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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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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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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조전 | 준명당 |
즉조당 명례궁터 |
석어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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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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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 서관 |
정원 | 중화전 | 덕홍전 | 함녕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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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명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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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 대한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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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덕수궁 · 경희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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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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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과거 덕수궁의 정문은 중화문 남쪽에 있었던 인화문(仁化門)이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전소되면서 동쪽에 있던 대안문(大安門)을 대한문으로 개칭해 정문으로 삼았다. 원래는 태평로 한가운데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으로 말미암아 1970년 8월 21일 이건공사를 시작해 1971년 1월 2일 마무리되어 원위치보다 22m 뒤로 밀려나게 되었다. 시청앞 광장과 마주보고 있으며, 그 건너편에는 고종이 황제 즉위식을 거행한 환구단이 있다.
2. 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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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문(中和門)
중화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1902년(광무 6) 창건되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원래는 중화전 주변을 두르는 행각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부분이 사라지고 중화문 오른쪽에 일부가 잔존하고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전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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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전(中和殿)
덕수궁의 정전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1902년(광무 6) 창건 당시에는 2층 전각이었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단층으로 중건했다. 대한제국 때 영건했기 때문에 중화전 답도에는 제후국을 상징하는 봉황이 아니라 황제국을 상징하는 용 2마리가 새겨져 있다. 1985년 1월 8일 중화문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3. 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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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浚眀堂)
고종이 함녕전으로 처소를 옮기기 전에 한동안 머물며 외국 사절을 접견하던 정면 6칸, 측면 4칸의 전각이다.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즉조당과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다. 고종은 늘그막에 얻은 고명딸 덕혜옹주를 위해 이곳에 유치원을 만들기도 했다.[1]딸바보편액으로 걸린 '명'이 일반 적인 '밝을 명(明)'이 아니라 '眀'인 점이 특이한데 둘은 모양만 다르고 같은 뜻을 가진 글자이다. 이를 두고 대한제국 측에서 일본의 '일(日)'이 들어간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라는 한자를 대체해서 썼다는 설이 있으나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구한말 전부터 써오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덕수궁 내 가이드라고 자처하는 사람이 반일 감정을 부추기고자 이런 거짓 정보를 퍼뜨린다고 하니 주의할 것. '眀'이 들어가는 건 '중명전(重眀殿)'도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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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조당(即阼堂)
정면 7칸, 측면 4칸의 침전 건물로 준명당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한성으로 환어한 이래 이곳을 시어소로 사용했으며, 1623년(인조 즉위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즉위한 장소였다. 아관파천 이후 1897년(광무 원년) 환궁한 고종이 1902년(광무 6) 중화전 창건 전까지 경운궁의 정전으로 삼았으며[2],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부터는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 엄씨가 이곳에서 거처하다가 1911년 7월 20일 장티푸스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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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어당(昔御堂)
누각을 제외한 궁궐 내의 전각 중 2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전각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이며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원래의 석어당은 1593년(선조 26)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뒤 1906년(광무 10) 중건했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승하하고, 1618년(광해군 10) 인목왕후가 폐위되어 유폐되었던 장소였다. 단청을 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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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홍전(德弘殿)
1911년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덕수궁 내의 전각 중 가장 나중에 영건되었다.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 서쪽에 있으며, 고종이 내외 귀빈을 접견하던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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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녕전(咸寧殿)
정면 9칸, 측면 4칸의 전각으로 고종의 침전이었다. 1897년(건양 2)에 지어졌으나 1904년(광무 8) 4월 14일 온돌 교체공사 도중 발생한 화재로 함녕전은 물론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모두 전소되었다가 곧바로 중건 공사에 착수해 1906년(광무 10) 복구했다. 고종은 일제의 강압으로 순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된 후에도 줄곧 이곳에서 거처했으며, 1919년 1월 21일 승하한 장소도 여기였다. 함녕전의 정문인 광명문은 일제강점기 덕수궁 유원지화 계획에 따라 중화문의 서남 측으로 이전되었다가, 2018년 6월에 이전 공사를 시작하여 12월에 마무리함으로써 본래의 자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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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헌(靜觀軒)
1900년(광무 4) 고종이 다과회, 연회장, 음악당 등의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의 건물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전통 건축 양식이 가미되어 화려하고 아기자기한 장식이 특징이다. 완공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커피를 즐겼으며, 현재도 매년 봄과 가을에 명사를 초청한 강연회를 여기서 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강연을 청취할 수 있다. 다만 고종실록 등에 의하면 1912년까지 이곳을 어진을 봉안한 장소로 이용한 것으로 보여 단순히 다과회, 연회장 등의 용도로 볼 수가 없다.
4. 서양식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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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전(石造殿)
영국인 하딩과 로벨 등이 설계에 참여했으며 1900년(광무 4) 착공해 1910년(융희 4) 완공한 정면 54.2m, 측면 31m의 신고전주의 양식 석조 건축물이다. 원래는 황제와 황후가 거처할 공간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설했으나 경술국치로 황궁으로 제대로 사용되지 못했다. 완공 후에도 암살시도에 시달렸던 고종은 석조전에서 실제로 생활하지는 않고 행사에만 사용했다. 영친왕이 일본에서 귀국할 때 이곳을 이용하는 등 호텔처럼 운영되었다. 석조전은 광복 이후 1946년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며, 이후 국립중앙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으로 사용하다가 2005년 국립고궁박물관이 경복궁에 마련되면서 비게 되어 근대미술관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원래의 황궁으로 복원할 것인지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2009년부터 2014년 10월 7일까지 복원 공사를 거쳐 10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개관했다. 당시 영국식으로 화려하게 치장되었던 석조전 내부를 관람하려면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해 해설관람으로만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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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구 이왕가미술관)
이왕직박물관으로 사용하던 석조선에서 일본인들의 작품만 따로 전시할 목적으로 1937년 석조전 옆에 지은 석조 건축물로 회랑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박물관 용도로 지어진 국내 최초의 근현대 건물이나 경복궁에 있었던 조선총독부 청사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일제식민지 잔재 건물이다. 한국 전쟁 때 훼손되었다가 1953년 수리한 후 1998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분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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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重眀殿)
1901년(광무 5) 건설된 2층 벽돌 건물이다. 중명전 터는 원래는 경운궁 바깥의 땅으로 당시 외국인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고, 정동 여학당이란 학교도 있었다. 고종이 환궁한 후 1897~1902년 사이 미국 공사관을 제외한 주변 부지들이 경운궁에 편입되었다. 당시 중명전은 오늘날과 달리 정관헌과 같은 양식으로 수옥헌(漱玉軒)이라는 이름의 단층 건물을 지어 황실 도서관으로 사용했다. 1899년 3월 헨리 아펜젤러가 찍은 미국 공사관 전경 사진에는 중명전이 있던 자리에 단층 양관이 자리잡고 있었고 호러스 뉴턴 알렌이 1895년에 작성했다는 지도에서 king's library라 적힌 지명이 그 증거로, 1901년 11월 16일에 일어난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2층 건물로 재건되었다. 이후 1904년(광무 8) 4월 14일 화재로 덕수궁 내의 주요 전각이 소실되자 고종은 이곳을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개칭하고 편전으로 삼아 외국 사절을 접견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05년(광무 9) 11월 17일 을사조약이 여기에서 체결되었다. 나중에 궁역에서 벗어나 소유권이몇 차례 바뀌면서 외관이 심하게 변형되었으나(위쪽 사진) 2010년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했다(아래쪽 사진). 다만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매각되기 이전의 것이라 하기에 무리가 있다. 매각되면서 외국인 사교 클럽으로 활용되거나 1925년에 화재가 일어나는 등의 변천을 거쳤고, 무엇보다 내부 구조에 대한 아무런 기록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어느 정도 외형을 간신히 유지한 알현실 또한 사실 다른 방과 달리 길게 늘어진 형태이기에 알현실로 사용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 뿐이다. 사실상 극히 일부, 그것도 외장만 복원한 셈이다. 참고로 을사조약이 체결된 장소였기에 복원 이후 을사조약에 관한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독특한것은 좌측에 보이는 중명전 현판의 밝을 명(明)자의 왼쪽 부수가 날 일(日)자가 아니라 눈 목(目)자이다. 明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변형자의 일부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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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덕전(惇德殿)
경운궁의 영역이 확장되던 시기 부지가 경운궁 영내로 편입되고 공사를 시작하여 1903년경 완공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계자가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당시 서양식건물을 주로 설계한 러시아 제국의 건축가 사바틴으로 추정되고 있다. 석조전의 북쪽에 있었고 그 규모가 비교될 만큼 큰 양관이다. 고종이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건물로서 많은 연회가 베풀어졌던 장소이며, 1907년에 순종황제의 즉위식이 이 건물에서 거행되었다. 1920년대초까지 존속했고 덕수궁 공원화계획에 따라 퇴락하여 헐린 것으로 보인다. 문화재청에서 2023년 복원을 완료하고 개방했다. 돈덕전 관련 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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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성헌(九成軒)
경운궁(덕수궁)의 건물이었으며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석조전 바로 뒤에 위치해있었다.
【약 120년 전, 흑백사진에 담긴 구성헌 모습】
5. 문화재
[1]
유치원으로 쓰던 시절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있는데, 준명당 기단을 살펴보면 어린아이가 높은 곳에서 떨어지지 않게 하려고 가장자리를 따라 철제 담장을 세울 때 뚫어놓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다.
[2]
1897년 ~ 1898년에는 태극전, 1898년부터 1902년까지는 중화전으로 불렸다. 신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다시 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