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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조지아 왕국 5, 9대 군주 1차 통합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5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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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5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V | |
별명 | 훌륭한 자(ბრწყინვალე) | |
가족 |
디미트리오스 2세(아버지) 네이트라(어머니) 다비트 9세(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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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286년 또는 1289년 ~ 1346년 | |
재위 기간 |
1299년 ~ 1302년(1차 재위) 1314년 ~ 1346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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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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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부 조지아 왕국 5, 9대 군주. 1차 통합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70년간 분열되었던 왕국을 통합하고 중흥을 이끌어낸 명군이다.2. 생애
동부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디미트리오스 2세와 조지아 삼츠헤, 아자라, 샤브셰티, 클라제티, 라지아, 타오, 콜라, 아르타아니, 자바헤티 등지의 통치자 베카 1세 자켈리의 딸 네이트라의 아들이다. 이복 형제로 다비트 8세, 바크탕 3세, 마누일, 아드가르, 바이두가 있었고, 이복 누이로 라사, 루수단, 자켈리가 있었다. 여섯 번째 아들이었으니 왕이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으나, 1299년 일 칸국의 가잔 칸이 자신에게 반기를 든 다비트 8세를 폐위하고 그를 왕으로 옹립했다. 하지만 나이가 어렸기에 베카 1세 자켈리가 섭정을 맡았고, 그의 권위는 수도 트빌리시에서만 통했다.1302년, 일 칸국은 여러 원정을 치르면서 보조병으로 참여하는 조지아군을 이끌 수 있는 성인 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302년 그를 폐위하고 다비트 8세의 동생 바크탕 3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이후 일 칸국의 수도 타브리즈로 보내진 그는 일 칸국의 대신 초반 노인에게 교육받으면서 그와 우호 관계를 맺었다. 1311년 일 칸국과 화해하여 조지아의 왕으로 인정받은 다비트 8세갸 사망하자, 다비트 8세의 어린 아들 기오르기 6세가 왕으로 선임되었다. 다만 올제이투 칸은 그를 어린 왕의 섭정으로 임명하여 실질적인 권력을 누릴 수 있게 해줬다. 이 시기에 룸 술탄국이 일 칸국에 반기를 들자, 올제이투 칸은 초반 노인에게 이들을 정벌하라고 명령했다. 조반 노인은 룸 술탄국을 정벌할 때 기오르기 5세를 데려갔다. 그는 이 전쟁에서 맹활약을 해 몽골군의 신뢰를 얻었다.
1313년 아직 성인이 채 되지 않았던 기오르기 6세가 죽었다. 사망 원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정황상 그가 암살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초반 노인의 적극적인 지지에 힘입어 동부 조지아 왕국의 단독 군주로 등극했다. 그는 왕이 된 후 일 칸국과 가급적 화목하게 지내고자 노력했다. 1316년 울제이투 칸이 죽고 아부 사이드 칸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자신을 칸에 소개하기 위해 타브리즈를 방문하여 칸에게 충성을 맹세해 신임을 얻어냈다. 이후 몽골군과의 합동 작전에 참가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수행해 그들의 신뢰를 받았다. 그 결과 1316년 올제이투 칸 사망 후 일 칸국의 권신이 된 초반 노인으로부터 조공을 직접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얻어냈다.
이후 오랜 세월 조지아 각지를 습격해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던 오세티아인을 공격해 3년간 공방전을 벌인 끝에 그들의 본거지인 고리를 함락시켰다. 이후 지속적인 원정을 벌여 오세티아인들을 시다 카르틀리에서 모조리 몰아내고 코카서스 산맥 북쪽으로 이어지는 모든 산길을 통제했다. 한편, 그는 왕권 강화에 주력했다. 그동안 일 칸국은 조지아가 강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기에 왕에게 불순종하는 귀족과 왕족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 칸국의 권신 초반 노인의 호의를 얻어냈기에 그들에 대한 어떠한 지원도 없었다. 그는 이 기회를 적극 활용해 자신에게 복종하지 않는 귀족들, 특히 카헤티의 권세가들을 모조리 처형했다. 이에 반발한 무리가 반란을 일으켰지만 단시일에 토벌되었고, 이후로는 동부 조지아 어디에도 그에게 맞서려 들지 않았다.
이리하여 기반을 확고히 다진 그는 조지아 통합을 다음 목표로 삼았다. 70여 년전 몽골 제국의 침략에 맞서 이메레티 등 서부 조지아 산악 지대에서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고 일 칸국에 절대로 굴복하지 않았던 다비트 나린의 후예들은 이 시기에 내전과 귀족들의 불순종으로 지리멸렬해졌다. 특히 1329년 왕위에 오른 바그라트 1세는 너무 어려서 이 상황을 수습할 능력이 부족했다. 그는 이 기회를 이용하기로 하고, 1330년 군대를 이끌고 서부 조지아로 진군했다.
지속적인 내전과 무정부 상태에 지친 주민들이 열광적으로 환영했고, 서부 조지아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는 아무런 저항 없이 함락되었다. 다디아니, 구리엘, 압하지야 및 스반 귀족들은 그를 찾아가 큰 선물을 바치고 복종을 표명한 대가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바그라트 1세를 해치는 대신 쇼라피니로 보냈다. 바그라트 1세는 그곳에서 공작 노릇을 하다가 1372년에 자연사했다. 그는 뒤이어 오디샤, 압하지야, 구리아로 순행해 그곳 주민들에게 충성서약을 받아냈다. 1334년 그동안 조지아와 동떨어져 지내던 삼츠헤의 영주이며 자신의 삼촌인 사르기스가 사망하자, 그는 삼츠헤로 행차하여 사르기스의 아들인 쿠바레쿠바르를 그곳의 영주로 임명했다. 이리하여 삼츠헤 역시 조지아에 편입되었다.
한편, 일 칸국의 혼란상은 갈수록 극심해졌다. 1327년, 아부 사이드 칸이 초반 노인과 두 아들을 추종자들과 함께 처형했다. 아부 사이드 칸은 왕권 강화를 꾀했으나 1335년 사망했고, 뒤이어 즉위한 아르파 케운 칸은 1336년 내전에서 패해 사망했다. 이후 일 칸국 각지의 군벌들이 7명의 황금씨족 출신 칸을 옹립하면서, 일 칸국은 사분오열되었다. 그는 드디어 고대하던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몽골에 대한 조공을 중단하고 모든 몽골군을 조지아에서 추방했다. 일 칸국의 잔여 세력은 동부 조지아의 지배를 회복하기 위해 원정을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모조리 격퇴되었다.
이렇듯 조지아를 통합하고 주권을 회복한 뒤, 그는 경제 부흥에 힘을 기울였다. 그의 치세 때 조지아 도시들에서 무역 및 공예품 생산이 크게 발전했다. 중동과 북캅카스와의 교역 뿐만 아니라 유럽, 특히 북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무역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는 그동안 쓰이던 몽골 화폐를 계속 통용하되 조지아산 은화를 새로 주조해 국내 시장에 유통하게 했다. 중세 조지아 문헌은 이 은화를 가리켜 "기오르고울리 테트리(Georgauli Tetri)"라고 칭했으며, 1380년대에 출간된 법률집에선 "위대하고 훌륭한 기오르기 왕 시대의 은화"를 보상금으로 쓰도록 규정했다. 또한 관개 사업에 힘을 기울여서 침체되어 있던 농업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포도 등 각종 과일 제배 산업을 지원했다.
또한 외교 관계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맘루크 왕조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고, 예루살렘의 십자가 수도원이 무슬림에게 회교 사원으로 바뀐 사실을 전해듣고 맘루크 술탄에게 탄원해 그곳을 다시 기독교 교회로 바꾸고 조지아가 관리하게 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조지아 순례자들은 깃발을 펼친 채 "거룩한 도시"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한편 동로마 제국과 교황청과도 활발한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트라페준타 제국 내 친 조지아 정파를 지원해 제국이 조지아에 이로운 방향으로 정책을 펼치도록 유도했다. 또한 1332/1333년에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보낸 사절을 영접한 뒤 자신이 3만 명의 군인을 이끌고 십자군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18세기 조지아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그리스 황제 미하일 콤니노스"의 딸과 결혼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집권했을 당시 동로마 제국을 통치하는 왕조는 콤니노스 왕조가 아니라 팔레올로고스 왕조였다. 다만 콤니노스 왕족들이 트라페준타 제국을 통치한 걸 고려했을 때, 이 나라의 공주가 그와 결혼했을 가능성이 있다. 연대기는 그의 아들로 다비트 9세만 기술했으며, 다른 자식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1346년 사망한 후 다비트 9세가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