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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보위/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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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규 앨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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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2

2003

2013

2016
[ 각주 ]

[1] Hours... Heathen 사이에, 2001년 미공개 정규음반인 Toy가 존재. 2021년 박스셋의 일부로 공개되었다.
[ 관련 문서 ]
||<tablebgcolor=#ffffff,#191919><tablecolor=#000,#e5e5e5><tablewidth=100%><width=500> 생애 ||<width=500> 공연 ||<width=500> ||

1. 어린 시절2. 데뷔 및 초창기: 1964-1967 / 1969-19723. 지기 스타더스트: 1972-19734. 위기와 소울 음악: 1974-19765. 베를린 3부작: 1977 / 19796. 아티스트에서 오버그라운드 싱어로: 1980-19837. 1984-1991: 오버그라운드 팝뮤지션으로서의 방황8. 1992-2004: 침체를 뛰어넘은 모험의 순간들, 사회에 안착한 락스타, 그러나9. 기나긴 침묵10. 2013-2016: 10년만의 귀환11. 지기 스타더스트, 별로 돌아가다

1. 어린 시절

런던 브릭스턴 거리에서 헤이우드 스텐턴 존스와 마거릿 메리 번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물려받은 유산이 많았으나 사업하다 다 까먹고 말단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으며 어머니는 웨이트리스 출신이었다. 태어났을 당시의 형제자매라고는 이복 누나들 뿐이었지만 나중에 이부 형인 테리[1]와 함께 살게 된다. 테리는 조현병 환자였는데, 이는 후에 보위가 시도하는 다양한 페르소나의 모티브가 된다.

유년기 시절부터 음악에 큰 관심을 보였으며, 열세 살부터 웨스트엔드 재즈의 영향을 받아 색소폰을 배우기 시작했다. 또한 독서를 통해 학구열을 불태웠으며 이는 그의 음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열다섯 살 때는 같은 학교를 다니며 밴드도 함께 하던 조지 언더우드라는 친구와 여자 문제로 싸우게 되었는데, 이 때 조지의 반지 주먹이 보위의 왼쪽 을 강타하면서 보위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결국 동공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되어 홍채를 가리게 되었고, 이 때문에 보위가 오드아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언더우드와는 하게 화해하고 이후에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언더우드도 후에 예술가가 되어 보위의 앨범 커버를 제작하기도 했다. #[2]

2. 데뷔 및 초창기: 1964-1967 / 1969-1972

학교에 불성실한 태도, 눈 부상으로 인한 장기 결석 등이 겹치면서 그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지 못했지만 이미 보위는 티렉스의 리더였던 마크 볼란 등과 친분을 쌓으면서 음악계를 향한 꿈을 키우고 있었다. 밴드를 결성하고 싱글을 발매하면서 음악계에 입문한 것은 1964년이었지만, 그가 데뷔 앨범을 발매하기까지는 2년의 세월이 걸렸다.

파일:데이비드 보위 1집.jpg
1966년 4월 데이비드 존스는 이후 '데이비드 보위'라는 예명으로 활동하게 된다.[3] 이듬해 6월에는 데뷔 앨범 ' David Bowie'를 발매하였다. 하지만 평단의 평이나 개인의 평이나 모두 썩 좋은 앨범은 아니었고, 이전 발매한 네장의 싱글과 더불어 그다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파일:데이비드 보위 2집.jpg
1969년에 나온 'David Bowie'부터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이 앨범은 67년의 앨범명과 동일하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 Space Oddity'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다. 하지만 보위가 데뷔 앨범을 영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대체로 이 제목의 앨범은 69년의 앨범을 말한다. 이 앨범에 수록된 곡 ' Space Oddity'가 싱글로 발매되었을 때는 마침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시기였고, UK 차트 5위 및 빌보드 핫 100 15위까지 올라간다. 다만 노래 가사와는 딴판으로 그저 space가 들어간다는 이유만으로 당시 영미권에서 달 착륙 관련 방송에 줄창 쓰였다. '가사를 알고 쓰는 거냐'며 까였다.[4]

1970년에는 안젤라 바넷과 결혼식을 올렸고, 다음해 5월, 아들 덩컨 존스를 낳았다.
파일:the man who sold the world.jpg 파일:bowie on mars?.jpg
지기 스타더스트 시절을 거쳐 1973년까지 보위의 백 밴드 기타리스트로 참여한 기타리스트 믹 론슨과 함께 1970년에 ' The Man Who Sold the World'를 발매하는데, 이는 이전의 스타일과는 다르게 하드 록을 시도한 앨범이었다. 하지만 대부분 The Man Who Sold The World하면 너바나의 커버곡을 더 먼저 생각한다. 지못미.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이 이 앨범과 동명의 타이틀곡을 MTV Unplugged에서 커버했는데, 그게 더 유명하다...[5]

이후 보위는 머큐리 레코드에서 나와, 믹 론슨과 함께 밴드 Arnold Corns를 결성해 몇 개의 싱글을 발매하였고,[6] 이후 다시 솔로로 돌아와 RCA 레코드와 계약을 하고 1971년 ' Hunky Dory'를 발매한다. 이전까지의 보위는 자크 브렐과 같은 유럽 쪽 대중 음악에 영향을 받았지만, 이후에는 벨벳 언더그라운드, 특히 루 리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7] 그 뿐만 아니라 앤디 워홀, 밥 딜런 등에도 영향을 받아 앨범에 이들의 이름을 넣은 곡들을 수록했다. 하지만 이 앨범도 발매 당시에는 큰 반향을 주지 못하고[8], 사실상 망했다.[9] 그리고 보위는 다시 한번 음악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3. 지기 스타더스트: 1972-1973

파일:ZIGGY STARDUST.jpg 파일:Aladdin Sane.jpg

보위는 당대 음악계에 센세이션을 선사하고자 했는데, 동성애자 커밍아웃과, 붉은 머리, 파격적인 의상의 글램 록을 통해 영국 음악계에 도전장을 내민다. 기본적으로는 티렉스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미국의 로커 이기 팝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그 결과 나온 앨범이 바로 1972년에 나온 불후의 명작 < The Rise and Fall of Ziggy Stardust and the Spiders from Mars>[10]이다. 이 앨범은 티렉스의 Electric Warrior와 함께 글램 록을 대표하는 음반으로 남았는데 이듬해까지 보위는 자신을 'Ziggy Stardust'라고 부르면서 활동한다. 이 당시 루 리드 Transfomer 이기 앤 더 스투지스 Raw Power를 프로듀싱 해 주기도 했다.

이듬해 발매한 < Aladdin Sane>에서는 얼굴에 번개무늬를 그린 앨범 커버를 발매했는데, 한동안 보위의 팬들은 공연장에 올 때 이 번개 무늬를 그려서 오는 경우가 많았다. 그 이후 여러 소위 무대 위 컨셉이라도 할 수 있는 페르소나들을 중심으로 무대연출을 선보였고, 곡들 역시 그 페르소나의 성격에 따라 다르게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지기의 페르소나가 데이비드 보위의 유명세, 그리고 실제 데이비드 존스의 자아를 잡아먹기 시작하며, 보위는 이따금씩 자신을 진짜 지기로 혼동하기 시작한다. 결국 휴식 및 새로운 도전을 위해 보위는 1973년 7월 3일 해머스미스 공연에서 지기 스타더스트의 은퇴, 사실상의 사망선고를 발표하고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4. 위기와 소울 음악: 1974-1976

지기 스타더스트에서 벗어난 당시 글램 록은 하락세였고 글램 록의 양대 산맥 중 한 축이었던 티렉스는 이미 한물 간 밴드로 인식되고 있었다. 보위는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장르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 Pin Ups'라는 커버 앨범을 낸 후에는 그의 세션 밴드였던 Spiders from Mars와도 결별한다. 다음 앨범 ' Diamond Dogs'에서는 그전까지의 글램 록 노선을 견지하면서 새로운 페르소나 Halloween Jack을 선보였으나, 이 앨범에 수반하는 Diamond Dogs 투어 와중에 보위는 이미 소울 음악 장르에 심취해 있었으며 소울을 자신의 음악에 흡수시키기 위해 흑인 세션[11]들을 대거 기용하여 투어 종료 후 바로 Soul 투어를 진행, 투어 도중 작곡된 곡들의 라이브와 녹음을 개시한다.
파일:Thin_White_Duke.jpg 파일:Thin_White_Duke..?.jpg
투어 도중에 녹음하여 이듬해 발표한 ' Young Americans'는 완전한 소울 앨범이었으며, 앨범 제목에서 노린 것과 같이 미국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1976년 보위는 그가 출연했던 영화 <The Man Who Fell to Earth>와 당시 듣고 있던 크라프트베르크, 노이! 등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페르소나 Thin White Duke의 컨셉을 구상하였으며,[12] 이를 바탕으로 소울과 록의 융합을 이룬 걸작 < Station to Station>을 발매한다. 지기 스타더스트를 넘어 앞으로 나올 후속작으로의 전환을 이끌어 낸 이 앨범은 상업적으로도 큰 흥행을 일으키면서 빌보드 3위, UK 5위의 성적을 거둔다.

그러나 이 시기는 또한 보위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적 시기였는데, 그의 코카인 중독이 절정에 달한 것이다.[13]

여기에는 복잡한 시대적 배경이 있다. 그 시대를 대표한 밴드 중 하나였던 도어즈 명칭 유래를 보면,18세기 영국 시인인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천국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의 한 구절인 "If the doors of perception were cleansed everything would appear to man as it is: infinite."(지각의 문들이 깨끗이 청소되면 모든 것이 진실된 모습으로 무한히 보일 것이다.)에서 인용한 것이라 하는데, 이를 그 시대 사람들은 환각 체험담을 담은 올더스 헉슬리[14]의 <인식의 문>(The Doors of Perception)이라는 작품과 연결지어 해석했다. 마약 등으로 육체를 극한으로 학대하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들면 인간의 감각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을 넘어 미지의 것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이유로 19세기 음악계에서도 약물 남용이 있었다. 링크 당시에는 약물의 부작용을 잘 알지 못해서 약물이 감각의 지평을 넓히는 수단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15][16], 보위도 처음엔 그런 이유에서 마약을 접했으나, 코카인에 중독이 되고 나니 자기가 쓴 곡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기억력에 악영향을 주었으며, 곡을 쓸 때 같은 부분만 계속 반복하게 되어서 다음 단계로 진행이 안 되었다고 한다.
또한 LSD를 통한 환각 체험은 그냥 원래 자기 머릿속에 있었던 게 나오는 것뿐이라며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이는 후술할 플레이보이 인터뷰에서 언급한 사실이다.[17][18]

1976년 플레이보이지와의 인터뷰[19]에서 그는 히틀러는 슈퍼스타였다라는 발언을 하게 되어 나치 옹호 논란에 휘말린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치즘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라, 미디어를 활용하는 히틀러의 카리스마적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이지만, 아무래도 유럽에서 금기시되는 인물이다 보니 게다가 Station to Station 투어 도중 스톡홀름에서는 "영국은 파시즘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 등의 발언을 하고[20], 나치식 경례를 했다는 논란이 이는 등 잇달아 문제를 터뜨리게 된다.[21] 후에 그는 이에 대해 사과하면서 "약물로 인해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라고 후회한다. 'Station to Station' 제작 과정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인터뷰 중 말한 적이 있고, 그 당시 살던 로스앤젤레스는 '그 엿같은 동네는 지구 표면에서 지워져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그야말로 완벽한 흑역사. 그리고 그는 베를린으로 떠나 요양 겸 후속 앨범 작업에 착수한다.

여담으로, 머그샷도 이 시기에 찍혔다. 원래는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퇴직 경찰관 집에 있었는데, 집 정리를 한다고 쓰레기통에 버린 걸 경매회사 직원이 우연히 발견해 경매에 부쳤다고 한다. 링크 그래서 이 머그샷은 2007년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비난은커녕, 화보 같다는 찬사가 지금도 쏟아지는 중이다.
파일:Legendary Mugshot.jpg

5. 베를린 3부작: 1977 / 1979

파일:Berlin trilogy [LOW].jpg 파일:Berlin trilogy [Heroes].jpg
파일:Berlin trilogy [Lodger].jpg

베를린에서 그는 전자음악의 대가 브라이언 이노와 함께 작업하면서 서독 크라프트베르크, 노이! 등 크라우트락의 영향을 받은 앨범 < Low>를 1977년에 발매한다. 이전의 앨범들과는 달리 상당히 음악이 성숙해졌다. 이는 그가 서독에서 코카인 중독 치료에서 받은 고통이 큰 영향을 미쳤다. LP의 뒷면 전체를 채우고 있는 Warszawa - Art Decade - Weeping Wall - Subterraneans 네 곡의 연주곡은 Low 앨범의 백미. 그전의 보위 앨범들은 그가 선보였던 페르소나의 이펙트가 강했던 반면 베를린 3부작은 그야말로 보위 자신의 음악적 역량을 마음껏 선보였던 작품으로 평가된다.

Low의 완성 직후 보위는 이기 팝의 솔로 앨범 The Idiot Lust for Life의 프로듀싱 및 공동작곡에 참여하며, The Idiot 투어에서 키보디스트를 맡기도 했다.

Lust for Life의 작업 이후 투어에는 참여하지 않고, 같은 해 10월에는 < "Heroes"> 를 발매한다. 이 앨범 역시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데, 앨범 제목이자 타이틀 트랙인 Heroes는 노이!의 곡 Hero에서 따온 것이며, V-2 Schneider는 크라프트베르크의 당시 멤버였던 플로리안 슈나이더에게 헌정하는 곡이었다. Low 앨범과 마찬가지로 뒷면의 곡들은 대체로 어두운 연주곡이지만(Sense of Doubt - Moss Garden - Neuköln. 예외가 The Secret Life of Arabia), 앞면의 곡들은 Low의 곡들보다 좀 더 록에 가깝고 대중 친화적인 선율을 가지고 있다. 세 번째 트랙인 동명의 곡 'Heroes'는 대중들에게도 명곡으로 남아서 후대에 많은 후배 음악가들이 커버하기도 했다. 앞뒤 앨범과는 다르게 작업 과정 전체가 베를린에서 이루어진 진정한 베를린 3부작 앨범.

1978년 Low / Heroes 테마의 Isolar II 투어를 마치고, 보위는 1979년 < Lodger>를 발매하면서 베를린 3부작의 마침표를 찍는다. Lodger는 스위스와 미국에서 녹음되었다. 베를린 3부작으로 불리는 건 앨범이 독일 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 베를린 3부작에서는 독일의 크라우트록, 신디사이저, 일렉트로닉, 아트 록을 적절히 조합하면서 그의 음악적 능력을 모두 보여줬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보위의 음악적 전성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었다. 베를린 3부작이 예술적 성과를 이뤄냈다면 보위의 상업적 최전성기는 80년대에 찾아온다.

6. 아티스트에서 오버그라운드 싱어로: 1980-1983

파일:Ashes to Ashes.jpg 파일:Let's Dance.jpg

베를린 3부작에서 보여준 음악적 시도를 잠시 뒤로 하고 보위는 다시 새로운 트렌드에 융화되고자 노력했다. 1980년 미국에서 살기 시작하며 발매한 < Scary Monsters (And Super Creeps)>에 수록된 ' Ashes to Ashes'는 UK 1위를 차지하면서 그의 건재함을 과시하는 음악이 되었고, 1981년에는 과 함께 ' Under Pressure'를 녹음하면서 세 번째로 UK 차트 1위에 오르게 된다. 또 그는 영화 The Hunger를 촬영한 뒤 1983년에 EMI와 계약하게 된다. 보위는 당시 세계를 휩쓸던 디스코 열광의 추세를 받아들여 훵크그룹 ' 시크'의 기타리스트인 나일 로저스가 프로듀싱한 Let's Dance를 발매한다. 보위 본인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나 타이틀 곡 ' Let's Dance'는 빌보드 싱글 1위의 영예를 차지하고, 후속 싱글 두 장 모두 빌보드 차트 20위 안에 들었다. 이 앨범을 통해 보위는 그야말로 최고의 상업적 업적을 기록한다. 미국에서는 데이비드 보위하면 'Let's Dance'가 가장 먼저 입에 오를 정도로 그의 상업적 히트곡으로 남았다.[22] 아쉽게도 여기까지가 현재까지 자타가 공인하는 보위의 음악적 최전성기이다.

7. 1984-1991: 오버그라운드 팝뮤지션으로서의 방황

Let's Dance의 성공은 보위 본인에게 크나큰 독이 된다. 특히 이어진 Serious Moonlight 월드 투어에서 그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100% 히트곡 위주로 채워진 셋리스트와 어마어마한 관중들을 보며 보위는 처음으로 자신의 팬들이 무얼 원하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여기 와있는 관객들 중에 벨벳 언더그라운드 곡을 들어본 사람이 있긴 할까? Let's Dance 하나만 보고는 내 기존의 음악적인 노력들을 무시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인데.' 이런 식의 고민을 하던 와중, 기획사에서 보위를 '히트 상품'으로 인지하고는 신보 발매를 재촉하자 음악적 영감도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채 뒤이어 Tonight을 발매하게 된다. 유행가로서의 목적은 그럭저럭 달성했으나, 짜내다시피 써낸 곡의 질은 현저히 하락하기 시작한다.
3년의 공백 후 발매한 Never Let Me Down에서는 Let's Dance에서 시도하였던 메인스트림과 록의 융합을 계속 선보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온 앨범들이 너무 어정쩡해서 결국은 큰 실패를 맛보게 된다. 심지어 본인조차도 "나는 길을 잃었었다"라고 말할 정도. 보위는 생전에 이 앨범의 곡들을 다시 리메이크하여 개정판을 만들려고 했고, 결국 보위 사후인 2018년 재녹음과 리프로듀싱을 통해 개정판이 나오고야 말았다. 완벽한 흑역사화.
이승환이 보위의 명성을 처음 접하고 궁금증에 산 앨범이 Never Let Me Down 앨범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자 이게 뭐지? 라는 반응을 보이고 보위에 대한 관심을 한동안 안 두었다고. 나중에 다른 곡들을 접한 뒤에야 비로소 뒤늦게 이런 음악을 알게 되었다는 것에 후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Never Let Me Down은 음악적으로나 상업적으로나 모두 그냥저냥이었지만 뒤따른 Glass Spider 투어는 달랐다. 매일 12시간 가까이 이어진 리허설로 상징되는 노력으로부터 이루어진 연극적이고 거대한 퍼포먼스들, 마치 페르소나 시절을 생각나게 하는 강력한 무대연출과 영상, 무용과의 합치는 현대 대중음악 공연들에까지도 주로 인용되는 부분들이 있을 정도로 쇼 문화에 전무후무한 영향을 미쳤다. 상업적으로 이 공연은 엄청나게 성공했지만, 실외 공연에서 보위가 지향했던 스토리라인이 눈에 띄지 않는 단점이 있었고, 당시 음악평론가들이 이 공연을 집중도가 낮고 난잡하다며 크게 비판하자 보위는 자신이 음악적으로 실패한 뮤지션이라는 생각과 함께 큰 슬럼프에 빠지게 되며, 투어 무대에 사용된 세트들을 태워버린다.
절망 속의 휴식기 이후 보위는 지금까지의 팝 친화적인 노선을 버리고 하드 록에 그런지 록을 가미하는 쪽으로 다시 방향을 전환하는데, 놀랍게도 이 와중에 자신의 이름마저 버리고 기타리스트 리브스 가브렐스[23]를 발굴하고 이기 팝과 함께했던 세션들인 세일즈 형제를 리듬 파트에 기용하여 Tin Machine이란 이름의 밴드를 만들어 1989년 데뷔 앨범 Tin Machine을 발매한다. 그러나 큰 특색이 없었던 음악은 밋밋했고 판매고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다만 이들의 음악이 펄 잼을 필두로 한 그런지에 영향을 줬다는 주장이 있다). 밴드의 휴면기 사이 베스트 트랙을 위주로 보위가 솔로 라이브를 했던 Sound+Vision 투어 이후에 밴드는 재결합하여 Tin Machine II라는 제목으로 앨범을 한 장 더 발매하지만 이는 더 큰 실패로 돌아왔고 보위는 결국 그룹을 해체한다.[24] 스튜디오 앨범으로서는 폭망이 맞고 심지어 보위도 2003년 Reality 투어 과정을 찍은 다큐멘터리에서 휴게소에서 염가판매에 나와있는 Tin Machine과 Tonight을 보고 "너무 안팔려서 여기 염가판매에 걸려있다"고 웃는 장면이 있지만, Tonight의 싱글인 Blue Jean까지는 매우 좋은 판매고를 가지고 있었고 보위에게 메인스트림의 영광을 안겨주었던 시기였다. 다만 보위에게는 "길을 잃었었다"라고 회고되는 시기.
틴 머신의 해체 이후 보위는 세일즈 형제들과는 사적인 친구관계만 유지하되 기용을 중단, 리브스 가브렐스는 90년대 내내 계속해서 세션으로 기용되며 함께한다. 이후의 행적은 다음 항목 참고.

8. 1992-2004: 침체를 뛰어넘은 모험의 순간들, 사회에 안착한 락스타, 그러나

1992년에는 프레디 머큐리 추모 공연에 참여하여 All the Young Dudes, Heroes, Under Pressure를 불렀다.
동년도 소말리아 출신 미국인 모델인 이만 무함마드 압둘마지드와 2년간 사귀다가 재혼에 골인하며, 틴 머신을 해체하고 Real Cool World 싱글로 솔로 복귀한다.
이후 연애결혼과 민족음악, 테크노에 영향을 받아 솔로 복귀작으로 Black Tie White Noise를 발매했지만 록과 소울과 일렉트로니카가 혼재된 이 음반을 평론가들은 미심쩍어했고, 보위의 이름을 보고 구입한 대중들도 혼란스러워했다. 그래도 Let's Dance 이후 10년간의 방황과 음악적 저하기보다는 보위 개인에게도 만족스럽고, 대중들에게도 괜찮은 반응을 얻은 앨범이었다. 결혼식을 위해 보위가 직접 만든 인스트루먼탈 몇 곡이 앨범에 들어가 있다. 이를 계기로 결혼식장에 찾아온 브라이언 이노와 작업을 약속한다.
그 다음으로 어덜 커절케이를 원맨 세션으로 내세워 OST앨범 The Buddha of Suburbia를 낸다. Scary Monsters 이후 보위의 숨겨진 명반으로 꼽히는 세미 인스트루먼탈 음반.
94년부터 브라이언 이노와 꾸준히 접촉하기 시작한 보위는 "예술 살인 의식" 이란 행위에 기반한 디스토피아 세계관을 만들고, 밀레니엄까지의 5부작 조곡 모음집을 기획한다. 페르소나를 버리되 세계관을 취하여 세계관 속 다양한 사람들의 면모를 간접적인 언어로 조명하고자 한 보위는 첫번째 조곡 모음집 LEON을 12시간 가까이의 즉흥연주 모음으로부터 추출하여 완성하나, LEON의 발매에 동의하는 음반사가 없자 LEON의 사운드 세팅과 세계관에 기반하여 1995년 인더스트리얼 사운드를 도입한 브라이언 이노와의 재협업작 1. Outside를 발매하였다.
앨범 자체도 실험적이었지만 곡들 못지않게 실험적인 투어 시도가 이루어졌다. 앨범 발매 2주 전에 시작한 투어에 발매도 되지 않은 앨범의 곡들과 이전까지는 한 번도 공연된 적 없는, 보위의 곡들 중 B사이드에 실리던 마이너한 곡들을 중심으로 세트 리스트가 쓰여졌고, 나인 인치 네일스가 오프닝 밴드로서 전 투어를 함께하며[25] 서로의 곡을 일부 함께 공연하였다.
보위는 나인 인치 네일스의 대표곡인 'Hurt'를 레즈너와 함께 화음을 넣어 불렀고, 레즈너는 감격했다.

관객동원력이 좋았던 트렌트의 팬들도 투어에 제법 많이 동원되었지만 서로의 팬들은 성향이 달랐다.[26] 보위는 트렌트의 팬들은 무대에서 자신을 잡아먹을듯 했고 본인의 팬들도 둘의 협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회고했을 정도. 이 투어는 두 사람이 무대 공연을 그만둔 2012년이 되어서야 재평가되어 롤링 스톤에서 선정한 최고의 락무대 10에 들게된다.
그러나 보위는 젊은 관객들을 꾸준히 설득시키는 작업에 재미를 크게 느꼈으며, 나인 인치 네일스와의 동반 투어가 종료된 후에도 모리세이를 오프닝으로 세워 겨울과 이듬해 여름에 유럽 지역 투어를 시도한다. 그러나 모리세이는 나인 인치 네일스+보위 식의 합주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보위가 모리세이의 곡 일부를 함께 연주하려 시도하자 보위를 욕한 후 투어 초부터 잠수를 탔다.[27]

여름의 유럽 지역 투어에서 정글과 중흥기 드럼 앤 베이스에 큰 흥미를 느낀 보위는 최신의 조류에 적응하려 시도하며 드럼 앤 베이스를 도입한 Earthling을 1997년 발매하였다. 또한 발매 직전 50세 생일 기념 콘서트를 통해 앨범의 수록곡들을 선공개하며, 소닉 유스, 푸 파이터즈, 블랙 프란시스, 빌리 코건, 루 리드 등과 함께 연주를 하였다. 이러한 시도들은 그를 영국 차트 정점에 올리며 화려한 예술적 부활을 알렸으나, 일부 평론가들에게는 보위가 이제 시대의 선도자가 아니라 후배들의 뒤나 쫒는 신세가 되었다며 좋지 못한 평을 받았다.[2020년대]
특히 드럼 앤 베이스 장르가 중흥하던 클럽 문화에서 매력을 느낀 보위가 Earthling 투어 공연장 다수를 클럽과 볼룸 등으로 잡게 되자, 소속사는 보위의 상품성이 떨어졌다고 느끼고 투어의 라이브 앨범 발매를 불허하면서 보위를 압박하였다.

이 시기 보위가 매진한 또 하나의 혁신적 방향성은 인터넷과 채권판매 산업이었다. BOWIENET이라는 자신의 회원제 개인 사이트를 런칭하고 팬들과 자유롭게 채팅을 나눴으며, 리믹스 콘테스트나 미공개곡의 다운로드 등 팬들이 사이트 운영에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넓혔다. 심지어 이후 발매되는 곡의 멜로디를 선공개한 후 작사 콘테스트[29]까지 열기도 했다. "보위 채권" 은 일종의 보증기금으로써, 보위가 저작권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지 않은 곡들을 채권 판매기금을 통해 구매하는 동시에 10년 만기로 구매자들에게 돈을 돌려주는 구조였다.

그러나 밀레니엄을 앞두고 보위는 나이들어감에 대한 관조를 서서히 내비치기 시작했고, 보위넷의 시스템 등 혁신을 추구했던 여러 프로젝트들은 지속했지만 음악적으로는 혁신의 길을 서서히 놓기 시작했다.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갈망 역시 지기 스타더스트 30주년 이후로는 상당히 상실한다. 이 과정에서 Hours 발매 직전 틴 머신 때부터 보위의 90년대 사운드를 견인해 온 기타리스트 리브스 가브렐스가 밴드를 탈퇴한다.
이후 발매하는 ' Hours...'는 Hunky Dory 스타일의 글램 록으로의 회귀를 보여주었다. 앨범 후반부의 곡들은 Earthling 시절의 전자음 사운드를 꽤 암시하지만, 투어에서 라이브되지 않음으로써 보위는 자신의 록 음악인으로서의 회귀를 확실시하는 듯 했다.

그래도 그의 라이브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아서, Station to Station의 기타리스트 얼 슬릭을 재영입하여 진행한 2000년의 글라스톤베리 헤드라이너로서의 라이브는 지금까지도 역대 최고의 글라스톤베리 라이브 10위 안에 들며, 자신의 공연이 방송되길 원하지 않던 보위에 의해 BBC 생중계가 중단되자 그로부터 2주동안 BBC에서 자체적으로 중계를 중단한 것으로 오인한 시청자들에 의해 온갖 항의서한이 날아들어올 정도였다. 2018년에 음반 및 DVD로 발매되었다. 보위의 Greatest Hits를 트렌디한 스타일로 라이브한 격이니 입문자들은 유튜브로라도 꼭 들어보자.

이후 발매되는 Heathen[30], Reality는 진지한 동시에 다양한 정통 록의 사운드를 보여주며 보위가 꾸준히 작품 활동에 매진함을 알렸고, 앨범 발매에 이은 Heathen 투어, Reality 투어 등의 전세계 투어와 Tibet House Benefit 등 각종 사회적 공헌 공연 참여 등을 통해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다만 안타깝게도 보위의 지기 스타더스트 30주년 뮤지컬, 2001년 발매 예정이었던 셀프 리메이크 앨범인 Toy 등의 계획이 취소되고, 보위의 어머니가 사망하면서 보위 개인에게는 약간의 부침이 있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보위 개인적인 생활의 영역에서도 70년대와 큰 대조점을 보이는 시기인데, 92년의 소말리아 출신 모델 이만과 결혼 이후 뉴욕 맨해튼에 자리를 잡고 평생 살면서 그의 사적인 생활 자체도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는 80년대에 술도 완전히 끊었고 90년대 시기에 들어 담배도 그만두었다. 아침 6시에 일찍 일어나 차이나 타운을 돌아다니는 게 소일거리라고 했을 정도. 더욱이 이만과는 2000년에 알렉산드리아라는 늦둥이 딸을 보게 된다.

9. 기나긴 침묵

활발한 활동의 상징과도 같았던 Reality Tour 말, 여러 사건사고가 터졌다. 보위의 무대관련 기사로 일했던 인물이 오프닝 공연까지 끝난 뒤 조명장치 문제로 공연 시작 직전 낙사하며 공연이 취소되는 일이 벌어진다. 한 달 뒤 노르웨이 공연 중 관객이 던진 막대사탕의 막대가 보위의 눈에 꽂힌 적도 있었는데, 다행히도 눈에 큰 문제는 없었다.[31][32]
6월 중순 체코 공연에서는 과호흡과 심한 근육통 등의 이상증세를 보여 공연이 중단되었다. 이상증세로 인해 보위가 2차례 무대 입ㆍ퇴장을 반복했고, 결국 셋리스트의 절반즈음에서 공연을 종료하게 된다. 이틀 뒤 독일 공연 종료 직후 보위는 결국 쓰러진다(이 공연에서마저 추위와 신체적 고통으로 공연 후반 보위는 아예 관객이 던져 준 후드티로 갈아입는다). 근육통으로 오진된 심근경색 증상이 방치되었음이 뒤늦게 인지되었으며, 이로 인한 심장마비 및 응급 수술의 여파로 그의 모든 활동은 중단되고[33] 그의 음악 생활에 커다란 침묵의 시기가 온다.

이 시기 갑작스럽게 일본을 방문해 대규모 콘서트를 열기도 하는 등의 일도[34] 있었고, 2005년 가을에는 자신이 아끼는 밴드 아케이드 파이어와 함께 공연을 하기도 하였으나, 2005년 이후로 그는 어떠한 신곡도 발매하지 않았다. 2006년 자선 공연에서 게스트로 등장하여 Wild is the Wind, Fantastic Voyage, Changes를 부른 것을 마지막으로 그 이후에는 공연도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몇 년 정도의 공백기라고 여기던 팬들도 그의 침묵이 길어지자 조바심과 안타까움에 사로잡혔다. 보위가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후로 (새로운 정규 음반 발매를 기준으로) 음악적인 활동을 5년 이상 쉬어본 적이 없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2003년 이후 아무런 신보가 없었던 것은 정말로 이례적이라고 할 정도의 침묵이었다. 글램 시절의 음반들이 발매 35주년, 40주년을 맞이했음에도 'Ziggy...'의 40주년 기념반을 발매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자, 팬들 사이에서조차 '이제 보위도 사실상의 은퇴를 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분위기가 있었을 정도.

언론에서는 뉴욕 맨해튼 생활을 하고 있는 보위의 파파라치 사진을 간간히 기사로 내놓으며 락스타의 황혼기라는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파파라치속의 보위는 편한 옷차림으로 갤러리를 방문하거나 그림을 그리고[35], 공원을 산책하는 모습이었다. 시대를 풍미했던 아티스트는 이제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노년기로 들어간 듯이 보였다.

훗날 보위와 함께 활동했던 뮤지션들, 그의 몇 안되는 사적인 친구들에 의하면,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만들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어' 라며 작곡에서 손을 뗀 채, 늦둥이 알렉산드리아(2000년생)의 육아와 미술 활동, 성우 활동 등으로 소일했다고 한다.
outside 투어 때부터 함께하며 그가 개인적으로 애정하던 베이시스트 게일 앤 도시의 언급에 의하면, 보위가 아침마다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는것이 너무 행복하다는 이야기도 했다고...

10. 2013-2016: 10년만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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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보위의 66세 생일이었던 2013년 1월 8일, 정말로 뜬금없이 새로운 싱글 Where Are We Now? 가 공개되었다. 게다가 이 싱글과 함께, 10년만의 새 앨범 The Next Day가 3월에 발매 예정이라는 뉴스까지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전해졌다. 사실상 그 전에는 그가 새로운 음반 작업을 한다는 이야기조차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뜬금없는 사건이었다. 실제로 보위는 이 음반 작업을 위해 2010년 말부터 평소 자신과 음악 작업을 오랫동안 해 왔던 사람들에게만 몰래 연락을 하여 기밀 유지 서약서까지 받아가며 비밀을 철저하게 지켰다고 한다. 프로듀서로는 'Space Oddity' 시절부터 그와 함께 한 토니 비스콘티가, 그리고 밴드의 멤버들은 그와 오랜 시간 투어와 음반 작업을 함께 해 온 사람들이 참여했다.[36] 음반 작업을 함께 하던 사람들 역시 시간이 많이 지나 다른 뮤지션의 세션에 다수 참여하고 있었기에, 그 "다른 뮤지션들"에게도 보위의 소식이 알려지지 않도록 엄청나게 유의해야 했다.


오랜 침묵을 지키던 거장의 귀환 소식에 그의 싱글 Where Are We Now? 는 영국을 포함한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이튠즈 차트 1위를 곧바로 점령하였다. 앨범은 2월 말에 아이튠즈로 전곡이 공개되었으며, 한국의 정식 발매는 3월 13일.

앨범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상당한 호평이었다. 간만에 데이비드 보위의 명반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는 말까지 나왔을 정도. 평가 중에서는 심지어, 1980년 이후 최고의 보위 앨범이라는 말까지도 있을 정도였다. 보위의 복귀에 대해서 '락 역사상 가장 화려한 귀환'이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는데, 단지 광고를 위한 과도한 호들갑은 아니었다.

The Next Day 앨범은 정식발매 후 곧장 UK차트 1위를 차지했으며, 2013년 첫 주에만 4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해 가장 빠르게 팔린 앨범으로 꼽히기도 했다. 세계 여러나라에서 앨범 차트 1위를 찍을 만큼 상당히 호평.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앨범 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미국은 2위를 했는데, 1위를 한 건 본 조비의 신보였다. 앨범차트 1위 다툼을 보위와 본 조비가 한다는 것에 대해 "지금이 1980년대냐?"라는 반응이 있기도.

그러나 팬들의 바람과는 달리, 보위는 이 음반의 곡을 중심으로 하는 투어나 공연 계획은 없다고 밝혔다. 제작에 참여한 인물들은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았지만(앨범 제작 도중에 투어 여부를 묻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위는 처음에는 "당연히 언제나 그랬듯이 할거야"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제작이 진척될수록 점점 망설이기 시작했다고), 정작 보위의 공식적 언급은 없었고, 단발성으로나마라도 공연을 가지지도 않았다. "보위가 다시는 투어를 하지 않겠다고 공식적으로 말한 적은 없다"는 이유로 2014년까지도 라이브 퍼포먼스에 대한 기대가 있었으나, 무대 프로모터 존 기딩스[37]에 의해 "요즘 보위를 만나면 인사도 하기전에 '투어 안할거야'라고 말한다"는 기사가 나왔고, 결국 2015년 보위의 매니지먼트측에서 투어만이 아니라 보위의 무대은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다. 매니지먼트 측에서는 그의 퍼포머로서의 은퇴를 2015년으로 잡고있으나 상술한 2006년 알리샤 키스와 함께 Change를 부른 자선공연 무대가 마지막이다.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부른 것 자체는 그 1년 뒤인 2007년 Extras라는 TV 프로그램에서 만든 Pug Nosed Face라는 곡을 Extras 크루의 팬미팅에서 짧게 부른 것이 마지막.

Where are we now? 의 뮤직비디오에 이어서 공개된 영상은 The Stars(Are Out Tonight)과 The Next Day의 뮤직비디오인데, 이 두 뮤직비디오가 무척 파격적이다. Where are we now? 가 상당히 정적인 뮤비였던 데 반해, 뒤의 두 뮤직비디오는 상당히 격렬한 영상과 똘끼충만한 내용이다. 뮤비의 캐스팅도 무척 화려한데, The Stars(Are Out Tonight)에서는 틸다 스윈턴이 보위의 부인 역할로 출연해 평범한 아줌마와 광기에 가득한 여인의 두 모습을 너무나 훌륭히 연기했다. 또한 The Next Day에서는 게리 올드먼 마리옹 코티야르가 출연하는데, 상당히 반기독교적인 뉘앙스의 뮤비이다. 비밀 클럽 느낌의 장소에서 성직자 복색의 올드먼이 성녀의 컨셉을 한 탕녀 코티야르를 유혹해대는 모습은... 여기서 보위는 클럽의 한켠에서 노래를 부르는 듯 하더니, 마지막 장면에서 올드먼과 코티야르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승천한다.
Valentine's Day의 뮤직비디오가 뒤이어 공개되었는데, 구성은 단순한 편이지만, 중간 중간 보여주는 보위의 동작이나 가사의 내용에서 NRA와 개인의 총기 소지에 대한 것을 비판하는 느낌이 있었다. 기타를 정면에 대고 겨누는 자세라거나... 특히 한 손에 기타를 들고 하늘로 뻗은 자세는 찰턴 헤스턴이 NRA 연설에서 총을 든 모습을 찍은 사진을 http://soundcheck.wnyc.org/story/307257-david-bowies-hidden-agenda/ 의도적으로 따라했다는 지적이 있다. 가사에서도 제목이 그 발렌타인 데이가 아니라, ' 밸런타인'이라는 이름을 가진 소년의 날이라는 뜻으로, 가사의 내용에서 밸런타인이 총기 난사를 저지르고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일부 팬들은 이를 2008년 밸런타인 데이에 벌어진 노던일리노이 대학 총기난사 사건에 대한 곡으로도 해석하고 있다.

2014년 기존 앨범에 미공개 B사이드 8곡을 추가한 The Next Day Extra가 발매되었고, The Next Day는 Brit Arwards에서 남성 솔로 아티스트상을 수상한다. 이는 브릿 어워드의 최고령 기록이기도 했다. 시상자였던 노엘 갤러거는 "좀 예상 가능했지만, 수상자는 데이비드 보위야. 니들 설마 데이비드 보위가 여기 올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 그는 그러기엔 너무 쿨하다고."라고 일축했고, 케이트 모스가 70년대 그의 코스튬을 입고 대리 수상했다. 사실 데이비드 보위는 이러한 시상식에는 꽤 오래전부터 참여하지 않았고, 대부분의 시상식과 달리 프랑스의 아티스트 시상식에서 그가 참석하지 않았음에도 관계없이 시상한 후 수상배지를 우편으로 보내자 그 힙함에 감탄하여 방송에 배지를 달고 나온 적이 있는 정도이다. 케이트 모스를 통해 전달된 짧은 메시지는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반대하는 "Scotland, Stay with us."라는 멘트로 끝나는데, 스코틀랜드와 집안 가계적으로 전혀 상관이 없고 생활도 뉴욕에서 하고 있는 보위가 왜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관련 멘트를 남겼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38] 영상. 영상을 보면 노엘은 마치 누가 등장할 것처럼 중앙무대를 보면서 관객을 놀리고 있고 관객들은 진짜 데이비드 보위가 나오는 줄 알고 기립까지 한다.

2015년에는 두 가지의 큰 일이 보위 팬덤에 있었는데, 보위의 주크박스 뮤지컬인 <Lazarus>가 계획 중이며 공연될 것이라는 예고와, 그의 25번째 스튜디오 LP, Blackstar가 그의 69번째 생일인 2016년 1월 8일에 발매된다는 공식 발표가 전해졌다.

11월 19일, 신곡 Blackstar의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11월 뮤지컬 <Lazarus> 관련 회견장에 참가하여 2013년 복귀 이후 없다시피 했던 외부세계와의 접촉을 처음으로 보여주었다.

12월 17일, 신곡 Lazarus가 공개되었다.


데이비드 보위는 이번 앨범에서 도니 맥카즐린 쿼텟이라는 재즈 뮤지션들과의 협업을 했는데, 대중적으로는 아무래도 좀 난해한 사운드의 신곡이어서였는지 혹은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의 곡이어서였는지는 몰라도, 공개된 곡들의 당시 반응은 그냥저냥한 정도였다. 데이비드 보위가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음악적으로 계속 실험을 하고 있다는 점으로 주목받았고 평가 자체는 좀 더 좋았지만, The Next Day 앨범 때의 폭발적인 반응은 없었다.
"I'm the Blackstar" 라는 가사 때문인지, 발매 직후에는 보위가 40년만에 새로운 페르소나를 들고 나왔다는 추측이 많았다. 어쨌든 보위의 귀환을 모두가 반기고 있었다. 2016년 1월 10일 이전까지는...

11. 지기 스타더스트, 별로 돌아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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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석상에서 촬영된 보위의 생전 마지막 사진
2015년 11월 - 2016년 1월 사이 촬영 추정
Look up here, I'm in heaven.
...I'll be free, Ain't that just like me?
- 'Lazarus' 가사 中
"당신이 편안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당신이 죽었다는 뜻이에요."
데이비드 보위

2016년 1월 8일, 25번째 스튜디오 LP, Blackstar가 발매된 지 이틀 후인 2016년 1월 10일, 데이비드 보위의 사망 소식이 보도되었다. 69세 생일 이틀 뒤에 세상을 뜬 것이다. 가족들의 품에서 집에 편안히 누워 눈을 감았다고.[39]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던 중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부고에 팬들의 충격이 상당했고,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며, 심지어는 이것도 앨범 프로모션이냐며 현실을 부정하는 팬들도 상당수였다. 아들 던칸 존스가 결국 사망을 확인해주는 포스트를 트위터에 남기며 팬들은 절망. 가장 빠르게 반응한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 카녜 웨스트를 시작으로 전세계의 수많은 셀럽들이 추모의 메시지를 남겼다. 페이스북에 의하면 18개월 동안 투병을 해왔다고 한다. 해당포스트 보기
독일 외교부는 '베를린 장벽 붕괴 공헌에 감사하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냉전 시절 서독 베를린에서 열린 공연 모습이 담긴 동영상 링크를 트위터에 올렸다. 링크
심지어 영국 성공회의 최고 지도자인 캔터베리대주교가 BBC 라디오4와의 인터뷰에서 "너무너무 슬프다"면서 "70년대에 그의 노래를 끝도 없이 들으면서 지냈던 게 생각난다"는 발언으로 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링크
여담으로, 성공회 성직자 중에서 보위를 추모한 사람은 캔터베리대주교만이 아니었다. 무려 성공회 매체에 보위의 팬임을 밝힌 성직자들의 발언이 실렸다. 링크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모양인지, 40년간 친구이자 동업자였던 브라이언 이노와의 마지막 이메일에 작별인사를 담아 보냈다고 한다.[40] 브라이언 이노는 그 부분이 작별이라는 것을 보위의 사망 이후에야 깨달았다고 한다. 해당기사

또한 보위는 사망할 때까지 뮤지컬ㆍ앨범 프로모터와 프로듀서, 함께하던 밴드 멤버들인 도니 맥카즐린 쿼텟을 제외한 그 누구에게도 투병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앨범 작업을 완성하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으며, CNN과 빌보드는 유작 앨범에서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만들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가했다. 마지막 앨범인 Blackstar의 모든 곡들이 마치 그가 죽음을 준비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 특히 타이틀곡인 Blackstar와 마지막 유작 뮤직비디오가 된 Lazarus는 보위의 사망소식을 알고 나서 가사와 영상을 다시 곱씹어보면 소름끼치는 대목들로 가득하다.[41] 록 음악계에서 유작이 된 앨범 중, 뮤지션 본인의 죽음 자체가 앨범 전체의 분위기에 녹아서 만들어진 음반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42] Blackstar 앨범은 무척 이례적이기까지 하다.

그의 사망 때문인지는 몰라도 Blackstar 앨범은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앨범 차트 1위를 달성하였고, 빌보드에서도 1위를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데이비드 보위는 사망 직전에 'Blackstar'를 이을 앨범을 두 번째 뮤지컬 계획과 함께 제작하려고 했다고 한다. 죽음까지 몇 달 더 남았다는 생각에 그런 계획을 했다고. 기사참조

유작이 출시된지 2일 뒤에 사망한 것을 볼 때, 정말 음악으로 맺은 최후다.

Starman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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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음악적 성과를 기리는 메모리얼 콘서트가 2016년 5월 31일 미국 뉴욕 카네기 홀에서, 흑인 밴드의 본좌인 더 루츠, 신디 로퍼, 더 마운틴 고츠, 페리 페럴, 밥 딜런의 아들인 제이콥 딜런 등이 출연한 가운데 열렸다. 또한 BBC에서는 프롬나드 콘서트에서 데이비드 보위를 추모하는 공연을 갖기도 했다.

마돈나, 엘튼 존, 게리 올드만 등의 뮤지션 혹은 각종 유명인들이 그의 죽음을 기리는 트리뷰트 무대를 자신들의 공연에서 가지기도 했다.
2016년 열린 그래미 어워드에서 레이디 가가가 보위 트리뷰트 무대를 선보여 보위의 히트곡 여러개를 불렀으며, 2016년 BRIT 어워드에서도 로드(가수)가 보위 트리뷰트 무대로 Life on Mars?를 불렀다. 레이디 가가의 무대는 보위의 화려한 페르소나를 보여준 무대였다면, 로드의 무대는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인으로서의 위상을 기린 무대였다.

그리고 2016년 BRIT Icon 을 사망한 후에 수상했다. 애니 레녹스가 시상하고 보위의 오랜친구 게리 올드만이 대리 수상하였는데, 보위의 긍정적이고 쾌활한 평소 성격을 보여주는 에피소드를 몇 곁들여 그를 기리는 짧은 연설을 하여 많은 박수를 받았다. 링크[43][44]

Blackstar는 2017년 BRIT 어워드에서 남성 솔로 아티스트상, 한 해의 앨범상을 수상한다. 솔로 아티스트상은 그의 생전 마지막 작품인 뮤지컬 라자루스에서 주연을 맡았던 마이클 C. 홀이, 한 해의 앨범상은 아들인 던칸 존스가 대리수상하였으며 던칸은 보위가 자신을 위해 써주었던 Kooks의 가사를 인용하며 보위의 생전 작업들과 그 의미를 다시 한번 기렸다. 만일 데이비드 보위가 여기 올 수 있었더라면, 그는 아마 안 왔겠죠. 시상자 노엘은 인스타에 애도글을 남길 때도 보위를 the KING으로 칭했었다.

보위는 생전에 장례식을 치르는 것을 원치 않았고 미국 뉴저지에서 화장후 인도네시아 발리에 뿌려졌다.

2018년 HBO에서는 데이비드 보위가 언론에 인터뷰를 하지 않기 시작한 2011년부터를 시작으로 David Bowie, the last 5 years라는 다큐멘터리를 공개한다. BBC에서도 방영되었다. 이 다큐멘터리는 데이비드 보위를 영향력 있는 팝가수 이전에 현대 예술가로 바라보고 있다.

여담이지만, 사후 유언장이 공개되었는데, 1억 달러(한화 1,200억 원!)의 유산 중 절반이 아내 이만에게 상속되고, 나머지는 그의 아들과 딸이 나눠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유언장에 따르면 과거 그의 비서였던 코리네 코코 슈와브가 2백만 달러를, 아들의 보모는 1백만 달러를 받게 된다고 한다.

2021년 1월 8일, 그의 74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두 곡의 미발표 곡이 공개되었다. 공개된 노래는 밥 딜런의 Tryin' to get to heaven과 존 레논의 Mother를 커버한 곡들이다. 두 곡 다 1998년도에 녹음되었으며, 딜런의 곡은 보위의 라이브 앨범 LiveAndWell.com 작업 시기에 녹음했고, 레논의 곡은 존 레논 트리튜브 앨범에 수록하기 위해 녹음했지만 둘 다 미공개로 남아있었던 곡이다.

2022년 1월 3일. 워너 뮤직이 보위의 유족과 저작권 매매 계약을 맺었다. #


[1] 록 음악과 비트 문학을 소개해 주는 등 큰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이후 증세가 심해져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였고, 1985년 자살을 한다. 주변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데이비드 보위가 형이 보낸 편지를 받을 때마다 한없이 말없이 조용해지면서 형 생각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 둘의 사이가 좋았단 것을 보여준다. [2] 시선을 움직이는 것이나 시력에는 큰 영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위는 69세까지 별다른 보조기구 없이 살았으며 시력 저하에 관한 것도 알려진 적 없다. 오히려 보위가 히트하고 난 후에는 이 사건이 보위에게 득이 되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다. 자연 발생 오드아이보다 색 차이가 매우 커서 흑백 사진에서도 두드러지며, 화려한 스타일링을 그만두고 10년의 공백을 가진 후 컴백했을 때도 그를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아이덴티티가 되었기 때문이다. 보위는 여러 페르소나를 차용한 것과 더불어 여러 음악 장르를 시도하며 그때에 맞춰 스타일링을 바꿔왔는데, 어떤 스타일링에서도 그의 선명한 오드아이는 눈에 띄었다. 유명인으로서의 보위를 신비로운 이미지로 고정시켜준 특징의 하나다. [3] 예명을 쓴 이유는 몽키즈의 멤버 '데이비 존스'와의 혼동을 방지하기 위함. [4] Space Oddity는 통신 사고로 달에 착륙하지 못하고 우주미아가 된 우주비행사를 주제로 한 곡이다. 달 착륙 방송 같은 곳에 쓰기엔 별로 좋지 않은 곡. [5] 너바나의 라이브에 감탄한 보위는 1995년 나인인치네일스와 함께한 outside 투어에서 이 곡을 인더스트리얼로 편곡해서 들고 나오는데, 공연이 끝나자 나타난 나인인치네일스 팬들이 "우와 아저씨, 너바나 곡을 커버하다니 멋져요" 운운하자 속으로 '이것들이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라며 어이없어했다고 한다. [6] 'Moonage Daydream' 등의 이 곡들도 이후 재녹음되어 지기 스타더스트 앨범에 실려 있다. [7] 사실상 벨벳을 재발굴한 첫 인물이며, 심지어 뉴욕에서 OTL중이던 루 리드를 영국으로 데려와 2집 제작을 지원해(믹 론슨과 함께 프로듀싱을 해 주었고, 일부 세션으로도 참여했다.) 그가 솔로 뮤지션으로서 경력을 이어 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쯤 되면 은인이다. 실제로 루 리드는 그가 공연장에서 White Light/White Heat를 부르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8] 하지만 후대에 나름 실험적인 명반으로 재평가되면서 보위의 대표작으로 인정받는다. [9] 이 앨범이 팔리고 차트가 올라간 것은 지기 스타더스트가 흥한 다음부터이다. 결과적으로는 UK차트 3위에까지 오른다. [10] 지기 스타더스트와 화성에서 온 거미들의 흥망성쇠, 줄여서 Ziggy Stardust라고 부른다. [11] 데이빗 샌본(색소포니아)이나 루터 반드로스(소울 보컬) 같은 뮤지션들이 보위를 통해 이 시기 발굴된다. [12] 이 때를 기반으로 정말 오랜만에 금발로 돌아왔으며 그동안 상징이었던 붉은머리와 화려한 화장은 보기 힘들어진다. [13] 이때 보위는 하루에 우유 한 잔과 말린 피망, 코카인만 먹었다고도 하는데, 얼마나 말랐었는지 2014년 경 그 케이트 모스가 보위의 실제 코스튬을 받았지만 당시 그는 너무 말라서 그 옷이 케이트 모스에게 맞지 않았다고 할 정도였다. 헤로인 시크의 아이콘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바짝 마른 체형의 모스이고, 남성 옷이 웬만해선 여성 옷보단 크단 걸 감안하면 대체 얼마나 마른 건지... [14] 다만 오해해서는 안 될 것이, 올더스 헉슬리는 오히려 구도자에 가까운 사람이었다. 그래서 종교에 대해 탐구한 서적을 남기기도 했다. 링크 그의 환각 체험은 고행의 일환이었을 뿐, 이기심에서 벗어나 신성한 실재와의 합일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실제 추구하는 방향은 기성 종교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의 대표작 멋진 신세계에서는 국가에서 국민에게 행복감을 심어 주기 위해 소마라는 약물을 배급하는 것을 비판한다. 그런 점에서 약 빨고 황홀경에 빠지자고 선동하는 사람은 결코 아니다. [15] 그런 점에서 예술 분야의 약물 복용은 단순히 기록 경쟁을 위한 스포츠 분야의 도핑과는 그 동기가 다소 다르다. 비유하자면, 탐험가가 몰래 국경을 넘어 밀입국을 하는 것과 비슷한 동기였다. 물론 대마초를 피우면 음감이 예민해진다는 속설도 있긴 하지만, 이는 입증되지 않은 것이며, 보위도 부정한 바 있다. 그보다는 예술 분야는 원래 일부러 미쳐야 한다는 인식 탓이 크다. [16] 여기에 환각 상태를 몸소 알아보려는 임상실험적인 동기도 크게 작용했다. 단순한 기능 증진이 아니라 경험치를 쌓는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실제로 문학계에서는 약물을 복용한 후의 심리 상태를 묘사한 작품도 일찌기 다수 있었다.이 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실제로 코카인 복용 체험을 소재로 시를 쓴 의사 출신 시인도 있었다. # 이 경우는 의사답게 적당량만 복용하여 중독자가 되진 않았으나, 차별화된 경험치를 쌓기 위해 위험을 무릅쓴 거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아주 운이 좋은 거고 대개는 그 댓가가 끔찍하다. [17]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 뮤지션들은 극한을 체험해야 한다는 유혹을 받았다. 스웨이드 브렛 앤더슨도 한때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언급된 '인식의 문'을 열기 위해 실험적으로 마약을 투여해 봤다가 중독자가 되었고, 그 때문에 이기적이고 얼빠진 인간이 되었으며, 그래서 중독에서 벗어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18] 또한 광기를 주제로 한 작품은 스스로 미쳐야 진정성 있는 작품이 나온다는 인식도 있었다. 일례로 마릴린 맨슨 Antichrist Superstar 앨범 녹음 당시 일부러 자해를 하고 멤버들과 약물 복용을 실험했다. 당시 프로듀서 중 한 명이었던 트렌트 레즈너도 같이 마약을 하고 기물을 파손하는 난장판에 동참했다. 하지만, 마약의 부작용으로 작업 자체에 집중을 할 수가 없어 원만히 진행이 되지도 않았고,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지 않아 레즈너는 맨슨을 비롯해 그의 밴드 멤버들과 사이가 나빠졌고, 훗날 레즈너는 이 시절을 후회하는 늬앙스로 인터뷰를 한다. 그리고 그 전에 투어에서 만났던 보위의 조언을 떠올리며, 결국 마약을 끊기로 결심한다. 즉, 앞서 언급한 헉슬리 같은 사람의 의도와는 달리, 변질되기 쉬운 위험한 방법인 것이다. [19] 참고로 여기서 보위를 인터뷰한 기자가 카메론 크로우 감독이다. 그는 당시 10대 소년이었다. [20] 보위는 약물 속 환각에서 파시즘 영국 사회의 총리가 되는 경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21] 다만, 나치식 경례는 그냥 손을 흔들어 인사하려는 순간이 찍힌 사진이 언론사의 악마의 편집으로 인해 그렇게 알려졌다는 해명이 있다. 2017년 기사에 당시 포토그래퍼의 발언도 언급된다. 유태인인 자신이 느끼기엔 나치 동조자라는 느낌은 안 들었다고 한다. [22] 본인도 이 부분을 좀 꺼렸는지 코난 오브라이언 쇼에서 따로 언급한다.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이 내게 말하길(길을 지나다니며 보위를 보는 사람들을 언급하는듯), "Hey! <Let's Dance!>" 나 춤(그 곡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싫어하거든요? 어후, 멍청하긴!" 이렇게. [23] 지금 더 큐어에 계시는 그 분 맞다. [24] 대외적으로는 밴드의 상생구조에 대해 본인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게 원인이라고 밝히고 있다. 말로는 모두 평등하다고 하지만 결국 보위와 그에 복종하는 밴드세션의 구조였기 때문에 그저 솔로 데이비드 보위에서 원맨밴드로 변신한 것일 뿐이었다고. 보위도 초기에는 밴드를 운영했었으나 이 당시 보위는 새로운 밴드를 꾸리기에는 너무 거물이었다. [25] 10곡 이상의 셋리스트를 보위가 용인하며 오프닝 밴드라기보다는 공동 투어 취급을 받는다. 실제로 나인 인치 네일스 투어 크로놀로지에서는 "Dissonance Tour" 로 따로 분류한다. [26] 비유하자면, 당장 신해철이나 서태지 같은 윗세대 백화점형 록 뮤지션이 실리카겔 공연에 게스트로 나타난 것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이는 사운드상의 불합치나 곡의 익숙함 정도의 차이에서도 문제가 된다. [27] 모리세이 문서에 가 보면 알겠지만, 이 이후 모리세이는 보위를 꾸준히 'David Showie' 라 부르며 욕했다. The Next Day의 특정 곡이 참다못한 보위가 모리세이에게 보내는 답이라는 설이 있다. [2020년대] 이러한 평은 2020년 초 코로나 시기 여러 앨범들에 대한 리스닝 파티가 있던 시기에 서서히 역전되기 시작했다. 현생에서 활동하는 인사가 아닌 "역사적으로 박제된" 보위의 유명하지 않던 시기들이 다시 오버그라운드에서 적극적으로 논의되며 이 앨범의 실험성에 대한 본격적인 재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직 평가가 압도적으로 변화하진 않았지만, 당시의 B사이드들과 앨범 자체의 박스셋, 소문과 부틀렉만 무성하던 90년대 라이브들이 전격적으로 발매되어 컨셉트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며 2020년대 중반 기준 이전의 평가가 조금 수정되고 있다. [29] Hours 앨범의 What's Really Happening [30] Let's Dance 이후 사이가 나빠졌던 토니 비스콘티가 정식으로 프로듀서 자리에 복귀한 첫 풀렝쓰 음반이다. [31] 안구에 꽂힌 것은 아니고 안구와 눈꺼풀 사이에 꽂힌 것. 보위는 또 이 상태에서 노래를 불렀다. 당시 부르고 있던 노래는 Earthling 앨범의 Battle for Britain. [32] 악의적 테러가 아니라 우발적 사고로 여겨지는 사건이다. 노르웨이에서 투어 중 발생한 사건인데, 노르웨이에서는 롤리팝이 애정의 표현으로 여겨지며 관객이 애정표현의 일환으로 던졌을 거라는 주장이 있으나 인터넷 댓글 외에는 근거가 없다. 눈에 막대가 꽂힌 직후는 보위도 기가 찼던지 곡을 마치고나서 "Where are you, creep? ...(아무도 앞으로 나서지 않자) it's easier to get lost in the crowd, you bastard"이라고 짧게 욕했으나, 막대사탕을 맞은쪽이 이미 동공확대 상태인 손상된 안구쪽임을 이용해 "내 한쪽 눈은 장식이지만 운 좋게도 잘 작동하는 다른 쪽 눈을 갖고 있으니 당신을 찾아내고 말거다"라고 농담을 하며 분위기를 되돌렸고, (범인을 찾기 위해서라도) 쇼를 더 길게 해야겠다고 하며 콘서트를 끝까지 진행했다. 현장에서의 쿨한 대응뿐만 아니라 나중에 이 사건 당시의 막대사탕에 맞은 본인을 자화상으로도 그렸다. [33] 이 독일 공연이 단독 콘서트로서의 영원한 마지막이었다. [34] 이때 데이비드 보위를 존경했던 일본 비주얼계의 유명 보컬리스트였던 쿠로유메 키요하루가 오프닝 공연을 서면서, 기존 보위의 팬+키요하루의 팬들이 티켓을 구하려고 하다보니 반나절도 채 안되어 매진되었다고 한다. [35] 2009년 보위의 그림이 뉴욕 모 경매에서 비싼 값에 팔리며 잠시 이슈가 되기도 했다. [36] 특히 리얼리티 투어 세션들, Earthling 앨범의 드러머였던 자카리 알포드, Serious Moonlight 투어의 색소포니아였던 스티브 엘슨 등. [37] 글라스톤베리 공연의 참여계기를 만든 사람 [38] 다만, 보위의 부계 쪽은 웨일스이고 어머니는 아일랜드이며 본인은 잉글랜드에서 태어나 성장한 배경이 있기는 하다. [39] Blackstar 싱글 발매 즈음 말기암 판정을 받았으며, 마지막 주에는 코마 상태에 준했다는 친척의 인터뷰가 있는 동시에 지기 시절의 드러머인 우디 우드맨시가 보위와 Blackstar 발매 축하 전화를 나눴다고 주장하는 등 마지막 순간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다만 유언은 따로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 거의 정설. 게리 올드먼 관련 주석에 보위가 유언으로 남기길 원했던 멘트가 후술되어있다. [40] "Thank you for our good times, Brian. They will never rot." -Dawn(장난스레 아무 단어나 별명으로 평소 사용하던 것에, 유달리 "새벽"이라는 단어를 썼다) [41] 특히 Lazarus의 뮤직비디오는 죽음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환자용 침대에 누워서 절규하는 데이비드 보위의 초췌한 모습이나... 특히 마지막에 옷장 속으로 스스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 데이비드 보위의 모습은 자신의 마지막 뮤직 비디오의 마지막 마무리의 모습으로 무척 인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42]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거나 음악 활동을 한참 그만둔 뒤에 죽거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장 27 클럽 등을 생각해보자. [43] 자신의 암을 알리는 메일에서조차 "근데 덕분에 젊을적처럼 광대뼈가 도드라졌다"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44] 게리 올드만은 이후에도 라디오에서 보위에 대해 인터뷰 할 일이 있었는데, 이때 인용한 보위의 음악에 대한 표현이자 사실상의 유언, "It has been the doorway of my perception, and the house that I live in"을 재인용한다.(보위는 2006년 이후로는 대중매체 인터뷰도 하지 않았지만 지인들과도 음악관련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저 표현은 1999년 보위의 버클리대 초대연설시 마무리 멘트이다.) 청자들도 고인을 기리는 자리에 잘 맞았다고 연설에 대해 호평이었는데, 게리 올드만 본인은 그 홀 한가득 거기에 있는 사람들의 보위에 대한 애정이 넘쳐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매우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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