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김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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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김병지의 선수시절 경력을 설명하는 문서.경력 문서를 작성하기 앞서 김병지가 뛰던 시절 체계화되지 않은 대회로 인해 기재하지 않은 기록이 있음을 알린다.
대표적으로 아시아축구연맹(AFC) 클럽대항전이 체계화되기 전인 1996~1998년 울산 현대 소속으로 뛰었던 국제경기 기록이다. 확인되지 않는 기록이 존재함에 따라 포항 스틸러스 시절의 A3 챔피언스컵 등 국제 대회 출전 기록을 제외하고 서술한다.
또한 보통 언론이나 공식적인 김병지의 클럽 통산 출전 기록은 아시아 대회와 FA컵 대회 기록을 제외한 국내 리그 및 리그 컵 대회만 합산한 708경기로 규정하고 있지만 현재 다른 리그의 현역 선수들의 통산 기록에 FA컵 기록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 문서 역시 김병지의 FA컵 대회 출전 기록인 39경기를 추가하여 서술한다.[1]
2. 클럽 경력
2.1. 유소년 시절
본래 육상 선수였으나, 밀양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고등학교와 성인 초기에 워낙 곤경이 많았어서 축구 자체를 늦게 시작했다고 아는 사람들이 많은데, 이는 잘못 알려진 정보이다.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무난한 축구인생을 보냈지만 이후 골키퍼임에도 키가 자라지 않아 마산공고 1,2학년을 축구부로 못 간 채 보내야 했다. 당시 감독이 체격이 클 때까지 쉬다 오라며 돌려보냈다고 한다.[2] 이후 161~165cm였던 키가 181~185대로 자라서 다시 축구부를 찾아갔을 땐 김병지의 자리를 다른 선수가 이미 채운 뒤인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필드 플레이어로 뛰기도 했던 김병지는 고3 때 부산 소년의집(현 알로이시오 전자고등학교)으로 전학을 택했고 이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대학 진학이 실패로 끝난 후 해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축구를 계속 하기 위해[3] 입시학원까지 다니며 준비했지만, 김병지가 일반 학생들처럼 계속 공부를 해온 게 아니다 보니 뜻을 이루지 못했다.
2.2. 아마추어 ( 금성산전 직장인 팀, 상무 축구단)
김병지의 첫 번째 성인 축구팀은 지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직장인 팀이었다. 해사 시험에서 낙제한 후 창원 금성산전(現 오티스 엘리베이터)에 입사해 검사실에서 일했고, 근무 시간이 끝나면 사내 직장인 팀에서 경기감각을 유지했다. 당시 직장인 리그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기업이 많아 선수 출신 직원을 따로 스카웃할 정도로 리그 수준이 좋았던데다 김병지 본인의 말에 따르면 프로나 실업에서 선수생활을 하다가 안정적인 삶을 위해 직장에 ‘취업한 선수’가 많다 보니 자신의 커리어가 오히려 평범한 편이었다고.1989년 말 영장이 나왔고, 고졸이어서 병역을 연기할 수 없던 김병지는 1990년 당시 존재했던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국군체육부대의 테스트를 통해 상무 축구단에 입대했다. 30개월 동안 복무하면서 80여 경기를 소화하다 보니 자신감이 붙었고, 실제로 프로에 진출하게 돼 김병지는 현재도 군에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한다.
김병지는 상무에서 굉장한 활약을 보였는데, 91년 가을에 열린 전국실업축구연맹전에서 상무를 7년 만의 우승으로 이끌었다. 특히 당시 실업축구팀 강호였던 국민은행과의 결승전에서 국민은행의 파상공세를 막아내어 정규시간 및 연장까지 1:1 균형을 유지한 김병지는 승부차기 선방을 통해 팀에게 우승을 안겼다. 대회 최우수 선수로 뽑히기까지 하는데, 당시 대회에서 김병지의 활약도를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
이때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1년 12월 진행됐던 신인 드래프트에 지원했다. 상무에서의 활약이 워낙 좋았어서인지 드래프트에 지명되지 않아도 92년 7월에 전역하면 유공 코끼리에서 그를 데려가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드래프트에서는 아쉽게 지명되지 않았고, 김병지는 드래프트 당일 오후 있었던 상무와 현대 호랑이가 맞붙은 연습경기를 뛰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차범근 감독을 비롯한 현대 코칭스태프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고, 그날 오후 현대에서 김병지를 추가지명하며 프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
2.3. 울산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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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년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극적인 골을 넣는 김병지[4] |
2.3.1. 현대 호랑이
현대 호랑이 시절 기록(1992~1995년)[5]
1992년 K리그: 10경기 11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6 | 7 |
아디다스 컵 | 4 | 4 |
합계 | 10 | 11 |
1993년 K리그: 25경기 19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1 | 15 |
아디다스 컵 | 4 | 4 |
합계 | 25 | 19 |
1994년 K리그: 27경기 27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4 | 24 |
아디다스 컵 | 3 | 3 |
합계 | 25 | 19 |
1995년 K리그: 35경기 26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8 | 21 |
아디다스 컵 | 7 | 5 |
합계 | 35 | 26 |
2.3.2. 울산 현대 호랑이
울산 현대 호랑이 시절 기록(1996~2000년)[10]
1996년 K리그: 30경기 37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5 | 33 |
아디다스 컵 | 5 | 4 |
합계 | 30 | 37 |
1997년 K리그: 22경기 19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13 | 9 |
아디다스 컵 | 1 | 0 |
프로스펙스 컵 | 6 | 8 |
FA 컵 | 2 | 2 |
합계 | 22 | 19 |
1998년 K리그: 25경기 33실점 1골
대회 | 경기 | 실점 | 득점 |
K리그 | 22 | 31 | 1 |
아디다스 컵 | 3 | 2 | - |
합계 | 25 | 33 | 1 |
1999년 K리그: 23경기 35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12 | 21 |
대한화재 컵 | 8 | 11 |
삼보컴퓨터 FA 컵 | 3 | 3 |
합계 | 23 | 35 |
2000년 K리그: 33경기 41실점 2골
대회 | 경기 | 실점 | 득점 |
K리그 | 26 | 34 | 1 |
대한화재 컵 | 3 | 0 | 0 |
아디다스 컵 | 2 | 4 | 1 |
서울은행 FA 컵 | 2 | 3 | |
합계 | 33 | 41 | 2 |
울산 현대 통산 230경기 248실점 3골(K리그 177경기 195실점 2골/리그 컵 46경기 45실점 1골/FA컵 7경기 8실점)
1992년 7월 전역과 함께 울산 현대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국군체육부대에 있을 때는 당시 병장 월급이 1만 원이었으나, 울산에서 첫달 월급 80만 원이 찍히는 걸 보고 프로는 다르구나, 실감했다고 한다. #
신인시절에는 최인영이라는 팀의 주장이자 대표팀 넘버원 골키퍼의 그늘에 가려 많은 기회를 받진 못했다. 그러나 1993시즌부터 최인영이 대표팀 소집으로 인해 팀을 이탈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김병지가 기회를 얻었고, 엄청난 선방과 함께 꾸준히 0점대 실점률을 보이는 등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특히 1995년 고재욱 감독 부임 이후 최인영을 밀어내고 본격적으로 울산의 주전 골키퍼로 활약했다. 한편, 발레리 사리체프를 앞세운 천안 일화 천마의 3연속 우승 쇼크로 인해 울산 현대를 제외한 K리그 전 구단이 외국인 골키퍼를 영입하는 붐이 일어났을 때도, 그만은 토종 골키퍼의 자존심을 지켰고, 1996년 자신의 커리어 첫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등 수많은 외국인 골키퍼 사이에서도 국내파의 자존심을 지켰다.[14][15]
울산 현대 호랑이의 1995년 아디다스컵 우승, 1996년 K-리그 우승과 1998년 K-리그 준우승, 아디다스코리아컵 우승에 일조한다.
특히 1998년 포항과의 PO 2차전에서 보여준 헤딩 골은 많은 팬들에게 회자되는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상황은 1:1, 후반전 추가 시간, 울산이 프리킥을 올리려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김병지가 포항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달려왔고 때마침 올라온 골을 그대로 헤딩, K리그 사상 최초로 골키퍼 필드 골을 넣었고 플레이오프 1, 2차전 합계 스코어 4:4를 만들면서 승부를 연장으로 끌고 갔다.[16] 결국, 팀은 승부차기 끝에 승리하여 결승에 진출했다.[17] 하지만 챔피언 결정전에서 이운재가 버티던 수원에 패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그래도 1998시즌 월드컵에서의 맹활약과 득점 등 인상적인 활약을 펼치며 K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2.3.3. 유럽 이적설
19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당시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 선덜랜드 AFC로부터 정식 영입 제의를 받기도 했다. 과거에는 언어 문제로 본인이 고사했다고 알려졌으나 2020년에 김병지가 본인 유튜브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본인은 월드컵 종료 후 구단에 복귀하지 않으며 항명했을 정도로 진출을 강하게 희망했으나 울산 구단에서 강제로 막았다고 한다. 1990년대 K리그 구단들은 입단 계약서에 계약종료 날짜가 없어서 강제 원클럽맨 신세였고 눈 밖에 나면 일부러 경기에 안 내보내고, 2군으로 보내버리는 일도 비일비재 했다고 한다. 입단 계약서가 노비 문서였던 셈인데, 1990년대에 있으나 마나했던 대한민국의 노동법 실태가 축구계에 한층 열악하게 드러난 것이다. 2001년 MBC가 연제협의 노비 문서 실태를 고발하여 먼저 터진 뒤부터 조금씩 개선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나마 김병지는 이미 대중적인 인지도가 어마어마한 스타 선수이자 자타공인 No.1 골키퍼였기에 구단이 불이익을 주거나 하지 않고 외국구단 제시액보다 연봉을 더 줘서 회유하는 방법을 택했다고 한다.사실 1994년 브라질 플라멩구 오퍼를 시작으로 1997년부터 1998 월드컵 즈음해서 선더랜드와 노리치, 프랑스 리그 1~2팀의 오퍼가 있었다고 한다. 저때 당시는 EPL이 최강 시절은 아니고, 세리에 A가 넘사벽 최강이었고 그리고 리그앙은 한 3~4위 리그 정도 되던 상위리그 시절이었다. 유럽 상위팀은 주전이 어려워도 중하위권팀은 자기와 비슷한 기량의 유럽 골키퍼들이 많이 뛰고 있어서 도전해볼 생각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이적에 관한 피파의 룰에 무지하고 당시 관행이었던 종신계약과 울산 현대의 완강한 반대로 잔류해버렸다. 해외 이적을 위한 항명까지 했지만 해외에서 제시한 연봉을 환율로 계산해서 더 주는 것으로 해버렸다고 한다. 계약서에는 계약기간도 없어서 무조건 원클럽맨이었고, 그게 1990년대 말까지 지속돼서 이적이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도 후에 인터뷰를 통해 울산 구단이 무조건적인 희생만 강요하지는 않았고, 기본적으로 팀에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줬으며 금전적인 부분에 있어서 확실한 보상을 해줬다고 밝혔다. 그리고 김병지도 잔류하여 활약했지만 울산 구단은 내리막을 걸으며 2년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고, 2000시즌에는 아예 꼴찌를 기록하고 만다. 하지만 2000년 10월 7일 안양과의 리그 경기에서 한국 프로축구 최초 골키퍼 페널티킥을 성공시켰다.
2.4. 포항 스틸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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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2005년)
2001년 K리그: 29경기 28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2 | 22 |
아디다스 컵 | 3 | 2 |
서울은행 FA 컵 | 4 | 4 |
합계 | 29 | 28 |
2002년 K리그: 25경기 31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1 | 27 |
하나-서울은행 FA 컵 | 4 | 4 |
합계 | 25 | 31 |
2003년 K리그: 43경기 43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43 | 43 |
합계 | 43 | 43 |
2004년 K리그: 39경기 39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7 | 24 |
삼성 하우젠 컵 | 12 | 15 |
합계 | 39 | 39 |
2005년 K리그: 39경기 32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4 | 22 |
삼성 하우젠 컵 | 12 | 9 |
하나은행 FA 컵 | 3 | 1 |
합계 | 39 | 32 |
포항 스틸러스 통산 175경기 173실점(K리그 137경기 138실점/리그 컵 27경기 26실점/FA 컵 11경기 9실점)
2001시즌을 앞두고 2002 한일 월드컵 개최를 기념해 일본 요코하마에서 한일 올스타와 세계 올스타의 경기를 소화하던 중, 울산의 일방적인 통보를 받고 포항으로 이적당한다. 당시 김정남 감독 아래 리빌딩을 시도하던 울산은 김병지를 당시 국내 선수 최고 이적료로 울산의 최대 라이벌 포항 스틸러스로 이적시켜버린 것이다.
물론 포항에서도 좋은 활약을 보여줬다. 하지만 2002년 9월 안양 LG 치타스와의 홈경기에서 뚜따의 골세레머니에 과하게 반응해 벤치 클리어링을 유도한 이유로 5경기 출장 정지를 받기도 했다.
하석주가 주전 경쟁에서 밀린 2003년엔 울산 출신 최초의 포항 주장[20]에 선임되는 등 최순호 감독의 엄청난 신뢰를 받으며 K-리그에선 최고의 골키퍼 자리를 유지했다. 2003시즌 종료 후 포항과 계약 기간에 이견을 보이며 은퇴를 놓고 줄다리기를 하기도 했으나, 결국 2+1년 10억5천만원에 재계약 사인했다. #
2004년을 앞두고 주장 완장을 내려놓았지만, K-리그 전기리그 우승 및 통합 준우승에 여러모로 일조했다. 수원과의 챔피언 결정전 1차전에서는 말 그대로 야신 모드로 엄청난 슈퍼세이브를 경기 내내 보여주며 무승부를 이끌어 냈다. 2차전 승부차기에서는 포항의 5번째 키커로 등장했는데, 김병지가 실패하면 수원의 승리가 되는 상황이었다. 김병지가 찬 공은 결국 영원한 국가대표 라이벌 이운재의 손에 막히며 팀도 패하고, 본인도 라이벌에게 패하는 아픔을 겪었다.
2005년 리그 2라운드 전북 원정에서 상대의 파상공세를 온몸으로 막아내며 무실점을 기록, 신의손이 갖고 있던 한국프로축구연맹 주관 대회 통산 최다 클린시트를 118경기로 경신하였다. 자신의 커리어 첫 외국인 감독이던 세르지오 파리아스 감독에게 무한신뢰를 받으며 전성기를 방불케하는 활약을 보여줬고 7년 만에 K리그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그리고 이때부터 무교체 연속 출장 기록이 시작됐다.
2005시즌 종료 후 유망주 정성룡과 신화용을 키우기로 한 포항을 떠나며 울산-포항으로 이어진 두 라이벌 구단에서의 커리어가 끝났다. 두 구단을 모두 거쳐간 선수 중에서 양 구단에게 모두 레전드 칭호를 받는 몇 안되는 선수이다. 김병지 본인은 두 구단 모두 애정이 있지만, 그래도 프로 생활을 시작하게 해줬으며 더 오래 뛴 울산에게 더 많은 애정이 있다고 밝혔다.
2.5. FC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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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우의 발리슛을 선방하는 김병지 |
(2006~2008년)
2006년 K리그: 43경기 37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7 | 23 |
삼성 하우젠 컵 | 13 | 11 |
하나은행 FA 컵 | 3 | 3 |
합계 | 43 | 37 |
2007년 K리그: 41경기 28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6 | 16 |
삼성 하우젠 컵 | 12 | 9 |
하나은행 FA 컵 | 3 | 3 |
합계 | 41 | 28 |
2008년 K리그: 6경기 7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5 | 7 |
삼성 하우젠 컵 | 1 | 0 |
하나은행 FA 컵 | 1 | 1 |
합계 | 7 | 8 |
FC 서울 통산 91경기 73실점(K리그 58경기 46실점/리그 컵 26경기 20실점/FA 컵 7경기 7실점)
2005 시즌이 끝나고 포항과 재계약이 결렬된 김병지는 3년 계약으로 FC 서울로 이적하여 2006년 팀의 하우젠 컵 우승에 공헌하고 2007 시즌 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2006년 신태용에 이어 사상 2번째로 4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고, 그렇게 프로축구 통산 최다 출장 기록자가 됐다.
2007년에는 K-리그 통산 최다 무교체 출장기록을 153경기로 경신했다. 이 기록은 칠레와의 A매치 경기에서 입은 부상[22] 때문에 마감되었다. 이 때 부상으로 잠시 전열에서 이탈한 사이 후배 골키퍼 김호준이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던 세뇰 귀네슈 감독의 의향에 따라 2008 시즌에는 김호준의 백업으로 머물게 된다.
이것을 크게 불쾌하게 여겨 이적 후 축구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전이었다면 우승했을거라며 2008시즌 준우승에 머무른 서울과 귀네슈 감독을 디스했다.[23]
2.6. 경남 FC
경남 FC 시절 기록(2009~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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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 500번째 경기 날 등번호 500번 유니폼을 들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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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통산 600번째 경기 날 경남의 모든 선수가 기념 티셔츠를 입었다 |
2009년 K리그: 31경기 30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6 | 28 |
피스컵 코리아 | 3 | 2 |
하나은행 FA 컵 | 2 | 0 |
합계 | 31 | 30 |
2010년 K리그: 37경기 50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9 | 34 |
포스코 컵 | 6 | 7 |
하나은행 FA 컵 | 2 | 9 |
합계 | 37 | 50 |
2011년 K리그: 33경기 44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30 | 40 |
러시앤캐시 컵 | 3 | 4 |
합계 | 33 | 44 |
2012년 K리그: 42경기 48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37 | 44 |
하나은행 FA 컵 | 5 | 4 |
합계 | 42 | 48 |
경남 FC 통산 143경기 172실점(K리그 122경기 146실점/리그 컵 12경기 13실점/FA 컵 9경기 13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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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의 페널티킥을 선방하는 김병지 |
2012년 6월 27일 통산 200번째 클린시트를 달성하였다.
2012년 10월 7일, 친정팀 서울을 상대로 대망의 6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웠다.
2012 시즌 후 FA 자격을 얻었는데, 경남 FC 주전 수비수 이재명과 함께 전남행이 유력하다는 기사가 나왔다. #
2.7. 전남 드래곤즈
전남 드래곤즈 시절 기록(2013~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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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아들과 함께 시축을 한 그의 K리그 통산[27] 700번째 경기날! |
2013년 K리그: 36경기 42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36 | 42 |
합계 | 36 | 42 |
2014년 K리그: 39경기 56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38 | 53 |
하나은행 FA 컵 | 1 | 3 |
합계 | 39 | 56 |
2015년 K리그: 31경기 36실점
대회 | 경기 | 실점 |
K리그 | 27 | 30 |
하나은행 FA 컵 | 4 | 6 |
합계 | 31 | 36 |
전남 드래곤즈 통산 106경기 134실점(K리그 101경기 125실점/FA 컵 5경기 9실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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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완벽한 득점찬스를 선방하는 김병지 |
결국 전남 드래곤즈로의 이적을 합의했다. # 여담으로, 김병지 슬하의 아들 셋이 모두 축구를 하는데, 모두 전남 드래곤즈의 유스 팀으로 옮긴다고 한다.
특이한 것이 경남 시절에는 분명 플레잉 코치로 입단했는데, 전남에 와선 플레잉 코치가 아닌 선수로 입단했다. 이 때 그의 나이 43세. 참고로 김병지가 전남에 입단하기 직전에 은퇴한 전남의 주전 키퍼는 다름 아닌 이운재다.
게다가 하석주 감독과는 겨우 3살 차이. 그나마도 하석주가 2014시즌을 끝으로 물러나고 수석 코치인 노상래가 감독을 하면서 코치진이 리뉴얼되었는데, 김병지보다 나이 많은 코치가 한 명도 없다.[28]
그리고 2015년 7월 26일, 대망의 700경기 출전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700번째 경기에서 제주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3대 1로 승리를 했다. 777번째 경기가 자신의 은퇴 경기가 될 거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번 700경기 인터뷰에서 아버지 뒤를 이어 축구를 하고 있는 장남 김태백 군이 프로에 데뷔할 때까지 뛸 거라고 하니까 어쩌면 777경기보다 더 오래할지도 모른다. #
2015 시즌 종료 후 계약 만료로 이적 시장에 나왔다. 2015시즌 27경기 30실점 8클린시트로 나쁘지 않은 기록을 보여줬으나, 이미 40대 중반의 최고령인데다가 후술할 막내아들 폭행사건 수습의 영향으로 2016 시즌 전반기엔 소속팀을 구하지 못하고 무적으로 남았다.
2.8. 은퇴
통산 747경기 802실점 3골(K리그 586경기 642실점 1골/플레이오프 11경기 10실점 1골/리그 컵 111경기 104실점 1골/FA 컵 39경기 46실점)[29]
2016년 7월 19일, 김병지는 본인의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최고령의 나이에 6개월의 공백 기간이 있었고, 커리어가 워낙 긴 이상 결코 저렴하지 않을 몸값(대우), 또 앞서 말한 사생활 이슈가 결국 그를 은퇴의 길로 끌고 갔다. 기사 링크 K리그 최고의 선수라 부를 수 있는 선수가 이렇게 그라운드 밖으로 나아갔다. 통산 최다 출전(708경기)[30], 통산 최다 무실점(229경기), 통산 최다 연속 무교체 출전(153경기), K리그 최고령 출장(45년 5개월 15일)의 대기록을 남긴 채.
2015 시즌까지 무려 24시즌을 현역으로 뛰었다. K리그는 2015년 기준으로 32시즌이다. 세계에서 몇 남지 않은 현역 1998 월드컵 출전자였으며[31] 그가 2016년 7월 20일 은퇴한 뒤 2002 월드컵 현역멤버는 17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현영민만 남아 있었을 정도.
은퇴식은 그의 프로 첫 팀 울산 현대의 주최 하에 2016년 9월 18일 일요일 전성기를 보낸 또 다른 친정팀 포항 스틸러스와의 울산문수축구경기장 경기에서 열렸다.
3. 국가대표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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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 벨기에전 선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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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 선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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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코스타리카전 선방 |
3.1. 1998년 이전
1994 FIFA 월드컵 미국 이후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최인영의 후계자를 찾고 있었고, 그 다음 해 중반부터 김병지가 기용되기 시작했다. 한편, 기존의 유력 후계자였던 이운재는 올림픽 대표팀과 함께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간염에 걸리며 선수 생활을 잠시 접어야 했고, 그렇게 주전 수문장은 김병지의 몫이 되었다.1995년 6월 5일 코리아컵 코스타리카전을 통해 A매치에 데뷔했다. 이후 1996 AFC 아시안컵 아랍에미리트에도 참가했는데, 팀의 성적은 좋지 않았다. 팀은 이란과의 8강전에서 식스투 참사로 탈락했고 김병지도 이 경기를 포함해 대회 4경기에서 11실점을 하며 좋지 못한 기록을 남겼다. 다만, 이 결과에 대한 비판은 김병지보다 박종환 감독과 수비진에게 많은 편이다. 이후 차범근호에서도 주전 자리를 지켰으며,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에도 출전했다.
3.2.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1998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은 조별리그 3경기에서 1무 2패를 기록하였는데, 도합 슈팅 57개, 유효 슈팅 32개를 허용했고 김병지는 19세이브, 12스틸, 9실점을 기록했다.[논란] 실점이 많았지만 그만큼 맞이한 유효 슈팅 수가 많았고 차범근호에서 제 몫을 한 선수를 한 명 뽑으면 그 선수가 김병지라는 게 중론이다.특히나 2차전인 네덜란드전에서의 그의 활약은 정점에 달했다. 당시 거스 히딩크 감독이 이끌던 네덜란드는 우승 후보로 꼽히는 명실상부 최고의 팀[33]이었다. 당시 네덜란드의 선수진은 데니스 베르캄프, 에드가 다비즈, 파트릭 클라위버르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 에드빈 판데르사르, 야프 스탐, 프랑크 더부르 등 축구계에서 손꼽힐 만한 선수들이 모여 있었다. 그런 팀을 상대로 대한민국은 5대0 패배를 당하고, 결국 차범근 감독이 네덜란드전 대패의 여파로 프랑스 현지에서 경질되며 귀국길에 오른다.
대한민국은 3-6-1 포메이션에서 선수비 후역습으로 어느 정도 상대의 측면돌파를 윙백이 끊어주고 중앙에서 강하게 압박을 시도하는 전술을 가지고 나왔으나 1차 저지선이어야 할 허리라인은 상대의 현란한 개인기와 패스 조합에 우왕좌왕하다 헝클어지면서 윙백의 부담이 커진 데다가, 레프트 윙어인 마르크 오버르마르스를 위시한 네덜란드의 윙플레이어들의 미친 돌파력으로 윙백들이 최후방라인보다 더 내려가게 되어 쓸모없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협력수비 한답시고 다들 공이 가는 곳마다 몰려다녀 정작 데니스 베르캄프 등의 공격수를 놓치면서 공간이 호남평야마냥 훤하게 드러나 침투도 용이해지는 바람에 골키퍼의 부담의 가중까지 미쳐 올라가는 지라 한마디로 총체적인 난국이었다.
결국 대한민국 대표팀은 무려 17개의 유효 슈팅을 허용했는데, 5실점밖에 하지 않은 건 김병지의 눈부신 선방 덕분이었다. 실제로 당시 히딩크 감독은 경기 후 인터뷰에서 "우리는 더 많은 득점을 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골키퍼가 너무 뛰어나서 더 많은 골을 넣지 못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후에 히딩크는 대한민국을 맡게 되었을 때 인터뷰 내용 중 프랑스 월드컵에서 김병지의 활약을 언급하자 월드컵에서 믿고 맡길 수 있는 골키퍼가 있다는 것은 팀에게도 감독에게도 좋은 일이며 더구나 그 때 김병지가 가장 인상에 깊게 남았었는데 그와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3.3. 허정무호 1기 시절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준수한 활약을 바탕으로 허정무 감독 체제에서도 초반에는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하지만 변수 또한 생겼는데, 간염을 회복한 이운재가 K리그에 나와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줬고 허정무도 그를 소집하기 시작했다.일단 김병지가 주전으로 선택을 받아 1998 방콕 아시안 게임, 2000 CONCACAF 골드컵에 참가했는데, 각각 8강과 조별 리그에서 광속 탈락했다. 심지어 방콕 아시안 게임에 홍명보가 불참하자 임시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하지만 대표팀의 성적이 계속 부진했고 이후 K리그에서도 기록과 소속 팀 성적이 좋지 않자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에서는 명단에 제외되며 출전하지 못했다.[34] 그 사이 상무에서 군 복무 중이던 이운재가 대회를 소화하면서 주전 경쟁의 시작을 알렸다.
3.4. 히딩크호 시절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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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스 히딩크 박항서 스태프
핌 베어벡 ·
정해성 ·
김현태 ·
압신 고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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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없어하는 거스 히딩크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떨구는 핌 베어백, 안절부절 못하며 일어나는 박항서의 모습이 압권이다.
마르세유에서 안면이 있는 히딩크 감독이 2001년에 선임되고 본격적으로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을 위한 경쟁을 시작했는데, 시작은 좋지 못했다. 2001년 1월 칼스버그컵 파라과이 전에서 갑자기 무리하게 공을 몰고 가다 상대 미드필더인 구스타보 모리니고에게 공을 빼앗기는 아찔한 실수를 벌였고, 결국 후반전에 교체되고 말았다. 비록 대한민국이 승부차기에서 승리했지만, 이 플레이로 김병지는 히딩크의 눈밖에 제대로 나게 되면서 한동안 대표팀에서 볼 수 없었다. 김병지의 2001년 출전 기록이 단 2경기 밖에 없었던 반면, 이운재는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을 포함하여 12경기를 출전하면서 히딩크의 신임을 받았다.
이 드리블은 은퇴한 지금까지 김병지를 쫓아다니는 상징적인 플레이가 되어버렸는데, 김병지 본인은 2018년 개인 유튜브 꽁병지tv와 언론 인터뷰나 가짜사나이 면접 등 당시 드리블에 대해 묻는 다양한 매체에서 드리블과 실패가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만큼 후회하지 않지만 그 이후 자신의 태도는 후회스럽다고 소회를 밝혔다. 자신의 실수이니 바로 인정했어야 했는데, '내가 김병지인데'라는 혈기에 먼저 사과하고 히딩크 감독과의 응어리를 풀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까지 부침을 겪으며 선수와 감독과의 관계, 고참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게 700경기 넘게 뛰는데 큰 자산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래도 이후에 절치부심하여 리그에서 성실한 모습을 보이자 그 해 11월에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게 되었고,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도 포함되면서 자신의 2번째 월드컵을 맞게 되었다. 2002년에는 월드컵 직전까지 이운재와 함께 교대로 선발 출전하면서 팽팽한 경쟁을 벌였다. 그러나 월드컵에서는 단 한 경기도 뛰지 못한 채 벤치에서 4강 진출의 기쁨을 맛봐야 했다. 히딩크 감독 자서전에 의하면 이운재와 김병지 두 선수 사이에서 많은 고민을 했으나, 이운재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 지속적으로 출전시켰다고 한다. 골키퍼 문제는 히딩크가 월드컵 개막 직전까지 고민했는데, 이운재를 낙점하고 김병지에게 개인적으로 찾아가 주전 키퍼로 이운재를 낙점했지만, 자신의 질책을 받아들이고 성실히 훈련에 임해 온 김병지를 존경한다고 말했다. 김병지도 이에 대해서는 히딩크에게 원망을 표하지 않았고, 히딩크는 이후로도 별말없이 성실히 훈련에 임하는 김병지를 보고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선수로써 최전성기 때 고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뛴다는 흔치 않은 기회를 놓친 것은 역시 한이 되는지 후에 히딩크와 2002년에 대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는 식의 발언을 몇 차례 했다. 4강에서 패배한 뒤라 3/4위전은 자신에게 기회를 줄 거라 생각했는데 끝까지 출전을 못해서 원망했다고. 실제로 올림픽처럼 3위에도 메달이 걸려있는 대회가 아닌 이상, 3, 4위전은 더이상 승부와 관계가 없고 마지막 경기이므로 여태까지 출전이 없었던 선수나 후보 선수들을 기용하는 것이 축구계의 반쯤 관례이다.[35][36]
3.5. 2002년 이후
한일 월드컵 이후에도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전 수문장은 이운재로 고정되어 가게 되었는데, 김영광이나 김용대 등 젊은 골키퍼들도 두각을 나타냈고 한일 월드컵 이후 외국인 감독들이 국제 대회 경험이 많으면서 최근 월드컵을 경험한 이운재를 중심으로 삼게 되며 자연적으로 대표팀에서 제외되곤 했다.그러나 2006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이운재가 2004년, 2005년 2년간 리그와 대표팀에서 기량 정체 및 저하를 보이자, 일부 언론과 축구팬들은 대표팀 부동의 1번 이운재에게 의구심을 드러냈고 김병지의 재입성을 주장했다. 실제로 기록만 본다면 이운재는 1점대 이상의 실점률을, 김병지는 0점대의 실점률을 보이며 수치상으로는 이운재를 압도하는 중이었다. 거기다 이운재의 소속팀은 K리그를 대표하는 클럽 중 하나이자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즐비한 수원 삼성 블루윙즈였지만, 김병지는 전통 명문 구단이긴 하나 당시에는 중위권에 위치하며 주춤했던 포항 스틸러스 소속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비교되었다.[37]
이 현상에 대해 이운재는 "좋은 후배들이 많기 때문에 김병지가 대표팀에 돌아오면 후배들의 앞길을 틀어막는다."라며 디스를 시전하였고, 얼마 뒤 김병지가 "너나 똑바로 해라. 네가 얼마나 대표팀에서 빙다리 핫바지식으로 굴었으면 나를 찾는가? 내가 돌아갈 정도면 네가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입을 놀리는 것인가?"라는 식의 맞디스를 날리면서 으르렁거리는 상황이 펼져졌고 양 선수들의 팬들까지 서로 '파라과이전 무한 돌파 실패한 벤치 멤버', '운동도 안 하고 살만 찌는 돼랑이'라고 온라인에서 물어뜯었다.[38] 한편 딕 아드보카트 감독은 팬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월드컵 대표팀 골키퍼 명단은 이운재, 김용대, 김영광 세 선수로 유지했고 팬들은 월드컵 엔트리에서 탈락해 아쉬운 선수로 김병지를 차두리와 함께 거론했다. 그리고 이운재는 독일 월드컵에서 훌륭한 활약을 보여줬다.
2007 아시안컵 이후 음주 파동에 휘말린 이운재를 대신해 오랜만에 대표팀에 복귀했으나, 2008년 1월 칠레와의 경기에서 허리 부상을 당하면서 다시 아웃되었다. 해당 경기 풀버전 이후 본인이 후배들을 위해서 길을 터줘야 한다며 사실상 국가대표 은퇴를 간접적으로 선언했다.
[1]
애초에 K리그 자체가 운영 방식 변경이 굉장히 많은 점도 있고 기록적인 측면에서도 기록에 따라(예를들어 골, 도움 기록. 염기훈의 통산 최다도움은 2부리그 기록이 더해진 기록이다.) 2부 리그 경력을 포함시키기거나 컵 대회 기록을 미포함하는 등 명확한 기준 없이 기록을 산정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체계 없이 무턱대고 운영해온 K리그의 자승자박이라 할 수 있다.
#
[2]
그때까지만 해도 체격조건의 성장이 더딘 운동부 학생을 당장 뛰기보다는 커서 오라고 하는 감독이 많았다고.
[3]
당시 육해공 3군 사관학교는 축구로 치열하게 경쟁했고, 선수로 뛰는 생도들의 실력도 좋은 편이었다.
[4]
1998년 울산과 포항의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 골득실로 비기기만해도 탈락하는 상황, 1:1이었던 후반 종료 40여초를 남기고 극적인 골을 넣은 김병지는 이후 진행된 승부차기에서도 활약하며 팀의 승부차기 4:1 승리를 이끈다.
[5]
구단명이 '현대 호랑이'었던 당시 김병지가 뛴 기간
[6]
당시 K리그는 포철, 일화, 현대, LG, 대우, 유공 등 총 6개 구단이 존재했고 각 팀당 30경기를 치렀다.
[7]
당시 K리그 리그컵 명칭으로 토너먼트가 아닌 리그제로 운영되었다.
[8]
기존 6개 구단에 버팔(전북현대의 옛 명칭) 팀이 추가되어 총 7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30경기를 치렀다.
[9]
기존 7개 구단에 전남 팀이 추가되어 총 8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28경기를 치렀다.
[10]
구단명이 '울산 현대 호랑이'었던 당시 김병지가 뛴 기간
[11]
기존 8개 구단에 수원 팀이 추가되어 총 9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32경기를 치렀다.
[12]
기존 9개 구단에 대전 팀이 추가되어 총 10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18경기를 치렀다.
[13]
97년 신설된 또 하나의 리그 컵으로 아디다스컵과 마찬가지로 리그제로 운영되었다.
[14]
덤으로 울산은 골키퍼 명가의 명성을 이어 갔다. 최인영, 김병지에 이어
서동명, 김영광, 김승규, 김용대, 조현우 등 대대로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울산의 골문을 지켜왔다.
[15]
한편 1980년대
렌스베르겐으로 대표되는 외국인 선수의 활약으로 좋은 성적을 거뒀던 거와는 반대로, 고재욱 감독이 지휘하던 1990년대 중후반
울산 현대는 이상하리만치 외국인 선수 영입을 안 하던 구단이었다. 이건 2000년대 들어서
파울링뇨의 영입으로 깨졌다.
[16]
당시에는
원정 다득점 원칙이 없어 양팀의 합계 스코어만 같으면 무조건 연장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었지만,다득점 원칙 규정이 있었다면 이 골이 그대로 다음 라운드 진출을 결정짓는 골이 되었을 것이다.
[17]
공교롭게도 이 날은 김병지 아내의 25번째 생일이었다.
[18]
기존 10개 구단에 광주 상무와 대구 팀이 추가되어 총 12개 팀이 참가했고, 각 팀당 44경기를 치렀다.
[19]
기존 12개 구단에 인천 팀이 추가되어 총 13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24경기를 치렀고 상위 4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20]
또한 포항 최초의 골키퍼 주장이기도 하다.
[21]
기존 13개 구단에 경남 팀이 추가되어 총 14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26경기를 치렀고 상위 4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22]
허리
디스크로 당시
고양시의 명지병원에서 응급 수술을 받을 정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다. 경기 도중 골킥이 하프라인조차 넘기지 못할 정도였으니...
[23]
그러나 2008 시즌 서울은 수원과 부산에게 각 1번씩만 패했을 뿐 충분히 우수한 시즌을 보냈고 김호준은 리그 24경기 23실점으로 나쁘지 않은 활약을 했다. 이 해 서울이 우승 못한 건
슈퍼매치까지 이겨놓고 선수들 멘탈관리 제대로 못하고 부산전에 터져서 리그 1위를 차지할 기회를 날리고 챔피언 결정전에서
데얀이 결정적인 찬스를 죄다 날려버려 홈에서 벌어진 결승 1차전에서 무승부에 그친 탓이다. 2008 시즌 서울의 무관은 그냥 멘탈 문제 이거 하나로 정리된다. 물론 베스트일레븐에 많았던 젊은 선수들이 결정적일 때나 화가 날 때 우왕좌왕하는 사이 주장이었던
이을용과 베테랑
김한윤이 이를 컨트롤해주기는커녕 같이 감정적으로 대응했던데다 또 다른 베테랑
이민성은 시즌 도중 좋지 못한 이유로 팀을 나갔다 보니 터진 게 당시 서울의 멘탈 문제인지라, 산전수전 다 겪은 김병지가 그라운드 안에 들어가 선수들의 멘탈을 잡아주고 팀의 중심이 됐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24]
기존 14개 구단에 강원 팀이 추가되어 총 15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28경기를 치렀고 상위 6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25]
기존 15개 구단에 상주 팀이 추가되어 총 16개 팀이 참가하여 각 팀당 기본 30경기를 치렀고 상위 6팀이 챔피언 결정전을 치렀다.
[26]
2011년을 마지막으로 리그컵 폐지
[27]
K리그-K리그 클래식으로 넘어간다.
[28]
노상래, 김태영이 그나마 그와 동갑인데, 둘 다 생일은 김병지보다 늦다.
[29]
2024년 4월 2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기록 복원 과정 중 1996시즌 챔피언결정전 2경기 출장이 인정되면서 기존 K리그 통산 706경기 출장에서 708경기 출장으로 기록이 늘어났다.
[30]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K리그에서는 FA컵 대회 기록을 제외한 경기수를 공식 통산 출전 기록으로 보고 있다. 현재 K리그 선수들의 통산 기록은 FA컵 기록을 포함하는 상황이라 아이러니한 부분)
[31]
이 사진 보면 알 수 있듯이 김병지뿐만 아니라
2014년
7월 20일에 은퇴한
최은성도 노장 골키퍼를 대표해서 나온다.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 최고령 선수 기록을 세운 콜롬비아의 파리드 몬드라곤보다도 나이가 많다는 것도 포인트.
[논란]
김병지가 월드컵에서 좋은 평가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그 기록에 관해서는 오랫동안 날조된 정보가 대한민국 내에서 널리 퍼졌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대회에서 허용한 유효 슈팅 57개나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유효 슈팅이 아니라 전체 슈팅이다. 또 다른 날조는 야신상 후보에 올라 2위에 랭크됐다는 것이다. 이 또한
조별리그 초반 2경기 기준으로 세이브 2위를 기록했던 것이 야신상 득표 2위로 크게 와전된 것이다. 대회가 월드컵인 만큼 다른 골키퍼들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며 이 중에는 야신상 수상자
파비앵 바르테즈와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
안도니 수비사레타 등의 월드 클래스들도 있었다. 당시 아시아 최고의 골키퍼로 평가를 받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모하메드 알데아예아도 이 대회에 출전해 김병지보다 더 많은 38개의 유효 슈팅 속에서 19개의 세이브와 7실점을 기록했다. 결정적으로 1998년 월드컵은 올스타 팀에 골키퍼를 2명 뽑았는데 바르테즈와 함께 선정된 선수는 김병지가 아니라 칠라베르트였다.
[33]
역대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3번째로 나온 세계구급 강팀이었다. 첫째는
요한 크루이프가 이끌던
1974 FIFA 월드컵 서독에서의 네덜란드, 2번째는
오렌지 삼총사를 필두로
UEFA 유로 1988에서 우승한 네덜란드, 그리고 바로 이 팀이다.
[34]
K리그의 정규 시즌을 모두 소화하긴 했으나
부상 기사가
몇 개
있던 것을 보면, 잔부상에 시달려 부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35]
대표적으로
루이 판할이 지휘한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에서의
네덜란드 축구 국가대표팀을 들 수 있으며, 판할은 3-4위전에서 23인 엔트리를 대회에서 모두 기용한 감독이 되었다.
[36]
물론 당시
이운재가
야신상을 노리고 있던건 감안해야 한다. 아무리 3,4위전이라도 엄연한 공식경기 라서, 이운재가 클린시트를 거두었다면 조금이나마 가능성은 있었다. 결론적으로 이운재는 수비 실수 탓이 크지만 대량 실점을 먹히며 물거품이 되었다.
[37]
2003년부터 2005년까지의 3년간 수원과 포항의 슈팅당 실점율을 비교하면 이운재가 가장 잘했던 시즌과 김병지가 가장 떨어지는 시즌의 실점율이 비슷한 수준이었다.
[38]
다만 훗날 둘은
유튜브 채널
슛 포 러브에서 재회했는데 사이는 나름 훈훈했다. 시간도 많이 지났고 어느 정도 화해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