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노 탱리고도선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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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통 북흉노 선우
봉후선우 逢侯單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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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난제(攣鞮) | |
휘 | 봉후(逢侯) | |
아버지 | 휴란시축후제선우(休蘭尸逐侯鞮) 난제둔도하(攣鞮屯屠何) | |
생몰 | ?년 ~ ?년 | |
재위 | 94년 ~ 118년 |
1. 개요
북흉노의 비정통 선우. 남흉노의 초대 선우 혜락시축제의 손자이자 남흉노 8대 선우인 휴란시축후제의 아들.2. 생애
94년 난제사자가 정독시축후제선우로 즉위하자 남흉노로 망명한 북흉노인 500~600명이 정독시축후제선우를 암살하려 시도했는데, 안집연사(安集掾史) 왕념(王恬)이 난제사자를 호위하는 군사들과 함께 북흉노인들을 격파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남흉노로 투항했던 북흉노 15부 20만여명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휴란시축후제선우의 아들인 욱건일축왕(薁鞬日逐王) 난제봉후를 협박해 선우로 옹립하였다.난제봉후를 선우로 옹립한 북흉노인들은 관리와 사람들을 죽이고 우정(郵亭)과 여장(廬帳)을 파괴한 후 막북으로 넘어가려고 했다. 이에 후한은 행거기장군(行車騎將軍) 등홍(鄧鴻), 월기교위(越騎校尉) 풍주(馮柱), 행도료장군(行度遼將軍) 주휘(朱徽)에게 좌·우우림(左·右羽林), 북군(北軍) 오교사(五校士), 군국(郡國)의 적사(積射) 및 변경지대의 병사들과 오환교위(烏桓校尉)임상(任尙)에게 선비족과 오환족 병사들을 동원하게 하면서 4만 대군을 거느리고 봉후와 북흉노를 토벌하게 했다.
봉후는 군사 1만을 이끌고 정독시축후제와 사흉노중랑장 두숭이 주둔하고 있던 목사성(牧師城)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94년 겨울, 등홍(鄧鴻) 등이 미직현(美稷縣)에 도착하자 봉후는 강에 얼음이 언 것을 이용하여 험하고 좁은 곳을 건너서 만이곡(滿夷谷)을 향하여 나아갔다. 정독시축후제선우는 아들에게 1만여 명의 기병과 두숭(杜崇)이 관할하던 4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게 하여 등홍(鄧鴻) 등과 [함께] 대성새(大城塞)에서 봉후를 추격해 3천여 명의 목을 베고 포로와 투항자 수만 명을 얻었다.
풍주(馮柱)는 다시 군대를 나누어서 그 별부(別部)를 추격하여 수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임상(任尙)은 선비(鮮卑) 대도호(大都護)인 소발외(蘇拔廆) 및 오환(烏桓)의 대인(大人) 물가(勿柯)[의 기병] 8천 명을 거느리고 만이곡(滿夷谷)에서 봉후를 기다리고 있다가 습격해서 다시 그를 크게 격파하였다. 전후하여 무릇 1만 7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그러나] 봉후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새외(塞外)로 탈출해버렸고, 후한군은 추격을 포기하고 95년 1월에 귀환하였다.
봉후(逢侯)는 새외에서 두 부로 나누어서 자신은 탁야산(涿邪山) 아래에서 우부(右部)를 다스렸고, 좌부(左部)는 삭방군(朔方郡) 서북부에서 주둔하였는데, 서로 수백 리가 떨어져 있었다.
96년 봉후가 다스리는 우부(좌부)와 좌부(동부) 흉노 간 서로 이반을 의심하다가 좌부가 봉후선우에게 등을 돌려 후한에 투항해버렸다. 이들은 삭방군의 관내로 들어가버렸고, 방분(龐奮)은 투항한 흉노인들을 환영하면서 위무했다.[1]
한편 봉후의 무리는 기근에다 선비족의 공격에 시달리면서 북흉노에서 후한으로 도망오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남흉노까지 매년 북흉노를 공격하면서 무리 대부분이 남흉노 측에 포로로 잡혀 끌려가면서 북흉노는 형편이 어렵게 되었다.
104년, 봉후는 사신을 보내 과거 호한야선우가 맺었던 화약을 다시 맺고싶다며 후한에 제안했으나, 후한은 거부했다. 105년에도 사신을 보내 자신의 나라가 가난해서 아직 예물을 갖추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대사(大使) 파견요청과 아들을 보내 내조하겠다고 요청했으나 역시 거부당했다.
117년, 봉후는 선비족에게 격파당해 부중이 분산되어 대부분의 무리가 선비족에게 투항했다.
118년, 봉후는 기병 백여 명을 이끌고 후한으로 투항했다. 봉후가 삭방군 관새로 오자 등준(鄧遵)은 봉후를 영천군(潁川郡)으로 보내야 한다고 상주(上奏)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