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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5:12:57

레디메이드 인생


[[채만식|
||<table align=center><table bordercolor=#696969><rowbgcolor=#696969> 파일:채만식 투명.svg ||<color=#fff>채만식
蔡萬植 | CHAE MAN SI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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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목록 ]


1. 개요2. 상세3. 특징
3.1. 레디메이드 인생은 왜 생겼는가?
4. 현대 사회와 레디메이드 인생

1. 개요

채만식 단편소설. 신동아에서 1934년 5월호부터 7월호까지 연재된 작품이다.

2. 상세

"레디메이드 인생이 비로소 겨우 임자를 만나 팔리었구나!"
주인공 P가 아들을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시키며 뱉은 말.[1]
레디메이드(Ready-made)는 기성품을 뜻하는 단어다. 제목의 의미는 학교를 졸업해 사회에는 나왔지만 취직이 되지 않는 불안정한 인생을 완성됐지만 팔리지 않는 기성품에 빗댄 표현이다. 1930년대 지식인들의 높은 실업률을 반영하듯 당시 지식인들의 비애를 그린 소설이다.

당시 채만식 태평천하가 히트치기 전까진 그다지 형편이 좋은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자전적인 요소도 깔려 있으며 일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지식인들에 대한 연민 동정의 시선이 있다.

방세도 못 내면서 담배가게 주인에게 체면이 깎이는 것은 싫다며 비싼 해태 담배를 억지로 구매한 후 후회하는 모습이나 자신의 양복도 모자라 친구의 까지 저당잡아 얻은 돈을 유흥으로 탕진하는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는 구제불능이라는 풍자적인 시선도 드러난다.

뭐 당장 아들을 맡아 키운답시고 학교도 아니고 인쇄소로 일 시키게 된 연유부터가 꼴도 보기 싫은 처가 쪽에는 절대 아이를 못 맡기겠다며 형편도 안 되는 자기 친가 쪽에 어거지로 아이를 맡겨놓았다가 거기서도 도저히 못 데리고 있겠다 싶어서 올려보낸 애를 그 꼴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전 부인이 사정사정을 하면서 애만 자기에게 맡기면 잘 키우며 최소 중학까지는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도[2] 그 꼴은 못 본다며 저런 짓거리를 한 거니 명백한 아동 학대다.[3][4] 그러면서도 "이제야 레디메이드 인생이 제 길을 찾아 팔렸다"고 독백하는 주인공도 이래저래 별로 좋은 인물로 그리진 않았다.

3. 특징

이전의 한국 소설들과 이 작품을 비교해 보면 꽤나 흥미롭다. 이광수 무정이나 은 교육을 받으면 조선 계몽되고 교육받은 지식인들이 농촌에 내려가서 농민들을 깨우쳐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설파했지만 채만식이 보기엔 그런 소리는 헛소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채만식의 인식은 신문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보러 간 주인공에게 일자리를 주기 싫어서 이리 빼고 저리 빼던 신문사 사장이 " 농촌에 가서 계몽운동이나 해라"고 하는 것에서 드러난다.[5] 실제로 작중에서 주인공은 농촌계몽운동은 허상에 불과하며 ' 농민이 우매하다든지 문화가 뒤떨어졌다든지 또 생활이 비참한 것이 근본 원인이 기역 니은을 모른다든가 생활 개선을 할 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는 것에서도 이런 인식을 볼 수 있다.

작중의 모든 인물들의 이름이 아이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알파벳 이니셜인데 이를 두고 '세상의 속세에 물든 어른들이 공장에서 찍혀 나오는 물건들처럼 알파벳 이니셜의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라는 해석도 있고 비슷한 시기에 나왔던 현진건의 빈처(1921)나 B사감과 러브레터(1925) 혹은 유진오의 "김 강사와 T 교수"(1935) 등의 작품들을 보아 그렇게 하는 게 당시의 문화 혹은 유행이었던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당시의 몇몇 소설에서 '그'나 '여(余)'라는 불투명한 주어가 나오는 것을 보면 알파벳 호칭도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이 가설이 맞다면 특정인을 지칭하기보다 호칭을 뭉뚱그려서 이야기의 내용이나 상황이 당시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음을 알려주는 게 목적이었을 수도 있다.

3.1. 레디메이드 인생은 왜 생겼는가?

讀者(독자) : 요새 값싼물건 하나 없을 가요, 年末賞餘金(연말상여금)탄김에 하나 사둘가합니다
記者(기자) : 博士(박사)
1933년 12월 19일 동아일보 조간판 3면에 게재된 '응접실[6]' 기사 한 토막.
간단히 말해 당시 일제가 만들어낸 인종 차별적인 사회 구조가 조선 지식인들의 레디메이드 인생을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소설 초반부에도 작가 채만식은 레디메이드 인생이 만들어진 스토리를 서사식으로 서술하였다. 일제는 조선을 집어삼킨 후 조선인들을 포섭하기 위해 교육을 장려하였다. 소설에서도 나오듯이 "배워라, 배우면 누구나 양반이 된다." 같은 신학문 풍조가 생기면서 전국 각지에서 신식 학교들이 만들어지고 전문학교 진학률이 높아졌으며 좀 잘 사는 집안의 사람들은 일본까지 유학을 가서 대학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런데 문제가 일제는 조선 식민지인들에게 교육을 그렇게 강조했지만 실상은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저항 의식이 꺾인 충성스러운 노예를 키워내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특히 일제 조선인들에게 이공계 쪽의 진로를 크게 제한하였다.

당시 전문학교에서는 농학, 건축학 등 일제 주도의 인프라 개발 인력을 육성하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으며 경성제국대학 종합대학이라는 명목 하에 설치는 하였으나 조선인 쿼터제를 두어 석박사급 취득에도 많은 제약사항을 걸어 두었는데 이조차도 원래는 설치하지 못하게 했으나 일제 말기인 1938년에 들어서야 겨우 설치했을 정도였다.

조선인들이 전자, 기계, 자연과학 등 전문 과학기술을 배우게 되면 일제 산업에 대항할 수 있는 조선 고유의 산업이 만들어지고 일제의 효율적인 식민지 통치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주기 때문이었다.[7]

이 때문에 해방정국에 이공계 출신들이 적었고 그나마 몇 명 남은 사람들도 월북하거나 미국 유학 등의 명목으로 한국을 떠나 1970년대에야 제대로 된 이공계 교육이 시작되었다. 강점기 문인들이 많은 이유도 이것으로 꼽히는데 당대에도 선망받던 의대 이공계에 입학할 수 있었던 똑똑한 이들도 입학이 불허되어 인문학으로밖에 진로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작가 채만식을 비롯하여 일제강점기에 대학물 좀 먹었다는 지식인들은 절대 다수가 문과 출신이었다. 물론 우장춘이나 도상록 같이 이공계 출신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말 극소수였다.[8] 게다가 우장춘은 사실상 일본인이고 해방 후에나 한국 땅을 밟았으며 도상록은 그나마 만주지역 대학 교수가 되었지만 해방 후 월북해 버렸다.

문제는 전술하였다시피 박사학위도 사실상 똥값이 되어 버린 일제강점기에도 문과 나와서는 취직할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제가 고의로 만든 가난하고 빈약한 식민지( 조선) 산업에서 매년 수천명씩 늘어나는 인텔리를 수용할 만한 일자리 확보가 어려운 점이 주요 원인이었지만 일제의 식민지인( 조선인) 차별 취업난에 한몫을 하였다.

특히 고등문관시험,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여 공무원이 돼서 행정계/법조계 계통에 취직을 하고 싶어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사상관계를 철저히 조사받는 등 제약 조건이 많았고 은행이나 증권회사 같은 상경계 일자리는 빽이 있는 소수의 친일반민족행위자나 말단급 고원/용인(심부름꾼)을 제외하면 대부분을 일본인들이 차지했다.

결국 당시 조선인 대학이나 전문학교 나와서 취직할 수 있는 계통은

이런 현실에 절망한 조선 지식인들은 대부분 영원히 팔리지 않는 레디메이드로 인생을 마감( 희망가 항목으로.)하였으며 그 중 일부는 현실에 타협하여 친일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다. 한마디로 일제의 목적대로 저항의식이 꺾인 충성스러운 황국신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채만식 본인조차 일제 말기에는 친일의 유혹에 무너질 정도였다. 그나마 뻔뻔하게 변명이나 늘어놓은 서정주 이광수와는 달리 그는 반성하긴 했다. 그래도 저항한다면 수양동우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처럼 전향 or 감옥살이를 선택하게끔 한다. 윤동주 이육사, 김영랑, 한용운, 신채호, 김창숙, 안창호 같이 끝까지 일제에 저항한 지식인들이 지금까지도 괜히 존경을 받는 게 아니다.

하지만 이들 중에서도 신채호, 안창호 1930년대에 죽었으며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8.15 광복 때까지 살아남지 못하였고 8.15 광복 후까지 살아남은 김영랑 김창숙 김영랑 6.25 전쟁 와중에 사망했으며 김창숙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독재 정권에게 핍박을 받았다. 저항한 몇 명이 있긴 했지만 해방 후 친일 지식인들이 주류가 되는 과정에서 월북해 버려 지금은 사람들이 거의 알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런 사회 구조가 극에 달했던 1930년대에 《레디메이드 인생》이라는 소설이 나왔다. 일제는 효율적인 통치를 위해 '신교육=신분상승' 이라는 환상향을 내세워 식민지 조선인들을 치밀하게 조종하였으며 결국 그 신기루에 낚인 조선인 인텔리들은 일제에 협력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레디메이드 인생이 된 것이다.

4. 현대 사회와 레디메이드 인생

이 소설이 발표된 지 80여 년 뒤인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한국에서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안 되는 현실 그대로 재현되었다. 이 소설이 발표되었던 일제강점기 이후를 보면 대한민국은 비약적인 경제 고도성장을 이룩했고 1980~1990년대 중반까지는 대학 진학률이 낮아서 일단 졸업만 하면 그런대로 대기업에는 무난하게 취직이 된다고 말할 정도였으며 공무원은 대학만 가면 21세기보다도 더 명예롭게 여겨지던 고시를 패스하는 경우가 아니면 줘도 안 갈 정도로 엄청난 호경기였다. 그러나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고용안정성이 떨어지고 대학 진학률이 높아지면서 구직난에 허덕이는 대졸자들이 넘쳐나게 되었다.[12]

국제적으로도 1930년대에는 대공황에 빠졌고 21세기에도 대침체를 맞이했으니 여러모로 공통점이 많다. 특히 소설 말미에도 아들을 인쇄소에 취업시킬 때 인쇄소 사람은 "우리같이 못 배운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식 공부 잘 시키려고 하는데 오히려 배운 당신이 왜 자식을 이런 일로 내모냐"고 묻고 주인공은 "공부해봐야 쓸 데가 없으니 차라리 기술이나 배우는 게 낫다"고 답할 정도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주인공만 하더라도 정작 자신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대낮부터 사글세 방구석에 누워 있는 건 일상이고 호주머니 속의 3원을 만지작거리며 '이것을 두곱만 하면 6원, 12원, 24원, 48원, 96원, 8원 모자르는 200원(192원), 400원, 800원...내가 이런 돈만 있더라면야 날 깔보는 놈들 엉엉 울게 만들수 있지.' 같은 공상을 하며 하루를 보내고 지나가는 여인네를 보면서 상상 속 로맨스를 무궁무진 펼치며 혼자서 낄낄거린다. 어쩌다 한번씩 보는 학교 동창들도 다 똑같은 놈팽이들이라 "올해도 총독부 고원(현재로 치자면 9급 공무원) 채용 시험에 떨어졌어. 이제는 변호사 시험이나 칠려고", "자네가 변호사만 붙으면 내 금방 주식회사 차려서 법률고문으로 모셔오지" 따위의 서로 낄낄거리며 쓰잘데기없는 대화들만 오고갈 뿐이다. 그러다가 심심해지면 시험공부 책을 판 돈으로 술집에 가서 기생들과 먹고 마시고 돈까지 던져가며 노닥거리다가 다음날 숙취로 끙끙 앓으면서도 "아놔 그 계집애 땡잡았네. 그런 년을 불쌍히 여긴 내가 미쳤지.." 이렇게 혀를 끌끌 차는 등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보낸다. 물론 본인도 이런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어하지만 배워서 눈은 높아진지 이미 오래고 정작 시골에 가서 무엇이라도 해 보라는 제안은 듣기 싫어한다. 이는 현재 우리 주변에 널려있는 취준생/공시생/백수와 비교하여 볼 때도 1930년대 일제강점기나 21세기 대한민국이나 사람 생각하는 것은 놀라우리만치 똑같다.[13]

이렇게 사회적/내면적 묘사를 통한 작품의 메시지가 현재에 이르러서도 적용된다는 건 오늘날의 세태를 다시 곱씹게 하는 계기가 되어 준다. 사실 고전의 이유가 이거긴 하다만.[14]


[1] 고향집에서 아들을 도시로 보낸 의도는 일종의 유학이었는데 화자는 바로 학교가 아닌 공장에 보내 버렸다. 아들을 취직시키며 대가를 받거나 한 것은 아니므로 일부의 견해처럼 '팔아먹었다'고 보기는 곤란하다. 다만 아들의 취직을 통해 자신의 '레디메이드한 삶'이 겨우 '팔렸다'고 표현한 것이기 때문에 어떤 의미로는 아들의 취직 = 현재 자신의 처지를 타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판단은 독자 스스로 하자. [2] 전 부인 쪽은 주인공보단 좀 더 잘 산다고 나온다. [3] 물론 이 시절까지만 해도 아이 부모가 여차하면 마음대로 해도 되는 물건 비슷한 인식이 크긴 했다. 21세기에도 좀 더 부유해졌을 따름이지 한국 문화 자체가 부모와 자식은 하나라고 보는 경향이 강해서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고통을 아이에게 투영시키는 풍습이 있다. 좋은 예를 들자면 저출산의 동기가 그런 것이다. 서양만 해도 자신과 아이를 다르게 보기 때문에 하류층도 자식을 가지는 등의 경우가 많다. [4] 다만 현실적으로 주인공의 방침이 옳았다고도 볼 수 있다. 작중 배경인 1930년대에 8살이었던 아들의 상황을 고려하면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돈을 모으는 것이 이후 독립, 6.25 전쟁, 군사정권을 맞이하는 한국의 역사를 감안하면 더 나은 선택지일 수 있다. 특히 독립 시점부터 이미 극심했던 좌우간 이념대립을 감안하면 소위 '지식인 계급'이나 '식자층'으로 편입되는 것이 편안한 삶을 보장하지는 않음을 알 수 있다. 오히려 인쇄소 도제로 들어가 적당한 시점에 늘 상승장이었던 부동산에 일부라도 모은 재산을 투자했다면 별 일 없는 한 죽을 때까지 먹고사는 걱정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훗날의 독자들 입장에선 기묘한 아이러니. [5] 방금 위에 있는 응접실에서 브나로드 운동의 서적을 구할 수 있겠느냐 하니까 본사 서무부로 연락달라고 하는데 그게 바로 이거다. [6] 당시 구독자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기자와 구독자 간의 자유로운 질의응답 코너이다. 참고로 저 질문에 응답한 사람은 천외천(天外天)이라는 필명을 가진 기자였는데 광범위한 지식과 특유의 시니컬한 유머 감각을 바탕으로 글을 써내리는 감각이 워낙 맛깔나면서도 끝까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 가장 인기가 많았던 기자였다. 여담으로 거의 9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봐도 이것저것 재미있는 애드립들도 많이 있다.(물론 중간의 오류도 하나 있다. 바로 일본의 사촌 간 결혼 문답.) [7] 현대에도 다르지 않아서 대부분의 나라들은 국가 간의 관계에 있어서 인문학, 사회과학, 예체능 교류는 몰라도 자국의 과학기술 지식만큼은 반드시 철저하게 보호하며 산업 스파이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자국의 과학기술 해외 유출자는 법적으로도 엄중 처벌할 정도다. 현대 국가들이 이런 판국에 당연히 인종 차별이 심했던 제국주의 국가들이 자신의 식민지 주민들에 고급 기술을 가르칠 리가 없다. [8] 해방 이후 이공계 출신 조선인 인텔리들은 거의 대부분 국가의 중요 인재로 대우받았으며 대학 교수로 임용되었지만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70% 정도가 월북했다. [9] 당시는 인구 100만이 안 되고 문해율도 50%에 한창 못 미쳤다. [10] 일본 제국은 표현의 자유를 철저하게 탄압하던 국가인지라(특히 일본 본토의 언론들과 기자들도 정부에 의해 탄압당하는 게 예사였다.) 기사에서 자칫 조금만 실수해도 경찰서 헌병대에 끌려가 죽도록 고문당했으며 석방되더라도 전과자 꼬리표가 붙어 정상적인 직장은 가질 수도 없는 것은 물론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폐인이 되지 않는다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11] 채만식과 동시대를 살았던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도 묘사되듯이 도시에서 공부한 당대 인텔리들도 졸업 후 시골 학교 교사로 일하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당대에 교사는 현대의 공무원처럼 기본급에 이런저런 추가수당이 붙는 것이 아니라 그 곳 주민들과 같이 농사도 짓고 집도 지어주며 글 읽고 쓸 줄 아는 지식인으로써 마을의 온갖 대소사도 챙겨주는 봉사활동에 가까웠는데 보수는 매우 적었으며 그것마저도 안정적으로 나오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가족을 넘어 한 집안 자체를 책임져야 하는 일제강점기 가장으로서는 견디기 힘들다. [12] 대학 진학률이 높아진 이유 중 하나가 대학설립준칙주의의 발효로 인해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뀌면서 대학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것인데 마침 발효 시기가 1997년 외환 위기 발발 4년 전이었다. [13] 고전의 의미가 이거다. 맨 위에 나온 응접실 애드립이 지금까지도 재미있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고. [14] 다른 하나의 더 큰 조건/이유는 지금 봐도 재미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 수호전, 서유기 등의 고전 소설부터 현대로 오면 고전이라고 불리는 만화/라노벨들이(너무 많으므로 굳이 서술하진 않겠다.) 왜 지금까지 내려오는지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