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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천/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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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관2. 상세
2.1. MBC 청룡 감독2.2. 삼미 슈퍼스타즈 코치2.3. LG 트윈스 감독2.4. 삼성 라이온즈 감독2.5. 인스트럭터 시절2.6. 롯데 자이언츠 감독2.7. 역대 감독 성적

1. 개관

롯데 자이언츠 시기와 이전의 시기로 평가가 갈린다. 1990년에는 LG 트윈스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팀을 우승시키면서 찬사를 받았다. 다음해 팀성적 하락으로 LG를 떠나서 야인으로 지내다가 1995년 말 삼성에 부임한다. 비록 삼성에서는 우승을 하지는 못했지만, 젊은 선수들을 대거 기용해서 2000년대 삼성 왕조의 기틀을 다졌다는 점에서 시간이 지난 뒤에 오히려 평가가 상승했다. 따라서 시간이 오래 흐른 현재는 여러 사건사고로 욕을 먹기는 했지만, 팀 프랜차이즈 첫 우승과 KBO 역대 최고의 리빌딩을 통한 육성 시스템 마련이라는 공적으로 인하여 LG와 삼성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1]

그러나 롯데 자이언츠 시절에는 고의 태업 의혹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여러 가지 문제들을 많이 일으켰고, 롯데 자이언츠의 암흑기를 개막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불과 1년 반만에 팀을 멸망시키면서 4연속 최하위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받게 되었고, 이로 인해 현재까지도 롯데 자이언츠를 넘어 압도적인 KBO 리그 역대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된다.

야구인으로써의 백인천이 역대급 성공을 거둔 인물인지라 전반적으로 감독으로서의 역량 자체는 우수하다는 것이 중론이며 LG와 삼성 때에는 나름 준수한 감독으로 평가받지만, 롯데에서는 KBO 역사에 남을 부진과 태업으로 인해 2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큰 비판을 받는다.

2. 상세

2.1. MBC 청룡 감독

1982년 서울 연고의 MBC 청룡은 초대 감독으로 백인천을 선임한다. 계약 기간은 3년 이며 이 중 1년은 선수로도 활동하는 계약을 맺는다.

MBC 청룡 원년 감독(겸 선수)으로 취임 당시 그의 나이는 만 39세로 6개 구단 감독 중 가장 젊었다. 나이가 갓 40줄이 된 백인천을 감독으로 선임하다 보니 그보다 나이가 위인 인사를 코치로 데려오기가 어려웠던 터라 동년배인 이재환, 유백만 코치를 데려왔는데 이들은 시즌 내내 매사에 불협화음을 빚었다. 이재환은 경동고 시절 백인천과 배터리로서 호흡을 맞췄던 투수 출신이고 유백만은 부산상고로 학교는 달랐지만 동기생으로 실업야구 시절 노히트노런을 네 차례나 기록했던 명투수였다. 게다가 두 코치는 모두 투수 출신이며, 야수 출신인 백인천 감독이 선수로도 뛰는 점을 감안하면 야수 출신코치를 선임하지 못한 비효율적인 코칭스태프 구성이었다. 결국 MBC는 후기리그가 이어지던 7월 12일 충암고 감독 출신의 한동화를 수비 코치로 영입해 보강할 수 밖에 없었다. 수비전문가였던 한동화의 합류 이후 내야진의 조직력이 원활해지기 시작했고, 백업 플레이 실수 등에서 비롯되는 어이없는 실책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원년 백인천 감독은 전기 3위, 후기 3위 그리고 통합승률 또한 46승 34패로 전체 3위에 머물렸다. 코칭스태프 문제도 컸지만 선수단 구성에도 문제가 많았다. 서울 지역 선수들을 대상으로 한 드래프트에서 그 해 세계선수권으로 팀 합류가 불가능한 김재박 이해창을 지명하였다. 서울지역 지명권을 공동으로 행사한 OB는 재빠르게 박철순을 지명했고 OB 우승의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MBC는 하기룡과 이길환, 이광권이 마운드의 주축을 이뤘지만 확실한 에이스가 없다는 뚜렷한 약점을 가지게 되었다. 청룡의 선수진이 크게 빈약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첫해만큼은 고전을 면하기 어려운 면면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백인천 1년 짜리 선수 계약은 1982 시즌 후 재계약을 통해 연장되는데 백인천/선수 경력 항목을 참고할 것.

1983년엔 전년도 국제대회 때문에 합류하지 못했던 김재박[2]과 이해창이 팀에 합류하면서 MBC의 내외야는 더욱 짜임새 있는 구성을 갖추게 되었다. 포수로는 롯데에서 트레이드로 영입한 차동렬[3]과 신인 박철영이 합류했다. 투수쪽에서는 신인 오영일의 가세로 하기룡 이길환과 함께 10승 투수 3인방을 구성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미국 마이너리그와 멕시코 리그에서 활약했던 이원국의 영입은 엄청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시즌 시작 후 MBC는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을 냈으며, 4월 20일부터 4연패에 빠지면서 4월 24일 7승 9패의 시점에서 프런트에 의해 일시적으로 감독직을 물러나게 된다. 선수로서도 .162의 타율로 부진에 빠져있던 상태라 4월 26일 구단에 휴식을 요청했다. 그러나 시즌이 한 달도 지나진 않았던 시점이라 갑작스러운 일시퇴진 및 휴식 요청에 의문점이 많았고 당시 신문기사에서도 사생활 문제[4]가 있음을 암시하고 있었다. 결국 KBO 감독으로서 첫 번째 커리어는 이렇게 마감한다.

MBC청룡 감독 시절에는 워낙 강렬한 성격인지라 심판들에게도 좋지 못한 인상이었다. 1982년 8월 26일, 대구시민운동장에서 펼쳐진 삼성 라이온즈와의 경기 4회말 수비 도중 양 팀간의 충돌로[5] 벤치 클리어링이 발생했는데, 주심이 김인식만 퇴장시키자 선수들에게 갑자기 덕아웃으로 들어오라는 초강수를 두었다. 이 때 백인천 감독은 주심에게 자세히 설명할 것을 요구했고 이해가 가지 않자 주심은 그라운드에 들어올 것을 요청했지만 끝내 백인천 감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결국엔 KBO 몰수게임 1호 이후엔 5경기 출장정지와 100만원[6] 벌금을 징계를 받았다. 선수로서 백인천의 원년 4할 기록을 비난할 때 8경기 결장기록을 가지고 상대 에이스를 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이 중 5경기는 감독으로서 역할을 하던 중 출장정지 징계를 받은 것이다.

2.2. 삼미 슈퍼스타즈 코치

1983시즌 백인천은 꾸준히 복귀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MBC에서 김동엽을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복귀가 불발되었다. 그러던 중 전기리그가 마무리된 6월말 삼미 슈퍼스타즈의 요청으로 이적을 통해 삼미 선수 겸 타격코치로 계약을 맺었다. 원년부터 그 와 갈등을 겪었던 이재환이 이미 삼미 코치로 와 있었기에 삼미 내부에서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으나, 구단주의 강력한 의지로 결국 2군을 창설하면서 이재환을 내려보낸다.

구단주의 강력한 의지 덕분인지 삼미는 후기 시즌 쾌조의 출발을 보인다. 그러던 중 삼미와 계약한지 2 달이 채 되지 않은 시점에 간통죄로 경찰에 입건된다. 사실 삼미 영입 이후 선수로서 성적은 안 좋았지만 타점 생산력이 높았고, 엄청난 성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던 일본 출신 장명부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었다. 삼미는 이 때까지 후기리그 16승 8패로 1위를 달리고 있었다. 백인천의 구속 이후 9승 1무 8패를 기록하는데 그쳐 MBC에게 5게임차로 후기리그를 내주게 된다.

1983년말 석방된 백인천은 구단에 자진사임 의사를 알렸다. 그러나 1984년 삼미는 지난 시즌의 분발이 무색하게 디펜딩챔피언 해태와 함께 탈 꼴지 경쟁을 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난 시즌 백인천 영입 효과를 봤다고 판단한 삼미는 전기리그 종료 후 백인천을 영입한다. 이 시즌 선수로서 백인천은 제한된 출장 기회와 만42세라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양호한 성적을 올렸으나, 기존 코칭스탭과 갈등이 심해 또 다시 반 년만에 퇴단하게 된다. 삼미를 인수한 청보에서 1985 후기리그에 타격 인스트럭터로 고용하였으나 마찰이 잦은 성격으로 여러 구단에서 기용을 꺼려 지도자로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2.3. LG 트윈스 감독

1984년 시즌 후 현역 선수로서 완전한 은퇴와 동시에 삼미 코치직도 그만둔 백인천은 골프용품 관련 사업을 벌이며 은퇴한 뒤 몇 년 간 야구계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1989년 11월 7일, 배성서 감독의 후임으로 MBC 청룡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야구계로 돌아오게 된다. 부임 당시만 해도 구단명이 MBC 청룡이었지만, 이후 청룡이 1990년 1월부로 럭키금성그룹에 매각되며 LG 트윈스로 구단명이 변경됨에 따라 LG의 창단 감독이 된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MBC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고, 동시에 LG의 시대를 연 감독이었던 셈.

1989년 시즌 당시 청룡은 선수진 개개인은 나무랄 데 없었지만, 팀웍 부재로 그해 내내 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했다. 백인천은 모래알 같던 팀웍을 재건하여 단 1년만에, 만년 꼴찌였던 팀을 페넌트레이스 - 한국시리즈 통합 우승팀으로 만들며 지도자로서 화려하게 부활하게 된다.
사실 처음부터 잘 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시즌 개막하기 직전 이광은, 신언호, 김기범의 줄부상에 교통사고에서 돌아온 김건우의 난조 등으로 인해 전력을 제대로 꾸리기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개막전 OB에 2연패를 당한 뒤 5연승으로 선두에 올라가기도 했으나 곧바로 6연패와 7연패를 한 차례씩 기록하며 5월 중반~6월 초순까지 OB와 함께 꼴찌 다툼을 하고 있었다. 6월 초에는 14승 22패로 꼴찌까지 떨어지자 잠실구장에서 김동엽 전 감독의 복귀를 바라면서 일부 LG팬들의 퇴진 시위까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해태 원정에서 더블헤더 포함 3연전에서 싹쓸이 승리를 거두더니 마산 롯데 원정에서 승리, 8연승의 삼성을 상대로 2연승, 태평양 상대로 2연승으로 상위권 팀을 도장깨기 하며 8연승을 거두었다. 투수 쪽에서는 유망주로만 머물러 있던 문병권 김태원의 포텐셜이 드디어 터졌고 뒷문이 강해졌으며, 타격에서는 윤덕규, 박흥식, 김상훈, 최훈재, 김영직 등 막강한 좌타라인이 상승세의 원동력이었다.

이 당시의 멤버들을 보자면 김재박, 이광은, 김상훈 등 국가대표급의 내야진이 건재했고, 김태원, 김용수, 정삼흠, 문병권, 이용철, 차동철 등 선발진에 중견신인 김기범까지 포함된 마운드, 노찬엽, 박흥식 등이 버티는 외야진에, 특급 신인 포수 김동수, 노련한 포수리드의 심재원, 당시 신인으로 데뷔한 이병훈까지 가세한, 신구조화가 완벽한 팀을 구성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구단에서 부담스러워하기 시작한 김재박, 이광은, 박흥식 등 노장들을 과감히 끌어안으면서 이들을 주력 주전으로 앞세워 성적으로 보여주는 리더십을 발휘하며 기존 MBC 팬심을 다시 잠실로 불러들였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는 5연패를 노리고 있었으나 1990 시즌의 LG는 1.5 게임 차이로 해태를 제치고 사상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를 우승하는 감격을 누렸고, 해태를 누르고 한국시리즈에 올라온 삼성에 여유있는 4연승을 거두며 마침내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시리즈 1차전에서 13대0으로 LG가 거둔 승리는 아직까지도 역대 포스트시즌 단일 경기 최다 점수차의 승리다. 시리즈 전체 내내 백인천의 투수 운용은 삼성 타선을 꽁꽁 묶었는데 12승의 김용수를 1, 4차전에 배치하고 18승의 김태원을 2차전, 중고신인 김기범을 3차전에 넣었는데 삼성 타선은 결과적으로 완전히 얼어붙었다. 여기에 2차전 김영직, 이병훈 등 투입한 대타들까지 적중시키며 그야말로 신들린 듯한 운영을 하였다. 어떤 팀 팬들은 믿고 싶지도 알고 싶지도 않을 사실이지만, 이 해 백인천 감독의 팀 운영은 개인의 모든 역량과 경험을 쏟아부어 대부분 옳게 적중시킨, 지도자로서 최고의 한 해였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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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은퇴식에서 헹가레를 받는 백인천. # 그리고 그날 해태가 더블헤더 2차전에서 지면서 최초의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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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헹가래를 받는 백인천.

하지만 다음해인 1991년에는 구단과의 재계약 문제[7]와 선수들간의 사이가 벌어짐으로 인해 팀은 6위로 내려앉았고, 시즌 종료 뒤 이광환에게 감독직을 넘기고 LG를 떠났다.[8] LG 감독에서 물러난 뒤 개인 사업 등 야구와는 거리를 두면서 몇 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2.4. 삼성 라이온즈 감독

그러다가 1995년 10월, 우용득의 후임으로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선임되면서 복귀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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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그러나 삼성 부임 전부터 백인천 감독의 건강은 별로 좋지 않았다. 1996년부터 암흑기 전력이던 삼성을 각고의 노력끝에 추스려 1997년부터 슬슬 성적이 나기 시작했는데, 6월에 한번 뇌출혈 병원 신세를 지게 되었다. 그렇게 쓰러진 뒤 감독직을 유지를 하느냐 마느냐 설왕설래도 있었지만, 그래도 원래 의지가 강한 백인천이었던 바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결국 현장에 복귀하게 되었다. 하지만 백인천이 돌아와 보니 코치들끼리 파벌이 나뉘어 서로 싸우고 있었고[10], 백인천은 이에 크게 실망하고 만다. 더불어 초반에 좋았던 성적도 3위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해 시즌 막바지인 9월 3일 LG와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당시 삼성 선발 투수 정성훈이 초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했고, 구원투수로 전병호가 등판했다. 그런데 당시 포수는 낫아웃 사건으로 악명이 높은 김영진이었고,[11] 포수 출신이라 볼배합에 많이 관여하던 백인천 감독이 변화구 사인을 냈는데...배터리는 사인을 잘못 읽었는지 4번타자 심재학과 정면 승부를 선택했고 3점 홈런을 허용하고 말았다. 마운드에서 내려온 전병호를 불러 백인천이 왜 내 사인대로 던지라는데 안 던지냐고 화를 내자 전병호는 던지라는 대로 던진 거라고 대꾸했고, 백인천은 격분하여 전병호의 뺨을 때리고는 다시 뇌출혈로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백인천은 곧바로 병원으로 후송되었고, 더블헤더 2차전은 감독 없이 경기를 치러야 했다. 결국 최측근인 수석코치 조창수가 감독대행을 맡으며 잔여시즌과 포스트시즌까지 치르게 되었다. 그리고 플레이오프 종료 후 백인천은 감독직에서 사퇴하였다. 일명 전병호가 백인천을 보내버린 사건. 다만 이는 전병호가 새가슴 기질인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형편 없는 투수리드로 악명 높은 포수 김영진의 잘못이 더 크다 봐도 무방하기에 이 부분에 대해선 백인천 감독이 크게 비난받진 않는다. 또한 김영진은 그 전의 낫아웃 사건만 봐도 공수주 모두 최악임을 인증했으니.

사실 퇴임 전까지 삼성에서도 MBC와 LG 시절 못지않게 여러모로 괜찮은 평가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백인천 감독은 삼성 감독 중에서 한국시리즈 최초의 우승을 기록한 김응용 감독과 최초의 통합 4연패, 정규시즌 5연패를 기록한 류중일 감독과 더불어 삼성팬들에게 있어서 이미지가 좋은 편. 무엇보다도 이승엽을 발굴한 것과 2년이라는 짦은 기간에 야수진의 전면적인 세대교체를 성공적으로 단행해서, 이후 삼성이 타력을 바탕으로 최강 팀으로 군림하게 된 기초를 만들었다.

이 시절에는 대부분 노쇠화한 30대 주전들을 제치고 젊은 신인급들만 데리고 스프링캠프를 일찍 시작하는 등 의도적으로 세대교체를 단행했다. 지금까지도 KBO 리그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리빌딩 사례로 손꼽힌다. 선수 은퇴 후 미국에 건너가 있던 박흥식을 삼성의 타격코치로 데리고 온 것도 그의 업적. 자신의 양아들로 보자면 이만수,[12] 양준혁[13][14]을 위주로 한 기존 삼성 멤버들과 이승엽, 정경배, 김태균, 김한수, 신동주, 최익성, 김종훈[15] 등 젊은 선수들이 있었다. 백인천이 이 시절 발굴하고 적극적으로 기회를 줘가면서 기용한 선수들과 공격야구를 앞세운 화끈한 팀 컬러는 2002년의 첫 통합우승의 기반을 다져놓았고[16] 이후의 2005, 2006 시즌의 우승에도 그의 입김이 남아있다고 평가받는다.[17]

하지만 괜찮았던 평가와는 별개로 감독 생활은 사실 알고 보면 상당한 우여곡절이 많았다. 김성래, 이종두, 강기웅[18] 등 기존 노장 선수들과 마찰을 빚은 끝에 리빌딩을 명목삼아 이들을 방출시키거나 트레이드시켰으며, 전병호, 동봉철 등과의 마찰과[19] 짧은 커리어긴 했어도 외야수 전향 전에 포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포수 육성에는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것[20] 자체는 오점으로 남는다.

삼성 감독 재임시기 있었던 사건으로는 압축 배트 의혹도 있었다. 1997년 5월 4일, 삼성과 LG의 대구 경기에서 삼성 타자들이 정경배의 연타석 만루홈런 등 27:5라는 무시무시한 점수를 내면서 LG 투수진을 떡실신시키자 다음 날 경기 도중 LG 트윈스 천보성 감독이 삼성 타자들이 사용한 미즈노사의 배트를 규정 위반인 압축배트라고 주장한 사건이다. 이날 경기 도중 백인천이 LG 주루코치이던 조 알바레즈와 멱살잡이까지 가는 난투를 벌이기도 했다. KBO는 해당 방망이를 목공소에서 절단해보고 이상이 없다고 했으나 LG 측은 계속해서 의혹을 제기했고 뜬금없게도 제3자인 쌍방울 감독 김성근이 정식으로 KBO에 공문을 보내어 결국 제조사인 미즈노에 배트를 보내서 의뢰까지 한 결과 배트에는 이상이 없었다고 밝혀지게 된다. 또한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사무국에서도 X-ray와 도료 검사까지 했으나 결론은 이상 없음이었다. 참고로 그 때 다른 구단들도 논란이 되었던 배트를 암암리에 구입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병호 사건만 부각되지만, 부임 때부터 건강이 안 좋은 것도 있었고 압축배트 논란 때부터 건강문제가 본격적으로 심각해지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거기에다가 1996년 시즌 삼성의 전력이 약했었고, 1997 시즌에서는 뇌출혈로 인해 빠진 경우도 있어서 감독직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 때문이었는지 역대 삼성 감독들 중에서 두 번째로 승률이 낮다.(승률 0.488) 또한 두 번째 뇌출혈과 전병호의 뺨 사건까지 겹친 관계로 삼성은 1997년도에 4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지만, 정작 그 해에 열린 포스트시즌은 조창수 감독대행이 팀을 이끌었다. 이것 또한 삼성 시절의 백인천에게는 무척 아쉬운 일. 또한 백인천 감독에게 민폐를 끼친 선수들만 한 두명이 아니었으니(김영진[21], 최창양[22], 양용모[23]) 그래도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구단측에서부터 연봉도 후하게 주고 백인천의 양아들이라 불렸던 어린 선수들에게는 사비로 용돈까지 챙겨줄 정도로 헌신적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썼던 것을 보면 삼성 감독 시절의 백인천의 노력을 엿보일 수가 있는 대목이다.

현재는 리그 역사상 가장 강력한 리빌딩이 이루어진 시기 중 하나로 평가받으며, 김성근 부임으로 뎁스가 작살난 삼성은 이 시기 이후로 두 번째 전성기를 맞게 된다.[24] 약 3년만에 팀을 다시 강팀으로 꾸려낸 것은 리그 역사에 유례없는 고강도 리빌딩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러한 점 때문에 백인천은 삼성 팬들에게는 명장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비록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그래도 미운 정, 고운 정이라도 박혀 있었는지 이후 삼성은 그를 타격 인스트럭터로 다시 부르기도 했고[25] 여전히 백인천에 대한 삼성 팬들의 평가는 좋은 편이다. 특히나 김응용 이후 삼성 라이온즈에 부임한 감독들의 평가가 거의 전원 최악이기에[26] 더욱 고평가를 받을 여지가 있다.

2.5. 인스트럭터 시절

삼성 감독직에서 퇴임한 뒤에는 몇 년간 야인으로 지냈다. 감독 시절 찾아온 뇌출혈 후유증을 치료함과 동시에, 간간히 프로 팀과 아마야구를 돌면서 타격 인스트럭터로 활동했다. 1998년에는 연세대학교 야구부의 인스트럭터로, 2000년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한때 감독을 맡았던 삼성 라이온즈의 타격 인스트럭터로, 이후 한화 이글스 SK 와이번스의 인스트럭터로 초빙되기도 했다.

하지만 2002년 초 한화 타격 인스트럭터 시절 김태균의 스윙폭을 늘리려다가 2002 시즌을 말아먹는 원흉을 제공했다. 그외에 전년도에 주전 지명타자로 3할을 기록했던 김종석의 타격폼을 무리하게 뜯어고치려다가 타격이 망해버린 전력이 있었다.

그리고 2002년 여름,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으로 영입되었다. 삼성의 감독으로 부임했었을 때처럼 우연히도 전임 감독이 우용득이었다.

2.6. 롯데 자이언츠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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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82 MBC 청룡 80 46 34 0 3위 -
1983 16 7 9 0 1위[27] -
통산 96 53 43 0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0 LG 트윈스 120 71 49 0 1위 우승
1991 126 53 72 1 6위 -
통산 246 124 121 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1996 삼성 라이온즈 126 54 67 5 5위 -
1997 86 45 36 5 4위 4위
통산 212 99 103 10
연도 경기 정규리그 포스트시즌
2002 롯데 자이언츠 71 18[28] 53 0 8위 -
2003 92 23 66 3 8위 -
통산 163 41 122 3
총계 717 317 38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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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체로 삼성 감독들 중 확실히 백인천 이상으로 평가받는 감독은 김응용, 류중일 정도가 전부이며, LG 역시나 30년동안 우승을 못했고 감독들이 대체로 평가가 안 좋았기에 팀 프랜차이즈 감독들 중에서는 평가가 좋은 축에 들어간다. [2] 1982 시즌 막바지에 합류해 세 경기에 나오긴 했다. [3] 원년 롯데의 주전 포수였던 차동렬은 심재원, 한문연, 김호근이 보강되면서 자리가 없어진 상태였고 마침 MBC에서 김재박의 본격 가세로 역시 자리가 사라진 정영기를 내주고 차동렬을 데려왔다. [4] 당시 백인천과 살던 부인은 재일 한국인이었는데 한국 정착 문제와 시부모 봉양 문제 등을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 부인과 매우 안좋게 결별하게 되는데 하필이면 그 사유가 간통이었다. [5] 4회말 삼성 라이온즈의 공격, 2루수는 김인식...1루에는 배대웅이었다. 암튼 삼성 라이온즈 다음 타자가 유격수 땅볼로 치자 6-4-3 더블플레이...이때 배대웅은 출루를 더 하기 위해 김인식에게 강하게 태클을 하였고 김인식은 당연히 쓰려졌다. 그때 배대웅은 사과를 하기 위해 김인식에게 다가갔고 욱한 김인식은 벌떡 일어나 주먹으로 치고 말았다. 훗날 방영된 히스토리 후에서 김인식 감독은 "배대웅과 같이 퇴장시켜야 되는데 왜 나만 퇴장시키냐"라고 억울했고 상황상은 같이 퇴장시키는게 맞다 [6] 지금도 어느 정도 액수가 크지만 당시 100만원은 상당한 수준. [7] 백인천의 증언에 따르면 MBC 시절 맺은 감독 계약은 표면상으로는 2년이었지만, 실제로는 1+1 계약이었다고 한다. 백인천 본인은 첫 해 통합우승을 차지했으니 당연히 좋은 조건에 재계약할 줄 알았는데, 프런트 직원에게 변호사의 공증을 받은 1+1 계약서까지 들이밀었는데도 프런트는 사태를 무마시키려고 하기는커녕 오히려 "백인천이 미국인 코치 영입에 반발해서 잡음을 일으켰다"며 언론플레이를 했다고... [8] 이광환 감독 부임 후 LG는 기존 MBC 청룡의 잔재를 지우기 위해 대대적인 선수단 개혁을 감행했다. 대표적으로 MBC의 핵심 멤버였던 이광은이 이 때 은퇴하고 코치로 전업했고, 김재박, 윤덕규, 김상훈 등 노장 선수들을 죄다 타 팀으로 트레이드시키며 팀을 떠났다. [9] 사실 비슷한 시기에 백인천을 감독으로 영입하려고 시도했던 팀들이 몇 있었다. 1994년 OB 베어스 선수단 항명파동으로 인해 퇴진한 윤동균 감독의 후임으로 백인천을 영입하려다가 막판에 김인식으로 선회했고, 1995년 말 태평양 돌핀스를 인수하여 출범한 현대 유니콘스가 창단 감독으로 백인천을 선임하려고 했으나 백인천이 삼성 감독으로 가는 바람에 김재박에게 감독직을 맡겼다. [10] 결국 백인천의 팀선배였던 장훈의 절친인 김응용이 전부 정리해버렸다. [11] 김영진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같은 해 8월 23일, 쌍방울 레이더스와의 홈 경기에서 팀이 1:4로 앞서던 9회초 2아웃에서 장재중의 헛스윙 삼진으로 낫아웃이 됐을 때 자동 아웃으로 착각했다가 6:4로 역전패하는 원인을 제공한 바 았다. 그 당시 장재중이 바운드 볼에 스윙 삼진이 됐을 때 김영진은 팬서비스를 한답시고 관중석 쪽으로 공을 던져버렸고 뒤늦게 백인천 감독이 김영진에게 1루로 송구하라고 외쳤지만, 공은 이미 관중석으로... [12] 당시 리빌딩을 위해 강기웅, 김성래, 이종두 등 노장 선수들과 갈등을 빚었음에도 불구하고 백전노장이었던 이만수만큼은 대타, 지명타자, 1루수 대수비 등으로 기용하며 기회를 여러 차례 준 바 있다. 이후 이만수는 백인천이 물러난 1997년 시즌 후, 그대로 방출되어 은퇴했다. [13] 다만 양준혁에게는 그의 타격 폼을 보고 형편없다고 까기도 했다. 양준혁 본인도 이렇게 좋은 소리는 못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밑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는 했었다. 물론 자신의 수제자 이승엽을 더 돌보느라고 정신이 없었겠지만... [14] 일례로 백인천과 이승엽, 양준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백인천 감독이 삼성 감독으로 부임할 당시 이승엽과 양준혁의 타격폼을 바꾸자고 대답을 했는데 양준혁의 경우 타격폼이 심플하지 않고 어려웠지만 이에 불구하고 타율 3할을 칠 수 있었던 비결은 양준혁이 야구에 대해 센스가 있고 파워가 있었다는 점이다. 백인천 감독은 양준혁을 보고 타격폼을 바꾸면 타율 4할도 노려볼 수 있었고 홈런도 50개를 쳐서 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승엽은 타격폼 변경을 하기로 했고 양준혁은 망설여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백인천 감독도 양준혁의 타격폼을 건드리면 독이 되지 않을까 망설였다고 결국 고심 끝에 양준혁의 타격폼을 그대로 내버려뒀다. 백인천 감독이 이를 언급하면서 그 때를 생각하면 두고두고 참 아쉬워했다고 한다. 양준혁이 잠시 슬럼프에 빠졌을 당시 그 때 당시 백 감독의 말대로 타격폼을 수정했으면 어땠을까 하며 말한 적이 있다고. [15] 1997년 시즌 중 롯데 투수 박동희와 함께 트레이드되었던 선수다. 박동희는 망했지만 김종훈은 삼성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되었다. [16] 2002년 한국시리즈 당시 엔트리를 보면 알겠지만 백인천이 감독 시절 중용했던 젊은 선수들 중 일부는 삼성 선수단의 핵심으로 굳건히 자리했다. 김한수는 2002년 당시 주장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었고 시리즈 내내 부진했던 이승엽은 6차전 9회말 기적의 동점 홈런을 쏘아올렸으며 김종훈은 쏠쏠한 존재감을 뽐냈고 먼 길을 돌아 다시 고향팀에 돌아온 양준혁도 우승에 큰 기여를 했다. 이 시기 삼성에 없었던 정경배, 김태균, 신동주, 최익성 등 선수들도 다른 팀에서 어느 정도 이상의 기량을 뽐내고 있었다. [17] 다만 선동열 감독 재임 시절 이뤄낸 2005~2006년 한국시리즈 2연패는 기존의 공격야구 대신 탄탄한 불펜진을 앞세워 투수력으로 우승했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백인천 시절 주축 선수들인 양준혁, 김한수, 김종훈 등이 여전히 건재하던 시절이었다 보니 백인천의 입김이 남아있다는 평가가 있다. [18] 강기웅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상당한 약골로 알려져 있으며, 그로 인해 고강도 훈련을 선호한 백인천과 마찰이 있었다. 결국 1996년 시즌이 끝나고 강기웅은 쫓겨나듯이 현대 유니콘스로 트레이드되지만 앞서 말했다시피 "심장에 푸른 피가 도는데 어떻게 유니콘스 옷을 입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명언을 남기고 현대 선수단 합류를 거부, 은퇴를 한다. 삼성 타선의 리빌딩 등 다른 쪽에서 좋게 보는 백인천 감독이지만, 강기웅 팬 한정으로 백인천 감독을 좋게 볼 리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반론이 있다면 강기웅은 주전 2루수로 잘 뛰다가 백인천 감독이 부임하기전인 1995년에 이승엽과의 충돌로 발목부상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다음 시즌인 1996 시즌에 겨우 11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며 팀 내 입지도 좁아져 있었고 노쇠화 기미가 보이던 시절이었다. [19] 다만, 동봉철의 경우 선수 본인의 기량 하락이 있었음을 감안해야 한다. [20] 삼성에서 10년이 넘도록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며 삼성 왕조의 핵심을 꿰찬 진갑용도 원래는 OB(현 두산) 출신이다. 결국 삼성은 이만수가 1993년 주전에서 밀려난 이후 심각한 포수난을 겪게 되는데 포수난의 한가운데 시점이 바로 백인천의 재임기다. 1990년대 중반 삼성은 김성현 박선일을 돌려쓴 후 김영진이라는 신예 포수를 기용했다가 폭망했는데 사실 김영진을 중용했던 감독이 바로 백인천이었다. 김영진의 폭망 이후 삼성은 1998년 해태에서 정회열을 데려오고 1999년 두산에서 진갑용을 데려와야 했다. 결국 진갑용이 주전 포수 자리를 꿰차고 나서야 오랜 포수난 역사를 끝냈다. [21] 낫아웃 사건의 그 포수가 맞다. [22] 실제로 백인천 감독이 최창양의 행동거지를 보고 1년에 6승 이상 못한다고 해서 했는데, 최창양은 정말로 1년에 6승 이상도 못 했다고 한다. [23] 새벽 4시까지 술을 먹고 오다가 백인천 감독한테 딱 걸렸다고 한다. [24] 이 전성기는 길게는 2015년까지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김성근 이상의 빌런인 안현호의 등장으로 팀이 90년대 중반 이상으로 심각하게 박살나버렸으며, 백인천같은 리빌딩 전문가도 등장하지 않고 홍준학 체제가 지속되며 9968837이 발생했다. 물론 안현호-홍준학은 백인천 본인의 롯데 시절과 비견되는 단장이기 때문에 저렇게 팀이 작살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25] 이 당시 김용희 감독을 견제하려고 불렀다는 말이 있다. 당시 2군 감독도 김성근이었다. [26] 류중일을 제외한 선동열, 김한수, 허삼영, 박진만 전원 김성근만큼의 평가를 받거나, 그보다도 혹평받는다. 백인천의 경우 상당한 리빌딩을 이루어내 삼성을 다시 강팀으로 만들고 나아가 우승의 기반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삼성 역대 감독들 중 손에 꼽을 정도로 좋은 평가를 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 [27] 시즌 초 사퇴. 이 해 청룡은 후기 리그 우승, 통합 승률 1위를 기록. 하지만 한국시리즈에서 해태에 패배하면서 준우승에 머물렀다. [28] 백인천의 통산승률이 5할에서 내려앉은게 이 시점이다. 참고로 롯데시절을 제외한 통산성적은 총 553전 275승 264패 11무로 승률은 0.507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