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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쪽: 가장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모차르트의 초상화. 모차르트 사후인 1819년에 바바라 크라프트(Barbara Krafft)가 그렸다. 모차르트 사후에 그려진 초상화지만, 난네를으로부터 빌린 모차르트 초상화 몇 점을 토대로 그린 그림이다. 가운데: 요제프 랑에가 그린, 죽기 한두 해 전의 모차르트를 그린 미완성 초상화. 그는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알로이지아 베버의 남편이자, 또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의 형부이기도 하다. 콘스탄체는 이 그림이 남편과 가장 흡사하게 그려졌다고 평가했다. 모차르트의 원래 머리카락은 적갈색이며, 왼쪽의 초상화처럼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깔끔한 백발은 다 가발이다.[1] 정작 모차르트 자신은 특별한 행사를 제외하곤 가발을 쓰는것을 꺼렸으며, 18세기 후반 유럽에서 유행하던 남성 헤어스타일인 생머리를 끈으로 동여매어두는 포니테일을 선호했다고 한다. 아래쪽: 북독일 지역을 여행하던 말년의 모차르트를 도리스 슈톡(Doris Stock)이 그렸다. 1789년 당시 33세이던 모차르트 모습을 그린 초상화이다. 실제로 제자 훔멜 등 당시 여러 사람의 증언에 다르면 모차르트는 눈이 살짝 튀어나오는 증상을 유발하는 그레이브스병을 앓아 눈이 상당히 컸다고 한다. |
1. 어린 시절
7살의 모차르트. 화가는 미상.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걸음마 시절부터 누나 난네를이 아빠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을 지켜보고 자랐으며, 음악과 수학에 특출난 재능이 있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3세 때 쳄발로 연주를 터득했고 5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 음악을 배우는 속도가 너무 빠른 나머지 5살 많은 누나의 수준을 금세 뛰어넘어 버렸고, 남동생에게 뒤처진 누나 난네를은 이를 몹시 속상해 했다고 한다. 부친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주변 사람들은 아들의 음악적 능력에 대한 그의 주장을 그냥 허풍이 잔뜩 섞인 자식자랑 정도로 생각하고 믿지 않았는데, 일부러 그의 집에 찾아와서 어린 음악의 신동의 능력을 시험해 본 후 그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작곡된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볼프강 모차르트가 즉흥적으로 연주하거나 흥얼거린 것을 아버지가 악보로 옮겨 놓은 것이다.
2. 연주 여행
아버지인 레오폴트는 자기 아들의 음악적 재능을 알아보고 작곡을 그만둔 뒤 볼프강에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데에 힘썼다. 레오폴트는 아들의 나이가 6살이 되던 1762년부터 온 가족을 데리고 유럽 연주 여행길에 올랐으며 이후 10년 동안 볼프강은 유럽 각지를 여행하였다. 이 여행을 통해 레오폴트는 음악의 신동인 아들을 유럽 각지에 소개하는 한편[2] 각지의 유명한 음악가로부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고 작은 도시인 잘츠부르크를 넘어 좀더 큰 무대에서 성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으려고 하였다.실제로 이 여행은 그의 음악인생에 큰 자산이 되었는데, 비록 출세라는 세속적인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유럽 각지에서 유행하는 음악을 접하고 당대의 중요한 음악가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여행에서 어린 모차르트는 뮌헨으로 가서 선제후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앞에서 연주를 선보였으며, 이어 1762년 10월 13일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쇤브룬 궁전을 방문해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신기에 가까운 연주 솜씨를 선보였고, 이때 쇤브룬 궁전 안의 '거울의 방'(Spiegelsaal)에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딸이자 훗날 비운의 왕비가 된 마리 앙투아네트도 만났다. 연주를 끝마친 당시 6살이었던 어린 모차르트에겐 피아노 의자가 너무 높아서 발이 땅에 닿지 않아 굴러떨어졌는데, 달려와 모차르트를 일으켜 세워준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첫눈에 반한 모차르트가 앙투아네트 품에 달려들어 결혼해달라고 조른 일화가 유명하다. 지켜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모차르트를 무척 귀여워하며 그를 안아주었다고 한다. 출처 이후 프라하를 방문하였다.
이듬해에는 3년 반에 걸친 긴 2차 연주여행을 시작했다. 1차 여행이 신동 모차르트의 잠재력을 유럽 전역에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면 2차 여행은 이제 갓 어린아이 티를 벗은 모차르트가 좀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음악가로서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려는, 좀더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2차 여행은 뮌헨, 만하임, 파리, 런던, 헤이그를 거친 후 다시 잘츠부르크로 돌아오면서 파리, 취리히, 도나우에싱엔, 뮌헨을 거쳤다. 모차르트는 상당히 어려운 쳄발로곡도 악보를 보고 즉석에서 연주를 해냈으며 어린 아이 답지 않게 즉흥연주에도 뛰어난 실력을 선보여서 사람들을 감탄시켰다. 이 시기 모차르트 남매의 명성은 유럽 전역에 알려졌기 때문에 각지에서 초청장을 보냈으며 덕분에 2차 여행은 3년이 넘는 긴 여행이 되었다. 문제는 여행이 길어지면서 레오폴트가 맡고 있던 잘츠부르크의 궁정부악장 자리가 장기간 공석이 되었다는 점인데, 다행히 당시 잘츠부르크 대주교 지기스문트 폰 슈라텐바흐(Sigismund Graf von Schrattenbach)는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었던 사람으로 모차르트 일가가 잘츠부르크에게 영광을 가져다주고 있다면서 이를 문제삼지 않았다. 다만 연주여행이 항상 즐겁지만은 않았는데, 레오폴트는 여행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비굴할 정도로 지역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가족들이 차례로 원인 모를 풍토병에 걸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이 여행에서 모차르트가 얻은 가장 중요한 성과는 당대의 훌륭한 작곡가들을 만나서 본격적으로 작곡법을 배웠다는 것이다. 파리에서는 당시 전도유망한 쳄발로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던 요한 쇼베르트(Johann Schobert, 1735~1767)[3]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이 당시에 작곡된 모차르트의 작품(K. 6~9)에서는 쇼베르트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음악가는 아니었지만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던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Baron Christian Friedrich Melchior von Grimm, 1723-1807)도 이 시기에 인연을 맺었다.
1764-65년 런던에 머무를 당시에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아들인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에게 작곡법을 배웠는데, 이 크리스티안 바흐의 가르침은 이후 모차르트의 기악곡, 특히 교향곡과 협주곡의 길잡이가 되었다. 이 시절 처음으로 작곡된 모차르트의 교향곡에도 크리스티안 바흐의 영향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한편으로 이 시기에 당시 유명한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조반니 만추올리(Giovanni Manzuoli, 1720-1782)에게 성악도 배웠는데, 모차르트는 성악에서도 매우 특출한 능력을 보여줬으며 변성기 전까지는 종종 교회 행사나 공연에서 보이소프라노로 활약하기도 했다.[4] 정말 타고난 음악 천재라고 볼 수밖에 없는 대목.
1766년 연주여행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슈라텐바흐 대주교 앞에서 연주여행의 성과로 얻은 자신의 음악실력을 뽐냈으며 이 시기 대학축제를 위해 최초의 극음악 《아폴로와 히아킨투스Apollo et Hyacinthus, K. 38》가 작곡되었다.
1767년에는 다시 빈으로 가서 1년간 머물렀다. 빈으로 가자마자 도시를 강타한 전염병(천연두로 추정)때문에 모차르트 남매도 병을 얻어 한동안 고생을 했는데 다행히 회복했다. 빈에서 모차르트는 오페라 작곡에 큰 관심을 보였는데, 이 때 작곡된 코믹 오페라 《단순한 거짓말La finta semplice, K. 51》이 이런 저런 이유로 상연이 좌절되는 바람에 크게 낙담했다.[5] 다만 프란츠 안톤 메스머라는 빈 대학교 교수 에게 의뢰를 받아 작곡한 1막짜리 <바스티앙과 바스티엔느(Bastien und Bastienne, K.50)>가 소극장에서 공연됐고 고아원의 축성 예배를 위해 씌어진 '고아원 미사(K. 139)'가 호평을 받은 것이 위안거리.
한편 레오폴트의 계속된 외도(?)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슈라텐바흐는 결국 1768년 레오폴트의 급여지급을 중단했고, 모차르트 가족은 부랴부랴 잘츠부르크로 돌아가야 했다. 슈라텐바흐는 이미 오페라를 쓸 정도로 훌륭한 음악가가 된 12살의 모차르트를 수석연주자로 임명했으며 17살의 난네를은 학교의 음악선생이 되었다.[6]
3.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1769년 12월부터 3년간 계속된 연주여행은 이전의 여행과 달리 과감하게 오페라의 본고장 이탈리아로 방향을 잡았으며, 엄마와 누나 난네를이 빠지고 아빠와 아들만 참여하였다.[7] 이 이탈리아 여행은 연주여행이라기보다 작곡여행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정도로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의 역량이 빛났던 여행이었으며, 이 여행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 덕분에 모차르트는 훗날 당대 최고의 오페라 작곡가가 될 수 있었다.여행 첫 해 볼로냐에서는 당시 유명 오페라 작곡가였던 요세프 미츨리베체크(Josef Mysliveček, 1737-1781)[8]와 조반니 바티스타 마르티니 신부(Giovanni Battista Martini, 1706-1784)[9]를 만나서 음악 교육을 받았으며 마르티니 신부의 주선으로 원칙적으로 20살 이상의 작곡가에게만 자격이 주어지는 아카데미아 필라르모니카(Accademia Filarmonica)의 회원자격을 받았다.
이듬해(1770) 로마에서는 시스티나 경당에서 연주된 그레고리오 알레그리(Gregorio Allegri)의 종교음악인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Miserere)>를 2번 듣고 거의 그대로 악보로 옮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 곡은 당시 교황청에서 악보를 유출시킬 경우 파문에 처할 정도로 엄격히 악보를 통제하고 있었는데[10], 당시 교황 클레멘스 14세는 겁없이 신성모독을 저지른 이
황금 박차 훈장을 달고 있는 모차르트. 1777년. 상단에는 그가 볼로냐의 베로나 음악회 회원이라는 것이 쓰여져 있다. |
같은 해 밀라노에서는 드디어 모차르트 최초의 본격 오페라라고 할 수 있는 <폰토의 왕 미트리다테(Mitridate, re di Ponto, K. 87)>가 공국 왕립 극장(Teatro Regio Ducal)에서 초연되었는데, 14살밖에 안된 소년 작곡가의 작품임에도 무려 21회나 상연될 정도로 당시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성공 덕분에 모차르트는 공국 왕립 극장에서 주기적으로 작곡을 의뢰받아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1771, K.111)>, <루치오 실라(Lucio Silla 1772, K.135)> 같은 오페라들을 잇따라 작곡하였다.
이때, 72세의 원로 작곡가인 요한 아돌프 하세는 그의 오페라 <알바의 아스카니오(Ascanio in Alba 1771, K.111)>를 듣고 "이 아이는 나중에 우리 모두를 잊혀지게 할 것이다"라는
이탈리아에서 작곡한 이 세 오페라는 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별도로 모차르트 연구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는데, 해가 거듭될수록 발전하는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의 잠재력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음악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루치오 실라는 실패까지는 아니지만 미트리다테나 알바의 아스카니오처럼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대본이 너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조반니 가메라(Giovanni de Gamerra)가 쓴 루치오 실라의 대본은 스토리의 개연성이나 등장인물의 개성 같은 극적인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고 있는 것도 모자라서 가사마저 유치함의 극을 달리고 있다.[11][12] 이런 엉터리 대본 때문에 고생한 경험 때문인지 후에 모차르트는 오페라를 작곡할 때 대본의 완성도에 굉장히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각설하고,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사춘기에 접어든 아들이 더 나이들어서 신동의 이미지가 사라지기 전에 어떻게든 안정적인 직장을 얻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다행히 모차르트는 가능성있는 소년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탈리아 오페라계에 나름 신선한 인상을 주었고, 덕분에 밀라노 공국의 총독으로 부임해있던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의 4남 페르디난트 카를 대공[13]이 모차르트를 궁정음악가로 고용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페르디난트 대공의 모친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차르트 가족과 나름 인연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야속하게 이 채용을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결국 모차르트의 취업은 성사되지 못했다.[14]
결국 1773년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에서 성공에 대한 기대를 접고 고향 잘츠부르크로 돌아가는데, 돌아오기 전 오늘날에도 절창되고 있는 소프라노 독창을 위한 모테트, <기뻐하라 찬미하라(Exsultate, jubilate, K.165)>를 작곡하면서 이탈리아 여행에 대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15]
Mozart Exultate Jubilate, K. 165(Lucia Popp) |
4. 힘겨웠던 잘츠부르크 시절
이탈리아에서 구직을 포기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모차르트는 어느덧 17살이 되었으며, 이제 신동으로서의 이미지를 벗고 잘츠부르크에서 본격 직업음악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미 뛰어난 작곡가로 유명해진 모차르트에게 여기저기서 작품 의뢰가 들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활발하게 작곡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피아노 독주곡, 협주곡(피아노, 바이올린 등), 오페라, 실내악, 교향곡 등등 거의 모든 장르에 걸쳐서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하지만 잘츠부르크는 유럽클래스의 작곡가 모차르트가 운신하기에는 너무 좁은 동네였다. 그는 밀라노에서처럼 대규모 오페라를 작곡하여 상연하고 싶어 했으나 잘츠부르크에서는 마땅히 공연할 곳이 없었다. 운영비용 문제로 궁정 극장은 1775년 문을 닫아버렸으며 다른 극장은 오페라를 제대로 상연하기에는 크기나 시설이 너무 부실했다. 그런 탓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스키피오네의 꿈(Il sogno di Scipione, K.126)>이나 <양치기 왕(Il re pastore, K.208)> 같은 소규모의 오페라밖에 쓰지 못했으며 그마저도 잘츠부르크 궁전에서 한두번 연주되고 말았다.
그러나 모차르트에게는 이런 사안보다 훨씬 큰 문제가 있었는데, 슈라텐바흐가 1771년 사망한 후 이듬해 새로 잘츠부르크 대주교로 부임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Erzbischof Hieronymus von Colloredo)와의 마찰이었다. 무난한 성품의 소유자였던 전임 영주와 달리 이 콜로레도 대주교는 상당히 깐깐하고 권위적인 인물이었다. 굳이 음악을 배척한 것은 아니었지만 딱히 음악에 대한 이해나 애정을 갖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음악가들에 대한 처우도 상당히 박했다. 다만 무작정 꼰대라고 하기엔 좀 특이한 성향의 인물이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는 계몽주의를 지지하는 나름 진보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고 누구보다도 볼테르를 존경했다. 심지어 그를 너무 존경한 나머지 집무실에 볼테르의 초상화까지 걸어놓았을 정도였는데, 가끔씩 보수적인 인사가 손님으로 오면 초상화를 가리느라고 상당히 애를 먹었다고 한다.[16]
그런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전임 대주교에 비해 음악을 좋아하지 않은 것은 공교롭게도 이런 계몽주의 성향 때문이었다. 그는 공식적으로는 가톨릭 성직자였지만 나름 개혁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존 가톨릭의 화려함과 사치스러움을 배격하고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검소함과 경건함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건축이나 미술 음악 등에 지나치게 많은 비용을 지출하는 것을 꺼려 했으며 심지어 가톨릭 행사에 프로테스탄트에서 사용하는 코랄을 도입하기도 했다. 잘츠부르크의 궁정 극장이 폐쇄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객관적으로만 보면 나름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모차르트와 같은 예술가 입장에서는 당연히 예술에 대한 이해가 없는 무미건조하고 교양 없는 사람으로 보였을 것이다. 여튼 이 괴짜 대주교는 모차르트에게 당시 시세로도 말도 안되게 낮은 연봉 150 플로린밖에 주지 않았으며 모차르트의 재능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하려고 들지도 않았다. 나이는 어렸지만 이미 유럽클래스의 음악가 반열에 오른 모차르트가 이런 답답한 사람 밑에서 제대로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은 당연지사. 젊은 모차르트는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대주교의 지시를 잘 따르지 않았고 그와 자주 충돌했다.[17]
결국 모차르트는 본업을 사실상 비워두고 다른 직장을 구하기 위한 구직활동에 열을 올렸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1774년 9월에 빈을 방문했고 1달 후에는 뮌헨을 방문했다. 모차르트의 명성을 잘 알고 있던 바이에른 선제후국의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 선제후는 모차르트에게 대위법이 돋보이는 모테트 하나를 써보라고 권했는데 3일만에 작곡해서 바쳤다.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K. 222). 또한 선제후는 뮌헨의 사육제기간에 상연할 오페라 부파를 작곡하라고 의뢰했으며, 덕분에 그의 초기 오페라 중에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인정받는 <가짜 여정원사(La finta giardiniera)>가 작곡되었다. 1775년 1월에 이루어진 <가짜 여정원사>의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는데 아쉽게도 해당 극장에서 상연해야 할 작품이 밀려있던 관계로 모차르트의 작품은 3번 공연 후 내려가고 말았다. 이처럼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는 모차르트의 음악에 상당히 관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끝내 자리를 제안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모차르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1777년에는 아예 잘츠부르크 궁정음악가 자리를 사임해 버리고 모친과 함께 다시 뮌헨으로 갔다. 하지만 뮌헨에서는 모차르트가 잘츠부르크에서 고용주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의 태도는 3년전보다 더 냉랭했다. 그는 모차르트에게 일단 이탈리아로 가서 오페라 작곡가로 성공하라는 등의 뜬금없는 조언만 하고 돌려보냈다.
낙담한 모차르트 모자는 팔츠 선제후국의 수도 만하임으로 떠났다. 만하임에는 유서깊은 교향악단이 있었고[18] , 모차르트는 이 악단에 취직하고 싶어서 만하임의 카를 테오도어 선제후에게 청원을 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대신 소프라노 가수로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17세의 소녀 알로이지아 베버(Aloysia Weber)[19]를 만나 그녀의 음악선생이 되었는데, 둘은 곧 사랑에 빠졌으며 모차르트는 청혼까지 했다.
당시 모차르트가 얼마나 그녀에게 빠졌냐면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알로이지아를 이탈리아로 데리고 가서 데뷔시키겠다"는, 당시 상황으로 봐서는 상당히 허황된 계획까지 세웠을 정도. 하지만 그녀의 재능만큼은 모차르트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알로이지아는 이후 당대를 풍미한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당시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소프라노를 위한 아리아 2곡을 작곡했는데(K. 294, K. 316), 둘 모두 오늘날에도 상당한 가창력을 요하는 작품이며 특히 '테살리아의 백성들이어!(Popoli di Tessaglia!, K. 316)'는 기네스북에 사람의 목소리로 가장 고음을 내야 하는 아리아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로 난곡이다.
Popoli di Tessaglia!(K. 316)[20] |
모차르트의 첫사랑 알로이지아 베버 |
모차르트가 만하임에서 일만 잘 풀렸더라면 두 사람은 큰 문제 없이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모차르트는 직장을 사임하고 제대로 돈을 벌지 못해서 상당히 많은 빚을 진 상태였으며, 아들의 출세에 목을 매고 있던 아버지의 간곡한 만류로 일단 연애감정을 접고 구직을 위해 프랑스 왕국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는 전술한 든든한 후원자 멜히오르 폰 그림 남작이 있었으며 그는 모차르트에게 돈을 빌려주고 구직을 위해 높은 사람들을 소개시켜 주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에서의 구직도 영 신통치 않았다. 음악 선생이나 연주 및 작곡 알바로 돈을 충당하면서 약 6개월간 나름 열심히 구직활동을 했지만 베르사유 궁전의 오르가니스트같은 내키지 않는 제안만 들어왔으며 설상가상으로 모차르트와 동행했던 그의 모친이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는 비극까지 벌어졌다.[21] 결국 모차르트는 파리에서도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하고 파리 교향곡 같은 몇몇 작품만 남긴 채 쓸쓸하게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레오폴트 모차르트는 이처럼 자기 아들이 외국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아내마저 허무하게 잃게 되자, 모차르트에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제안했다. 레오폴트는 이 지역 귀족들을 간곡하게 설득하여 연 450 플로린의 급여를 주겠다는 제안을 받아냈고 콜로레도 대주교로부터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초청이 있을 경우 출장을 허락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았다며 모차르트의 귀향을 종용했다. 당연히 모차르트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기 싫었지만 대안이 없었다. 후원자였던 폰 그림 남작까지 당장 파리에서는 취직이 어려울 것 같으니 고향에서 재기를 노리는게 어떻겠냐고 권하자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 복귀를 결심한다.
하지만 잘츠부르크에 가기 싫었던 모차르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도 이곳 저곳을 들르면서 복귀에 뜸을 들였다. 이 시기에 다시 뮌헨을 거치는데, 이 때 뮌헨에 취직하여 가수로 활동하고 있던 알로이지아와 재회하게 된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그녀는 더 이상 모차르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두 사람의 재회는 썰렁하게 끝나고 만다.[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로이지아를 포함하여 그 집안의 여인들은 모차르트와 평생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아래 콘스탄체 항목으로.
5. 빈으로 간 모차르트
우여곡절 끝에 잘츠부르크로 복귀했으나 이곳 사정은 여전히 암울했다. 월급은 좀 올랐지만 콜로레도 대주교는 여전히 꼰대질을 해댔고(...) 음악환경은 열악했다.오페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모차르트는 일종의 외주를 받아서 오페라 작곡을 시도했다. 순회공연단을 위해 오페라 부파였던 '가짜 여정원사'를 독일어 징슈필로 개작하였고, 1779년에는 모처럼 프랑크푸르트로부터 징슈필 오페라인 차이데(Zaide)를 의뢰받아 작곡했으나 대본에 문제가 많은데다 징슈필 치고는 오페라의 분위기가 너무 어두운 탓에 도중에 포기했다.
이후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 한동안 잠잠했다가, 이듬해 팔츠-바이에른 선제후[23] 카를 테오도어가 궁정 카니발에 상연할 목적으로 모차르트에게 오페라 '크레타의 왕 이도메네오(Idomeneo re di Creta, K.366)'를 의뢰하였는데, 이 오페라가 1781년 1월 뮌헨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이도메네오는 모차르트의 후기 오페라들에게 인지도는 밀리지만 그의 음악인생에서는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인데, 이 작품을 계기로 오페라 작곡가로서의 재능과 역량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이도메네오는 이후 모차르트의 오페라에서 드러나는 중요한 특징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으며 모차르트 당시 이미 화석화 되어버린 오페라 세리아 장르에서 모처럼 생명력이 넘치는 작품을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24]
1781년 3월, 모차르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선출된 요제프 2세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대관식에 자신의 고용주인 콜로레도 대주교를 따라 참석했다. 여기서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받는 연봉의 절반이 넘는 액수를 제안받고 황제 앞에서 연주하려고 했는데, 콜로레도 대주교가 이를 거부하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다.[25] 자신을 하인으로 취급하면서 사사건건 간섭하는 콜로레도 대주교에게 오만 정이 떨어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로 돌아온 즉시 사표를 제출하는데, 대주교는 이러한 중대한 사안은 아버지랑 논의하고 하는게 자식의 도리가 아니냐며 사표수리를 거부했다. 그러자 모차르트는 제 아버지에 대한 도리는 알아서 할 테니 오지랖 좀 작작 떨라고 대주교에게 말했다. 이를 듣고 화난 대주교는 그의 비서, 아르코 백작을 시켜 그를 내쫓았다. 즉, 자신의 비서에게 건방진 음악쟁이의 엉덩이를 걷어차게 해서 내쫓아 버린 것. 정말로 말 그대로 엉덩이를 차여 내쫓겼다.[26]
이 일로 모차르트는 아버지와도 사이가 벌어지는데, 모차르트가 계속 떠돌이 인생으로 살기보다는 수준에 좀 안 맞더라도 당분간 잘츠부르크에 안정적으로 지내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물론 혈기 넘치는 25세의 청년이 아버지의 바램대로 움직일 리는 없었으며, 일단 사직한 후 지체없이 빈으로 떠났다. 빈에 도착한 모차르트는 더 이상 왕궁이나 지방 귀족들에게 굽실거리면서 자리를 얻으려 하지 않았고, 이 참에 과감하게 프리랜서 작곡가의 길을 선택했다.
잘츠부르크 시절 모차르트의 고용주였던 콜로레도 대주교는 상당수의 미사곡, 디베르티멘토, 교회 소나타 등 작곡에서 기교적인 콜로라투라 아리아나, 카논이나 푸가, 아 카펠라 등의 대위법적 페세지들을 최소로 줄이고 실제 교회 및 궁정 행사에서 사용될 적합한 규격으로, 최대한 간단하면서도 실용적인 형태의 작곡을 요구하였다. 미사곡의 길이도 실제 교회 예배에서 사용에 적합한 20분 이하로 맞출것을 주문하였는데 당시 모차르트의 상당수의 미사 브레비스(Missa Brevis)곡들은 이런 요구에 부합하여 작곡되었다. "미사 브레비스"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간결한 미사"인데 통상전례문(Mass of the Ordinary) 형식의 미사 악장들, Kyrie, Gloria, Credo, Sanctus, Benedictus, Agnus Dei이 각각 2분~4분 내의 짧은 길이로 작곡되는게 실용성을 강조한 이러한 미사 브레비스 악곡의 특징이다.
결국 콜로레도 대주교의 이러한 요구들은 모차르트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범위를 최대한 제한한 것이다. 대담한 화성의 사용도 금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미켈란젤로에게 한정된 물감과 미술 재료만 가지고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에 비유될수있었다. 모차르트는 이러한 대주교의 요구에 맞춰 많은 미사 브레비스 곡들을 최대한 단순한 조성인 C장조로 작곡하였으나 실제 곡 내에선 대주교의 꼰대성을 비꼬는 듯한 익살스럽고도 복잡한 화성을 자세하게 들으면 눈치챌수있을 정도로 조금씩 사용하였고, 실제 연주에서 대주교가 "엥? 뭐임?"거릴 상황을 만들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미사 형식에선 복잡한 대위법의 사용도 지양되는데, 가령 푸가로 Cum Sanctu Spiritu나 Et Vitam Venturi 따위의 짧은 메세지의 가사를 돌림노래처럼 여러 성부에서 엇갈리게 부르는 페세지를 넣으면 실제 통상전례문 미사곡의 가사가 커버해야될 한정된 곡 분량을 너무 많이 잡아먹는다는게 이유였다.
잘츠부르크는 제대로된 규모의 오페라 하우스도 없는 시골도시였다. 여러 분야에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쳐보이고 싶은 모차르트를 가두기엔 너무나도 좁은 우물이었다.
모차르트가 전업 작곡가라는 당시로서는 새로운 "직종"의 창시자에 가깝다는 사실은 사회사(혹은 역사사회학) 및 예술사적으로 매우 의미가 컸다. 전업 작곡가 이전의 "음악가"들이 거의 궁정악사, 악장이나 교회 전속 음악가[27]로 직업이 협소하게 정해져 있었던 반면[28], 전업이자 프리랜서가 되면서, 당대의 계몽주의 사상과 맞물려, 음악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한 현상이자 원인이 되었기 때문. 단적으로 모차르트의 전례가 없었다면, 베토벤의 활동이나 이후 슈베르트를 위시한 낭만파 음악, 다시 현대음악의 시작인 쇤베르크 등으로 이어지는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가 가능했던 하나의 사회구조적인 요인은 형성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물론, 사회구조적인 요인만이 음악의 시대사적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또 한가지 언급해야 할 것은, 흔히 알려진 것처럼 모차르트가 음악 역사상 최초의 프리랜서 작곡가는 아니라는 점이다. 모차르트 이전에도 궁정이나 교회에 소속되지 않고 연주/작곡 의뢰를 받아 생계를 꾸렸던 음악가들은 꽤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헨델.[29] 다만 선배 프리랜서 작곡가들과 달리 모차르트의 라이프 스타일은 이후 등장한 수많은 작곡가들의 직접적인 롤모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여튼 결과만 놓고 보면 모차르트가 프리랜서가 된 것은 모차르트 본인에게도 상당히 성공적인 선택이었으며, 음악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확실하게 꽃을 피웠다.[30] 즉 모차르트는 전업 작가의 시조인 동시에 확실한 성공 사례를 제시했던 셈.
6. 빈에서의 성공
일종의 운명의 장난처럼 모차르트가 빈으로 오기 직전에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도 부친의 사망을 계기로 만하임에서 빈으로 건너왔다. 일단은 전업가수로 성공한 베버 집안의 요세파와 알로이지아가 더 넓은 무대로 진출하기 위해서였고, 그 다음으로 부친이 일찍 사망해서 집안에 일정한 수입이 없었던 관계로 적절한 돈벌이 수단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돈벌이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숙박업. 여기에 모차르트가 머물면서 그의 인생 2막이 본격적으로 펼쳐진다.빈으로 온 모차르트는 당장 마땅한 거처가 없었다. 일단 콜로레도 대주교의 빈 저택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호의로 저택의 별사(別舍)에 머물렀는데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 형편이었다. 이때 옛 연인 알로이지아의 집안에서 하숙집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고, 그는 잠시만 머물 생각으로 숙소를 옮겼다. 옛사랑 알로이지아는 이미 요제프 랑에라는 연극배우와 결혼하여 따로 살고 있었고, 그녀의 두 여동생 콘스탄체와 조피가 하숙집에 살고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이 쾌활한 소녀들과 너무 재미있게 지낸 나머지 잠시 머물려던 계획을 바꾸어 계속 하숙집에 머무르게 된다. 그러다가 콘스탄체와는 재미있게 지내는 사이를 넘어 연인으로 발전한다.
▲ 피아노를 위한 알레그로, K. 400. 조피와 콘스탄체(Sophie und Constanze)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
두 사람의 사랑은 깊어져 결국 결혼 약속을 하는데, 문제는 양가의 부모였다. 일단 모차르트의 아버지가 이 결혼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아직 자리도 못 잡은 주제에 결혼은 사치라는 것이 그 이유. 게다가 콘스탄체의 어머니 체실리아 베버도 처음에는 모차르트를 음악을 한답시고 일정한 직업도 거처도 없이 빈둥대는 백수건달 정도로 여겼던 탓에 두 남녀가 너무 가까워지자 모차르트에게 하숙집을 나가달라고 요구했다.[31] 하지만 자식을 이기는 부모는 없는 법. 모차르트의 간곡한 설득에 그의 아버지는 결국 "네가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설득을 포기해 버렸고, 체실리아 베버는 모차르트가 빈에서 나름 잘나가는 것을 확인한 후 오히려 콘스탄체와의 결혼을 부추겼다.[32] 이런 우여곡절 끝에 결국 1782년 8월 4일에 두 사람은 결혼했는데 모차르트의 가족들(부친과 누나)은 참석하지 않은 채 콘스탄체 집안 사람들만 참석한 채로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모차르트 부부는 6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4명은 일찍 죽었다. 이에 대해서는 주변 인물들 항목에 있는 "아내 콘스탄체와 처형/처제" 부분 참조.
20세 무렵의 콘스탄체 모차르트 |
빈에 온 모차르트의 음악인생은 상당히 순조로웠다. 빈에 오자마자 뛰어난 피아니스트로 각광을 받았으며 제자도 생겼다. 1781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자신보다 4살 위이며 모차르트보다 앞서 빈에서 명성을 날리고 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무치오 클레멘티와 피아노 배틀을 벌였는데, 여기서 사실상 승리하면서 '빈 최고의 피아니스트'라는 명성도 얻었다. 다수의 피아노 협주곡이 작곡되었으며 작곡자 본인의 연주로 공연되었는데, 공연마다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작은 콘서트홀 대신 큰 강당이나 발레 공연장 등을 연주장소로 선택하였다.
한편 당시 국립징슈필극장(Nationalsingspiel)[33]의 감독이자 대본작가였던 고틀리프 슈테파니(Gottlieb Stephanie)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요제프 2세로부터 독일어로 된 새 오페라를 상연해줄 것을 요청받았는데, 모차르트는 스테파니를 설득하여 이 오페라의 작곡을 담당하게 된다. 여기서 모차르트의 또 하나의 중요한 징슈필 오페라 <후궁으로의 도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탄생했다.[34]
이와 동시에 그는 빈에서 음악적으로 자신을 도와줄 사람들도 여럿 만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판 즈비텐(Gottfried van Swieten)과 요제프 하이든이었다. 장서가이자 외교관이었던 즈비텐은 바흐/ 헨델/ 텔레만을 비롯한 바로크 음악가들의 악보 사본을 다수 보유하고 있었으며 모차르트는 즈비텐의 배려로 이 사본들을 열람할 수 있었는데, 이 때 모차르트는 바로크 특유의 정교한 대위법과 유려한 합창/성악 처리법에 주목한다. 이런 작곡수법들은 이제까지 모차르트가 접하지 못했던 것들로 모차르트에게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모차르트는 즈비텐이 보유한 바로크 거장들의 악보들을 베끼고 피아노로 연주해 보면서 열심히 공부했으며, 이후 모차르트의 중요한 작품 상당수에서 이 때 익힌 대위법 수법이 반영된다.[35]
1784년에는 빈에 들른 하이든을 만났는데 두 거장은 서로의 음악에 큰 감명을 받았으며 24살의 나이차이를 딛고 금세 친구가 되었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아들은 명성으로 보나 저의 경험으로 보나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음악가입니다.'라는 찬사를 담은 편지를 보냈으며 모차르트는 모차르트대로 하이든의 영향과 앞서 언급한 대위법적인 전개수법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6곡의 하이든 4중주((K. 387, K. 421, K. 428, K. 458, K. 464, K. 465)를 3년에 걸쳐 작곡하여 차례로 하이든에게 헌정하였다. 이 6곡의 하이든 사중주는 모차르트의 실내악에 일대 전환점을 가져온 작품들로 음악적 가치 못지 않게 모차르트의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작품들이다.
한편 모차르트는 1784년에 12월에 프리메이슨 자선지회에 가입하였는데, 이 프리메이슨도 모차르트의 음악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리메이슨 가입을 통해 다수의 친구를 얻었으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프리메이슨의 의식을 위한 음악이나 프리메이슨 사상을 반영한 음악도 몇 작곡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이 K.477의 프리메이슨 장송음악(Maurerische Trauermusik)이나 K.623의 프리메이슨을 위한 소 칸타타(Little Masonic Cantata). 그리고 상당수의 연구자들은 그의 생애 최후반기에 작곡된 2개의 징슈필 오페라 현자의 돌(Der Stein der Weisen, K. 592a)과 <마술피리(Die Zauberflöte, K.620)>를 프리메이슨의 사상에 의거하여 씌어진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36]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프리메이슨이 중요한 이유가 따로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돈. 프리메이슨의 인맥은 모차르트의 일종의 돈줄 역할도 했는데, 특히 프리메이슨 동지이자 방직업자였던 미하엘 푸흐베르크(Michael Puchberg) 로부터 상당히 많은 돈을 빌렸다. 모차르트는 프리메이슨의 회원으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며 후에는 마스터 메이슨까지 올라갔다.
7. 오페라의 거장 모차르트
이처럼 모차르트의 빈 진출은 성공적이었다. 부와 명성도 얻었고, 결혼도 했으며, 사사건건 간섭하는 윗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음악적으로도 좀더 성장할 수 있었다. 문제는 돈을 많이 벌기는 했는데 실제 생활은 의외로 쪼들렸다는 것이다.모차르트는 작곡료나 연주료도 충분히 받았고 유력가 자제들을 대상으로 피아노 과외를 하면서 제법 쏠쏠하게 돈을 벌여들였다.[37] 그런데 작곡료로 돈을 벌면 도박과 사치로 그 이상을 써버렸기 때문에, 아무리 벌어도 계속 돈이 모자랐다. 즉, 돈을 벌 줄만 알았지 그것을 관리하고 쓸 줄은 몰랐던 것.[38] 모차르트만 돈관리를 못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아내 콘스탄체의 낭비벽은 남편보다 한술 더 떴다. 이 모차르트 부부는 돈이 좀 생기자 빈 중심가의 임대료가 매우 비싼 집으로 이사를 했다. 거기에 하녀와 요리사, 미용사도 고용하고 심지어 승용마도 샀다. 그리고 자기 아들 카를 토마스 모차르트는 비싼 기숙사립학교로 보냈다. 집에서는 뭉칫돈을 들여 자주 잔치를 벌였다. 그가 빈에서 사들였던 포르테 피아노는 당시 시가로 900 플로린이었는데, 이는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봉 2년치에 해당되는 금액이다.[39]
음악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는 빈에서 몇년간 활발한 연주/작곡활동을 했지만 오페라쪽에서는 후궁으로 도피 이후 딱히 이렇다 할 작품을 쓰지 않았다. 1784년 <카이로의 거위(L'oca del Cairo)>와 <속아넘어간 신랑(Lo sposo deluso)>의 작곡에 착수했으나 도중에 포기해버렸다. 2년 뒤 1막짜리 소규모 오페라인 극장지배인(Der Schauspieldirektor)이 쇤브룬(Schönbrunn Palace)에서 상연된 것이 전부였다.
이렇게 빈에서 명성을 얻었으면서 유독 자신이 그토록 애착을 가졌던 오페라에서 지지부진했던 이유는, 피아노 연주자로 바쁘게 활동했던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오페라 대본을 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높이를 맞춰줄만한 대본작가로 베네치아 출신의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 1749 – 1838)가 있었는데, 문제는 이 분이 이미 안토니오 살리에리를 비롯해서 다른 작곡가들의 대본 의뢰를 받은 상태였기 때문에 당장 모차르트에게 대본을 써줄 형편이 안됐다는 것. 다 폰테는 몇 달만 기다려 달라고 했지만 몇 달을 기다려도 대본은 차일피일 미뤄졌다.
마냥 다 폰테만 기다릴 수 없어서 다른 작가에게 의뢰를 하여 전술한 카이로의 거위와 속아 넘어간 신랑의 대본을 받았지만 대본의 수준이 도저히 제대로 음악을 붙일 수가 없는 지경이었기 때문에 결국 작곡을 중도에 포기해 버린 것.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2년만에 어렵게 다 폰테로부터 받아든 대본이 바로 보마르셰의 희곡을 오페라용으로 각색한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 모처럼 마음에 쏙 드는 대본을 받아 쥔 모차르트는 즉시 작곡에 착수하였고 1786년 드디어 야심작 피가로의 결혼이 완성되어 무대에 올려졌다.[40]
오페라 역사에 큰 획을 하나 그은 이 작품은 빈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모차르트가 방문한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서는 더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고, 모차르트의 음악은 빈을 넘어 독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의 성공에 고무된 모차르트는 다 폰테의 또 다른 대본 <돈 조반니(Don Giovanni)>의 작곡에 착수하였다. 모차르트는 바람둥이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 이 대본을 썩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는데[41] 내용이 너무 파격이어서 대중들에게 외면받을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프라하에서 초연된 돈 조반니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후에 빈에서 상연되었을 때에는 우려했던 대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당시 돈 조반니는 오페라 부파치고는 음악이나 내용이 너무 난해하고 복잡하다는 평을 받았다.
대중적인 성공여부와 별도로 다 폰테의 대본에 만족한 모차르트는 다시 그로부터 대본을 받아 1790년 다 폰테 3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코지 판 투테(Così fan tutte, K.588)>를 작곡하였으며 역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모차르트가 돈 조반니 작곡에 한참 열중하던 1787년 5월 건강이 좋지 않았던 아버지 레오폴트 모차르트의 부음 소식이 전해졌다. 모차르트는 야속하게도 잘츠부르크가 너무 멀다는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부친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이후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와 인연이 끊어졌다.[42]
한편 돈 조반니를 작곡하던 시기에 17세의 소년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찾아와 그에게 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시기 베토벤이 빈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사실이지만 베토벤이 모차르트를 만났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며, 학자들은 만났을 가능성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자세한 것은 루트비히 판 베토벤 문서로.
이 시기, 나름 빈의 황실에서도 모차르트라는 떠오르는 작곡가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1787년 12월, 요제프 2세는 모차르트에게 연 800 플로린의 급여를 지급하고, 황실에서 필요할 때 연주나 작곡을 의뢰하기로 했다. 낭비벽 때문에 쪼들렸던 모차르트에게는 많지는 않지만 정기적인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이 파트타임 잡이 나름 도움이 됐으며, 황실 음악가라는 타이틀도 내걸 수 있었다.[43]
8. 진혼곡
1788년에 모차르트 부부는 빈 중심가의 임대주택을 떠나 빈 교외의 알체그룬트(Alsergrund)에 있는 큰 집으로 이사를 갔다. 1789년에는 돈벌이를 위해 베를린, 라이프치히, 드레스덴, 만하임을 비롯한 신성 로마 제국 독일어권의 여러 도시로 연주여행을 다녔는데, 목표한 만큼의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다만 이 여행을 통해[44] 그는 헝가리나 네덜란드의 귀족들에게 후원을 약속받고 그들에게 곡을 써주기로 했으며 이 후원금으로 드디어 그는 그간 나날이 늘어만 가던 채무의 변제를 시작할 수 있었다. 1791년부터는 창작 의욕도 다시 회복되어 왕성한 작곡 활동을 재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레오폴트 호프만의 후임으로 슈테판 대성당의 카펠마이스터로 낙점되어 그의 집안의 경제적 상황도 점차 좋아질 조짐을 보였다.[45]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이렇게 희망을 보여준 1791년이 본인의 영원한 생애 마지막 해가 되고 말았다는 것.
1791년 9월 6일 모차르트는 요절한 요제프 2세의 후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국 국왕으로 선출된 요제프 2세의 동생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 축제에 맞추어 프라하에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La Clemenza di Tito)>를 상연하였는데, 이때부터 병을 얻어 상당한 고열에 시달렸다.[46]
모차르트는 본인의 나빠진 병세를 회복시켜줄 새도 없이 9월 30일에는 빈에서 자신의 마지막 오페라가 된 <마술피리>를 초연했다. <마술피리>의 초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이와 별도로 그의 건강은 점점 나빠졌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쉬지 못하고 진혼곡의 작곡에 매달려야 했다. 이 진혼곡은 당시 28살의 젊은 귀족이었던 프란츠 폰 발제크(Franz von Walstegg) 백작이 거액을 주고 20살에 죽은 본인의 아내를 애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곡을 의뢰한 것이다.[47] 모차르트는 작곡료의 절반을 미리 당겨받고 빠른 시일 내에 완성해 달라는 독촉을 받았는데, 건강이 악화되는 바람에 작곡에 속도를 내기 힘들었다.
모차르트는 11월 20일에 고열과 부종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설사와 구토를 하면서 쓰러졌고, 아내와 처제 조피가 그를 간호해주고 가족 주치의에게 치료를 맡겼으나, 통 차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1시경 진혼곡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35세. 이 진혼곡은 어쩌다 보니 결국 자신을 위한 곡이 되어버린 셈.
모차르트 사망에 관한 이야기는 모차르트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졸지에 과부가 된 아내 콘스탄체는 미완성 상태가 된 진혼곡을 다 완성시키는 게 급선무였다. 의뢰인으로부터 이미 계약금의 절반을 받았는데, 이를 완성시키지 못하면 되돌려줘야 했기 때문이었다. 시일이 촉박했던 그녀는 먼저 모차르트의 제자 요제프 레오폴트 아이블러(Joseph Leopold Eybler, 1765~1846)에게 의뢰하였으나 아이블러는 Dies irae와 Confutatis의 오케스트레이션 일부와 Lacrimosa를 조금 손댄 뒤 포기했다. 이에 콘스탄체는 모차르트의 또다른 제자였던 프란츠 쥐스마이어(Franz Suessmayer,1766~1803)에게 의뢰하였으며 결국 그가 이 진혼곡을 다 완성하였다.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죽기 직전까지 그와 함께 있었으며 이 곡의 작곡 방향에 대해서 나름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Sequentia와 Offertorium의 오케스트레이션을 완성했으며 Lacrimosa 이후의 Sanctus, Benedictus, Agnus Dei는 쥐스마이어 자신이 작곡했다고 한다. 이렇게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는 표지에 모차르트의 사인을 위조하여 기입한 후 의뢰인이었던 발제그 백작에게 전달되었다.[48]
[1]
백발
가발은 당시 정장의 일부였으며
바흐,
헨델,
하이든 등도 가발을 쓴 초상화가 있을 정도로 이들이 살았던 17~18세기 당시에는 가발을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심지어
현대 영국 법원에서 아직 사용할 정도.
[2]
여행 초반에는 누나 난네를도 어린 나이라는 프리미엄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소녀 음악가로 소개되었다.
[3]
오늘날에는 음악보다 베일에 싸인 인생으로 더 유명한 음악가이다. 일단 출생년도가 불확실한데, 1735년설과 1740년설이 대립하고 있다가 최근에는 1720년생(..)이라는 주장까지 나왔다. 중세 이전의 인물도 아닌데 출생년도를 놓고 20년의 시차를 둔 논란이 생기는건 정말 드문 일이다. 출생지 또한
슐레지엔(Schlesien),
알자스(Alsace),
뉘른베르크(Nürnberg),
마인츠(Mainz) 등 후보군이 다양하다. 그리고 생에 초반에는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1760년경부터 갑자기 파리에 나타나서 전도 유망한 젊은 음악가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사망 이유도 범상치 않은데, 집에서 독버섯이 든 요리를 먹고 부인과 함께 급사한 것. 이 사망원인을 두고 각종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현존하는 그의 많지 않은 작품을 살펴보면 확실히 재능은 뛰어난 음악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4]
나중에 모차르트가 알로이지아 베버에게 성악을 가르치거나 오페라 공연 연습때 가수들의 발성이나 가사처리를 일일이 지도할 수 있었던 것도 본인이 소시적에 뛰어난 가수였기 때문이었다.
[5]
이 La finta semplice는 아플리지오라는 자칭 극장흥행사에게 사기를 당한데다 극장마다 상연될 오페라들이 밀려 있어서 좀처럼 상연기회를 얻지 못했는데, 레오폴트가 이 때 보낸 편지에 보면 빈의 다른 작곡가들이 이 오페라의 상연을 조직적으로 방해했다고 적혀 있다. 그나마 이 오페라는 1년 후 잘츠부르크 궁정에서 조촐한 규모로 연주되었다.
[6]
다만 이 수석연주자는 일종의 명예직이라서 월급은 없었다. 정식 월급은 콜로레도 주교가 부임한 후부터 지급되기 시작했다.
[7]
난네를은 2차 여행이 끝난 후 음악교사가 돼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나이도 이미 18살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소녀음악가라는 타이틀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8]
미츨리베체크는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보헤미아 왕국(현대
체코)
프라하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작곡가이다. 현재는 아는 사람만 아는 인물이지만 당대에는 가장 인기있는 오페라 작곡가로 이름을 날렸으며 모차르트에게 이탈리아 오페라 작법을 본격적으로 가르쳐준 은인으로, 이탈리아 여행 이후에도 모차르트 부자는 이 미츨리베체크와 종종 연락을 주고 받았다. 미츨리베체크 본인도 외국 출신이었기 때문에 모차르트가 외국인 입장에서 어떻게 이탈리아 오페라를 배워야 하는지 잘 알려주었다고 한다.
[9]
마르티니 신부는 당시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음악 이론가이자 교육자였다. 모차르트 부자도 마르티니 신부를 만나기 위해 꽤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마르티니 신부는 모차르트의 재능을 한 눈에 알아본 후 모차르트에게 수준 높은 대위법과 음악이론을 가르쳤다. 모차르트는 마르티니가 1784년 사망할 때까지 서신을 주고 받았다.
[10]
특별한 정치적 이유는 없고 일종의
바티칸 신비주의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보면 된다. 참고로 이 음악은
바로크 초기 작곡가인 알레그리의 작품으로 되어 있으나, 18세기 초에 토마소 바이(Tommaso Bai)라는 작곡가에 의해 한 차례 개작되었다.
[11]
그나마 가사는 가메라의 스승 메타스타조(Pietro Metastasio)가 대폭 다듬어서 많이 나아졌다. 가메라는 나중에 꽤 인정받는 대본작가가 되지만 루치오 실라처럼 초짜 시절에 쓴 대본들은 상당수가 이런 3류급 풍모를 자랑하고 있다.
[12]
한편으로 이런 망한 대본이 나오는 것은 당시 오페라계를 장악하고 있던 가수들의 등쌀 때문이기도 했다. 그 시절 가수들은 자신이 부각되고 가창력을 과시하는데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스토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모차르트의 초기 오페라가 현재 자주 연주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스토리상의 약점을 그대로 갖고 있기 때문.
[13]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지은
빈 회의 이후
모데나 공국 공작으로 부임하는
프란체스코 4세의 아버지로 합스부르크에스테 분가의 시조.
[14]
페르디난트 대공은 1754년생으로 모차르트보다 겨우 2살 많았기 때문에 비슷한 연배의 소년 작곡가 모차르트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마리아 테레지아는 모차르트 부자에 대해 '거지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고용주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쓸모없는 사람들'이라면서 고용에 반대했다. 이렇게 과격한 표현까지 써가면서 결사적으로 반대한 이유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레오폴트가 빈에서 아들의 오페라를 상연시켜달라거나 궁정음악가로 받아들여달라는 등의 각종 청원서를 황궁에 올리면서 유난스럽게 굴었던 것 때문에 모차르트 부자에 대해 좋지 않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1774년에도 모차르트 부자는
빈 황궁에서 뇌물을 써가면서 마리아 테레지아를 직접 알현할 기회를 얻었는데, 이 자리에서 레오폴트는 아들을 당시 공석이었던 빈의 황립 극장감독으로 추천했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15]
이 모테트는 사실
소프라노가 아니라
카스트라토 가수였던 베난치오 라우찌니(Venanzio Rauzzini)를 위해 작곡된 것이다. 이 라우찌니는 루치오 실라에서 세실리오 역할을 맡아서 상당히 인상적인 가창력을 보여주었고 이 모테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작곡된 것.
[16]
그의 이런 계몽주의 성향은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장이었던
요제프 2세의 계몽주의 성향을 본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17]
이로 인해 모차르트는 귀족들 사이에서 다루기 힘든 악동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고 나중에 모차르트가 구직활동할 때 계속 걸림돌로 작용하게 된다. 한편 모차르트가 대주교를 얼마나 싫어했는지는 그가 부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항상 그에 대한 욕을 하였고, 오죽했으면 아버지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대주교 욕설을 자제해달라고 부탁했을 정도였다.
[18]
현대적인 의미의 교향악단의 효시가 바로 이 만하임 교향악단이다. 바로 이 만하임 교향악단으로부터 바로크시대의 '합주'를 넘어서는 '교향악'이라는 개념이 형성되었으며 이 만하임 교향악단의 성립과 발전에 큰 역할을 했던 작곡가 요한 슈타미츠(Johann Stamitz, 1717-1757)는
교향곡 양식의 선구자로 평가받고 있다(참고로 하이든은 교향곡 양식의 완성자이다).
[19]
베버라는 성을 보고 짐작한 사람도 있겠지만 이 알로이지아 베버 집안과 음악가
카를 마리아 폰 베버 집안과는 친척관계이다. 알로이지아 베버의 부친과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부친은 나이 차이가 꽤 나는(알로이지아 부친이 손위) 이복형제였다.
[20]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엘리자베스 비달같은 1급
소프라노조차도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할 정도로, 이래저래 부르기 굉장히 어려운 아리아이다. 나중에 명가수가 된 알로이지아지만 당시 제대로 데뷔도 하지 않은 17세의 소녀가 이런 아리아를 제대로 불렀을지는 의문이다.
[21]
자금난에 시달렸던 모차르트가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했던 탓에 그의 모친은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결국 사망하였다.
[22]
이런 상황이 제기된 것은 물론 연애감정 자체가 식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이 현실적으로 너무 맞지 않았던 탓도 있다. 알로이지아는 소녀 티를 완전히 벗기도 전에 이미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가수가 된 반면 모차르트는 일종의 몰락한 유망주로서 과거 신동의 칭호가 무색하게 빈털터리 신세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알로이지아는 부친이 일찍 사망하여 사실상 소녀가장 신세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좀더 현실적인 선택을 해야 했다. 1780년 알로이지아는 부유한 연극 배우이자 화가였던 조셉 랑게와 결혼하는데, 결혼 시에 남편으로부터 자신의 모친에 대한 경제적 원조를 약속받았다.
[23]
당시 바이에른 선제후는 전술한 막시밀리안 3세 요제프였는데 그가 1777년 말에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대가 끊어지자 팔츠계 비텔스바흐 가문의 팔츠 선제후
카를 테오도어가 1648년 체결된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황제선거에서 1표만 행사하는 조건으로 통합 팔츠-바이에른 선제후가 되었으며 거주지를 만하임에서 뮌헨으로 옮겼다. 요제프 2세의 욕심으로
바이에른 계승 전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유의미한 유혈사태가 벌어진 전투 없이 종결되었다. 바이에른 계승 전쟁을 끝내면서 오스트리아가 받은 영토인
브라우나우암인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의 고향이 되겠다.
[24]
전술했다시피 당시 오페라 세리아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에 가수들의 가창 경연대회로 전락한지 오래였다. 하지만 이 이도메네오는 '극과 음악의 일치'라는 선배 작곡가
글루크의 오페라철학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 진정한 극음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다만 이 오페라를 공연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당시의 관행에 젖어 있던 가수들이 곡을 멋대로 바꿔 부르거나 배역의 비중을 높여달라는 등의 무리한 요구를 해댔기 때문에 이들을 달래느라 엄청나게 애를 먹었다.
[25]
히에로니무스 그라프 폰 콜로레도(Hieronymus Graf von Colloredo) 대주교는 대주교로서는 매우 유능했지만, 예술에 관해선 문외한인데다 뭣보다 예술은 '있으면 좋고 없어도 그만'이란 입장으로 별 관심이 없었다.
영상
[26]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요제프 하이든의 친동생 미하엘 하이든이 있었기 때문에, 콜로레도 대주교는 건방지고 다루기 힘들었던 모차르트의 부재를 딱히 아쉬워하지 않았다.
[27]
미사 또는
예배음악, 장례음악 등 담당
[28]
직업이 협소하다는 것은 '하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좁게 정해져 있었다는 말과 같다. 그 범위를 벗어나면 심하게는 처벌 또는 사형당할 수도 있었으나, 모두가 알다시피 계몽군주의 하나로 통하는 요제프 2세의 정책의 영향과 함께 그는 이 모두를 초월하는 음악을 남겼다.
[29]
헨델은 1714년 후원자였던 영국의
앤 여왕이 사망하자 오페라 극장의 창립에 직접 참여했으며, 영국에서 오페라가 몰락한 1730년대 이후 본격 프리랜서 작곡가로 전향해서 다수의 오라토리오와 기악곡을 작곡했다.
[30]
다만 밑에 나와 있다시피 돈 관리를 잘못해서 그 많은 돈을 다 탕진하기는 했다.
[31]
그래서 하숙집에서 두 집 정도 떨어진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32]
심지어 체실리아는 모차르트에게 자기 딸과 약혼을 해놓고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다면서 1년에 300플로린을 딸에게 지급하라는 소송을 걸겠다는 되도 않는 협박까지 했다. 모차르트는 이런 속물근성에 질린 탓인지 결혼 후에도 장모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33]
우리말로 번역하면 국립"노랫말"극장
[34]
연구자들은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의 이름이 콘스탄체이며 역경을 이겨내고 사랑을 이루는 내용 등을 볼 때, 자신의 처지를 투영한 작품으로 파악하고 있다. 게다가 콘스탄체는 자신의 옛 연인이었던 알로이지아 베버를 염두에 두고 만든 배역이니, 모차르트에게는 더더욱 이 작품이 특별했을 것이다.
[35]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모차르트는 바흐나 헨델의 몇몇 작품을 편곡하거나 고전파 수법으로 재구성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바흐의 5개의 푸가 편곡(K.404) 이나 헨델의 오라토리오 아시스와 갈라테아의 편곡(K.566)이 있다.
[36]
두 오페라의 대본작가가 쉬카네더(Emanuel Schikaneder)인데 이 분도 프리메이슨 소속이다. 두 작품 중 현자의 돌은 모차르트와 다른 4명의 작곡가의 공동작품인데 상연기록만 남아 있고 악보가 분실되어 버렸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었으나, 1996년에 음악학자 데이비드 버치(David Buch)가 이 작품의 모차르트의 자필 사본을 발견하여 현재는 연주 가능한 수준의 악보가 나와있다.
[37]
전술한 클레멘티와 피아노포르테 연주대결에서도 승리하여, 한방에 잘츠부르크 시절 연봉 수준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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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선 "모차르트가 실제 도박을 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다. 전쟁으로 인하여 음악가로서의 삶이 궁핍해진 게 모차르트 말년 가난의 더 큰 원인이다." 주장한다.
[39]
다만 그가 잘츠부르크에서 받았던 연 450 플로린의 연봉은 정말 심하게 박봉이긴 했다.
[40]
다 폰테는 모차르트 오페라의 빛나는 조연이었다. 모차르트의 이탈리아어로 된 또다른 걸작 오페라 돈 조반니와 코지판 투테도 모두 다 폰테의 대본으로 바탕으로 작곡된 것이다.
[41]
이 돈 조반니 대본의 주인공인 바람둥이 남자의 실존 모델은 바로 다 폰테 본인이었다. 다 폰테는 당시 최고의 난봉꾼으로 알려진 카사노바 못지 않게 여성 편력으로 악명이 높은 사람이었다. 한편 카사노바가 모차르트를 직접 찾아와 돈 조반니에 자신의 일화를 반영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적이 있었는데 모차르트는 가차없이 거절했다.
[42]
이후 누나 란네를과도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 다만 모차르트가 사망한 후 한참 뒤인 1820년에 콘스탄체가 잘츠부르크에서 난네를을 만났으며 이후 콘스탄체와 그녀의 3자매들이 모두 잘츠부르크에서 말년을 보냈다.
[43]
황실이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본격적으로 궁중음악가로 활용하려는 목적보다 모차르트라는 유명 작곡가에게 일종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빈에 계속 머물게 하려는 목적이 더 컸다(황실에는 이미 전속 음악가가 차고 넘쳤다). 황실에서 모차르트에게 요구한 것은 황실의 축제나 무도회 때 연주될 춤곡을 작곡하라는 정도가 전부였기 때문에 모차르트는 계속 음악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 지원금은 요세프 2세가 1790년 사망하면서 중단되는데, 이 때 모차르트와 당시 빈 황실의 악장이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갈등이 본격화된다.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자신을 시기해서 지원금을 중단시켰다고 주장했는데, 자세한 것은 살리에리 항목 참조.
[44]
근데 이것도 여행 덕분인지는 사실 불확실하다.
[45]
이 시기에 쓰여진 유명한 종교음악이 찬송가 Ave Verum Corpus이다.
[46]
당시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의 작곡 주문을 받은 상태에서 진혼곡을 작곡해달라는 주문이 들어왔다. 이런 와중에 2달도 남지 않은 레오폴트 2세의
대관식에 맞춰 상연할 오페라 주문을 또 받았다. 제아무리 천재에 강골이라도 이런 강행군에서는 몸이 견뎌낼 재간이 없다.
[47]
발제크 백작은 이 작품을 자신이 쓴 것으로 사칭하여 발표하려고 했다. 거액을 준 이유도 자신의 의도를 작곡가에게 납득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악보를 필사하여 1793년 12월 자신의 지휘로 연주를 했다고 하는데, 이 때 자신의 작품으로 사칭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이 곡의 초연 자체는 1793년 1월에 이미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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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학자들은 쥐스마이어가 모차르트의 스케치나 모차르트가 생전에 레퀴엠의 작곡을 위해 연주하던 것을 듣고 기억하여 이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레퀴엠의 끝곡인 Communio는 곡의 첫 부분인 Introitus와
Kyrie의 선율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데 이는 모차르트의 지시라는 것이 정설이다. 음악적으로 보면 라크리모사 이후 쥐스마이어가 완성한 부분은 모차르트가 직접 작곡한 부분에 비해 수준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다른 작곡가나 연주자들에 의한 수정보완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직도 쥐스마이어판이 가장 많이 연주된다. 더 자세한 것은 따로 진혼곡 항목이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