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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구려, 부여에 속하는 여러 나라들의 관계들이다. 다만 고구려 건국 설화가 다름아닌 고구려가 있었을 당대부터 유명하고 드라마틱한 좋은 이야기였던데다 현대에도 회자되어 고구려가 곧 부여에서 갈라진 나라라는 관념이 강하고, 실제로도 왕족도 부여계였지만 문화와 종족면에서 고구려-부여간 관계보다 고구려-고조선(진개에게 밀려나기 전 요서 및 요동에 무게 중심을 둔)이 더 밀접했다. 이는 후술할 부분 참조.[1]2. 역사
2.1. 초반
일단 고고학적으로는 기원전 2세기에 부여에서 온 소수 집단이 남래하여 요동 동부 변경 지대의 고조선 잔민들을 아울러 지배층으로서 모종의 집단을 이루고, 기원전 1세기에 또 다시 역시 부여계 집단이 남래하여 고구려를 이루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로선 이 두 집단은 주몽 설화에서 등장하는 졸본부여와, 주몽이 세우는 고구려임이 거의 확실시된다. 즉 고구려는 소수 부여계 지배층과 다수 고조선인 피지배층이 융화되어 성립한 나라란 얘기다. 다만 고구려 초기 돌무지 무덤은 부여계 집단이 오기 전에는 주로 산 아래 지역이나 계곡 근처에 위치했는데, 부여계 집단이 온 이후에는 부여계 지배 집단이 주로 무덤을 쓰는 산중턱에 무덤을 쓰는 걸로 드러나며 부여계 토광묘 묘제 전통도 일부 따르고 부장품도 부여계와 비슷한 양상을 띈다. 즉 고조선계를 일방적으로 찍어누른 건 아니고, 어느 정도는 지배계층의 일부로 포용하고 타협한 것으로도 드러난다.2.2. 중반, 후반
다만 때문에 부여가 초반에 고구려를 나름 무시했을 개연성은 크다. 국력 자체가 고구려가 약소하긴 하였으나, 부여 입장에서 고구려는 자기네한테서 떨어져나간 이들이 그 당시만 해도 도시국가 수준의 소국이나 구성하던 고조선계 세력들을 꾀어서 세운 나라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였는지 유리명왕 때 고구려는 부여에 조공을 바치고 태자를 볼모로 보내기도 했으나 대무신왕은 부여를 정벌하려 했으며 대소왕은 대무신왕과의 전쟁에서 사망했다. 이 때부터 둘의 대립은 더 커졌다. 대소왕 사후 부여에서는 내분이 있었는지 갈사왕은 부여를 떠나 갈사국을 세웠고, 대소왕의 종제인 낙씨는 1만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에 투항했다. 태조대왕 때에는 금와왕의 막내아들이 세웠던 갈사국이 고구려에 합병되었다.121년과 122년에는 고구려가 현도군을 위협하자 위구태(왕자)가 군사를 이끌고 현도군을 지원해 5백여명을 참수하는 등 고구려와 현도군과의 싸움에서 현도군 편을 들었다.
이후 3세기에 기록된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 의하면 국력상으론 부여가 고구려보다 우위였으며[2], 간위거왕 시기에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하자 부여는 군량을 위나라군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하지만 승부가 끝내 고구려의 승리로 끝난 건, 부여는 확장할 곳이 마땅치 않았던데가 북쪽과 서쪽에는 선비족과 흉노족이란 만만찮은 강적들이 있었던 반면, 고구려는 남쪽에는 한반도 북부, 서쪽으로는 요동, 동쪽으로는 옥저라는 금노다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한반도 북부, 요동, 옥저에 살았던 예맥족들이 다들 그저 허수아비들만은 아니었으나, 다름아닌 부여와 한군현의 선진 기술을 직수입해서 부쩍부쩍 성장하던 고구려의 적수는 아니었다.
부여가 고구려를 멸하는데 전력 투구하면서 고구려가 훗날 했을 역할을 대신 했다면 얘기는 달라졌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고구려가 한반도 북부를 제패하고 요동 동부 맥족들을 아우르게 되면서 결국 우열은 뒤집히게 된다.
2.3. 결말
고구려의 본격적인 부여 정벌은 광개토대왕 시기였다. 모두루묘지명에 의하면 묘주인 모두루의 관직이 영북부여수사(令北夫餘守事)였고, 모두루의 조상[3]인 염모가 북부여 지역을 침입해온 모용선비를 막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광개토대왕비에 의하면 410년 동부여를 정복했다고 한다.이후 494년 문자명왕 때 이르러 완전히 병합되었다. 일부 부여 세력들은 더 북쪽으로 달아나서 두막루를 세웠으나 결국 고구려에게 복속되고 만다.
3. 같이 보기
[1]
한편, 부여는 고조선 유민을 대규모로 받아들인 사실이 없다. 진개의 정벌 당시 밀려난 고조선인들 대부분은 남쪽 한반도로 이주했고, 위만이 정권을 찬탈했을 때 발생한 한씨조선인들도 대부분 한반도로, 위만조선이 망할 때 발생한 유민 대부분 역시 한반도로 이주했기 때문이다. 고조선 유민이 부여로 이주할 루트 대부분은 다름아닌 고구려인들의 선조인 맥족, 옥저계 동북한인들 등등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고조선인들이 그렇게 만만하게 밀어낼 수 있는 수준의 선주민들이 아니었다.
[2]
고구려는 3만호, 부여는 8만호로 기록하고 있는데, 부여가 고구려보다 2배 이상 많았다.
[3]
모두루의 조부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