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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통합 조지아 왕국 6대 군주 ბაგრატ | 바그라트 6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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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바그라트 6세 |
조지아어 | ბაგრატ | |
라틴어 | Bagrat VI | |
가족 |
콘스탄틴 1세(조부) 기오르기(아버지) 굴라샤르(어머니) 엘레니(아내) 바크탕(장남) 알렉산드레 2세(차남) 다비트(삼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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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439년 ~ 1478년 | |
재위 기간 | 1465년 ~ 147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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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6대 군주. 기오르기 8세와의 2년 내전에서 승리하고 조지아 국왕에 즉위했으나 조지아의 분열을 수습하는 데 실패했다.2. 생애
1439년 2차 통합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콘스탄틴 1세의 차남 기오르기와 굴라샤르 사이에서 출생했다. 1455년 기오르기 6세로부터 이메레티의 통치자로 임명되었다. 1462년 삼츠헤의 쿠바르쿠바레 3세와 함께 기오르기 6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밀약을 맺었다. 그는 삼츠헤 외에도 밍그렐리아의 리파리트 1세, 구리아의 마미아, 압하지야 및 스바네티아의 영주들에게 "자신을 도와주면 중앙 정부에 과세를 낼 의무를 면제해주겠다"라고 약속했다.1463년 기오르기 8세가 이끄는 정부군을 상대로 치코리에서 완승을 거둔 뒤, 조지아 서부에서 가장 큰 도시인 쿠타이시를 점령하고 밍그렐리아, 구리아, 압하지야, 삼츠헤, 스바네티의 대귀족들 앞에서 자신을 이메레티의 왕으로 선포했다. 기오르기 8세가 복수를 다짐하고 병력을 규합해 삼츠헤를 공략하자, 그는 쿠바르쿠발레 3세와 함께 삼츠헤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마침 기오르기 8세는 조지아 동부로 쳐들어온 카라 코윤루의 우준 하산과 맞서다 패배해서 이를 막을 수 없었다.
1465년, 기오르기 8세가 삼츠헤를 다시 침공했다가 파라바니 호수에서 삼츠헤군에게 생포당했다. 기오르기 8세가 아할치헤로 끌려가 옥고를 치르는 사이, 그는 군대를 이끌고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에 입성한 뒤 조지아의 왕으로 즉위하고 기오르기 8세를 공식적으로 폐위했다. 카헤티의 통치자 다비트가 이에 맞서 반기를 들었지만, 조지아 대부분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쿠바르쿠바레 3세는 그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신에게 좋을 것 없다고 판단하고, 기오르기 8세를 자신의 딸인 타마르 자켈리와 결혼하는 조건으로 풀어주기로 했다.
이후 기오르기 8세는 카헤티로 가서 그곳의 왕으로 등극했고, 콘스탄틴 2세는 카르틀리에서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그에 맞섰다. 그는 고심 끝에 1467년 기오르기 8세와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기오르기 8세를 카헤티의 왕으로 인정하고 카헤티의 완고한 귀족들을 토벌하는 데 협조하기로 했고, 기오르기 8세는 콘스탄틴 2세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그를 돕기로 했다. 하지만 콘스탄틴 2세를 쉽사리 토벌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평화 협약을 맺어는 방식으로 귀순시켰다. 그러는 사이, 카라 코윤루가 조지아를 잇따라 침략하여 파괴와 약탈을 자행했다. 급기야 1477년 카라 코윤루군이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를 함락시키기에 이르렀지만, 그는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16,000 뒤카트의 공물을 지불하고 봉신을 자처하는 조건으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는 생전에 조지아 귀족의 여식 엘레니와 결혼하여 바크탕, 알렉산드레 2세, 다비트를 낳았다. 바크탕은 어린 나이에 사망했기에, 1478년에 그가 사망한 후 차남 알렉산드레 2세가 뒤이어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