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계 중국인 관련 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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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뤄쓰족 俄罗斯族 | Russian Chinese | Pусские в Кита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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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명칭 | <colbgcolor=#fff,#2d2f34> [ruby(俄罗斯, ruby= Éluósī)][ruby(族, ruby=zú)] ( 중국어) |
Pусские в Китае/ ( 러시아어) | |
Russian Chinese ( 영어) | |
인구 | 16,136명 (2020) |
주거주지역 | 신장 위구르 자치구, 내몽골 자치구, 헤이룽장성 |
1. 개요
2. 역사
19세기 말 하얼빈과 다롄에 정착한 이들과 청나라 신장성으로 이주한 백여 명 정도의 정교회 구교도들이 시초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하얼빈에서도 하얼빈 혁명이 발발하기도 했다. 러시아인들의 본격적인 중국 이민 계기는 러시아 제국에서 발생한 적백내전이었다. 당시 많은 백군 난민들 수만여 명이 미하일 이바노프 장군을 따라 20세기 초반 중화민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을 백계 러시아인(white émigré)이라고 불렀다. 러시아도 중국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있는 만큼, 러시아인( 슬라브인) 뿐 아니라 러시아에 사는 여러 소수민족들도 하얼빈이나 동튀르키스탄 방면으로 망명하였다.특히 이미 러시아 타운이 구비되어 있던 하르빈을 중심으로 대규모 러시아인 난민 공동체가 형성되었다.[2] 하르빈의 러시아 타운은 소련의 유대인 자치주의 유대인들과 밀접한 관계였는데, 자원이라고는 숲 밖에 없는[3] 유대인 자치주에서 나무를 베서 가구를 만들면, 하르빈에 체류하는 다른 유대인들이 이를 밀수하여 중국인들이나 일본인들에게 판매하는 비즈니스가 번성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발해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를 최초로 주도한 사람들이 바로 러시아계 난민들이었다.
1931년 9월 10일. 일본 관동군이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 근처에서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적으로 벌이기 일주일 전. 하얼빈발 기차에 몸을 싣고 발해 유적 조사를 떠나는 러시아 학자들이 있었다. 중국 정부로부터 제대로 지원도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은 후원금을 모아 어렵게 조사단을 꾸렸다. 그들은 소련이 여권 발급을 거부한 ‘백군파(볼셰비키혁명 때 반혁명 입장에 섰던 부르주아 온건파)’였다. 당시 발해 수도 상경성(上京城) 일대는 비적들이 횡행하는 곳이라서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만주의 역사를 밝히겠다는 일념으로 위험을 감수하며 장정을 감행했다.
이 발굴을 이끈 대표자가 러시아 고고학자 포노소프(V. V. Ponosov)였다. 그는 1899년 우파시에서 태어나 1922년 하얼빈으로 건너온 뒤 40여 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이어받은 당대 최첨단의 고고학자와 생물학자, 지질학자가 많았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넘게 하얼빈에 거주하며 고고학연구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만주의 역사를 발굴하고 조사했다.
그러나 포노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망명자들의 불행한 삶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이용되고 폄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는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동아고고학회’의 등장이 그 단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가 공고히 되자 곧바로 만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에는 그들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아고고학회를 발족했다. 그 비용은 중국이 지불한 ‘의화단 사건 보상금’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선 동아고고학회는 러시아인의 발굴 자료에 기반, 발해 발굴을 시작한다.
“만몽(滿蒙)은 한민족의 영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관계가 밀접하다.”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발해 상경성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켜보고만 있다가 만주국이 성립되자마자 곧바로 발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발해고고학은 만주를 일본의 역사에 연결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조차 발해 발굴의 효시가 하얼빈의 러시아 발굴단이 아니라 동아고고학회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비운의 학자 포노소프는 동아고고학회가 발해 상경성의 발굴을 독점한 이후 더 이상 발해 연구를 하지 못했다. 포노소프는 일찍이 “상경성은 ‘만주의 폼페이’가 될 것”이라고 중대성을 인식했다. 연차 발굴을 기획하고, 이 ‘만주의 폼페이’가 만주 역사연구에 서광을 비출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이름도 잊혀졌다.
1940년대를 전후해 지역 정세가 불안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얼빈의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포노소프는 ‘조사한 자료를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없다’며 중국에 잔류했다. 그리고 1957~61년 중국의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수십 년간에 걸쳐 조사한 유적들을 정리하고 중국인 학자들을 양성한 후에 호주로 이민 갔다. 그가 조사하고 전시한 유물들은 하얼빈시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건물은 그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호주에선 브리즈번의 퀸즐랜드대 인류학 박물관에 근무하며 호주의 고고학에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한 뒤 197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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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발굴을 이끈 대표자가 러시아 고고학자 포노소프(V. V. Ponosov)였다. 그는 1899년 우파시에서 태어나 1922년 하얼빈으로 건너온 뒤 40여 년간 그곳을 중심으로 헤이룽장(黑龍江) 지역의 고고학을 연구했다. 당시 하얼빈에는 유럽의 학문 체계를 이어받은 당대 최첨단의 고고학자와 생물학자, 지질학자가 많았다. 시민혁명의 여파로 제정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들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이다. 그들은 50년 넘게 하얼빈에 거주하며 고고학연구회를 조직해 체계적으로 만주의 역사를 발굴하고 조사했다.
그러나 포노소프를 비롯한 러시아 학자들의 연구 성과는 망명자들의 불행한 삶처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일본과 중국에 의해 이용되고 폄하됐기 때문이다.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는 6개월 뒤인 1932년 3월 만주국이 성립되면서 일본이 만주 침략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동아고고학회’의 등장이 그 단초다. 일본은 한반도에 대한 지배가 공고히 되자 곧바로 만주 쪽으로 눈을 돌렸다. 1925년에는 그들의 침략을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는 동아고고학회를 발족했다. 그 비용은 중국이 지불한 ‘의화단 사건 보상금’으로 운영되었다. 일본의 대륙 침략에 앞장선 동아고고학회는 러시아인의 발굴 자료에 기반, 발해 발굴을 시작한다.
“만몽(滿蒙)은 한민족의 영토가 아니라 오히려 일본과 관계가 밀접하다.”
그렇게 주장하기 시작한 그들은 러시아인들의 발굴 성과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고 무시했다. 동아고고학회는 설립 초기부터 발해 상경성을 발굴하고 싶어 했다. 사정이 여의치 못해 지켜보고만 있다가 만주국이 성립되자마자 곧바로 발굴단을 조직했다. 이때부터 발해고고학은 만주를 일본의 역사에 연결시키려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의 도구로 전락한다. 그리고 오늘날 일본 역사학계는 물론 한국 역사학계조차 발해 발굴의 효시가 하얼빈의 러시아 발굴단이 아니라 동아고고학회로 믿고 있는 실정이다.
비운의 학자 포노소프는 동아고고학회가 발해 상경성의 발굴을 독점한 이후 더 이상 발해 연구를 하지 못했다. 포노소프는 일찍이 “상경성은 ‘만주의 폼페이’가 될 것”이라고 중대성을 인식했다. 연차 발굴을 기획하고, 이 ‘만주의 폼페이’가 만주 역사연구에 서광을 비출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의 이름도 잊혀졌다.
1940년대를 전후해 지역 정세가 불안해지고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하얼빈의 러시아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떠났지만 포노소프는 ‘조사한 자료를 그대로 두고 떠날 수 없다’며 중국에 잔류했다. 그리고 1957~61년 중국의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수십 년간에 걸쳐 조사한 유적들을 정리하고 중국인 학자들을 양성한 후에 호주로 이민 갔다. 그가 조사하고 전시한 유물들은 하얼빈시 헤이룽장성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그 건물은 그가 근무했던 곳이기도 하다. 호주에선 브리즈번의 퀸즐랜드대 인류학 박물관에 근무하며 호주의 고고학에 기틀을 세우는 데 기여한 뒤 1975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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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계 러시아인들은 어느 날 일본이 자신들을 도와 소비에트 정권을 전복시키고 러시아의 군주 체제 및 정통 종교를 회복시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더욱이 하얼빈과 부근 지역에서는 나타나고 있던 혼란과
토비들의 만행이 점증하면서 그들은 신분상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좀 더 강력한 통치 주체가 나타나 사회를 안정시켜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만주에 진주한 이후) 그러한 꿈은 곧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군의 만행이 러시아계 이산자들에게 실망과 두려움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만주를 차지한 일본은 하얼빈의 러시아계 기업, 점포들로 하여금 그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일본인 고문을 앉히고 그들의 월급을 지급하도록 강요했다. 동시에 러시아인 사회 내의 기차역, 항구, 여관, 커피점 등에 비밀 스파이를 고용해 일본에 비판적인 말을 하거나 의심스러운 행동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도록 했다. 이때 ‘반만친소(反滿親蘇)’ 혐의자는 일본 헌병대로부터 고통을 당하거나 구금되었다. 하얼빈의 일본 특무기관에는
정치범을 위한
고문 기구들이 설치되어 있었다.
러시아 여성들이 일본군이나 일본 낭인에게 능욕당하거나 강간당하는 일도 빈발했다. 당시 러시아 부녀자들이 일본군 일본 낭인 헌병 고문 등에게 유린당한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얼빈의 러시아 신문들이 이 사실을 보도하자, 일본 식민 당국은 범죄자에 대해 ‘일본’이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고 만일 위반할 시 정간 폐간 처분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얼빈의 신문에서는 일본인 범죄자를 모두 ‘외인(外人)’으로 표현했다.
출처
러시아 여성들이 일본군이나 일본 낭인에게 능욕당하거나 강간당하는 일도 빈발했다. 당시 러시아 부녀자들이 일본군 일본 낭인 헌병 고문 등에게 유린당한 일은 상상을 초월했다. 하얼빈의 러시아 신문들이 이 사실을 보도하자, 일본 식민 당국은 범죄자에 대해 ‘일본’이라는 글자를 쓰지 못하도록 엄명을 내리고 만일 위반할 시 정간 폐간 처분을 하겠다고 협박했다. 그 일을 계기로 하얼빈의 신문에서는 일본인 범죄자를 모두 ‘외인(外人)’으로 표현했다.
출처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도 러시아인 난민들이 대거 정착했었다. 그러나 철도 교통을 통해 물자를 원활하게 공급받을 수 있었던 하얼빈과 다르게 당시 동튀르키스탄은 물자가 넉넉하지 않았으며, 난민 대부분은 간쑤성을 거쳐 상하이로 이동하거나 알타이 산맥 부근으로 추방당했다. 이후 성스차이의 친소군벌 정권이 신장성을 장악하게 되고 소련 공산당 간부들이 백군 난민 출신 군인들을 지휘하는 웃지 못할 일도 자주 벌어졌다. 백계 러시아 난민들은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에서도 합류하여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동튀르키스탄에 있던 러시아인들 중 상당수는 적백내전 이전에 러시아로 종교 박해 문제로 이주한 고의식파들도 있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중국에 남아있던 고의식파 신도 상당수는 소련으로 압송되어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한다.
동튀르키스탄에서는 친소 성향 군벌 성스차이가 집권하면서 백군 난민들이 소련군 측에 강제 징집당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하얼빈의 러시아인 공동체는 일제의 만주 침공과 만주국 설립 와중에 심한 탄압을 당했으며, 중일전쟁이 격화되는 와중에 하얼빈시에 러시아인들은 1936년 들어선 일본군의 생체실험장 731 부대에 끌려가는 경우가 발생했다. 731 부대 희생자 중 상당수가 하얼빈에서 거주하던 러시아 백군 난민이었다. 일본에서는 이들이 소련군 전쟁 포로라고 날조하고 있으나 피실험자 상당수가 임신부를 포함한 여성이었다. 출처는 영문 위키의 731 부대 항목과 링크 참조 바람 이 와중에 하얼빈의 러시아인 상당수는 기회가 되는 대로 상하이를 통해서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의 최종 행선지는 대개 미국과 캐나다, 서유럽, 호주 등이었다. 당시 상하이시는 중국과 서양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역사 덕분에, 무일푼으로 망명 온 러시아인들에게 이런저런 일자리가 있었다. 서구인들의 상전 노릇에 질렸던 상하이 시민들 사이에서는 보상 심리로 러시아인 여성들을 무희나 하인으로 부리며 푼돈을 주는 일이 유행했으며, 운이 좋으면 음악인이나 프랑스어 교사 같은 괜찮을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다.
러시아인들의 망명은 1937년 상하이마저 일본군에게 점령당하면서 수년간 중지되었었다. 그러나 중일전쟁이 끝나고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상하이 내 러시아인들은 굴라크에 끌려갈 위기에 처하고 이들을 받아준 것이 호주였다. 당시 호주는 백호주의 외교 정책을 펴며 아시아 대륙 방면에서의 이민은 이유와 인종을 불문하고 막았으나,[4] 상술한 것처럼 미국의 러시아 정교회 측에서[5] 호주 정부에 탄원을 넣을 것을 계기로 상당수의 러시아 난민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6]
중국 정부에서 자국 내 러시아인들을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1986년부터이다. #
3. 현황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금발에 파란 눈의 중국인들중국에 남은 러시아인은 점차 동화되어 가고 있는데, 2000년 통계에 의하면 러시아계 중국인과 다른 민족과의 통혼율은 74%에 달했다.이들은 원래부터 혼혈이 많았다. 스탈린이 소련 영토에 살던 중국인 상당수를 친소 군벌 성스차이가 장악했던 신장으로 추방하는 와중에, 해당 중국인들과 결혼했던 러시아인 배우자들과 자녀들이 신장으로 따라간 것 # 성스차이는 이들 중 상당수를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숙청했으나, 러시아인 가족들은 소련과의 외교를 생각하여 건드리지 않았다. 중소관계가 냉각된 이후에는 러시아인들에 대한 차별과 박해가 심각해지면서,[7] 후손들에게나마 차별을 피하게 해 줄 목적으로 일부러 한족과 결혼하는 경우가 흔했다 한다.
중국에 정착해서 중국국적을 지니고 있는 러시아인들의 수가 많지는 않아도 중국에 유학이나 취업, 사업상의 이유로 중국에 있는 러시아인은 꽤 많기는 하다. 중국과 직접 국경을 접한데다가 중국과 러시아와의 교류도 활발하기 때문이다.
4. 알바진인
알바진인이란 중국에 정착한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 후손들도 존재하는데, 이들은 후이족들과 마찬가지로 종교만 다르지 혼혈화되면서 외모에선 중국인들과 차이가 없을 정도이고 문화적으로도 러시아보단 중국과 가깝다. 심지어 언어에서도 러시아어가 아니라 중국어를 사용할 정도이다. 중국 정부에선 이들을 한족으로 분류하고 있다.[8] 이들은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인정받고 싶어하지만 인구가 250여 명으로 따로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분류되기는 어렵다.17세기 청나라에 포로로 잡힌 코사크들 중 러시아로 귀환하는 대신 청나라에 남을 것을 결정한 이들 수십여 명이 그 기원으로 청나라에서는 베이징의 버려진 절 하나를 주고 정교회 성당으로 개조하도록 허락해주었다 한다. 청나라에 포로로 잡힌 코사크들은 모두 남성이었고, 청나라는 이들과 싸우다 전사한 다우르족 미망인들과 재혼하도록 맺어주었다. 이들의 후손들은 베이징에 체류하였는데, 중국인 여성들은 이들이 외양이 특이하다 하여 결혼하기를 꺼렸고, 이 때문에 청나라 조정 관리들은 이들을 몽골족 여성 죄수들과 강제결혼시키곤 했다.
여담으로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청나라 내 러시아인들 관련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아라사라는 종족이 있는데 이들이 키우는 개는 크기가 무척 크고 호랑이나 표범도 사냥할 수 있으며, 이들이 끄는 수레 역시 크기가 매우 크고 부녀자들 역시 기골이 장대하다는 내용이 언급된다.
5. 중국의 러시아계 타타르인
러시아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백인계 타타르인들(특히 볼가 타타르인)의 후손들.[9] 일반적인 러시아계 중국인 및 알바진인과 다르게 이슬람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우즈베크인이나 위구르족 같은 중국의 다른 무슬림 민족들과 가깝다.
물론 말 그대로 러시아에서 이주해왔기 때문에 신장 지역에 거주하던 다른 무슬림 민족들에 비해 교육 수준이 높은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이슬람 모더니즘 성향의 학교를 운영하면서 위구르, 카자흐족들의 민족주의 발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들의 영향으로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비교적 소득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교육수준은 오히려 평균보다 더 높은 편이다. 보통 중국 내에서 인구 수가 얼마 되지 않는 소수민족들이 미분류민족으로 대충 처리되는 것과 반대로 인구 수가 얼마 되지 않음에도 독자적인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었다.
러시아계 중국인들이 같은 러시아인끼리 결혼하는 경우보다는 중국 내 다른 민족들과 결혼하는 경우가 많은 것처럼 중국 내 러시아계 타타르인들도 위구르인, 카자흐인, 후이족 등 중화인민공화국 내 무슬림 민족들하고 통혼하는 경우가 많으며 일부는 아예 한족, 몽골족, 만주족 등 비무슬림 민족과 통혼하기도 한다. 1930~40년대부터 60년대 찍힌 타타르인 사진들은 백인 외양이 좀 더 강하다면 세대가 지날수록 사진에 나온 것처럼 외양이 유라시안 민족인 우즈베크인, 위구르인, 투르크멘인과 흡사해진다. 아예 일반적인 중국인과 전혀 차이없는 외모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중국의 러시아계 타타르인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부르한 샤히디가 있다.
신장성 이외에 만주 하얼빈에서도 타타르족들은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다. 동방 철도를 경비하기 위해 파견한 타타르 군인들을 위해 하얼빈에 모스크가 건설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더 많은 타타르 무슬림들이 하얼빈으로 들어왔다. 한 때 하얼빈의 타타르인들은 타타르어로 된 신문을 인쇄하고 학교를 열고 금요일 합동 예배를 근행하기도 하였다. 하얼빈의 타타르족들은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점차 하얼빈을 떠나 다른 지역 혹은 다른 나라로 이주하기 시작하였고, 타타르인들이 남기고 떠난 모스크는 공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임대되었다. 오늘날 하얼빈에 남은 타타르인 인구는 노인 몇 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
6. 중국의 러시아계 유대인
러시아 제국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건설하는 와중에 하얼빈에도 철도를 건설하였는데, 이 과정에 하얼빈에 러시아 타운이 생기고, 적백내전 과정에서 러시아계 아슈케나지 유대인을 포함한 백계 러시아인 난민 상당수가 중국으로 피난한 케이스이다. 2차대전 당시 일본에서 하얼빈 731부대를 운영하면서 생체실험 대상으로 끌려가는 등 수난을 겪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일본 정부는 나치 독일과 다르게 유대인 완전 박멸까지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10] 하얼빈 외 지역에 거주하던 러시아계 유대인들은 수난을 덜 겪는 편이었다.[11] 러시아계 유대인 상당수는 하얼빈이나 신장에서 상하이를 거쳐 미국이나 호주 등으로 이민하였고, 미처 이민가지 못하고 남아있던 경우 상당수는 국공내전 이후 소련으로 다시 끌려가서 수용소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풀려나 소련에 재정착한 경우도 꽤 있었다고 한다.
물론 소련에서 파견된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미하일 보로딘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보로딘의 경우 엄밀히 말하면 벨라루스 출신 유대인이긴 한데, 러시아 제국과 그 후신 소련의 유대인들이 대부분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 지역 출신이기도 하고, 당시 기준으로는 따로 벨라루스인이나 우크라이나인 정체성이 없는 경우가 많아서[12] 그냥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분류되는 편이다.
유대교를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는 카이펑 유대인과 가깝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나, 카이펑 유대인은 유대교 관련 지식이나 율법 상당수를 소실한 상황이다.[13] 오히려 러시아계 유대인과 인도계 유대인이 차라리 더 가깝다고 보면 된다.
7. 번외
중국 본토를 제외한 다른 중화권의 러시아계 주민들.7.1. 대만의 러시아계 중국인(러시아계 대만인)
한 편, 국공 내전 및 국부천대의 영향으로 상하이나 신강에서 대만으로 피신하거나 이주한 러시아계 중국인들도 있는 편이다. 이들은 2021년을 기준으로 하여 대만 주요도시에 합쳐서 593명이 거주 중이라고 한다.물론 러시아에서 대만으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도 있다. 주요인물은 대만의 영화배우인 "安妮(Анечка Марченко, 아네츠카 마르첸코)"가 있다.
7.2. 홍콩의 러시아계 중국인(러시아계 홍콩인)
위키피디아홍콩 반환을 기점으로 러시아계 중국인이나 러시아 본토인 중 일부가 홍콩으로 이주하기도 했다.
8. 같이 보기
- 중국계 러시아인
- 중러관계
-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 -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로 명목상으로는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인데, 러시아 본토에서는 한 번도 정상적으로 운영된 적이 없고[14], 실질적으로 중국 내 동방 가톨릭 신도들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9. 외부 링크
[1]
우루무치시와
일리 카자흐 자치주를 포함한
중가리아(북강) 대부분의 지역에 거주한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나머지 지역에선 소수가 거주한다.
[2]
미국의 저명한 러시아사 학자였던 니콜라스 랴자노프스키도 하얼빈으로 피난한 이후 미국으로 망명한 백군 난민의 후손이다.
[3]
사실 이런저런 광물들이 많이 매장되었다는 보고는 나왔지만, 이런 자원에 대한 본격적인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소련과 러시아 당국 입장에서야 이미 있는 광산을 개발하기에도 바쁜데 굳이 작은 주의 자원개발에 까지 투자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4]
심지어 레바논의 백인 기독교인들의 이민조차 막았다.
[5]
#
[6]
여기에는 다른 이유도 있는데, 백군 난민들은 소련 여권을 받기를 거부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중화민국 측 역시 자국 영토 내 러시아인들을 자국민으로 대우하지 않았다. 이들은 무국적자 상태에서
난센 여권만 들고 있던 상태였고, 법적으로 아시아인이 아니었다.
[7]
상당수의 러시아인들이 소련 수정주의 스파이라는 명목으로 탄압이 가해졌고 이 가운데 고문치상자들도 나왔다.
[8]
반대로 후이족, 위구르족의 경우 종교가 이슬람교가 아닌 경우에도 후이족, 위구르족으로 분류하고 있다.
[9]
명, 청 때는 타타르라는 말이 오랑캐 비슷한 늬앙스의 비하명칭에 가까웠으나, 러시아에서 이주해온 타타르인들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비하적 의미가 옅어졌다.
[10]
나치 독일은
미국의 참전과 더불어, 그 자신들이
동부전선에서 뻘짓을 반복하기 전에 점령지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던 지라, 점령한 곳에서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 점령국들의 시민들을
죽여대면서 그들의 커뮤니티를 철저히 뭉개버렸다. 반면,
일본 제국은 강점한 지역의
한국인과
중국인들을 상대로
민족말살정책이다
신멸작전이다 하면서 강제동화를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현지인들의 문화적 특성에 큰 타격도 주지 못했다. 게다가, 나치 독일과는 달리 한 인종 전체를 완전히
홀로코스트시키려는 미친 짓까지는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유대인들의 자금줄을 노리려는 의도였지만 유대인들을 대피처를 세우는
복어계획도 수립했으며, 예상과는 달리 돈 많은 유대인보다 가난한 유대인이 많이 몰려와 실패한 이후에도 나치독일의 요구를 거부하고
게토에 가두는 선에서 끝냈다.
[11]
그래서
미국의
랍비인 마빈 토케이어가 저술한
탈무드 해설서에 의하면,
일본 내
유대인들 사이에서
일본 제국 시기에 대한 평가가 극과 극으로 갈렸다고 한다.
일본의 전쟁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이라면 이를 갈 지경이었지만,
복어계획의 일환으로
일본군 점령지에 정착했다가 탈출해온 이들은 일본 정부에 대해 호의적으로 인식하거나, 최소한 적대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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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에 불과하다"는 어그로성 주장을 한 레프 트로츠키나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핵심 장본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라자르 카가노비치도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서로 상성이 안 좋은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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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식문화로 설명하자면 원래 유대인은 돼지고기는 절대 먹지 않고
소고기, 양고기의 경우 모세오경에 나온 방식으로 도살한 후 피를 다 빼고 하체 부위는 먹지 않고 상체만 먹는데 비해, 카이펑 유대인은 소고기나 양고기 관련한 금기는 아예 없고 그냥 심플하게 돼지고기를 먹는 대신 돼지의 하체 부위만 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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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년
2월 혁명으로 동방 가톨릭에 대한 박해가 중단됨에 따라 러시아 그리스 가톨릭 교구가 설치되었으나 몇 달 뒤인
10월 혁명으로 바로 붕괴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