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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4 06:37:17

대지(소설)

1. 개요2. 줄거리
2.1. 1부2.2. 2부2.3. 3부2.4. 4부?
3. 작중 시간의 흐름과 설정 구멍4. 백인우월주의 논란5. 영화

역대 퓰리처상 시상식
파일:PulitzerPrizes.png
소설 부문
1931년 1932년 1933년
마가렛 에이어 반스
《Years of Grace》
펄 S. 벅
《대지》
T. S. 스트리블링
《The Store》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0px-GoodEarthNovel.jpg

1. 개요

우리들은 을 파먹고 살아왔어.
그리고 또다시 땅속으로 돌아가야 해.
너희들도 땅만 가지면 살 수 있어.
누구라도 땅만은 빼앗을 수 없어...
펄 벅(Pearl S. Buck, 1892~1973)이 1931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원제는 <The Good Earth> (좋은 토지)

선교사 출신이 쓴 소설인 데다, 영미권 독자들이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 따위에는 관심 없을 것이라며 출판사들이 출판을 거절했지만 정작 이 나오자 베스트셀러가 된다.[1] 그리고 1938년에 미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까지 받았다.

중국의 왕룽이라는 한 농부을 그리고 있는 이 작품은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작가의 독특한 이력 덕분에 중국인들의 생활상과 습성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또한 주인공에 대한 집착 사랑은 우리 농민들의 정서와도 닮아 있어 더욱 애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거칠고 가난하지만 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중국 농민들의 삶이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가와 건강한 자극이 되어 준다.

작가인 펄 벅은 선교사였으나, 기독교를 중국과 아시아에게 강요하고 기독교를 우월하게 보며 비기독교인을 얕보는 제국주의적인 면을 무척 비판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 덕분에 미국 기독교회들은 그를 엄청나게 비난했다. 더불어 이 작품이나 < 북경에서 온 편지> 등 그의 소설을 보면 아시아에 대하여 고증도 철저히 하고 여러모로 꼼꼼하게 조사하여 쓴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어로도 여러 판이 나왔는데, 장왕록[2], 안정효 등이 번역했다. 다만 안정효 초기 번역판에는, 약탈당하던 부잣집에 들어간 왕룽이 미처 달아나지 못한 집주인의 살려달라는 애원에 "그럼 을 내놓아요!"라고 존댓말한 것으로 번역한 부분이 있어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그만큼 왕룽이 착실하여 남을 협박하는 짓에 서툴렀다고 볼 수도 있으므로 큰 문제로 보기는 어렵다. 다른 번역판에는 "그럼 어서 돈을 내놔!" 등의 난폭한 말을 했다고 나온다. 그 다음 안정효 판에서도 "썩 꺼져, 죽여버리기 전에!" 라고 비슷한 어조로 번역했다.[3]

<아들들>, <분열된 일가>라는 두 편의 후속작이 있다. 1부 본편에 비하면 2~3부는 인지도가 별로 없다. 세계 문학 전집 류의 대작 시리즈로 나올 때는 1~3부를 함께 묶어서 내놓는 경우가 있지만 아동용이나 청소년용 축약본은 1부만 요약해서 찍어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통합본을 접한 사람은 대부분 <아들들>과 <분열된 일가> 역시 함께 읽었다. 연속성이 높은 작품이라 별개의 작품이라는 느낌은 거의 안 난다.

2. 줄거리

2.1. 1부

가난하게 살지만, 성실한 농부인 주인공 왕룽(王龍)은 성 안에서 가장 부자인 황씨 댁의 여종 오란(玉蘭)을 아내로 맞이한다. 오란은 외모는 보잘것 없지만[4][5] 알뜰하고 강직한, 전형적인 농부의 아내 감이었다. 선천적으로 부지런한 농부인 왕룽과 오란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해서 생활에 점점 여유가 생긴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오란이 살던 황씨 댁에 돌아가서 예쁘게 옷을 지어 입힌 아이를 보여주고 오기도 하고, 거기서 황씨 댁 사정이 안좋게 돌아간다는 걸 알고는 힘들게 모은 돈으로 황씨 댁 전답을 사들이기도 한다. 식구도 늘어나고 재산도 늘어나고 만사가 다 잘 풀리는 듯 했지만, 그들 사이에 네 번째 아이가 태어날 무렵,[6] 큰 가뭄이 들어 무서운 굶주림이 시작되자 죽기 직전까지 몰린 왕룽 일가는 오란의 의견에 따라 남방으로 떠난다.

남방으로 내려간 일가는 왕룽은 인력거를 끌고, 오란은 나머지 식구들과 함께 구걸을 하며 겨우겨우 살아나간다. 고향에 있을 때와 비교하면 그나마 굶지나 않을 뿐, 객지 생활도 궁핍하고 어렵기는 마찬가지인 상황.[7]

어느 날 일을 마치고 돌아왔더니 둘째 아들이 푸줏간에서 고기를 훔쳐온 것을 본 왕룽은 이대로는 아이들이 도둑놈으로 자라겠다는 걱정에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지만 오늘 벌어 오늘 먹고 사는 처지인지라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던 중 주변에서 전쟁이 일어나면서 피난을 간 도시에도 불경기가 닥쳐 공황이 일어나고, 빈민들이 들고 일어나 부잣집들을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왕룽과 오란은 군중 틈에 끼어 한 부잣집에 들어갔다가 뜻밖에도 많은 돈과 보석을 손에 넣게 되고,[8] 고향으로 돌아와 황씨 댁의 남은 땅을 모두 사들여 큰 부자가 된다.[9]

그러나 왕룽은 지주가 되어 재산을 불리고 소작인들을 부리면서 자식들을 교육시키고 성내 다방의 롄화(蓮華)라는 기생을 첩으로 맞아들이는 등 농사일에서 점점 멀어져간다. 롄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로 시집오면서 몸종 겸 식모로 두취안(杜鵑)도 데려오는데, 이는 롄잉(蓮英)을 첩으로 들인 것보다도 더 왕룽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키게 된다.

롄화는 오란에게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만, 두쥐안은 오란이 황씨 집에서 종살이하던 시절 황씨 집 주인영감의 총애를 등에 업고 오란에게 횡포를 부린 경력이 있었기 때문이다.[10][11][12] 오란은 남편이 젊고[13] 예쁜 첩을 맞이한 사실을 알고 가슴앓이하며 나날을 보냈고, 그동안의 고생이 겹쳐 극도로 쇠약해진 오란이 끝내 고생스러웠던 한평생을 마치자 그제야 왕룽은 오란이 이 집에서, 그리고 자신의 인생에서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를 깨닫는다.[14]

이후 도적 집단의 부두목임을 슬쩍 내세워 일가를 위협하던 작은아버지와 말썽꾸러기 사촌에게 골치를 썩이던 왕룽은 첫째 아들의 제안에 따라 이제는 셋집이 된 황씨 댁 저택으로 집을 옮기고, 넓은 저택에서 지난날을 회상하며 고독 속에서 지내다가 결국은 젊고 어여쁜 종 리화(梨花)를 셋째 아내로 삼고 외로움을 달랜다.

리화는 왕룽의 둘째 아내 롄화의 시중을 드는 종이었고 흉년에 그 아버지가 은 20냥에 왕룽에게 팔았는데, 난봉꾼인 왕룽의 사촌 아우에게 희롱당할 위기에서 구해 왕룽 곁에 잠시 두었다. 사실 리화는 왕룽에게 첩이라기보다 양딸 같은 존재이다. 리화 역시 아버지한테 하는 것처럼 왕룽에게 매달렸다.[15][16]

큰 아들은 그의 뒤를 이어 대지주가 되고, 둘째 아들은 거대한 상인이 되며, 막내아들은 집을 뛰쳐나가[17] 남방의 군벌에 입대해 군인이 된다. 어느 날, 훌륭한 관을 준비해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던 왕룽은 두 아들이 토지를 팔려고 의논하는 것을 듣고 크게 노한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는 안 판다고 얼버무리고 뒤로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싱긋 웃는다.

2.2. 2부

왕룽이 결국 노환으로 사망하고, 호사스럽고 게으른 지주가 된 첫째 왕이[18], 약삭빠른 장사꾼이 된 둘째 왕얼(王二), 군벌이 된 셋째 왕싼[19]의 행보를 왕싼을 중심으로 하여 그리고 있다.[20][21] 첫째는 두 아내를 두고 가족 모두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재산과 토지는 점점 줄어들고[22], 둘째는 형이 소유한 전답을 대거 사들여 소작료를 챙기고 상인 기질을 발휘해 여러 곳에 사업을 벌여 부를 증식시켜 크게 성공하지만, 인정이라고는 없고 검소하여 자신의 아들들에게 원망을 산다. 왕룽의 둘째 첩이었던 리화는 왕룽이 죽자 천치 딸과 왕이의 자식이지만 거의 버려진 취급을 받는 곱사등이와 같이 산다.[23][24] 무엇보다 왕싼을 중심으로 군벌이 되어가는 영지물 과정이 흥미롭게 전개되는데, 전투 묘사 등 여러 모로 볼거리도 있다.

왕싼은 초기에 지역의 군벌 아래서 인정받는 부대장이 되고, 혁명은 말로만 외치며 현실에 안주하는 상관을 혐오하여 100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독립탈영한다. 그 부하 100명으로, 술이 유명한 작은 현에서 왕처럼 군림하던 '표범'이라는 소군벌을 물리치고, 현장(군수 정도로 생각하면 될 듯)을 협박해 현의 사령관 신분이 된다. 사령관이라지만 사실상 현을 통치하는 건 현장이 아닌 사령관 '호랑이 장군 왕싼'이어서, 현장이 죽은 뒤에도 현으로 부임해오는 관리가 없을 지경이었다. 시대가 청나라 말기의 치안 공백 상태이긴 하나, 엄연히 '도적' 신분인 타 군벌과 다르게 토벌에 나선 관군에게 거액의 뇌물을 바치고[25] 공문을 올려 명목상으로는 관군 신분이 될 정도로 꽤 머리를 썼다.

그렇게 작은 군벌에서 차츰차츰 무기를 늘리고 병사를 늘려가며 20,000명에 이르는 중대 규모 군벌이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왕싼은 아버지가 되고[26], 안정을 원하게 되면서 자신이 꿈꾸던 신중국 건설에는 결국 나서지 못한다.

2.3. 3부

왕룽의 손자들, 그 중에서도 왕싼의 외아들 왕위안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왕위안은 아버지가 만들어낸 군벌 집단의 후계자로 꼽혔지만 그러한 분위기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억지로 결혼할 위기까지 처하면서 결국 아버지의 다른 부인이 있는[27] 상하이로 이주해서 거기서 신식 교육을 받게 된다. 거기서 학생운동에 가담하다가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미국 유학을 가는 등의 스토리가 펼쳐지고,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후가 후반의 줄거리이다.

이후 소설의 말기에는 고향에서 농민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일가의 기반이었던 농토를 모두 다 잃는다. 첫째 왕이의 집안은 아들 하나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은행의 부은행장이 되어 있어서 상하이로 이주하고[28], 둘째 왕얼의 집안은 2부에서 삼촌 왕싼 밑에 들어간[29] 아들 곰보[30]가 부유한 상업도시 하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그쪽으로 도망간다. 문제는 셋째 왕싼인데, 왕싼은 도망간다는게 아버지의 옛집이었고, 당연히 들키는 바람에 농민들에게 몰매를 맞아 그 후유증으로 앓다가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 왕위안을 만나고 죽는다.[31]

애초에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던 배경은 왕얼에게 있었다. 왕싼이 아들의 유학 자금이나 군자금 등으로 왕얼에게 돈을 빌려 썼는데[32], 왕얼은 동생에게 가차 없이 이자와 대부 원금을 상환 받았다.

이 비용 부담 때문에 한때 20,000명의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었던 왕싼의 군대는 건달패 100여 명밖에 남지 않을 정도로 쪼그라들었고, 조카인 왕얼의 아들조차 자기 지배구역에서 걷는 세금을 삼촌에게 바치지 않을 정도였다. 가문의 배경인 왕싼의 군대가 없어지자 왕얼의 착취를 참고 참았던 농민들이 일시에 봉기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군벌의 보호를 받는 유력자들이 그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주면서 상부상조한다는 걸 감안해 보면 왕얼은 결국 그 탐욕스러운 본성을 못 버려서 동생에게 자금 지원은 못 해 줄 망정 철저히 잇속만 따지다가 결국 화를 자초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왕싼의 봉기 초기부터 보면 왕얼이 돈을 안 받고 넘어간 건 왕싼이 늘어난 군대를 무장시킬 총을 구입했을 때밖에 없었다. 그나마도 무사히 수령한 2,000정 정도에 대한 대금은 전부 받았고, 소실된 1,000정 가량에 대한 대금만 왕싼이 못 받은 것에 대해선 지불할 수 없다고 배째라로 나와서 어쩔 수 없이 안 받고 넘어간 것에 불과했다[33].

한편 그 시기, 왕이의 두 아들은 혁명군에서 중책을 맡아 공직에 종사하고 있었고, 위안을 혁명군에 끌어들이려고 했던 그의 군사학 가정교사는 고위직에 올라 있었다.[34][35] 위안의 이복누이 아이란은 속도위반으로, 부유하지만 여자 관련으로 소문이 좋지 않은 연애 소설가[36][37]와 결혼했으며, 위안은 의붓동생 메이링과[38]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3부가 종료된다.

2.4. 4부?

펄 벅은 <붉은 대지>라는 4부 격의 소설을 집필하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 작품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 이 <붉은 대지>는 왕룽의 손자들이 공산화된 중국에서 겪는 헬게이트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었다. 실제로도 이 소설의 미완성된 부분을 봐도 문화대혁명 당시 중국의 모습과 문화대혁명으로 왕룽의 증손자들이 고생하는 것을 그리는 걸로 기획되었다.

3. 작중 시간의 흐름과 설정 구멍

사실 이 책이 30년대 초에 쓰였으니 실제 역사와는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긴 한데, 작중의 연대를 잘 따져 보면 참으로 기묘한 현대사를 느끼게 된다. 왜냐 하면, 책 내용대로라면 적어도 1970년대가 될 때까지 중국은 여전히 군벌시대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1부 시작 부분에서 왕룽이 결혼하는 날 이발사의 대사를 보면 이미 변발을 자른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적어도 1900년대 이후, 아마도 신해혁명 직전임을 의미하는 상황이다. 이후 왕룽이 아직 살아있을 때 손자들의 입으로 "혁명이 일어난 후"라는 대사가 나오므로 왕룽의 생전에 신해혁명이 일어났으며 그 이후로 역사가 이어진다는 이야기가 된다. 왕룽의 결혼 이후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따져보면 이렇다.
1) 왕룽은 결혼하고 바로 첫 아들을 얻었다. → 이것도 좀 오류인 것이, 밀싹이 트는 초봄에 결혼한 왕룽이 벼 베는 철에 첫 아이를 얻고 설날에 오란과 아들을 데리고 황부잣집에 세배를 간다. 임신한지 5개월 만에 애를 낳은 건가!
2) 왕룽의 장남 왕이(王一)는 20~21세에 결혼, 바로 첫 아들을 얻는다.
3) 왕이의 장남은 28세에 결혼한다.
4) 왕룽의 삼남 왕싼(王三)이 스무 살이 안 된 외아들 왕옌(王元)을 억지로 결혼시키려 할 때, 왕이의 장남은 결혼한 지 20년가량 되었다.
5) 왕옌이 혁명분자에 대한 체포를 피해 미국에서 유학을 한 기간이 6년이다.
6) 왕옌이 귀국한 지 1년 후 소설이 막을 내린다.

즉 대지 3부작에서 소요된 시간은 왕룽이 결혼한 후 거의 75년에서 80년 가까이까지 잡을 수 있다. 왕룽이 결혼한 해를 1900년이라고 잡아도 70년대는 너끈히 넘는다.

등장인물들의 나이는 확실한 설정 구멍이다. 일단 왕룽 생전에는 왕룽의 나이도 나오지 않는다. 1부에서 나이가 명시되는 사람은 오란 하나뿐으로, 결혼할 때 20살이다. 이후 아들딸과 손자손녀들이 숱하게 나오지만 나이가 명시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어쩌다 한 마디씩 나오는 것만 가지고 때려 맞춰야 한다. 셋째 아들이 30세가량이 되어 첫 아들을 얻었을 때 왕룽이 "살아있었다면" 90세라는 이야기가 나오며 아직 살아있는 롄화의 나이가 78세라고 나오는데, 여기서 역산해 보면 오란과 결혼할 때 왕룽의 나이는 거의 40에 가까웠다는 결론이 나온다. 가난한 농부라는 점을 생각해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다.

이외에도 다른 등장인물, 특히 아들들의 나이는 5~10세씩 늘었다 줄었다 하고, 순서도 마구 바뀐다. 2부에서 왕룽의 둘째 왕얼(王二)의 장남이라고 나왔던 곰보가 3부에서는 둘째라고 나오고, 1부에서는 왕룽에게 11명의 손자와 8명의 손녀가 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2부 이후에 등장하는 건 왕따의 다섯 아들과 왕얼의 네 아들(그나마 왕룽이 죽은 뒤에 태어난 애들도 있다)뿐이다. 뭐, 유아 사망률이 높은 시대이니 나머지 손자손녀들은 어려서 죽었다고 생각하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셋째 왕싼의 아들 왕위안은 이런 설명도 불가능하다. 왕옌에게는 아이란(愛蘭)이라는 이복여동생이 있는데, 얘들은 같은 해에 거의 동시에 태어났다. 그런데 왕위안이 20세에 떠난 유학을 6년 만에 마치고 돌아왔을 때 아이란은 26살이 아니고 23살이다.

4. 백인우월주의 논란

이원복은 만화로 이 소설이 중국을 폄하하고 있는 백인우월주의 시각을 담고 있다고 했으나, 그렇게 간단히 결론이 날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펄 벅이 중국에서 실제로 겪었던 여러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고, 그는 위에서 서술한 대로 기독교의 무분별한 중국 선교를 반대하며 중국풍 사고방식을 이해하자는 주장을 했다. 또 3부인 <흩어진 집안>에는 중국을 혐오한다는 백인들이 나와, 중국인들의 갈등도 중국인의 시각으로 보여준다. 1930년대 백인이 쓴 소설로서는 꽤 다른 사고방식을 보여줌에도 단지 1부에 나온 대지의 가난한 중국 농민들 모습만 보고 판단한 것이다. 사실 그런 이유로 까대는 중국인들이 있는 걸 보면(...). 아예 "펄 벅이 내 식당에 들어오면 죽여버리겠다. 그만큼 나는 <대지>를 싫어한다"는 투의 대사를 중국인으로 설정된 캐릭터가 얘기하는 영화도 있었다. 그러나 현대 중국에서도 대지는 재평가되어 중국 근대를 잘 이야기하는 작품이자 영문학 추천 소설로 자주 선정되어 높이 평가받고 있다.

대지가 중국을 비하하는 백인우월주의 및 제국주의적 관점으로 쓰여진 작품이라는 주장은 출간 직후부터 나오고 있었다. 중국 근현대사를 대표하는 문호 루쉰 역시 이렇게 주장했고, 오랜 기간 중국에서 펄 벅과 대지가 저평가 받은 것이 바로 루쉰의 영향력 때문이라는 해석도 있을 정도이다.[39] 또한, 펄 벅의 작품 전반에서 강하게 드러나는 리얼리즘적 관점이 중국인 독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는 해석도 있다. 특히 1권 초반에서 가난한 중국 농민의 삶을 리얼하게, 끔찍한 부분도 숨기지 않고 묘사한 것 때문에 펄 벅이 자신들의 수치와 치부를 드러내어 망신을 주었다고 느낀 중국인 독자들이 많다는 것이다.

재미 동포 소설가로 이름 높은 강용흘도 펄 벅에게 직접 이런 비판을 한 적이 있다. 다만 비판의 내용이, 작중에서 부유한 지주가 된 왕룽이 소녀(리화)를 사서 첩으로 삼는 장면을 두고 '중국에서는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면서 '중국인의 도덕적 품성을 왜곡하고 비하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라 설득력이 없다. 펄 벅도 강용흘에게 "이게 내가 생각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살면서 만난 노부인들이 자신이 겪은 일이라며 들려준 이야기이고, 당시 중국인들이 꽤 많이 겪은 일"이라고 했다. 또한 "당신이야말로 중국인의 도덕적 품성을 운운하기 앞서, 비참한 청나라 말기 시대상을 제대로 아는가? 군벌이 난립해 먹고 살기에도 어렵던 근대 중국의 생활상을 그저 옛날 중국 도덕적 품성이라는 기록에 의존해 부정한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당신의 주장은 한마디로 기독교권, 백인 나라에서도 번번한, 비참한 서민층 생활상을 죄다 외면하고 잘 사는 것만 강조하여 오리엔탈리즘 우월론으로 왜곡 및 강조하는 선교사들과 차이가 전혀 없다."라고 반론하였다. 이에 강용흘이 도리어 데꿀멍해 반론하지 못했으며 할 말이 없는지 펄 벅을 개인적 자리에서 피해 다녔다.

사실 당대의 중국과 중국인을 까기로 치면 펄벅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과격하게 비판한 것이 루쉰 자신이지만... 제국주의의 전성기였던 20세기 초반 중국이 처해 있던 가장 심각한 위협 중 하나가 바로 서구 열강의 침탈이었고, 이는 정치경제적 침탈 뿐 아니라 문화적 차원에서 중국(및 동양) 문화에 대한 심한 조롱과 비하, 모욕까지 포함한 문제였다는 점이다. 펄 벅은 분명 중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인물로써 중국과 중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공감, 애정을 보여준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백인(서양인)의 정체성을 가진 인물로 비춰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는 것. 즉 루쉰이 중국과 중국인을 모질게 까대는 것은 중국인 자신이 스스로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서양인' 으로 정체화된 펄 벅이 당대 중국 사회의 문제점과 참상을 드러내는 것은 '서양인이 중국인(동양인)을 조롱하고 모욕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 어쨌거나 당시 서구 문화권 내에 중국 및 동양에 대한 인종차별주의적, 제국주의적인 관점이 만연했던 것은 분명 사실이고, 수많은 매체와 작가들이 이런 분위기에 편승하여 중국이나 동양인 및 그 문화를 비하하여 조롱거리로 삼았던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말하자면 루쉰이나 일부 중국인 독자들이 펄 벅에게 강한 반감을 보인 것은 펄 벅의 작품에서 리얼리즘적으로 드러난 중국 사회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묘사를 인종차별주의 작가들의 비하적 묘사와 마찬가지라고 인식했기 때문이라는 것. 좀 거칠게 설명하자면 펄 벅은 진짜 제국주의-인종차별주의 성향의 매체에 대한 비판 과정에서 싸잡혀 부당한 공격을 받은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위에 소개된 강용흘의 사례 역시 이와 비슷하다. 상식적으로, 전근대의 동양 사회(중국이든 한국이든)에서 소녀를 돈으로 사서 첩으로 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은 역사를 공부한 현대인의 입장에서든, 당대를 살던 인물들로써든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용흘이 위와 같이 무리한 반론을 했던 이유는 펄 벅의 독자들이 펄 벅 자신만큼 중국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줄 것이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 이라고 볼 여지가 있다. 예를 들어 당시의 서구 문화권에서는 기독교=윤리=문명이라는 인식이 아주 강했고, 이 당시 성행하던 해외선교활동 역시 '동양인들은 기독교 신앙이 없으니 제대로 된 윤리관도 없고 문명도 없는 야만인들일 것이다. 그러니 불쌍한 야만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을 전파해서 문명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는 사고방식에 기반한 면이 강했던 것. 물론 펄 벅 자신이야 당대의 동양사회도 수천년 이상의 기간동안 고도화시켜온 사유체계와 윤리관, 사회구조를 갖춘 문명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이를 서구에 소개한 인물이지만... 펄 벅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미개한 동양사회에서는 부모가 딸을 팔아먹고 부자가 소녀를 첩으로 들이는 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고 인식할 개연성도 충분하다는 것. 말하자면 강용흘은 '고전과 기록에 기반한 중국 사회의 도덕적 품성' 을 이야기했고, 펄 벅은 '청조 말기의 비참한 혼란상 속에서 그 도덕적 품성이 짓밟히고 훼손된 현실'을 이야기했지만... 최소한 이 두 사람은 중국(동양) 사회에 나름의 윤리적 규범이 있었음을 이해한 상태로 논쟁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펄 벅과 같은 이해를 보여주지 못하는 그녀의 독자들 중에는 '역시 동양 사회는 미개하고 제대로 된 윤리도 없다' 고 인식해 버리는 이들도 나올 것이라는 것. 따라서 강용흘의 비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자면, '그런 행동은 중국의 도덕적 기준에서도 잘못된 것이다' 라는 점을 방어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건 한국 초기 영문학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영미문학사에서도 나름 비중있는 위치를 차지할만한 업적을 이루고 당시 서양 문학계에 한국의 문화적 전통을 소개하는 데도 크게 공헌하여 펄 벅에게도 '동방의 가장 빛나는 예지' 라는 높은 평가를 받은 인물인 강용흘이 이 사건 때문에 '펄벅에게 뻘소리 하다 털린 놈' 정도로 기억되었다.

정작 본토에서는 백인우월주의는커녕 농경문명이라는 동서양의 공통점을 묘사하는 이 소설로 동서양의 가치를 별개의 것으로 간주한 뒤 서양 문명을 우위에 놓는 오리엔탈리즘을 박살냈다는 고평가를 받고 있으며, 미국에서는 이 소설 덕에 형성된 중국에 대한 우호적 감정이 전간기, 대전기의 대중국 정책에 일정한 영향력을 미쳤다는 이야기까지 나오는 판국이다. 즉 이 소설에 백인 운운하는 것은 그냥 어리석고 소심한 피해망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펄 벅은 평생을 바쳐 동양에 헌신한 사람이고, 미국이 공산당에 밀린 중화민국을 손절하려 하자 백인들이 기독교를 앞세워 친절한 자선가, 선교사 노릇을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냉정하게 저버린다면서 신랄하게 비난했을 정도로 백인과 아시아인 그 사이에 있던 사람이었다. 오히려 <대지>에 백인우월주의를 운운하는 사람들 본인이야말로 아시아인은 아시아인만 묘사할 수 있다는 식의 인종차별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욱 흥미로운 점은, 펄 벅 자신이 대지의 3부에서 미국에 유학하던 주인공 왕옌을 통해 이런 관점을 보여준 바 있다는 점이다. 작중에서 다른 중국인 유학생들이 농부로 분장하고 우스꽝스러운 촌극을 공연한 것에 대해 왕옌이 "너희는 중국인의 체면을 깎고, 망신시키고 있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나온다. 즉 펄 벅 자신도 이와 같은 방어적 태도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 뿐만 아니라 펄 벅 자신도 평생에 걸쳐 강용흘이나 루쉰 등과 비슷한 입장, 즉 당시 서양 내에 만연했던 동양에 대한 비하적 편견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역할을 담당해 왔다. 결국 이는 젊은 시절의 펄 벅이 자신은 중국인도 미국인도 아니라고 인식했던 것처럼 펄 벅 자신의 복잡한 정체성이 가져온 상황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랬으니 유일한부부와 그리 인연이 두터웠을 것이다.

게다가 이 소설은 유교, 기독교의 양쪽 문명의 관점에서 바라본 페미니즘 문학으로서의 독특한 입지가 있어 백인, 아시아인을 불문하고 현대 사회에서까지 그 가치가 높다. 오란을 예로 들면, 등장인물들이 부당한 여성에 대한 착취나 폭력,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굳건하고 능란하게 가정을 이끌어나가거나 남성보다도 강건한 힘으로 현실과 싸우고, 오란을 부당하게 대한 왕룽은 결국 아이를 낳고 기르며 가정을 이끄는 여성의 가치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리거나 첩을 들이고 가정을 소홀히 한 자신의 악행을 깊이 반성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소설과 같은 사건들이 저개발 국가에서는 아직도 일상적인 일들이고, 가정폭력이나 여성 착취는 선진국에서도 제법 벌어지는 일들임을 감안하면 특정 문화권에 한정하는 좁은 소견과 독후감을 가질 일이 아니다.

5.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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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미권에서는 각종 이유(이런 이야기는 독자들이 관심 없을 것이다, 수준이 저급하다, 논란거리가 될 민감한 소재라서 내줄 수 없다 등등)로 출판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가 훗날 대박 터지는 작품들이 상당히 많다. 해리포터 시리즈도 그 중 하나이다. 해리포터 시리즈는 요즘 어린이들은 마법사 마법에는 흥미를 못 느낀다는 이유로 퇴짜 맞았다. [2] 장영희 서강대 교수의 아버지. [3] 애초에 해당 장면 자체가 처음에 집 주인을 협박할 때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당황하고 당혹스러운 상태였던 왕룽이 (평소에는 그렇게 잘나보이는 부자였던) 집주인이 비굴하게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분노와 폭력성에 사로잡힌다는 묘사가 있는 만큼 처음에는 (협박을 하면서도) 존댓말을 했다가 그 다음에는 난폭한 어조로 바뀐 것이 오히려 원작 분위기를 잘 살린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어쨌건 독자가 판단할 문제지만 말이다. [4] 외모가 보잘것 없는 이유는 왕룽 아버지의 주문 때문이다. '예쁜' 종은 외모만 꾸미려고 하지 농삿일 따위를 하지 않으려 들 공산이 큰 데다가, 주인집 남자들이 이미 건드렸을 게 뻔하므로 일부러 외모가 예쁘지 않은 사람을 달라고 했다. 왕룽이 오란을 맞이하러 갔을 때 마나님도 '이 애는 내가 알기론 아직 처녀야' 라고 했다. 후에 이와 관련한 묘사가 있는데, 흉년 때문에 남방으로 떠났지만 그곳에서도 가난에 시달리자 왕룽이 을 그 지역 부잣집에 종으로 팔까 말까 고민할 때 오란이 직접 예쁜 여종의 운명에 대해 언급한다. 부잣집 여종은 걸핏하면 매를 맞는다는 오란의 말에, 왕룽이 내심 움찔했는지 이 애는 제법 예쁜데 예쁜 종도 매를 맞느냐고 묻자 오란은 "매를 맞거나 사내 침실로 끌려가는 거예요. 주인집 도련님들이 돌려가며 희롱하다가 도련님들이 싫증낸 종은 또 청지기들이 돌려가며 희롱하죠. 예쁜 애들은 아주 어릴 때부터 그 꼴을 당해요."라고 대답했다. 여담으로 이 시기에는 몰랐지만, 나중에 이 딸이 좀 자라고 나서야 백치라는 것을 알게 된(선천적인 것일 수도 있지만, 이 흉년기의 영양실조가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다) 왕룽은 '그때 이 아이를 팔았다면 부잣집에서는 백치인 줄 알자마자 죽여버렸겠구나'라고 생각하며 딸에 대한 미안함으로 잘 보살펴준다. [5] 그리고, 왕룽 둘째 아들인 왕얼도 똑같이 이렇다. 첫째 왕이는 예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지만(거기다가 도 뒀다.), 왕얼은 예쁜 여자는 씀씀이가 크고 바람도 피거나 일도 안 하려 하니, 얼굴은 별로라도 착실하고 씀씀이가 적은 알뜰살뜰한 여자를 원한다고 하여 정말로 얼굴은 별로지만(정확히는, 미인은 아니나 결코 못생기진 않았고, 붉은 고기에 빗댄 묘사를 들어보면 왕룽의 아내 같은 박색은 아니고 호감은 가질 만한 평범한 외모인 듯하다.) 당돌한 성격을 가진 상인의 딸과 결혼해 매우 금실이 좋았다. 그러나, 소작료를 악랄하게 받아내던 왕얼에게 불만을 가진 일당에게 소작료를 받으러 나간 왕얼의 아내는 끔살당하고(사실 돈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지자면 할 수 있었는데 돈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협박하던 인간들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이야기를 회고하던 왕얼은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6] 남방으로 떠나기 직전 이 넷째 아이를 낳지만 아이는 왕룽이 출산을 확인하러 갔을 때 이미 죽어 있었다. 사산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달랑거리는 아이의 목에 두 군데 검은 상처가 있었다"는 묘사로 봐서는 갓 태어난 아이를 오란이 살해한 것이라는 해석이 주류다. 아이가 태어날 무렵에는 이미 극심한 흉년으로 참혹한 기아가 시작된 상태였고, 왕룽 자신도 굶주림으로 쇠약해진 오란이 출산 과정에서 죽지나 않을까, 그리고 아이가 태어나면 그 아이를 어떻게 먹여살릴까에 대하여 끔찍하게 고민했다. 그러면서 차라리 사산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아이의 첫 울음을 듣고 도리어 실망하는 내면 묘사가 나올 정도였다. 출산 후, 아이가 죽었다는 오란의 말에 "울음소리가 들려서 무사히 태어난 줄 알았다"고 이야기했지만 오란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고 왕룽 역시 더 묻지 않는다. 아이의 시신을 매장하며 목의 상처를 확인했으나 이에 대해서도 오란에게 묻지 않는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눈치가 빠르고 (원칙주의적인 왕룽에 비해) 도덕선을 벗어나더라도 실용적인 면이 강한 오란이, 어려운 상황에서 아이를 키우려다 다른 가족의 생존마저 위협할 것을 걱정하여 아이를 낳자마자 죽였고, 왕룽은 이를 눈치챘지만 처한 상황과 오란의 심정(작중 직접 묘사되지는 않으나, 다른 식구들이라도 살리기 위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죽여야 할 때의 참담함은 왕룽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리는 없다)을 알기에 모른 척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시체는 개가 먹어버린다. 뼈만 남은 마른 아기였다고 하지만 시체를 파묻으려고 하자 뼈가 보일 정도로 굶은 큰 개가 나타나 노려봤다. 분노한 왕룽이 큰 돌을 주워 몇 번이나 맞혀도 개는 그대로 있었다. 왕룽도 '어쩔 수 없지. 너도 굶주렸으니...' 하며 대충 파묻고 뒤로 안 돌아보고 달려간다. [7] 이때 인력거를 몰며 여러 사람을 만나던 왕룽은 (선교사로 추정되는)외국인을 태웠다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그려진 전단지를 받기도 하고, 광장에서 젊은 학생이 사회주의에 관한 전단지를 나눠주며 연설을 하는 것도 듣는다. 하지만 둘 다 정작 왕룽 일가의 어려운 현실을 타개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 되었고, 왕룽이 받아온 전단지는 오란이 신발 밑창을 만드는 데 쓴다. [8] 왕룽은 미처 탈출하지 못한 부잣집 남자에게 은화 두 무더기를 강탈하고, 오란은 비밀 장소에 숨겨져 있던 보석을 한보따리 입수한다. [9] 남방과 비슷하게 왕룽의 고향에서도 황씨 댁이 비적에게 습격당해 주인마님이 죽고 가치 있는 보물이나 가구는 죄다 빼앗기고 하인들도 모두 도망치는 난리가 있었다. 그 때문에 황씨 댁에서는 외지에 나가 있던 아들들이 전답을 모두 팔고 이 고장을 뜨기로 했고, 마침 돈이 있었던 왕룽이 보석을 투자해 모두 사들인 것이다. [10] 이는 오란이 기본적으로 소박하고 유순한 성품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상황에서 두쥐안의 신분은 '첩의 하녀' 인데 비해 오란은 가장의 본처, 즉 '집안의 가모' 였기 때문. 만약 오란이 강인하거나 권력지향적인, 또는 복수심이 강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면 "핫하! 옛날에 날 들볶던 무렵에는 이런 날이 올 줄 몰랐으렸다?" 를 외치며 두쥐안을 마구 괴롭히고 학대하여 보복을 시도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롄화나 두취안 역시 만만한 성품은 아니니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았겠지만 오란 역시 부잣집 하녀 출신이니 부잣집의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니고, 명분(신분)상 명백한 우위에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오란이며, 가장인 왕룽 역시 롄화에게 완전히 빠져있기는 해도 오란에게 일종의 죄책감과 부채의식 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자신이 빠진 첩(롄화) 자신도 아닌 그 첩의 하녀를 위해 아내를 강하게 제지했으리라 보기는 어렵다. [11] 그리고 작중 내용에서도 보이듯 왕룽은 아무리 상대가 롄화라도 일정한 선을 넘어오면 무작정 참아주지는 않는 인물인데다 롄화 역시 왕룽이 정말 화가 난 것 같으면 (왕룽의 총애를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몸을 사리는 정도의 눈치는 있는 인물이다. 즉, 롄화 역시 왕룽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면 퇴물 기생으로 나앉게 될 위험을 감수하고 하녀를 지키기 위해 집안의 본부인과 맞서줄지는 불분명한 것. 결국 부자가 된 뒤에는 나름 세상을 즐기는 방법에 눈을 뜬 왕룽과는 달리 오란은 부잣집 부인이 된 뒤에도 계속 스스로 집안일을 할 정도로 소박한 성품을 가지고 있고, 하녀 생활을 하던 당시 자신을 괴롭히던 두쥐안이 자기 집안의 하녀(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들어왔음을 실감하지 못하고 첩과 그 하녀 역시 자신이 직접 집안일을 하며 섬겨야 할 상대로 인식할 정도로 권력지향적이지 못한 성격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는 도덕적으로 원칙주의적인 왕룽에 비해 오란의 성격은 도덕선을 벗어나더라도 실용주의적이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도덕선이라도 넘는 성격일 뿐 자기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는 오히려 희생적인 성격임을 보여주고 있기도 한 것. [12] 눈치 100단인 두쥐안도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어서, 오란과 마주치자 나름대로 화해하자는 제스처를 보였다. 하지만 오란은 두견을 보자마자 자기가 직접 보복하지는 않고 왕룽에게 뛰어가서 위와 같이 호소한 것. 그리고 왕룽이 자기 말을 들어 두쥐안을 내보내주지 않자 그 둘을 위한 집안일은 일체 하지 않는 등 소극적인 대응만 한다. 뜨거운 물이 없어 롄화가 차 한 잔 못 마신다는 두쥐안의 호소를 들은 왕룽이 달려와 뜨거운 물 정도는 나눠줘도 되지 않으냐고 따지자 오란이 "난 종년의 종년이 아니다"라고 하고 왕룽은 "두쥐안을 위해서가 아니라 롄화를 위해서"라고 하는데, 오란이 당신이 내 소중한 진주를 빼앗아 그 여자한테 주지 않았냐며 노려보자 움찔해서 도망간다. 그리고 분쟁을 피하려고 두쥐안과 롄화가 따로 쓸 부엌을 만들어주는데, 이게 또 줄줄이 파생효과를 낳는다. 혼자 부엌을 쓰게 된 두쥐안이 롄화를 위한다는 핑계로 비싼 음식을 마구 사들여서 돈을 물처럼 써댔고, 진기한 음식 먹기를 좋아하는 숙모가 롄화의 집에 꼬이게 되었다(애초에 롄화를 왕룽의 집에 데려오는 뚜쟁이 노릇을 한 사람이 숙모였다). 두쥐안이 돈을 낭비하는 것도 싫고, 싫어하는 사람인 숙모가 롄화와 친해지는 것도 싫었던 왕룽이 롄화에게 한 마디 하니 롄화는 "난 여기서 하루종일 혼자 있고 친구도 없는데 숙모랑 이야기도 못 하게 하다니, 당신은 날 사랑하지 않는 거냐"며 울어댔고, 결국 당황한 왕룽은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뒀다. 대신 롄화를 덜 찾아가게 된다. [13] 롄화는 미인이기는 하지만 화장으로 커버하고 있을 뿐, 보기보다 나이가 많다는 언급이 있다. 후속편을 보면 왕룽보다 겨우 12살 어렸다. 물론 이 소설이 등장인물들 나이가 오락가락하는 것을 감안해도 왕룽이 첩으로 맞이했을때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30대는 한참 넘었을 것이다. 백이면 백 오란보다 연상이었을 것이다. 롄화를 데려오는 일을 중개한 왕룽의 숙모도 보기보다는 늙었다면서 나이가 많지 않으면 이런 조건으로 농사꾼에게 낙적해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14] 왕룽이 말년에 가장 크게 후회했던 일 중 하나가 아내가 가지고 있던 진주를 뺏어서 롄화에게 준 일이었다. [15] 리화는 왕룽이 당숙에게 희롱당할 뻔한 자신을 구해준 후 호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나이 많은 남자들이 좋다며 그에게 매달렸다. 어린 시절(왕룽의 집에서 생활할 때 포함) 무슨 일을 겪었는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는 왕룽 외의 남자들은 자신을 팔아버린 아버지조차도 밉다고 하고, 특히 젊은 남자들은 잔인하고 사납다며 무서워한다. 왕룽은 리화의 이런 태도가 두쥐안이 음탕한 이야기로 위협했기 때문인지, 차마 말 못할 짓을 당했기 때문인지 잠시 추정하기도 했으나 작중에서 나오는 바는 없다. [16] 본문에서는 육체관계를 말하는 내용이 있지만 그리 오래가진 못했다. 늙은 왕룽에게는 짧게 타오른 정욕이었고, 이내 낮에는 시중을 받고 밤에는 그저 '부드럽게 리화를 품에 안고 누워서 그녀의 육체를 느끼는 것으로 만족하는' 그런 정도의 관계가 된다. [17] 막내아들 왕싼이 집을 나간 결정적 이유는 리화를 연모했기 때문이다. 왕룽이 리화를 첩으로 맞아들이는 바람에 가출하고 만다. 다만, 이는 왕룽이 리화를 포기하고 왕싼에게 붙여주려고 했지만 리화 쪽에서 싫다고 한 것도 있다. [18] 王一, '왕따'(大)로 적은 판도 있다. [19] 王三, 후에 불리는 이름은 왕후(王虎)였다. [20] 여담이지만 《대지》 1부에서는 서당의 훈장 선생이 서당에서 부를 이름으로 큰아들과 작은아들의 이름을 각각 눙언, 눙운이라고 지어주었다고 나온다. 일종의 아명 같은 것으로 사용한 듯 하다. 한자식으로 농문(農文), 농은(農恩)이라고 나오는 경우도 있는데, 사실 이 소설은 중국어가 아닌 영어가 원문이기에 모든 등장 인물의 이름은 영어(중국어 발음의 로마자 표기 또는 아예 영어 단어)로 되어 있고, 한자 표기는 발음이나 단어 번역으로 적당히 만든 것이다. [21] 한국에서는 중국어나 일본어 번역판에서 사용한 한자를 이용하는 경우도 많다. 오란(O-lan)의 한자 표기가 당장 중국어 위키백과와 영어 위키백과가 다르다. 첩의 이름이 이 문서 안에서도 롄화로 나왔다가, 롄잉으로 나왔다가 하는 식으로 오락가락한데, 원문에는 그냥 Lotus(연꽃)로 되어 있다. 즉 Lien-hua도 Lien-ying도 아니다. 한 중국어 번역판에는 Lotus를 표준중국어에서 널리 통용되는 단어로 번역한 荷花로 나온다. 펄 벅이 여기서 영어 단어를 그대로 쓴 것은 이 이름을 본명이 아닌 그냥 기방에서 쓰는 가명 비슷한 것으로 설정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오히려 적당히 한자를 때려맞춰 그것을 한국 한자음이나 표준중국어 한자음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영어 단어를 그대로 번역해서 부르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펄 벅이 부활해서 자기 작품을 직접 중국어로 번역하지 않는 한 이런 한자 표기 난립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훈장이 아버지인 왕룽의 직업을 듣고 거기서 따서 '눙' 자를 돌림자로 지어주었다고 하니 한국식 발음으로 '농사 농'(農)인 것만큼은 맞는 듯하다. [22] 그래도 3부에서 사는 걸 보면 부유층으로 떵떵거릴 정도는 된다. 왕룽이 워낙 재산을 많이 불려놓아서인 것도 있고, 왕이의 큰아들이 은행 부총재로 할아버지만은 못해도 어떻게 자기 자리 하나는 차지했으니. [23] 첫째 첩이었던 롄화는 78세까지 살아있었으나 급체로 죽었다. 급체가 오기 직전까지도 건강했었다. 이때 표현이 아이러니하게도 치아가 너무 건강해서 입을 억지로 벌리고 약을 먹이지를 못해서 죽었다고.(급체로 죽어가고 있었기에 스스로 약을 먹지를 못했다.) 그녀가 죽은 후 두쥐안은 진심으로 슬퍼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남긴 패물들은 전부 챙겨서 떠났다. 패물을 전부 챙기는 바람에 엄청난 부자의 첩이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남긴 것은 소박한지(...)에 대해서 말이 나왔을 정도. 여담으로 두쥐안은 오란이 10대일때 황부자 영감의 첩이었던 걸 보면 오란보다는 나이가 많은 것으로 추정되는데 롄화가 죽었을 때까지도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24] 이 천치 딸이 병으로 죽고 리화는 스님이 되었다. 결국 갈 길 없는 곱사등이도 스님행. 그러나 이 곱사등이 아이는 몸이 망가져서 가족들 사이에서는 버려진 애 취급이었으나(밥도 같이 안 먹을 정도였다.) 사실 몸이 망가진 것도 자기 탓이 아니다. 친엄마가 태어난 이 친아들을 달가워하지 않고 젖도 안 먹여서 유모를 구했으나 유모는 자기 친아들에게 갈 젖을 억지로 이 아이에게 먹이는 것에 증오를 품고 어느날 갑자기, 갓난아기인 그를 바닥에 내던지 등뼈가 부러져 곱사등이가 되고 만 것이다. 젖꼭지를 아기가 물어 그렇다고 피가 난 가슴을 보여줬지만 일부러 그랬는지도 모를 일. 곱사등이인 점을 제외하고 몸이 매우 튼튼하였기에 정신적으로는 꽤 야망을 품고 있는 아이였다. 왕싼이 곱사등이 아이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몸만 멀쩡했다면 군인으로 딱일텐데라고 아쉬워했다.)이 복선같이 나오더니 결국 이 아이는 리화가 죽은 후 흑화하여 혁명가가 된다고 3편 마지막에 등장한다. 다만 자신이 겪은 일로 가족이나 핏줄에 대하여 증오를 가져 혁명가랍시고 하던 말이 "가족을 죽여라!", "바꾸려면 주변 가족을 믿지마라!"라고 외치면서 근친살육을 외쳤으니 씁쓸한 결말이다. [25] 이 뇌물을 위해 현에서 생산되는 도자기 술병에 적은 액수의 세금을 부과하는데, 워낙에 많은 갯수가 생산되는 물건이라 금방 거액이 되었다. [26] 이전에 호감을 느꼈던 리화에게 상처를 받은 그였지만 이후 군벌이 되면서 자신이 죽인 표범 장군의 여자에게 반해 부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한다. 그녀는 매우 아름답고 영리한 암표범같은 여자여서 왕싼에게도 실제적인 조언을 많이 했는데, 왕싼이 총이 더 필요하다고 하자 둘째 형을 통해 외국에서 사들이면 된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형은 곡물상이지 무기상이 아니라는 왕싼에게 "형님 자신이 무기를 취급하지 않을 뿐이지, 무기를 거래하는 사람과 연락할 수 있는 연줄은 있을 거다"라고 일깨워주어 3,000정이나 되는 총을 구할 수 있는 지혜를 준다. 그리고 그 총이 도착하자 배신한다. 전 남편의 부하들에게 정보를 주어 총이 들어오는 수송로를 습격해서 총을 탈취하게 하고, 자기도 도망쳐서 그쪽으로 합류한다. 그녀는 사실 처음부터 왕싼을 사랑하지 않았고, 왕싼의 사랑을 이용해 전 남편의 복수를 할 생각뿐이었다. 왕싼은 결국 도망친 아내를 쫓아가 목을 베고, 잃어버린 총도 일부 회수하지만, 여자들에 대한 혐오가 더욱 심해진다. 그래도 자식은 있어야겠기에 형들에게 아내로 삼을 여자를 보내달라 부탁해 두 아내를 얻는다. 그녀들에게서 각각 딸 하나, 아들 하나를 얻지만 아내들을 사랑하진 않았다. [27] 왕싼은 첫 부인을 죽인 후, 큰형과 작은형으로부터 한 명씩 여자를 소개받는데, 서로 자기 와이프가 추천하는 여자를 왕싼과 결혼시켰다. 이때 큰형이 소개해준 여자는 전형적인 신여성 스타일로 아이란이라는 외동딸을 하나 낳았고, 작은형이 소개해준 여자는 전형적인 시골 여성 스타일로(이가 검고 입냄새도 심할 정도로 그런 쪽에 신경을 안 쓰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이가 검은 색인건 콤플렉스여서 입을 가리고 말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 여자가 왕위안의 생모다. 이 여자로부터 왕위안의 동복 여동생이 몇명 더 태어났으나 이복 여동생인 아이란에 비해 비중이 적다. 이름도 안 알려졌고 적당히 나이먹어서 시집갔다는 얘기만 나온다. 그리고 큰형이 소개해준 여자는 아들인 왕위안에게만 집착하는 왕싼에게 실망하여 혼자 외동딸을 잘 키워보겠다며 아이란을 데리고 상하이로 이주했다. 왕위안이 상하이로 간 후 왕위안의 친어머니같은 역할을 해준다.그리고 그 아이란은 춤추고 놀기만 하다가 속도위반 결혼까지 하면서 제대로 속을 썩이지 [28] 이 부은행장이 된 아들이 뚱뚱하고 미식가 스타일에 공처가 기믹도 살짝 보이는 등(...) 아버지와 완전히 닮았다. 사실 젊었을 때는 왕싼을 따라가서 군인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도 있었으나 아버지가 거절했고, 이후 완전히 아버지 판박이가 된다. [29] 믿을 만한 측근이 필요했던 왕싼이 두 형들에게 아들 하나씩 달라고 했다. 하지만 왕이가 보낸 아들은 군인이 되는 게 너무 무서워서 목을 매어 죽는다. 애초에 유약했고 학문을 좋아하던 스타일이라 무관과는 전혀 맞지 않았고, 이 아들이 죽은 후에 왕이의 부인이 '학자 기질이 있는 애를 왜 보내서 죽게 만드냐.'라고 왕이에게 화내는 장면이 있다. [30] 그럭저럭 아버지를 닮은 상인의 기질로 스파이 등의 역할을 맡는데, 군대 생활을 성공적으로 잘 해나가고 후엔 자신이 지배할 영토까지 할당받았다. 다만 완전히 군인이라기보다는 상인 기질이 강하다보니 상업도시의 관리자가 된 후에는 전형적인 배나온 문관 관리가 되어 후에 왕싼에게 '얘도 역시 군인이 되기에는 부족한 놈이구만.'하고 까인다(...) [31] 몸도 아팠고, 애지중지하던 명검을 농민들이 훔쳐가버린 것에 큰 충격을 받아 정신적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얼마나 정신이 나갔냐면 메이링을 친딸 아이란으로 착각하고 내 딸이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32] 그래도 학비나 군자금은 감당이 가능한 선이었지만, 결정타는 아들이 혁명세력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일이었다. 이때 그를 빼내기 위해 엄청난 뇌물을 썼는데, 이것으로 인한 채무가 결정타가 되어 왕싼의 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던 것이었다. [33] 사실 원칙을 따지면 총기 소실은 왕싼측의 과실로 일어난 일이니 전액 지불이 맞고, '잃어버린 총 값은 못 내겠다'고 했다가 '손해는 반반 부담하자'고 요구한 왕싼의 주장이 억지이기는 하다. 하지만 폭력이 만연한 혼란기에 20,000명에 이르는 병력을 거느린 군벌의 보호는 돈을 바쳐서라도 받을만한 것이었고, 왕싼의 영역에 있는 다른 부자들은 왕얼처럼 왕싼과 거래를 하기는 커녕 아예 세금 명목으로 생 돈을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평화로운 시기에는 말도 안되는 억지지만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그나마 받아들이는 것조차 행운이라는 점에서 왕얼-왕싼의 관계는 왕룽-숙부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더 심하고 뻔뻔한 숙부의 행태를 끝까지 꾹 참은 왕룽은 죽을 때까지 약탈을 당하지는 않은데 비해, 훨씬 신사적인 왕싼을 상대로도 과욕을 부린 왕얼은 스스로를 지킬 수단마저 상실하게 된 것이다. [34] 혁명 성공 후 위안이 자기 아래로 와서 일하길 바랬지만, 위안은 교사가 되기를 희망하여 성사되지 않았다. 참고로 위안은 할머니 오란을 많이 닮았다고 묘사된다. [35] 다만 왕이의 막내아들은 지금의 혁명군도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데, 공산주의자를 묘사한 것으로 보인다. 왕이의 자식들을 처음 만나기 전에 아이란이 대놓고 그런 식으로 소개했었고.(왕위안은 꽤 자란 후에 상하이로 간 것이라서 사촌인 왕이의 자식들하고도 다 커서 처음 만난 것이다. 반대로 아이란은 아주 어릴때 이주했기에 그들을 여러번 본 것으로 보이고.) [36] 이미 결혼도 한 번 했었다. 정략결혼이었기에 마음이 없어서 결국 이혼했다. 아이란의 생모가 왕위안에게 말한 바에 의하면 굉장히 불행한 여자라고. 거기다가 아이란이 애를 낳는 장면에서의 표현을 보면 이 소설가는 전부인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자식도 두 명 이상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37] 극중에서 상당히 잘나가는 소설가로 항상 주인공을 자살시키는 결말로 유명했다고(...) 다만 주인공을 자살시키는 결말이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닌것이,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소개된 바와 같이 동아시아의 개화기에 '연애'와 '자살'은 개인의 욕망과 자유를 상징하는 아이콘이었다. [38] 중간에 한번 이어질뻔 했는데 왕위안이 조급해져서 다 말아먹는다. 메이링은 마지막 날에 데이트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왕위안이 조급한 나머지 자기 마음을 안 받아준다고 여겨서 그날 따로 약속을 잡고 외출해버린 것이다. [39] 루쉰이 이처럼 대지를 나쁘게 본 이유가 번역이 엉망으로 된 중역판을 읽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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