암탐사격에 의해 사망하였다. 설은 이 이후 일본군 추격대 선봉을 독립군이 섬멸시켰다고 하는데, 이런 전초전 자체가 없고 섬멸시킨 적도 없다. 더불어 설은 사기 고취와 전시 홍보를 위해 과장되었던 사상자 수치인 157명 전사 300명 부상을 인용하여 결론을 지었는데, 최초 상해독립신문에서 보도된 사상자 수는 적(일본군) 사상병 12명이었고 일본측 자료에 의하면 사망 1명이 전부다. 현지답사를 통해 실제 전투를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에서조차 하나같이 "일본군이 마을에서 학살을 벌인 이유는 독립군을 찾아내 죽이지 못해서였지, 독립군이 일본군을 사살해서가 아니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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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해
설명하면서 "원래
중국 하면
삼국지! '지략이 뛰어나다' 생각하기 쉽지만, 그런 것 다 필요없어요. 그냥 전술 하나, '
인해전술'입니다"라고 말한 뒤, '무기 숫자보다 군인 숫자가 더 많았다'는 속설을 인용해 "3명 중 1명에게만 소총을 주고 나머지에게는 피리와 꽹과리를 주었다"라고 중국군을 숫자만 많은 오합지졸로 묘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당시 중공군이 소총을 3명당 1정씩 지급한 사실도 없거니와,[14] 널리 알려진 것과 달리 참전 당시 중국군의 규모는 1제대 26만, 2제대 8만 정도로 북진시 약 33만 명 규모였던 유엔군에 비해 압도적이지는 않았다.
중국군은 먼저 도로로만 이동하는 미군이나 미군에 비해 무장강도와 전투력이 취약한 한국군의 약점, 그리고 유엔군 측의 화력과 공군력의 우위는 밤에 활용하기 어렵다는 점 등을 파악했다. 이를 토대로 산악로로 우회기동하여 후방에 배치된 한국군 부대부터 야간에 공격하여 보급과 퇴로를 차단한 뒤 다시 밤중을 틈타 각 부대를 각개격파하는 포위 전술을 구사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참전용사들이 '인해전술'이라고 느꼈던 것은 바로 중공군이 이러한 각개격파 전술로 전체 병력은 압도적이지 못했어도 국소적인 교전에서는 매우 큰 양적 우위를 확보했기 때문. 일개 보병들 입장에서는 적의 물량이 압도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고, 이것이 인해전술이라는 잘못된 신화로 굳어지게 된 것이다. 오히려 중공군이 유엔군보다 훨씬 더 많았던 때는 이미 전선이 고착되어 '고지전'이 벌어지고 있던, 따라서 중공군이 선전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던 전쟁 후반부이다. 그러니 설민석의 발언은 사전 조사가 부족한 측면이 있었다. - 그리고 소련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으며 대신 두만강 일대에서 공중지원만 하고 있었다고 언급하였다. 실제로 소련군은 엄연히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공군과 곡사포 부대가 참전하였다. 다만 스탈린은 참전 사실을 감추기 위해 전투기를 중공군의 것으로 위장하였으며 중국어를 쓰도록 교육시켜 참전을 은폐하였다. 물론 미국도 소련의 참전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미국과 참전국들의 확전 여론 확대를 우려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이를 비밀로 부쳤다.
- 어떤 한국전쟁 강의에서는 딘 애치슨을 국무부 장관이 아닌 국방부 장관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https://youtu.be/ntP6RmaG7g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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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도 아닌 15세기에 현재
한반도에서 가장 추운
4군 6진 지역을 통치도 아니고 개척하러 보낸 것은 지금 생각하는 거보다 엄청난 고생이다. 조선시대 평균 수명이 짧기에 관료들은 정년이 없던 게 현실이다. 대부분은 정년을 바라지도 않는다. 입버릇은 "관직에 욕심 없다"고들 하지만, 조선시대에 현직 관료가 주는 혜택은 녹봉의 양으로 단순계산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하다. 오죽하면 사학과 대학원에서 농담처럼 도는 말이 조선시대 사대부의 3대 거짓말 중 하나가 '관직 욕심 없고, 얼른 낙향하고 싶다'일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당시 사람들도 한 사람이 너무 잘 나가거나 재상을 독점해서 지내면 왕조 시대 특성상 왕에게 직접적인 비난을 하지 못하는 대신, 장기 재임자에게 투서와 각종 비판과 견제가 들어가기 때문에 관례적으로 사양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재상은 모든 관료들의 꿈이지만, 재상까지 올라가는 관료는 정말 적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재상직을 오래 독점하면 모든 관료의 시기와 질투를 한몸에 받게 된다. 그러니 사양하는 척이라도 해야 되는 것. 늙고 병들어 직무를 수행하지 못할 정도면 이를 들어서 탄핵을 받았어야 한다.
그런데 설민석은 인터넷에서 역덕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밈을 진짜처럼 받아들여 얘기한 것. 인터넷 역덕들이 세종 같은 몇몇 유명한 왕들 시대에나 집중하다보니 황희의 사례가 특이해 보이는 거지, 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 재상을 지낸 사람들은 모두가 주기적으로 사직을 청하고 왕은 반려하는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세종이 유독 신하들 부려먹는 악덕 상사인 게 아니라, 그냥 사직-반려가 조선시대 정치의 당연한 관례였던 것이다. 물론 진짜 더이상 일하기 어려울 정도로 늙거나 아파서 골골대는 사람이 사직을 청한다면 왕이 수락해준다. 왕이 계속 반려한다는 것은 이게 관례적으로 사직을 청하는 행위라는 것을 양쪽 다 알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조선시대 특유의 정치판의 룰을 잘 모르는 역덕들이 악덕상사 드립이나 황희 노인학대 드립을 인터넷 사방팔방에 퍼뜨리면서 왜곡된 인식이 대중적으로 상당히 퍼져나간 상태다. 사실 여기 위키만 해도 온갖 문서에 이 드립이 퍼져있어서 일일이 수정하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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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어른 방송분 중
이성계를
귀화한 여진인이라고 언급했다. 이성계는
전주 출신 이안사의 후손으로 이성계의 아버지인
이자춘이
원나라에 속했다가
고려에 투항하긴 했지만 그 역시 고려혈통이며 이성계 본인도 동북면의 특성상
여진족과 교류가 많았을 뿐 그가 여진족 출신이었다는 것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자세한 것은
이성계 여진족설 문서 참고.
여기서 이성계, 정도전, 무학대사를 흙수저로 칭하였는데, 이성계는 여진족이 아닌 것은 물론이고 동북면에서 자신의 왕국이나 다름없는 기반을 가진 세력가 집안, 정도전은 외조모 혈통의 문제가 있다지만 아버지 정운경이 형부상서까지 지낸 인물로 이성계와 정도전 모두 개경 귀족 중심부와는 거리 있는 위치였다는 것이면 몰라도 흙수저라 할 신분은 절대 아니다.
참고로 위 영상 뒷부분에서 이방원이 공부하기가 싫어서 정도전을 살해했다는 얘기를 하는데 이방원은 문관으로 정도전의 제자였으며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과거에 급제했을 만큼 공부에 도가 튼 엘리트였는데 그런 이유로 정변을 일으킬 리가 없다.
태종 이방원은 조선의 국왕들 중 유일한 과거 급제자였다. 1468년에 구성군 이준이 영의정을 3년 간 지내고 난 직후 1471년(성종 2년) 이후로 종친의 과거 응시는 금지된다. 구성군 이준은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아들이다. 그리고 당시 이성계의 가문에서 유일한 과거 급제자, 그것도 순위는 낮은 편이었지만 당시 20세도 안 되는 어린 나이였기에 변방 출신 무신이라 자격지심이 있던 이성계는 이 사실을 엄청나게 기뻐했고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1차 왕자의 난은 태조의 후계 문제, 사병혁파를 비롯한 정도전의 급진적 개혁에 대한 불만 등 복잡한 이유들이 얽혀서 발생한 것이다. 물론 왕이 된 이후에 경연을 피하긴 했지만, 이건 경연 자체가 굉장한 부담이 되는 일과 중 하나였기 때문이고 오히려 참여하면 역으로 신하들을 학식으로 찍어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역사 강사라는 사람이 이를 모르진 않았을 테고, 본인 딴에는 농담이라고 던졌겠지만, 이걸 보는 대중은 진실로 오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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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벌거벗은 세계사
난징 대학살 편에서
6.25 전쟁 당시
북한의 남침(혹은 김일성의 남침 결심)이
애치슨 라인 때문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1994년 6월
김영삼 당시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 때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건내준
소련의 과거 기밀문서, 이른바 '옐친 문서'에서는
김일성이 1949년 3월
스탈린과의 회담, 그보다 전에는
평양 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남침승인을 받기위해 노력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애치슨 라인은 1950년 1월에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기 때문에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과 상관 없이, 바꿔 말하면 미국의 전쟁 개입 여부와는 별개로 남침을 계획하고 스탈린을 수시로 설득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이후 스탈린은 애치슨 라인 발표 2개월 후인 1950년 3월에 끝내 남침을 승인 한다.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이유는 기밀문서에 나와있지 않아 스탈린의 당시 의중은 추측만이 가능하다. 스탈린이 끝내 남침을 승인한 것에 애치슨 라인의 발표가 작용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의 의견은 애치슨 라인 뿐만 아니라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중국대륙을 장악한 것, 소련의 원자폭탄 보유 등 다양한 의견이 종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스탈린의 당시 의중이 추측만이 가능한 상황에서 애치슨 라인이 스탈린의 남침승인에 직접적 혹은 결정적으로 작용했다는 식의 설명은 옳지 않다. #
- 선을 넘는 녀석들 스페인 편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 하지만 레알 마드리드 CF/오해 문서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지원했다는 물적 증거는 전혀 없으며, 되려 레알 마드리드 역시 바르셀로나, 빌바오 못지 않은 탄압을 받았다. 1950년대에 프랑코가 레알 마드리드를 비호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긴 했으나, 바르셀로나 역시 프랑코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하는 등. 스페인 축구계는 바스크의 빌바오를 제외하면 프랑코 정권의 영향력 하에 놓여 있었다. #
4. 석사 논문 표절 사건
자세한 내용은 설민석 석사 논문 표절 사건 문서 참고하십시오.
[1]
그래서 타 전공자가 교육대학원에 가는 경우는 거의 없고, 대부분 현직 교사가 직무 경력을 위해 진학하거나 사범대 학부 졸업자가 교육 분야 연구를 위해 지망하는 경우가 전부이다. 교육대학원은 특정 과목 교육에 필요한 전공 지식을 배양하는 곳이 아니라 이미 그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떠한 교육공학기법을 적용하여 지식을 전달할 것인가를 연구하는 곳이다.
[2]
사범대학 학부와 달리 교육대학원은 사범대 출신자로 지원자가 한정되어 경쟁이 낮고, 대학원에서 교원자격증을 무제한으로 발급할 경우 자격증의 질적 수준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3]
마지막 가능성이 연극과를 주전공으로, 사학과를 복수전공하는 경우지만 이 역시 알 수가 없는 부분이다.
[4]
일반대학원 사학전공은 여타 전공들 중에서도 학위취득기간이 매우 긴 전공으로 꼽힌다. 부지런히 준비만 한다면 2년(4학기) 안에는 논문이 통과되는 다른 전공과 달리, 사학전공은 빨라야 2년 반(5학기), 3-4년은 예사로 준비한다. 이는 사학전공이 참고해야 할 레퍼런스의 양이 방대함은 물론 공정성과 객관성을 위해 오래 검증하는 점, 필요에 따라 발굴조사나 답사까지 곁들여야 한다는 점이 포함된다.
[5]
학부 전공을 대학원 사학과로 가져와 그 전공 분과의 역사를 연구하는 일은 드물지 않다. 단, 예외적으로 언어학사(언어학의 역사)와 문학사(문학의 역사)는 사학과에서 거의 다루지 않고 어문계열에서만 다룬다. 물론 아예 안 배우는 건 아니지만 가령
겐지모노가타리에 대해 배운다면 일문과에서는 겐지모노가타리의 역사적 배경과 흐름은 물론 그 속의 문학적 내용과 당시의 고전문법까지 역사, 언어, 문학을 총체적으로 배우지만 사학과에서는 '이 시대에는 이러이러한 사회상이 나타나면서 겐지모노가타리라는 것도 나왔습니다.' 수준에서 끝난다. 그래서 언어학사나 문학사를 연구하고싶은 학생은 사학과 대학원이 아니라 어문계 대학원을 가야 한다. 학부 사학과에서도 사회과학 및 철학이 아닌 어문계열의 역사학은 사학의 영역이 아닌 어문의 영역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해서 거의 다루지 않는 편이다. 이유는 언어학사와 문학사를 제외한 역사들은 사회적, 시대적 배경 그 자체가 그 분과에 영향을 주고 그것이 하나의 역사로서 전개되지만 언어학사와 문학사는 사회 및 시대 배경이 어학과 문학에 끼치는 영향이 아주 미미하고 그것이 하나의 역사라기보다는 언어적, 문학적 이론으로 굳어졌기 때문이다.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사회과학과 철학은 역사가 끼치는 영향이 막대해서 좋든 싫든 공부하지 않을 수가 없으니 같이 한 묶음으로 공부하게 되지만 언어학과 문학은 시대 흐름과는 별개로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해왔으니 어문이라는 별도의 학문을 다시 공부해야 하므로 사학 전공자보다는 어문 전공자가 공부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라는 뜻. 그래서 국어학사와 국문학사가 궁금하면 역사교사가 아니라 국어교사를 찾아가야 한다. 성균관대학교 사학과에서 국어사 전공으로 학위를 받고 성대 사학과와 한국외대 한국어교육과에서 국어사를 가르치는
정재환 교수 같은 사례도 없지는 않지만 이건 정재환 교수가 국어사라는 분야를 국문과가 아닌 사학과에서, 국어학의 범주가 아닌 사학의 범주로서 직접 개척한 케이스이기 때문에 아주 드문 예외에 속한다.
[6]
남의 역사왜곡은 욕하면서 설민석이 자행하는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니, 설민석의 새로운 해석이니 하며 눈물의 똥꼬쇼를 한다.
[7]
프란츠 폰 파펜이 히틀러와 나치를 무시하여 이용하려던 것이 그 때문이었다.
[8]
모용의 경우 정사에서는 등장하지 않고 연의에만 등장한다.
모용선비의 귀화 성씨인 모용은 후한이 멸망한 후에야 등장했으므로 실제 삼국지 역사에서 모용씨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9]
공손씨는
공손찬과
공손연, 제갈씨는
제갈근과
제갈량 형제, 사마씨는
사마의,
사마사,
사마소 삼부자, 하후씨는
하후돈 &
하후연 등이 있다.
[10]
태사자,
관구검,
순우경,
황보숭 등.
[삭제됨]
[12]
실제로
최태성과 같은 강사 및 교수들도 이를 언급하며 해당 유적지에 방문할 때 관광 가이드도 이러한 취지로 설명을 하는 등 왜곡된 낭설이 널리 퍼져있다. 물론 졸속으로 진행하여 결과적으로 문화제를 훼손하였다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13]
각종 매체를 통해 총성이 매우 크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는 현대인들도 실제로 총성을 들어보면 소스라치게 놀라고 움츠러든다. 심지어 사격장에서 처음 총성을 들으면 몇 번 들었더라도 소리가 날때마다 무의식중에 움찔움찔 할 정도로 크다.
[14]
전 문단에선 소련군이 이런 식으로 운용했다고 서술돼 있었는데,
독소전쟁 당시 소련군이 여러 명이서 소총 1정을 같이 썼다는 건 영화
에너미 엣 더 게이트 때문에 널리 퍼진 오해로, 소련군의 개인화기 지급률은 딱히 부족하지 않았고 자동화기 지급률은 오히려 독일군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