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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14대 군주 동부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დავით | 다비트 7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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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다비트 7세 |
조지아어 | დავით | |
라틴어 | David VII | |
이름 | 다비트 울루(დავით ულუ) | |
가족 |
기오르기 4세(아버지) 지그다 카툰(첫째 아내) 알툰(둘째 아내) 그반사 카하베리제(셋째 아내) 에수칸(넷째 아내) 기오르기(장남) 디미트리오스 2세(차남) 타마르(장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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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215년 ~ 1270년 | |
재위 기간 |
1247년 ~1259년(조지아 군주) 1259년 ~ 1270년(동부 조지아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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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14대 군주. 다비트 나린과 함께 조지아를 양분했다.2. 생애
조지아 왕국 11대 군주 기오르기 4세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평민 출신의 여인으로만 알려졌다. 기오르기 4세는 그녀를 무척 사랑해 왕비로 들이려 했지만, 귀족과 교회의 거센 반발에 못이겨 그만뒀고 죽을 때까지 왕비를 들이지 않았다. 그는 이 때문에 사생아로 낙인찍혀 왕위 계승권이 박탈되었고, 기오르기 4세가 사망한 뒤 여동생 루수단이 왕위를 이었다.1242년, 루수단은 그가 왕위를 갈망할 것을 두려워해 사위인 룸 술탄국 술탄 카이쿠스로 2세의 궁정에 그를 보내 억류하게 하고, 자신의 아들 다비트 나린을 바투 칸에게 보내 공식적인 후계자로 인정해달라고 청원했다. 그러나 다비트 나린이 몽골에서 좀처럼 돌아오지 않던 1245년경 루수단이 사망했다. 귀족들은 2년 더 기다려봤지만 여전히 돌아오지 않자, 다비트 나린이 사망했다고 여기고 1247년 그를 조지아로 불러들인 뒤 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살아있었던 다비트 나린은 지지자들을 끌어모아 반기를 들었다. 나린의 지지자들은 전통적인 조지아 왕실법에 따라 왕권은 나린에게 속하며 사생아인 그는 왕이 될 자격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이에 맞서 기오르기 4세는 다비트 7세를 왕으로 세울 의사가 있었다며 선왕의 유지를 받든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논쟁이 좀처럼 끝나지 않자 양측 모두 몽골에 분쟁을 해결해달라고 호소했다. 몽골의 계승법은 적법한 자녀와 사생아를 구별하지 않았다. 귀위크 칸은 이에 의거해 두 사람이 조지아를 동시에 다스리되 나이 많은 사람이 더 높은 권위를 가지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리하여 그와 다비트 7세는 1247년부터 1259년까지 조지아를 함께 통치했다.
1256년, 그는 몽골군이 알라무트 요새를 점령하는 걸 돕고자 조지아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1259년 다비트 나린이 몽골에 반기를 들었다가 진압군이 다가오자 조지아 서부 산악지대로 피신해 그곳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갖추었다. 1260년, 훌라구 칸은 맘루크 왕조를 정벌하기로 마음먹고 그에게 군대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그는 이를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가 아르군의 침략을 받아 조지아 남부 일대가 초토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261년 다비트 나린의 영역으로 망명했고, 이듬해 몽골군과 화해하여 트빌리시로 돌아갔다. 얼마 후 일칸이 킵차크 칸국과 전쟁을 벌일 때 병력을 보내줬다. 조지아군은 킵차크 칸국의 베르케 칸을 쉬르반에서 격파하고 킵차크로 후퇴시켰다.
그는 생전에 4명의 아내를 두었다. 첫번째 아내 지그다 카툰은 룸 술탄국 술탄의 딸 또는 몽골 여인으로 알려졌다. 그녀는 남편이 몽골군에 종군할 때 섭정을 맡기도 했지만 자식을 보지 못했다. 이에 1249년, 그는 알란 여인 알툰을 임시 아내로 삼으면서도 알툰이 낳은 아이를 지그다 카툰의 아들로 삼기로 했다. 알툰은 1250년에 기오르기를 낳았고, 지그다 카툰에게 입양되었다. 이후 딸 타마르가 태어났고, 알툰은 곧 그와 이혼했다. 지그다 카툰은 1252년 사망했고 므츠헤타의 네크로폴리스에 안장되었다.
그는 뒤이어 라차 공작 카하베르 4세 카하베리제의 딸 그반사 카하베리제와 결혼하여 디미트리오스 2세를 낳았다. 그러나 1260년 남편이 몽골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배하고 조지아 서부로 달아났을 때, 그녀는 미처 따라가지 못하고 몽골군에게 붙잡힌 뒤 훌라구 칸의 명령으로 피살당했다. 그는 1263년 시라마칸 노얀의 딸 에수칸을 네번째 아내로 들였다. 1264년 우자르마의 주교이자 재상 바실리오가 에수칸과 간통한 혐의로 기소되자, 그는 바실리오를 교수형에 처했지만 에수칸은 내버려뒀다. 1270년 그가 사망했을 때, 에수칸이 남편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지만 진위 여부는 불명확하다.
그는 2명의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장남 기오르기는 1250년 알툰의 자녀로 출생했으나 1268년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디미트리오스 2세는 1259년 그반사 카하베리제의 자녀로 출생했고, 1270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조지아 동부의 왕으로 등극했다. 타마르는 알툰의 자녀로 출생했고, 1273년경 아르군 칸의 아들과 결혼했다가 나중에 조지아 귀족 만카베르디의 사둔과 재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