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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샤바는 도시로서의 역사가 짧은 편이다.[1] 하지만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동유럽의 강국이었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이기도 했고 적대국가들의 최대 전리품으로서 오랜 기간 외세 지배를 받기도 했으며 전쟁 중 도시가 완파되기도 하는 등 최고의 영광과 최악의 수모를 모두 겪은 도시이기도 하다. 20세기 전까지, 그 아름다움 덕분에 제2의 파리, 또는 동유럽의 파리라 불렸던 이 도시는 파란만장한 역사를 거치면서 과거의 흔적이 제한적으로 남아 있다. 바르샤바는 수백년 동안 폴란드 국가와 폴란드 민족의 수도였기 때문에 바르샤바 자체의 역사와 폴란드 역사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 항목에서는 되도록 바르샤바 자체의 역사만을 서술하되, 배경이 되는 폴란드의 역사에 대해선 주석을 달거나 항목 링크를 걸어 보완한다.2. 초기, 마조프셰 공국의 지배 (9c ~ 1526)
현재의 바르샤바인 곳에 9세기~12세기 중반에 걸쳐 브로드노, 카미온, 야즈도프, 바르쇼바 이렇게 네 개의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들 마을이 커지면서 서로 인접했던 이 마을들은 하나의 도시가 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피아스트 왕조 폴란드에서 떨어져 나온 마조프셰(Mazowsze, 마조비아) 공국[2]이 지배했는데, 약 13세기 중반 마조프셰 공 볼레스와프 2세, 그리고 계승자인 콘라드 2세가 이 지역에 목재 성과 성당을 지었다고 한다. 역사 자료에서 바르샤바의 성주가 최초로 언급되는 시기는 1313년이고, 1339년엔 튜튼 기사단과 마조프셰 간 법정 다툼이 바르샤바의 성 얀 성당에서 있기도 했다 한다. 도시는 점차 발전해 1413년 마조프셰 공작 야누시 2세 시절에는 마조프셰의 수도가 되었고, 약 4500명의 사람들이 살았다고 한다. 무역과 수공업으로 성장하던 도시는 그 영역을 점차 확장해 갔는데, 도시의 확장은 기존의 시가지에선 거주하는 것이 허가되지 않은 사람들, 주로 유대인들에 의해 이루어졌다.[3] 도시가 커져가자 자연스럽게 도시 내에선 불평등도 발생했다. 그러자 1525년 도시의 빈민들이 부자와 도시내 권력자들을 상대로 소요사태를 일으켰고, 이 저항의 결과 도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빈자들도 제 3세력으로서 도시의 권력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1526년 마조프셰 공작의 대가 끊기자,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는 1351년 이래로 속국이었던 마조프셰 공국을 합병하면서 자연스럽게 바르샤바도 획득했다.3. 폴란드의 지배 (1526 ~ 17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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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56년 바르샤바의 스카이라인을 묘사한 판화 |
1529년, 바르샤바는 폴란드 귀족의회인 세임의 의석이 되었고 16세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폴란드에 편입된 마조프셰가 크게 발전해 바르샤바 역시 인구 2만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바르샤바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연방이 형성되기 전까지 두 국가의 수도였던 크라쿠프와 빌뉴스의 중간에 있었고, 발트해의 항구도시 그단스크와도 다른 두 도시들보다 가까웠다. 그리고 당시 연방의 왕 지그문트 3세 바사[4]는 1592년, 스웨덴 왕위도 자연스럽게 계승하여 스웨덴와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동군연합으로 묶었는데 스웨덴 섭정이었던 숙부 쇠데르만란드 공작 칼은 그의 스웨덴 왕위를 자꾸 위태롭게 하고 있었기에 이에 신속히 대처할 수 있어야 했지만 당시 수도로서 그가 머물던 크라쿠프는 남쪽으로 좀 많이 떨어져 있었다. 마침 1595년, 왕궁이었던 크라쿠프 바벨 성에 불이 나자, 지그문트 3세는 1596년에 바르샤바로 왕궁을 옮겼다.[5] 이에 맞추어 왕실 건축가였던 산타 구치(Santa Gucci)가 왕궁을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축했고, 1611년에 공사의 주요 부분이 마무리되자 이때부터 이곳은 왕들의 거처가 되었다.[6] 또한 주요 정부기관도 바르샤바로 이전했다. 폴란드 분할 때까지 공식적인 수도는 크라쿠프였고 왕의 대관 같은 왕사와 관련된 의식들은 여전히 크라쿠프에서 치러졌지만 바르샤바는 1596년부터 실질적인 연방의 수도로서 기능했고 대외적으로도 연방의 수도는 바르샤바로 인식되었다.[7] 이 무렵 새로운 도시 확장은 사적 공동체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 지역들은 귀족과 지주들이 통치권을 행사했는데, 바르샤바 내의 프라가[8]라는 구역은 1648년 따로 도시 특권을 부여받기도 했다.[9] 하지만 성장하던 도시는 ' 대홍수'를 거치면서 큰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연방을 침공한 각국의 군대에 의해 1655년~1658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스웨덴군에게 3차례나 빼앗기고 다시 탈환되었는데, 이때 수많은 문화재들을 약탈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약탈 후 도시를 복구하는 과정에서 도시는 전쟁 전보다 더욱 화려해졌다. 고딕 양식이 첨가된 후기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들이 거리를 메웠고 뒤이어 귀족과 부자들에 의해 거대한 바로크 양식 건물들이 도시 곳곳에서 올라왔다. 1677년에는 폴란드 민족의 '군신' 얀 3세 소비에스키가 바르샤바 교외에 바로크 양식의 빌라누프 궁전을 짓기도 했다. 연방의 국운은 천천히 쇠하기 시작했지만 도시는 좀 더 번영하고 화려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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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정화가 베르나르도 벨로토가 그린 18세기 말 바르샤바의 신세계 거리(Nowy Świat) |
18세기 바르샤바는 수차례 함락되고 재탈환되는 전장이 되었다. 1697년에 선출된 작센 선제후 출신 아우구스트 2세는 1700년 무모하게 루스 차르국과 함께 대북방전쟁에 참전했다. 하지만 연방군은 스웨덴군에 크게 밀렸고 1702년 바르샤바는 스웨덴의 수중에 떨어졌다.[10] 바르샤바를 점령한 칼 12세는 폴란드 귀족들을 움직여 아우구스트 2세를 폐위하고 꼭두각시 왕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새로운 연방의 왕으로 삼겠다고 했다.[11] 1704년, 작센군을 데려온 아우구스트 2세는 대규모 포격 끝에 바르샤바를 재탈환했지만, 1705년 전투에서 또다시 크게 져 바르샤바를 도로 빼앗겼다. 1707년에는 러시아군이 스웨덴으로부터 도시를 빼앗아 2달간 점령하다 다시 빼앗기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 바르샤바는 스웨덴에 엄청난 공물을 바쳐야만 했다. 1709년 이후 전쟁의 균형추가 러시아 제국으로 기울자, 연방을 스웨덴으로부터 사실상 해방한 러시아 제국은 연방에 강력한 영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엔 1713년부터 러시아와 작센의 군대가 상주하기 시작했다. 이런 전쟁에 의한 피해 외에도, 1708년엔 페스트가 도시를 덮쳤고 1713년엔 홍수와 함께 흉작이 발생해 도시에 큰 타격을 입혔다.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한 후 일어난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때에도 바르샤바는 전장이 되었다.
이렇게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와중에도 바르샤바의 18세기는 특출나게 성장이 가속화되었다. 작센에서 온 아우구스트 2세[12]는 작센, 그리고 독일 각지에서 건축가들을 불러와 작센의 수도 드레스덴을 원형으로 도시를 아름답게 꾸몄다. 1740년에는 가톨릭 성직자에 의해 귀족 자제를 입학 대상으로 하는, 바르샤바 대학의 전신인 '콜레기움 노빌리움(Collegium Nobilium)'이 건립되었으며 1747년엔 폴란드 최초, 최대이자 당대 유럽에서 가장 큰 공공도서관 중 하나이던 자우스키 도서관(Załuski Library)[13]이 세워졌다. 1742년에는 도시의 도로와 하수를 관리하는 도시 위원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8세기 후반이 되자 도시에는 초기 자본주의가 확산되었다. 공장이 들어서고 귀족과는 다른 자본가와 기업가들이 성장했다. 이에 따라, 수많은 농민들이 바르샤바에 일자리를 찾아 모여 들었으며 도시는 급격히 성장했다. 1754년 고작 24000에 불과했던 인구가 40년도 지나지 않은 1792년에 11만 5천명으로 불어 바르샤바는 유럽 전체에서도 가장 큰 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18세기 동안 바르샤바는 그단스크를 넘어 연방 최대의 도시로 성장했다.
한편 연방의 쇠퇴는 가속화되어 1772년 폴란드 분할이라는 끔찍한 상황을 겪게 되었고, 1788년에 예카테리나 2세의 허락을 얻어[14] 연방의 정치적 위기 해소와 외세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위한 세임이 바르샤바에서 소집되었다.[15] 이 회의로부터 약 32개월의 노력 끝에 세임은 '1791년 5월 3일 헌법'을 이곳에서 반포했다.[16] 하지만 전 유럽에 혁명의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계몽주의의 영향을 듬뿍 받은 이 헌법을 연방의 주변 국가들은 큰 위협으로 여겼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끝낸 예카테리나 2세는 1792년에 연방을 전격 침공하여 패배시킨 후 헌법을 정지시켜버린다(헌법수호전쟁). 1793년의 2차 폴란드 분할 뒤, 파멸을 눈앞에 둔 연방의 시민들은 분노했고 1794년 연방 전역에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ściuszko)[17]가 이끄는 봉기군이 발흥해 외세를 물리치려 했다. 코시치우슈코의 군대가 각지에서 성공을 거두자 이에 맞추어 4월 바르샤바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는데, 무기고를 장악한 시민들은 2000명이 넘는 러시아군을 전사시키고 잔존병력을 철수하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치에요비체 전투(Battle of Maciejowice)에서 봉기군이 패배하고 코시치우슈코가 사로잡히자, 사기가 떨어진 바르샤바의 민병대들은 도시를 모두 요새화하는데 실패했고 11월에 결국 러시아군에게 도시가 함락되고 만다. 러시아군 사령관 알렉산드르 수보로프[18]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군은 광범위한 학살과 파괴, 약탈을 자행했다. 4월 봉기에서 죽은 러시아군에 대한 복수로 특히 프라가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했는데, 이때 바르샤바 전체에서 살해된 사람의 숫자는 자료마다 크게 다르지만 최대 2만에 달한다고 한다. 이 봉기에 놀란 주변 3국은 1795년 3차 폴란드 분할을 통해 연방을 완전히 없애버렸고, 바르샤바는 프로이센 왕국에 귀속되었다.
4. 외세의 지배 (1795 ~ 1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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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 봉기 당시 바르샤바의 무기고를 탈환하는 폴란드 봉기군. |
프로이센에 귀속된 후 바르샤바는 남프로이센의 주도가 되었다. 얼마 뒤 1806년 프로이센군을 쳐부수고 이곳에 당도한 나폴레옹은 틸지트 조약에 의해 이 도시와 폴란드 중부지방을 묶어 바르샤바 공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시켰다.[19] 나폴레옹이 패배한 뒤 1815년 빈 회의를 통해 바르샤바 공국의 영역은 폴란드 입헌왕국으로 대체되었고, 같은 회의에 의거해 이 나라가 러시아 제국과 동군연합으로 묶이면서 바르샤바는 사실상 러시아의 일부가 되었다. 이 나라는 한때나마 진보적이었던 알렉산드르 1세의 승인 아래 자체적인 헌법을 가지고 광범위한 자치를 누렸고 바르샤바 역시 자치를 누리며 많이 성장했다. 1816년에는 바르샤바 대학교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1세 사후 1825년 반동적인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여 자주 폴란드 입헌왕국의 헌법을 무시하며 내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입헌왕국에 총독으로 파견된 콘스탄틴 파블로비치 대공[20]은 이런 니콜라이 1세의 뜻대로 폴란드의 헌법을 무시했고 폴란드 민족주의 단체를 해산했으며, 행정 요직에서 폴란드인을 쫓아내고 러시아인을 대신 채워 넣었다. 분노한 입헌왕국의 젊은 장교들은 1830년 11월 대공의 거처인 바르샤바의 벨베데르 궁을 습격하여 무장 봉기를 일으켰지만(11월 봉기)[21] 325일에 이르는 봉기 끝에 결국 패하고 말았다. 패배의 대가는 가혹했다. 니콜라이 1세는 왕국과 바르샤바의 자치권을 대폭 축소하고 왕국의 군대는 해산했다. 의회는 정지되었으며 대학교는 문을 닫았다. 또 바르샤바에 군정을 세우고 도시에 북쪽에 요새를 짓고 병력을 주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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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61년 계엄령이 내려진 바르샤바에 주둔한 러시아군. |
약 30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바르샤바 시민들은 이 억압을 참아왔다. 러시아 제국이 크림 전쟁에서 패배하고 알렉산드르 2세의 치하에서 개혁의 고삐를 당기던 1860년, 러시아의 통제가 비교적 느슨해진 바르샤바에는 새로운 도서관과 예술가 커뮤니티가 생겼다. 1862년에는 순수미술 박물관이 들어서고, 유대인들이 히브리어 신문 하-츠피라(Ha-Tsfira)를 발간했다.[22] 바르샤바 대학도 이 시기 다시 문을 열었다. 하지만 이와 함께 지하에선 독립의 움직임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1861년 4월에는 바르샤바 시내에서 반 러시아 시위가 격화되어 200명이 사망하는 대형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밖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잇따르는 바람에 1861년 내내 러시아군은 계엄령을 내리고 바르샤바 거리 한가운데에 텐트와 진지를 꾸리고 고생해야 했다.[23] 1863년 폴란드 각지의 지하조직들이 모여 폴란드 국민정부를 형성하고 구 연방의 영토 회복을 기치로 1월 봉기를 일으켰다.[24] 봉기 기간 내내 바르샤바 내에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일어났고 러시아군은 때론 보복으로 주요 건물들을 폭파시키기도 했다. 봉기가 실패로 끝난 후, 거듭된 초대형 반란에 지친 러시아는 유화책을 완전히 버리고 1867년 명목상 존재하던 폴란드 입헌왕국을 러시아의 프리비슬린스키(Привислинский край, 러시아령 폴란드)로 자국 영토에 편입해버린다. 이때부터 약 50년간 바르샤바는 완전히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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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중반 이후, 바르샤바는 불안으로 가득했지만 산업혁명기에 발맞추어 물적으론 크게 성장했다. 1840~60년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빈, 비드고슈치를 연결하는 철도가 개통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경제체제가 근대적 자본주의로 발전함에 따라 19세기 말엽~20세기 초입에는 450개의 공장에서 30,000명의 노동자들이 일하여, 한창 성장하던 다른 도시 우치(Łodz)[25]와 함께 러시아령 폴란드의 공업중심지로 성장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출생의 소크라티스 스타린키에비츠(Sokrates Starynkiewicz)가 시장으로 재직할 때(1875~1892) 바르샤바는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했으며 이 시기 바르샤바 최초로 상하수도 시설이 갖추어졌다. 해방된 농노들은 끊임없이 도시를 찾아와 1830년 14만명이었던 인구는 1900년 686,000명으로 늘었다. 하지만 이런 경제적 번영의 이면에는 강압적인 러시아화가 존재했다. 러시아 총독부는 폴란드어 학교를 폐쇄하고 정교회 성당을 더 많이 지었다.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어로 하는 교육도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1882년 센서스에 의하면 바르샤바는 문맹의 도시나 다름없었데, 전체 인구의 46.1%만이 초등교육을 받았고 중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6.1%,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1.9%에 불과했다. # 바르샤바에 가득했던 불안은 이런 러시아화에 대한 반발에 상당 부분 기인했다. 결국 1월 봉기 이후 큰 시위 없이 잠잠하던 바르샤바에선 1905년 러시아에서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진 것을 계기로 또다시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시위와 파업이 1907년까지 이어졌고 러시아 경찰과 카자크 기병대가 이를 진압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러시아가 독일에 크게 밀리면서 1915년 8월 6일 바르샤바는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다. 독일군은 전쟁에서 폴란드인들의 협력을 얻기 위해 유화책을 썼고 이에 따라 바르샤바에선 폴란드어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기술대학, 경제대학 등 각종 학교가 들어섰다.[26] 또한 이 시기 독일 군정[27]은 바르샤바의 외곽 지역을 시의 영역으로 통합해 바르샤바는 행정구역 상 면적이 3배로 커지게 되었다. 1918년 가을 독일에서 혁명이 터지자 11월 8일 독일군은 철수했고, 드디어 외세가 사라진 바르샤바에선 독립준비작업이 신속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1월 10일 폴란드 군단의 지휘관 유제프 피우수트스키[28]가 바르샤바에 도착해 러시아와 독일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에 착수했다. 다음날 섭정의회가 설립되어 그에게 군정권을 부여하며 폴란드의 독립을 선언했으며 바르샤바를 독립 폴란드의 수도로 지정했다.[29]
5. 전간기 (1918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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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전투 승리 후 소련 군기를 노획한 폴란드군. |
하지만 바르샤바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수도가 되자마자 큰 위기에 처한다. 폴란드가 일으킨[30]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 폴란드는 붉은 군대의 빠른 진격에 바르샤바 근방까지 밀리게 되었으나[31] 뒤이어 바르샤바 동쪽에서 벌어진 바르샤바 전투에서 극적인 승리를 거둬 전세를 역전시켰다.[32] 이 전투로 말미암아 붉은 군대의 서부전선군은 사실상 와해되었고, 전쟁의 균형추는 폴란드로 기울었다. 이 전투는 유럽으로의 공산주의 이념 수출을 25년간 저지한 전투로 평가받는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으로 전쟁이 끝난 뒤에도 폴란드 제2공화국이 혼돈의 정국을 거듭했기 때문에 바르샤바에서는 굵직한 정치적 사건들이 일어났다. 1922년[33] 공화국 초대 대통령 가브리엘 나루토비치가[34] 취임한 지 5일만에 자헹타 미술관에서 극우 민족주의자이자 정신병을 앓는 화가였던 엘리기우시 니에비아돔스키(Eligiusz Niewiadomski)에게 암살당했다. 이후에도 정국이 혼란을 거듭하자, 공화국의 상황에 불만을 가진 피우스트스키 원수는 청정(사나치아, Sanacja)의 기치를 들고 1926년 5월 쿠데타를 일으켜 자신에게 충성하는 군대를 이끌고 바르샤바로 진격해 당시 대통령이던 스타니스와프 보이치에호프스키(Stanisław Wojciechowski)에게 사임을 종용했다. 이때 바르샤바의 거리에선 소규모 전투가 벌어졌는데, 이 전투의 전사자, 그리고 전투에 휘말린 민간인 등 약 400명이 사망했다.[35] 이후 폴란드에는 13년간 피우수트스키파가 통치하는 권위주의적인 사나치아 정부가 들어선다. 1934년엔 바르샤바의 시장도 사나치아 정부에 의해 쫓겨나고 사나치아 진영의 사람인 스테판 스타진스키(Stefan Starzyński)가 시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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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사스키 광장(현 피우스트스키 광장)의 모습. 중앙엔 거대한 정교회 성당이 있고 사진 아래쪽엔 사스키 궁전이 보인다. 둘 다 현재 남아있지 않은 건물들이다. |
1925년 바르샤바의 인구는 100만명을 넘어섰다. 바르샤바는 대공황 직전 세계경제가 호황함에 따라 역시 경제력과 복지가 증가했다. 거리는 넓혀졌고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들이 기존 양식의 건물들과 조화하여 새롭게 바르샤바의 거리를 장식했다. 도시 곳곳에 꽃이 수놓아졌고 녹지와 공원이 형성되어 시민들의 삶의 질을 높였다. 1921년엔 임시 공항이 들어섰고[36] 1926년엔 라디오 기지가 설립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 계획적으로 파괴된 건물도 있었다. 현재 바르샤바의 피우수트스키 광장 자리에 러시아 정교회는 1912년 높이가 70m나 되는 거대한 알렉산드르 넵스키 성당(Sobór św. Aleksandra Newskiego)을 세웠다. 하지만 폴란드의 독립 후 러시아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한 폴란드 정부는 정교회 신자들의 간곡한 탄원에도 불구하고 1926년 이 성당을 15,000개의 폭약으로 철거했다. 1929년부터 1933년까지 바르샤바도 대공황의 늪에 빠져 도시는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실업자들이 거리로 쏟아졌다. 하지만 1934년부터 경제가 회복되기 시작해 발전이 재개되었다.
1934년 시장이 된 스타진스키는 비록 사나치아 정부의 사람이었지만 굉장히 능력있는 시장이었다. 도시의 급속한 개발, 그에 이은 대공황으로 바르샤바 시는 엄청난 부채를 안고 있었는데, 스타진스키는 전쟁 전까지 5년간 부채의 상당부분을 상환하면서도 엄청난 길이의 도로를 포장하고 많은 학교와 박물관을 세웠다. 바르샤바에 특히 많은 공원과 녹지가 조성된 것도 이 사람이 시장으로 재직할 때의 일이었다. 1934년 정규 공항인 오켕치에 국제공항[37]이 건설되었고 바르샤바 중앙역이 유럽에서 가장 현대적인 스타일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르샤바에서 가장 높은 64m의 프루덴셜 빌딩도 세워졌다. 1937년엔 이 빌딩에서 텔레비전을 방송하기도 했다. 1939년 전쟁 직전까지, 바르샤바는 각종 양식의 건물들과 녹지가 조화를 이루어 동유럽의 파리로 불릴 만큼 아름다웠다. 1936년 당시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4차 국제언어학자대회에 참석차에 도중 폴란드를 방문한 한국의 문학평론가였던 정인섭[38]도 바르샤바의 아름다움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1938년 바르샤바를 담은 컬러영상 전쟁 직전 1939년까지 인구는 129만명으로 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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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의 대 시나고그 |
전간기 바르샤바는 유대인들의 천국이기도 했다. 유럽 최대의 유대인 거주지로서, 바르샤바에는 1918년부터 31만에 달하는 유대인들이 살았고 1938년에는 유대인 인구가 37만 5천명으로 불어나 도시 전체인구의 약 30%를 차지했다. 주로 도시 북쪽에 거주하던 이들은 공화국의 관용 속에서 히브리어로 된 신문을 발간하고 유대인 학교를 운영했으며 이들을 대표하는 정당도 만들어 정치에도 참여했다. 도시 곳곳에 새로 시나고그가 세워졌고 도시 중심의 대 시나고그(Wielka Synagoga w Warszawie)[39]는 항상 의식을 치르는 유대인들로 붐볐다.
6. 2차 세계대전 (1939 ~ 1945)
↑ 바르샤바를 공습하는 루프트바페의 He 111 폭격기.
1939년 9월 1일, 즉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첫날부터 바르샤바에 폭탄이 떨어졌으며 폴란드 공군이 방어를 위해 출격해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다. 당시 폴란드의 실권자였던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Edward Rydz-Śmigły) 원수[40]는 전쟁발발 당일 바르샤바를 버리고 루마니아 방면으로 후퇴했다. 도시가 심각한 혼란에 빠지자 민정 시장이었던 스타진스키는 바르샤바 전체의 권한을 장악한 뒤, 무질서를 막기 위해 시민 치안대를 조직하고 시민들과 방어군의 사기를 올리는 라디오방송을 했다. 9월 3일, 리츠시미그위는 후퇴를 거부하고 바르샤바에 남았던 발레리안 추마(Walerian Czuma) 중장[41]을 바르샤바 방어군 사령관으로 삼았다. 9월 8일 바르샤바에 도달한 독일 제 4기갑사단이 남서쪽에서 공격을 시작했으나 80대의 전차를 잃고 방어군에 격퇴당했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절망적이었다. 3일 뒤 바르샤바는 전면 포위되었고 시민들은 굶주리기 시작했다. 9월 17일 소련군이 폴란드 동부국경을 넘어 침공했다는 소식과 함께[42] 바르샤바와 폴란드의 얼굴인 왕궁이 폭격에 맞아 불탔고 23일엔 발전소가 파괴되어 도시에 전기가 끊겼다. 포위된 와중에도 12만의 폴란드군은 도시로 진입하는 독일군을 결사적으로 막아내며 버텼다. 하지만 28일 한계에 다다른 바르샤바는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약 4주의 기간 동안 루프트바페는 매일같이 바르샤바의 병원, 학교, 식수 공장, 군수품 창고 등을 폭격하며 광범위한 테러를 자행했고 민간인 거주지도 폭격해 바르샤바 시민들을 살해했다. 바르샤바가 포위된 후 도시는 독일군의 포격도 얻어맞게 되었고, 바르샤바가 항복했을 땐 도시에 있는 건물 중 약 10%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인명피해도 어마어마해서 25,000명의 민간인을 포함해 31,000명이 사망했고 46,000명이 부상당했다. 좀 더 자세한 사항은 바르샤바 전투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폴란드 침공 당시 제 30대 바르샤바 시장이었던 스테판 스타진스키(Stefan Starzyński, 1893~1939).
바르샤바는 폴란드 총독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때의 통치는 바르샤바가 겪은 그 어떤 통치보다도 잔혹했다. 총독부는 즉시 고등 교육기관을 폐쇄하고 지식인들을 조직적으로 체포해서 바르샤바 근처의 숲에서 처형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냈다. 또한 이때 바르샤바에는 와판카(łapanka)라는 행위가 자주 일어났다. 영어로는 Roundup, 즉 일제검거라는 뜻으로 번역되는데, SS 친위대나 독일 경찰들은 바르샤바의 불특정 구역에서 무작위로 주변에 돌아다니는 사람을 체포했다. 이렇게 잡혀간 사람들은 강제 노동수용소로 보내지기도 하고 저항세력에 대한 보복으로 처형되기도 했으며, 인종청소의 제물로 그냥 살해되기도 했다. 한편 바르샤바의 영웅적인 항전을 지휘한 사람 중 한명이었던 스타진스키 시장은 바르샤바 점령 직후 도시를 방문한 히틀러의 안전을 위해 인질로 잡혀갔고, 풀려난 뒤 얼마 되지 않아 폴란드의 엘리트들을 제거하는 중이던 게슈타포에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탈출의 기회가 몇번 있었음에도 자신이 탈출한 뒤 남은 사람들의 운명을 걱정하여 거부했고, 결국 1939년 12월 하순에 46세의 나이로 게슈타포에 의해 처형되었다. 현재 바르샤바에서는 그의 행적을 기리는 기념판과 기념비를 몇몇 볼 수 있는데, 그 중 세나토르스카 거리의 시티은행 건물에 헌정된 기념판에는 1939년 9월 23일 바르샤바 포위 당시 시민들을 독려하기 위해 그가 라디오 연설에서 한 유명한 말이 적혀 있다.
"나는 바르샤바가 위대해지길 원했다. 그건 정말 멋진 일일 거라고 믿었다. 나와 측근들은 계획을 구상하며 미래의 위대한 바르샤바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 지금 폴란드의 명예를 지키고 있는 이 도시는 그 규모와 명성이 절정에 달해 있다. '''
"Chciałem, by Warszawa była wielka. Wierzyłem, że wielką będzie. Ja i moi współpracownicy kreśliliśmy plany, robiliśmy szkice wielkiej Warszawy przyszłości. (...) dziś Warszawa broniąca honoru Polski jest u szczytu swej wielkości i sławy. "
#"Chciałem, by Warszawa była wielka. Wierzyłem, że wielką będzie. Ja i moi współpracownicy kreśliliśmy plany, robiliśmy szkice wielkiej Warszawy przyszłości. (...) dziś Warszawa broniąca honoru Polski jest u szczytu swej wielkości i sławy. "
↑ 바르샤바 게토 봉기 중 은신처가 발각당하자 탈출하려 한 유대인 소녀.
1940년 10월에는 바르샤바 게토가 만들어져 악명높은 홀로코스트의 서막이 오른다. 총독부는 바르샤바와 바르샤바 주변의 40만이 넘는 유대인들을 3.4km²의 지역에 몰아넣었다. 하나의 방을 9명이 넘는 유대인들이 함께 써야 했고 일인당 하루에 183kcal의 식량만이 배급되었다. 이 엄청나게 밀집한 공간 속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아사했다. 1941년부터 게토를 탈출한 유대인, 게토의 벽 너머로 빵을 던지는 등 유대인을 도와주는 폴란드인은 즉결 처형되었다. 1942년 여름이 되기 전까지 약 92,000명이 질병과 기아로 숨졌다. 1942년 여름, 게토의 유대인 중 약 26만명이 트레블링카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1942년 말이 되자 남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운명을 확실하게 깨닫게 되었다. 1943년 4월 19일 나치 독일이 남은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이송하려 하자, 학살당하기보단 명예롭게 죽기를 바란 게토의 유대인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무기가 너무나 부족했기에 싸울 수 있는 사람은 1000여명 남짓에 불과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5월 16일까지 한달 가까이 독일의 진압군을 막아내며 견뎠다. 독일군은 진압 과정에서 게토에 무차별적인 포격을 가했고 화염방사기까지 동원하여 모든 건물을 불태웠다. 봉기 기간 동안 약 13,000명의 유대인들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었고 살아남은 57,000여명의 유대인들은 마이다네크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이들의 영웅적인 항전이 억압된 후 살아남은 봉기 지도자들은 자결했다. 독일군은 봉기 진압 후 게토를 건물 하나 남기지 않고 완전히 파괴했으며 아름다웠던 대 시나고그도 이때 파괴되었다. 바르샤바 게토에 수용되었다가 전후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10,000명도 되지 않았다. 훗날, 아르놀트 쇤베르크는 이 도시에서 학살된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바르샤바의 생존자>를 작곡하기도 했다. 봉기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바르샤바 게토 봉기 항목을 참고하기 바란다.
↑ 칼 자주박격포가 쏜 2톤 포탄에 직격당하는 프루덴셜 빌딩.[43]
1944년 7월, 독일에 반격을 가하던 붉은 군대는 폴란드 영토 깊숙히 들어와 바르샤바 방면으로 독일군을 추격했다.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점령이 이루어질 것으로 보이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폴란드의 독립에 대해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던 폴란드 망명 정부는 폴란드 지하국가(Polskie Państwo Podziemne, 속칭 PPP)에 봉기를 일으켜 소련군이 당도하기 전에 도시를 자력 탈환할 것을 명했다. 이에 따라 1944년 8월 1일 17시[44] PPP의 주력인 폴란드 국내군(Armia Krajowa, AK)이 중심이 되어 그 유명한 바르샤바 봉기를 일으켰다. 약 2만에서 4만 9천에 이르는 봉기군은 봉기 이틀만에 바르샤바의 주요 구역을 점령하고 라디오 송신과 신문 배포를 시작해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8월 4일부터 독일군이 조직적인 반격을 개시하자, 무기가 부족했던 봉기군은 밀리기 시작했다. 독일군은 1년 전의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진압 과정에서 광범위한 파괴행위를 벌였고 수많은 시민들을 학살했다.[45] 독일 공세에 밀리고 기아에 시달리던 봉기군은 결국 10월 2일 항복했다. 봉기 기간 중 최대 추산 20만에 달하는 폴란드인이 사망했다. 봉기군 전사자는 16,000명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모두 학살된 민간인이었다. 봉기 진압 후 히틀러는 이 도시를 완전히 파괴해 없애버릴 것을 명했다. 히틀러는 1939년 6월 20일 전쟁전에 이미 뷔르츠부르크의 독일 건설부를 방문해 바르샤바를 조직적으로 파괴하고 독일식으로 재건할 파프스트 계획(Pabst Plan)을 세워두었는데 전황이 기울어 도시를 독일식으로 재건할 수는 없자 히틀러는 이 도시를 지도상에서 지워버리기로 했다. 먼저 나치는 65만명의 바르샤바 시민들을 프루슈코프(Pruszków)의 난민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시민들을 추방한 뒤 나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이미 절반 가까이 파괴되어 있던 바르샤바의 남은 건물들을 모조리 폭파했다. 이때까지 남아있던 사스키 궁전, 브륄 궁전 등이 고의적으로 폭파되었고 폴란드의 상징인 왕궁은 벽 한장 남기지 않고 완전히 폭파하여 가루로 만들었다. 조직적인 파괴행위가 끝난 뒤, 약 85%의 시가지가 완파되었고 바르샤바는 10만 남짓한 사람들만 남은 유령도시가 되었다. 1944년의 비극이 끝나고 비스와-오데르 대공세를 통해 독일군을 폴란드에서 몰아내던 소련군은 1945년 1월 17일 바르샤바에 입성했다. 2차대전 기간동안 바르샤바 시민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
7. 전후 (1945 ~)
소련군의 진주와 함께 바르샤바의 전쟁은 끝났다. 원래 바르샤바는 가톨릭 문화권의 고딕 양식에서부터 정교회 문화권의 비잔티움 양식 그리고 철근, 콘크리트를 이용한 아르데코 양식의 건물까지 과거와 현재의 건물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지만, 이 건물들은 양식의 구분없이 모두 무차별적으로 파괴되어 대부분 사라졌고 약 10만 발의 지뢰와 불발탄까지 도시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폴란드의 수도는 어디까지나 바르샤바였지만 파괴가 너무나 심해 종전 직후엔 수도의 기능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남쪽의 대도시 우치가 1948년까지 실질적으로 수도로 기능했다. 파괴가 덜했던 크라쿠프, 포즈난, 우치 중 하나로 수도를 완전히 이전하자는 주장도 있었으나 바르샤바의 문화적, 역사적, 지정학성 중요성이 워낙 컸던지라 전부 기각되었다.[46] 하지만 설령 바르샤바를 다시 수도로 기능하게 하려 해도 그 전에 반드시 도시를 재건해야 했다.
↑ 복원중인 구시가지.
1945년 2월부터 바르샤바에는 수도 재건국(Biuro Odbudowy Stolicy, BOS)이 세워졌다. 전후 폴란드 인민정부가 들어선 뒤 1947년 7월 3일, 의회는 바르샤바 재건법을 통과했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 재건 최고위원회(Naczelna Rada Odbudowy Warszawy)가 발족했고 전국적으로 기금이 모였으며, 1948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시의 재건이 시작되었다. 비스와 강 서쪽에 면한 구 시가지의 복원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큰 규모로 정교하게 이루어졌다. 복원을 위해 전쟁 전 바르샤바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시각 자료들이 참고되었다. 사진에서부터 엽서, 심지어 초등학생들이 학교서 그린 풍경화까지 참고되었고, 특히 18세기 폴란드의 궁정화가였던 베르나르도 벨로토(Bernardo Bellotto)[47]의 그림이 많이 참고되었다. 남녀노소, 각계각층의 수많은 자원 봉사자들과 함께, 폴란드 각지에서 온 1,400명의 장인들이 1960년대 중반까지 구시가지 일부를 완벽하게 복원했다. 이 구시가지는 '벽돌 한장까지 고증에 맞춰' 재건되었는데 장인들은 구 시가지를 오래된 느낌이 나는 거리로 복원하기 위해 일부러 석재를 더럽힌 뒤 건물을 지었다.[48] 구 시가지의 복원은 1984년 왕궁이 완벽하게 복원되면서 마무리되었다. 유네스코는 이 복원이 예외적으로 대규모의 복원이란 점, 그리고 강력한 국가적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정해 1980년 바르샤바 구시가지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했다.
복원된 구시가지 이외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섰고, 새 도시계획에 따라 도시는 넓은 도로를 가지고 깔끔하게 계획적으로 재건되어 갔다. 1952년엔 전형적인 공산주의 리얼리즘 양식의 거대한 MDM 아파트가 지어졌고 1955년에는 '스탈린의 선물', 소련 영향력의 상징인 문화과학궁전이 지어졌다. 도심지의 상당부분이 공산주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투박하지만 중후한 건물들, 그리고 깔끔하고 현대적인 모더니즘 건축물들로 채워졌다. 그러나 도심지 외곽의 주거지역은 다시 급증하는 인구의 주거 수요를 맞추기 위해 공산주의 특유의 성냥갑들로 가득해졌다. 재건으로 말미암아 바르샤바는 전쟁 전과는 너무나 다른 도시가 되어갔다. 복원된 구시가지로 전쟁 전의 바르샤바를 온전히 느끼기엔 복원된 영역이 전체 도심에 비해 작았다. 한편 구시가지가 아닌 영역에서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은 되도록 복원했으나 사스키(작센) 궁전[49] 대 시나고그, 브륄 궁전(Pałac Bruhla) 등은 끝내 복원되지 못해[50] 지금은 흑백 사진으로만 그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 1979년 조국의 수도를 방문해 대규모 미사를 집전한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이때 폴란드 시민들에게 민주화의 동기를 부여했다.
한편 바르샤바는 여러 차례 반공시위가 일어난 현장이기도 했다. 1968년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 브와디스와프 고무우카가 반 러시아적인 은유가 많다는 이유로 희곡작가 아담 미키에비츠의 연극을 금지하자, 열받은 학생들이 정권의 검열행위에 반대해 시위를 일으켰다. 이 시위가 전국으로 퍼져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되었다. 1970년대 에드바르트 기에레크(Edward Gierek)[51]의 통치하에 경제가 침체에 빠지자, 바르샤바 시내에는 노동자들의 작은 시위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1979년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조국의 수도를 찾아 미사를 거행하면서 '폴란드의 얼굴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말로 설교를 끝맺어 폴란드인들에게 민주화의 동기를 부여했다. 1980년 그단스크에서 발원한 폴란드 연대노조 운동이 전국으로 퍼지자 1981년 12월 바르샤바를 시작으로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폴란드의 반공운동이 어두운 시기를 겪고 있을 때, 1983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다시 한번 바르샤바를 찾아 연대노조를 지지했다. 연대노조 운동이 억압에도 꺾이지 않은 결과, 바르샤바에서 1989년 2월 6일부터 4월 5일까지 인민정부와 연대노조 간 원탁회의가 열렸다. 회의 결과, 인민정부는 선거를 통한 민주적인 의회 구성을 약속했다. 같은 해 6월 4일 선거로 폴란드의 공산정권은 붕괴되었다.
↑ 폴란드 인민정부와 연대노조 간 원탁회의. 1989년 2월 6일.
공산정권 붕괴 후 바르샤바의 모습은 또 달라졌다. 현대 자본주의가 도시에 정착해가면서 서방 각국의 투자가 이어졌다. 이에 따라 바르샤바 중심부엔 수많은 고층빌딩들이 세워지기 시작하면서 동유럽의 다른 주요 도시들과는 확실히 차별화된 외관을 가지게 되었다. 1995년에는 숙원이던 지하철 개통이 완료되었다.[52] 현재 바르샤바는 더는 제 2의 파리로 불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16세기~19세기 양식의 건물들이 들어선 구시가지가 있는가 하면 번쩍거리는 마천루가 들어선 중심가도 있고, 이들 도심이 서로 잘 조화해 새로운 매력을 뽐내고 있다. 또한 다른 동구권의 주요 도시가 좁고 낡은 도로 때문에 만성적인 교통문제를 앓고 있는 것과 달리, 계획적인 재건에 따라 넓고 잘 정비된 도로 체계를 가진 바르샤바는 이들 도시보다 훨씬 기능적인 현대도시로 성장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중인 국가의 수도로서, 이제 바르샤바는 어둡고 비참했던 파란만장한 역사를 뒤로 하고 새로운 빛을 발하고 있다.
[1]
펠리페 2세 이후
스페인의 수도가 된
마드리드,
호엔촐레른 가문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확고한 기반을 잡은 15세기 중후반 이후부터 성장한
베를린과 비슷하게 16세기나 되어서야 수도가 되면서 동시에 유의미한 대도시로 발전했고, 그 이전엔 한적한 마조프셰 공국의 소도시 수준이었다. 이정도면
파리,
런던,
빈,
로마처럼 천년고도가 즐비한 유럽의 수도 기준에선 상당히 짦은 것이 맞다.
[2]
1138년
볼레스와프 3세 사후 그의 유언에 따라 네 아들들이 폴란드 왕국의 영토를 서로 나누어 가졌다. 마조프셰 공국 역시 그 중 하나였고 1351년 다시 폴란드의 봉신이 되었다.
[3]
제2차 세계 대전 전까지 바르샤바에 유대인이 많았던 이유를 이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4]
스웨덴
바사 왕조 출신이었던 그는 1587년, 어머니
카타지나 야기엘론카 공주가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던 혈연에 힘입어 폴란드-리투아니아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5]
결국 1597년, 칼 공작은 반란을 일으켜 지그문트 3세를
린셰핑 근처에서 패퇴시켰고, 1599년에 조카를 스웨덴 왕위에서 폐위시켜 자신이 5년 동안 섭정으로 있다가 1604년,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지그문트 3세는 1632년에 사망할 때까지 스웨덴 왕위를 되찾는데 초점을 두었는데, 그의 이런 정책은 100년이 넘는 연방과 스웨덴의 대립의 시작이었다.
[6]
공사는 1619년에 완전히 끝났다. 이 왕궁은 현재 바르샤바 구시가지의 입구를 잠코비 광장과 함께 장식하는 건축물로 바르샤바 최고의 랜드마크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두어 번 크게 파괴되었지만(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엔 기둥 하나, 벽 한장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때를 원형으로 완벽하게 복원되어 있다. 잠코비 광장 중앙에는 큰 기둥이 있는데, 기둥 위에서 십자가를 들고 바르샤바를 내려다보는 인물은 지그문트 3세이다.
[7]
다만 바르샤바가 완전히 공식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수도가 된 건 거의 멸망 직전인 1793년에 가서야였다.
[8]
현재 바르샤바 중심부에서 강 건너편 북부의 구역. 대략
바르샤바 국립경기장 옆동네다.
[9]
귀족들의 힘이 강했던 당시 연방의 상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0]
애초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였던 아우구스트 2세는 폴란드보다 모국인
작센 선제후국에 더 관심을 두었다. 때문에 연방에서 왕의 영향력이 약해지자 폴란드 귀족들은 자국이 어떤 지경에 처해있는지도 모르고 왕에게 특권을 요구해댔다. 폴란드 귀족들의 환심을 사고자 아우구스트 2세는 1629년에 스웨덴에게 상실한
리보니아를 되찾기 위하여 루스 차르국의
표트르 1세,
덴마크와 노르웨이 국왕
프레데리크 4세와 동맹을 맺고
대북방전쟁을 일으켰다. 하지만 전쟁 초반부터 덴마크가 이탈하고, 루스 차르국도
에스토니아
나르바에서 스웨덴군에게 대패하면서 스웨덴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형세로 흘러갔다. 아무리 국력이 쇠해도 여전히 강대국의 지위를 차지하던 연방이었지만 연방의 군사권을 상당부분 장악하던 귀족들이 말을 듣지 않아 전쟁 중에 힘을 제대로 쏟을 수 없었고, 결국 뛰어난 지휘관인
스웨덴 국왕
칼 12세에게 유린당하고 말았다.
[11]
1709년 스웨덴군이
폴타바 전투에서
루스 차르국군에게 대패하고 칼 12세마저
오스만 제국으로 도주하자, 더 이상 칼 12세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스타니스와프 1세의 왕위도 끝났다. 1733년 아우구스트 2세가 사망하자 세임에 의해 다시 왕으로 선출되었는데, 이것이 마음에 들지 않던
러시아 제국은 아우구스트 2세의 유일한 적자
아우구스트 3세를 내세워 그의 지지자들과 함께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을 일으켰다.
[12]
아들
아우구스트 3세는 폴란드-리투아니아에 관심도 없었고, 바르샤바는 어쩌다 한 번 방문했으며 인생 대부분을 드레스덴에서 보냈다.
[13]
당대 유럽에는 공공도서관이 몇 없었고, 따라서 자우스키 도서관은 유럽에서 가장 빨리 세워진 공공도서관이기도 했다. 설립 당시 약 20만 권의 저작을 소장했으며, 곧 40만 장을 소장하는 도서관으로 성장했다.
[14]
1709년 스웨덴으로부터 연방을 해방시켜준 점,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에서 러시아가 후원하던
아우구스트 3세가 결국 연방의 왕이 된 점, 1764년 친 러시아 성향의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가 왕으로 선출된 점 등으로 말미암아 연방은 사실상 러시아 제국의 종속국이 된 상황이었다.
[15]
예카테리나 2세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폴란드의 도움이 필요했기에 이 반항적인 회의를 승인했다.
[16]
1787 미국 독립헌법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반포된 성문헌법이다. '황금의 자유'라는 무제한적인 특권을 가진 귀족들에 의해 무정부에 가까운 상황이 종종 발생하던 당시 연방의 정치체제를 훨씬 민주적인
입헌군주제 형태로 바꾸는 헌법으로,
선거군주제를 세습 군주제로 바꾸고 양원제 의회, 선출직 판사를 두어 기초적인 삼권분립을 보장했다. 그리고 귀족과 도시민의 지위를 동등화하고 귀족 아래에서 농노에 가깝게 지내던 지방 농민들을 법의 보호하에 두어 농노제의 폐단을 완화했으며, 귀족들에 의해 마구 남용되어 끊임없이 국가 발전을 저해했던 '
리베룸 베토(Liberum Veto)[53]'를 폐지해 귀족들의 권한을 약화시켰다. 또한 참정권을 재조정해 과거에 귀족이면 무조건
참정권이 부여되던 것과는 달리, 땅이 있거나 국가에 세금을 내는 모든 사람에게 참정권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총 70만의 귀족 중 땅이 없고 가난한 30만 귀족의 참정권이 박탈당했으며, 땅을 가진 군역 종사자들, 자본가나 자영농에게 참정권이 주어졌다. 이는 헌법에 대해 가장 중요한 것만 간략히 서술한 것으로 이 밖에도 조항이 더 많이 있다. 현대의 헌법에 비하면 그 조항 수도 적고 선진적인 면이 덜한 구석도 있지만 당시에는 충분히 획기적인 면이 많았다. 1795년 이후 국가가 사라진 123년 동안 폴란드인들은 이 헌법을 성공적인 내부 개혁의 증거이자 폴란드 주권 회복을 보장할 상징으로 여겼다. 현재 폴란드는 이 헌법을 매우 자랑스러워 해 매년 5월 3일을 제헌절로서 기념한다. 이 이상 서술하면 주석이 너무 길어지기에 이 헌법에 대해서는 따로 항목을 만들 필요가 있다.
[17]
미국 독립전쟁에도 참가하여 준장까지 승진한 바 있다. 귀국한 뒤 조국의 상황에 통탄을 금치 못해 봉기를 이끌었고 결국 실패하여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에 붙잡혔다. 그의 시신은 현재 크라쿠프의 성 플로리안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폴란드 최고의 민족영웅 중 하나로 폴란드에선 그의 이름을 딴 지명을 많이 볼 수 있다.
[18]
후일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러시아 원정을 막는 데 큰 공헌을 한다.
[19]
나폴레옹의 동맹 중 하나인 작센 왕국과
동군연합으로 묶였다. 당시 작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바르샤바 공작을 겸했다. 자세한 사항은
바르샤바 공국 항목 참조.
[20]
파벨 1세의 둘째 아들로
알렉산드르 1세의 동생, 니콜라이 1세의 형이다. 알렉산드르 1세가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차후 황위 계승 서열 1순위였으나 본인이 황위 계승에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황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그 후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죽자 잠시 황제 자리를 맡았두었다가 3주 후 니콜라이에게 양위한다. 이를 빌미로 개혁적 성향의 일부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것이 바로
데카브리스트의 난.
[21]
바르샤바에서의 봉기가 성공하자, 봉기는 왕국 전역에 배치된 폴란드 군대로 확대되었고 러시아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입헌왕국과 사실상 전면전을 벌여야 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에 훨씬 큰 피해를 강요하며 열심히 싸웠지만 러시아의 물량을 당해낼 수 없었고, 결국 폴란드군 사상자 4만, 러시아군 사상자 7만을 남긴 채 폴란드군의 패배로 봉기는 끝났다.
[22]
그러나 이 신문은 러시아의 검열을 받아 단 6개월만에 폐간한다. 이후 1874년부터 다시 발간했다.
[23]
같은 해 옛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뉴스에서도 대규모 시위가 빈발했다. 리투아니아는 1월 봉기 당시 폴란드와 함께 전역이 되었다.
[24]
하지만 지하조직들이 완전히 조직화되지 못했고 러시아 적대국들의 지원도 받지 못했기에 봉기는 11월 봉기처럼 전면전의 형태가 아닌 게릴라전, 러시아 인사들에 대한 암살 등으로 진행되었다. 1년하고도 4개월에 걸친 봉기 끝에 게릴라군은 각개격파당하고 진압되었다. 봉기군 396명이 처형당하고 18,672명이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것을 포함해 7만에 달하는 폴란드인들이
캅카스,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 각지의 불모지로 보내졌다. 봉기는 표면상 별 소득 없이 끝났지만 점차 러시아의 지배에 순응하고 1861년 러시아의 농노제 폐지로 관심이 돌아가 있던 폴란드인들의 민족주의를 다시 한번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알렉산드르 2세는 폴란드인들의 관심을 다시 돌리고 여전히 강하던 폴란드 귀족들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1864년 폴란드의 농노제도 폐지했다). 다만, 이런 민족주의의 고취와 별개로 독립운동 자체는 무장투쟁이 아닌 실력양성을 중심으로 하는 것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25]
같은 시기 면직 산업이 발달하고 있던 우치는 종종 '폴란드의
맨체스터'라고 불렸다.
[26]
반면 당시 미처 러시아 제국 본토로 도망치지 못한
러시아계,
우크라이나계,
벨라루스계 이주민들과 조상 대에 완전히 정교회로 개종하여 태생이 정교회 신자인 일부 토착 폴란드인들은 독일군에 의해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27]
독일은 점령한 러시아령 폴란드에 자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공동
괴뢰국인
폴란드 섭정왕국을 세웠다.
[28]
러시아 지배 하 리투아니아 출생으로, 폴란드 독립의 영웅이다. 1904년 독립군인 폴란드 사회당 전투단(후에 폴란드 군단으로 개편)을 설립해 끊임없이 러시아군을 괴롭혀 왔다. 러시아 제국의 약화를 바라는 오스트리아 정부의 묵인 하에 피우스트스키는 크라쿠프에 군사학교를 세우고 지속적으로 세를 불렸다. 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러시아가 전쟁에서 패배할 것이라고 예상한 그는 그의 '폴란드 군단'을 이끌고 독일-오스트리아 연합 측에 서서 러시아와 맞서 싸웠다.
[29]
1937년 폴란드 제 2공화국은 1918년 11월 11일을 폴란드의 독립 기념일로 지정했고, 지금도 폴란드는 이 날을 국경일로서 기념하고 있다.
[30]
폴란드가 1919년 2월 14일
벨라루스의 소비에트 러시아군을 공격해 벌어진 전쟁이다. 한국에는 폴란드의 지나친 고토회복 욕망 때문이라는 관점이 주류이지만, 개전의 이유는 다양한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당시
볼셰비키들은 혁명이념을 수출하겠다는 입장을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1918년 11월 13일에는 독일이 항복한 지 이틀만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파기했고, 뒤이어 소비에트 러시아와 접경한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들이 볼셰비키의 침략 대상이 되었다. 에스토니아는 1918년 11월,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는 12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는 1919년 1월에 침공을 당했다. 이 신생국들 중 폴란드 중심부와 지척이었던 벨라루스는 1919년 1월 5일 민스크가 함락되어 가장 빨리 멸망했다. 폴란드는 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선빵을 쳐서라도 붉은 군대의 진공을 저지하려 했다.
[31]
전쟁 초반, 붉은 군대가
내전에 빠져있던 사이 폴란드는 빠르게 진격해 고토의 상당부분을 점령했다. 그러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들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했고,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지휘 아래 본격적으로 붉은 군대가 반격하자 폴란드는 크게 밀려 바르샤바 전투 직전까지 영토의 60% 가까이를 점령당했다.
[32]
전투 초반, 폴란드의 대(對) 러시아군 정보망 교란이 성공하여 바르샤바로 진격하던 붉은 군대 병력 일부(4군)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또한 붉은 군대의 기병사단을 이끌던
세묜 부됸니가
미하일 투하쳅스키의 지휘에 원한을 가져 바르샤바 전투에 참여하라는 명령에 불복하고
이오시프 스탈린이 공격하던
르비우로 가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소련군이 수적으로 우세했고 붉은 군대는 바르샤바의 중앙과 북쪽에서 도시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붉은 군대 본대의 남쪽을 보호하는 마지르 집단(Mazyr Group, 키예프에서 폴란드군을 몰아낸 정예 병력)은 그간의 전투와 길어진 보급선 때문에 매우 약화되어 있었고, 단 8000명이 150km에 이르는 전선을 커버하는 상황이었다. 피우수트스키는 남쪽에 대기시켜 둔 2만의 폴란드 정예병력을 돌진시켜서 이 방어병력을 돌파하고 붉은 군대의 15군과 16군을 서쪽에서 포위해 완전히 섬멸했다. 전투에 참가한 붉은 군대 부대 중 3군만이 전투 후 부대를 정비해 후퇴할 수 있었다. 한편, 교란에 속아
프워츠크 방면으로 간 4군은 기다리고 있던 폴란드군에 섬멸되었다.
[33]
1918년부터 1922년까지는 유제프 피우스트스키가 국가수령(Naczelnik Państwa)으로서 공화국을 통치했다. 그는 조금씩 의회에게 권한을 물려주다 1922년 퇴임하고 공화국에선 최초의 대통령 선거가 이루어진다.
[34]
좌파 정치인으로, 좌우 분열로 몸살을 앓던 폴란드 정국을 안정화하고 통합하기 위해 자신의 정적에게 외무부 장관 자리를 준 것이 사실상 대통령으로서 한 유일한 일이었다.
[35]
5월 31일 의회는 피우수트스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나 피우수트스키는 수령을 거부했다. 대신 피우수트스키에게 순종적이던 화학자 출신의 이그나치 모시치츠키(Ignacy Mościcki)를 새 대통령으로 선출, 대통령을 배후에서 조종해 실질적인 폴란드의 최고 권력자로 군림했다.
[36]
1929년부터 이 공항을 허브로
LOT 폴란드 항공이 운영되었다.
[37]
이 공항은 현재
바르샤바 쇼팽 국제공항으로 개명했다.
[38]
후에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된다.
[39]
1878년에 완공되었으며 완공 당시 세계 최대의 시나고그였다. 바르샤바에서 가장 장엄하고 아름다운 건물 중 하나였던 이 회당은 1943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 후 SS 친위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전후 바르샤바에서 유대인이 사라짐에 따라 이 시나고그는 끝내 복원되지 못했다. 지금은 흑백사진을 통해서만 당시의 아름다움을 확인할 수 있다.
[40]
1935년 피우수트스키가 사망하자 대통령, 총리와 일련의 정쟁을 벌인 후 1936년부터 실권을 장악해 군부독재를 펼쳤다.
[41]
바르샤바 전투 후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945년 4월 무르나우 포로 수용소(Oflag VII-A Murnau)에서 미군에 의해 해방된 뒤 짧게나마 자유 폴란드군에 들어가 다시 독일군과 싸웠다.
[42]
폴란드가 나치와 소련에게 완전히 점령된 뒤, 1940년 소련의
NKVD는 붙잡은 폴란드 군인들과 경찰, 지식인들을 스몰렌스크 근방
카틴 숲에서 학살했다.
[43]
이 건물은 현재 바르샤바 호텔이다. 구글맵에서 보면 문화 과학 궁전과 가깝다.
[44]
봉기군은 이 때를 Godzina W, W-hour라고 정했다.
[45]
바르샤바 북서부의 볼라(Wola)에선 8월 5일부터 12일까지 일주일만에 4~5만명이 학살당했다. 이 사건을 특별히 볼라 학살이라 부른다. 봉기의 남은 기간 동안 시내의 전투가 치러지는 모든 곳에서 지속적으로 학살이 일어났다.
[46]
폴란드 국민들의 의지가 반영된 게 더 컸겠지만 소련의 입김 또한 존재했을 것이다. 바르샤바는 러시아 제국령 폴란드 시절에 러시아의 폴란드 지배에 있어 중심이 되는 곳이기도 했기 때문에, 후대의 러시아계 국가인 소련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제국 시절 폴란드를 지배하던 영광을 불완전하게나마 되살릴 필요도 있었을 것이다.
[47]
이탈리아 출생의 화가로 유럽 각국에서 궁정화가로 일했다. 주로 도시 풍경을 많이 그렸는데, 1768년부터 1780년 사망할 때까지 폴란드의 궁정에서 머물며 바르샤바를 그린 풍경화를 많이 남겼다.
[48]
바르샤바의 구시가를 여행하면 벽면의 페인트칠이 벗겨지고, 석회가 떨어져나가고, 검게 때를 탄 건물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놀랍게도 이 건물들은 지어진 지 70년밖에 되지 않은 건물들이다. 복원의 과정에서 장인들이 이런 것을 고증했다.
[49]
Pałac Saski. 바르샤바 봉기 후 계획적으로 폭파되었다. 현재 바르샤바의 피우수트스키 광장과 사스키 공원 사이에 있었다. 피우수트스키 광장의 좌우 끄트머리에는 넓은 잔디밭이 있는데, 이 잔디밭이 궁전의 본체가 있던 곳이다. 두 본체는 중앙의 열주회랑을 통해 연결되었는데, 지금 두 잔디밭의 중앙에 있는 무명용사의 묘는 파괴된 사스키 궁전의 중앙 회랑 일부이다. 이곳에 무명용사의 묘가 있는 이유는
폴란드 제2공화국시절 폴란드 육군부 청사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중앙 회랑의 무명용사의 묘는 파괴를 면했는데 여러 설중 설득력이 있는건 당시 발파에 참여한 독일 군인이 무명용사를 존중해서 다이너마이트를 발파 구멍에 넣지 않았다는 설이다. 사스키 공원은 이 궁전에 딸린 정원이었고, 피우수트스키 광장 역시 과거 명칭은 사스키 광장으로 궁전의 일부였다.
[50]
바르샤바 시는 2006년부터 사스키 궁전과 브륄 궁전을 복원하려 했지만, 세계 경제위기 때문에 예산이 부족해져 공사를 진행할 수 없었다. 따라서 지금도 사스키 궁전 터는 잔디밭으로 남아있다.그래도 2023년부터 다시 추진되었고 2030년까지 복원하고 사스키 궁전은 폴란드
세나트(상원) 건물로 사용하기로 했다.
[51]
고무우카의 실각 후 폴란드 공산당 지도자가 되었으며 막대한 외채를 빌려 폴란드 경제를 번영케 했다. 하지만 그는 외채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고, 외채들의 만기가 점점 다가오자 다시 폴란드 경제는 무너져 갔다.
[52]
1925년부터 계획했으나 주변 상황 때문에 여러 차례 발목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