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 북흉노 선우
북선우 北單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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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 난제(攣鞮) | |
휘 | 불명[1] | |
생몰 기간 | 음력 | 기원후 ?년 ~ 기원후 91년(?) |
재위 기간 | 기원후 88년 1월 ~ 기원후 91년(?) |
1. 개요
북흉노의 3대 선우.[2] 우유선우의 이복형으로, 동생 어제건이 있다.북선우(北單于)는 후한 측이 북흉노의 선우를 남흉노의 선우와 구분하기 위해 붙여진 호칭이라 실제 호칭은 알 수 없다.
2. 생애
우유선우의 이복형으로, 본래 좌현왕(左賢王)이었으나 87년 우유선우가 선비족(鮮卑)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자 이듬해인 88년 1월 골도후(骨都侯) 등의 추대를 받아 선우로 즉위했다. 북선우는 선비족과 정령족(丁令)을 두려워해 안후하(安侯河) 서쪽으로 피신했는데, 그의 형제들이 서로 선우로 즉위하려고 다투면서 세력이 크게 약화된 상태였다.북흉노 소속이었던 허거(虛渠), 우수일축(右須日逐) 선당경(鮮堂輕) 등을 통해 북흉노가 약화되었다는 상황을 파악한 남흉노의 휴란시축후제는 북흉노를 합병하기 위해 후한의 두태후에게 북흉노 정벌을 제안하였다. 휴란시축후제의 제안을 승낙한 후한 조정은 89년 정서장군 경병, 거기장군 두헌이 이끄는 후한군 8천명과 휴란시축후제가 이끄는 남흉노군 3만명이 삭방군으로 나아가서 북흉노 정벌을 감행하였다. 북선우는 계락산에서 후한-남흉노 연합군 싸웠으나 패배해 몸만 겨우 도망쳤다.[3]
이어 90년에 후한-남흉노가 다시 북흉노를 공격했는데, 후한-남흉노군이 군사를 둘로 나누어 진격해 북선우의 군대를 포위공격하게 되었다. 북선우는 크게 놀랐지만 정예병 1천여명을 이끌고 접전을 벌였다. 북선우는 부상을 입고 말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말에 올라타 경기병 수십명과 함께 겨우 도망쳤고, 후한-남흉노 연합군은 선우의 옥새를 얻고 연지와 남녀 5명을 사로잡고, 8천여명의 목을 베고 수천명의 포로를 데리고 귀환했다.
91년 북선우는 후한의 우교위(右校尉) 경기(耿夔)에게 패한 후 도망쳤는데 그 소재를 알 수 없었다고 한다. 북선우가 실종된 후 동생인 우곡려왕(左谷蠡王) 어제건이 선우로 즉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