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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1 06:53:24

르브론 제임스/선수 경력/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1기

파일:상위 문서 아이콘.svg   상위 문서: 르브론 제임스/선수 경력

1. 개요2. 2003-04 시즌3. 2004-05 시즌4. 2005-06 시즌5. 2006-07 시즌6. 2007-08 시즌7. 2008-09 시즌8. 2009-10 시즌9. 클리블랜드의 문제였는가? 르브론의 문제였는가?10. 수상11.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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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003 드래프트 1라운드 1순위로 지명되어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의 유니폼을 입게 된 르브론 제임스의 2003년부터 2010년까지의 커리어를 정리한 문서이다. 데뷔 초반부터 좋은 활약을 펼치며 클리블랜드를 우승 후보로 올리고 실제로 컨퍼런스 파이널에 2회, 파이널에 1회 진출했지만 우승의 벽은 너무 높았다.[1]

2. 2003-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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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드래프트 유망주 중 르브론은 단연 스포트라이트를 독식했다. 1순위 지명권을 얻기위해서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덴버 너기츠가 꼴찌하기( 탱킹)를 시전할 정도. 심지어 덴버는 미리 르브론을 지명하기도 전에 르브론의 이름이 들어간 유니폼을 제작하는 등 열의를 보였으나, 결국 1순위 지명권은 클리블랜드 차지가 되었다.[2]

클리블랜드는 오랜만에 찾아온 오하이오 주 출생의 프랜차이즈 스타인 르브론을 애지중지 아꼈다. 팀 로스터 구성도 르브론의 입맛에 맞게 구성해주었고, 르브론이 언론에 공격을 받는다 싶으면 아낌없이 실드를 쳐주었다. 르브론도 이런 구단의 배려에 좋은 플레이로 보답했고, 지역봉사를 통해 팬들과 호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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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경기전 파우더를 손에 바르고 이를 허공에 뿌리는 퍼포먼스로 팬들의 환호를 유도하는 장면은 일종의 상징처럼 여겨졌다.

또 팀은 르브론이 프로에 잘 적응하게 하기 위해 2003-04 시즌 인성을 중시하는 폴 실라스를 감독으로 선임했고, 르브론을 위주로 팀이 돌아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리키 데이비스[3]를 트레이드시키기도 했다. 게다가 데이비스는 이후 보스턴 셀틱스와 미네소타 팀버울브스에서 뛰면서 수준급의 스탯에 비해 팀공헌도가 형편없다는게 들통났고 30세도 되기 전에 후보급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해외와 하부 리그를 떠돌다 초라하게 은퇴했다. 개인득점력은 좋았지만 지나치게 이기적이고 팀플레이가 안되는 문제가 있던 선수였다.

팀의 이런 지원에 르브론도 성적으로 보답했다. 르브론은 2003-04 시즌 20.9득점 5.5리바운드 5.9어시스트를 기록하면서 신인상을 수상한다.[4] 우승은 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잘 하지 못하던 팀을 이후 일약 우승 후보 팀으로 만들었다. 데뷔 시즌의 성과는 상당해서 직전 시즌 17승 65패를 했던 팀이 35승 47패로 많은 승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여담으로 당시의 팀은 르브론 이외에도 리키 데이비스가 있었다. 그는 직전시즌 평균 20득점을 기록할 정도로 가능성 있는 슈팅 가드였다. 하지만 르브론의 성공가능성을 확인한 후 시즌 중간에 보스턴으로 트레이드 시킨다. [5]

3. 2004-05 시즌

시즌 직전 팀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던 파워 포워드 카를로스 부저의 배신사건으로 인해서 팀 코어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어수선한 상황이었으나 르브론의 능력은 일취월장해 어리숙했던 돌파 마무리 능력이 리그 정상급으로 발전했고, 정확해진 3점 슛, 야투율이 5% 가까이 증가해서 평균 27득점을 해내는 등의 뛰어난 활약으로 팀을 42승 40패로 이끌었다.

블락과 득점이 가능한 빅맨 Z맨의 헌신적인 골밑 사수로 조금 더 편안한 경기를 할 수 있었고, 트레이드된 포인트 가드 제프 맥키니스 역시도 쏠쏠한 활약을 보여주었다.

최종 성적
27.2득점 7.4리바운드 7.2어시스트 2.2스틸
만 20세 20일의 나이로 역대 최연소 트리플 더블 기록[6]
만 20세 나이로 올-NBA 세컨드 팀에 선정 : NBA 최연소 기록

4. 2005-06 시즌

만 21세 나이로 역대 최연소 올스타전 MVP를 수상했으며 팀은 50승 32패로 성적을 대폭 끌어올렸다. 이 시즌 처음으로 ALL-NBA 1st팀에 입성했으며, MVP 투표에서 표를 받았다.

최종 성적
31.4득점 7.0리바운드 6.6어시스트 1.6스틸

5. 2006-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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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블랜드는 르브론을 앞세워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한다. 당시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상대는 막강한 수비력으로 2000년대를 지배하다 내리막길에 접어든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였다. 르브론은 1차전과 2차전에서 각각 10득점, 19득점에 30%대의 야투율을 기록하는 등 부진하였고 팀도 2연패했다. 그러나 이어진 3차전과 4차전에서 르브론은 부진을 털어내고 승리를 가져왔으며 5차전에는 48득점을 기록하며 디트로이트의 수비를 무너뜨리는 활약을 선보였다. 클리블랜드가 2점 차로 승리한 이 경기는 '디트로이트 침공'으로 불린다.[7] 이후 6차전에서 르브론은 27.3%의 야투율로 20점을 기록하는 아쉬운 모습을 보였지만 다니엘 깁슨이 77.8%의 야투율로 31점을 폭격하며 시리즈를 끝내고 파이널에 진출했다.

파이널 상대는 팀 던컨, 토니 파커, 마누 지노빌리가 있던 당시 최강의 팀 샌안토니오 스퍼스였고 클리블랜드는 4-0 스윕으로 압도적인 패배를 당한다. 클리블랜드에는 르브론 밖에 없었지만 당시 돌파 외에는 별다른 공격 수단이 없었던 르브론은 샌안토니오의 수비에 막히자 별다른 수도 써보지 못하고 시리즈 내내 관광당했다.

샌안토니오에는 8년 연속으로 올-디펜시브 팀을 수상한 수비수인 브루스 보웬이 있었고, 보웬이 1선에서 압박하고 르브론이 돌파하는 순간 스피드가 아직 살아있던 던컨이 순식간에 리커버리 후 샷을 컨테스트 하면서 르브론을 압박했다. 파이널에서 르브론은 스탯상으로는 평균 22득점 7리바운드 6.2어시 1스틸 0.5블락으로 준수해 보였지만 평균 5.8턴오버를 기록했으며 야투율이 35.5%(32/90)밖에 되지 않았다.

결국 이 시리즈는 NBA 역사상 가장 일방적으로 끝난 파이널이 되었으며,[8] 클리블랜드도 르브론도 아무것도 해보지 못하고 박살이 나버렸다. 여담으로 던컨은 4차전이 끝난 이후 르브론에게 '앞으로 이 리그는 너의 것이 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6. 2007-08 시즌

시즌 전, 레이커스가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파우 가솔을 데려왔고, 이에 자극을 받은 다른 팀들도 전력보강을 위해 움직였다. 이에 클리블랜드도 트레이드를 통해 벤 월러스, 월리 저비악, 딜론테 웨스트 등을 받아오며 전력을 보강했다. ALL-NBA 1st팀에 입성했으며, 이 시즌부터 캐벌리어스 2기가 끝난 2017-18시즌까지 무려 11년 연속으로 퍼스트팀을 지킨다.[9]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보스턴을 만난 르브론은 보스턴의 수비에 고전했다. 7차전 원정 경기에서 45득점을 기록하며 41득점으로 맞불을 놓은 폴 피어스와 쇼다운을 벌였지만 결국 패배해 탈락했다.

7. 2008-09 시즌

클리블랜드는 모 윌리엄스를 받아와 전력을 강화했다. 르브론을 골자로 하여 롤플레이어들이 갖추어지면서 정규 시즌에 클리블랜드는 강력한 모습을 보였고, 지난 시즌 45승을 거뒀던 팀이 무려 21승을 더 보태며 66승 16패로 창단 최초 정규 시즌 전체 1위라는 엄청난 성적을 냈다. 르브론 역시 MVP를 차지하는 등 최고의 정규 시즌을 보냈다. 2008-09 시즌의 르브론 제임스는 31.67의 PER을 기록했는데 이는 단일 시즌 PER 순위에서 역대 7위의 기록이다.

클리블랜드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와 2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 애틀란타 호크스를 연달아 스윕하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올랜도 매직을 상대했다. 드와이트 하워드를 상대로 르브론은 WS/48 0.399, PER 37.4을 기록하며 맞섰다.

시리즈의 분수령은 사실상 1차전이었는데, 클리블랜드 홈에서 치러진 경기는 클리블랜드가 그야말로 전반전을 압도적으로 잘 풀어나갔고 2쿼터에서 모 윌리엄스의 말도 안되는 하프코트 버저비터가 들어가며 이 시리즈도 쉽게 풀어가나 했다. 그러나 전열을 정비하고 나온 올랜도가 후반전에 반격을 가하면서 클리블랜드의 수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경기는 묘한 방향으로 흘렀다. 그래도 경기 종료 25.6초 전 르브론은 팀이 1점 차로 뒤처지고 있는 가운데 하워드에게 앤드원을 얻어내고 하워드가 6파울 아웃을 당하며 승기를 잡았다. 자유투까지 성공시키며 2점 차로 역전하여 그렇게 클리블랜드의 승리로 끝나나 했는데, 라샤드 루이스의 기가 막힌 역전 3점 슛이 터져버렸다. 이후 클리블랜드는 딜론테 웨스트의 오픈 3점 슛이 아깝게 들어가지 않았고, 경기종료 1초를 남기고 일어난 점프볼에서 모 윌리엄스가 공을 따내 터프샷을 시도했지만 실패하며 르브론이 49득점을 퍼부었음에도 불구하고 1점 차로 패배했다.

이후 2차전에는 종료 1초전 히도 터코글루의 클러치샷으로 2점 차로 뒤처졌다가 종료를 1초 남기고 르브론이 역전 3점 버저비터를 넣어 1점 차 승리를 가져왔다. 그러나 올랜도 원정 세 경기를 전부 패배하며 탈락했다. 이때 컨퍼런스 파이널을 넘었다면 코비 브라이언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격돌하는 상황이었다. 2009년 플레이오프 직전부터 이 두 사람의 파이널 맞대결 성사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리그 최고의 스타들끼리의 격돌이 무산된 것이다. 이후 코비 브라이언트의 은퇴 시즌에 르브론은 관련 인터뷰에서 코비는 자신의 할 일을 다했지만 본인 때문에 파이널에서 만나지 못해 아쉽다며 이때를 언급했다. 더불어 클리블랜드 팬들에게도 정규 시즌과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는 파죽지세여서 창단 첫 우승에 대한 기대감이 굉장히 컸던 만큼, 아쉬움도 컸다.

8. 2009-10 시즌

클리블랜드는 샤킬 오닐을 데려오고, 트레이드 데드라인을 맞추어서 앤트완 재미슨까지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하는 등 우승을 위해 사활을 걸었고 르브론 개인으로서도 시즌 MVP를 두 시즌 연속 수상했지만, 2라운드에서 르브론의 부진과 함께 보스턴 셀틱스에게 매우 무기력하게 탈락했다. 이에 찰스 바클리는 평소보다 약한 모습을 보인 르브론에게 쓴소리를 남겼다.

이때도 지난 시즌과 마찬가지로 컨퍼런스 파이널을 넘었다면 코비 브라이언트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격돌하는 상황이었다. 2010년 플레이오프 직전부터 이 두 사람의 파이널 맞대결 성사여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리그 최고의 스타들끼리의 격돌이 다시 한 번 더 무산된 것이다. 거기에 이 시즌 같은 팀메이트이자 노장이었던 샤킬 오닐도 있어서, 만약 파이널에 진출했으면 오닐은 자신의 최전성기인 레이커스 시절 원투펀치 콤비 파트너였던 코비 브라이언트, 그리고 코비의 새로운 원투펀치 파트너인 파우 가솔과도 맞붙을 수 있을수 있었지만 결국 2라운드에서 탈락하면서 그런 기회는 무산되고 말았다. 거기에 오닐은 2010-11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하면서 이 때 파이널에서 코비, 가솔과 맞붙지 못한 것이 더욱 아쉽게 느껴진 팬들도 많았다.

9. 클리블랜드의 문제였는가? 르브론의 문제였는가?

르브론이 클리블랜드에서 뛸 당시, 팀의 지원에 대해서 말하자면 분명 팀은 르브론을 지원하려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당시 클리블랜드는 스몰마켓임에도 불구하고 리그 최상위권의 페이롤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러나 스몰마켓의 클리블랜드는 한계가 있었다. 레이커스같은 빅마켓에 매력적인 도시를 연고지로 하는 팀들이 슈퍼스타를 비교적 수월하게 데려오는 반면에, 매력 없는 스몰마켓 팀들은 리그 최고의 슈퍼스타나, 정말 가치 있는 롤플레이어들은 데려올 수 없었고, 거품이 낀 선수들이나 과거의 S급인 노장들에게 실력 이상의 돈을 줘야 간신히 데려올 수 있는 편이다. 그렇다고 클리블랜드가 같은 상황인 2007 파이널 상대 샌안토니오만큼 스카우팅 능력이 뛰어났냐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래리 휴즈, 월리 저비악, 벤 월러스 등의 선수들을 데려왔지만 A급 선수 3명보다 S급 선수 1명이 더 효율적인 플레이오프에서는 르브론이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식으로 나이가 많거나 어중간한 선수들을 거액을 주고 영입하다 보니, 르브론의 클리블랜드 시절 말년에는 팀의 샐러리 유동성은 엉망이 되고 악성계약으로 가득 차 답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당시 슈퍼스타로서 팀의 선수 영입에 영향을 끼치던 르브론의 책임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몰마켓의 문제가 컸다.[10]

꼬일대로 꼬인 상황에서 경쟁팀인 보스턴 등은 여전히 강력하고, '르브론이 너무 많은 걸 하려고 하니 팀원들이 제 능력을 발휘 못한다.'는 말이 흘러나오는 상황이었다.

10. 수상

11. 관련 문서


[1] 이때 한계를 느낀 르브론은 결국 이적을 선택한다. [2] 여담으로 당시 멤피스는 수년 전의 트레이드를 통해 그 해 지명권을 디트로이트에 보낸 상태였고, 이 지명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은 추첨에서 1순위를 뽑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확률 대로라면 6순위에 불과했던 멤피스의 추첨 순위가 점점 올라가면서 마지막 두 팀에 들게 되었다. 여기서 1순위에 뽑히면 기적적으로 르브론을 지명할 수 있는 상황. 하지만 멤피스는 2순위에 그쳤고, 제리 웨스트 단장이 머리를 감싸쥔 가운데 지명권을 디트로이트에 넘겨야 했다. 한편 희희낙락하며 그 2순위 지명권을 받아든 디트로이트가 카멜로 앤서니, 크리스 보시, 드웨인 웨이드를 거르고 뽑은 선수가 바로 다르코 밀리시치였다... [3] 르브론 제임스 이전 클리블랜드의 주축 득점원이었지만, 멘탈 문제가 심각했고 트리플 더블하려고 자기 골대에 자살골을 던지려는 이상한 짓을 저질렀던 전적이 있고, 수비도 안 좋아서 빛 좋은 개살구였던 선수. [4] 다만 카멜로 앤서니가 신인왕을 받아야 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카멜로는 르브론보다 평균 득점, 평균 리바운드, 평균 턴오버, 야투율, 3점 슛 성공률, 자유투 성공률에서 우위를 점했으며, 덴버 또한 클리블랜드보다 8승을 더 거두었다. [5] 르브론은 포인트 포워드 역할, 리키 데이비스는 3점 슛과 점퍼가 좋은 다재다능한 슈팅 가드. [6] 이 기록은 론조 볼이 이보다 5일 앞선 만 20세 15일로 트리플 더블을 작성하면서 깨졌다. 이후로도 여러번 갱신되었고 현재는 만 19세 84일의 조시 기디가 가지고 있다. [7] 한국에서는 이 시리즈 전체를 디트로이트 침공이라고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확히는 이 한 경기만을 말한다. [8] 본래 두 팀 다 스몰마켓이기도 하고 경기 자체도 너무 일방적이라 스포츠 기자들도 파이널을 안 보고 소프라노스의 마지막 에피소드를 보았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9] 11년 연속 퍼스트팀은 칼 말론과 르브론 제임스 단 둘만이 해낸 전인미답의 고지이다. [10] 물론 스몰마켓 팀인데도 불구하고 좋은 모습을 보이는 오클라호마시티나 샌안토니오도 있지만,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이들과 비교해 능력이 부족했다. 그리고 리그에서 가장 완벽한 프런트를 가진 샌안토니오도 역사상 최고의 파워 포워드로 꼽히는 팀 던컨, 그리고 프랑스 리그에서 주목 받은 토니 파커, 이탈리아 리그와 유럽 대항전에서 검증된 마누 지노빌리를 얻고 나서야 2000년대에 자주 우승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