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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f5f5,#2d2f34><colcolor=#e81018> 개인 | 생애 | ||
군사경력 | 제2차 세계 대전 · 횃불 작전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
대통령 재임 | 리틀록 사건 · 머큐리 계획 | |||
외교 | 한미상호방위조약 · 미중상호방위조약 · 제네바 합의 · 신 미일안전보장조약 | |||
선거 |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사건사고 | 스푸트니크 쇼크 · U-2 격추 사건 ·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 | |||
보수주의 | }}}}}}}}} |
1. 초기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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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생도 시절의 아이젠하워 |
이후 육군 보병 소위가 된 아이젠하워는 진급이 늦어졌고 소령시절 그의 잠재력을 본 폭스 코너가 그가 복무하던 파나마로 데려와 그에게 업무, 군사학을 가르쳤다. 이후 개인적으로는 사관학교 선배인 육군참모총장이자 훗날의 필리핀군 육군 및 육군 원수가 되는 맥아더의 전속부관으로 일하게 되었다. 다만 이는 맥아더가 초고속 진급을 한 것이다. 하여튼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참모총장 시절부터 전속부관으로 일하기 시작해서 워싱턴에서 5년, 필리핀에서 4년,[3] 합쳐서 무려 9년 동안이나 전속부관 일을 수행했다. 즉, 대대장 한 번도 못해봤다는 소리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상관인 맥아더가 아이젠하워를 9년이나 계속 부관으로 중용했을 정도로 일을 잘했다는 뜻이었고 나중에는 진급 추천서도 잘 써줬다. 아래 평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좋게 봤다는거지만, 사실 아이젠하워는 쌓인게 있었는지 후술되어있듯 맥아더 욕도 제법 했다.
아이젠하워는 내가 지금까지 만나본 사람 중 최고의 사무원(clerk)이다.[4]
필리핀을 떠나서야 맥아더의 요청으로 육군 대령으로 승진했고, 그제서야 재능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해
1941년에는
준장까지 진급했다. 그러나 그의 고속 승진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훗날 맥아더는 대권에 대한 야심을 드러냈으나 대통령이 되지 못한 반면, 맥아더보다 출세가 늦었던 아이젠하워는 종국엔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까지 되었으니 이것도 아이러니한 대목.
2.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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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O 사령관 시절 당시 윈스턴 처칠과 찍은 사진. |
이를 위해 미국은 아이젠하워를 다시 대장으로 진급시켰으며, 1944년 말에는 원수로 진급, 5성장군이 된다. 이때 미군은 아이젠하워를 포함 총 7명의 장군과 제독에게 원수 계급장을 수여했다( 오마 브래들리 장군과 윌리엄 홀시 제독은 전후에 진급한다). 그 7명은 육해군 최고사령관 참모총장 윌리엄 리히 제독,[5] 육군참모총장 조지 C. 마셜 장군, 해군참모총장 어니스트 킹 제독, 태평양 방면 연합군 최고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 장군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한번 만나 보면 그의 팬이 된다고 할 정도로 대인 관계가 좋았고, 대립하는 두 집단의 조정에도 능해서 당시 조지 S. 패튼이나 버나드 로 몽고메리 같은 고집불통 장군들 간의 갈등을 잘 무마하였다. 물론 그 과정이 절대 쉬운 건 아니었다. 저 두 사람은 아이젠하워보다는 선배뻘인 장군이기도 했으나, 고집이 세고 불같은 성격이라서 마음고생이 심했다. 즉, 피곤한 선배 또는 짜증나는 선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몽고메리 원수는 미군이 실수를 할 때마다 "그러게 내가 뭐랬소?" 하면서 미군을 멸시하지, 패튼 장군은 매일매일 폭주해서 자기한테 열내지... 다음과 같은 시나리오가 전쟁 기간 내내 벌어졌는데도 연합군 사령부가 멀쩡하게 돌아가고 아이젠하워가 홧병에 걸리지 않은게 신기할 정도다.[6]
1.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한다. 2. 전략을 토의한다. 3. 패튼과 몽고메리가 서로 내가 옳네 하며 신경전을 벌인다. 4. 곧 두 사람끼리 언성을 높이면서 말싸움을 벌이고, 나머지 지휘관들은 버로우. 5. 회의가 끝난 후 아이젠하워 원수가 6. 브래들리 장군이 패튼 장군과 몽고메리 원수를 달래러 간다. 1. 다시 아이젠하워 원수가 연합군 지휘관들을 소집... 이하 반복. |
아이젠하워 성격이 아무리 유하다고 한들, 그라고 이런 괴팍한 인간군상을 상대하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부처나 도인인 건 아니라서, 이전에도 "누가 킹을 쏴버리면 전쟁을 좀 더 쉽게 이길 수 있을 것", "킹은 정신적 깡패다",[8] " 맥아더는 후빨러를 편애하는 불안정 요소" 같은 소리를 하기도 했다. 단, 킹이나 맥아더를 상대로는 일기장 속에서만 그랬는데, 패튼만큼은 부하들 앞에서 이런 소리를 했다는 데서 그 골치아픔을 짐작할 수 있다.
횃불 작전, 시칠리아 상륙작전, 노르망디 상륙 작전 등을 지휘하며 활약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끌었다.
2차대전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소련에서 최고 등급의 무공훈장인 전승훈장을 주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미국과 소련은 같은 연합국이었기에 이러한 행위가 가능했지만 몇 년후 소련이 라이벌 적대국이 될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본래 최고등급의 무공훈장은 적기훈장이지만 이 전승훈장은 그걸 뛰어넘는 것으로 소련이 판단하기에 2차대전에 큰 공헌을 한 17명에게만 주었다. 서방 연합군에서 이걸 받은 사람은 아이젠하워와 버나드 로 몽고메리 두명 뿐이다.
1946년에 육군참모총장 신분으로 한국에 잠깐 방문하여 당시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육군 중장과 만난 적이 있다. 그러나 불과 두세시간 정도의 체류였기 때문에 잘 알려져있진 않은편
이후 1948년, 컬럼비아 대학교 총장이 되었다. 1950년 NATO군 사령관이 되면서 사임하려 했으나 사임을 거절당했고(...), 1952년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후 비로소 사임할 수 있었다. 법적으로 대통령 등 선출직엔 현역 군인 신분으로 출마할 수 없었기에, 선거 전 전역 신청해 예비역 민간인 신분으로 출마, 대통령 퇴임 후 육군의 예비역 소집령을 받아 다시 원수 신분이 되는 형식을 썼다.
2.1. 진급 이력
- 1941년 9월 29일: 전시 준장
- 1942년 3월 27일: 전시 소장
- 1942년 7월 7일: 전시 중장
- 1943년 2월 11일: 전시 대장
- 1943년 8월 30일: 정규군 준장 → 정규군 소장
- 1944년 12월 20일: 전시 원수
- 1946년 4월 11일: 원수 (은퇴 계급)
3. 끊임없는 정계 진출 요구
이렇게 전쟁영웅으로 인기가 하늘 끝까지 솟아있던 상황에서, 아이젠하워는 여러번의 정계 진출 제안을 받았다. 전쟁 중이던 1943년, 한 정치인이 전쟁 후 대통령에 출마해보라며 일찌감치 권유했던 적이 있었고, 전쟁이 끝난 후부터 양 당의 인사들이 아이젠하워에게 정계 진출을 권유했다. 1948년 대선 당시에는 민주당에서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추대하려 했고, 공화당에서는 대선 경선에 나와달라 권유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당시에는 정계 진출에 뜻이 없었고, "명백한 이유가 없는 한 군인은 정계에 진출해서는 안 된다" 라면서 양측의 제안을 모두 거절한다.이후 1952년 대선이 다가오자,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아이젠하워에게 민주당의 대선 경선에 출마해달라고 권유했으나, 아이젠하워는 민주당은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는다며 공화당을 선택했다. 다만 아이젠하워가 공화당에 입당한 이유는 민주당의 20년 이상 장기집권이라는 독주를 깨고 그동안 축적된 부패와 난맥상에 대한 견제를 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공화당이 아이젠하워에게 러브콜을 할 때도, "FDR부터 트루먼까지 20년 이상 집권하였기에 이를 멈출 필요가 있다" 라며 러브콜을 보냈다는 이야기도 있다.
4. 대통령 재임
4.1. 선거 출마와 당선
대선 당시 캠페인 광고(1952년)[9] |
이후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 육군에서 전역[10]하고 공화당 후보 경선에 나간다. 이 때 아이젠하워는 오하이오 상원의원 로버트 A. 태프트와 맞붙는데, 둘이 격돌한 공화당 경선은 공화당 역사상 가장 치열한 경선 중 하나로 꼽힌다. 결국 아이젠하워의 승리로 돌아갔고, 아이젠하워는 태프트와의 앙금을 해소하기 위해 태프트 계파에 대한 보복을 하지 않을 것이며, 정부지출을 삭감하고, 모든 국내정책 분아에 있어서 사회주의의 침투를 막을 것을 약속했다. 이에 태프트는 아이젠하워와 국내정책에 대한 의견들에 합의를 보았고, 아이젠하워의 대권도전을 적극 지원하게 된다.[11]
본선 상대는 민주당의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이었는데,[12] 한국 입장에선 씁쓸한 일이지만 미국 국민들은 당시 한국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다. 미국인 입장에선 고통스런 1차대전, 대공황, 2차대전이 끝나고 이제 평화를 누리나 싶었는데, 듣도보도 못한 나라에서 내전이 발생했다고 다시 수년간 전쟁하는 건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간다(go to Korea)."라는 표현이 "난제를 정면 돌파하다/맞닥뜨려 해결하다."라는 뜻의 유행어가 될 지경이었다. 공화당은 민주당의 20년 장기집권을 끝낼겸 총공세를 퍼부었고, 그 결과 아이젠하워가 3407만(55.2%) 표를 얻고 선거인단 수에서는 442명을 얻어서 압승하였다. 반면 스티븐슨은 남부 9개 주에서만 이겨 2737만표(44.3%) 표를 얻고 선거인단 수에서는 89명 밖에 얻지 못하였다. 이로써 공화당은 20년 만에 정권을 탈환했고 전란 시기 민주당의 장기 집권은 막을 내렸다.
4.2. 내각 구성
대통령 이전의 정치 경험이 전무한 아이젠하워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각료들 또한 거의 대부분 비정치인 출신들로 임명했다. 특히 군, 기업, 법률, 학계와 같이 정치 이외의 분야들에서 큰 성공을 거둔 인재들을 대거 발탁했다. 이들은 거의 대부분 부유했기 때문에, 당시 리버럴들과 민주당에서는 "8명의 백만장자와 1명의 배관공[13] 으로 채워진 내각"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오하이오 주립대학교 역사학과 교수 데이비드 스테벤(David Stebenne)에 따르면, 아이젠하워는 만약 성공한 기업인들을 입각시키지 못한다면, 이는 사업 실패자, 정치꾼, 뉴딜 변호사[14] 이외에는 어느 누구도 각료로 임명하지 못하는 현상을 초래할 것이다(If the leaders of successful business were excluded from consideration, the result would be an inability to get anybody to take jobs in Washington except business failures, political hacks, and New Deal lawyers)라고 일기에 작성하며 이러한 비난들에 대해 크게 불쾌해 했다고 한다. #
국무부 장관으로는 뉴욕의 대형 로펌에서 근무하던 존 포스터 덜레스를 임명했다. 덜레스는 유력한 공화당 인사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왔던 인물로, 그들에게 대외정책에 대한 조언들을 해왔다. 덜레스는 국무부 장관으로서 미국의 대외관계에서 큰 영향력을 미쳤다.
재무부 장관으로는 클리블랜드 은행가 조지 험프리를 임명했다. 비록 험프리가 소위 "Old Guard"로 불리는 공화당 내 보수 강경파들의 정책노선에 공감하기는 했으나, 실제 정책추진에 있어서는 점진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법을 채택해 이전 민주당 행정부들의 조세와 재정 정책에 큰 변화를 주지는 않았다.
국방부 장관으로는 제너럴 모터스 CEO를 역임한 찰스 E. 윌슨을 임명했다. 아이젠하워는 세계 최대의 자동차 회사인 GM을 성공적으로 경영한 윌슨의 경험이 그로 하여금 미군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능력을 갖추게끔 했다고 보았으며, 실제로 윌슨은 비대해진 국방비를 효율적으로 감축했다.[15]
농무부 장관으로는 아이다호의 농장주 에즈라 태프트 벤슨을 임명했다. 뉴딜 정책의 농업 보조금 프로그램들을 유지하기는 했으나, 재정보수주의적 성향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조금 프로그램을 성공적인 농장에 대한 인센티브로서 작동하게끔 개편했다. 노동부 장관으로는 상단에서도 언급한 배관공 노조 위원장 마틴 더킨을 당초 임명했으나, 아이젠하워는 미국 전체보다는 배관공 노조를 우선시하는 그의 행보에 실망해 뉴저지의 기업인 제임스 P. 미첼로 교체했다.
임기 말인 1959년에는 원자력위원회(현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전신) 위원장 루이스 스트로스를 상무부 장관으로 임명하려 했다. 하지만 스트로스는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에 대한 간첩몰이 등으로 적을 많이 만들었고, 야당 민주당의 반대를 받아 결국 46:49로 청문회에서 인준이 부결되었다. 스트로스는 정계에서 완전히 몰락했고 아이젠하워 또한 큰 정치적 타격을 입었다.
4.3. 재선과 최초의 한국 방문
그는 선거 당시 수렁으로 빠져가던 6.25 전쟁을 끝내겠다고 공약을 내걸며 "제가 한국에 가겠습니다."라는 슬로건을 내놓았고 실제로 당선 후 전쟁 종결을 위해 한국에 갔으며 방한한 첫 번째 미 대통령이 되었다. 그러나 1952년의 방한은 대통령 당선자 신분이었기에 정식 미국 대통령으로서의 방한은 아니다.195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는 건강문제가 대두됐다. 아이젠하워는 1955년에 심각한 심근경색이 발생했고,[16] 1956년엔 회 장염 수술도 받았기 때문. 그러나 두 경우 모두 빠르게 회복했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공화당 대통령 후보 전당대회에서 어려움 없이 무난하게 대통령 후보에 당선되었다. 반면 민주당에서는 이번에도 스티븐슨이 전당대회에서 에스테스 케포버를 13%p 차이로 이겨서 이번에도 아이젠하워 vs 스티븐슨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는 지난 선거보다 더 벌어져 아이젠하워는 무려 3557만표(57.4%)를 얻었고, 선거인단 투표 수도 지난번보다 15명을 많이 얻은 457명 얻었다. 스티븐슨은 전보다 인기를 잃은 2602만표(42%), 선거인단 수에서는 73명을 얻으며 참패했다. 거기에다 스티븐슨은 당시 골수 민주당 지역이었던 앨라배마 주에서 1명의 반란표까지 나와서...
1960년 4.19 혁명 직후[17] 허정 과도정부 내각 시기에 한국에 방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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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젠하워 환영 인파 |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엄청나서 당시 환영 인파가 200만 서울 시민의 절반인 100만여명이었다고 하며 그가 탄 차가 앞으로 나갈 수 없었고 사람들이 하도 달려들어서 차가 일부 파손되었다. 그를 보기 위해 국보1호 숭례문 기와 위에 사람들이 올라가는 등의 추태를 보일 정도라 당시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과유불급', 극히 귀한 손님에게 큰 실례를 저질렀다며 이를 개탄하였다. 오토바이를 타며 아이크 대통령을 호위하던 박 모 경위가 인파에 밀려 넘어져 졸도하여 병원에 실려가는 등 별의별 사건이 다 일어났다.
심지어는 참전용사 묘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수도사단의 김수산 중령과 최갑석 대위가 즉석에서 " 실탄으로" 105mm 곡사포로 예포 21발을 쏴 의전을 해[19],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내 생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무서운 축포였다."는 농담을 건넨 일화도 있었다고. 당연히 장성 출신이니 공포탄이 아닌 실탄인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한국인들의 엄청난 환대에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원래 아이젠하워는 한국 방문 이전 일본 방문을 하기로 계획했는데, 당시 일본은 안보투쟁으로 인해 반미 감정이 극에 달해 있던 상황이었다. 특히 6월 10일에는 아이젠하워의 방일을 협의하기 위해 일본에 온 제임스 해거티 백악관 대변인이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에서 시위대에게 포위당해 미국 해병대에게 헬리콥터로 구조받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로 인해 아이젠하워는 방일을 포기[20]하고 방한만 결정하였다.
영상 처음은 대만 방문이며, 장개석이 보인다. 한국 방문은 1분 7초부터,1분 33초에서는 '국무총리 허정(Premier Huh Chung)'이 언급된다.
강준만의 미국사 산책을 보면 임기 말에도 인기가 좋아서 3선 제한만 없었으면 다시 출마해도 가능성이 있었다고도 하는데, 역사에 if란 없으니 그저 가정일 뿐이긴 하다. 당장 1958년 상하원 선거에선 크게 패한데다[21] 대선은 변수가 원체 많다보니 막판에도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는지라.. 게다가 3선 제한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의 장기 집권에 질린 당시 공화당이 주도해 만든 규정이었는데 그걸 다시 들먹이는 것 자체가 내로남불이 될 수 있긴 했다.
4.4. 주요 정책과 업적
4.4.1. 균형재정과 경제호황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경쟁자였던 태프트 상원의원과 마찬가지로 재정보수주의 성향이었으며, 미국 경제가 자유기업에 의해 자율적으로 작동해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했다. 다만 아이젠하워는 공화당 내 보수 강경파들의 세금 감면 요청에 반대하여, 균형재정 달성을 중요시했다.아이젠하워의 임기동안 미국의 GDP 대비 부채 비율은 57.2%에서 43.6%로 하락하여, 미국 경제의 재정건전성이 크게 향상되었다. GDP 대비 정부지출 또한 20.4%에서 18.4%로 감축시켜[22]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보수주의자들을 만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또 경제호황에 힘입어 GDP 자체도 3553억 달러에서 4877억 달러로 크게 증가했고, 다우 존스 산업평균지수도 288에서 634로 2배 이상 뛰어올랐다.
4.4.2. 주간고속도로망 건설
제2차 세계 대전의 연합군 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는 독일의 아우토반[23]을 보고나서 훗날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미국 연방고속도로 건설을 추진하게 된다. 흔히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Interstate Highway)라고 하는데, 정식 명칭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국 주계간 방위 고속도로망(Dwight D. Eisenhower National System of Interstate and Defense Highways)이다.이는 제2차 세계대전 후 급증하는 도로 교통 수요에 대처하기 위한 조치였고, '방위(Defense)'라는 명칭에서 나타나듯이 군사적 목적도 있었다. 미국 동부와 서부 간의 병력 이동을 단기간에 수행하기 하기 위해서 추진된 고속도로였다.
아이젠하워는 인터스테이트 하이웨이를 건설하기 위해 1954년에 이를 기획하는 위원회를 구성했고, 군인 시절부터 자신의 최측근이었던 루시어스 D. 클레이 장군을 위원장으로 임명한다. 클레이의 위원회에서는 공사기간 10년, 1000억 달러 규모의 예산으로 총 길이 64000km의 고속도로망을 건설해 5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모든 미국 도시들을 연결한다는 구상을 마련했다.
이러한 구상에 따라 1956년 연방도로법(Federal-Aid Highway Act of 1956)이 의회에 상정되었다. 하원에서는 388 대 19로 무난하게 통과되었지만, 상원에서는 41 대 39로 아슬아슬하게 통과되었다. 민주당 내 다수 의원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법안 통과에 반대했으나, 해리 F. 버드나 리처드 러셀 주니어같은 보수연합 소속의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은 배리 골드워터나 조지프 매카시같은 공화당 상원의원들과 함께 연방도로법에 힘을 실어줬다.[24] #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연방도로법이 발효되자, 전 구간을 중앙분리대로 나뉘고 편도가 최소 2차선인 고속도로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서 미국 전역을 연결하는 자동차 전용도로 체계가 구축된다. 연방정부가 90%, 주 정부가 10%를 부담하는 구조였고 막대한 건설 비용은 휘발유 가격에 세금을 부과하여서 충당하였다.
일부는 기존 국도를 활용하기도 했으나, 이들도 곧 중앙분리대로 나뉜 편도 2차선 이상의 자동차 전용도로로 개조되었다. 1956년부터 건설이 시작되어 급속히 노선망이 확충되어 2006년 기준 총연장이 75,440 km(46,876 mi)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고속도로 체계이다.
당연히 경제적 부수 효과도 가져왔으며, 장대 교량, 장대 터널, PC 공법 등이 개발되었고 토목공학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4.4.3. 인종차별 철폐
대통령이 된 후에는 냉전과 인종 문제에 애를 쓰는데 특히 1957년에 일어난 리틀록 사건은 미국 내 인종 구별 문제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뿌리 깊은 흑인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하였다.이때까지의 미국 교육정책은 플레시 대 퍼거슨 판결을 통해 '분리하지만 평등하게(separate but equal)'라는, 교육시설은 분리하지만 교육과정이나 시설이 동등하다면 차별이 아니라는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원칙하에 이뤄졌으나 1954년 연방대법원의 '분리된 교육시설은 본질적으로 불평등하다.' 라는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판결(Brown v. Board of Education)[25]로 이 원칙이 공립학교에서는 위헌이라는 판결이 나왔다.
당시 얼 워런 대법원장이 직접 쓴 판결문은 만장일치로 수정헌법 14조 중 "...그 관할권 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동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에 위배되어 위헌이라고 판결했는데 유형적 차별 뿐 아니라 무형적 차별도 금지된다는 내용으로 분리 자체가 차별임을 명확하게 선언했고 이 브라운 판결을 근거로 공공장소, 기관, 교통수단 등에서의 분리도 위헌으로 선언하며 이후 브라운 2판결을 통해 지방연방법원들이 브라운 판결의 집행을 지킬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아칸소 주 리틀 록에서 백인만이 다니는 공립학교에 흑인 학생들이 등교를 하자 이를 두고 백인들의 폭행과 흑백인 사이의 찬반 시위가 벌어진다. 이에 아칸소 주지사 오벌 E. 포버스가 치안 유지를 핑계로 아칸소 주 방위군 육군까지 동원하여 흑인 학생들의 등교를 막자 아이젠하워는 주 방위군을 연방 육군에 편입시켜 버리고 "어느 누구도 정의를 방해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정예 연방 육군 공수부대인 제101공수사단을 보내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호하게 했다. 자세한 내용은 리틀록 사건 문서 참조. 사실 이 사건은 인종 문제 뿐만 아니라 주정부와 연방정부 사이의 힘겨루기도 겹쳐 있었지만 연방군까지 투입하는 아이젠하워의 뚝심에 결국 10년 뒤에는 공립학교에서의 인종차별이 비교적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배째라 하고 버티는 곳이 많아 1963년에도 흑백 통합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2%도 안됐지만... 그 후 1960년대 흑인 민권 운동이 활발해지자 린든 B. 존슨이 대대적으로 손봤다.
4.4.4. 수에즈 전쟁 종식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문제로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이 나세르의 이집트를 침공해 수에즈 전쟁( 제2차 중동전쟁)이 벌어지자 소련은 이집트에서 영국 등이 물러나지 않으면 가만 있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고 아이젠하워도 영, 프, 이스라엘 등에 압력을 행사해 물러나게 했다. 하지만 1957년 1월에 의회에 공산주의 세력의 중동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중동 지역의 미군 주둔 권한을 대통령에게 줄 것, 중동 지역에 대한 경제원조로서 이후 2년 사이에 4억 달러를 지출할 것 등이 포함된 특별교서, 즉 아이젠하워 독트린을 보내 미국이 중동지역에서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정책을 지속하였다.4.4.5. 군산복합체 견제
아이젠하워는 퇴임사에서 군대와 산업이 결합된, 이른바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그러나 실제로 군산복합체라는 개념을 꺼내든 것은 아이젠하워의 연설 각본가인 랠프 윌리엄스와 맬컴 무스였고, 이 개념의 최초 제창자는 찰스 트레벌 영으로 그의 요지는 병기산업을 국영화하고 그것을 통제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주장의 요지 역시 의외로 '국방 예산을 줄이자!'이며, 일부에서 제기하는 수상쩍은 악의 단체가 미국을 배후 조종한다는 식의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군사예산을 삭감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자세한 것은 군산복합체 항목 참조.사실 막무가내 국방 강화를 외치기 쉬운 입장임에도, 아이젠하워는 오히려 군 출신이기 때문에 군과 군수 대기업들이 예산을 타내가는 꼼수를 훤히 꿰뚫어보고 있었고, 덕분에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군사 분야에 과도한 예산이 투입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는 교육이나 연구개발, 사회기반시설 건설과 보수에 가야할 예산이 군사 분야로 과도하게 투입되는 것을 극히 꺼려 군부가 요청한 예산을 무자비하게 깎았다.[26] 정부 재정은 한정적이기 때문에 군사비의 증액은 결국 학교, 정부 출원 연구소, 사회기반시설(고속도로, 철도, 공항, 항만, 통신, 발전소, 송전망, 상하수도, 가스 등) 건설과 보수 등에 가야할 예산을 잡아먹는 결과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다들 알겠지만 군사무기는 어떠한 가치 재생산도 하지 못한다. 물론 전쟁에 쓰여서 짧은 시간에 전쟁을 압도적으로 이기고 유리한 평화조약을 맺는다면 나름대로 상당한 경제적 가치를 만들 수도 있지만, 쓰지 않는다면 결국 시간이 흐른 뒤 그냥 고철로 폐기되기 마련이다. 열강 시대까지는 실제로 이렇게 이득을 본 전쟁이 많지만, 2차대전 이후로 민주주의 국가들은 경제적 이득을 위한 팽창 전쟁은 거의 하지 않는 방향으로 여론이 고착되었다. 실제로 구형 잠수함을 면도기 회사에 고철용으로 팔아치운 사례도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평시에 과도한 군사비 투입은 경제에 심각한 악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
다만 "어차피 전쟁 안 할거면 국방비에 투자할 돈을 모두 그냥 민간 기업에 투자하면 기술 개발도 더 효과적인거 아니냐?"는 의견도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보통 민간 기업은 회장 개인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아닌 이상 단기간에 경제적인 성과가 확실하지 않은 기술에는 잘 투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채우기 위해 정부가 지원하지만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는 연구개발분야 정부 투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아직 군수산업이 민간산업에 기대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과 유럽에서는 첨단과학기술의 최초 수요자가 군수산업이고, 그렇게 연구인력을 유지하고 기술을 더 발전시키고 경제성을 키워 민간에 상용화된 경우가 흔하다.
그런 식으로 군수산업이 이것을 위해 존재하지는 않지만, 의도치 않게[27] 군수산업이 과학기술발전의 마중물로써 작용하고 애초 군수분야의 요구에서 시작했지만 그것에서 유관 분야나 전혀 무관한 분야의 민간 기술이 파생된 사례가 많다.
예로, 스페이스X같은 민간 로켓 개발회사들이 그나마 NASA의 지원을 받아 위성발사체 사업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근 반 세기동안의 국가주도 연구개발 "낭비"와, 엄청난 숫자의 대륙간탄도탄과 그것을 관리, 발사, 유도하는 시스템을 생산하며 발전한 결과를 이어받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간 NASA의 천문학자와 다른 과학기술자가 한 일 대부분은 그 자체로서 바로 미국 서민의 "빵"이나 "달러"가 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달 탐사와 외행성 탐사를 위해 NASA가 얻은 예산 역시 냉전시대 미소경쟁과 군사기술 개발 요구에 힘입은 바 크다. 그리고 만약 미소간 경쟁이 없었다면 GPS 위성 발사는 훨씬 늦었을 것이고 우리는 지상기지국기반 위치추적시스템을 친숙하게 사용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한국 정부의 예산 수준으로 위성기반 위치추적시스템은 지금도 힘들다. 한반도 인근에서 사용할 용도로 겨우 시동을 걸고 있는 정도고 그나마 이것이 더 미래가 아니라 요즘 예산을 얻은 것도 국군의 필요가 반영된 것이 크다.
하지만 "군산복합체"에 대한 경고라고 알려진 그의 발언은 시대상을 읽을 필요가 있다. 아이젠하워 집권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동안 "전세계의 군수공장"[28] 역할을 한 미국이 트루먼시절 대대적인 군축에 들어갔다가,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50년대에 다시 군비를 키울 때였다.[29] 아이젠하워 재임 후기쯤 오면 이것에 다시 "고삐를 졸라맬 시기"라는 말리 이 때 나왔다.
아무튼 군 관련 예산을 삭감하는 정책 때문에 군 수뇌부들이 크게 항의를 하거나 일부는 사표도 던졌지만, 아이젠하워는 절대로 정책을 굽히지도 않았으며 그럴 필요도 없었다. 아이젠하워는 2차대전 시기 유럽 연합군 최고 사령관이였던 5성 장군 출신이자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군 수뇌부들은 대통령에게 '전문가'인 자신들의 조언을 받아들이라는 논리를 성립시키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던 반면,[30] 군대의 온갖 역량이 최대한으로 발휘되고 벌어지는 일이었던 제 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5성 장군까지 하며 산전수전 다 보고 왔고 당시 미국 최선임 짬킹이기도 한 대통령에게는 말 한마디로 군 수뇌부 인사들을 찍어누를 수 있는 방법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자기들이 유학의 '전문가'라고 조언을 받아들이라며 세종대왕에게 요구한다고 생각해보자. 씨알도 안먹히고 박살날 것이다.
당시 합동참모의장이던 아서 W. 래드포드 대장도 임관연도로는 아이젠하워보다 1년 밀렸고, 육군참모총장이었던 매튜 B. 리지웨이나 맥스웰 테일러는 2차대전 당시 유럽연합군 총사령관 아이젠하워 휘하의 일개 사단장들이었다.... 다만 이들이 아이젠하워의 군축 정책에 곱게 순응한 건 아니라서 래드포드 제독의 경우 아이젠하워의 핵전력을 통한 군사력의 우위 정책(New Look Policy)을 기본적으론 지지했지만, 그로 인한 재래식 전력 군축에 있어 여러 차례 반대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31]
그 당시를 비롯해 냉전 기간 동안 정부 예산의 상당 부분이 이런 군산복합체로 흘러들어갔고, 이는 냉전이 끝난 현재에도 문제가 되고 있는데,[32] 아이젠하워는 그 당시부터 이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의 좋은 의도에서 시작된 군산복합체 타도가 결국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핵무기의 대량생산화를 불러왔다는 일부의 지적도 있긴 하다. 그래서 영국의 저명한 좌파 역사가 에릭 홉스봄은 "스스로는 광기에 물들지 않은 채 핵전쟁 광기로의 진행을 이끈 지도자"라고 아이젠하워를 비판하기도 했다. 물론, 반대로 핵무기의 억제력 덕분에 냉전 시기가 비교적 물리적 충돌없이 평화적으로 흘러갔다는 분석도 가능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해당 발언도 "스스로는 광기에 물들지 않은"이란 다른 의미로 곱씹어보면 공산주의자인 홉스봄의 입장에선 나름 긍정적인 평가도 포함된 비판이다. 실제로 반대 정당 민주당 지지자 리버럴들에게도 '마지막으로 국가 전체를 위해 일했던 훌륭한 공화당 출신 대통령'이란 미국내 대중의 평가는 말할것도 없고, 진보 진영에서도 아이젠하워 시절 냉전 구도의 격화 자체는 비판해도 그 와중 아이젠하워 본인의 온건한 성향은 인정하는 편이다.
사소한 이야기지만, 이 무렵 아이젠하워가 언론에까지 대대적으로 군산복합체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대중들에게 각인시킨 탓에 이때부터 서브컬쳐나 음모론자들이 군수기업들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영향을 의도치않게 끼치기도 했다. 이 때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군산복합체가 미국 정부를 뒤에서 좌지우지하며 온갖 전쟁을 일으킨다는 음모론이나 작품을 50년대부터 만들며 편견을 계속 재생산해 오늘날까지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데[33] 사실 군수기업들에겐 그럴만한 힘이 전혀 없다. 아예 아무런 영향력도 없다고 하긴 힘들지만 미국 정부를 뒤에서 쥐고 흔들기는커녕 거의 갑을관계에 놓인 회사들이다.
4.4.6. 복지정책과 과학기술 연구
공화당 출신 대통령임에도 불구하고, 정책적으로는 중도 성향에 가까웠던 그는, 트루먼 행정부의 복지정책을 큰 틀에서 바꾸지는 않은 채, 이를 보다 현실적으로 유지가능한 방향으로 수정하는데 집중하였다. 국방비 감축 등 예산 운용의 효율성을 증대함으로써 확보한 추가적인 세수는 보건복지예산 증액에도 투입되었다. 그 일환으로 보건사회복지부를 신설하였고 사회보장제도를 확장하였다.임기 내에 벌어진 스푸트니크 쇼크에 대응하기 위해 항공우주 연구기관 DARPA와 NASA를 설립해 미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5. 대통령 퇴임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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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4월 22일, 퇴임 직후 후임 대통령인 존 F. 케네디와의 만남[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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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에 찍은 사진 |
퇴임 후에는 예비역 소집 명령을 통해 육군에 다시 복귀하였는데, 종신계급인 원수로서 보기 드물게 전역을 했다가 다시 복귀한 인물이기도 하다. 강력한 문민통제의 원칙을 따르는 미국이기에 현역 군인은 선출직 공무원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으므로, 아이젠하워는 전역을 신청해 민간인으로 대선에 나갔다가 8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예비역 미 육군 원수로 복귀하는 절차를 거쳤다. 물론, 사실상 명예직이라서 육군 관련 실무를 크게 맡진 않았고, 남은 생애 내내 거의 사복 차림으로 보냈다.
이후엔 펜실베이니아 주 게티즈버그의 농장에서 조용히 살다가 본인의 러닝메이트이자 부통령이였던 리처드 닉슨이 대통령이 된 지 2개월 뒤인 1969년 3월 28일 심장병으로 타계했다. 이때가 향년 78세.
"I've always loved my wife, my children, and my grandchildren, and I've always loved my country. I want to go. I'm ready to go. God, take me."
("난 항상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손주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난 항상 조국을 사랑했지요. 난 가고 싶습니다. 난 갈 준비가 됐습니다.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3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유언
("난 항상 내 아내, 내 자식들, 내 손주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난 항상 조국을 사랑했지요. 난 가고 싶습니다. 난 갈 준비가 됐습니다. 주여, 나를 받아주소서.")[35]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유언
당연히 장례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으며 현직 대통령 리처드 닉슨, 전직 대통령 린든 존슨, 프랑스 대통령 샤를 드골, 유엔 사무총장 우탄트, 팔라비 2세, 영국의 마운트배튼 제독 등이 참석했다.
2024년 1월 8일에 우주장 회사 셀레스티스가 "엔터프라이즈 비행"의 일환으로 다른 미국 대통령 워싱턴, 케네디, 레이건과 함께 유해의 일부가 우주로 쏘아올려졌다. 날아간 유해는 영원히 우주를 떠돌게 될 예정이다.
[1]
박충구 지음, 종교의 두 얼굴, 홍성사
[2]
어릴적엔 바다를 본 적도 없는데다 자신의 집이 경영하는 여관에 숙박한 육군 장교들의 태도에 반해 육군 장교가 되려 했던
체스터 니미츠가 원래 육사를 지망했다가 국회의원의 추천서를 선착순으로 받지 못해서 해사 추천서로 대신 받은 것과 겹치는 부분. 니미츠 제독의 해사 추천서도 상원의원의 해사 추천 TO가 남아서, 낙심한 체스터 니미츠에게 의원들이 "해군은 자리가 있는데 거기로 갈래?"라고 제안한 걸 체스터 니미츠가 별다른 고민 없이 수락해 얻어낸 것이다. 대조적인 것은, 체스터 니미츠는 원래 고등학교 졸업반도 아닌데 추천서와 학교 선생님들의 특별과외를 받아서 동기들보다 어린 나이에 입학했다. 여러모로 인생을 바꾼 신의 한수였던 셈이다.
[3]
보너스 군대 사건으로 맥아더가 좌천 비스무리한 필리핀
원수(당시 미국의 식민지였다) 진급을 하게 되면서 덤으로 끌고 갔다. 여담으로, 맥아더가 이때 필리핀으로 그를 끌고 가려 하자 아이젠하워가 절망했다고 한다.
[4]
그레고리 펙이 주연했던 맥아더의 전기 영화에 나온 내용. 아이젠하워가 대통령이 되자, 맥아더가 "저 친구는 훌륭한 대통령이 될 거야. 내 부하들 중에서 가장 유능했거든."이라고 평했다. 맥아더의 이 평은 뉴욕타임즈의 99년 기사에도 "맥아더는 나중에 아이젠하워를 내가 가진 최고의 사무원이라고 조롱했다(MacArthur would later deride Eisenhower as the best clerk I ever had)"라고 실렸다. 이것은 사실 칭찬이 아니라 내 밑에서 잡일이나 열심히 하던 녀석이라는식의 뒤끝 넘치는 비하로, 사실 필리핀에서 아이젠하워는 그야말로 인생 최악의 고생을 했다. 맥아더가 워낙 막장짓을 많이한데다 심지어 자기가 친 사고를 떠넘기기까지 했으니까.
[5]
지금의
합동참모의장격의 직책이다. 리히 제독 개인의 능력도 나쁘지 않았지만, 해군이 사사건건 통합군 드립을 빌미로 육군이 해군을 집어삼키려 드는 거 아니냐는 불만 종식 차원에서 해군 출신인 그를 육해군 최고 선임자로 임명했다.
[6]
패튼은 아이젠하워보다 6년 먼저인 1906년부터 육군에 복무했지만, 고집이 세고 불같은 성격 덕분에 대인관계에서 문제가 일어났으므로, 번번이 진급에 실패해 아이젠하워는 물론 자기 부하였던 브래들리에게도 진급이 밀려버렸다.
[7]
이후 아이젠하워는 1945년 독일로 부터 승리를 거둔 이후 소련에 대한 적대감으로 불타는 패튼이 독일군을 감싸고 돌며 소련군과 마찰을 일으키자 결국 패튼을 제 3군 사령관에서 해임시켰다.
[8]
어니스트 킹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 양반도 맥아더 못지 않은 천상천하 유아독존형 지휘관이었다. 전쟁 개전과 동시에 루즈벨트로부터 '킹에게 협조하지 않는 자는 해임될 것이다'라는 약속을 받아낸 만큼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맥아더와 기 싸움을 수시로 벌여 니미츠를 피곤하게 했으며 핸리 아놀드가 이끄는 육군 항공대가 해군 항공대에 비해서 일본 본토 폭격에 성과를 내지 못하던 시기에는 '그냥 그거 들고 해군으로 와라'라고 조롱을 하지 않나, 커티스 르메이의 21폭격기 사령부를 일본 근해에 기뢰를 부설하는 것에 대해 핸리 아놀드가 불만을 표하자 '그럼 해군없이 잘 해보던가'라고 쏘아붙이기도 하였다.
[9]
"I Like Ike (나는 아이크가 좋아)" 또는 "Ike for president!(대통령을 위한 아이크!)"라는 리드미컬한 구호가 돋보인다. 앞서 서술했듯 'Ike'는 Like와 라임이 맞기도 한 아이젠하워의 애칭이다. 영상에 아이젠하워의 그림을 등에 얹은
코끼리가 북을 치는 장면이 나오고
당나귀가 이를 멀뚱멀뚱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각 정당을 비유한 것이다.
코끼리는 아이젠하워의 소속 정당인
공화당의 비공식적 상징 동물이고
당나귀는
민주당의 비공식적 상징 동물이다. 공화당이 비유적으로 민주당을 까는 셈이다. 밤낮이 바뀔 때 어두운 배경 앞으로 누군가가 당나귀를 타고 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는 민주당 소속의
해리 S. 트루먼 33대 대통령이
백악관을 떠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트루먼이 가고 난 자리에 아이젠하워를 세우자는 것.
[10]
현역 군인은 선출직에 출마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종신 현역이 보장되는 원수 계급의 장교였던 그는 대선에 나가기 위해 전역해 민간인이 되는 절차를 거쳐야 했다. 이후 8년의 대통령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뒤, 육군에 재소집 의사를 보내 예비역 소집 형식으로 다시 현직 육군 원수로 죽을 때까지 신분을 유지했다.
[11]
이후 태프트는 아이젠하워의 당선을 도운 공로로 상원 원내대표 직에 오르게 된다.
[12]
애들레이 스티븐슨은
일리노이의 정치 명가에서 태어났으며,
유엔의 창설에 큰 역할을 했던 인물이었다. 출마 당시엔 일리노이 주지사로 재임 중이었는데, 지적이고 헌신적이며 위트 있는 인물이었던 것과는 별도로 폭 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후일
존 F. 케네디 정부에서 유엔 미국 대사를 재임했다. 스티븐슨의 낙선은 스티븐슨의 권력의지 부족도 한 몫 했다는 평가가 있는데, 52년 선거도
트루먼의 추대를 통해 지명되었고 진흙탕 선거를 태생적으로 피하는 귀족적인 성격이 문제였다는 평가다. 흥미롭게도 이런 스티븐슨과 가장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는 정치인이, 아이젠하워의 부통령인
리처드 닉슨이었다.
[13]
배관공은 배관공 노조 위원장을 역임했던 노동부 장관 마틴 더킨(Martin Durkin)을 가리킨다
[14]
뉴딜 변호사란 1930 ~ 40년대에 민주당 행정부들에서 기용되어
뉴딜 정책을 구성하고 변호하던 변호사들을 일컫는다. 공화당과
민주당의 남부보수파 등 당시
미국 보수 진영에서의 뉴딜 변호사들에 대한 인식은 오늘날
한국 보수 진영에서의 운동권 출신 시민단체 인사들이나
민변과
우리법연구회 출신 진보 성향 법조인들에 대한 인식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15]
여담으로 이 사람이 한 가장 유명한 발언이 바로 GM에 좋은 것은 미국에도 좋다(What's good for General Motors is good for the country)로, 이 발언은 1950년대 당시 GM이 가진 미국 자동차 산업, 나아가
미국 경제 전체에 가진 막강한 영향력을 상징하는 말이기도 하다. 실제로 당시 미국에서 GM의 포지션은 오늘날 한국에서
삼성의 포지션에 근접했다. GM공화국
[16]
심근경색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고위 장군들의 직업병 같은 것이었다. 당장 미 육군항공대의 수장
헨리 아놀드 대장도 여러차례의 심근경색 끝에 사망했고, 과달카날 해전의 영웅 윌리스 리 소장도 종전 직후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17]
4.19 혁명 이후에도 아이젠하워 정부는 한국에 대한 변함없는 지지를 약속했다. 사실 아이젠하워가 당선자 신분으로 온 52년 때의
이승만은 문자 그대로 폭주상태였고,
발췌 개헌과 53년 발생한
반공포로 석방 사건으로 이승만에게 분노하여 트루먼때부터 준비한
에버레디 계획을 실행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다. 그래서 휴전 이후에도 이승만과 아이젠하워는 매우 냉랭한 관계였고, 4.19에 참여한 한국 시민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18]
이런 이미지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까지 이어졌다. 당시 미 해군의 항공모함이 한국으로 온다는 소식을 시위대 측이 듣고는 '미국이 우리 민주주의를 위해 도와주러 오는구나'라고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미국이
신군부와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을 지지하고 협력한 것이 밝혀지면서 미국에 대한 배신감에
반미 감정이 촉발되는 계기가 된다.
#
[19]
포탄 낙하 지점은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미 설정 해 놨을 것이다. 그냥 즉흥적으로 쏘면 막대한 인명피해로 뉴스에 나왔을 것이다. 이 당시 영상을 보면 경찰들이 교통 통제를 위해 무전기를 들고 있다.
[20]
단
오키나와는 예정대로 방문하였다. 일본 본토를 방문한 최초의 미국 대통령은 1974년의
제럴드 포드이다.
[21]
사실 미국의 20세기 상하원선거는 1930년대 이후부턴 민주당이 공화당보다 우위인 경우가 많았다. 공화당이 우위를 회복한 건
빌 클린턴 행정부 시절인 1994년 중간선거 시점이 되어서야이다.
[22]
아이젠하워 이전에 집권한 루스벨트와 트루먼 행정부, 그리고 아이젠하워 이후에 집권한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는 모두 GDP 대비 정부지출을 증액했다.
[23]
아우토반은 로마의 가도를 자동차 도로형태로 바꾼것이다.
[24]
아이젠하워 행정부 시절에 공화당은 상하원에서 주로 열세였기 때문에, 민주당 내 남부보수파 의원들과의 협치를 통해 주요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25]
미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종차별을 폐지시킨 역사적인 판결로, 영미법을
수박 겉 핥기로 배우는 대학교 1학년 교양수업에도 등장하는 굉장히 유명한 판결이다.
[26]
전쟁 영웅 출신 대통령인지라 예산을 무자비하게 깎아대도 군부가 찍 소리 못했다.
[27]
국방비에 예산을 많이 쓰고 싶어하는 정부는 없다. 이익이 아닌 리스크와 생산단가가 늘어나는 걸 좋아하는 군수회사도 없다.
[28]
총력전 와중이었으니 자동차부품회사, 가전제품회사, 타이어회사까지 전차와 포탄,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했다. 그런 회사들이 민수용 대단위 생산시설을 전용해 만든 물량이 전쟁 전부터 명맥을 이어온 전문 전투기, 전차회사들보다 더 많을 정도. 이 회사들은 50년대 중반 이후 하나둘 군수부문을 접거나 합병하거나 청산해 사라졌다. 전쟁때야 "우리 회사에 좋은 무기 있어요"하고 시연하면 채택해주었지만 이젠 전쟁때 늘어난 여러 회사들이 국가의 콘테스트에 응모해 선정되어야 했고 두세 번 떨어지면 회사를 유지할 수 없었던 것이다.
[29]
2차 세계대전과 그에 뒤이은 한국전쟁을 겪으며 전쟁 패러다임과 무기가 너무 발전해버려서 가지고 있던 것들이 싹 구닥다리가 돼버렸다.
[30]
대통령이 그 한무더기 있는 군사 전문가들 머리꼭대기 위에 올라앉아서 그 전문가들의 온갖 방식들을 티끌 하나 안 놓치고 다 겪어봐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니...
[31]
식견(2차 세계대전 연합군 사령관)과 경력(원수)은 물론 인망이 좋다고 정평이 난 성격 덕분에 군 상층부에 인적 인프라도 갖추고 있었기에 당시 장성들이 결국은 아이젠하워의 정책에 따랐다.
[32]
미국의 국방비 지출은 전세계 1위이며, 이는 2위부터 10위까지의 지출을 모두 합친 것을 능가한다. 심지어 중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상위 20위 내의 국가는 대부분 미국의 군사동맹이거나 우호국임에도 그렇다.
[33]
예를 들면
이런 것이나
이런 것등..
[34]
당시 케네디는 쿠바에서의 피그스만 침공 실패로 국내외에서 정치적 곤경에 빠졌는데, 이런 와중에 전임 아이젠하워를 만나러 간 것이었다. 이날 찍힌 사진 중에는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뒷모습을 담은 것도 있었는데, 그 사진이 다음해 퓰리처상 보도사진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35]
서양권에서는 신과 대화할 때 please를 붙이지 않는 친칭(informal)을 쓰지만 국내 정서상 존댓말로 번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