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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여의 문화를 다루는 문서.2. 상세
其人麤大, 性彊勇謹厚, 不寇鈔.
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출처
부여인들은 전체적으로 굳세고 강인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고구려와 유사한 북방계 민족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주로
평원을 터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반농반목의 생활을 영위했다. 특히 부여의 음주가무와 백의민족 같은 문화는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졌다.그 나라 사람들은 체격이 크고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며, 근엄·후덕하여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하지 않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출처
3. 종교
《삼국지(三國志)》<위지(魏志)> 부여조의 영고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정확히는 은력으로 정월이다. 당시 중국은 인월(동지의 다다음달)을 정월로 보았는데 부여는 동지 다음달인 축월을 정월로 보았다. 즉 영고는 부여에서 한해의 시작에 열리는 제천행사이다),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고 한다. 때문에 제천 의식에 기초한 샤머니즘 신앙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부여의 동명 시조 설화가 고구려의 주몽 설화와 판박이인 것을 볼때 부여에도 고구려와 같은 시조/시조모 숭배 신앙이 있었을 것이란 추정도 있다.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천 의식을 행했는데, 이때 소를 죽여 그 굽을 살펴서 길흉을 점쳤다. 만약 굽이 갈라져 있다면 이를 흉조로 여겼고, 그렇지 않다면 길조로 여겼다.
4. 의복
在國衣尙白, 白布大袂, 袍·袴, 履革鞜.
국내(國內)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출처
흰색을 숭상하여
흰 옷을 즐겨 입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국내(國內)에 있을 때의 의복은 흰색을 숭상하여, 흰 베로 만든 큰 소매달린 도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삼국지(三國志)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 부여(夫餘) 출처
5. 장례
장례 문화가 상당히 어마어마했는데, 죽은 사람의 장례는 무조건 5월에 치렀다. 만일 다른 달에 죽으면 5월까지 보존했고 심지어 당시에는 귀한 얼음까지 팍팍 써 가면서 최대한 시체의 부패를 늦추었다. 다른 설로는 무조건 5월에 장례를 치른 게 아니라 5개월 동안 장례를 치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3년상 같은 것을 생각한다면 이쪽이 더 현실적이다. 이런 장례 의식을 후장(厚葬)이라고 불렀다.6. 물질문화
고고학적인 조사 결과와 함께 부여의 물질 문화에 대해서 살펴보면, 부여 문화의 출발은 청동기시대의 서단산 문화로서, 그로부터 초기 철기시대의 대해맹-포자연 문화로 이어져 형성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아예 대해맹-포자연 문화를 부여로 인식하는 연구자들도 더러 있는 편이다. 서단산 문화의 니질계의 회도들이 확인되는 층위의 위로 대해맹-포자연 유적의 층위가 확인되고 있으며, 토기의 유형 또한 유사하다는 점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가장 우측의 토기는 유수 노하심 유적의 출토품이고, 그 옆의 토기는 서단산 문화에 해당하는 유적에서 확인된 토기이다.
이는 기원전 1세기 말부터 기원후 3세기 사이의 유적인 중국 지린성 유수시 노하심촌 유적, 즉 유수 노하심 유적에서 확인되는 독특한 형태의 동이류의 토기들과도 관련이 있다고 파악하기도 한다. 파수부가 2개씩 부착되는 특징이 확인되며, 독특한 구연부의 형태를 갖는 것이 특징인데, 이러한 특징적인 요소들이 부여 문화의 기저 유형으로 인식되는 서단산 문화에서 확인되는 토기 유형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특히 서단산 문화가 확인되는 유적의 층위 바로 위로 포자연 유적, 대해맹 유적들이 확인되는데, 이 유적들에서 바로 저러한 쌍이부호들이 확인되므로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부여와 관련된 유적으로는 통상 '유수 노하심' 유적이라고 불리는 중국 지린성 위수시 노하심촌의 노하심 유적이 대표적이다. 그 외에도 지린성 지린시의 동단산 유적, 서단산 유적, 모아산 유적 등이 있다. 조사가 되었지만 보고서가 정식으로 발간된 유적은 유수 노하심 유적밖에 없으며, 다른 유적들은 보고서가 간략한 형태로만 짧게 보고되었다. 모아산 유적 같은 경우에는 당대의 사회상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고분 자료 중심의 유적이지만, 보고서가 공식적으로 발간되지 않아서 자세한 연구가 어려운 실정이다.
이런 것은 동북공정 때문은 아니고 원래 중국 고고학계 자체가 한족과 관련된 유적에 포커스가 자주 몰리는 편이며, 다소 매스컴의 인기를 끌 만한 금은보화들이 나오지 않으면, 보고서의 발간 작업 자체가 많이 느린 편이다. 또 다른 이유도 있는데, 문화대혁명 당시에 벌어진 희대의 반달리즘 때문에, 비슷한 일이 또 있을 걸 우려해서 중국 고고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하는 것에 대해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960년대에 명나라의 만력제의 능을 발굴하는 와중에 홍위병들이 들이닥쳐서 고고학자들을 끌고가 코로 탕수육을 먹이고 발굴된 유물과 유골들을 박살내버린 흑역사가 있어서, 중국공산당이 아직까지도 건재한 이상, 똑같은 짓을 하려는 또라이가 안 나온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에 유적 발굴을 꺼리게 된 것이다.
때문에 중국의 고고학자들은 지금도 한족들이 세운 게 분명한 명나라 시대의 황릉들조차 하나도 발굴하지 못하고 입맛만 다시는 판국이라, 이민족, 그것도 타국 사람들이 세운 유적의 발굴에 의욕적일 리가 없다.
한국이나 일본이 고고학적 발굴조사의 보고서의 발간 시스템이 투명하고 공식적인 편이다.
따라서 사실상 구체적인 부여의 물질 문화를 담고 있는 실물자료로는 유수 노하심의 보고서 외에는 전무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부여의 유적과 유물에서 다소 뜻밖(?)인 점은 바로 선비 계통의 유적과 상관성이 많다는 점이다. 사실 동북지역의 1~3세기 토기 문화의 전개 과정은 앞선 청동기시대부터 한 문화의 성립 즈음까지 매우 복잡 다변하게 전개되므로, 저런 질 나쁜 도면 몇 장으로 토기 문화의 동질성 내지는 상관성을 역설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그러한 한계점을 차치하고서라도 금속 유물 및 장신구류의 조합상을 보면 저런 동물문 장식의 계열 자체가 스키타이 계열의 문화적 요소이기도 하다. 지면의 한계가 있지만 대부분의 장식 유물들이 흔히 선비족 유적의 표지적인 유물 세트와의 관련성이 돋보인다. 청동 단추라던지 조개 껍질(화폐(?)), 청동 방울 등.
귀걸이[이식(耳飾)]의 형태 또한 조형(祖形)을 따지고 보면 북방 계열, 즉 내몽골 쪽의 기원 전후한 빠른 시기의 유적에서 기원이 찾아지기도 하기 때문에 부여와 선비족의 관계는 생각보다 복잡하게 전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흔히 알려진 신라 금관들의 장식들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런 고구려는 선비족 계열의 국가들인 모용선비의 전연, 후연, 북연 즉 '삼연(三燕)'의 물질 문화와의 상호교류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그만큼 동북아시아 국가나 집단의 상호교류가 활발했었다.
물론 신라 금관의 장식적인 요소 일부들이 관련이 있다는 점이며, 전반적인 금관 자체의 신라 특유의 아이덴티티는 엄연히 신라의 독자적인 요소로 엄존하고 있음을 전제에 둔다.
그래도 위와 같은 귀걸이는 조형이 내몽골의 흉노, 선비 계열의 유적에 있다할 뿐이지 그래도 분포 지역의 패턴을 살펴보면 오롯이 부여계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양식을 갖춘 편이다.
위의 사진과 같은 형태 외에도 새끼손톱 모양의 귀걸이도 있는데, 이 역시 부여계로 볼 수 있는 유물이다. 특히 이 손톱 형태의 귀걸이는 요령성 환인현의 망강루 고분군, 길림성 통화시 만발발자 유적에서도 확인되는데, 두 고분군은 모두 초기 고구려와의 관련성이 돋보이는 고분군이기도 하다. 또 김포 운양동 유적에서도 같은 형태의 귀걸이가 확인되기도 하였다.
위의 사진에서 우측의 귀걸이의 형태는 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요령성 북표현 라마동 고분군에서도 확인되는데 그 유적은 삼연, 즉 선비족의 고분 유적이기도 하다.
여하간 위의 이유로 인해서 부여와 선비나 흉노와의 고고유물의 조합 및 자체적인 판별에 대한 논의가 많다. 동경의 경우 선비족은 파훼하여 부장하는 점이 특징이지만, 유수 노하심에서는 완전한 형태의 동경이 많이 확인되고 있으므로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서차구 고분군에서는 파훼된 동경이 확인되고 있으며, 선비 계통의 삼족기도 확인되기도 한다. 그러나 또 부여계의 이식도 확인되고 있어 교류의 흔적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떠한 유물이 어떠한 형태인가를 두고 완연한 부여계의 물질 문화인가를 정의하는 것은 아직도 쉽지 않은 문제이다.
6.1. 금동가면
2014년 10월 29일, 국립중앙박물관이 공개한 일제가 수집한 유물 중 부여 금동 가면 # 이 공개된 바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일제강점기 유리 건판 목록과 문서 열람 서비스에서도 사진을 확인할 수 있으며, 중국 길림성에서 채집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위의 일제강점기에 채집한 가면과 거의 동일한 형태의 가면이 중국 길림성 길림시의 동단산 유적에서 채집된 바 있다. 참고로 채집이라 함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되거나 유물 신고에 의해서 입수된 것을 뜻한다. 위의 유물은 길림성박물관의 부여관에서 전시 중에 있다. 이러한 가면을 부장하는 특징 또한 선비족의 유적에서도 확인된다.
7. 건축
그 외에도 동단산 유적의 바로 밑에는 동단산 평지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 바로 뒤로는 모아산 유적이 넓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초기 부여의 도성지로 추정케 하는 근거가 되는 유적들이기도 하다. 이 동단산의 바로 앞에 흐르는 송화강은 지린시를 동서로 구분하는데, 동단산 유적에서 10여 km 정도 서쪽에는 바로 서단산 유적이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