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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3:15:56

르브론 제임스/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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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BA 농구선수 르브론 제임스의 커리어를 정리한 문서이다. 21세기 최고의 농구선수답게 커리어가 정말로 다사다난하다. 2003년 전체 1픽으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에 뽑힌 이후 16년 동안 세 번 팀을 옮겼고, 동서부 컨퍼런스를 모두 경험하는 선수가 되었다. 또한 빌 러셀 이후 연속으로 파이널에 가장 많이 간 선수가 되었으며, 20번의 올스타, 20번의 ALL-NBA 팀, 네 번의 MVP, 네 번의 파이널 MVP를 받은 선수가 되었다.[1] 거기에 네 번의 NBA 파이널 우승, 세 번의 올림픽 농구 금메달을 수상하였다. 또한 1만, 2만, 3만득점을 모두 최연소 기록으로 갈아치운후, 마침내 한국시각 2023년 2월 8일 카림 압둘자바가 39년동안 가지고 있던 통산득점 1위 기록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또한 NBA 선수 최초로 4만 득점을 돌파했다.

2024-25 시즌 현재는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소속이다.

2. 클리블랜드 1기 시절

No. 23 르브론 제임스
2003~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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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브론이 프로에 첫 발을 내딘 곳이다. 엄청난 고군분투에도 아쉽게 우승을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두 번 연속으로 시즌 MVP를 따내기도 했고 디트로이트 침공이라는 역사에 남을 만한 퍼포먼스를 보이기도 했다.

3. 첫 번째 FA, The Decision

플레이오프가 끝난 후부터 디시젼 쇼가 일어나기 전까지 나온 모든 루머와 소식을 요약한 영상이다.[2]

2010년 여름 전까지만해도, 친구를 따라 명문팀을 포기한 의리남, 불우했던 가정환경을 극복한 효자, 독보적인 재능의 로컬 히어로에 백투백 MVP 수상자라는 이미지로 팬이 많으면 많았지 그다지 큰 안티 여론은 없었다. 특히 클리블랜드 지역에서 르브론의 인기는 설명할 필요조차 없었다. 유일한 약점이라면 클리블랜드에서 루키 계약이 끝나고 체결한 3년 연장 계약 중 파이널에 올라간 적은 단 1번이라는 점이고, 그마저도 무기력하게 끝났다는 것이다.

2009-10 시즌 캐벌리어스는 르브론의 우승에 대한 욕심을 충족시켜야했다. 왜냐하면 시즌이 끝나고 펼쳐지는 르브론 쟁탈전에서도 유리한 지점을 선취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트레이드로 앤트완 제이미슨[3]과 샤킬 오닐을 영입해 그 어느때보다 강력한 캐벌리어스 팀을 만들었으며 2009-10시즌 캐벌리어스는 61승 21패를 기록하면서 동부컨퍼런스 1위로 정규시즌을 끝마친다.

그렇게 플레이오프가 시작되고 1번 시드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는 8번 시드였던 불스가 상대인 플레이오프 1라운드를 가볍게 4승 1패로 순항하고 2라운드에서 셀틱스를 상대로 2승 1패라는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으나 너무 무기력하게 다음 세 경기를 지면서 플레이오프에서 완전히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르브론을 우승시키기 위해 그 어느때보다 심혈을 기울였던 구단주 댄 길버트는 완전히 패닉 상태에 빠지면서 저번 시즌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한 마이크 브라운을 해고시켰으며 마이크 페리는 이에 불만을 품고 자진으로 퇴임을 했다.

그 후 6월 1일 CNN에서 래리 킹이 르브론을 인터뷰 했을 때에는 클리블랜드에 남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 그후 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을 잡기위해서 모든 노력을 가했다. 마이크 브라운이 해임되고 나서 공직이었던 감독자리를 먼저 찾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1순위 후보는 미시간 주립 대학 감독이었던 탐 이조였다. 그를 잡기 위해 거액의 계약을 제시했으나 탐은 르브론이 캐벌리어스에 남을지에 대해 너무 불확실했기에 거액의 계약을 거절했다. 결국 선임된것은 바이런 스캇 감독이었다. 넷츠를 지휘하면서 여러번 파이널에 올라갔었고 르브론의 절친인 BANANA BOAT BROTHERS 중 한 명인 크리스 폴을 지휘하면서 뉴올리언스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기에 클리블랜드 입장에서는 최선의 선택을 했다. 다만 이에 대해서 르브론은 아무것도 언급을 하지 않으면서 클리블랜드 팬들은 목이 타기 시작했다.

르브론 본인의 경우. 자유계약 신분이 되기 전까지 이러한 질문에 확답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제임스는 이런 언론의 움직임을 잘 이용했다. 어느 인터뷰에서는 "뉴욕을 사랑한다" 라고 발언하면서 뉴욕팬들의 애간장을 태웠고, 또 어느 인터뷰에서는 "고향 클리블랜드는 내 마음의 안식처" 라고 해 고향팬들을 안심시키기도 했다.

당시 이적시장에는 르브론 제임스 외에도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시, 폴 피어스, 레이 앨런, 디르크 노비츠키,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등 한 팀의 주축이 될 수 있는 슈퍼스타 선수들이 한꺼번에 자유 이적생이 되어 열기가 장난이 아니었다. 클리블랜드, 시카고, 뉴욕, 마이애미 등이 르브론의 가능 이적지로 거론되었다. 특히 대부분의 기자들은 시카고행을 예측했는데 그 이유는 하단에 서술하겠다.

후일 디시젼 쇼에서 르브론은 6개의 팀이 르브론 자신을 영입하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 팀들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뉴욕 닉스, 시카고 불스, 뉴저지 네츠, 로스앤젤레스 클리퍼스, 그리고 문제의 마이애미 히트였다. 그 당시 6개의 팀들의 르브론 영입에 대한 열망은 상당했는데 그 6개의 팀들 모두다 다른 FA 선수들의 협상을 중지하고 모두 클리블랜드로 가서 르브론과 프레젠테이션을 가지기로 했다.

뉴저지 넷츠가 먼저 7월 1일에 프레젠테이션을 가지게 되었는데, 그 당시 뉴저지 넷츠는 12승을 거둔 최약체 팀이었다. 하지만 데릭 페이버스를 뽑게되는 최상위권 픽과 르브론 이외에 다른 슈퍼스타를 영입할만한 충분한 캡스페이스와 새로 취임한 러시아 구단주의 무지막지한 돈, 그리고 르브론의 절친인 JAY-Z가 구단주 중 한명으로 있었다. JAY-Z 역시 클리블랜드에 방문해 르브론과 프레젠테이션을 가졌다.

넷츠 이후로 뉴욕 닉스가 르브론과 프레젠테이션을 가지게 되었다. 닉스 역시 많은 먹튀들을 처분하는데 성공한 르브론을 영입한 이후로도 또다른 맥스 계약급 슈퍼스타를 영입할 캡 스페이스가 충분한 상태였다. 또한 당시 마이크 댄토니의 빠르고 공격적인 오펜스 전술과 뉴욕과 같은 마켓에서 뛰게되면 얻는 수입이 천문학적으로 많아진다는 점 역시 밝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뉴욕의 온갖 셀럽들이 르브론이 뉴욕으로 오길 바란다는 영상을 제작해 보여주었고, 르브론이 가장 좋아하던 미드였던 소프라노스의 두 주연 배우인 제임스 갠돌피니와 로레인 브라코를 섭외해 르브론이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뛰어야한다는 장면을 드라마를 각색해서 만들어 냈다.[4]

닉스 다음으로는 문제의 마이애미 히트가 7월 2일 첫번째로 프레젠테이션을 가졌다. 그 당시 마이애미 히트는 닉스와는 다르게 드웨인 웨이드를 중심으로 여러 선수들에게 샐러리를 적당하게 분배하는 팀 운영을 했다. 그 당시 드웨인 웨이드 역시 FA였기에 웨이드와의 협상을 중지하고 르브론에게 가서 프레젠테이션을 갖는 일은 상당히 위험한 일이었다. 그러나 라일리는 이미 라일리만의 대책을 가진 상태였다. 미국 현지시간으로 11월 9일 캐벌리어스가 마이애미 히트와 원정 경기를 치르러 온날 라일리는 마이클 조던과 함께 르브론과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 르브론은 조던의 유산을 따라가지 않겠다고 인터뷰한 기사가 11월 13일에 나온 것을 보면 이들 만남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즉 라일리는 르브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찌됐든 프레젠테이션에서 라일리는 그런 그의 영향력을 최대한 발휘하면서 그의 여러개의 반지를 보여주고 마이애미의 전설인 알론조 모닝을 데려왔다. 또한 주에서 부과하는 세금이 플로리다에는 없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프레젠테이션을 마감했다.

7월 2일 두번째로 잡힌 프레젠테이션은 LA 클리퍼스와의 프레젠테이션이었다. 클리퍼스의 단장은 르브론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였다. 여담이지만 프레젠테이션 중 상당히 독특했던 점은 로스앤젤레스의 장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여태까지 프레젠테이션을 가졌던 팀과는 다르게 농구 이야기에만 집중했다. LA 클리퍼스에게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젊은 선수들이 있었다. 배런 데이비스와 부상으로 1년을 쉬었지만 다음 시즌엔 뛸수 있는 블레이크 그리핀, 그리고 그 당시에는 전도유망한 선수인 크리스 케이먼이 있었다.

7월 3일 토요일에는 마지막 두팀과 프레젠테이션을 가졌는데, 새로 감독에 취임하게 된 바이런 스캇과 새로 단장이 된 크리스 그랜트와 미팅을 가졌다. 클리블랜드는 애향심으로 르브론을 설득하고, 르브론이 등장인물 중 한 명인 패밀리 가이 풍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팀원들만 아는 은어를 넣어 캐벌리어스에 대해 애착심이 더욱 가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체제작 UCC를 통해 We are the World를 페러디한 "We are Lebron" 를 보여주었다. 이 노래를 부르기 위해 오하이오주 지역 소방관 부터 주지사까지 동원되었다. 마지막으로는 르브론의 원소속팀인 만큼 FA시장에서 그 어떤 팀보다 높은 금액을 제시할 수 있다는 제안을 남기고 프리젠테이션을 마무리 시켰다.

그후 마지막으로 시카고 불스와 미팅을 가졌는데, 그 당시 기자들은 대부분 불스로 르브론이 갈 것이라 생각했다. 조던의 유산을 이어갈수 있으며, 전도유망한 올스타급 선수들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다. 데릭 로즈, 조아킴 노아와 같은 선수들이 있었고, 르브론과 계약을 한 후에도 다른 스타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캡스페이스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카고 불스의 열성적인 팬인 그 당시 미국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가 르브론이 불스로 가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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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얼마후 2010년 7월, 이적 시장의 한 축인 크리스 보시가 웨이드가 뛰는 마이애미 히트와 계약을 했다고 발표가 났다. 이에 따라 수많은 미국의 스포츠 기자들은 르브론까지 마이애미로 갈 지에 대해 신나게 기사를 써내고 있다. 유력한 목적지는 소속팀인 클리블랜드, 시카고 불스, 뉴욕 닉스가 거론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루머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르브론 영입 쟁탈전에서 본래라면 보시 영입으로 이제 빠져야 할 마이애미가 유력하게 떠오르고 있었던것. 많은 사람들은 설마 르브론 - 보시 - 웨이드라는 꿈의 조합이 이루어질지 경악하고 있었다.
75분동안 생방송으로 진행된 The Decision에서 마이애미 히트로 간다고 말한 르브론 제임스.

그리고 그것은 현실이 되었다. 7월 9일, 르브론 제임스는 The Decision이라는 쇼를 통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한다는 말을 전국에 알렸다.
"This fall, man, this is very tough, this fall, I'm going to take my talents to South Beach and join the Miami Heat."
올 가을에는…… 말하기가 쉽지 않네요. 저는 올 가을에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해 제 재능을 사우스비치로 가져갑니다.

이는 엄청난 충격을 가져왔고, 이에 대해서 온갖 이야기가 터져나왔다. 히트 팬들을 제외하면 부정적인 이야기였다.

NBA는 리그에서 지정한 일정한 기간 동안에만 자유계약 자격을 얻은 선수와 구단과의 자유로운 접촉을 허용한다. 리그에서 허용하는 기간이 아닌 시점에 팀 이적이나 계약 기간, 계약 금액, 내가 그 팀에 입단할 경우 어떤 신인을 뽑을 것이며, 추가적으로 어떤 베테랑 선수를 영입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야기가 오갈 경우, 해당하는 선수와 팀의 계약은 무효가 된다. 이 시기는 대체로 7월 1일부터 2주기간으로 이 시기를 모라토리움 시기라고 한다. 이 시기에 구두계약을 뒤엎어 사고를 친 선수로 디안드레 조던이 있다.

빅쓰리를 결성하는 과정에서 맥시멈 연봉이 100% 확실한 3명의 탑클래스 FA선수가 매우 절묘할 정도로 적은 액수를 균등하게 페이컷하고 팀에 안착했다는 것에서부터 이 조합은 사실상 담합이나 탬퍼링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세 선수가 각각 계약을 완료한 시점은 드웨인 웨이드(버드 권한 계약), 크리스 보시(사인 앤 트레이드), 마지막으로 르브론 제임스의 순서였는데 이 과정에서 너무나 노골적인 조작의 뉘앙스를 풍겼던 것이다. 특히, 마이애미의 프랜차이즈 스타였던 드웨인 웨이드의 경우, 크리스 보시와 르브론 제임스보다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었지만 사전에 입을 맞추지 않았다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애매한 금액만 받았다. 더 놀라온 것은 그 다음으로 마이애미에 안착한 크리스 보시 역시, 맥시멈 계약을 준비하던 수많은 팀을 뿌리지고 역시 애매한 수준의 페이컷을 하며 사인 앤 트레이드로 마이애미에 안착한다. 르브론 제임스 역시 애매한 수준의 페이컷으로 마이애미에 안착하고(동일한 사인 앤 트레이드), 결국 세 선수가 받게 된 연봉은 서로서로 정확하게 일치하게 된다. 그 당시 CBA룰에 따르면, 각 선수의 루키 스케일(신인 계약 당시 지불받는 금액)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의문투성이의 페이컷 수준을 통해 3명의 슈퍼스타가 한 팀에 모임과 동시에 정확하게 똑같은 연봉을 받게 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5]

몇몇 기자들은 담합 의혹을 제기했고, 심증적으로는 모두가 인정하는 일종의 사기였지만, 데이빗 스턴이 총재직을 재임 중이었던 NBA 리그는 결정적인 물증을 잡기 힘들다는 명목으로 이 사건을 크게 다루지 않고 흐지부지 끝내버린다. 따라서 이 조합은 시작부터가 부정한 것이며, 리그 차원에서 그다지 열정적으로 이 사건의 뒤를 캐지 않았기 때문에 무효가 되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빅쓰리 결성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들이었는데, 이것이 리그의 밸런스를 붕괴시키는것은 물론이고 이에 르브론이 무임승차를 하여 거저먹으려고 한다는 식이었다. 르브론의 비교 대상이 바로 저 마이클 조던이고, 조던이 약체였던 팀을 자기를 중심으로 구성하여 결국 전설을 만들었던것[6]과 대조되어 "이제 르브론은 조던과 비교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찰스 바클리는 "우리 때는 하다하다 안 되어서 은퇴 직전에 뭉쳤는데 요즘 것들은 편하게 우승 트로피 가져가려고 한다."[7] 고 르브론의 이적을 비꼬았다.[8]

두번째는 더 디시전이라는 이적 방식이었다. 조던의 옆에 있던 올타임 스몰 포워드 피펜급은 커녕 확실한 2옵션 하나 없었던 클리블랜드 였기에 팀을 떠나는건 이해한다는 사람들도[9], 굳이 떠나려면 조용히 떠날 것이지 디시전이라는 방식으로 홈 팬들의 속을 긁어놓고 갈 필요가 있냐는 비난이었다. 이에 가장 불쌍하게 된건 물론 클리블랜드의 팬들이었다.

원래 디시전이라는 방식은 미국의 고교 운동선수 유망주들의 대학 진학 결정이 시작되는 날인 내셔널 사이닝 데이를[10] 앞두고, 뛰어난 고교 운동선수 유망주들이 복수의 명문대에서 입학 제의를 받았을때 선수에게 결정권을 주고 학교측에서 마련하는 이벤트이다. 간단한 예시.[11] 하이라이트는 유망주 선수가 입학 제의온 학교의 모자를 앞에 펼쳐두고 결정한 대학교의 모자를 집어들어 쓰는 장면. 나쁘게 말하면, 르브론 제임스는 고딩때나 할 짓을 나이먹고 프로팀에 하는 민폐를 저질렀다고 할 수 있다. 고교 선수를 스포츠 장학생으로 리크루트하는 대학교는 미국내 수백개 학교가 있고, 이들은 갓 17세~18세 선수 한 두명이 거절하고 딴 학교 갔다고 해서 몇년 농사를 망칠 정도도 아니며, 자유의지를 중요시하는 미국인들 성향에 성인을 앞둔 젊은이가 스스로 미래를 결정하는 선택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학교측에서 이런 행사를 해주는 것이다. 반면 르브론 제임스는 이미 리그에서 7시즌을 마친 중견급 선수이고, 이 비지니스의 생리를 잘 알고 있으며, 자신의 자유와 규정에 맞게 팀을 옮긴다고 해도 다른 구단들에게 남기는 충격이 있다는 점을 알고 이에 대해 구단과 팬들을 배려할 도의적 책임이 있다. 그런 점에서 디시전 쇼는 18세 고딩이면 몰라도 리그 최고의 선수가 하기에는 너무나 미성숙한 쇼였다.

프로스포츠에 있어서는 정말 불쌍할 정도로 패배의 역사만 있는 클리블랜드에서 르브론은 유일한 희망이었지만, 이렇게 르브론은 팀을 떠나고 말았다. 클리블랜드의 댄 길버트 구단주는 공개적으로 저주의 편지를 남기며 배신감을 나타났으며, 르브론을 가장 열렬하게 응원하던 그 팬들은 이제 르브론 관련 상품과 사진들을 찢고 불태우고 내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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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ne.
대략 이런 분위기였다.

물론 르브론이 자기가 뛰고 싶은 팀을 찾아 가는것 자체는 문제가 없었지만, 대중들은 스타의 쉬워보이는 선택보다 역경을 딛고 일어나는 영웅을 원했다. 그리고 이때까지 르브론은 역대급 "선수"가 아니라 "영웅"이 되기에 충분한 선수였다. 그렇지만 '온리 원' 이 아닌 '빅쓰리' 라는 조합을 구성하면서 이는 부서져버린것.

그냥 어지간한 선수들하고 조합을 이루었으면 모르지만 르브론이 마이애미로 이적할 당시 크리스 보시는 24득점에 11리바운드를 기록하는 엄청난 성적을 거둔 엘리트 빅맨이었고, 드웨인 웨이드는 커리어를 제외한 당시의 기량만 보자면 코비 브라이언트에도 전혀 밀릴 것 없는 리그 최고의 슈팅가드였다. 실제로 몇년 전까지만 해도 파이널에서 히트를 원맨 캐리해 우승시켰을 정도니. 여기에 MVP 급 선수인 르브론 본인까지 합류하니 우승은 너무나도 쉬워보인 것이다.

다만 보시는 볼륨이 뛰어난 1차스탯에 비해 과대평가된 약체팀의 에이스라는 평도 많았다. 이적 직전 25.0라는 높은 per에 비해 선수가 뛰고 있을 때와 코트 밖에 있을 때의 마진이 반영되는 bpm,vorp에서는 각각 2.3,2.7(리그 50위권)을 기록하는등 약한 리바운드 능력과 수비력으로 인해 보여지는 스탯에 비해 경기에 미치는 영향력이 낮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냉정히 뒤돌아 봤을때의 이야기고 언론들과 팬들은 PER 1,2,4위가 모인다는 파격적인 이적결정에 아연실색한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게다가 조용히 홈팬들에게 사과를 하며 떠나도 될 상황에서 온갖 야단법석을 떨며 어그로를 한껏 끌고 떠났기에 비난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리고 클리블랜드를 떠난 것에 대해 팬들에게 사과해도 시원 찮을 판에 마이애미 하트의 빅 3 환영 쇼에서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여준 것. 무려 3-Peat가 아닌 8-Peat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해당 발언.[12] 그 환영쇼에서 정말 호탕하게 웃는 제임스의 모습은 배신감으로 이미 지친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비수를 꽂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영상이 담긴 유튜브 비디오는 거의 저스틴 비버 급의 비호감이 때려박혀 있다. 그 당시는 유튜브가 아직 메인 스트림 사이트가 되기 전이었임에도 이정도라면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화났는지 알 수 있다.

그 와중에 뉴욕 닉스의 팬들도 분노했는데, 르브론의 뉴욕 이적 가능성도 높았기 때문.[13]여담으로 당시 13세였던 도노반 미첼은 "르브론의 마이애미 이적 소식을 들은 뉴욕 팬들이 화가 나서 병을 던졌는데 맞을 뻔 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제 문제는 빅쓰리를 결성한 르브론이 압도적인 활약으로 이를 조용히 시키느냐, 아니면 망신을 당하여 온갖 비난을 받거나 하는 문제였다.

4. 마이애미 히트 시절

No. 6 르브론 제임스
2010~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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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두 번째 FA, 고향으로 돌아오다.

마이애미에서의 네 번째 시즌이 끝나고 르브론의 클리블랜드 행이 계속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유는 간단한데 마이애미가 슬슬 노쇠화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승을 위해 뭉친 빅3가 늙기 시작했고 샐러리가 가득찬 상황에서 더이상 큰 영입도 불가능해졌다.

휴스턴과 클리블랜드가 르브론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다는 이야기. 하든+르브론+하워드로 빅3를 만들려는 휴스턴. 어빙+러브+르브론으로 새로운 빅3 등등. 여러가지 가능성이 이야기되고 있다.

그런데 6월 24일, 갑자기 옵트아웃으로 FA가 될 것임을 발표했다.

의외로 그에게 가장 열렬히 구애하고 영입 가능성이 높은 구단은 친정팀인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다. 그가 떠날 때에는 저주를 퍼부었던 구단주가 그를 설득하기 위해 마이애미 행 비행기를 비밀리에 탔다는 보도도 나왔고, 비록 루머로 판명났지만 나이키가 클리블랜드 홈 경기장의 모든 광고판을 샀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그리고 클리블랜드는 전력보강 없이 오로지 재럿 잭의 연봉만 덜어내는 트레이드로 재럿 잭과 작별하며 노골적으로 르브론 영입을 위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르브론 입장에서도 나쁘지만은 않은 선택인게 이미지 개선은 차치하고서라도 캐벌리어스는 리빌딩이 거의 완료되어 카이리 어빙 등 1픽 유망주들이 포텐을 터뜨릴 만반의 준비가 끝나있다. 또한 2014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얻어 2014년 6월 27일에 열린 NBA 드래프트에서 '제2의 르브론 제임스'로 기대를 모은 SG/SF 앤드류 위긴스 를 지명했다. 그리고 2014년 7월 12일부로 친정팀으로의 컴백을 선언했다. I'm coming home.

다음은 2014년 7월 11일자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트(Sports Illustrated)에 실린 르브론 제임스의 편지 전문 해석본. (르브론 구술, SI기자 리 젠킨스 정리) 마이애미팬들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으면서도 고향인 오하이오주에 대한 그리움과 과거의 반성, 새로운 팀에서의 도전정신을 잘 묘사했다. 내용 자체는 흠잡을것이 없는 매우 잘 쓰여진 글로 볼 수 있다.[14][15] 다만 클리블랜드 팬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라고.

원문 링크
사람들이 내가 어느 곳에서 뛸지 신경 쓰기에 앞서, 나는 오하이오주 북동부에서 자랐다. 그곳에서 나는 걸었고, 뛰었으며, 울었고, 피흘렸다. 때문에 그곳은 언제나 내 심장에 자리한 특별한 장소다. 오하이오 사람들은 내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봤고, 때때로 나는 오하이오 사람들 모두의 아들이라고 느꼈다. 오하이오 사람들의 열정은 엄청났으며 나를 흥분시키기도 했다. 그만큼 나는 오하이오 사람들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주고 싶었다. 오하이오와 나의 관계는 농구 그 이상이다. 그러나 4년 전에 나는 이를 알지 못했다. 지금은 잘 알고 있다.

2010년 오하이오를 떠난다고 발표했을 때를 기억할 것이다. 당시 정말로 힘들었다. 오래 머물고 있었던 곳에서 떠난다면, 분명히 무언가 달라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전히 오하이오는 내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내게 있어 마이애미는 대학교와 같은 곳이었다. 마이애미는 지난 4년 동안 나를 성장시키고 내가 누구인지 알게 해줬다. 마이애미서 더 나은 농구선수가 됐고, 더 나은 사람이 됐다. 내가 가기를 원했던 프랜차이즈에서 많은걸 배웠다. 앞으로도 나는 마이애미를 내 두 번째 고향으로 생각할 것이다. 마이애미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을 것이다.

마이애미로 간 것은 드웨인 웨이드 크리스 보시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유도니스 하슬렘과 함께하기 위해 희생했다. 마리오 찰머스와 형제처럼 지냈던 것도 정말 좋은 경험이었다. 우리 모두가 함께한다면, 마술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 믿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마이애미를 떠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이들과 함께 쌓아올린 경험들을 이제는 이어가지 못하는 것이다. 결정을 내리기에 앞서 마이애미 동료들과 이야기해왔고, 내가 내린 결정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우리가 이룩한 것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우리는 평생을 함께할 형제들이다. 구단주 미키 애리슨과 팻 라일리 사장에게도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이들은 내게 정말 엄청난 4년을 선물해줬다.

내가 이렇게 글을 쓰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해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릭 스폴스트라 감독과의 관계, 라일리 사장과에 관계에 대해 의문을 품는 이가 없었으면 좋겠다. 마이애미 히트가 하나되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공식기자 회견이나 파티는 없을 것이다. 이 글을 남기고 난 후에 나는 내년 시즌을 위해 연습할 것이다.

클리블랜드를 떠날 때, 나 스스로에게 미션을 부과했다. 챔피언십을 따내는 것이었고, 두 번 달성했다. 그러나 마이애미는 내가 오기에 앞서 이미 챔피언십을 따낸 팀이다. 그런데 클리블랜드는 정말 긴 시간 동안 우승하지 못했다. 클리블랜드서도 내 목표는 변함이 없다. 최대한 많은 챔피언십을 차지하는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이 내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하이오에 트로피를 선물하는 일이다.

나는 언제나 클리블랜드로 돌아갈 것을, 그리고 클리블랜드서 내 커리어를 마칠 것을 생각했었다. 단지 그게 언제가 될지를 몰랐을 뿐이다. 올 시즌이 끝나고 FA가 됐을 때도 생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 두 아들과 딸을 임신하고 있는 아내와 함께하고 있다. 우리 가족이 내 고향에서 함께 긴 시간을 함께하는 것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다른 팀에 갈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마이애미를 떠난다면, 클리블랜드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내 생각이 옳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클리블랜드로 돌아와서 행복하다.

클리블랜드 복귀에는 아내와 어머니의 지지가 필요했다. 이들 역시 결정을 내리기 힘들었다. 댄 길버트 클리블랜드 구단주의 편지와, 클리블랜드 팬들의 야유, 그리고 그들이 내 유니폼을 불태운 일들 모두 우리 가족을 힘들게 했다. 내 감정 역시 복잡했었다. 당시에는 “그래, 다시는 저 사람들은 신경 쓰지도 않겠다” 고 쉽게 말했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봤다. “만일 내가 한 운동선수를 어린 시절부터 지켜보고, 그 운동선수가 내 인생에 기쁨을 선사했다면? 그런데 그 운동선수가 갑자기 떠났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행동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봤다. 댄과 꾸준히 만났고, 우리는 여러 이야기를 나놨다. 모두가 실수했고, 나 또한 실수했다. 나를 포함한 모두가 서로에게 원한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챔피언십을 약속하지는 않겠다.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가 당장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나는 내년에 우리가 승리하기를 바란다. 냉정히 보면, 긴 여정이 될 것이다. 2010년 당시보다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내 인내심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나는 어린 선수들, 그리고 새로운 감독과 함께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클리블랜드서 나는 베테랑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과 하나 되는 것에 쾌감을 느낀다. 이들이 아직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경험하도록 도울 것이다. 내가 어린 선수들의 멘토가 되고, 뛰어난 재능을 지닌 선수들을 이끌게 되어 굉장히 신난다. 나는 카이리 어빙이 리그 최고의 포인트가드가 되도록 도울 수 있다. 트리스탄 탐슨 디온 웨이터스가 성장하도록 도울 수도 있다. 나에게 있어 좋은 동료였던 앤더슨 바레장과 다시 뭉치게 된 것도 기분이 좋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는 농구를 하기위해 클리블랜드로 다시 왔다. 그러나 농구 외에도 다양하게 클리블랜드를 이끌어야할 책임 역시 있다. 이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할 것이다. 마이애미와는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다. 오하이오 아이들에게,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는 것을 일깨우고 싶다. 아이들이 대학을 마치고 이곳으로 돌아와 가정을 꾸리고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이런 모습이 내게 미소를 가져다 줄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이제는 우리의 재능을 하나로 모을 때다.

오하이오에서 그냥 얻어지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쟁취해야한다. 우리가 가진 것을 위해 우린 뛴다.

나는 이러한 도전에 응할 준비가 됐다. 난 집에 돌아간다.

...그리고 그는 2년 뒤 이 약속을 지켰다.

5.1. 케빈 러브 리크루팅

르브론의 클리블랜드 복귀후부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간에 케빈 러브를 두고 트레이드 협상이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다. 르브론 역시 케빈 러브와 함께 뛰고 싶다는 의사를 표했고 러브 역시 구단에 클리블랜드로의 트레이드를 요청했다는 루머가 나오면서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 ESPN에 의하면 케빈 러브 - 앤드류 위긴스의 트레이드는 시간문제라 하고 팀버울브스는 8월 23일경 러브를 트레이드할 것이라는 기사까지 나오면서 팬들 사이에서도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만약 이 트레이드가 성사된다면 클리블랜드는 '현역 최고의 선수 - 올스타 파워포워드 - 올스타 가드'라는 라인업을 앞세워 일약에 우승 후보로 떠오를 수 있다.

한국시간 기준 2014년 8월 7일, 클리블랜드와 케빈 러브가 5년 계약을 맺었음이 알려졌고 8월 23일에 클리블랜드-미네소타-필라델피아 간 3각 트레이드가 성사되었음을 발표했다.

파일:external/www.nbareligion.com/Lebron-Irving-e-Love.jpg
왼쪽부터 케빈 러브, 카이리 어빙, 르브론 제임스 순이다.

마침내 르브론 제임스 - 케빈 러브 - 카이리 어빙의 클리블랜드 BIG 3가 탄생했다. 이렇게 르브론은 고향팀에서의 새 도전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6. 클리블랜드 2기 시절

No. 23 르브론 제임스
2014~2018
파일:lebroncavs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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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 번째 FA

클리블랜드에서 네번째 시즌이 끝나고 FA를 맞은 르브론은 클리블랜드와의 옵션을 포기하고 옵트아웃을 선택했고, 결국 2018년 7월 2일 레이커스와 4년 $154M 규모의 계약을 맺었다. 정확히는 3+1년의 계약으로 3년간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함께한 뒤 1년은 옵트아웃 후 FA가 되거나 사인 앤 트레이드 되어 다른 팀으로 갈 수 있다. 이로써 15년간 동부 컨퍼런스의 왕으로 군림했던 르브론은 선수 생활 16년 차에 처음으로 서부 컨퍼런스에 오게 되었다. 이적의 표면적인 사유는 가족을 위한 선택이었다며 특히 자녀교육이 우선순위였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르브론이 또 다시 고향팀을 떠나는 선택을 했음에도 이번 레이커스 이적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는 거의 없다시피하다. 우선 르브론이 2016 파이널에서 캐벌리어스에 우승 트로피를 안기며 기어이 약속을 지켰다는 점, 르브론의 클리블랜드 2기 시절인 4년 내내 파이널에 진출했던 점, 특히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8 플레이오프는 그야말로 한 명의 선수가 어디까지 팀을 멱살잡고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최고의 퍼포먼스를 펼쳤기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르브론이 클리블랜드에 정말 해줄만큼 해주고 떠난다는 반응이었다.

게다가 2기 시절 르브론이 고향에 설립한 I Promise School을 비롯한 자선사업은 지속되기 때문에, 비록 르브론이 팀은 옮겼지만 클리블랜드 지역과의 유대는 계속된다는 점도 한 몫 했다. 댄 길버트 구단주도 저주의 편지를 남겼던 예전과 달리 이번 이적때는 르브론에 대한 감사와 응원의 편지를 남겼고 향후 영구결번도 약속해줬다. 클리블랜드 팬들도 반응이 크게 다르지 않아서 르브론의 LA 이적 직후 르브론 버전의 레이커스 유니폼 판매량을 도시별로 집계할 때 놀랍게도 클리블랜드가 무려 전체 4위를 차지했다. 이게 정말 대단한 게 당시 1~3위는 LA, 뉴욕, 오클랜드로 하나같이 인구가 많은 대도시인데, 고작 인구 38만에 불과한 클리블랜드에서 저 순위를 찍었다! 오로지 르브론 하나만 보고 응원팀도 아닌 유니폼을 구매한 클리블랜드 팬들이 상당했다는 뜻으로, 과거 르브론이 마이애미로 이적할 당시 르브론 유니폼을 찢고 불태우던 흑역사를 생각하면 감회가 남다르다 할 수 있다. 또한 르브론이 이적 후 첫 클리블랜드 방문 원정경기에서도 구단에서 헌정 영상을 틀어줬고, 팬들도 기립박수로 화답해줬다. #
계약 3년차인 2020-21 시즌을 앞두고 2년 $85M 연장계약[16]을 체결하며 2022-23시즌까지 레이커스에서 뛸 가능성이 높아졌다. 여기에 2022-23 시즌을 앞두고 2023-24 시즌부터 시작되는 1+1년 97.1M 계약을 추가했다. 2024년 NBA 드래프트에 아들 브로니 제임스가 참가한다면, 브로니를 지명한 팀으로 가기 위해 옵트아웃을 할 가능성이 크다.

2024 NBA 드래프트에서 레이커스가 55픽으로 브로니를 지명했으나, 르브론은 옵트아웃을 하였다. 이후 7월 3일, 레이커스와 1+1년 104M의 계약을 체결했다.[17]

8.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시절

No. 6 & No. 23 르브론 제임스
2018~현재
파일:lebronlakers.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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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가대표

9.1. 2004 아테네 올림픽

9.2. 2008 베이징 올림픽

9.3. 2012 런던 올림픽

9.4. 2024 파리 올림픽

7월 31일, 예선 C조 남수단을 상대로 12득점을 기록하며 승리를 안겼으며 국가대표로는 300득점 달성에 성공한 선수가 되었다.

세르비아와의 준결승전에서 올림픽 역사상 최초로 두번째 트리플 더블(16득점 12리바운드 10어시스트)을 기록하면서 결승전에 진출했다.

파일:르브론 2024 파리 올림픽 금메달.jpg
파일:Lebron James MVP PARIS 2024.jpg
8월 11일, 결승전에서 개최국 프랑스를 상대로 5연패를 달성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이 올림픽을 끝으로 대표팀에서 은퇴했다. 이후 동시에 베스트 5, MVP에 선정되었다.

10. NBA Career Statistics

[ 정규시즌/펼치기 · 접기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시즌 || 경기수 || 시간 || 필드골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락 || 턴오버 || 트루슈팅 || PER ||
03-04 79 39.5 .417 .290 .754 20.9 5.5 5.9 1.6 0.7 3.5 .488 18.3
04-05 80 42.4 .472 .351 .750 27.2 7.4 7.2 2.2 0.7 3.3 .554 25.7
05-06 79 42.5 .480 .335 .738 31.4 7.0 6.6 1.6 0.8 3.3 .568 28.1
06-07 78 40.9 .476 .319 .698 27.3 6.7 6.0 1.6 0.7 3.2 .552 24.5
07-08 75 40.4 .484 .315 .712 30.0 7.9 7.2 1.8 1.1 3.4 .568 29.1
08-09 81 37.7 .489 .344 .780 28.4 7.6 7.2 1.7 1.1 3.0 .591 31.7
09-10 76 39.0 .503 .333 .767 29.7 7.3 8.6 1.6 1.0 3.4 .604 31.1
10-11 79 38.8 .510 .330 .759 26.7 7.5 7.0 1.6 0.6 3.6 .594 27.3
11-12 62 37.5 .531 .362 .771 27.1 7.9 6.2 1.9 0.8 3.4 .605 30.7
12-13 76 37.9 .565 .406 .753 26.8 8.0 7.3 1.7 0.9 3.0 .640 31.6
13-14 77 37.7 .567 .379 .750 27.1 6.9 6.3 1.6 0.3 3.5 .649 29.3
14-15 69 36.1 .488 .354 .710 25.3 6.0 7.4 1.6 0.7 3.9 .577 25.9
15-16 76 35.6 .520 .309 .731 25.3 7.4 6.8 1.4 0.6 3.3 .588 27.5
16-17 74 37.8 .548 .363 .674 26.4 8.6 8.7 1.2 0.6 4.1 .619 27.0
17-18 82 36.9 .542 .367 .731 27.5 8.6 9.1 1.4 0.9 4.2 .621 28.6
18-19 55 35.2 .510 .339 .665 27.4 8.5 8.3 1.3 0.6 3.6 .588 25.6
19-20 67 34.6 .493 .348 .693 25.3 7.8 10.2 1.2 0.5 3.9 .577 25.5
20-21 45 33.4 .513 .365 .698 25.0 7.7 7.8 1.1 0.6 3.7 .602 24.2
21-22 56 37.2 .524 .359 .756 30.3 8.2 6.2 1.3 1.1 3.5 .619 26.2
22-23 55 35.5 .500 .321 .768 28.9 8.3 6.8 0.9 0.6 3.2 .583 23.9
Career 1421 38.1 .505 .345 .735 27.2 7.5 7.3 1.5 0.8 3.5 .588 27.2

[ 플레이오프/펼치기 · 접기 ]
||<table align=center><table width=100%> 시즌 || 경기수 || 시간 || 필드골 || 3점슛 || 자유투 || 득점 || 리바운드 || 어시스트 || 스틸 || 블락 || 턴오버 || 트루슈팅 || PER ||
05-06 13 46.5 .476 .333 .737 30.8 8.1 5.8 1.4 0.7 5.0 .557 23.2
06-07 20 44.7 .416 .280 .755 25.1 8.1 8.0 1.7 0.5 3.3 .516 23.9
07-08 13 42.5 .411 .257 .731 28.2 7.8 7.6 1.8 1.3 4.2 .525 24.3
08-09 14 41.4 .510 .333 .749 35.3 9.1 7.3 1.6 0.9 2.7 .618 37.4[18]
09-10 11 41.8 .502 .400 .733 29.1 9.3 7.6 1.7 1.8 3.8 .607 28.6
10-11 21 43.9 .466 .353 .763 23.7 8.4 5.9 1.7 1.2 3.1 .563 23.7
11-12 23 42.7 .500 .259 .739 30.3 9.7 5.6 1.9 0.7 3.5 .576 30.3
12-13 23 41.7 .491 .375 .777 25.9 8.4 6.6 1.8 0.8 3.0 .585 28.1
13-14 20 38.2 .565 .407 .806 27.4 7.1 4.8 1.8 0.6 3.1 .668 31.0
14-15 20 42.2 .417 .227 .731 30.1 11.3 8.5 1.7 1.1 4.1 .487 25.3
15-16 21 39.1 .525 .340 .661 26.3 9.5 7.6 2.3 1.3 3.6 .585 30.0
16-17 18 41.3 .565 .411 .698 32.8 9.1 7.8 1.9 1.3 4.0 .649 30.1
17-18 22 41.9 .539 .342 .746 34.0 9.1 9.0 1.4 1.0 4.3 .619 32.2
19-20 21 36.3 .560 .370 .720 27.6 10.8 8.8 1.2 0.9 4.0 .647 30.2
20-21 6 37.3 .474 .375 .609 23.3 7.2 8.0 1.5 0.3 4.2 .564 20.2
Career 266 41.5 .495 .337 .740 28.7 9.0 7.2 1.7 0.9 3.7 .583 28.2

11. 관련 문서


[1] MVP는 조던, 빌 러셀(5회)과 카림 압둘자바(6회) 만이, 파이널 MVP는 조던(6회)만이 그보다 많이 수상했다. 올스타와 ALL-NBA 팀은 역대 최다이며, 1st팀으로만 한정해도(13회) 마찬가지이다. 20년 연속 ALL-NBA 팀 선정 및 20년 연속 올스타 선정이라는 대기록도 가지고 있다. [2] 마지막에 내레이터가 르브론의 디시젼을 보고 열받은 나머지 밥상뒤집기를 시전한 것이 그 당시 모든 일들을 압축해준다. [3] 원래는 제이미슨 대신에 스타더마이어를 영입할 생각이었으나 캐벌리어스 측은 J.J 힉슨이 딜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딜은 파토가 났다는 루머가 돌았다. [4] 여담이지만 소프라노스는 2007년에 끝난 드라마다. 즉 르브론의 FA 협상과는 무려 3년전에 끝난 드라마라는 것. 그런데 르브론을 영입하기 위해 무려 소프라노스의 두 주연배우를 섭외해 그가 좋아하는 종영된 드라마를 각색해 다시 촬영했다는 것이다. 뉴욕 닉스가 얼마나 르브론을 원했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수 있다. [5] 사실 이것이 냄새가 예전부터 풍겼던게, CBA규정에 일반적으로 1라운드 지명된 선수가 좋은 활약으로 루키스케일 3년 계약을 마치면 4년차때 맥시멈 연봉으로 5년 계약하는 것이 보통이다.(이런 선수들은 로즈룰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동일 연차인데도 최대기간이 아닌 5년 계약이 아니라 3+1년 계약을 맺었다. 이런 식으로 드래프트 1라운드 특급 유망주들이 뽑힌 팀에 최대 9년을 적정한 연봉에 뛰는 것이 스몰마켓이 스타급 선수를 보유하고 지키는 중요한 보호장치였는데 이들은 어느정도 계획적으로 서로의 스텝을 맞춘 정황이 보인다. [6] 조던이 입단할 때만 해도 시카고 불스는 별볼일이 없던 팀이었고, 조던은 신인시절에 배드 보이즈 디트로이트에게 말그대로 얻어맞으며 여러번 좌절해야 했다. 그 후 불스는 조던의 변함없는 기량과 필 잭슨의 지도력, 스카티 피펜, 호레이스 그랜트의 성장과 함께 약체팀에서 왕조를 만들었다. 올 NBA 퍼스트팀까지 들었던 피펜을 생각해보면 르브론과 환경 자체가 다르긴 했다. [7] 찰스 바클리는 베테랑들이 연달아 은퇴하며 약체가 된 세븐티식서스와, 자신이 중심이 되어 강팀을 만든 피닉스 선즈에서 오랜기간 뛰었고, 데뷔 12년차였던 선수 말년에 우승에 도전하기 위해 결국 실패했지만 휴스턴 로켓츠에 이적했었다. [8] 반대 의견도 있는데, 사실 찰스 바클리 말대로 하다 하다 안돼서 은퇴전에 뭉친팀이 우승을 차지한 케이스는 거의 없으며, 오히려 스타급 선수들이 지나치게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갈 우려가 컸기 때문에 웨이드-제임스-보시가 과연 제대로 굴러갈까라는 의구심도 컸다. 하지만 이 의구심은 마이크 슈셉스키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국가대표팀, 일명 리딤팀을 통해 세명을 완벽하게 한 팀에 녹여내면서 이들이 이상적인 조합임을 증명하며 금메달을 가져왔고, 이를 팻 라일리 에릭 스폴스트라가 가다듬어 완성했다. 이들의 합체 구상은 2008년 올림픽에서부터 나온 셈. [9] 다만 피펜이 처음부터 올타임급 스몰포워드는 아니었다. 5번픽으로 뽑혔으며 신인시절엔 평균 20분씩 뛰는 평범한 선수였으나, 자연스럽게 성장하면서 스타 선수가 된 것이다. 그런데 클리블랜드는 이런 식으로 신인을 키우는게 아니라 이미 네임밸류가 있는 스타들을 데려오려고 하다가 실패한 것이니 사실 1대1로 비교하기가 어렵다. 사실 1980년대 보스턴의 버드-맥헤일-패리시 빅3만 하더라도 그 파괴력이 히트 빅3보다 못하다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슈퍼 유망주이던 버드는 제쳐두고라도 패리시는 합류 당시 평범한 선수였으며, 맥헤일도 신인시절 후보로 시작했으나 자연스럽게 성장해 슈퍼스타가 된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도 많다. 그러나 마이애미는 이미 슈퍼스타로 인정받는 선수들에 합류하는 꼴이 되니 쉬운 길만 찾아간다는 비판을 받는 것이다. [10] 미식축구의 경우 매년 2월 첫 수요일이고, 남자 농구는 매년 11월 둘째주 수요일이다. [11] 여담이지만, 해당 동영상의 주인공인 주주 스미스슈스터는 2017년 NFL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62순위로 피츠버그 스틸러스에 지명되었고, 스타플레어어로 성장했다. 포지션은 와이드 리시버. [12] 그러나 르브론은 마이애미에서 리핏과 통산 2회 우승에는 성공했지만 3-peat와 통산 3회 이상 우승에는 실패하였다. 이로 인해 마이애미의 NBA 왕조 건설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르브론의 저 발언이 디시전 쇼와 제대로 엮이면서 더욱 조롱거리로 전락한 것도 있다. [13] 2009-10 시즌 NBA 플레이오프에서는 보스턴 팬들이 르브론이 자유투를 던질 때마다 뉴욕 닉스라고 연호하기도 했다. [14] 다만 이 편지를 두고 NBA팬들의 의견은 분분한데 마치 영웅의 귀환과 선역으로의 복귀로 드라마틱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있는 반면 굉장히 계산적이고 정치적이라는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다. 각각 농구잡지 점프볼과 루키에서 편집장을 맡고있는 손대범 편집장과 조현일 기자, 해설위원들은 이 편지는 르브론이 전부 쓴게 아닐거라는 의견을 내며 중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NBA잡지 루키의 기자 이승기의 경우는 해당 편지로 르브론 제임스를 비판하는 기사를 실어 극과 극의 반응을 끌어냈다. [15] 사실 편지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서 클블행을 "도전"으로 보기도 뭐하다. 르브론이 클블과 계약하기 전부터 피터 벡시같은 베테랑 기자들이 "르브론이 케빈 러브 합류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으며, 이런 보도가 나온 직후 캐브스가 "위긴스 못준다"던 기존의 태도를 바꿔 "위긴스도 줄수 있다"고 나섰기에 "어빙-러브와 새로운 빅3 결성을 보장받고 클블 이적하는것 아니냐"는 추측이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이애미 빅3는 슈퍼스타들이었으나 13,14시즌을 기점으로 웨이드의 기량이 크게 하락하기 시작한 만큼, "이미 늙어가고 있는 빅3를 버리고 더 젊고 성장하고 있는 빅3를 택했다"는 비판도 있는 상황이다. 이후 나온 "르브론과 사전접촉이 있었다"는 러브의 발언으로 인해 르브론이 새로운 빅3를 약속받고 캐브스에 합류했다는 정황이 확인되었지만 , 템퍼링이 확인된 기사는 아직 없다. [16] 옵션이 없는 순수 보장계약이다. [17] 트레이드 거부권 또한 포함되어 있다고 알려졌다. [18] 사실상 플레이오프 역대 최고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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