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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12:40

김성한/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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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3.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감독
3.1.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3.2.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3.3. 감독 성적3.4. 타이거즈 유일한 곰사냥꾼 감독
4. 이후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6.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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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성한의 지도자 경력을 서술한 문서.

2. 해태 타이거즈 코치 시절

1995년 시즌 막판 성대한 은퇴식을 끝으로 공식적으로 은퇴한 김성한은 이듬해인 1996년부터 해태 타이거즈의 2군 타격코치로 계약했으나 실제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1년간 지도자 연수를 받았다.[1] 실질적인 코치 경력은 연수 후 귀국한 뒤 1997년부터 해태의 1군 타격코치를 맡은 것부터 시작했다. 타격코치 시절에도 평가가 꽤나 좋았는데 장성호, 홍세완, 이호준, 정성훈 등 젊은 선수들을 키워내는 데 일조했다. 이 당시에도 군기반장하던 기질이 여전해서 이호준 장성호가 제일 무서워하는 코치였다고 한다.[2] 이호준의 더그아웃 인터뷰에서보면 지금도 상당히 그 카리스마가 남아있는 듯. 1997년 한국시리즈 영상을 보면 이종범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 있고 장성호의 귀를 잡아당기는 사진이 있는 걸로 보아, 1루 코치도 겸했음을 알 수 있다. 1루 코치 사진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기를 새로 입단한 김종국이 수비와 주루는 뛰어나나 타율이 2할 1푼대에 머무르자 다른 선수들에게는 전수하지 않았던 본인의 오리궁뎅이 타법을 김종국에게만 전수시켰고 2할 7푼까지 끌어올렸다고 한다. 타법을 가르쳐주면 꼭 성공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한편 타격코치 시절에도 심판의 판정에 격렬하게 항의하다가 퇴장을 당한 바 있는데, 당시 김성한에게 퇴장을 명령한 심판은 다름아닌 한때 팀 후배였던 문승훈이었다. 관련기사

3. 해태 타이거즈 ~ KIA 타이거즈 감독

3.1. 해태 타이거즈 감독 시절

2000년 말 김응용 감독이 삼성 라이온즈로 떠나자[3] 2001년 해태의 마지막 감독을 맡게 된다. 당시 해태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던 비밀번호 5-7-6을 찍던, 다 무너져가던 팀이었다. 장성호와 함께 그나마 팀을 받들어주던 홍현우마저 FA가 되어 LG 트윈스로 이적하면서 말 그대로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 현우도 없던 시기[4][5]

하지만 김성한은 남아있는 선수들로 기적같은 투혼을 발휘한다. 사실 5월까지 현대기아자동차그룹은 창단의사를 뚜렷히 밝히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 시기 해태 타이거즈는 5월 하순까지 22승 1무 19패로 4위를 마크하며 IMF 여파를 무시하듯이 타격의 힘으로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이며 현대자동차그룹의 구단 인수 결정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6월까지 3위 두산 베어스와 더불어 승승장구하며 3, 4위의 터줏대감 노릇을 하던 해태 타이거즈는 6월말부터 에이스 최상덕에게 크게 의존하던 투수진의 힘이 떨어지면서 7월에는 간신히 4강싸움을 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속에서 김성한 감독은 홍세완, 김종국[6], 김경언 등을 새로이 발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타선 쪽에서는 이렇게 좋은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앞서 언급했던 것 처럼 투수 쪽에서는 이렇다할 선수의 발굴도 없고, 한 두명의 투수에게 의존하는 다소 아쉬운 운용을 보이면서 초보감독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7]

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경기는 7월 29일이었고, 팀의 마지막 감독으로서 이름을 올리게 된다.[8][9][10] 이 경기 이후 KIA 타이거즈로 팀명이 바뀌면서 초대 감독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한편 루이스 안두하를 잘 던지는데도 뜬금없이 강판시켜 그가 짐싸들고 가게 된 원인을 제공하였다. 안두하의 성적을 생각하면 해태 입장에서는 아쉬울 따름.

3.2. KIA 타이거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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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인 김응용 감독과 함께.

자금난을 겪어오던 소속팀 해태 타이거즈 현대-기아자동차그룹으로 인수되고 자연스럽게 KIA의 첫 번째 감독으로 유임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KIA 감독 재임 시절 페넌트레이스에서는 해태 타이거즈 시절에도 달성하지 못했던 2년 연속 승률 6할[11]을 달성했다.

KIA 감독 시절 김성한 감독의 야구 스타일은 일명 '감의 야구'라고 불리며 데이터에 따른 기계적인 선수 운용 대신 선수의 컨디션 및 상황에 따라 감독의 직감으로 교체카드를 쓰는 스타일.[12] 그리고 대체로 강공 위주로 공격을 지시하고, 투수를 가능한한 최대한 믿고 오래 끄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 잘 나가던 감독들인 짜내기 야구 및 지키는 야구의 대가 김재박, 벌떼계투진으로 대표되는 상대 맞춤형 전술의 김성근 감독, 데이터야구의 전도사 조범현 감독의 스타일과는 극단적으로 반대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고, 그 놈의 강공 위주 공격 때문에 일명 '짜내는 야구'를 잘 시도하지 않다보니[13] 이길 때는 화끈한 타격의 힘으로 크게 이겨주나, 질 때는 강공 실패가 반복되며 결국 수많은 잔루를 남기며 스스로 자멸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단기전에 약했다.[14]

또한, '감의 야구'의 영향으로 당시 기아 타이거즈는 구단 내에서 '정보분석팀'의 영향력이 많이 약했고 이 당시 기아는 정보분석을 통한 확률놀이보다 감독이 관찰한 컨디션이나 감을 중시하다보니 부족한 인원으로 기껏 정보를 구해와도 그 정보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한 편이었다. 실제로도 2003년 플레이오프에서 조범현 감독 시절의 SK 와이번스에게 현미경 야구를 당하며 스윕으로 털리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정보분석팀의 차이'가 지적되기도 했다.[15] 결국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2002, 200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 3위로 마감하고, 2004년에는 전년도 시즌성적 2위 팀을 4위 이하로 떨어뜨린 성적부진으로 비판을 받아 시즌 도중 경질됐다.

겉으로는 성적이 무난하게 좋아 보였으나, 김성한은 단점이 상당히 뚜렷하게 드러났던 감독이었다. 앞서 언급했던 부분 말고도 투수 운용측면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무지막지한 이닝과 경기 수를 기록하게 한 오봉옥[16], 이강철[17], 신용운[18], 유동훈[19]은 말할 것도 없고. 선발진 역시 잘 던진다 싶으면 완투를 곧잘 시키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다니엘 리오스, 존슨, 마뇽과 같은 선발체질인 용병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뒷문이 불안하다는 이유로 시즌 초 마무리로 쓰다가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이고서야 시즌 중간부터 선발로 돌려서 활용했다. 낙후된 재활시설과 관리시스템으로 유명했던 당시 기아의 환경을 생각하지 않고 부상에서 조금만 나아지는 모습만 보여도 마구잡이로 올려서 쓰다가 다시 탈이 나는 박충식과 같은 케이스 역시 존재했다. 또한 2002년 플레이오프에서 시즌 내내 풀타임 선발로 활약한 신인 김진우를 별다른 검증 없이 마무리로 돌리다 결국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는 등 선수활용에서 부족한 점을 많이 보였다.

위의 것을 다 제쳐두더라도 김성한이 현재 감독으로서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려운 이유는 그가 감독 시절 보여준 구시대적 행보 때문이다. 해태 시절 군기반장으로 유명했던 김성한은 일명 김성한 구타 사건으로 대표되는[20] 80-90년대의 한국프로야구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강압적 스타일의 감독[21]이었으며[22], 이것도 모자라 해임되기 바로 직전인 2004년 초에는 타이거즈 특유의 정신력과 결집력을 다잡겠다는 미명 하에 전라북도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부터 광주광역시 무등 야구장까지 선수들을 국토 대장정을 시킨다든지 하는 기행까지 벌였다.[23][24] 2002년과 2003년 승률 6할을 찍을 당시엔 성적이 나오니 이거에 대해 별말이 없었지만, 성적이 조금씩 떨어지던 2004년에는 바로 이것이 발목을 잡아 정재공 단장과 좋지 못한 관계와 함께 김성한 감독의 명줄을 앞당기는 사유가 됐다. 김성한 감독이 재임하던 시절 기아자동차라는 거대기업의 인수덕에 이전에는 생각치도 못할 많은 금액을 투자하여[25] 박재홍, 진필중, 마해영, 심재학 등 A급 선수들을 쓸어왔고[26] 여기에 투수진 강화를 위해 최향남, 조규제 등의 베테랑들도 영입했으나[27], 2년 이상 활약하거나 제대로 정착한 외부출신 선수가 진필중의 보상선수였던 손지환 뿐이었다는 점[28]과 비싼 돈을 들여서 유망주들을 쓸어모았으나[29] 정작 우승을 못 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바뀐 환경에서 팀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고 구시대적 악습을 유지했던 것이 우승하지 못한 원인 중 하나임을 부정할 수 없다.

3.3.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1 KIA 타이거즈 133 60 68 5 5위 -
2002 133 78 51 4 2위 3위[30]
2003 133 78 50 5 2위 3위[31]
2004 88 41 43 4 5위[32] -
통산 487 257 212 18

3.4. 타이거즈 유일한 곰사냥꾼 감독

그가 재임하던 3년동안(중도사퇴 한 해 제외) 두산 베어스를 상대로 34승4무18패를 거두며 타이거즈 감독 중 유일하게 베어스를 상대로 압도적인 전적을 기록하였다.

4. 이후

감독 경질 이후, 2004년 9월에 모교인 군산상고 감독로 부임하였고, 군산 신풍초등학교 야구부 창단에 기여 하는 등 지역 사회 활동을 하였다. 2005년엔 대통령배에서 팀을 4강으로 이끌었고, 이 당시에 선수 시절 때처럼 '카리스마'가 넘쳤다고 하며 군산상고 주변에 살던 사람들 증언으론 제자들 엉덩이에 불을 무지하게 냈다는 후문도 있다. 이 시기의 제자로 차우찬, 원종현, 황선일, 이준호가 있다.[33] 차우찬을 팀 후배인 선동열이 감독으로 있던 삼성에 지명시키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그 후 2006년 KBO 기술위원으로 재직하였고, 미국 연수를 떠난다.

2009년에는 WBC 대표팀 수석코치로 참가했다. 이후론 천하무적 야구단에 자주 모습을 보이다가, 결국 기술 고문이라는 이름으로 고정 확정, 매 경기 해설을 맡기도 했다. 해설 이외에도 연습경기에 참여하는데, 연습경기에 참여하면 매번 삼진아웃을 당한다고 한다.

여담으로 기아의 감독에서 성적부진 명목으로 불명예 퇴진했으나 직전해까진 나름대로 팀 성적이 좋았던 터라[34] 이후 유남호, 서정환 감독 때 팬들 사이에서 수없이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와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고, 그동안 해태-기아를 맡아왔던 감독들보다 상대적으로 온건한 조범현 감독이 2008년 팀을 맡고 역시 하위권을 기록하자 팬들의 반감은 극에 달했고 역시 김성한 감독을 다시 데려오라는 요청이 쇄도했다. 조범현 감독이 2009년 팀을 우승으로 이끈 후에야 이는 어느정도 잠잠해졌다.[35] 본인 역시 인터뷰 등에서 감독 복귀를 꿈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긴 하지만 위에서 나오는 폭행 사건의 여파로 그의 복귀는 사실상 어려운 편이다.

김응용 감독이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선임되자 그의 거취도 관심이 쏠렸는데, 결국 2012년 10월 15일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로 복귀하게 되었다.

5.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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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시작하는 단계이긴 하지만, 적어도 취임 직후 시점에서 한화 팬들의 반응은 그런대로 호의적이었다. 이미 해태의 상징 김응용 감독이 부임한 마당에 해태 출신이라고 거부반응을 보일 이유도 없으며, 김성한이라는 인물 자체도 순수하게 능력만 따진다면 유능한 인물이기 때문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일지도.[36] 다혈질의 성격이 불안요소라면 불안요소이긴 한데...5년동안 야구를 보면서 혈압이 오를대로 오른 한화팬들은 "최소한 실책이나 병살, 주루사 나왔을때 쪼개는 꼴은 안 보겠네" 하면서 은근히 좋게 보는 분위기.

공백기가 좀 길었지만 능력 자체는 검증된 인물이기 때문에 김응용 감독과 함께 많은 기대를 받았다.

2013년 시즌이 시작된 이후, 투수진의 붕괴로 팀이 총체적 난국에 빠지며 김응용 감독과 함께 비난을 받기 시작했다. 그나마 타격 코칭은 괜찮다는 말도 나오긴 했지만, 일단 김성한이 타격코치는 또 아닌지라 여기에도 의구심을 보이는 이들도 많다. 특히, 송창식 문제로 대표되는 한화 불펜진의 고질적인 소진 문제에도 불구하고 김응용 감독에게 이렇다할 진언이나 이의를 제기하는 모습 하나 없이 손 놓고 있는 느낌도 강하다.

2014년, 5월 14일, 4연패(KIA전 3연패+삼성에게 패배) 끝에 "감독님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며 사임했다. 자진사퇴의 형식이지만, 김응용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김응용 감독과의 트러블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만한 점으로는, 김성한이 수석코치를 맡기 불과 4개월 전에 MBC 정보석의 쥬얼리하우스 이종범 편의 초대손님으로 등장했을 때, 이종범 보고 절대 코치는 하지 말라고[37] 만류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인데, 김응용의 한화 감독행에 맞물려 강제 소집(?)되자 어쩔 수 없이 이종범과 함께 한화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는 거다. 나이나 경력 등을 고려할 때 김성한은 결코 코치 정도로 그칠 인물이 아니고[38] 감독 후보군이었는데 김응용 감독에 대한 의리로 억지로 한화 수석코치를 맡았었는데[39] 결국 김성한의 인내심과 김응용에 대한 서운함이 폭발하여 이 지경까지 이른 것으로 보인다.[40][41][42]

6. 이후

한화 수석코치 사퇴 이후 해태 시절 후배인 선동열 KIA 감독이 사퇴하자 2015시즌 KIA 감독 유력후보로 꼽혀 KIA 타이거즈를 떠난지 11년만에 다시 컴백하는듯 했으나 김기태 전 LG 감독이 선임되며 복귀에 실패했다.

[1] 이 당시 선동열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는 과정에서 해태 출신 선수 3명을 주니치에서 지도자 연수를 받을 수 있게 해주는 조건이 있었는데, 가장 먼저 김성한이 연수 대상으로 선정되어 1년간 연수를 받았다. 이후 김태완, 이건열도 주니치에서 연수를 받았다. [2] 이 당시 이호준과 장성호를 일찍 불러낸 뒤 각각 짬뽕 한 그릇씩 사주고 훈련시켰다는 에피소드가 유명하다. [3] 이 무렵 유남호, 김종모, 조충열 등의 코치들이 김응용 감독을 따라 삼성으로 이적했다, 그리고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서정환, 최해식, 김봉근, 이건열, 백인호가 새 코치로 오게된다. 투수코치인 이상윤은 수석코치로 영전했고 선배였던 김봉연, 차영화 코치는 팀을 떠나 각각 극동대 강사와 충장중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다. 문희수, 장채근 코치는 유임되었다. [4] 홍현우는 90년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고졸 신인으로 입단해 입단 2년차부터 노쇠화 기미를 보인 한대화를 밀어내고 주전 3루수를 차지했고 1996년 그는 .332의 타율에 .453의 출루율을 찍었으며, 1999년 김종국의 부상으로 2루수 자리가 비자 2루수로 포지션을 옮겨 3할-30홈런-30도루-100타점을 찍으며 클래식 스탯 기준 커리어하이를 찍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선수 항목 참조. [5] 해태는 보상선수로 외야수 최익성을 지명한다. [6] 물론 김종국이 주전 풀타임 2루수로 활약하던 것은 신인 시절의 일이지만, 1998~2000년은 부상 등으로 인해 제대로 출전하지 못 하고 정체된 모습을 보여주었고 수비는 S급이지만 타격이 별로였다. 그랬던 김종국이 타격에 본격적으로 눈을 뜨기 시작한 시기이다. [7] 01 시즌을 보면 오봉옥이 50경기에 올라와 100이닝을 넘게 던졌고 송유석 트레이드 때에 LG에서 넘어온 이병석이 47경기에서 68이닝을 던지며 2점대 평균 자책점을 올리며 불펜의 핵으로 자리잡았다. 선발투수는 최상덕과 레스 원 투펀치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나머지 투수들의 성적은 박충식을 빼면 3점대 평균자책점을 올린 선수가 거의 없고 그 박충식도 부상의 여파로 30경기도 채 나오지 못 했다. [8] 7월 29일에 마지막 게임을 치렀지만 마지막 승리는 7월25일 사직구장 대 롯데전이며 해태의 마지막 승리투수, 마지막 완투승 투수이자 마지막 완봉승투수도 그때 완봉승을 거둔 최상덕이며 팀의 마지막 승리타점도 그때 2점홈런을 쳐낸 해태의 루이스 산토스이다. [9] 마지막 경기 당시 상대는 공교롭게도 당시 김응용 감독이 이끌던 삼성 라이온즈였는데, 그 경기는 아쉽게도 6:8로 지게 되었다. [10] 사실은 7월 31일 인천 SK 와이번스전이 해태의 마지막 경기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당시 중부지방을 강타한 집중호우로 이 경기가 우천취소되었다. [11] 2002~03시즌 6할 달성.그러나 2002 시즌때는 김성근이 이끌던 4위 LG 트윈스에게 플레이오프에서 패퇴했고 2003시즌에는 조범현이 이끌던 4위 SK 와이번스에게 스윕으로 업셋당하며 한국시리즈에 못 가봤다. [12] 대표적으로 99시즌에 20-20을 달성한 검증된 타자인 신동주를 7번에 박아가면서까지 당시 2할 5푼대의 좌익수이던 김경언을 6번타자로 중용한 것. 이 덕분인지 김경언은 결국 기아에서는 빛을 못봤지만 10년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한화에서 각성했다. [13] 세이버메트릭스가 알려진 지금과는 다르게, 이때는 강공위주 플레이는 장단점이 극명하다고 평가받았고, 짜내는 플레이를 섞어쓰는 게 권장되는 분위기였다. 그 이후에도 김경문 감독 체제의 두산 베어스는 국내 구단 중에서는 그나마 빅볼에 가까운 야구 스타일을 구사하는 편이었고 가을야구에 단골로 진출하면서 한국시리즈도 여러 차례 진출했지만, 스몰볼을 추구했던 선동열 감독의 삼성, 김성근 감독의 SK에 번번이 패해 우승 문턱에서 주저앉아야 했다. [14] 실제로 언급한 김재박, 김성근, 조범현은 각각 현대 유니콘스의 왕조, SK 와이번스의 왕조, KIA 타이거즈의 V10 달성 성공과 함께 강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또 2005~2006 한국시리즈를 우승한 선동열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당시는 투수 중심의 작전 야구 및 스몰볼 야구가 대세였었다. 게다가 당시 2000년대 후반기 왕조를 이끌었던 김성근은 당시 하위 팀이던 SK를 최강팀으로 바꿔놓으면서 국내 야구계 전체에 스몰볼 열풍이 불기도 하였다. 물론 2010년기 초중반 삼성왕조를 이끈 류중일이 삼성이 선호하는 선굵은 야구인 빅볼야구로 팀을 운영하여 4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성공하면서 잠잠해졌지만 말이다. [15] 여기에 김성한은 당시 자기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김봉근 투수코치를 시즌 중 경질했고, 그 때 SK 와이번스의 감독이던 조범현이 냉큼 영입하여 기아 투수들의 약점을 손쉽게 분석할 수 있었다. [16] 2001년 50경기 102이닝 출장 [17] 2002년 66경기 105이닝, 2003년 67경기 68이닝, 2004년 79경기 85이닝 출장. 더군다나 이강철의 당시 나이는 37~39살로 은퇴까지 얼마 남지도 않은 시점이었다. 그렇게 혹사를 당했음에도 이강철의 2005년 성적은 평이한 수준이었지만 끝내 은퇴를 선언한다. [18] 2003년 70경기 119이닝 출장 [19] 2004년 68경기 120이닝 출장. 이후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군대로 끌려가면서 유남호 - 서정환의 혹사를 피한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20] 2002년 시즌중 팀의 2군 포수이던 김지영의 머리를 방망이로 때려 머리가 찢어지는 불상사를 일으킨 사건이다. [21] 놀라운 것은 당시 KIA 선수들 모두가 감독을 두둔했다는 점이었다. 1994 시즌 당시 OB 베어스 윤동균 감독이 선수들을 윽박지르며 체벌 위협을 하자 주축 선수들이 집단으로 팀을 이탈했던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22] 게다가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당시 대표팀 코치가 되었는데 준결승전 1차전에서 김진우가 부진하자, 태업으로 오인하고 쌍욕을 박았다고. [23] 그야말로 군인들이 하는 행군이나 다름없었던 일이었다. 시즌 종료 후 체계적인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휴식을 취하면서 다음 시즌을 치르기 위해 조금씩 준비해야 하는 한겨울에 무작정 며칠간 100km 이상의 아스팔트 도로 위를 걷게하는 행군이 선수들의 몸 상태에 좋은 영향이 있을 리가 없다. 실제로 이 국토 대장정 이후, 2004시즌 중 차세대 에이스였던 김진우가 무릎 부상을 당했고, 이종범은 체력 저하로 인해 시즌 중 부진을 면치 못했으며 고질적 무릎 부상에 시달리던 홍세완과 햄스트링 부상을 달고 살던 박재홍은 1년 내내 부상과 사투를 벌여야 했는데 이 역시 군산~광주 간 대장정 행군과 연관이 없었다곤 보기 힘들다. 결국 박재홍은 2004 시즌 종료 후 SK 와이번스로 트레이드되었다. 박재홍은 2022년 스톡킹에 출연해서 국토대장정에 대해 실컷 깠다. [24] 이에 대해서 김성한 감독은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자세한 내용을 풀었다. 원래는 지리산 종주를 계획했으나 구단 프런트에서 음식물 공급이 어렵다며 난색을 표하자, '그렇다면 내 고향인 군산에서 출발해서 광주 5.18 묘지까지 간 다음 참배를 하자'면서 코스를 바꿨다고 한다. 자신은 팀워크 강화에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해서 이런 훈련을 추진했다고 말했으며, '국토대장정 훈련을 왜 했는지 비난 의견이 최근에 많다는 걸 알고 있으나 눈에 칼이 들어와도 난 잘못했다고 인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어떻게보면 구타사건 이외에도, 이러한 구시대적 훈련으로 인하여 좋은 성적에도 불구하고 선수단 장악과 관련하여 호불호도 상당하였기 때문에 타이거즈 시절 이후 감독직을 다시는 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25] 당장 해태 말년에는 모기업이 부도나는 바람에 선동열과 이종범 임대료로 팀을 운영했고, 98년은 조계현, 99년은 임창용을 삼성에 팔아서 운영비에 보탰을 정도였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 모기업이 해태제과에서 해태그룹의 채권은행인 조흥은행으로 바뀌었을 정도. [26] 박재홍을 받기 위해 주전 3루수였던 정성훈 + 10억을 들여 현대로 보냈고, 진필중을 받기 위해 손혁 + 외야수 김창희에 8억원을 더해서 두산으로 보냈다. 또한 마해영을 영입하기 위해 신동주 + 보상금 11억 4천만원을 삼성에게 주었고 여기에 FA계약금도 마해영에게 지급했다. 다만 심재학 영입을 위해서 들인 대가는 황윤성 + 박진철인데 둘 다 그저 그런 2군 선수였으니 그나마 이건 기아가 손해를 덜 본 케이스다. [27] 베테랑은 아니지만 불펜진을 강화하겠다고 3루수 유망주인 김상현을 LG로 보내고 젊은 좌완투수 방동민을 데려왔지만 정작 온지 2주 만에 인대가 찢어졌고, 04년에 복귀하지만 9점대 평균 자책점을 올리다가 소리없이 사라졌다. [28] 심지어 2003 시즌 중반에 두산에서 트레이드된 최용호는 트레이드를 거부하며 잠적 소동을 벌였다. [29] 2002년 1차 지명자인 김진우는 무려 7억을 주었고 2003년 1차 지명자인 고우석은 2.5억, 2004년 1차 지명자인 김주형은 3억을 받았다. 연고지 내의 특급 유망주들에게 계약금 하나 못 줘서 MLB로 유출된 사례(서재응 - 김병현 - 최희섭)가 많았던 과거를 생각하면 대조적인 부분. [30] 플레이오프에서 LG에게 패하며 최종 3위 [31] 플레이오프에서 SK에 패하며 최종 3위 [32] 시즌 도중 사퇴 당시 [33] 참고로 황선일의 모친이 김성한의 초등학교 동창이다. [34] 2-2-4를 기록했다. 다만 포스트시즌에서 2002년(對 LG), 2003년(對 SK) 2년 연속 업셋을 당했다. [35] 물론 2010년에 부진하자 다시 그런 여론이 되살아났고 결국 팬들이 그렇게 노래를 부르던 선동열이 5-8-8을 찍고 물러나면서 잠잠해진 상황. [36] 순수하게 야구 내적인 능력만 판단했을 때 김성한 수석코치는 분명 강한 카리스마를 가졌으며 최연소 2000안타의 장성호, 인생은 로또 이호준, 100타점 유격수 홍세완 등을 키워내고 팀을 3년 연속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고 2년 연속 6할 승률을 찍는 등 타격코치와 감독으로서의 역량이 검증된 인물이다. 적어도 2013 시즌이 시작되기 전까진 그랬다. [37] 이 발언은 이종범을 강제은퇴시킨 선동열의 밑에서 코치를 하지 말라는 것으로 선동열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38] 50대 중반이면, 이미 감독도 몇 년 해봤으니 어딜 가도 감독급 레벨이다. 사실 기아 감독 시절 성적도 무난한 편이였다. 2015년이면 선동열 감독과 김응용 감독의 계약기간이 종료되는지라, 감독으로 복귀할 가능성도 생겼다. [39] 첫 수석코치 등용당시에는 폭력사건으로 인해 막힌 야구계 커리어를 김응용 감독이 해결해 주려고 한 거 아니냐는 게 대다수의 견해였다. [40] 사실 해태 선수 말년에도 불화가 있었다. 1994년 시즌 전 전지훈련지에서 김성한이 갈 수록 노쇠화가와 타격 성적이 떨어지자 이를 계기로 특유의 오리궁뎅이 타법을 코감독이 강제로 뜯어고치려다가 실패해 은퇴로 내몬 것도 있고, 2000년 시즌이 종료된 후 김응용 감독이 삼성으로 자리를 옮기자 해태의 주요 코치진을 줄줄이 빼간 것, 그리고 김응용 감독이 과거 박동희 기자 와의 인터뷰에서 김성한 구타 사건을 대놓고 디스한 적도 있는지라, 겉과는 달리 속으로는 상당히 곪아 있던 게 터진 건지도 모르겠다. [41] 사실 김응용 감독은 과거에 수석코치와 트러블을 빚고서 그 코치를 내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90년 김인식 쌍방울 레이더스 초대 감독으로 가면서 수석코치가 된 백기성은 김감독이 자신을 선수들 앞에서 종종 갈구고, 이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자, 김 감독에게 육두문자를 들어야 했고 결국 이런 상황이 지속되자 1991년 시즌이 끝나고 사임하고 말았다. [42] 이와 같은 케이스로는 유남호도 있다. 원래 해태에서 같이 삼성으로 옮긴 유남호는 수석코치로 1992년부터 2003년까지 그를 보좌했으나, 그와의 사이가 틀어져, 2003년 시즌 중 사표를 쓰고 바로 다음 시즌인 2004년에 친정팀 KIA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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