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관광용 인력거[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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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인력거([ruby(人力車, ruby=じんりきしゃ)])는 사람의 힘(人力)으로 끄는 수레(車)를 말한다. 오늘날의 택시와 유사하게 운용되었으며 한국에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주로 이용되었던 교통수단이었다.영어로는 'rickshaw'(릭샤)라고 하는데 이는 일본어 '[ruby(力車, ruby=りきしゃ)](리키샤)'에서 유래했다.
2. 역사
사람이 끄는 수레 자체야 고대부터 있어 왔고 물건은 물론 사람도 실러나르기도 했지만 보편적인 교통수단은 아니었다. 사람을 태우는 인력거를 최초로 고안한 사람은 미국인이다. 19세기 중반에 일본에 선교사로 파견된 감리회 소속의 조나단 스코비 목사는 병약한 아내의 교통수단으로 인력거를 고안했다. 유럽에서도 비슷한 물건이 17~18세기에 있었는데 주로 마차가 가기 힘든 좁은 골목이나 재래시장통에서 운용되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상업화된 인력거가 등장한 나라는 일본이다.마차라는 동물을 이용하는 수송 수단이 이미 자리잡았던 서양에서는 보편화되지 못했지만 일본, 한국, 중국 등에서는 굉장히 빠르게 보편화되었는데 이는 가마라는 인력을 이용하는 수송수단이 이 지역에 이전부터 존재했기 때문이다. 인력거가 요즘에야 느리지만 처음 나올 당시에만 해도 가마보다 훨씬 빠르고 힘도 덜 들었다. 더구나 가마는 웬만하면 4명 아무리 적어도 2명이 필요했는데 비해 인력거는 혼자서도 가능했으며 마차에 비해자면 건초를 준비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순식간에 가마를 대체해 버렸다. 근대의 잘 깔린 도로와 좋은 바퀴로 된 인력거는 가마보다 승차감이 좋았기에[2] 빠른 대체의 한 원인이 되었다.
급속한 도시화는 진행되지만 적절한 교통수단이나 도로기반이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등장한다는 점에서 근대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도시화 자체가 진행되지 않은 극단적인 후진국에서는 수요가 없어서 인력거가 생기지 않는다. 도시에서 다른 교통수단의 요금보다 인건비가 월등히 낮을 때 등장하는 직업이다. 인건비가 높아지고 경제 사정이 나아지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이용해 승객을 끄는 뚝뚝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사라진다. 그러다 영운기 택시가 등장하고 나중에 선진국이 되면 승용차를 이용한 택시가 된다.
한국에서 인력거의 주 이용층 중 하나가 기생이었는데 기생을 술자리에 부르려면 당시로서는 지나치게 비싼 택시는 못 보내도 최소한 인력거 정도는 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 중 하나는 기생은 고객, 인력거꾼은 서비스 제공자였는데도 불구하고 인력거꾼은 이용자인 기생에게 하대를 하고 기생은 인력거꾼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존대했다고 한다. 이는 실제로 인력거꾼 중에 기생들의 아버지가 많았기 때문이었다고 한다.[3]
3. 현대
현대에 들어서는 내연기관과 전기모터의 발달로 순수 인력으로만 끄는 인력거는 많지 않고 오토바이나 자전거형으로 변형된 인력거가 대다수이다. 현재 인력거가 남아있는 곳은 주로 인도와 방글라데시, 베트남 같은 동남아, 남아시아나 아프리카 지역이다. 손잡이 부분에 자전거를 달아서 초반에 속도를 낼 때는 인력으로 끌다가 어느 정도 속도가 나면 자전거에 올라타서 운전한다. 자전거가 인간의 이족보행보다 에너지 효율이 훨씬 좋기 때문에 훨씬 빠르다. 여름에 타도 바람 덕분에 추워질 정도다. 그래서 대부분의 인력거에 담요가 준비되어 있다. 그래도 끄는 쪽에서 힘들기는 마찬가지다.일본에서는 1900년대에 노면전차가 개통되면서 점차적으로 사양길에 접어들었고 1920년대에 택시가 운행하기 시작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에 잠깐 인력거가 석유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잠깐 부활한 적도 있지만 1950년대 이후 일본의 경제성장으로 오토바이와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하자 관광용으로 전락했다. 교토나 도쿄의 아사쿠사와 같은 관광지에서 관광 목적으로 운행하며 요금은 2인 기준 1분에 300엔이지만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한국에서는 택시가 너무 비쌌기 때문에 인력거가 6.25 전쟁 시기까지는 대중적인 교통수단으로 남아 있었는데 전후에 버스가 널리 운행되기 시작하면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일부 관광지에 이러한 형태의 인력거가 남아 있다.
저성장 개발도상국에서는 아직도 관광상품이 아니라 실제 상용으로 사람이 끄는 인력거가 남아있다. 뭔가 한 번 타보고 싶어서, 또는 못 사는 외국인 한 번 도와줄 겸 타 보려는 관광객들이 있지만 마음이 심약한 경우 후회할 수도 있다. 자기는 앉아서 가는데 온몸을 땀으로 적셔가며 수레를 끄는 사람의 등을 보고 있노라면 괜시리 미안한 기분이 든다고 한다.
동아프리카 등에서는 보다보다라는 자전거/오토바이 택시가 인력거 역할을 한다. 나라마다 이름이 다르다. 형태는 보통의 자전거나 오토바이 짐받이 부분을 탑승석으로 개조한 정도지만 인력거가 생각나게끔 탑승석을 붙인 마개조도 있다.
중국에서는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초기에 대도시에서 흔한 대중교통이었고 공산화 이후로도 한동안 영업하였지만 힘을 덜 쓰는 삼륜자전거로 점차적으로 대체되었으며 현재는 관광지에서 운영한다.
인도, 방글라데시에는 일부 남아있다. 인도는 '릭샤왈라'라고 불리는 인력거꾼의 숫자가 매우 많았기도 했다. 그래도 90년대에 이미 자전거 릭샤가 80%를 차지했고 2010년대 들어서는 사람이 직접 끄는 인력거는 보기 힘들어졌다. 대부분 자전거인 사이클 릭샤나 엔진으로 기동하는 오토릭샤로 움직인다. 동력으로 움직이는 오토릭샤가 70%를 넘긴다고 한다.
인도 캘커타에선 인력거(릭샤)가 상당히 문제가 되기도 했는데 주로 가난한 노동자들의 밥벌이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이다. 이 도시에서 이들을 대체할 만한 수단이 없어 심지어 정치인들도 인력거를 타고 출근하며 등교용 인력거 인부인 릭샤왈라를 개인적으로 따로[4] 두고 있는 실정인데 문제는 이들이 도시의 이미지를 위해 인력거 폐지를 주장하면서 일어났다. 하지만 릭샤왈라들의 결사적 반대 및 인권단체로부터 그럼 그들이 벌어먹을 일자리를 구해 달라는 비난에 직면했고, 릭샤왈라들의 표 때문에 단기간에 바뀔 전망은 없어 보인다.
유럽에서도 위 사진과 같이 자전거에 끄는 형식의 인력거가 흔하게 쓰인다. 보통 부모가 아이를 끄는 용도라 인력거 형식의 유모차라고 봐야 할 듯. 'bike trailer'라고 부른다. 고인이 된 노무현 대통령도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 바이크 트레일러에 손녀를 태우고 다닌 적이 있다.
넓은 의미로 휠체어나 유모차 정도가 오늘날에 광범위하게 아직까지 사용되고있는 인력거의 형태이다. 주용도는 아니지만 리어카에 사람이 탈 수 있어서 인력거처럼 활용할 수 있다.
4. 운동 효과
최영의도 젊은 시절에 여비를 벌기 위해 인력거를 끌었던 적이 있다고 하며 영화 황비홍에 귀각칠도 인력거꾼으로 나온다.인력거는 달린다는 그 자체로도 다리 힘을 크게 길러주는 데다가 위쪽이 아닌 뒤쪽으로 무게를 끌고 달리기 때문에 운동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햄스트링을 단련하는데 효과가 아주 그만이다. 게다가 손잡이를 잡은 상태로 상체로 버티며 끌기 때문에 대흉근과 팔근육 및 허리, 복부 등 코어근육을 단련하는데도 굉장한 효과를 발휘한다.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그걸 버텨낼 수만 있다면 좋은 단련법인 셈이다. 프로 운동선수나 대회 출장급으로 단련하는 아마추어들 역시 이런 식으로 뒤에 무게를 끌고 달리는 단련을 거의 필수적으로 거친다. 그래서 인력거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스포츠물이나 무협물에서 주인공이 인력거로 단련을 하거나 인력거꾼으로 위장하는 모습은 거의 필수요소.
5. 인력거꾼
동명의 소설에 대한 내용은 인력거꾼(소설) 문서 참고하십시오.
rickshaw driver / [ruby(車引, ruby=くるまひ)]き(쿠루마히키)
인력거를 끄는 사람을 인력거꾼이라고 한다. 별다른 자본 없이 힘만 쓰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기 때문에 힘 좋고 할 일 없고 가난한 남자들이 주로 했는데 그런 것에 비해 벌이는 괜찮은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단, (현대의 택시 기사와 마찬가지로)[5] 운행하는 지역의 지리는 숙지할 정도의 기억력은 있어야 했다.
하지만 밑천이 없으면 인력거를 돈 주고 빌려야했기 때문에 수입의 상당수를 인력거 임대료로 날려야 해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기는 힘들었으며 무척 고된 일이었다. 그래도 손님을 많이 유치하거나 돈을 잘 모아 자비로 인력거를 장만해 나름대로 고수익을 올리는 인력거꾼도 있었다.
한국에서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인력거꾼이 많았다.
의외로 중국에는 여성 인력거꾼이 많은데 남성이 가사일을 맡고 여성이 돈을 벌어오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5.1. 노동의 강도
보는 입장에서는 사람이 사람을 끌다니 굴욕적이라고 느꼈던 것 같다. 만주국이나 중국 동부에 대거 이주한 일본인들의 자손들이 일본으로 귀환하거나 방문했을 때 일본인이 인력거를 끄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 그 예.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수필이나 미라이 공업 창업주 야마다 아키오가 쓴 책[6]에서 그러한 이야기가 나온다.당시 주요섭이 쓴 동명의 소설 《 인력거꾼》에는 매일같이 지나친 뜀박질을 하는 탓에 인력거꾼은 9년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버린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당시 주요섭은 사회주의에 영향을 받아 카프 계열의 작품을 많이 썼고 소설 《인력거꾼》도 카프쪽 작품의 대다수가 그렇듯이 사회적 약자들의 처지를 충격적으로 묘사해서 독자의 마음을 뒤흔드려는 경향이 보인다. 따라서 작품 내 인력거꾼의 힘든 생활도 다소 과장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작가들이 이를 쓸 만큼 대중적으로 공감이 될 만한 하층 직업으로 보던 점도 있다.
그런데 의외일지 모르지만 일 자체는 그렇게 고되지 않았다고 한다. 인력거 자체가 상당히 인체공학적으로 만들어져서 언덕만 없으면 큰 힘이 들지 않는데[7] 인력거가 주로 다닌 길은 한중일 가릴 것 없이 대부분 대도시의 평평한 도로였다.
중국에서 나온 공산화 이전 인력거꾼을 했던 사람들은 인터뷰에서 고된 농사일이나 막노동에는 아예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수입도 5인 가족이 도시 빈민가에서 간신히 생활을 꾸릴 수준은 되었기 때문에 도시 빈민층 중에서는 오히려 괜찮은 직업이었다고 말했다. 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인력거꾼은 대개 4교대제로 일했기 때문에 이틀에 한 번 일하면 되었고 결원이 나기를 기다리는 지원자들로 항상 북적거렸다고 한다.
정비석의 소설 '졸곡제'에서 그런 모습들이 조금 비춰지는데 지게꾼인 주인공이 손님이 계속 있고 돈도 꾸준히 버는 인력거꾼들을 부러워하는 모습이 그런 장면이었다.
5.2. 매체에서
- 정무문: 작중에 인력거가 다니는 장면이 종종 나왔으며 특히 주인공인 진진( 이소룡 분)이 인력거꾼으로 변장해 통역사를 막다른 골목으로 유인하여 결국 끔살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특히 이 과정에서 진진이 통역사를 태운 인력거를 진진 자신의 힘으로 높이 들더니 그 자리에서 냅다 던져버리는 장면이 압권이다.
- 시티 오브 조이: 하자리 팔
- 대지: 왕룽 - 왕룽이 흉년으로 집안 살림도구를 싸게 팔고, 그 돈으로 온식구를 데리고 머나먼 도시로 가서 인력거꾼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극중 묘사에는 인력거꾼이 하두 많고 인력거도 빌려서 써야 했기 때문에 하루에 번 돈에서 반 이상을 인력거 대여비로 써야 했다. 농사일보다 못 번다고 왕룽은 투덜거리지만 이웃집 짐마차를 모는 사내가 담배를 피우면서 이 도시에는 당신같은 인력거꾼이 몇 만명은 있으니 이런 거란 말을 했다. 아무튼 왕룽은 부잣집에서 털어온 돈과 보석으로 엄청난 부자가 되면서 다시는 인력거를 끌지 않게 되었다.
- 산과 식욕과 나: 타키모토 겐지로 - 등산이 삶의 낙이라서 평소에도 늘 체력과 근력을 단련하기 위해 이 직업을 택했다고 한다.
- 인력거꾼(소설): 아찡, 뚱뚱보
-
걸즈 앤 판처: 신자부로설정상 하인이다. 인력거는 3화에 곁다리로만 나왔기 때문에 인력거 끌다 온 거 아니냐는 말도 나오겠지만 시대상과 본편과 최종장을 통합해도 1대만 보였기 때문에[8] 하인으로 있으면서 인력거 끄는 법도 배웠거나 원체 신체능력이 좋다고 봐야 한다.
- 좀100: 좀비가 되기 전에 하고 싶은 100가지: 주인공이 편의점에서 폭죽들을 챙겨서 가지고 가던 중 인력거꾼 좀비에게 쫒기는 장면이 잠깐 나온다.
6. 여담
중국 칭저우 고성의 인력거.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한 하드웨어 관련 커뮤니티에 인텔 저가형 CPU를 사용하는 사람을 인력거라고 비하하여 부르는 갤러들이 있다.
직업이 인력거꾼으로 나무위키에서 문서가 만들어진 실존 인물은 박원문이 유일하다. 1909년 이완용을 인력거에 태우다가 이완용을 암살하려던 이재명 의사에게 피습당해 사망했다.
비슷한 운송수단으로 철도를 손으로 밀어서 움직이는 인차철도가 있다.
[1]
사진에서 인력거에 탄 여성이 입은 옷은
시로무쿠라는 일본 전통
결혼식에서
신부가 입는 옷이다.
[2]
가마는 심하게 흔들리기 때문에 익숙한 사람은 몰라도 처음 탈 때는 멀미가 장난 아니었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 출신이 아닐 경우 대개 시집 갈 때 처음 가마를 타게 되는데 이때 가마 멀미 때문에 시부모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드러누워 버리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았다고 한다. 다만 가마 문서에서도 보듯 교통 인프라가 발전하기 전에는 다른 탈것들의 승차감이 영 좋지 못했기 때문에 이에 비하면 나은 편이었다. 더욱이 가마꾼을 늘리면 가마꾼 수에 비례해서 탑승감이 향상된다.
[3]
김이석의 단편소설 <실비명>이 기생을 주로 태우고 다니던 인력거꾼 홀아버지의 이야기를 다룬다. 아버지는 총명한 딸에게 큰 기대를 걸고 딸을 의사로 키우고 싶어했으나 딸은 기생이 되고 싶어하여 기생들과 어울리면서 아버지와 마찰을 빚었다. 결국 딸이 백기를 들고 아버지의 강권으로 간호학교에 입학하지만 적성도 맞지 않고 과도한 업무 스트레스까지 겹쳐 초췌해지자 그 모습을 본 아버지는 결국 이건 아니구나 싶어 학교에서 딸을 데리고 나온다. 절차를 밟는 모습은 나오지 않지만 사실상 자퇴를 허락한 것이나 다름없는 묘사다. 그렇게 아버지가 딸을 인력거에 태우고 귀가하던 중 부녀는 그만 교통사고를 당하고 아버지는 사망하고 딸은 살아남았다. 이후 딸은 결국 기생이 되었지만 다른 기생들이 다 인력거를 타고 다닐 때도 빗속에 옷을 적시며 걸을지언정 절대로 인력거를 타지 않았다고 한다.
[4]
자동차로 치면 정치인들과 재벌가의 고급 차량을 운전해 주는
쇼퍼와 같은 격이다.
[5]
요즘에는
내비게이션의 도움을 받아 길을 몰라도 그나마 곤란함이 줄어들었다. 물론 인력거가 주로 쓰였던 시기엔 내비게이션 같은 건 없었다.
[6]
한국에도 발간되었다.
[7]
잘 만들어진 인력거는 손잡이를 놔도 수평을 유지할 정도로 무게중심이 잘 잡혀있다. 따라서 손잡이를 위나 아래로 지탱할 필요 없이 앞으로 밀기만 하면 된다.
[8]
최종장 1화 블루레이에서는
BC 자유학원도 있지만 지붕도 없거니와 사람이 타는 게 아니라 고물 싣는 수레 수준이기에 논외. 여담으로 거기서도 사람이 타는건 말이 몰고, 모습도 마차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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