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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부 조지아 왕국 4, 7대 군주 დავით | 다비트 8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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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 한국어 | 다비트 8세 |
조지아어 | დავით | |
라틴어 | David VIII | |
가족 |
디미트리오스 2세(아버지) 마누일 1세의 딸(어머니) 바크탕 3세(동생) 마누일(동생) 라사(누이) 이드가르(이복 동생) 바이두(이복 동생) 자켈라(이복 누이) 기오르기 5세(이복 동생) 올드자트(첫번째 아내) 하마다 수라멜리의 딸(두번째 아내) 기오르기 6세(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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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 년도 | 1273년 ~ 1311년 | |
재위 기간 |
1292년 ~ 1299년(1차 재위) 1308년 ~ 1311년(2차 재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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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부 조지아 왕국 4, 7대 군주. 일 칸국의 가잔 칸에게 폐위되었지만 끝까지 저항한 끝에 왕위를 탈환했다.2. 생애
동부 조지아 왕국 2대 군주 디미트리오스 2세와 마누일의 딸의 장남이다. 동생으로 바크탕 3세, 마누일이 있었고, 누이로 라사가 있었다. 또한 이복 동생으로 이드갈, 바이두, 기오르기 5세가 있었고, 이복누이로 자켈라가 있었다. 본래 아버지에 이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가장 높았으나, 1289년 아버지가 일 칸국의 아르군 칸에게 소환되어 처형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 아르군 칸은 그 대신 서부 조지아 왕국 초대 군주 다비트 6세의 차남 바크탕 2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1291년 타르자이치 오르벨리아니 공작에 의해 조지아 왕으로 추대되었지만 일 칸국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인정을 받고자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을 방문하기도 했고, 일 칸국의 원정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 덕분에 1292년 바크탕 2세가 사망했을 때 일 칸국으로부터 조지아 왕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칸의 신임을 얻고자 수도 티플리스보다 일 칸국의 수도인 타브리즈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러던 1297년, 바이두 칸과 가잔 칸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다. 그는 바이두 칸을 지지했지만 가잔 칸이 바이두 칸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가잔 칸이 트빌리시에 머물고 있던 그에게 소환령을 내렸지만, 그는 아버지가 소환에 응했다가 어찌 되었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가잔 칸은 진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동부 조지아 각지를 초토화시켰고,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오셰테스는 시다 카르틀리 지방을 공격하여 랴흐비 강 계곡 일대를 정복했다. 그는 미틸레티 산맥에 숨은 뒤 자신을 추격하는 몽골군을 상대로 치카레에서 유격전을 전개한 끝에 승리를 거두었다.
1299년, 가잔 칸은 그를 조지아 왕으로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그의 동생 기오르기 5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일 칸은 여러 원정을 치르면서 조지아군을 이끌 수 있는 성인 왕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1302년에 다비트 8세의 동생 바크탕 3세를 새 왕으로 세웠다. 하지만 그는 북부 산악지대에 자리를 잡고 계속 항전했다. 1299년과 1301년, 쿠틀루샤가 이끄는 몽골군이 그를 토벌하려 했으나, 그는 산악 부족의 지원에 힘입어 이들을 격퇴했다. 이에 일 칸국은 협상을 제의하며 가잔 칸의 진영을 방문하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같은 꼴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었기에 단호히 거부했다.
1304년 티플리스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지만 곧 몽골군의 지원을 받은 바크탕 3세에게 격퇴되어 산악 지대로 후퇴했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동부 조지아 대부분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확보했다. 일 칸국은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건 무의미하다고 판단하고, 1308년 바크탕 3세가 죽자 그를 조지아 왕으로 인정했다. 그 대신 자신의 아들 기오르기 6세를 몽골로 보내는 데 동의했다. 한편, 그는 일 칸국의 경쟁 국가인 맘루크 왕조와 우호 관계를 맺었으며, 1305년 동로마 제국의 중재에 힘입어 예루살렘 십자가 수도원을 조지아 정교회로 복귀시켰다.
그는 생전에 두번 결혼했다. 첫번째 아내는 일 칸국의 아바카 칸의 딸이자 바크탕 2세의 미망인인 올드자트였고, 두번째 아내는 조지아 귀족 하마다 수라멜리의 딸이었다. 이 두 결혼에서 아들 기오르기 6세를 얻었다. 1311년 사망한 후 기오르기 6세가 새 군주로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