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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8 19:57:14

달성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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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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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색: 2015년 기준으로 총 인구 100명 미만인 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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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be673> 사로 6촌 신라 6부 성씨 시조
알천 양산촌 급량부 이씨 알평
돌산 고허촌 사량부 최씨 소벌도리
취산 진지촌 본피부 정씨 지백호
무산 대수촌 점량부 손씨 구례마
금산 가리촌 한기부 배씨 지타
명활산 고야촌 습비부 설씨 호진
삼국사기 기준. # 삼국유사에서는 돌산 고허촌(사량부) 소벌도리를 정씨로 취산 진지촌(본피부) 지백호를 최씨로 기록했다. 또한 6촌의 순서도 셋째가 무산 대수촌(점량부), 넷째가 취산 진지촌(본피부)이라고 기록했다.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dcffff> 파일:달성배씨_판서공파_이화(梨花)종문.png 達城 裵氏
달성 배씨
대구 배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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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향 <colbgcolor=#fff,#000>대구 광역시
비조 지타(祗陀)
도시조 배현경(裴玄慶)
시조 배운룡 (裵雲龍)
중시조 배손적(裵孫迪)
집성촌 대구광역시 달성군
경상북도 달성군
경상북도 경산군
경상북도 칠곡군
전라남도 무안군
전라남도 영암군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경상북도 경산군 자인면
인구 77,942명(2015년)

1. 개요2. 유래3. 역사4. 항렬표5. 인물6. 관련 유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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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구 배씨(달성 배씨)(大邱 裵氏)는 대구광역시 달성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경상북도 경산 지역의 세거 성씨로, 시조는 고려 시대에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배운룡(裵雲龍)이다. 중시조 배손적(裵孫迪)의 증손 배정지(裵廷芝)가 고려조에 밀직사부사(密直司副使)에 올랐다. 집성촌은 경상북도 최남단에 위치한 경산 자인면 읍천리에 국내에서 가장 큰 집성촌이 있다. #

그외 집성촌으로는 전북 고창군 해리면 광승리, 전북 순창군 유등면 외이리, 광주광역시 광산구 황룡동, 전남 무안군 청계면 청천리, 전남 무안군 청계면 태봉리, 경북 칠곡군 지천면 영오리, 전남 영암군 시종면 구산리 등이 있다.

지역별 인구 분포도는 서울 12,825명, 부산 4,006명, 대구 7,207명, 인천 2,239명, 광주 5,268명, 대전 929명, 울산 939명, 경기 9,046명, 강원 732명, 충북 470명, 충남 945명, 전북 2,939명, 전남 6,069명, 경북 3,371명, 경남 3,857명, 제주 262명이다.

2. 유래

달성(達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최남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렀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대구현(大丘縣)으로 개칭하여 수창군(壽昌郡)에 속하였다. 조선 영조조(英祖朝)에 구(丘)를 구(邱)로 고쳐 대구(大邱)라 하였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가지를 이룬 전역이 대구부(大邱府)로 독립되고, 외곽지 전부와 현풍군을 폐합하여 달성군(達城郡)으로 개칭하였다

달성 배씨(達城裵氏)는 고려 창업(高麗創業)의 주역(主役)으로 개국공신(開國功臣)에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 배운룡(裵雲龍)을 일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있다.

「배씨대동보(裵氏大同譜)」에 의하면 그는 고려조(高麗朝)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斯革)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고려 중엽에 벼슬을 지내고 공(功)을 세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진 연유로 후손들이 그를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달성(達城)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그후 달성 배씨는 민부 전서(民部典書) 배영(瑩 : 배운룡의 7세손)의 아들 배정지(廷芝)와 배정란(廷蘭) 형제대에서 가세(家勢)가 크게 융성하여 명문(名門)의 기틀을 다졌다.

10세의 어린 나이로 금위(禁衛)에 들어갔던 배정지(廷芝)는 강화(江華)에 천도했던 원종(元宗)이 개경(開京)으로 환도(還都)할 때 왕(王)을 호종(扈從)하여 대정(隊正)이 되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 후(印 侯)와 함께 연기(燕岐)에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하여 용맹을 떨쳤으며, 충청(忠淸)과 전라도 찰방(全羅道察訪)으로 나가서는 지방 관기(官氣)를 바로잡는 데 앞장섰고, 충숙왕(忠肅王) 때 일어난 제주도(濟州道) 반란사건을 존무사(存撫使)로서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도원수를 지낸 아우 배정란(廷蘭)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공민왕(恭愍王) 때 과천(果川)에 침입한 홍건적(紅巾賊)을 토벌하다가 아들 배광유(光裕)와 함께 순절한 배성경(成慶)은 밀직부사 배정지의 맏아들로, 그의 아우 배천경(天慶)․배함경(咸慶)과 더불어 가문의 중추적(中樞的)인 인맥(人脈)을 형성하였다.

신유당옥(辛酉黨獄)으로 아버지 배정지가 무고를 받아 유배되자 대신하여 수형(受刑)할 것을 간청했던 배천경(天慶 : 배성경의 아우)은 공민왕을 호종하여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으로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우 배함경(咸慶)은 맏형인 배성경과 함께 홍건적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으로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라 명성을 떨쳤다.

배성경의 손자 배균(均 : 배광유의 아들)은 우왕(禑王) 때 함양(咸陽)의 사근역(沙斤驛)에서 왜군과 맞서 싸우다가 순절하여 의절(義節)의 가통을 이었고, 고려 말에 충신(忠臣)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 했던 배을서(乙瑞 : 배균의 아우)는 조선의 개국(開國)한 후 수차에 걸친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둔거하여 고려 말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유명했으며, 야은(冶隱) 길재(吉再)에게 글을 배웠던 배인경(仁敬 : 배성경의 증손, 배문우의 아들)은 태종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를 지내고 세종 때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어 뒤에 고부군(古阜君)에 봉해졌다.

그외 수양대군(首陽大君)의 왕위찬탈을 예견했던 배두유(斗有)와 단종(端宗)이 손위하자 절의를 지켰던 배효명(孝明)이 뛰어났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배사원(師元)은 정언(正言)과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1467년(세조 13)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이를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으며, 성종(成宗) 때 정주 목사(定洲牧使)를 지낸 배상경(常絅)은 연산군(燕山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한편「여지승람(輿地勝覽)」의 편찬에 참여했던 배익신(益臣)은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으며, 명종(明宗) 때 유일(遺逸)로 기자전 참종(箕子殿參奉)에 천거되었던 배서(恕)는 을사사화(乙巳士禍)에 연루되어 귀양간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의 억울함을 상소(上疏)하다가 파직되자 향리로 돌아가 후진양성에 전념했다.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했던 배승무(承武)는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 김천일(金千鎰)․ 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진주성(晋州城) 싸움에서 순절하여 승문원 좌승지에 추증되었으며, 배성유(聖有)는 영조(英祖) 때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낸 배상규(祥奎), 고종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과 병조 정랑(兵曹正郞)을 지낸 배은성(殷星), 좌승지(左承旨) 배인기(仁基) 등과 함께 가문을 대표했다.

3. 역사

달성배씨(達城裵氏)의 시조는 배운룡(裵雲龍)이며, 배운룡(裵雲龍)은 고려 창업의 주역으로 개국공신에 책록된 배현경(裵玄慶)의 6세손 이다. 배운룡裵雲龍, 고려조에 벼슬하여 나라에 공을 세워 달성군에 봉해진 것을 연유로 후손들이 달성을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배현경의 후손으로 고려조에 삼중대광三重大匡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배사혁裵斯革의 셋째 아들이다. 달성은 대구의 옛 지명이다. 대구는 본래 신라의 달구화현인데 지금 이름으로 고쳐 수창군의 속현으로 만들었다. 고려조 현종 때 경산부에 소속시켰고 인종 때 현령을 두었으며 조선조 세종 때에는 군으로 승격되었다. 1949년 대구시로 승격할 때 달성부의 가창·성서·월배 등의 면이 대구시에 병합되었다.

달성(達城)은 현재 대구광역시 일원의 옛 지명으로 별호로 삼한시대에는 달구화(達句火) 또는 달구벌(達句伐)이라 불렸다. 영조 때에 대구(大丘)를 대구(大邱)로 변경하였으며,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대구부 대구군이 되었다가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대구부의 시가지 부분인 대구면이 대구부로 독립하고 옛 대구부의 일부와 현풍군의 일부가 통폐합되어 달성군이 되었다. 1938년 달성군의 일부가 대구부로 편입되었고, 1949년에는 대구시로 개편되었다. 1981년에 대구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88년에 달서구가 신설되었다. 1995년 대구광역시로 개편하면서 달성군을 통합하였다..

달성 배씨(星山 裵氏)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대호군(大護軍)에 추증된 배손적(裵孫迪)으로 집안은 고려시대에 대대로 대구(大邱)지방의 향리(鄕吏)를 역임하였다고 한다. 그의 증손 배정지(裵廷芝)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고, 배정지의 아들 배천경(裵天慶)이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를 거쳐 동경윤(東京尹)을 역임하였으며, 고려 공민왕 때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이를 계기로 후손들이 본관을 달성(대구)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신라 성덕왕 때 상대등을 지낸 휘 배부(裵賦)가 처음으로 역사서에 등장한다. 나말여초기에는 배씨 후손들이 지방 호족으로 그리고 각층의 부류에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웠던 기록들이 사적으로 고증된다. 먼저 성산 적산 수동 유산 본피 일대에서 고려 태조의 삼한 통합을 도와 그 일대를 경상부로 승격하고 삼중대광 벽상공신에 봉해진 배최언(裵崔彦), 배신예(裵申乂)가 있었고, 고려개국 2등 공신 배운태(裵運泰), 고려개국 3등 공신 배웅, 고려통합 2등 공신 배선, 그리고 궁예 휘하의 장수 배총규(裵悤規) 등이다. 그러나 이들을 시조로 하는 배씨 계파는 없다. 누가 실질적으로 달성 배씨의 조상인지 근원을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문양공 배지타 이후 배씨의 세계를 밝힐 문헌이 실전되고 유구한 역사로 인해 서로 다른 파를 이루고 있는 배문이 오늘날처럼 무열공 배현경의 단일후손으로 인식된 발단은 1740년 조선조 영조대왕의 경신수교로 인하여 전 배씨 일동이 경신수교의 수혜를 받고자 대동합보 운동이 태동되어 그동안 각 배씨 계파에서 수보되지 않았던 무열공 배현경을 중시조로 한 경주배씨 대동보인 갑신합보(1764년)가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4. 항렬표

달성배씨 항렬표[1]
行列字 行列字 行列字
30 漢(한),潤(윤),淇(기) 31 ○植(식),○模(모),○權(권) 32 煥(환),炳(병),啓(계)
33 ○斗(두),○奎(규),○星(성) 34 錫(석),鎭(진),鍾(종) 35 ○洙(수),○​泰(태),○淳(순)
36 東(동),相(상),秉(병) 37 ○烈(렬),○黙(묵),○熙(희) 38 世(세),時(시),達(달)
39 ○鉉(현),○鏞(용),○鎬(호) 40 泳(영),濟(제),彦(언) 41 ○秀(수),○祐(우),○綵(채)
42 昌(창),日(일),冕(면) 43 ○箕(기),○表(표),○赫(혁) 44 璋(장),錦(금),琦(기)
45 ○海(해),○浩(호),○鴻(홍) 46 炳(병),桂(계),根(근) 47 ○燁(엽),○燮(섭),○謙(겸)
48 聖(성),在(재),基(기) 49 ○欽(흠),○鐸(탁),○銓(전) 50 源(원),洪(홍),洛(락)

5. 인물

배숙(裵 淑) 고려(高麗)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구(裵 球) 고려 때 문하시승(門下侍丞)을 역임하였다.

배문진(裵問晋) 호(號)는 고헌(高軒). 고려 때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배영(裵 瑩) 고려 때 민부 전서(民部典書)를 지냈다.

배정지(裵廷芝) 1259 (고종 46) ~ 1322 (충숙왕 9)초명(初名)은 공윤(公允), 자(字)는 서한(瑞漢), 호는 금헌(琴軒). 10세에 금위(禁衛)에 들어가 도지(都知)가 되고, 1270년(원종 11) 강화(江華)에서 개경(開京)에 환도(還都)할 때 11세로서 왕을 호종, 대정(隊正)이 되었다.1291년(충렬왕 17) 별장(別將)으로 만호(萬戶) 인 후(印 侯)를 따라 연기(燕岐)에서 합단(哈丹)을 격파, 용맹을 떨쳐 중랑장(中郞將)에 특진되었다. 후에 충청․전라 양도 찰방(忠淸全羅兩都察訪)으로서 지방의 관기를 바로잡고, 충선왕(忠宣王) 때 호군(護軍)이 되어 전농사(典農司) 비창(備倉)의 일을 관장했다.1318년(충숙왕 5) 탐라(耽羅)에서 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이를 토벌, 돌아와 밀직무사(密直副使)가 되었다. 1321년(충숙왕 8) 에 옥사(獄事)가 일어나 죽림(竹林)의 방호(防護)에 유배되고, 후에 풀려나와 금기(琴碁)로 여생을 보냈다. 나주(羅州)의 초동사(草洞祠)에 제향되었다.

배성경(裵成慶) 1312년(충선왕 4) 문과(文科)에 급제, 판통례문하사(判通禮門下事)를 지내고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하자 과천(果川) 전투에 참전하여 아들 광우(光祐)와 함께 순절(殉節)하였다.

배천경(裵天慶) 1321(충숙왕 8) 신유당옥(辛酉黨獄) 때 아버지 정지(廷芝)가 무고(誣告)로 유배(流配)되자 대신 수형(受刑)할 것을 간청(懇請)하는 등 효행(孝行)이 출중하였다. 1354년(공민왕 3) 왕을 호종(扈從)한 공(功)으로 단성강절공신(端誠康節功臣)이 되고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에 올라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1359년(공민왕 8) 경주 유수(慶州留守)가 되었다.

배함경(裵咸慶) 자(字)는 선지(善之).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할 때 형 성경(成慶)과 함께 참전, 많은 공(功)을 세워 정충효절공신(貞忠效節功臣)에 녹훈되고 검교장군(檢校將軍)에 올랐다.

배문우(裵文祐) 자(字)는 용도(龍覩), 호(號)는 회은(晦隱), 시호(諡號)는 충간(忠簡).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에 올랐는데,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이에 불복(不服)하고 아우 을서(乙瑞)와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절개를 지켰다. 능주(綾州)의 대곡사(大谷祠),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균(裵 均) 자(字)는 호익(虎翼), 호(號)는 율헌(栗軒). 1380년(우왕 6) 원사(元師) 배극렴(裵克廉)과 정 지(鄭 地) 휘하에 있다가 함양 사근역 전장(咸陽沙斤驛戰場)에서 왜구를 맞아 많은 공(功)을 세우고 순절하였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을서(裵乙瑞) 자(字)는 봉소(鳳韶), 시호(諡號)는 청정(淸靖). 공민왕(恭愍王)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 등 여러 관직을 거쳐 예부 상서(禮部尙書)에 올랐다. 정몽주(鄭夢周)와 뜻을 같이한 여말(麗末)의 절의충신(節義忠臣)으로 이성계(李成桂)가 조선을 개국하자 둔세(遯世), 태종(太宗)이 세자 사부(世子師傅), 도는 대광 태사(大匡太師)로 임명(任命)하였으나 불취(不就)하였다. 나주(羅州)의 초동원(草洞院), 장성(長城)의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다.

배경덕(裵敬德) 자(字)는 군범(君範), 호(號)는 극재(克齋), 야은(冶隱)길재(吉再)와 교유(交遊)한 학구지사(學究之士)로 누차 관직에 오를 것을 권유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학구(學究)에만 전심(專心)하였다. 세종(世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배을보(裵乙甫) 자(字)는 봉의(鳳儀). 조선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집현전 직제학(集賢殿直提學)에 이르렀다. 문종(文宗)이 죽은 뒤 치사(致仕)하고 은진(恩津)에 은거(隱居)하여 금서(琴書)로 자오(自娛)하니, 세인(世人)이 그의 선견지명(先見之明)에 탄복(嘆服)하였다. 나주(羅州)의 무열사(武烈祠)에 제향(祭享)되었다.

배현우(裵玄祐) 자는 오겸(五兼). 효성(孝誠)과 선행(善行)으로 활인군자(活人君子)의 칭송을 받았다. 세조(世祖) 때 이조 참의(吏曹參議)에 추증되었다.

배인경(裵仁敬) 자(字)는 이직((而直), 호(號)는 만은(晩隱). 조선 때 길재(吉再)의 문하(門下)에서 수업하고, 태종(太宗) 때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에 오르고, 1420년(세종 2) 고주 수령(固州守令)으로 있으면서 선정(善政)으로 소임을 다하고 사퇴하여 금서(琴書)로 소일하였다.이상원(李相原)의 천거(薦擧)로 사부(師傅)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1440년(세종 22) 왕(王)이 고적(古籍)을 취고(取考)할 때 선음(先陰)을 상기(想起)하여 고부군(古阜君)에 봉(封)해졌다. 1455년(세조 1) 단종 손위(端宗遜位)를 통탄(痛嘆)하고 스스로 호(號)를 만은(晩隱)이라 하였다. 고성(固城)의 수림서원(繡林書院)에 제향되었다.

배두유(裵斗有) 자(字)는 덕선(德善), 호(號)는 우재(寓齋). 조선 문종(文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환 찰방(成歡察訪)을 지냈다. 단종 재위(端宗在位) 때 수양대군(首陽大君: 세조)의 위세(威勢)가 날로 성(盛) 함을 보고 불원간(不遠間) 조정(朝廷)에 불안(不安)이 있을 것을 예지(豫知)하고 가족(家族)과 더불어 능주(陵州) 대곡(大谷)에 은거(隱居)하였다.단종 손위(端宗遜位) 후 두문사객(杜門謝客)하고 정사(精舍)에 우재(寓齋)라는 편호(偏號)를 게시(揭示)하고 일생을 보냈다.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배효명(裵孝明) 자(字)는 경부(敬夫), 호(號)는 소요자(逍遙子). 1451년(문종 1) 수의부위(修義副尉)가 되었고, 1453년(단종 1)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戶曹佐郞)을 역임하였다.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사퇴하고 은거(隱居)하였는데 세조(世祖) 때 누차(累次) 징명(徵命)이 있었으나 불취(不就)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예조 참의(禮曹參議)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사원(裵師原) 자(字)는 도심(道心), 호(號)는 희암(希菴). 1466년(세조 12)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대사간(大司諫)에 올랐다.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 때 배맹달(裵孟達)과 함께 출전(出戰)하여 역도(逆徒) 토평(討平)에 큰 공(功)을 세웠다.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상경(裵尙絅) 자(字)는 회보(晦寶), 호(號)는 휴재(休齋). 1474년(성종 5) 문과(文科)에 급제, 여러 관직을 거쳐 정주 목사(定州牧使)에 이르렀는데, 연산군(燕山君) 때에 치사(致仕)하였다.

배익신(裵益臣) 자(字)는 사겸(士謙). 1492년(성종 23) 진사시(進士試)에 합격 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여지승람(輿地勝覽)」수찬(修撰)에 참여하고,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를 거쳐 양산 군수(梁山郡守)를 지냈다.

배서(裵 恕) 자(字)는 인원(仁源), 호(號)는 안심당(安心堂). 조선 때 문장예학(文章禮學)이 숙성(夙成)하여 1546년(명종 1)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어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이 되었으나 송규암(宋圭庵)의 무죄(無罪)를 상소(上疏) 구신(救伸)하다가 파직(罷職)되었다. 귀향(歸鄕)하여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배경인(裵褧仁) 자(字)는 성보(聖甫), 호(號)는 만암(晩菴). 조선 선조(宣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병조 참의(兵曹參議)에 이르렀는데 당쟁(黨爭)으로 국정(國政)이 혼란(混亂)해지므로 고향(故鄕)인 대구(大邱)로 돌아와서 칠곡(漆谷)으로 이거(移居)하여 일생을 마쳤다.

배승무(裵承武) 자(字)는 자환(子桓). 1579년(선조 12)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1586년(선조 19)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를 지냈다.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 김덕령(金德齡)․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 등과 함께 왜구(倭寇)를 맞아 싸우다가 진양(晋陽)에서 순절(殉節)하였다.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경연참찬(經筵參찬)에 추증(追贈)되었다.

배세강(裵世剛) 1700(숙종 26)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통영중군(統營中軍)을 거쳐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를 지냈다.

배성유(裵聖有) 자(字)는 시중(時中). 1756년(영조 32) 식년친임전시(式年親臨殿試)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배상규(裵祥奎) 자(字)는 문오(文五). 1832년(순조 32)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지냈다.

배병수(裵炳壽) 자(字)는 치회(致繪), 호(號)는 남재(南齋). 1884년(고종 21) 선공감역(繕工監役)을 거쳐 시종관(侍從官)을 지냈다. 효성(孝誠) 이 지극하였다.

배은성(裵殷星) 자(字)는 경열(景悅), 호(號)는 운포(雲圃). 1874년(고종 11) 경과정시전시(慶科庭試殿試)에 급제하고, 1876년(고종 13) 중시(重試)에 급제하여 승정원정자(承政院正字)․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고, 병조 정랑(兵曹正郞)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다.

배철순(裵哲淳) 1894년(고종 31) 전시 을과(殿試乙科)로 급제하여 맹산군수(孟山郡守)를 지냈다.

배인기(裵仁基) 자(字)는 처인(處仁), 호(號)는 야은(野隱). 1890년(고종 27) 판서(判書) 송세헌(宋世憲)의 천거(薦擧)로 출사(出仕),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호조 정랑(戶曹正郞)을 거쳐 승정원 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이르렀다.1905년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분(憤)을 참지 못하고 복수토적(復讐討賊)할 것을 항소(抗疏)하였다.

배상옥 동학군을 이끌고 활약하며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 불려 졌던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 장군은 농민의 시위나 혁명을 주도했고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남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전남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고 청계면 청천리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의 정신을 구현했다. 또한 해제면 석용리에 거주하면서 포교활동을 했고 그곳에 연병장을 설치해 혁명군을 훈련시켰다.

배중손 :고려 1270년(원종 11년)에 몽골 침략에 대항하여 자주국방. 자유독립을 외치며 저항한 삼별초 항쟁(三別抄抗爭)을 지도했다.당시 고려는 미증유의 대전란으로 근 40여 년에 걸쳐 전국 국토가 몽골 기마병들에게 짓밟혀 초토화되었고, 수많은 백성들이 희생당하는 엄청난 재난을 당하였다.배중손 장군은 삼별초를 이끌고 고려시대 몽골 침략에 대항하여 강화도에서 조국수호, 자주국방, 민족보호라는 절대 절명에 따라 항몽 항쟁을 벌렸고, 진도로 이전하여 국난극복의 거룩한 항몽 역사를 이룩했다.애국과 충의에 불탄 삼별초 배중손 장군(裵仲孫 將軍)은 분연히 일어나 몽골의 앞잡이로 전락한 왕권에 대항하고자 승화후 온(承化侯 溫)을 임금으로 추대(1270년 6월)하였고, 새로운 전열을 가다듬고 앞날의 발전을 도모하고자 1천여척의 배로 江都(강도)에서 진도(珍島)로 옮겨 용장산성에 터를 잡아 진지를 구축하였다. 이 자주적 신왕조(新王朝)에 전라도와 경상도 백성들이 지지하고 개경의 관노들까지 호응하였다. 같은 해 11월말 탐라(제주)를 정복하니 해상은 물론 전주, 나주등 내륙과 경상도 연안의 남해, 거제, 합포, 동래, 김해 등이 그 세력권에 들었다.개경 고려왕실은 이를 토벌하고자 麗蒙(려몽) 연합군을 편성(고려 김방경金方慶, 몽골 아해阿海‧ 근도伒都)하여 수차례 공격하였으나 배중손 장군(裵仲孫 將軍) 휘하의 삼별초와 진도 백성들의 굳은 방어에 번번이 실패하였다. 이에 위협을 느낀 元 세조는 홍다병(洪茶兵)에게 대병을 이끌고 출병하게 하고, 김방경과 혼도의 연합군과 합세하여 진격하여 왔다.중과부적으로 방어가 곤란하고 온 왕마저 죽음을 당하자 裵仲孫 장군은 최후 결전을 위해 一軍을 탐라로 보내 후일을 기 약하게 하고 자신은 여몽 연합군을 유인하여 굴포리에서 결전하다가 장렬한 전사를 하니 그 휘하의 군사들도 모두 붉은 피를 흘렸다.(1271년 음력 5월 15일)

배정지(裵廷芝, 1259 ~ 1322) : 고려 후기의 무신. 아버지는 민부전서(民部典書) 배영(裵瑩)이다. 고려 충렬왕 때 별장으로 연기에 침입한 거란군을 격파하였으며, 충숙왕 때 일어난 김성(金成)의 탐라 반란사건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 밀직부사가 되었다.

배성경(裵成慶) : 고려 공민왕 때 과천에 침입한 홍건적과 맞서 싸우다 아들 광유(光裕)와 함께 순절하였다.

배정란 : 고려시대에 도원수를 지냈다.

배천경 : 고려시대에 판추밀원사를 거쳐 동경윤을 지냈으며 달성군에 봉해졌다.

배함경 : 고려시대에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검교장군을 지냈다.

배인경 : 조선시대에 우간의대부를 거쳐 고주의 수령이 되었으며 그곳을 잘 다스려 고부군에 봉해졌다.

배익신 : 조선시대에 청송 부사를 지냈다.
《현대인물》

6. 관련 유적지


[1] 달성 배씨의 시조는 배운룡(裵雲龍)이고 시조(始祖) 배현경(裵玄慶)의 손자의 손자 배사혁의 셋째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