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의 리그 오브 레전드 프로게이머 'Rekkles'에 대한 내용은 마틴 라르손 문서 참고하십시오.
레클리스 | Reckless 아침해 | 黎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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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0E0E0,#5D5D5D> 출생 | <colbgcolor=#fff,#1f2023> 1948년 7월[1] |
미군정 남한 서울특별자유시 (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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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8년 5월 13일 (향년 19세) |
미국 샌디에이고 | |
품종 | 몽고말 (Mongolian horse) 추정[3] |
성별 | 암컷 |
신체 | 142 cm, 410 kg |
털색 | 밤색(Chestnut) |
대표 자마 |
피어리스 (1957년) 돈틀리스 (1959년) 체스티 (1964년) |
군사 경력 | |
복무 | 미합중국 해병대 |
복무 기간 | 1952년 10월 26일~ 1959년 |
최종 계급 | 하사 (E-6) |
근무 | 제1해병사단 5연대 무반동화기 소대 |
주요 참전 | 6.25 전쟁 네바다 전초 전투 |
서훈 내역 |
디킨 메달 2x 퍼플 하트 2x 대통령 부대표창 해군 부대표창 해병 선행장 국방 종군기장 4x 한국전쟁 종군기장 국제연합 종군기장 |
[기념웹사이트] | [팬_페이스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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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새벽 여명의 연기와 화염 속에서 말의 실루엣을 보고 내 눈을 믿지 못했다. 레클리스였다."
헤럴드 워틀리 예비역 병장. 2013년 레클리스 동상 제막식에서.
헤럴드 워틀리 예비역 병장. 2013년 레클리스 동상 제막식에서.
"말의 본능은 도망치는 것이지만, 레클리스는 전우를 위해 위험한 전장으로 달려갔다."
로빈 허튼, Sgt. Reckless: America’s War Horse의 저자.
로빈 허튼, Sgt. Reckless: America’s War Horse의 저자.
"레클리스는 베가스 전초에서 싸웠던 모든 해병의 말이었고, 용맹한 활약으로 모두에게 사랑받았다."
출처: 제1해병사단 공문 050706Z, Andrew Geer, Reckless: Pride of the Marines, p.165-166
한국전쟁 당시 전선의 최일선에서 활약하며 가히 비범한
용기와
인내, 영리함으로 그 이름을 드높인
군마. 원래 이름은 아침해였으나, 겁없이 무모할 정도로 용감한 성격을 본떠[7] 미군 병사들이 '레클리스(Reckless, 무모한 자)'라는 이름을 새로이 붙여주었다.출처: 제1해병사단 공문 050706Z, Andrew Geer, Reckless: Pride of the Marines, p.165-166
6.25 전쟁 당시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군마로서 탄약과 무기를 수송하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해낸 공로로 1959년 미 해병대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부사관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계급은 하사.
2. 생애[8]
원래 레클리스는 6.25 전쟁 전에는 서울 신설동 서울경마장에서 아침해라는 이름의 경주마로 지내온 제주 암말의 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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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설동 경마장 풍경 |
김혁문은 8살 나이에 가족과 함께 우연히 신설동 경마장을 지나다가 경기장에서 한 적갈색 암말을 본 뒤 말이라는 동물에 완전히 매료되었고, 이 적갈색 암말의 일본인 마주와 기수의 눈에 띄어 귀여움을 받으며 경마를 구경할 수 있었다. 기수가 거친 수말에 기승하다가 낙마할 위기에 처하자 수말의 고삐를 붙잡고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 진정시켜 기수의 목숨을 구하였는데, 이 일에 대한 보답으로 적갈색 암말의 견습 구무원이 되어 조련사와 기수 훈련을 받았다.[10] 이 적갈색 암말에는 일본 이름이 따로 있었으나, 김혁문은 이 말을 아침해라고 불렀고, 마주와 기수도 이 이름으로 불렀다.[11]
아침해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여러 경주에서 1착을 기록한 명마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기병대 대령인 마주와 대위인 기수는 전사하였고, 더 이상 마주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된 김혁문은 짐말을 돌보는 역할로 강제 징용되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다른 일본인 조련사들로부터 멸시당하는 지옥같은 몇년을 보내게 된다. 아침해를 비롯한 경주마들도 짐말로 징발되어 전쟁 끝에는 마체가 망가질 정도로 혹사당하였다. 다행히도 아침해는 김혁문의 필사적인 보살핌 끝에 몸이 회복되고 김혁문을 기수로 태우면서 은퇴전을 치를 수 있었다.
은퇴 후에는 아침해에게 걸맞은 수말을 붙여주어 혈통을 이어가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아침해는 첫번째 새끼를 낳은 지 3일만에 산후열로 사망하고 만다. 어미를 너무나도 닮은[12] 망아지의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김혁문은 삶의 의지를 잃고 근 1년간 망아지를 다른 망아지들과 함께 방치하다시피 하였으나, 이 망아지가 어미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임을 깨닫고, 어미의 이름을 따와 아침해라고 이름 붙였다. (어미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기 때문에 엄밀히는 아침해 2세가 진짜 이름이라 볼 수 있다.)[13] 본격적으로 훈련을 시작한 아침해는 어미보다도 더욱 영특하여 훈련을 잘 따랐고 한번 훈련받은 내용을 잊어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김혁문은 자신이 사랑하던 암말의 유일한 혈육인 아침해를 무척 아꼈고, 다른 망아지들과 같이 달리는 병주 훈련을 할 때 더 빠르고 힘차게 나아가는 것을 즐기면서 1950년 7월에 치를 예정인 데뷔전을 준비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신익희를 기념하는 일요일의 7번째 경주가 열린 후 신설동 경마장은 폐쇄되었고 아침해에게는 데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6.25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후 김혁문의 가족이 피난을 갈 때 아침해는 수레를 끌고 가족을 한명씩 태우며 영등포 방면으로 한강을 헤엄쳐 건너서[14] 서울을 탈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부산까지 당도했다. 부산에서 김혁문과 아침해는 항구에서 군수품을 하역하고 운송하는 일을 했다. 이후 국군이 북진에 성공하면서 김혁문 일가는 1952년에 서울로 되돌아올 수 있었다.[15] 하지만 누나 김정숙이 지뢰를 밟아 다리를 잃자 의족을 구하기 위해서 결국 아침해를 미해병대에게 팔게 된다.[16]
미해병 1사단 5연대 무반동화기소대 에릭 페더슨(Eric Pederson) 중위[17]는 발사 이후 진지 전환을 해야하는 무반동총[18]을 따라가며 탄약을 나르는 탄약병들이 다른 해병들보다 먼저 지치는 것을 확인하자, 진지 주변의 거친 지형을 뚫고 탄약을 나를 수 있는 수송용 군마를 찾다가 아침해를 발견하고 250달러에 구입하였다. 이후 아침해는 1952년 10월 26일자로 미 해병대에 입대하였다.
2.1. 전쟁의 포화 속에서[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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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는 전투중 탄약을 운반하는 위험천만한 임무인 탄약수송병을 맡게 되는데, 400kg의 이 작은 암말[21]은 총알과 포탄이 날아오는 전장에서 무거운 탄약더미를 부지런히 나르며 임무를 수행했다. 무반동포 소대가 사용하던 M20 무반동포의 탄약 중량은 발당 9kg 가량이었는데, 레클리스는 이를 한 번에 최대 12발까지 실어나를 수 있었다. 차량이 달릴 수 없는 한반도 전방의 험준한 산지에 적이 접근하기 힘들도록 만든 진지 주변의 거친 지형과 진창같은 논밭을 문제없이 달리며 포탄을 옮길 수 있었고, 다른 말과는 달리 무척 영리해서 1~2번 같이 동행하면 그 뒤에는 혼자 보내도 알아서 길을 찾아갔다.[22] 적의 사격이 시작되면 엎드려서 사격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았고, 참호에 피신하는 훈련을 받은 뒤로 포격이 시작되거나 " 포격이다! (Incoming!)"라고 동료가 외치면 알아서 참호에 들어가 엎드려 피했다. 무반동포의 발사를 처음 목격했을 때는 후폭풍과 발사음에 깜짝 놀라서 두 발로 설 정도로 뛰어올랐으나, 두 번째 발사 이후부터는 진정하였고, 그 뒤로는 주변에서 발사되더라도 놀라지 않아서 이름값을 한다는 칭찬을 들었다.[23] 원래 말은 겁이 많은 동물인데 레클리스는 유독 겁이 없는 별종이었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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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다 전초 전투는 1953년 3월 26일부터 30일까지
판문점 동북방 16km 지점인 현(現)
연천군
백학면 매현리 지역인 네바다 전초[25]를 방어 중이던 美 해병 제1사단 제5해병연대가 전초진지로 침공한 중공군 제120사단을 격퇴하기 위하여 전개한 방어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미 제5해병연대는 3월 26일 밤 중공군의 기습적인 공격을 받고 베가스 전초와 레노 전초를 상실한 후, 제7해병연대 1개 대대와
포병 및
공군의 지원하에 역습을 감행하였으나 되찾지 못했다. 이에 미군은 레노 전초 탈환을 일단 보류하고 베가스 전초를 집중적으로 공격하여 목표를 탈취하였으며, 그 후 중공군이 3일 동안에 걸친 재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미해병대는 끝까지 베가스 전초를 확보하고 중공군 제 120사단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의 사상자 수는 1,300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美 해병 부대도 118명이 전사하고 801명 부상에 실종 98명의 손실을 입었다. 베가스 전초는 가히 피로 지킨 고지였다.
레클리스가 탄약을 날라야 했던 무반동총 소대들은 베가스 전초에 최대한 빠르게 포탄을 퍼부어야 하는 작전 특성상 진지 전환을 하지 못하고 같은 자리에서 사격을 계속해야 했다. 당연히 진지 주변에는 무반동총을 무력화시키려는 총격과 포격이 비처럼 쏟아졌고, 이들에게 포탄을 날라다주는 레클리스 역시 최중요 목표였기에 중공군의 조준사격을 당했다. 레클리스의 등에 포탄을 실어주는 탄약보급소 장병들은 이번이 레클리스의 마지막 임무이고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처럼 느끼며 숙연해하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레클리스는 기적처럼 생환하였다.
5일간 전투중 무반동총 사격이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1953년 3월 27일에 레클리스는 총 51회, 거리로는 56km를 적의 총탄이 쏟아지는 가운데에서도 위험을 무릅쓰고 왕복하면서 임무를 수행하였고, 이 날 사용한 무반동총 포탄의 95%인 386발, 9천파운드(약 4000kg, 4톤) 달하는 탄약을 혼자서 운반하였다. 덕분에 장병들은 무반동총 중 하나의 포신이 과열로 녹아내릴 정도로 충분한 양의 포탄을 받아 끊임없이 사격을 계속할 수 있었다.[26] 당시 미 해병대 Babbit 상사는 "암갈색 몸매에 하얀 얼굴을 한 레클리스가 말 없이 총탄을 뚫고 생명과 같은 포탄을 날라주는 모습을 보고 모두 감동해서 사기가 진작되어 적을 괴멸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전한다.
작전 도중 레클리스는 2군데(왼쪽 눈 위, 왼쪽 둔부)에 파편상을 입어 피투성이가 된 적이 있다. 일반적인 말이었으면 임무 재개가 불가능했을만한 부상이었지만[27], 레클리스는 치료와 약간의 휴식만을 받은 뒤 끝까지 임무를 완수했다.[28] 이 일로 퍼플 하트를 2회 수여받았다. 또한 중공군의 백린섬광탄이 지근거리에 터졌을 때도 페더슨 중위가 자신의 방탄조끼로 눈을 가려주자 침착하게 기다린 뒤 임무를 속개했고, 수송 작전 하루 후인 3월 28일에는 30미터 거리에 또다시 백린 연막탄이 떨어졌음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고 동료 해병의 인솔하에 안전하게 위험 지역을 떠났다.[29] 사람도 트라우마를 겪을 만한 눈 주위 부상이나 백린탄 공격 등을 당한 뒤에 전선으로 복귀한 것은 일반적인 말의 범주를 넘어서는 정말 대범한 일이다. 터프함과 전우애를 미덕으로 여기는 해병대는 이런 레클리스의 침착함과 인내심을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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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의무부사관의 보살핌을 받는 중.[30] |
자유시간에는 주둔지 내부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면서 붙임성 있는 성격으로 동료 해병들과 놀거나 텐트에 들어가 함께 자기도 했다. 겨울에 추울 때는 사육사인 레이텀 중사의 텐트에 들어가 난로를 쬐며 쉬었다. 네발 달린 전우를 배려하는 뜻에서 레클리스의 등에 타지 못하도록 연대 차원에서 금지령이 내려지기도 했다.( 루이스 풀러 준장에게만은 허용되었다.)[31] 어느날 밤에는 방목지를 혼자 빠져나와 최전선에 있는 다른 소대의 참호까지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무반동포 소대는 이미 자신의 존재에 너무 익숙해져서 무덤덤했기에 다른 소대로 가서 관심을 받고 싶어했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여기서 레클리스는 장병들이 꿍쳐둔 C-레이션 간식을 같이 먹으며 장병들에게 심신의 안정을 주는 마스코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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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식 중 초콜릿과 맥주를 즐기는 레클리스 |
먹을 것처럼 보이는 것은 뭐든 입에 넣어보는 습관이 있어서 레클리스의 주변에는 음식물을 두고갈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미국에 도착한 날에는 기념식에서 꽃 장식과 케이크도 먹었다. 심지어 초콜릿[39], 철모의 내피, 호주군 군모, 자신이 입을 말 담요와 조련사의 포커 칩도 먹은 일이 있었다. 포커 칩을 먹기 직전에는 조련사가 겨드랑이에 끼운 담배갑을 먹으려고 물어서 조련사가 식겁하며 말렸다고 한다.[40]
2.2. 휴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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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1950년대 당시 레클리스는 아크 링크레터 쇼를 비롯한 유명 TV 프로그램에서 얼굴을 비추고 라이프(Life)지에도 기사가 실리는 등, 일반인들도 이름과 활약상을 잘 아는 슈퍼스타 취급을 받았다. 레클리스의 가족력과 전쟁 전후 생애는 1사단 5연대 2대대의 대대장이었던 앤드류 기어(Andrew Geer) 중령에 의해 정리되고 Reckless: Pride of the Marines[41]라는 이름으로 편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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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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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경주마의 명예의 전당 격인 켄터키주 렉싱턴 호스파크에도 동상이 세워졌다. 이로써 알 수 있듯 무려 4차례(미국 3회, 국내 1회)에 걸쳐 동상이 세워질 정도로 영웅 대접을 받은 말이다.
케모노 프렌즈 팬덤에서는 국내 뉴스로 재조명된 이 사연을 듣고 팬아트를 그리기도 하였다. #
제주경마공원에서는 2024년 10월 26일 토요일 5경주, 제주마 1등급 1300m 경주를 <호국영웅 레클리스 기념 경주>로 시행하였다.
3.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 김구라의 라떼9에도 언급되었다.
4. 같이 보기
[1]
남반구가 아닌 지역임에도 7월에 태어난 경주마다.
[2]
어머니가 서울 경마장의 말이었다 하니 서울 출생은 맞다.
[3]
키와 몸무게를 기반으로 추정. 몽고말은 과거 경주마였지만 흔하게 자주 쓰이는
서러브레드 품종이 아니다. 제주마와 서러브레드의 혼혈인 한라마로 추정하기도 한다.
[4]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는 잘못된 정보가 인터넷 상에 퍼져 있는데 행정안전부 상훈담당관실에서, “군마 레클리스의 대통령표창 수여기록이 없음”을 확인해 주었으며 관련
언론 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은 아닐지라도 상징적인 공로훈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이마저도 잘못된 정보이다. 왜냐하면 행정안전부 상훈관리실에서 군견(린틴, 헌트, 노도)에게 무공훈장 수여 관련 사실관계 확인 민원에서 아래와 같이 답변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정부포상은 헌법, 상훈법, 정부표창규정(대통령령), 정부포상업무지침을 근거로 하여 운영되고 있으며, 그 대상은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적을 세운 사람'으로 규정(상훈법 제2조)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동물에게 대한민국 훈장이 수여된 사실이 없으며, 군견(린틴, 헌트, 노도)에게 무공훈장이 수여됐다는 인터넷 정보는 잘못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기념웹사이트]
[팬_페이스북]
[7]
원래 말은 겁이 많은 편이다.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군마를 담당하던 말지기의 가장 중요한 업무는 말이 큰 소리를 들어도 기수를 낙마시키지 않는 훈련과, 말에게
마갑의 개념을 인지시켜 번쩍이는 병장기 앞으로 주저없이 돌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일이었다. 인류가 말은 그렇게 많이 키웠음에도 이런 용감한 적성을 지닌 말이 소수인데다가 여기에 열이면 열 마리가 이 훈련을 통과하는게 아니니, 인류는 군마의 공급부족을 항상 달고 살았다. 별도의 군마화 훈련없이 총알과 포탄이 날아드는 전장 한복판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전투 물자를 수송한 레클리스가 정말 놀라울 정도로 강심장인 것이다.
[8]
Reckless: Pride of the Marines, Andrew Geer, 1955, Part One, p.15-119. 저자 앤드류 기어 중령을 비롯한 미 해병대원들이 전 마주의 언급만 듣고 기록한 생애인데다, 전 마주가 자신의 본명을 비롯한 실제 사연을 드러내기 꺼렸기에 아래의 이야기에 각색이 있을 수 밖에 없음을 저자인 기어 중령도 인정하고 있다. (Geer 1955, p.14) 일단 레클리스는
한국마사회같은 한국 쪽 기록으로는 공식적으로 경주마로서 기록이 없다. (다만 신설동 경마장 시절 자료는 원체 구하기 어렵기도 하고, 경주마로 데뷔하기 전에 입대했기 때문에 기록이 없는거 아니냐는 주장이 있기도 하다.) 어미였던 아침해의 혈통과 전적은 관련 자료가 없기에 불명이며, 레클리스의 혈통과 정확한 품종 또한 알려지지 않았다.
[9]
작가에 의해 가명이라고 명시되어있고, 본명은 알려지지 않았다.
[10]
그냥 일만 시킨 것이 아니라 견습으로 들어갈 때 50엔의 계약금을 주기까지 했다. 이 당시 김혁문의 가족은 모아둔 돈이 15엔이 채 되지 않았고, 월 15전인 보통학교 학비조차 버거워하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일본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탐탁지 않게 여기며 김혁문에게 맡기기만 했다.
[11]
일본인들은 발음을 어려워하여 불꽃(Flame)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고 하는데, 해를 히(火)로 발음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12]
다 자란 후 어미와 외모가 다른 부분은 오른쪽 앞발의 색이 갈색이었다는 것 뿐이라고 한다.
[13]
이 망아지 시절에 들개한테 습격당한 일이 있었는데, 이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었는지 이후로도 개나 개과 동물을 보면 다 죽여버리려 할 정도로 날뛰었다고 한다.
#
[14]
한강의 수위가 21세기 현재처럼 깊어진 것은 1987년에
김포대교와
잠실대교에 수중보가 설치된 후이다. 1950년에는 상대적으로 수위가 낮아 말이 그나마 헤엄쳐 건너갈 수 있는 수준이었다. 레클리스 덕분에 김혁문 일가는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이 벌어지기 전 서울을 탈출할 수 있었다.
[15]
Geer 1955, 80-84
[16]
김혁문이 아침해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약 1년 후 해병대 장병들이 새 편자를 갈기 위해 서울경기장을 찾아왔을 때였다. 경마장에 있던 사람들은 망아지 시절부터 지켜봤던 아침해를 기억하며 환영해주었고, 장제사 일을 하던 김혁문은 아침해가 왔다는 소식에 헐레벌떡 뛰어와서 서로를 알아보고 머리를 맞대며 재회하였다. 하지만 해병대 장병들은 후술할 페더슨 중위가 아닌 사육사 레이텀 중사의 인솔하에 있었기에 장제사가 아침해의 전 마주였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일이 끝났을 때 레클리스의 발굽은 말끔히 정리되었고 장제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후 김혁문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Geer 1955, p.145-146)
[17]
페더슨 장비를 발명한
존 페더슨의 아들.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한
사병 출신 장교이다.
[18]
무반동총은 직사 화기이고 발사시 대량의 후폭풍이 발생하기 때문에 발사 즉시 위치가 노출되었다. 따라서 진지 전환을 하지 않으면 박격포와 포격의 일차 목표가 되었다.
[19]
Geer 1955, Part 2, p.90-151
[20]
"위험천만한, 무모한" 이라는 형용사로, 무반동총(recoilless gun)과 발음이 유사한 데서 나온 언어유희. 실제로 무반동총은 무겁고 관통력이 약한데 반해 후폭풍 반경은 커서 위치가 노출되기 쉬운 상당히 위험한 무기였다.
[21]
일반인에게 익숙한
서러브레드의 평균 체중은 약 450kg이며 440kg 이하일 경우 작다고 인식된다.
[22]
레클리스는 아직 아침해였던 시절, 서울에서 피난을 갈 때 한강을 혼자 헤엄쳐 수차례 건너면서 김혁문 일가를 한명씩 태워다 준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23]
Geer 1955, p.104-109
[24]
레클리스는 아침해였던 시절 혼란스러운 피난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 김혁문의 가족을 태우고 한강을 왕복해서 헤엄쳐 건너간 강심장이었다.
[25]
베가스 전초,
리노 전초,
카슨 전초. 이 지점을 성공적으로 방어한다는 것은 도박이라는 현지 지휘관의 심정에 따라 도박과 관련된 지명 이름이 붙었다.
[26]
Geer 1955, p.133-139
[27]
말은 고통에 대단히 민감한 동물이고, 기억력이 좋아서
PTSD도 심하게 겪기 때문에, 특정 지점에서 큰 고통을 받으면 해당 지점을 기억하고 되도록 다시 가지 않으려고 한다. 따라서 말을 훈련시킬 때는 최대한 고통을 주는 일이 없도록 각별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실제로도 기적의 명마라는 이명까지 얻은
토카이 테이오는 잦은 골절로 고생을 했고 그 때문인지 의사를 무척 싫어했으며 하얀 옷을 입은 사람만 봐도 의사로 오인해 난동을 부린적이 있다. 비슷하게 일본 경마 역사에서 가장 개선문상에 가까웠다고 평가받는 황금 세대의 일원,
엘 콘도르 파사 또한 눈밭에서 한번 미끄러져 넘어진 후엔 죽을 때까지 물이나 눈이 조금이라도 고인 곳은 근처에도 가지 않았었다.
[28]
Geer 1955, p.137
[29]
Geer 1955, p.136, 139
[30]
귀가 들어갈 구멍을 뚫은 군모를 종종 선물받았는데, 사진에서 쓰고 있는 호주군의 챙이 넓은 군모는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사진 촬영이 끝난 후 뜯어먹었다고 한다.
[31]
태백 근처에서 모처럼 방목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한 병사가 명령을 무시하고 등에 탄 적이 있는데, 2년여만에 사람을 태우자 예전에 경주마로서 훈련받을 적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갑자기 전력질주를 한동안 하다가 상쾌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 레 클리스 하사님의 지뢰밭 더비
[32]
전 세계 경주마계에서 어마무시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혈통의 시조로
미스터 프로스펙터의 친조부이자
노던 댄서의 외조부이자 일본 2대 아이돌호스인
오구리 캡의 친조부이다. 22전 21승에 2착 1회로 11연승, 10연승과 연대율 100%를 자랑한 명마중의 명마이자,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 회색마인 덕분에 일반인에게도 눈에 잘 띄어서 더 큰 인기를 얻은 최초의 슈퍼스타 경주마였다. 21세기 현재 대다수 미국산 서러브레드에는 네이티브 댄서의 피가 흐르고 있다.
[33]
서러브레드는 속도를 위해 내구성을 희생한 품종이므로, 부담 중량이 65kg을 초과한 상태로 전속력으로 달리면
다리가 부러질 위험이 있다. 따라서 이 말도 안 되는 경기 조건은 귀하게 자란 서러브레드 왕자님은 못하지만, 자신들처럼 전장에서 구른 레클리스는 여태껏 그렇게 해왔다는 자부심을 해병대식으로 표현한 것이며, 레클리스를 자신들과 같은 해병으로 인정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34]
부산의 스펠링을 비틀어 업산(Upsan)으로 적고, 인생사의 굴곡을 나타내는 Ups and Downs에서 따온 말장난. 엡섬 다운즈(Epsom Downs) 경마장의 패러디로도 보인다.
[35]
그리고 미 해병대 측에서 도전장을 보낸 후 며칠 뒤, 네이티브 댄서는 켄터키 더비에서 생애 유일한 패배를 겪었다. (Geer 1955, p.144-145)
[36]
사실 우리가 초식이라 알고 있는 말과 소를 비롯한 거의 모든 초식동물들은 기회만 된다면 육식도 한다. 야생의 풀을 뜯다 보면 수많은 곤충도 자연히 같이 섭취하며, 생쥐 등 작은 동물을 잡아먹기도 한다. 다만 이들의 주식이 식물이며 중, 인간 같은 대형 동물을 사냥감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공격하거나 잡아먹지 않을 뿐이다. 무엇보다 내장기관 특성상 대량의 육식은 적합하지 않다. 그래도 소량이라면 가능하다는 뜻. 현존하는 동물 중 진짜 풀만 먹고 사는 순수 초식동물들은
코알라와
이구아나뿐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포탄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하며 상당한 열량과 단백질을 소모했을 레클리스에겐 건초보단 군인들이 먹을 고단백 고열량 식단이 더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37]
고열량 간식이어서 비만을 방지하기 위해 하루 2병으로 제한해야 했다고 한다.
[38]
몇몇 말들은 주인이 주는 맥주에 맛들려서 즐겨 마시기도 한다.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례는
기네스 흑맥주를 주식처럼 마시고 광고 모델까지 했던 미국의 경주마
젠야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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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초콜릿은
강력한 흥분제로 말에게 독성 물질로 작용하는
테오브로민이 포함되어있어서 소량만 먹어도 심혈관계 이상을 유발할 수 있는데, 레클리스는 신기하게도 포탄을 나른 후 쉬는 시간에 초콜릿을 먹으면서 원기를 찾았다고 한다. 아무래도 격렬한 전장을 오가면서 다져진 건강 덕분에 스트레스를 초콜릿으로 중화할 수 있었던 모양. 다만 병영식 메뉴인 초콜릿 푸딩만큼은 몸에 안 맞아서 먹은 후 설사를 했다고 한다. 다른 해병들도
자신들도 맛없어서 못 먹는 푸딩을 호기심 때문에 먹게 한 것에 미안해 했다고.
[40]
Geer 1955, p.119-120
[41]
해당 책의 1부는 전 마주 김혁문의 일대기를 자세하게 서술하였고, 레클리스가 해병대의 훈련을 잘 따르고 사람과 잘 어울리는 성격으로 자란 것은 전적으로 김혁문의 공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Geer 1955, p.166)
[42]
4성 장군인 해병대사령관과 동등한 예우이다.
[43]
전투 중 부상 입은 군인에게 주는 훈장
[44]
사병이 3년 단위로 일정 수준 이상의 징계를 받지 않을 경우 수여받는 훈장
[45]
함께 선정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조지 워싱턴,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햄 링컨,
존 웨인 등 미국 역사를 함께한 인물들이 즐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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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병대 중에서 가장 많은 훈장을 수여받은
루이스 "체스티" 풀러(
Lewis "Chesty" Puller) 중장의 이름을 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