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0><colcolor=#fff> 올더스 헉슬리 Aldous Huxle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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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올더스 레너드 헉슬리 Aldous Leonard Huxley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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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94년 7월 26일 |
영국 잉글랜드 서리 고달밍 | |
사망 | 1963년 11월 22일 (향년 69세) |
미국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 | |
직업 | 작가 |
학력 | 이튼 칼리지[1] (1908년 – 1911년) |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컬리지[2] (영문학 / B.A.) (1913년 – 1916년) | |
부모 |
아버지 레너드 헉슬리 어머니 줄리아 아널드 |
형 | 줄리언 헉슬리 |
배우자 |
마리아 니스 (1919년 ~ 1955년, 사별) 로라 헉슬리 (1956년 결혼) |
자녀 | 매슈 헉슬리 |
종교 | 무종교( 불가지론)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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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올바르면서 알기 쉽게[3]
영국의
소설가, 비평가.2. 생애
이튼 칼리지를 졸업하고 의학도가 되려 하였으나 점상 망막염을 앓고 3년간 맹인으로 지낸 경험 이후로 의사의 꿈을 꺾고 옥스포드 대학교로 가 영문학도가 되었다. 1916년 불타는 수레바퀴로 데뷔한 이래 시집을 여러 권 내기도 했으나 결국 올더스 헉슬리를 유명하게 해 준 것은 그의 소설들이었다. 대표작으로 멋진 신세계와 연애대위법(원제. Point counter point)등이 있다. 기본적으로 풍자를 하는 데 정통해 있어 그런 장르의 소설작들을 많이 발표했다. 1938년에서 1964년까지 노벨문학상에 9번이나 후보로 올랐지만 결국 수상하지는 못하였다.대학생 시절부터 이미 문학계에서 꽤나 기대받는 유망주로 평가받고 있었으나 그의 본업이 소설가가 된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공군에서 사무직으로 근무했으며 모교인 이튼 칼리지에서 프랑스어 교사를 맡기도 했으나 교사로서 엄격하지 못하다고 다수의 학생들과 교사들에 비판받고 교직을 떠났다. 사실 그는 학생으로서나 교사로서나 이튼 시절을 즐기지 않았다고 한다. 청소년기에 몇 년간 맹인으로 지내느라 학업에 열중할 분위기가 아니라 아무리 명문학교라고 한들 그 학교에 애착을 가지기 힘들었다고 하며 교사가 된 것도 돈 벌려고 한 것이지 적성에 안 맞는 것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헉슬리의 프랑스어 교실을 들었던 학생들 중에는 조지 오웰도 있었는데 오웰은 헉슬리를 훌륭한 자질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오웰도 입학 성적은 좋았지만 이튼 칼리지의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해서 졸업 성적은 별로 좋지 않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의 어떤 공통점이 보이는 듯?
집안 연줄로 당시에 첨단 시설로 지어진 화학 공장에 사무직으로 취직했는데, 이때 그 화학 공장의 전경이 그의 대표작인 멋진 신세계에 큰 영감을 줬다고 밝혔다.
사망 전에는 후두암으로 인해 말을 할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필담으로 대화했다. 그의 최후의 모습은 그의 아내가 쓴 책에서 확인할 수가 있다. 그의 마지막 유언은 " LSD 100마이크로그램, 근육 내 주사(LSD, 100 µg, intramuscular)" 라는 작은 메모였으며 두 번의 주사를 맞은 뒤 평화롭게 사망했다고 한다. 우연히도 같은 날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이 일어나는 바람에 그의 사망 소식은 크게 알려지지 못했다.
3. 한국 출간작
- 가자에서 눈이 멀어 (1936년 作)
- 멋진 신세계 (1932년 作)
- 모크샤 MOKSHA
- 아일랜드 (1962년 作) - 유작
- 영원의 철학 (1945년 作)
- 연애대위법 (1928년 作 / 원제. Point counter point)
- 원숭이와 본질 (1948년 作)
- 제이콥의 손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공저)
- 고양이의 설교
- 단편소설 토요일
- 지각의 문 · 천국과 지옥
4. 여담
- 그의 할아버지가 바로 생물학자로 유명하며 무엇보다 진화론을 강력히 지지하며 논쟁에 휘말리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찰스 로버트 다윈을 대신하여 논쟁에 나서며 다윈의 개라는 비아냥을 듣자 "기왕이면 작은 애완견보단 다윈의 불독으로 불러달라. 불독은 물어뜯을 수 있잖아."라며 당차게 대꾸하였고 자신을 원숭이의 손자라고 비꼬는 반진화론주의자인 영국 국교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에게 "진실을 두려워하는 인간이 될 바엔 원숭이의 후손이 되겠다"라면서 역으로 한 방 먹이며 신랄하게 까대던 사람이었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1825~1895)다. 다른 가족 중에도 유명인들이 여럿 있는데 형인 줄리언 헉슬리는 생물학자로 유네스코 초대 회장을 지냈으며 할아버지의 제자이기도 한 허버트 조지 웰스 및 그 아들과 같이 1929년에 생명의 과학(The Science of Life)이란 생물학 서적을 집필했다. 막내동생 앤드루 헉슬리[4]는 전기생리학자로 오징어의 신경 활동 전위(action potential)를 밝혀내 1963년 노벨생리학·의학상을 수상하였다. 그 앞서1962년 수상자들의 업적이 멋진 신세계에서 예견되어, 화제가 된다. 또 다른 동생 데이비드 브루스 헉슬리는 다른 형제들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특이사항이 있는데 딸 안젤라 헉슬리가 찰스 다윈의 증손자 조지 펨버 다윈과 결혼하면서 다윈 가문과 사돈이 되었다는 점이다. 헉슬리 가문 자체가 워낙에 유명인이 많은 명문가문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들을 언급할 때에는 풀네임을 다 써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다.
- 그는 종교와 철학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평화주의적 철학과 관련하여 말년에는 동양 철학과 불교에도 관심을 보였다. 한편으로 유명한 불가지론자이기도 하다. 세상에는 어떤 의미나 도덕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다고 보았으며, 그런 걸 가정하는 것은 도리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할 뿐이라고 생각했다.
-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저자인 D. H. 로런스와 가까운 사이였으며 로렌스가 채털리 부인의 연인을 탈고한 뒤 타자기로 정서할 때 헉슬리 부부가 대신 해주었다고 한다. 당시에 이런 작업은 전문 타이피스트에게 맡기는 게 보통이었는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은 그 내용 때문에 타이피스트들이 작업을 거부했다고.
[1]
Aldous Huxley 참고.
[2]
최우등 졸업(First class honours)
[3]
올더스 헉슬리가 글을 쓸 때 목표한 방향. 즉,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하게 신경쓰던 것이다. 올더스는 올바르면서 알기 쉬운 글이 가장 쓰기 힘들면서, 가장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비단 올더스만의 특징이 아니라, 다른 헉슬리들도 마찬가지로 '올바르면서 알기 쉬운'을 목표로 했다. 헉슬리 가문의 가풍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을 듯. 헉슬리 가문 외에도, 문학가나 학자들 중엔 '간결하고 읽기 쉬운 글이 오히려 더 쓰기 어렵다'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4]
이복형제. 아버지인 레너드 헉슬리가 재혼한 뒤에 태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