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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 왕국 2대 군주 გიორგი | 기오르기 1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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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기오르기 1세 |
조지아어 | გიორგი | |
라틴어 | George I | |
가족 |
바그라트 3세(아버지) 마르타(어머니) 바실(동생) 바스푸라칸의 마리암(첫째 아내) 알라니아의 알다(둘째 아내) 바그라트 4세(장남) 구란두크트(장녀) 마르타(차녀) 카타(삼녀) 디미트리오스(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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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998년 또는 1002년 ~ 1027년 8월 16일 | |
재위 기간 | 1014년 5월 7일 ~ 1027년 8월 1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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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13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 전념했으나 끝내 패배했고, 카케티아 공국이 떨어져나가는 걸 막지 못했다.2. 생애
996년 또는 1002년 바그라트 3세와 마르타 사이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동생으로 훗날 조지아 정교회에서 시성된 바실이 있었다. 1014년 5월 7일 아버지가 타오의 파나스케르티 성에서 사망한 뒤, 왕국의 수도 쿠타이시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당시 13살 또는 18살밖에 안 됐고 어머니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가 귀족들의 섭정을 받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매사에 적극적인 성격이었던 그는 섭정을 거부하고 스스로 통치하겠다고 밝혔다.하지만 그는 노회한 정치술을 발휘해 여러 귀족을 통제할 수 있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귀족들을 통제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과거 바그라트 3세에게 정복당한 뒤 독립할 때를 노리던 조지아 동부의 카케티아 귀족들은 어린 왕이 통치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 틈을 타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왕이 임명한 총독들을 인질로 잡고 카케티아 공국을 부활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귀족들의 요청에 응했다. 이리하여 카케티아 공국이 조지아에서 떨어져 나가면서 통치 첫해에 조지아 영토의 3분의 1 이상이 떨어져 나갔다. 그는 아버지가 사용한 호칭 중 란족과 카흐족의 이름을 삭제하고 "압하지야인과 카트벨인의 왕"만 써야 했다.
1020년, 아르메니아 왕 가기크 1세가 사망했다. 장남 숨바트 3세가 왕위에 올랐지만, 차남 아쇼트가 이에 불복해 반란을 일으켰다. 아쇼트는 1021년 아르메니아 북동쪽에 왕국을 독자적으로 세웠다. 이에 그가 중재를 맡아 아니 지역을 숨바트 3세가 가지고 아쇼트는 조지아와 아바시드 칼리파테 지역 사이의 땅을 받는 조건으로 양측을 화해시켰다. 그러나 양측은 곧 사소한 일로 재차 갈등을 벌였다. 어느 날, 숨바트 3세가 아니로 가는 길에 쉬기 위해 남동생의 영역에 속한 샤티크에서 쉬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쇼트는 형이 조약을 위반했다며 분노했다. 아쇼트로부터 형을 치는 데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그는 이때를 틈타 아니로 쳐들어가서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아르메니아 귀족들은 숨바트 3세를 그에게 넘겨줬고, 그는 여러 요새와 아니의 주권을 가지는 대가로 숨바트 3세를 석방했다. 이리하여 아르메니아를 조지아에 사실상 예속시킨 그의 다음 목표는 동로마 제국이었다.
990년, 황제 바실리오스 2세는 반역자 바르다스 포카스를 도왔던 타오 공작 다비트 3세를 굴복시키고 그로부터 "제가 죽으면 모든 영지를 제국에 바치겠습니다."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다비트 3세가 죽은 뒤 후계자 바그라트 3세가 다비트 3세의 모든 영지를 상속받으려 했지만, 황제의 압력을 받고 동로마 제국과 가까운 조지아 영토를 제국에 헌납해야 했다. 그는 이 땅을 되찾기로 마음먹고, 1015/1016년 동로마 제국 국경을 넘어 여러 곳을 약탈했다. 중세 조지아 역사학자 아리스타케스 라스티베르치(Aristakes Lastivertsi)에 따르면, 바실리오스 2세는 그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짐이 네 아버지에게 줬던 유산 일부를 포기하고 지금 가지고 있는 영토를 다스려라.
이에 그는 다음과 같은 답신을 보냈다고 한다.
아버지가 소유했던 영토를 단 하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 불가리아 제1제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바실리오스 2세는 현지 지휘관들에게 조지아의 거듭된 도발에 응하지 않고 방어에 전념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이 때를 틈타 동로마 제국을 지속적으로 침략했고 파티마 왕조와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1018년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하고 불가리아 전역이 동로마 제국의 속주가 되었다. 이제 바실리오스 2세는 병력을 끌어모아 조지아 정벌에 착수했다. 여기에 파티마 칼리프 알 하킴 바르 암르 알라가 사망했고 뒤이어 칼리프에 오른 알리 아즈자히르는 아직 어려서 조지아를 적극적으로 도울 여력이 없었다. 조지아는 이제 파티마 왕조의 도움 없이 제국에 항전해야 했다.
양군은 타오의 바시아니 평원에서 처음 맞붙었다. 그는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올티시 마을에 후퇴했다가 곧 불태운 뒤 계속 이동하다가 시림니 마을 인근에서 후위대가 적 선봉대의 공격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방향을 돌렸다. 1021년 9월 11일 양군이 재차 맞붙었다. 동로마 제국군은 이 전투에서 상당히 고전했지만 결국 승리를 거뒀고, 조지아의 여러 장군이 전사했다. 조지아군은 삼츠헤로 퇴각했지만, 동로마군은 그들을 추격하여 자바케티 일대를 황폐화하고 아르타니 시를 파괴했다. 적군이 삼츠헤로 접근하자, 그는 트리아트 지역으로 후퇴한 뒤 각지에서 병력을 끌어모아 험준한 산악 지대에 병력을 배치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적을 조기 섬멸하는 건 어렵다고 판단하고 아르타니로 후퇴해 겨울 숙영에 들어갔다. 그는 적이 쉬고 있는 사이에 동로마군의 만행에 복수하고자 조지아 주변 지역을 여러 차례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트라페준타 근교로 군대를 옮긴 뒤 조지아의 봉신 노릇을 하고 있던 숨바트 3세를 제국에 귀순시키는 등 조지아를 고립시키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러던 1022년 아나톨리아의 스트라테고스 니키포로스 시피아스는 황제가 조지아 왕국과 전쟁을 벌이느라 수도가 비어있는 틈을 타 바르다스 포카스의 아들 니키포로스 포카스 바리트라첼로스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마음먹고 조지아 왕국과 내통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이 일을 눈치채고 두 반란 지도자에게 별도로 편지를 보내 양자가 서로를 불신하도록 조장했다. 이 작전은 보기좋게 들어맞았다. 1022년 8월 15일, 시피아스는 니키포로스 포카스를 암살했고, 니키포로스 포카스의 지지자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된 토벌대가 접근해오자, 시피아스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와서 자신 앞으로 끌려온 시피아스를 삭발시킨 뒤 안티고네 성으로 추방했으며, 공모자 대부분을 투옥하고 재산을 몰수했다. 여기에 모반에 가담하여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가 발각된 2명의 왕실 인사 역시 처형했다.
황제는 모반의 배후에 그가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재차 조지아 원정에 착수했다. 1022년과 1023년 사이의 겨울, 양군은 바시아니 평원에서 재차 맞붙었다. 동로마 제국 소속 그리스군은 조지아군에게 격퇴되었지만, 키예프 루스에서 온 용병대가 조지아군을 몰아붙여 막심한 피해를 입혔고, 이로 인해 조지아의 여러 영주와 장군들이 전사했다. 이후 양자는 평화 협상을 벌인 끝에 조약을 체결했다. 그는 장남 바그라트 4세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보내 3년간 인질 생활을 하게 했다. 또한 조지아는 14개의 요새를 내줘야 했고 다비트 3세가 가지고 있었으나 제국에 귀속된 영역에 대한 모든 소유권을 포기해야 했다.
1025년 12월 15일, 바실리오스 2세가 사망했다. 뒤이어 황위에 오른 콘스탄티노스 8세는 바그라트 4세를 계속 붙잡아두려 했지만, 왕자는 이미 조지아로 돌아갔다. 새 황제는 조지아에 사절을 보내 "약속된 3년이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어째서 왕자가 조지아로 돌아갔는가?"라고 따지고 왕자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다시 데려가게 했다. 하지만 그는 거부했고, 왕국 각지의 장정을 소집해 제국과의 일전을 준비했다. 그러던 1027년 8월 16일, 그는 트리알레티 지역의 음킨바르니 마을에 들렀다가 돌연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베디아 대성당에 안장되었고, 바그라트 4세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아르메니아 문제를 처리할 때 조지아와 동맹을 맺은 바스푸라칸의 세네케림-호반네스 왕의 막내딸 마리암과 결혼하여 아들 바그라트 4세와 세 딸 구란두크트, 카타, 마르타를 낳았다. 이중 마르타는 일찍 죽었고, 고란두크트는 아르메니아 왕자 숨바트와 결혼했으며, 카타는 카르스의 압바스 1세와 결혼했다. 뒤이어 알란 족의 왕의 딸인 알다와 결혼해 아들 디미트리오스를 낳았다. 디미트리오스는 1039~1042년에 조지아 왕을 자칭하며 바그라트 4세와 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