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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00:22:25

근육조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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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육조선
등장인물 / 조선 ( 1부 · 2부) 설정 ( 입신체비) 개변된 역사 / 조선 웹툰

1. 개요2. 조선3. 일본4. 중국
4.1. 명4.2. 만주4.3. 대만
5. 태국6. 유럽
6.1. 스페인6.2. 영국6.3. 프랑스6.4. 이탈리아6.5. 러시아 제국 → 러시아 왕국/소련6.6. 독일
7. 중동8. 아프리카/오세아니아
8.1. 아프리카8.2. 폴리네시아8.3. 호주
9. 아메리카
9.1. 북미9.2. 중미9.3. 남미

1. 개요

대체역사물 웹소설 근육조선》에서 빙의자 주인공에 의해 변화된 역사.

작중 등장하는 역사는 1부, 2부, 근현대를 구분하여 서술 및 표기 바랍니다.

2.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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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일본

중국과 함께 작중 개변된 역사 속 또다른 피해자. 강성해진 조선의 집중적인 견제에 속수무책으로 당해온 것은 물론 근대에 들어서는 본래 역사의 한반도처럼 분열되는 사태를 겪는다. 하지만 나라 내부의 삽질로 패망한 중국과 달리, 1, 2부 공통적으로 일본에서 먼저 조선에 수작을 걸다가 반격으로 몰락하는 것 때문에 동정의 여지도 없고, 당시 막부정치 체계의 모습이 음습하고 치졸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독자들에게 오히려 비웃음을 사고 있다. 아예 작중에서도 이순신의 말에서 인용된 왜인들은 신의가 없다는 말이 잊을만 하면 수시로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나오기도 한다.헬창의 시선에서 육식금지령을 까는 것은 덤.

1부에서는 인삼으로 인해 국가가 분열된다. 일본에서 조선의 인삼을 너무 많이 요구하자 조선에서는 오히려 인삼 씨앗을 대규모로 넘겨 버리는데[1], 일본은 인삼이 자라기 어려운 토질과 기후여서 제대로 인삼을 키울 수 없었다. 게다가 인삼이 지력을 미친듯이 빨아먹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되고, 탐욕때문에 내분까지 벌어진 데다[2] 원 역사에도 있었던 쵸로쿠-칸쇼 기근까지 겹쳐버리자 일본은 극심한 식량난에 시달린다.

그러자 왜구들은 명과 조선에 나가 닥치는 대로 해적질을 하기 시작하고, 백제의 후손이라는 명목으로 전통적으로 조선과 일본 사이에서 중개역을 맡던 오우치 가문은 양국 사이에서 간을 보다가 조선의 분노를 산다. 그래서 조선은 붙잡힌 왜구들을 명으로 보내 일본의 실태를 고하고, 명 황제의 명을 따르는 형식으로 일본 본토를 공격해 토벌하는 경인왜변을 일으킨다. 일본은 병력과 무구의 질에서 압도적으로 밀려 토벌당하고, 주요 다이묘와 가문들이 몰락한다.[3] 패배 후 종전 협약으로 규슈 지방을 조선과 명에 할양하고, 미래를 알고 있는 수양대군의 수작으로 금광, 은광이 있는 사도가시마 섬도 일본 견제용 거점이라는 명목으로 빼앗긴다.

2부에서는 노골적으로 조선을 견제하고 영토를 회복해 무로마치 막부 시절로 돌아가려는 야욕을 드러낸다. 본래 역사에서 전국시대에서 두각을 드러내거나 아예 통일했던 신흥 세력들은 견제당하고, 기존 가문들은 뭉치기는커녕 서로의 이익다툼으로 인해 내부 통치도 엉망인 상황이다. 원래라면 일본 통일에 나설 오다 노부나가는 약소 군벌로 전락한 끝에 멸망했으며, 원래라면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두각을 나타냈을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관백은커녕 꼭두각시 신세가 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또한 주먹만한 떡을 먹는 것으로 위장 암살을 당해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일본 전국을 장악한 것은 다케다 신겐의 아들인 다케다 카츠요리다.

작중 일본은 조선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령인 규슈를 점령하려 하지만, 국제 정세에 어두워 조선의 국력에 대해서 오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규슈 침략은 유성룡에 의해 막히고, 이후 선제공격으로 보복공격을 예방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일으킨 을유왜변은 조선에 상륙하기만 했을 뿐 조선의 역공작에 낚여 처참히 패배했으며, 조선이 오히려 일본 원정에 나서면서 다케다 가문의 수장 등 쟁쟁한 인물이 모조리 조선 땅에서 목숨을 잃고 참패당한다.[4] 이후 일본 본토는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군에게 유린당하고 수많은 사람이 포로로 잡혀 조선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신세가 된다. 전후에는 다테 마사무네를 쇼군으로 한 막부정부가 들어서지만 이는 사실상 조선의 괴뢰정부 신세이며, 일본 출신 포로들은 군인은 북방 노예로, 보인[5]은 조선의 저임금 노동자로 일하게 된다.

1부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태평양을 내해로 둔 거대한 국가인 대한제국에 포위당한 형국이며, 조선과의 전쟁에서 2번이나 패배한 뒤 인구는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자원은 점점 고갈되어가 재기는커녕 점점 피폐해져 간다. 대한제국은 이런 일본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식민지화하려 하였으나, 성리학자 출신의 총리대신 사카모토 료마가 무진천명대전과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가까스로 큐슈를 돌려받는 이득을 거두고 자립을 위해 사해동도주의를 주장하며 개혁을 추구하였다. 그러다 료마의 사망 후 후임 총리대신인 이토 히로부미가 중국의 순나라와의 가격경쟁을 위해 자원과 사람을 쥐어짜는 바람에 공산주의가 득세하고,[6] 결국 교토 이남으로는 근왕파 사회주의 국가인 일본 볼셰비키 공화국이 건설되어 독립해 버린다. 그렇게 2번의 내전을 걸쳐 1963년에야 통일된다. 현대에는 2020년 올림픽 유치에 성공할 정도로 국력이 회복되었다고 한다.

그래도 작중 현대의 일본은 멕시코 포지션이기라도 하지, 오히려 원 역사보다 비참해진 건 현실의 라틴아메리카 꼴이 난 중국이다. 오히려 조선왕가와 결혼관계인 러시아는 캐나다급 대우를 받는데 성공한다.

한편 대마도는 큐슈보다 훨씬 순조롭게 별 문제 없이 조선 쪽으로 전향해 안정을 누렸으며, 작가 댓글에 따르면 현대에도 대한공화국에 소속된 채로 남았다고 한다.

4. 중국

개변된 역사의 가장 큰 피해자. 1부에선 수양대군이 일으킨 나비효과로 인해 요동의 통제를 상실했고 2부에서는 조선이 중국 분열을 꾀하는 전략을 취하자 시간이 흘러 중국의 근본을 구성하던 중화사상과 하나의 중국, 천명사상을 비롯한 문화적 사상적 구성요소들이 완전히 붕괴해버린다. 결국 명이 멸망한 이후엔 여러 나라로 갈라지면서 동아시아의 패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1부, 2부 모두 공통적으로 내부의 우환을 다스리지 못하고 부패한 관리들이 이를 악화시켜서 완전히 곯아 버리는 게 고질적인 단점으로 묘사된다.[7]

4.1.

사실 수양대군은 토목의 변을 어찌어찌 막아보려고 했으나, 조선이 조공으로 바친 시험생산용 보총 때문에 근거없는 자신감을 얻은 명이 예상보다 빠르게 몽골을 도발하면서 결국 역사보다 1년 일찍 토목의 변이 일어나게 된다. 조선은 전력 은폐 목적으로 보총의 초기 개발품을 진상하고 이 과정에서 얻은 제작 노하우로 기술 개선을 거쳐 후기 보총을 완성하는데, 이런 개발 노하우가 전무한 명에서는 강철이 아깝다고 청동으로 찍어내다 보니 실전에서 사용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게 만들었고, 비리로 인해 실사격 훈련은 커녕 사용방법 교육조차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엄청난 생산력으로 미친듯이 만들어 국경지대까지 여기저기 뿌려버리니 에센 타이시가 이게 화약무기라는 것을 깨닫고 대응훈련[8]을 하는 바람에, 결국 수양대군의 의도와는 반대로 보총 때문에 더 일찍 일어난 것이다.

토목의 변 이후 명은 요동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 대대적인 사민정책을 펼치고, 대신 요동에 살던 여진족은 모조리 몰아낸다. 그러나 정통제의 어설픈 배려 때문에 남방에서 농업은커녕 장사나 공업으로 먹고 살다가 억지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대규모 수해까지 입자 서유정이 어떻게든 붙잡아온 행정 체제가 붕괴해버린다. 게다가 서유정의 후임 관료와 조정의 환관들은 입을 모아 사태를 은폐하고 오히려 주민들을 죽여 여진이나 몽골 도적이라고 수급을 보낸다.[9] 결국 남은 주민들은 살아남기 위해 정말로 도적떼로 변해 가고, 일본에서 끌려온 칼질밖에 모르던 포로들까지 더해지자 요동은 완전히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아귀다툼의 생지옥이 돼 버린다. 세월이 흐른 2부 시점에서 요동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도덕이나 양심 따위는 알 바 아닌[10] 도적의 땅이 되어버렸다.

중국 본토에서는 관리들의 고질적인 부패로 인해 날이 지날수록 국가 체계가 썩어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겉으로는 상국 대우를 해 주지만 왕실은 물론 관료들까지 두들겨 맞는 돼지새끼라고 비하할 정도로 내심 업신여기고 있다. 그러나 부자가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넓은 영토와 인구수에서 나오는 힘은 여전하고,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중화질서의 상국이기 때문에 조선이 어느 정도 굽히고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래서 조선에서는 명을 내부에서 분열시키고 마음대로 조종하기 위해 친 조선파 관료들을 육성해 투입하는 한편 국력을 모아 결정적인 중화사상 체제의 전복 포인트를 노리고 있었다. 마침 황제인 만력제가 본래 역사와 같이 태업을 시작하고, 본 역사 이상으로 친 조선적 행보를 보이기 시작하며 명은 본격적 하락세를 걷게 된다. 만일 2부 시점에서 빙의자 유성룡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대기근의 영향으로 궁지에 몰린 조선이 중국 본토 점령이라는 악수를 둬서 원나라가 그러했듯 중국 문화에 그대로 흡수되는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빙의자 유성룡과 예언가 이지함 덕분에 이런 결말은 뒤바뀌게 된다.

결국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요동 도적이 결집한 국가인 대연, 이자성이 시안과 북경을 거점으로 세운 순, 쓰촨 지방을 기반으로 한 제, 현재의 저장/장시/푸젠/광둥에서 명맥을 유지한 남명으로 갈라졌다. 조선은 지원과 공작을 통해 이 세력들 간의 힘의 균형을 유지해 중국이 다시 통일하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남명 황실은 조선으로 망명해 춘천에 살림을 차린다.[11] 춘천으로 망명온 남명 황실은 수백 년이 지나자 이름만 대명국(명나라)이지 사실상 조선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었다.[12] 명나라의 옛 중국어는 황실 인물들이 옛 전통을 지키려 쓸데도 없는 걸 억지로 익히는 언어가 되었고, 동지사(冬至使)는 1년에 4번 관광객이 참여해서 즐기는 관광 코스가 되었으며, 황제도 애들에게 사인이나 해주는 이름만 남은 수준으로 전락했다. 사실 몇백 년간 춘천에서 살았으니 자연스럽게 현지인과 혼혈이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혈통을 지킨다고 근친혼만 고집했다간 유전적으로 문제 있는 자손들이 태어났을 것이니, 명 황실은 이름만 중국인일 뿐 유전적으로도 한국인이라 볼 수 있다.

본토의 남은 3개 국가들은 대한제국/일본/연방국과의 전쟁인 무신천명대전에서 패전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고, 전쟁 보상금을 갚을 방법이 없어 혼란이 계속되다 결국 7갈래로 찢어져 버린다. 내몽골 자치구는 몽골로,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투르키스탄으로, 요동과 만주는 대한 공화국으로 흡수되었으며, 티베트는 독립을 유지하고, 본토는 군사 독재 국가인 북부의 중화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남서부는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남동부는 중화민국으로 갈라진 상태다. 기존의 3개국 중 순나라는 채무의 2할을 변제하고 디폴트 선언, 제나라는 프랑스로 망명, 연나라는 별 언급이 없으나 요동을 기반으로 한 국가인 만큼 대한 공화국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중국 본토인들은 대한 공화국을 조선이라 부르며 멸시한다. 그래서 자신들끼리는 항상 티격태격하면서도, 대한 공화국과 관련된 건은 삼국이 협력한다. 대한 공화국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어서, 2차 세계대전에 끼어들기 전에 이들 3개국의 내전을 유도하여 배후지를 안정화시키고자 했다.

4.2. 만주

송화강 서쪽까지의 만주는 조선이 명에게서 넘겨받아 세력권에 둔다. 그리고 강한 자를 숭상하는 유목민의 특성과 장병부터 왕까지 입신체비로 강해진 조선의 특징이 맞물려 조선이 여진을 완전히 흡수해 버린다. 새로 섬기는 왕은 웬만한 부족장 따위는 뺨칠 정도로 힘센 장수에, 입조 후 새로 할 일이라고는 아직 조선에 적대적인 부족들을 '평소 하던 대로 털어버려'라는 신나는 것이고, 조선에서는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조선은 모르는 일이니까 명나라에서 말 안 나오게 적당히 눈치 보면서 놀아라'는 식으로 대놓고 뒷배를 봐주겠다고 선언했다. 거기에 부족의 후계자들을 데려다 교육시키고 관직도 내려주고, 물품 교역 때는 좀 떼먹긴 하지만 몇 배 이상을 후려친 명 시절보다 훨씬 양심적으로 값을 쳐 준다.[13] 이러니 여진 입장에서는 입조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셈이다. 이 과정에서 아이신기오로 충샨이 조선에 귀부하자 후일 나타날 청나라의 싹은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누르하치는 아예 태어나지도 못했으며, 그 먼 친척뻘 되는 사람은 호주에서 광산을 운영하며 금을 캐고 있다. 만일 태어났어도, 이 광산주가 그렇듯 여진족 조상을 둔 조선인으로 살아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 귀부할 당시에는 유목민족 특유의 수렵과 약탈 문화를 이어왔고 개척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는데, 홍일동이 개척 과정에서 따르는 노동이 아니라 강해지기 위한 '훈련'으로 만들어버리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조선의 북방 개척에 큰 보탬이 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선과 동화되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는 아예 반쯤 농경민족화 되었다. 쌀이 잘 자라지 않는 북방이다 보니 밀을 주식으로 삼고 있으며, 서양처럼 밀을 빻기 위한 풍차가 생기고 자연스럽게 풍차 주변에 마을을 형성해서 살고 있다.[14] 그래서 조선인처럼 체격과 장비는 좋지만 유목 민족 특유의 기마술과 전투 능력은 사라졌다.[15]

2부 기준으로 흔히 북인(북쪽에 사는 사람)이라 불리며, 완전히 조선에 동화되어 자신들을 고구려의 후손이라 여기는 좀 거친 조선인이 되었다. 고구려를 첫 조상, 금나라를 중간 조상이라고까지 말하는 상황. 정충렬의 가문 회령 정씨는 아예 조선의 일익으로 자리를 굳혔고 나머지 가문들은 사참을 운영하거나 토관 등으로 지내면서 중앙으로 진출할 기회를 엿보고 있다. 호전적인 성격은 어디로 가질 않아서 내수린에 환장하는데, 채광하던 광부들이 교체 시기가 되어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한 일이 내수린장 건설일 정도다. 그런데 내수린을 너무 거칠게 하다 보니 부상률이 높아 낙법을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낙법을 가르치기 전에는 부상률이 3할(30%)이었는데, 그나마 낙법을 가르친 덕분에 1할(10%)로 줄었다고 한다.

4.3. 대만

조선의 이간책으로 일본 왜구들이 남경 근처까지 약탈을 나가게 되자, 골치를 썩던 명에서는 조선의 해군으로 왜구를 소탕하려 한다. 원래 명의 제안은 조선 수군을 항주에 주둔시키는 것이었으나, 해외 진출을 모색하던 조선에서는 이를 핑계로[16] 이 참에 주둔 및 개척지로서 대만, 당시 이름으로는 이주(夷洲)를 양도받게 된다. 이렇게 대만은 "대양도"[17]라는 이름을 얻고, 조선에서는 열대작물 재배지 및 해군 기지로 사용하게 된다. 초기에는 대만 원주민들과 마찰이 많았다. 대만 원주민들 중 고산족은 타 부족의 목을 따 오면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데, 이 풍습 때문에 개척을 위해 찾아온 조선세력과 충돌이 일어났으며 그 과정에서 수풀에서 습격당해 목이 잘린 조선군이 많았던 것. 그러나 홍윤성의 계책으로 알몸에 녹색 칠을 하는 일종의 위장 전술을 도입하면서 적대적인 고산족을 무력으로 진압해 복속시켰다.

이후 시간이 지나 대양도의 조선군과 현지인 여성과의 결혼 등으로 점차 조선과 동화되면서 구르카처럼 운영되는 대만 원주민들을 징병하는 임해도감이라는 특수부대가 운용되기도 한다. 조선군 점령 지역에서는 원주민들이 사람 머리를 베어 오는 성인식을 할 수 없으니 대신 힘을 증명하기 위해 입신체비 도구를 훔쳐서 들어올리는 것으로 변질[18]되어 소소한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걸 본 도감군 정범수가 '힘을 증명하는 것이 성인식 조건이라면, 아예 훈련도감처럼 빡시게 굴리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창설한 것. 이것마저도 처음에는 습성이 남아 초모에 응한 자가 넘쳐났는데, 참파에 용병으로 나설 때 전쟁의 무서움을 직접 체험하며 과열된 열기를 빼내게 된다.

그 밖에도 유황 작업 기지로 쓰이기도 한다. 작업자는 보통 일본 왜구였다가 체포당한 이들. 도망쳐 봐야 임해도감에게 잡히고, 바다로 나와 봐야 고향은 하도 멀기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19]

5. 태국

2부 본편 완결 직전에 아유타야 왕국으로 등장하였다. 당시 군주인 나레수안[20] 크라 운하를 건설하기 위해 조선측에 유성룡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기에 당시 임금인 이준이 어명을 내려 유성룡이 3개월간 현지에서 운하 설계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 파견으로 인해 현지에서 말라리아에 감염되어 죽다 살아났고, 간이 크게 손상되어 시한부 인생을 살게 된다. 이는 이준의 큰 실책이 될 수 있었지만 유성룡이 이에 대해 아무런 비난을 하지 않아 덮고 넘어갔고, 이 사례를 들어 60세가 넘는 관료는 해외 파견을 나가지 않게 법으로 명시하게 되었다.[21]

이 때 설계된 크라 운하는 건설에 성공하였는지 2부 에필로그에서 대한 공화국이 나치 독일을 응징하기 위한 병력 및 물자 수송 루트를 검토할 때 크라 운하를 통과하는 루트가 언급되었다.

6. 유럽

1부 당시엔 유럽은 로마에 사절단이 방문한 것 이외엔 조선과 별다른 접촉이 없었고 중동과 교류가 더 많았으며 때문에 한동안 오스만 제국에 귀한 보약을 팔아서 이득을 보는 이교도 국가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1부말에 직접 찾아가고 오스만을 털어버리면서 그점은 많이 희석되었고 2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동방의 강대국 정도의 이미지가 된다. 로마에서 조선으로 건너 온 기술자들은 청계천의 치수나 강화도의 성당을 비롯해 북방지대에 자라는 밀을 이용한 제빵 기술 등, 다양한 기술과 문화를 조선에 전래했으며 일부 인원은 귀국하지 않고 완전히 정착하기도 했다.

2부에서 서반아국, 즉 스페인이 본격적으로 해상 활동에 나서면서 유럽, 특히 스페인과의 교류가 부각되기 시작한다. 2부 초기 당시엔 스페인 상인들은 해적으로 돌변한다거나 서로 간의 문화, 교육 차이로 인한 소규모 충돌이 일어나긴 했어도 양국이 서로를 경계하느라 큰 문제는 일어나진 않았다. 그러나 사소한 오해로 인해 스페인의 함대가 명나라 남경을 침공하는 경진만란이 일어나자 조선에서 스페인은 물론 유럽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었고, 조선은 스페인과의 교역을 중단하다시피 하는 무역 보복을 가해 스페인 역시 상당한 피해를 입는다. 이후 스페인은 조선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사절단을 보내 사과하고 일본과의 전쟁에서도 아낌없이 협조하여 여론을 회복한 후 교역을 재개하였으며, 유성룡이 포함된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며 본격적인 문화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유럽 각 국은 조선식으로 음차되어 표기되는데 스페인 → 서반아, 포르투갈 → 포도아, 잉글랜드 → 영길리, 프랑스 → 불란서 등으로 불리고 있다.[22]

6.1. 스페인

경진만란 건에 대해 조선측과 화해하면서 조선에서 사절단을 파견하고 동맹을 체결하였다.

칼레 해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성룡이 포함된 조선의 사절단을 맞이하였는데, 이 때 조선에게서 구매한 비격진천뢰 덕분에 칼레 해전에서 대패를 면한다. 무적함대가 화공에 당한 것까지는 같으나, 해적 출신인 영국 해군이 노획을 위해 함선에 접근하자 근접전 특화 병기인 비격진천뢰가 빛을 발해 영국 해군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부하들을 먼저 보내 살아남았지만, 존 호킨스는 욕심 때문에 먼저 접근하다 폭사한다. 결국 칼레 해전은 스페인과 영국 모두 큰 손해를 입어 공멸하는 상황으로 마무리된다.[23]

영국의 해군 세력이 원 역사보다 크게 위축되었고,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조선령 호주와의 무역에 맛들려 대서양이 아닌 인도양에서 바르바리 해적을 털고 있는 바람에 원 역사보다 아메리카 항로가 안전해졌다. 덕분에 스페인은 물론 다른 국가들 또한 식민지를 만들어 빠르게 아메리카를 개척하고 있으며,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는 동쪽에서 온 여행자라 불리고 있다. 다만 원래 유럽에서 하던 막무가내식 개척 방식은 그대로인지라, 수틀리면 자신들을 학살하는 자들로 원망과 두려움을 사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위생 개념이 발달한 조선과 교류하는 상황에서도 그딴 거 신경 안 쓰고 있는지라 온갖 질병을 옮기고 있어 동쪽 지역의 아메리카 원주민들 중 세스페데스 신부를 따르는 자들은 스페인 개척단을 피해 조선의 영역으로 이동을 개시하였다. 스페인에 대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평가는 최악 그 자체라 스페인을 막기 위한 요새를 건설한다는 말에 일가족 모두가 자발적으로 나서서 공사 현장에 나와 열성적으로 일하는 바람에 완공 예정일이 1년이나 단축될 정도.

조선측에서 동맹 10주년을 기념하는 승자기 100세트를 제작하여 펠리페 2세에게 선물하였는데,[24] 이는 승자기를 더 비싸게 팔아먹으려는 명품화 전략의 일환으로 펠리페 2세를 통해 유럽 전역의 군주와 명사들에게 뿌리기 위해서였다.[25] 하지만 명품화 전략이 지나치게 잘 먹혀서 유성룡의 예상보다 4배의 주문량이 몰려들기도 하였다.

아메리카 대륙 영토 협정의 모호한 조항을 이용한 조선측과 조선의 지원을 받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탐험대가 전멸당하는 사태가 벌어진 뒤 조선측에 항의하려 하였지만, 펠리페 2세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펠리페 3세와 그의 측근들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연합하여 조선측을 압박하기보다는 타협하는 쪽을 택해서 조선에서 개척한 영토를 경계로 협정을 다시 맺게 되었다.[26] 이후 아메리카에 세운 식민지는 원 역사대로 영국에게 빼앗겼는지 아메리카 대륙 동부에 영국계 국가인 아메리카가 건국되었다고 언급되었다.

소설에 직접은 안 나오지만 작가 해설로는 콜럼버스는 향신료가 아니라 인삼을 찾아서 서쪽으로 항해했다고 한다. 덕분에 원 역사의 일본의 별명 지팡구는 서인도 제도가 받았다. 이후 스페인 측 관계자들이 토키치로(히데요시)를 격파한 해전을 관전하고, 왜병 포로들을 분류해 함대에 가득 실어다 지팡구 제도에다 팔아넘겼기 때문에 지팡구 제도에 실제로 일본인이 가게 된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했다.

6.2. 영국

칼레 해전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전함의 40%가 박살 나는 피로스의 승리를 거둔 끝에, 이전처럼 스페인의 자리를 빼앗는 해상대국이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스페인이 보복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상황이었지만, 드레이크 제독이 우연치 않게 조선의 호주 개척과 목화 산업의 잠재력에 대해 알게 되면서 '호주에 구교도 이주와 바르바리 해적 판매로 스페인과의 관계를 개선시키고, 목화 무역으로 재정을 확보'하는 이익 사이클을 마련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영국의 호주 개발이 몇 세기는 앞당겨서 이루어졌다. 더불어 영국 해양세력들이 대서양에서 호주로 돈 벌러 나가버린 덕분에 여타 유럽 국가들이 미 대륙으로 진출하는 게 수월해져서 미 대륙 개척 또한 앞당겨졌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조선뿐만 아닌 전세계 의학에 엄청난 기여를 하였는데, 이주시킨 구교도 중에 우두 감염자가 있었던 것. 이것이 아메리카 대륙 개척을 위해 천연두 치료법을 찾던 유성룡의 눈에 띄었고, 이를 계기로 허준을 비롯한 조선의 의원들이 종두법을 찾아내어 천연두를 몰아낼 발판을 마련하였다.

면직물 무역이 본격화되면서 호주에서 사들인 면직물을 유럽지역에 팔아 상당한 수익을 거두고 있으며, 드레이크는 바르바리 해적 포획을 후임에게 인계하고 면직물 및 호주로 가는 이민자들을 수송하는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후임인 캐번디시가 메카를 약탈하고 순례객들을 잡아가는 대형사고를 쳐서 이를 수습하기 위해 출동한 이순신에게 협력하기도 하였다.

이후 원 역사보다 축소된 대영제국을 건립하였고,[27]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패배하는 등 나치 독일에게 탈탈 털리다[28] 대한 공화국과 미국(迷國) + 아메리카 연합의 참전으로[29] 간신히 승전국이 되었다. 세계에 미친 영향력이 원 역사보다 축소된 여파로 야드파운드법은 사실상 사장되었고 전 세계가 미터법을 채용한 것은 덤.

대영제국이 건립된 이후에는 조선과의 자존심 경쟁이 벌어졌는지 근대 시점에서 전차 개발에 참여한 영국인 기술자가 대한제국을 은근슬쩍 디스하는 발언을 하는 등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였다. 현대 시점에서 음모론에 가까운 유성룡 현대인설을 퍼뜨린 것도 영국이라는 모양. 그게 사실이긴 한데 믿는 사람이 거의 없는 개소리 취급 당하는 건 덤.[30] 하지만 조지 5세가 대한제국의 황태자와 자신의 딸의 결혼을 제의했다고 언급된 걸 봐선 마냥 견제만 한 건 아닌 듯하다.

6.3. 프랑스

유럽을 순방하던 유성룡 일행이 스페인 다음으로 방문한 국가. 이 시기에는 앙리 3세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앙리 3세는 당대 프랑스인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는 왕이었지만 조선에서 볼 때는 국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탐욕스러워 사치를 일삼으며, 불효하기까지 한 최악의 군주였다. 그래서 이를 본 사절단은 만도 못한 혼군이라는, 유교권 국가에서 군주에게 내릴 수 있는 최악의 평가를 내렸다.

내전에서 앙리 3세의 군대가 패배하고 파리 시민들이 봉기하여 조선 사절단이 다급히 피신하였고, 이후 교황 식스토 5세의 요청으로 다시 한번 프랑스에 방문하였다. 앙리 3세의 뒤를 이은 앙리 4세는 자신들 때문에 조선 사절단이 피신했다는 오점을 만회하기 위해 사절단이 재방문하였을 때 앙리 3세가 내주기로 했던 페르슈 지방의 말에다 육우와 젖소[31]를 추가로 얹어주었다.

앙리 3세가 기름기 있는 음식을 자꾸 요청하는 것 때문에 화가 난 유성룡과 유운룡이 작정하고 기름기로 떡칠된 조선식 음식[32], 프랑스어로 조선 퀴진을 만들어준 일이 있는데, 이후 프랑스 음식은 조선 퀴진의 영향을 받아 기름으로 떡칠된 음식이 되어버렸다. 원 역사에서의 미국의 식문화와 비만율이 프랑스로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기준으로 평균 수명 순위가 40위권 밖이고, 정부에서는 기름기 적은 음식을 먹이기 위해 애를 쓰지만 역부족인 상황이다. 그나마 낭트 일대는 유성룡 사신 일행이 남긴 정통 조선 퀴진의 영향을 받아서[33] 깔끔하고 정갈한 음식을 즐겨 먹어서 평균 수명이 높다. 유성룡이 다녀간 직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는지, 2부에서 드레이크가 기름 범벅의 미친 요리라고 씹고영국인에게 욕먹는 요리 외전에 등장한 히틀러가 프랑스 놈들은 매일 비계를 처먹는다며 까는 것은 덤.

조선이 새 도량형을 도입하려 할 때, 부르봉 왕조에서 공화주의에 압박할 목적으로 작업에 적극 협력하여 미터법을 정착시키는 데 성공한다.

6.4. 이탈리아

1부에서 조선의 왕족들이 이탈리아에 방문하며, 그리고 반대로 이탈리아 예술가들도 조선에 방문하며 입신체비가 이탈리아 역사로 스며든다. 그래서 다비드상 같은 많은 예술작품들이 근육에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입신체비를 체계적으로 배워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예술가 가문을 중심으로 '그런 게 있다더라' 정도로만 전해지고 있었고, 그러다 누군가 무거운 물건을 무리해 들다 다치는 일이 생겨 사장되었다.

2부 기준으로 원 역사보다 펠리페 2세를 기반으로 하는 예수회의 영향력이 더 세지고, 조선이 유럽에 미치는 영향이 더 커지면서 제사에 대한 기준을 모든 교회 학자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제사는 우상숭배가 아닌 조상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방식이다.' 라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면서 가톨릭 방식의 제사[34]를 진행하는 방식으로 가톨릭의 포교가 가능해졌다. 추가로 실제 역사의 서학을 배운 학자들과 같이[35] 가톨릭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나왔고, 교황청에서는 선교사를 파견해 이들에게 세례를 내리려 한다. 그러나 근육으로 단련된 선비들은 스승인 신부들이 자신보다 근력이 약한 걸 받아들이질 못해 이들을 입신체비로 굴렸고, 마침 작중에서 입신체비로 대성한 신부인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주요 조연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가톨릭에도 입신체비가 전파되기 시작한다.

주인공 유성룡인 이를 두고 '입신체비를 하는 신부가 더 오래 살면서 고위직에 오를 테니 장기적으로는 가톨릭의 메타 자체가 입신체비로 변할 것'이라고 예측했고, 실제로 현대쯤 되면 가톨릭 사제들은 완전히 근육질이 된다. 가톨릭 신부들은 3대운동 400kg이 기본 소양이 되고, 근육을 드러내고 화보를 찍으며, 수녀들조차 근육을 길러 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 정권과의 전쟁에서 포탄을 옮기는 등의 활약을 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도 원 역사에서는 동로마 멸망 이후 제조법이 소실되며 보라색 염료를 구하지 못해 성직자들의 복식이 붉은색으로 변경되었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조선과의 꾸준한 무역으로 염료를 사들여 보라색 복식을 유지하고 있는 중이라고 언급되었다.

이탈리아 본국은 그 외 특별한 언급이 없다. 20세기 제 2차 대전 때 무솔리니가 집권하며 아프리카 식민지를 탐내 솔로몬 제국을 침공했으나 60kg짜리 기관총을 혼자 들고 쏘는 마사이 족의 참전으로 밀려났다. 그리고 교황청이 전쟁에 반대하자 교황청을 군대로 포위, 당시 교황인 비오 12세를 비롯한 중요 직책들이 감금당했으나, 이탈리아 전역의 신부와 수녀들이 전쟁에 반대하며 저항군에 합류하게 된다. 현재는 이탈리아 14개소 전쟁성지 순례길 같은 게 있을 정도.

6.5. 러시아 제국 → 러시아 왕국/소련

원 역사대로 시베리아에 진출하였으나, 연해주 지역은 조선이 꽉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캄차카 지방 개발권과 경원항( 블라디보스토크) 지역의 사용권을 교환하는 거래로 우호 관계를 맺는다. 로마노프 왕가와 대한제국 황가 간 혼인도 이루어져, 타티아나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가 조선의 세자비로 들어왔다고 한다.[36]

러시아 제국은 원래 역사에서 러일전쟁 패배, 과도한 공업화와 수출로 인한 농업 정책 실패, 1차 대전으로 인한 재정 불안정화 때문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으나, 근육조선 세계관에서 일본은 조선과의 전쟁에서 진 이후 빌빌거리는 상황이라 러일전쟁 자체가 일어나지 않고 조선에서 엄청난 식량을 수입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다소 해결되었다. 하지만 부패한 귀족들 때문에 식량 대신 사치품의 수입량이 늘어나 식량 부족 현상이 재발된 상황에서 니콜라이 2세가 자존심 때문에 시베리아 횡단철도에 엄청난 투자를 하면서 생긴 적자가 결정타가 되어 혁명이 일어나 버리고, 적백내전에서 패배한 황실은 시베리아 동부로 피난와 러시아 왕국을 세운다.[37] 원래 대한제국과 우호 관계였던 국가이고 동시베리아 지역은 조선의 영향이 매우 큰 지역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로, 대한제국이 아니었다면 로마노프 황가는 분노한 시베리아 원주민들에게 맞아죽었을 거라고 한다. 또한 현대에도 대부분의 거주민이 시베리아 원주민이거나 대한 공화국 출신이라는 듯하다.

소련의 경우 구체제 황실을 옹호하는 대한제국을 응징하고 싶어했으나, 국력의 한계로 인해 실패했다고 한다.[38]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벌인 카틴 학살이 1947년에 발견되자, 세계 최강국 중 하나이자 인권 문제로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이력이 있는 대한 공화국의 눈치를 보느라 공산주의 세력을 크게 확대하지는 못했다.[39] 특히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이 분열되어 3개국 중 1개국만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고, 일본은 원역사 한국처럼 절반만 공산주의 분단국가였다가 그나마도 1963년에 자유진영 측이 통일하였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서의 세력도 크지 않은 상황. 덕분에 냉전이 원 역사처럼 크게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느라 체제 모순이 덜 자극된 모양인지 소련이 해체되지 않고 현대까지 남아있다.

러시아 왕국에서는 외교부장관 아나스타샤가 슈비브지크(작은 악마)라는 별명대로 상대(특히 소련)를 외교적으로 완전 농락하는 수준에 이른 모양. 외전의 댓글에 따르면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복선화는 대한이 해 줬으니 우리쪽 복선화는 소련이 해 달라라고 요구했고, 소련에서는 이에 당연히 반대하려 했으나 아나스타샤가 카틴 학살을 들먹이자 바로 알겠다고 꼬리를 내린 모양이다(...). 이후 대한 공화국에 진 막대한 채무[40]를 갚기 위해 왕가를 따라 이주한 해군의 함선들을 어선으로 개장하고[41] 베링해 어업에 뛰어들었으며 현대 시점에서도 어업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듯하다. 현대 시점에서는 구 대한제국배 스포츠 대회에 러시아가 참가하는 걸 보아 사실상 대한 연방의 일부로 취급되는 듯하다.

6.6. 독일

1부 에필로그에서 언급된 바로는 원 역사대로 히틀러가 독일을 장악한 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원 역사보다 국력이 축소되고 미합중국이 없어 지원을 받지 못한 영국과 소련을 상대로 영국 본토 항공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승리하는 등 승승장구하던 중, T-4 프로그램 등의 학살이 대한 공화국에 알려지면서[42] 분노한 대한 공화국의 참전으로[43][44][45]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 패배 했다고 한다. 화력덕후인 대한 공화국이 상대이다 보니 원 역사의 유럽 전선에서 88mm포의 우수한 장갑 관통력과 두터운 장갑으로 상당한 전공을 쌓은 티거 전차가 대한 공화국의 240mm 자주포 세례와 130mm포를 장착한 전차에 밀려 시가전만 벌이다 털리는 상황.[46] 히틀러 본인은 벙커에 숨어있다 생포당할 시 근육당하는 건 뻔한 상황이라[47] 자살하려 했는데 권총도 독약도 수중에 없어 수류탄으로 자폭했다고 한다.[48]

2부에서는 조선 사절단이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을 방문하는 정도만 언급되다가 에필로그 시점에서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역사가 드러났는데, 방어전에 일가견이 있는 그 발터 모델조차도 3개월을 버티는 게 고작이었는데, 이때 상대한 전력은 선전포고 후 급한 대로 투입된 사실상 선발대에 불과한 전력이였던지라 대한 공화국이 보급로 확보 뒤 본격적으로 물량을 쏟아붓자 나치 독일은 문자 그대로 근육당해버렸다. 티거 2는 물론이고 원 역사보다 여력이 넘쳐서 개발에 성공한 E-75 E-100을 투입하고도 대전차무기로 개량된 작렬신기전부터 타국의 중전차(重戰車)를 중형전차(中戰車) 급으로 만들 정도로 우월한 화력과 장갑을 가진 41식 중전차를 소수정예도 아니고 물량전으로 쏟아붓는 대한 공화국의 화력 앞에 나치 독일이 녹아내려버린 것.

이후 원 역사에서처럼 서독, 동독으로 분단되었다가 카틴 학살이 폭로되어 행여라도 대한 공화국의 공격을 받을까 봐 겁먹은 스탈린[49]이 은둔하면서 동독 지역을 반환하였다고 한다.

7. 중동

본래 역사대로라면 중국을 통해 간접적으로 서적 자료로만 정보를 접할 땅에 불과했겠지만, 각종 선박 제조 기술의 발달과 효령대군의 활동을 계기로 시작한 조선의 대외진출로 인해 교류를 시작하게 된다.

조선 사절단과 접촉한 오스만 제국은 본격적으로 시작한 조선과의 홍삼 중개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면서 유럽 세력을 원래보다 강하게 압박하고, 이런 자신의 행적을 숨기기 위해 조선에 가 있는 피렌체나 오스만 제국 출신 사람들에게 가짜 편지를 보낸다. 이로 인해 유럽에서 조선의 여론이 바닥까지 내려앉았지만 조선은 이를 모르는 상황. 그러나 한명회에게 이 위조가 들통나자 조선이 오스만과 적대 관계인 티무르 제국의 백양 왕조에 군수품을 지원하였다. 이때의 백양 왕조의 왕은 실제 역사에서도 메흐메트에게 큰 피해를 입힌 우준 하산이었고, 조선에서 받은 정보와 대포를 활용해 더 큰 피해를 주는 데 성공했다. 또한 강화 때에 슬쩍 인도인을 보여 줘서 화포를 맘루크 왕조에서 지원한 척 거짓 정보를 흘리고, 맘루크 왕조에 홍삼을 판매해 상잔을 유도하면서 오스만과 맘루크 항구에 대한 직접 공격을 시작하는 등 다양한 보복을 가한다. 이 때문에 술탄 메흐메트는 화병을 얻어 원래보다 일찍 사망한다. 참고로 오스만 제국 사람들도 이에 동조하는데, 아랍어 편지를 위조해서 가짜를 보냈다는 게 이유. 아랍권에서 아랍어란 쿠란에서 알라의 말씀을 기록한 성스러운 글자인데 이걸 가지고 장난을 쳤으니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었고, 조선에 있던 오스만 제국 사람들은 군주라는 작자가 역적도 안 할 사기를 치니 충성할 이유가 없다며 조선에 아예 귀부한다.

2부 시점에서는 조선과 직접적인 관계는 맺고 있지 않으나,[50] 여전히 바르바리 해적이 해상을 돌아다니며 영국, 스페인은 물론 솔로몬 제국과도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조선 쪽은 특별히 건드리지 않고 있고, 솔로몬 제국과는 '해상전은 바르바리가, 육상전은 솔로몬이 이기는' 상호 카운터 관계. 조선이 호주 개척에 본격적으로 나서면서 합류한 몽골 탐험대의 의뢰를 받은 드레이크 해적선단에게 가끔 낙타와 말을 털리고 노예 무역으로 먹고 살던 해적들이 호주의 목화밭으로 끌려가는 소소한(?)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51]

아프리카 쪽에 독립 세력인 솔로몬 제국이 건국되었으니 유럽 열강의 식민지배가 위축되었고, 덕분에 현대 이스라엘부터 시작해서 유럽 열강이 아프리카~중동 쪽에 일으킨 부작용들이 나타나지 않은 본래 역사보다 온건하고 건설적인 역사가 전개되는 것으로 보인다.

8. 아프리카/오세아니아

조선의 근육적 나비효과의 수혜를 받은 지역. 본래 역사에서는 제국주의 열강의 가장 큰 피해자였지만, 근육조선의 역사에서 조선은 유교 사상을 바탕에 둔 온건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해당 지역 원주 세력들도 큰 충돌이나 유혈사태 없이 조선의 영향권에 놓이게 된다.

8.1. 아프리카

1부에서 오스만 제국의 배신으로 스페인과 직접 교류할 방법을 찾던 조선 함대가 퉁아니 부족, 현대의 마사이족과 만나면서 처음으로 등장한다.[52] 조선 함대는 기본적으로 변질되기 전의 유교적 정신을 밑바탕에 두고 있는데다 왕족까지 끼어 있는 입장이다 보니 이들과 특별히 적대하지 않았고, 마사이족은 탐검사 일행의 엄청난 근육과 보총을 보고 전설 속의 영웅 은가이가 보낸 위대한 전사들이라 여겨 '조선인들은 마사이인의 근육적 가능성을 탐내고, 마사이인들은 조선인들의 엄청난 근육을 탐내는' 교류의 장이 벌어진다. 덕분에 마사이인들 중 일부 청년이 조선까지 따라와 조선의 단련법과 학문, 모기 퇴치법과 농경 등에 대해서 배운다. 이들 중 우두머리 역할을 하는 레무아니라는 청년은 중국과 조선의 역사를 배우면서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간 마사이족이 흉노나 말갈과 다름없이 생활했다는 걸 깨닫고 고민하게 된다. 그러자 수양대군은 삼국지를 인용해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래 이어진 국가인 에티오피아의 존재를 알려주었고, 삼국지에서 조조가 그랬듯이 에티오피아를 천자로 옹립해 명분을 챙기라는 조언을 해준다.[53] 이 청년들은 후일 귀국해서 마사이인 국가인 마사이국을 세우고, 후일 북상하여 수양대군이 말했던 에티오피아 솔로몬 왕조와 접촉하여 동맹을 맺는다. 조선의 입신체비를 전수받아 굴강해진 마사이족은 병력의 부재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솔로몬 왕조에 큰 도움이 되었으며 후일 건국될 솔로몬 제국을 이루는 핵심 세력 중 하나가 된다.

2부 시점에서는 솔로몬 제국이 건국된 상태이며, 조선과 정기적으로 교류를 하고 있다. 유럽과는 종종 교류하기는 하지만 당시 유럽의 선원들은 비위생, 무식의 극치를 달렸고, 그런 더럽고 무식한 놈들이 자기들을 깔보니 유럽에 대한 감정은 별로 좋지 않은 상태다.[54] 단, 유럽 쪽에서도 솔로몬 제국을 깔볼지언정 무시하지는 않는데, 조선에서 전수받은 입신체비로 단련된 병사들의 압도적인 근접 전투력에다 근력을 바탕으로 던지는 투창의 위력과 조선에서 수입한 화기를 운용해 소규모 전투에서는 원거리 전투력도 꿀리지 않는 상황인지라, 작중에서 벌어진 스페인과의 국지전에서 원거리 사격전 및 근접전에서 스페인 측을 손쉽게 털어버릴 정도의 무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55]

조선과의 교류 및 중개무역을 통해 나라가 번창하면서 인구가 늘어나자 악명 높은 수면병 등 여러 질병이 다시 퍼지고 있는 상황이고, 아프리카의 거대한 야생동물 때문에 농사도 여의치 않다. 이 때문에 원래는 조선과 함께 호주 쪽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바르바리 해적의 압박으로 원양 항해 능력이 그리 발달하지 못해 손가락만 빨고 있는 상황. 대신 근접전에서는 입신체비 덕분에 바르바리 해적을 압도하고 있는, 어찌 보면 상호 카운터 관계. 실제로 드레이크 선단에게 잡혀 노예로 팔린 바르바리 해적들이 자신들이 팔려온 곳이 마사이족의 영역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저항을 포기하고 살려달라고 싹싹 빌 정도.

스페인과의 국지전에서 노획한 선박을 조선의 도움을 받아 역설계하여 원양항해용 선박 건조의 노하우를 습득하고 포로로 잡힌 스페인 선원들에게 항해술을 전수받은 뒤 아프리카에서 호주로 흐르는 해류를 발견하여 호주에 진출하였으며, 대규모 목화농장을 운영하며 영국과의 면직물 무역으로 상당한 이익을 거두게 되었다.[56] 이 과정에서 백인(영국에서 노예로 부리라며 보내진 범죄자들) + 중동인(바르바리 해적) + 동양인(일본인 전쟁포로)을 목화농장의 노예로 부리며 원 역사와는 상반된 모습을 보인 것은 덤.[57]

구성군과 한명회가 발견하여 극락도라고 이름지은 모리셔스는 한동안 조선이 중간 기착지로 사용했으나, 더럽기 짝이 없는 스페인 선원들이 들락날락하면서 황열병 말라리아가 퍼지자 조선에서 이곳을 포기했다. 그리고 조선인들이 만들어 놓은 인프라는 해적들이 사용하다가 이순신에게 탈탈 털렸다.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여러 악재들을 극복했는지, 속국인 이집트를 포함해 아프리카 동부 전역을 지배하는 강대국이 된다. 세계 1차대전 당시에는 이탈리아가 솔로몬 연방국의 영토를 노려 공격했지만, 리비아를 거쳐 수단 남부까지 진군했다가 60kg에 달하는 14.5mm 구경의 기관총을 혼자 짊어지고 쏘는 마사이족의 참전으로 순식간에 밀려나게 된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독일과 정면으로 붙는 것은 국력의 한계로 불가하였지만 추축국인 이탈리아를 상대로 선전하였으며,[58] 수에즈 운하를 개방하여 대한 공화국을 지원해주었다. 기원전 970년을 원년으로 잡는 독자적 달력[59]을 사용하고, 조선에 유학생도 보내고 있다.

8.2. 폴리네시아

해적들에게 당해 표류하던 한명회가 뉴기니 섬에 당도하면서 이들과의 교류가 시작된다. 처음에는 적대적이었으나 조선인 중 가장 몸집이 작았던 한명회가 입신체비로 단련한 근육을 통해 부족 최고의 전사를 1 대 1로 제압하자, 가장 작은 사람이 저 정도라면 도저히 이길 가망이 없다고 포기해 항복하면서 우호관계가 되었다. 이 부족은 천자총통을 선물로 받았는데, 이걸 녹여서 무기로 만들어 다른 부족을 약탈하자 공공의 적으로 찍혀 멸망 직전에 놓여 있었다. 그러다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다시 방문한 한명회가 구원하면서 아예 조선에 귀부해 버린다. 폴리네시아에서 도입된 고구마, 바나나, 멜론 같은 작물은 조선과 대양도(대만)에 성공적으로 정착했으며, 폴리네시아인들의 뛰어난 항해기술은 조선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폴리네시아인들은 수양대군의 근육을 보고 폴리네시안 신화의 반신 마우이의 현신으로 추앙했으며, 수양대군은 이들의 마나 문화를 입신체비와 잘 엮어내 이들을 교화시킨다. 그 정도가 너무 과해 일종의 종교화가 되긴 했으나, 마나를 흡수한답시고 식인까지 하던 과거에 비하면 훨씬 낫기 때문에 조선에서도 그냥 넘어가고 있다. 폴리네시아인들의 근원인 대양도(대만) 또한 조선 세력권 안에 있으니 조선 문화의 교육, 주입도 문제 없이 행해졌다. 덕분에 영어 이름이 붙었던 수많은 섬들은 모두 조선식 이름이 되었는데, 예컨대 뉴기니 섬은 신농도(神農島)[60] 같은 식으로 이름이 붙었다.

1부 시점에는 뉴질랜드와 이스터 섬부터 하와이까지 사실상 호주를 제외한 태평양 전역이 조선의 세력권 하에 있다.[61] 모아이로 인해 나무가 전부 벌채되어 파멸로 치닫던 이스터 섬은 아메리카 지역 개척을 위한 보급 거점을 만들기 위해 찾아온 한명회와 조선의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몰락을 피하게 된다. 그동안 만들었던 석상들은 과도한 허례허식의 폐해를 알리는 증거물로서 남게 되었고, 폴리네시아 인들은 나무와 숲의 소중함을 인식하게 된다. 대지진과 쓰나미로 큰 피해를 입어 살아남기 위해 식인까지 자행하던 마오리 족은 조선의 지원을 받아 식인 풍습을 버리게 되었고, 분열 위기였던 통가 제국은 이런 조선의 모습을 보고 조선에 복속한다.

2부 시점에서는 폴리네시아 원주민이 조선에서 관직 생활을 하다 은퇴하면승진하면 은퇴하지 못한다[62] 다시 고향 섬으로 내려가 작살질을 하며 사는 장면이 묘사될 정도로 완전한 조선의 강역이 되었다. 폴리네시아인들은 고래를 잡아 고기와 기름 등을 조선에 팔고 목재와 고양이 등을 사가고 있다. 가끔 영국인들과 만나기는 하지만, 특별히 적대적이거나 하는 접점은 없는 상태다. 영국인들 입장에서는 유럽 선박만 털어도 충분한데 굳이 지구 반대편의 망망대해까지 와서 동방 강국인 조선의 비호를 받는 폴리네시아를 건드릴 이유가 없고, 폴리네시아인들은 영국인들이 해적인 건 알지만 자신들을 털지는 않았으므로 별다른 충돌 없이 지내는 사이. 자신들을 털러 온 영국 해적을 봐도 실제로 피해를 입은 게 없으니 구조해 주기도 한다.[63] 이 시점에서는 하와이도 조선에 완전히 동화되어, 일부 전사들이 조선식 이름을 갖고 미주 개척에 참여하고 있다.

8.3. 호주

처음에는 그냥 작은 섬이 모인 군도 정도로 인식되었지만 수양대군의 이야기를 들은 이현전의 학자들이 해류를 분석해 섬이 아닌 대륙의 존재를 예상하고, 한명회가 발로 뛰어서 발견한 곳. 막상 찾아가 보니 명나라 땅보다 더 큰 수준으로 엄청나게 넓은데다[64] 척박하기까지 한 땅이라 조선에서도 딱히 건드릴 견적이 보이지 않아 2부 초반 시점까지는 개척하지 않고 놀려 두고 있었다. 이후 경진만란을 계기로 서양세력이 아시아로 진출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권율이 이끄는 개척단을 파견하게 되는데, 마침 소빙하기로 인한 한파로 고민중이던 몽골 세력이 이항복의 설득, 교섭 끝에 개척에 참여하게 된다.

조선의 호주 개척은 제국주의 시기의 열강들과 다르게 평화롭게 진행된다. 어보리진과 같은 호주 원주민은 사전에 조선의 물산을 선물해 호감을 사고, 기술과 문화를 전수해 서서히 자국으로 흡수한다.[65] 호주의 자연 환경은 개척단장 권율의 '한 그루 베면 세 그루 심기' 정책으로 숲을 조성해 가며 생태계를 지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었고, 본래 역사에서 영국이 싸질러 호주 생태계를 붕괴시킨 토끼는 반입되지 않았다. 이항복이 영입한 몽골인 톨가가 토끼를 실은 상자를 실수로 바다에 빠뜨렸는데 그 변명으로 '토끼의 번식력이 엄청나니 데려가면 감당이 안될 것이다'라는 정확한 답을 내놓았다. 권율이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엄격히 물품 검사를 한 덕분에, 토끼 전쟁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66] 하지만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는데다[67] 먹성이 좋아 농토를 짓밟아놓고 사람을 상하게도 만드는 에뮤는 근육으로 인간에 대한 공포심을 심어 주는 식으로 해결해 버린다. 그 이후 개척단과 개척을 도우러온 유생들이 조사해 보니 에뮤 껍질은 기름이 많지만 고기는 입신체비에 어울리는 육질을 지니고 가슴 기름샘도 선크림으로 효과적이라고 인기가 높아졌다.

이 후 죽다 살아나서 호주에 도착한 프랜시스 드레이크의 해적선단이 호주에 다다르는데, 그는 바르바리 해적을 마사이 족의 목화 농장 노예로 팔아치우고, 몽골인들에게는 운송 수단인 낙타를 납품하며, 호주에서 나오는 값싼 면직물[68]은 유럽에 비싸게 팔아먹는 기막힌 사업 아이템을 얻어내게 된다. 이 과정에서 바르바리 해적을 소탕하고, 박해받던 영국의 가톨릭 교도들을 조선의 개척지에 이주시키는 식으로 외교적 이익도 얻는다.

덕분에 호주는 동아시아 출신의 조선과 몽골인 및 일본인[69], 태평양의 폴리네시아인과 호주 원주민, 동아프리카의 흑인, 해적 출신의 아랍인 노예, 영국 출신의 백인 이주민, 더 나아가 네덜란드 등 다른 유럽인들까지도 모두 섞인 인종의 도가니가 된다. 이렇듯 온갖 인종이 혼합된 상태에서 조선이 호주 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모든 이주민들에게 필요한 물자의 공급과 의료 등의 행정 지원을 해주는 물주가 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조선어가 공용어가 되었다. 이렇게 온갖 인종이 혼합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으로 16세기 후반인 2부 시점에서 몽골인들이 드레이크 해적선단에게 사들인 중동산 낙타를 화물 운송 수단으로 부리면서 가축으로 들여온 프랑스산 소를 도축해 영국인들에게 배운 방식으로 스테이크를 구워먹고 농장에서 도망치는 영국인 노예들을 추적해서 체포한 뒤 조선 말로 영국인 노예들과 대화하는 모습이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조선에서 배운 건지 마유주에 럼주를 말아 폭탄주를 마시고 잔뜩 취해 기어다녔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혼혈도 늘어나서 2부 에필로그의 현대 시점에는 인구의 약 15%가 인종 분류가 안 되는 기타 계열로 분류되어 있다고 한다. 14대째 면직물 가게를 운영하고 있는 어느 호주인의 경우 신장과 체격은 솔로몬(마사이)계인데 피부색과 두상은 아랍계이고 금발에 곱슬거리는 머리는 호인(어보리진)계에다 눈은 초록색 섞인 갈색이어서 구분 자체가 불가능했다.

2부 에필로그에서 근육조선의 현대에서 호주가 어떻게 되었는지 언급된다. 권율의 숲 조성 정책이 호주 원주민들에게 '농지를 만들려면 숲이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고정되어,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나무를 심어온 결과 본래 90%를 차지하던 호주의 사막이 40% 정도까지 줄어들었다. 호주 내륙은 지나치게 황폐해 손을 못 대지만, 물길이 유지되는 곳은 모두 숲을 조성해 현대의 호주는 녹화 사업이 한계에 다다랐다. 이렇게 정성들여 자연을 가꾼 덕에 관광사업도 발달했다. 특히 에뮤를 근육했던 사건은 호주의 대표적인 축제가 되어 매년 개최되고 있다. 작중 묘사되는 현대 호주는 야생 동물의 천국으로, 웜뱃은 걷어차면 벌금형에 처한다거나 공항 시설에 캥거루가 돌아다녀서 캥거루와 싸우지 말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을 정도다.[70] 다만 외래종의 반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서, 일부 동물들은 원 역사와 똑같이 유해조수로 지정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몽골인들이 처음 들여 온 낙타는 에뮤 근육 축제에 같이 끌려나와서 근육당하고 있으며, 쥐를 잡기 위해 들여온 고양이도 유해조수 취급당하고 있다.

9. 아메리카

호주와 마찬가지로 이현전의 학자들이 해류를 분석하여 대륙이 더 있을 거라 예측하였지만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사람을 현혹한다는 뜻의 미주(迷州)로 명명되었다. 이후 콜럼버스보다 훨씬 일찍 한명회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면서 조선의 세력권이 될 뻔했지만 일부 간신들의 연이은 트롤링으로 인해 원주민들의 여론이 악화되면서 중남미 지역은 본래 역사처럼 스페인 문화에 편입된다. 그나마 북미 지역중 서부를 조선이 접수하였으며 2부 종료 시점에선 원래 역사의 택사스 주까지 편입, 근대 시점에선 독립하여 미주(迷州) → 미국(迷國)이 되었다[71]

9.1. 북미

1부 시점에선 한명회가 미주로 항해했으나 실패해 실존 여부를 증명하지는 못했으며, 1부에서 멀지 않은 미래에 미주를 발견하여 개척에 나선다. 조선 개척단은 이전의 원주민에게 했듯이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기술과 문화를 전파하며 복속시키려 했지만, 구대륙 질병에 저항력이 없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문제 때문에 제한적인 교류만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욕심에 눈이 먼 윤원형이 천연두 테러를 하는 바람에 원주민들이 조선과의 접촉을 피하는 적대적 무시 상태가 되었다. 조선 측도 미주 땅의 가치는 알고 있었으나 거리도 지나치게 멀고, 윤원형의 만행으로 민심도 좋지 않으며, 조선 내부의 기반도 잘 다져지지 않았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개척에 나서지는 않고 소수 개척단으로 서부 해안 정도만을 활용하는 데 그친다. 이후 스페인도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게 되고, 조선과 스페인 양국이 각각 아메리카 서해안과 동해안을 적당히 개척하고 견제만 하는 소극적인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인 빙의자 유성룡은 소빙하기로 인한 경신대기근이 올 것을 알고 있었고, 텍사스 지역의 곡창 지대를 확보해 백성을 이주시켜 본토의 식량 소모를 줄이고, 미국의 압도적인 식량 생산량으로 기근을 극복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그래서 스페인과의 협상을 통한 세력권을 확정하고[72], 마침 호주의 우두로 종두법이 개발되자 일본에 퍼진 천연두의 방역을 도와주는 대가로 홋카이도의 항구를 할양받아 해류를 타고 미주를 개척하기 시작한다.

유성룡은 적대적 무시 상태였던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우두 접종을 통한 천연두 예방법을 전파하여 관계를 개선하였고,[73] 조선의 호의를 무시하고 주변 부족을 약탈하여 평판이 좋지 않은 아파치-코만치 부족 연합도 이들의 대전사를 팔씨름으로 꺾어 원주민들의 저항 없이 복속할 여건을 조성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조선의 임금을 대추장으로, 미주 관찰사인 유성룡을 대추장 대리 겸 대전사로 모시면서 조선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고 있으며, 다양한 부족의 추장들이 조선의 임금을 알현할 사절단을 보낼 정도로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되었다.[74] 덕분에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원 역사에서의 상황과 달리, 조선의 비호 하에 번성할 발판을 마련하였다. 게다가 유성룡이 보총 및 장총통(산탄총)을 지급하고 사명대사를 포함한 승려들을 불러와 군사 교육을 시켜, 스페인 탐험대 정도는 가볍게 격퇴하는 힘을 갖게 되었다. 거기에 미주의 야생동물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총이 필수가 되었는데, 미주인의 기술력으론 총을 수리조차 할 수 없었기에 총을 생산할 수 있는 조선에 의지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조선에 흡수되었다.

작중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의 압도적인 풍요로움을 잘 보여 준다. 서부 해안만 해도 랍스터가 조선 기준으로 크고 수량도 많아서 지겹도록 먹었는지 죄수들에게 주는 식사에 랍스터는 하루에 한 번만 주는 걸로 법까지 제정되었다.[75] 거기다 텍사스에 도달하기 전 중간거점으로 삼은 샌안토니오 북부 지역은 프레리로 불리는 대평원 지역[76]이다. 농사가 지나치게 풍작이라 옥수수는 별의별 음식으로 만들고, 원주민들에게 나눠 주고, 그래도 남아서 비료더미에 처박아 놓을 정도다. 쌀은 조선 본토 기준으로 가장 기름진 땅에서 대풍년이 들어야 수확하는 양을 기본으로 수확해내서 역시 물량이 감당이 안 되다 보니, 엿이나 술을 만들거나 가축 사료로 그냥 뿌리다시피 하고 있다. 먹이가 넘쳐나니 가축들도 무제한적으로 번식해 농장 하나가 닭을 수십 수백 마리씩 키우는 대농장으로 성장했다. 길거리에 지나가는 아이들이 엿을 마음대로 씹고 돼지고기를 길에 방치해놔도 집어가지 않는 요순시대의 재림으로 고을 이름을 동쪽에 있는 요임금의 땅이라는 뜻의 동요현으로 명명할 정도. 그래서 아메리카 대륙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너무 풍요로운 나머지 여가 시간에 입신체비로 몸을 단련하기도 한다.

또한 개척단이 발견한 구리광산은 터무니없는 매장량을 자랑하는데, 채굴을 시작한 지 4개월만에 4만 근(24톤)을 채굴해낸다.[77] 그것도 주변에 제련에 필요한 목탄을 만들 나무가 없어서 이 정도에 그친 것이다. 화포 제작에 반드시 필요한 전략물자인 구리가 이렇게 남아돌다 보니 조선에서는 꿈도 못 꿀 온갖 돈지랄을 하는데, 요새의 강도 보강을 위해 구리 사슬을 도배하고 일반 백성들도 구리솥과 식기를 쓰고 있으며, 나중에는 목재 부식을 막기 위해 배 밑바닥에 구리판을 도배하기까지 한다. 구리가 별로 안 나는 조선 본토에서는 이런 짓을 하면 관료들에게 탄핵당하기 딱 좋은 짓이다.

다만 풍요로운 모습의 이면에는 대자연의 위협도 공존하고 있어, 땅에서는 가축들을 노리고 목책을 부수고 쳐들어오는 불곰이나 송아지만한 크기의 늑대가 수십 마리의 무리를 지어 덮쳐오고, 하늘에서는 툭하면 독수리가 닭을 채어가며 바다에서는 그물을 던지면 그물 속의 물고기들을 노리고 상어떼가 몰려오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78] 자연이 조선을 거부하리라

2부 시점에서 유럽의 진출 여부는 스페인이 플로리다를 기점으로 세력권을 확대해나가고 있으며 아메리카에 진출한 영국, 프랑스와 충돌이 있었다는 정도의 언급만 있었으나, 드레이크 해적선단을 비롯한 영국 해적들이 면직물 무역에 뛰어들기 위해 활동 영역을 중동지역으로 옮겨버리는 바람에 아메리카 대륙 진출을 위협하던 걸림돌이 사라지면서 개척이 가속화되어 유럽 각국이 개척에 나선 상황이라고 언급되었다.

후대에는 동부 지방의 아메리카와 서부 지방의 미국(迷國)으로 나뉘고, 두 국가가 앙숙관계처럼 되었기에[79] 두 국가 모두 원 역사처럼 세계 최강국의 면모를 발휘할 수는 없게 되으며,[80] 2부 에필로그에서 언급된 바로는 동부는 프랑스계의 캐나다와 영국계의 아메리카로 나뉘어 있다고 한다. 즉, 벤쿠버 등 원 역사의 캐나다 서부 지역은 미국(迷國)의 영토로 남아있는 상황. 미국의 인구 분포는 아메리카 원주민 4할, 조선계/일본계 4할, 백인/흑인이 2할이라고 언급되었다.

9.2. 중미

아즈텍 제국 에르난 코르테스가 아닌, 인신공양 풍습을 보고 격노한 홍윤성에 의해 멸망한다. 이후 조선에 의해 어느 정도 통치가 되고 있었지만, 임사홍이 황금을 보고 눈이 돌아가 원주민들을 착취하며 금을 빼돌리는 바람에 조선에 대한 여론이 매우 악화된다. 그리고 코르테스는 조선을 또 다른 압제자라고 하며 원주민을 규합, 멕시코 남부를 확보한다.

2부 시점에서도 임사홍의 영향이 안 좋은 쪽으로 남아있는데, 중미지역 원주민들이 적대적 관계까지는 아니지만 조선에서 뭔가를 할 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는 철저한 기브 앤 테이크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에필로그 시점에서는 현재의 멕시코-파나마 일대를 아우르는 남미국(南迷國)이라는 국가가 세워져 있으며 대한 공화국 및 미국(迷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있는 듯한 모양으로, 대한 공화국과 미국을 포함한 우방국이 나치독일을 응징하기로 결의한 회의에서 파나마 운하 개방을 약속해주었다. 2부 시점까지는 조선이 크게 진출한 것도 아니고 우호관계를 맺은 것도 아니었으니, 그 사이에 조선에 대한 인식이 우호적으로 바뀐 모양.

9.3. 남미

곤살로 피사로에 의해 잉카가 멸망한 후, 일부 주민들이 나름 접점이 있던 조선으로 망명한다. 잉카 석공들은 원래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어, 조선에서도 잉가국 출신이 공사에 참여한다고 하면 품삯은 보통 인부 수준으로 줘도 좋으니 기술을 배우려는 석공들이 몰려드는 듯.

작가가 공개한 현대 근육조선의 세계지도에서 남미 쪽은 현실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을 볼 때, 이쪽은 역사가 별로 바뀌지 않은 듯 보인다. 그래도 원래의 미국이 두 토막이 나서 한국계인 '미국'과 유럽계인 '아메리카'로 나뉘어 있으므로, 원 역사에서 미국에게 당한 패악질은 덜 당했을 듯하다.


[1] 귀한 인삼 씨앗을 그냥 내어준다면 당연히 의심받을 테니, 기골이 장대한 수양대군이 자신을 힘만 센 단순무식한 장수로 위장하고 '북방에서 군자금이 모자라 멋대로 일본에 인삼 씨앗을 파는 것'이라는 형식으로 씨앗을 넘겨버린다. 그리하여 선체에 타르를 바른 거대한 검은색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는데, 원 역사에서의 흑선내항은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 일본의 국력이 신장되는 계기가 되었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일본 몰락의 시발점이 되었다. [2] 인삼 때문에 교토 한복판에서 이마가와의 직속이 호소카와의 수하에게 살해당할 정도. 살해당한 자는 인삼 종자 발아율이 5할에 이를 정도의 기술을 가진 자였기에 노하우를 얻어내려다 안되니 살해당한 것이다. [3] 시부카와 가문은 책임소재를 피해 도주 후 잠적하는데, 나중에 홍길동이 개척 중이던 율도에 도달해 이름을 바꾸고 율도 교씨의 시조가 된다. 그 외 호소카와 가문은 아예 몰락하고, 시마즈 가문은 명맥만 유지하며, 오우치 가문은 조선에 완전히 굴복한다. [4] 그나마 포로로 잡힌 사나다 마사유키가 어린 다케다 가의 핏줄을 가주로 올려 주가의 명맥은 이을 수 있도록 허락을 받는다. [5] 보급 역량이 발달하지 못했던 전근대에, 차량이나 말 대신 보급을 담당하던 사람들이다. 사람이 나를 수 있는 물자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보통 병사들과 1:2.5 비율로 편성되었다. [6] 덕분에 원 역사에서는 일본과 투쟁했던 독립운동가들이 근육조선에서는 일본의 노동자들을 위해 발벗고 나서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졌다. [7] 2부에선 조선 쪽 인물들이 명나라의 부패를 보고 조선이었으면 줄줄이 잡혀갈 정도의 부패가 만연하다고 평했다. [8] 처음에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에 공격하거나 말의 귀를 막을 생각도 했지만 - 말의 귀를 막으면 주인 명령을 듣지도 못할 테고, 비바람 몰아치는 날이 흔한 것도 아니거니와 성에 농성을 할 터여서 고민하다가, 물에 불린 대나무를 불에 넣어 터트리면 포화만큼은 아니어도 큰 소리가 나니 이걸 이용해 말이 폭음에 익숙해져서 겁을 먹지 않도록 훈련을 시킨다. [9] 그래도 양심은 남아 있었던 서유정은 이런 사태에 반대했지만, 묵인하지 않으면 요동 치수를 실패한 건을 보고해 백각형을 받게 하겠다는 협박에 굴복해버린다. [10] 우연히 퍼진 우역(구제역)의 전염에 대한 지식을, 우역을 막는 데 사용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라에 퍼트려 자기 소 값을 올리려고 할 정도다. 심지어 잠깐 지나가듯 언급된 말이지만 늙은 부모를 산에 내다버리는 고려장 비슷한 정신나간 행위가 실제로 존재하는 듯. [11] 이때 조선 국왕은 천자 자리를 이어받아 중원을 차지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한다. [12] 1부 시점의 미래에서는 조선은 중국의 일부가 되었지만 2부를 거치면서 명이 조선의 일부가 된 상황. [13] 아구지가 명나라와 거래하던 시절 계산으론 잡곡 150석에 불과한 모피가 조선과의 거래에선 쌀 750석, 이것도 절반 이상 후려친 거라고 하니 그간 명나라가 얼마나 떼먹었는지 알 수 있다. [14] 밀은 겨를 벗기기 힘들어서 가루를 내서 빵을 만들어 먹어야 하는데, 매 끼니마다 가루를 내는 게 보통 힘든 일이 아니라 밀을 주식으로 하는 지역에서는 풍차나 수차 방앗간 근처에 마을이 형성되는 일이 흔했다. [15] 2부에서 몽골 케식이 이를 보고 지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근육으로 일반적으로 죽을 상황을 극복하거나, 각종 물자들을 아낌없이 공유하는 것을 보면서 이들과 교류할 것을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은퇴하는 기병들이 북인들에게 기마술 등을 가르치는 일을 하게 된다고. [16] 오키나와로 가는 통신수단이 불안정하다는 핑계를 댔다. 물론 명의 간섭을 피할 수 있다는 게 주 이유. [17] 또는 "대남도"라는 이름이 혼용된다. [18] 성인이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려 자신의 힘과 노동력을 인증받는 문화는 세계 각지에 비슷한 것이 많다. 당장 조선시대만 해도 평민들은 들돌이라는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것이 관례의 일부였고, 이것이 제주도식으로 변형된 민담이 ' 한락댁이'이다. [19] 시간이 지나면서 2부 시점에서는 죽을 죄를 지은 이를 보내 거기서 유황을 캐다가 병들어 죽게 하는 식으로 실질적인 사형지로 사용된다. [20] 원 역사에서는 천연두로 사망하였을 시기이지만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조선이 종두법을 전해주어 천연두를 극복하고 건강히 살아있던 상태였다. [21] 상왕은 끝까지 나라에 충성한 유성룡을 위해 상왕이 직접 쓴 축객령 여러 장을 유성룡에게 준다. 설령 왕이라도 유성룡을 부르지 못하도록 배려한 것. [22]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음차는 원래 중국에서 각 국명을 중국어 발음에 적합하게 음차한 것을, 나중에 조선이 한자를 조선식으로 읽으면서 생긴 음차들이다. 서반아(西班牙)는 중국식으로 읽으면 스빠냐 정도가 되어 '에스파냐'에 부합하고, 영길리(英吉利)는 잉길리(잉글랜드), 불란서(佛蘭西)는 푸란스(프랑스) 식이 되어 얼추 원어와 비슷해진다. 원 역사에서도 구한말 유럽 국가를 부르던 방식. [23] 해전으로 인한 피해 규모가 스페인 측이 더 컸기에 표면적으로는 영국의 승리였으나, 스페인을 억누르고 대양으로 나가겠다는 영국의 목적이 이뤄지지 못했다. 비격진천뢰의 유용함을 알아본 스페인이 선박 방어용으로 널리 보급하는 바람에, 영국 측에서 스페인 상선을 털기 더욱 어려워져 사략 해적의 활동 성과가 원 역사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고, 결과적으로 영국 입장에서는 피로스의 승리가 되었다. [24] 그 무렵 펠리페 2세가 아메리카 대륙의 영토 건에 대해 조선을 미심쩍어하고 있었는데 자신을 믿고 귀한 선물을 보낸 조선은 역시 믿을만한 동맹이라며 그냥 넘어갔다. [25] 1~10까지는 펠리페 2세에게, 나머지는 펠리페 2세가 명사들에게 뿌릴 것을 부탁했으며 실제로 그에게 물려받은 1번 승자기는 펠리페 3세가 쓴다. 그 외에 승자기를 쓰는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은 엘리자베스 1세, 윌리엄 셰익스피어 등이 있다. [26] 여기서 유럽측의 식민지에 대한 시선이 잘 드러나는데, 유럽에서 식민지의 가치는 당장에 얻을 수 있는 귀금속 및 노예, 정복한 땅을 차지했다는 명예를 중시하지 그 땅에서 뭐가 나는지에 대해선 관심 없는 모습을 보였다. 펠리페 3세 또한 텍사스의 비옥한 흑토지대와 구리 등의 지하자원의 존재를 모르긴 했지만 조선이 그만한 땅을 차지했음에도 그 땅에 금과 은이 나지 않는다는 것만 확인하고 필요 없는 땅이라고 단언했을 정도. [27] 조선의 영향으로 인도 식민지가 원 역사의 절반 수준으로 축소되었고 호주는 16세기 말에 조선의 영토로 편입되는 등 원 역사보다는 축소된 제국이 되었다. [28] 여기에는 아메리카가 미국(迷國)과 대립하느라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못한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공화국에서 나치 독일에 빡치자 연방 수뇌 회의에서 아메리카 견제를 중단했다는 언급이 나오기도 한다. [29] 이 세계관에서 미국은 단일 국가 미국(美國)이 아닌 조선계인 미국(迷國)과 영국계인 아메리카로 나뉘어져 서로 대립하고 있는 중이다. [30] 작중의 현대인, 특히나 건축업 종사자들은 야근을 절대 안 하는 게 상식인데 유성룡은 문자 그대로 일만 하다 죽은 셈이니 대한 공화국의 현대인이였다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이유로 안 믿는 것. 물론 선후관계가 반대로 된 이 근거에 주인공은 어이없어 했다. 사실 원래도 조선이든 어디든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인 농촌 사회는 그렇게 빡세게 일하는 편이 아니지만, 이후 설정상 조선은 과로=건강 악화=근손실=불효(...)의 공식이 붙어버려서 산업화에도 노동 시간이 서구만큼 늘지 않았다. 심지어 포드가 24시간 노동을 권하다가 욕을 먹고 포기하기도 한다. [31] 원래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수입이 불가능했을 가축들이라서 추가 수입이 불가능할 거라는 언급이 있다. [32] 이때 형제가 합심해서 엿먹으라고 만들어준 요리는 시카고 피자, 츄러스, 마요네즈, 그리고 푸아그라 스테이크로 번과 패티를 변용한 징거더블다운맥스. 조선인의 입장에서는 토 나올 수준의 기름기를 가진 요리들이지만 앙리 3세의 취향에는 딱 맞아 떨어졌다. [33] 독초로 취급 받던 토마토, 가축 사료로나 쓰이던 도토리, 우유 찌꺼기로 만든 리코타 치즈 같은 당시 프랑스인들이 경악한 재료들로 말끔한 연회 요리를 만들어 낭트 시장과 귀족들에게 대접했었는데, 막상 먹고 나니 기름기 투성이인 프랑스식 연회 요리에 비해 속이 편안하고 많이 먹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아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34] 가톨릭에서 제사를 대하는 법을 기준으로 하여, 만약 유교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랑 섞였을 경우 분리해 진행한다. [35] 한국의 가톨릭 포교를 보면 알 수 있듯, 서학을 학문으로 배우던 사람들이 스스로 종교에 귀의한 독특한 특징이 있다. [36] 2부 외전에서 대양도나 미주에서 왕비를 들이는 일은 있었지만 대한제국은 유럽과 피를 섞지 않기로 유명했다고 하며 이는 처음이라고 한다. [37] 원래 러시아는 제국이었으나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잃어버렸으니 제국이라 할 수 없다며 국명을 격하시켰고, 자기 대에서 제국을 잃었다는 상실감으로 술독에 빠졌다. [38] 가뜩이나 대한제국 자체가 태평양 지역을 죄다 접수한 거대한 제국인데, 러시아 왕가가 대한 제국의 비호로 시베리아 동부 지역에 아직 살아남아 있었기 때문에 원 역사보다 소련의 힘도 약했다. [39] 스탈린은 카틴 학살이 폭로된 뒤 점령중이던 동독 지역을 반환하고 은거했다고 한다. 현대 시점에서도 종전 전에 학살이 폭로되어서 스탈린도 무솔리니처럼 전범으로 처형당했어야 했다며 대한 공화국 사람들이 이를 갈은 걸 봐선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폭로되어서 망정이지 종전 전에 폭로되었다면 소련의 승전국 지위는 고사하고 스탈린의 목이 날아갔을 정도였고, 스탈린 본인도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투입된 대한 공화국의 압도적인 군사력과 소련군에게 퍼줄 정도로 넘쳐나는 보급 역량을 체감한 상태였던지라 혹여라도 대한 공화국을 자극할까 봐 팽창노선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숨은 듯하다. [40] 한때 황족끼리 결혼까지 했던 나라였던 만큼 연 이율 1%에 상환기간 120년이라는 관대한 조건의 채무였다고 한다. [41] 대한 공화국의 보호를 받기에 군사력을 유지할 필요가 없다며 해군 함선들을 전부 다 어선으로 개장했다고 한다. 이때 강구트급도 게잡이 어선으로 개장되었는데 생전에 강구트급 개장에 반대한 키릴 대공의 묘비에 영하 15도의 날씨에도 얼지 않은 붉은색 이슬이 맺혔다고 한다. 이때 뜯어낸 함포 중 130mm 부포는 후에 대한 공화국에 양도되어 41식 전차의 주포로 채택되었다. [42] 당시 채식을 선보이려고 찾아갔던 기자 부공차의 눈에 학살이 눈에 띄면서 눈이 뒤집어져 당시 안내하던 친위대를 두들겨 팼다. 수적 열세로 두들겨 맞긴 했지만 여럿 두들겼고 그 사실을 감추려고 입막음 후 조선으로 돌려보냈지만 이미 눈 돌아간 부공차는 귀국 후 즉시 알렸다. [43] 원 역사에서의 조선도 장애인 인권이 높았는데 이 세계관의 조선과 이를 이은 대한 공화국의 장애인 인권은 온갖 편의시설이 집적된 전용 시설을 건설하여 최상의 편의를 제공해줄 정도로 매우 높은 수준이였는데,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나치 독일의 학살극에 대한 공화국 국민 전체가 분노해서 나치 독일을 응징하기 위한 군인 모집에 앞다투어 몰려들었다고 한다. [44] 나치독일이 대한공화국에 러브콜을 보내던 이유가 입신체비로 유전자 자체를 개조하여 위버멘쉬의 국가가 된거라고 생각했다. [45] 장애인들은 효도할 기회가 박탈당한것으로 봤으며 상체를 쓸수있으면 상체운동 하체를 쓸수있으면 하체운동이라도 했으며 몸을 쓸수없으면 주변에 양반이나 부유한자가 하인을 보내 수발을 대신하며 부모에게 폐를 끼치지 않게하여 효도를 대신했다 [46] 88mm의 2배에 가까운 130mm 포를 쏘면서 근육이 넘쳐나는 승조원들의 완력으로 장전 속도는 88mm보다 2배 빠른 수준으로 티거가 1발 쏠 때 대한 공화국 전차는 2발 쏘는지라 티거 승조원들이 저게 말이 되냐며 욕설을 퍼부을 정도이다. [47] 최후통첩도 Ich muskuliere dich(너를 근육하겠다) 였다. [48] 심지어 자살하려고 총을 들었지만 공포탄으로 교체되고 독약을 먹었지만 수면제로 바뀌어 있어서 훈장을 씹으며 그 고통으로 정신을 깨우며 근성?혹은 근육 당하기 싫다는 공포감으로 자폭한다. [49] 대 독일전의 지원으로 온 병력을 보면서 대한 공화국의 전력을 똑똑히 본 결과 미움 샀다가는 절대 못 이긴다는 걸 깨달은 모양. [50] 왜냐하면 교류 조건으로 이슬람 포교를 강요하고 입신체비와 결합한 유학을 이단으로 치부하며 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라고. [51] 드레이크 선단 이후 영국 해적들이 몽땅 이쪽으로 자리를 옮긴 걸로 봐서 결코 소소한 수준으로 끝나지 않았을 듯. [52] 원래 서역행 당시 카이로를 통해서 가려고 했으나, 페스트가 창궐한다는 말을 인도에서 듣고 항로를 조정하며 경로에서 빠진다. [53] 물론 당시 에티오피아가 남아있을지는 몰랐기에 만일 망했어도 후예들은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더했다. [54] 특히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를 믿는 솔로몬 제국에게 '몇천년도 된 종교라 이교와 다를 바 없는 교리니 가톨릭 교리를 받들라'고 강요해 황제가 빡돌아 단교를 선언하기도 했다. [55] 다만 이때 싸운 스페인인들은 정식 군대가 아닌 상단의 선원들과 그들을 지휘하는 퇴역군인들이었던지라 무장이 비교적 빈약한 것도 있었다. 스페인의 테르시오 수준의 정예들과 싸우면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긴 힘들 듯하다. [56] 단순한 금전적 이익 외에도 드레이크 해적선단과의 거래를 통해 잡아들인 바르바리 해적들을 꾸준히 사들이면서 솔로몬 제국을 괴롭히던 바르바리 해적세력을 약화시키는 이득도 얻고 있다. 호주의 광활한 대지에서 생산될 목화의 양과 드레이크가 온 세상의 해적들을 여기로 보내면 엄청난 이득이 될 거라고 독백한 걸 봐선 바르바리 해적의 씨가 마를 때까지 노예로 잡혀 팔릴 가능성이 크다. [57] 원 역사에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이 죽을 때까지 혹사당했던 것과 달리 마사이족의 목화농장 노예들은 10년의 노동기한을 채우면 급여를 지급받고 일하는 정식 노동자가 되던지 자유를 얻고 해방되던지의 선택지가 주어진다는 것과, 채찍으로 때리는 대신 마사이족 전사가 근력운동을 겸해 쇠몽둥이를 휘두르며 위협만 가하는 방식으로 일할 것을 독촉한다는 차이가 있다. 단, 중간에 도주한다든지 등의 문제를 일으키면 노동기한을 늘리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58] 이탈리아군이 국제협약으로 금지된 겨자 가스까지 쓰며 발악하였지만 속수무책으로 밀렸다고 한다. [59] 이스라엘과 에티오피아 관련 대체역사에서 종종 등장하는 '솔로몬력'을 그대로 차용한 것. 성경에 나와 있는 솔로몬의 즉위년도를 현대 서력에 대입해 역산한 개념이다. 시바의 여왕 전설을 따르는 에티오피아를 기반으로 마사이족이 합류한 제국이기에, 유대인들이 끼어들지 않아 유대 달력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60] 고구마가 매우 요긴한 식량이 되었으므로 농업의 신의 이름이 붙었다는 후문이 있다. [61] 1부 시점에서 호주는 그 존재만 확인하였을 뿐으로 본격적인 개척에 나선 것은 2부 중반 시점(16세기 말)부터였다. [62] 주인공 아버지의 친구 중 한 명이 윤원형 사건과 연관되어 파면당했다. 이 사람은 그저 상회 운영 관련 허가를 내준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억울해하면서도, 내심 좋아하며 고향으로 내려간다. [63] 실제 드레이크와 그 부하들도 대서양 해적질은 돈이 영 안되어 이들의 포경선이라도 털려고 남태평양에 왔다가 이질에 당해 표류하다가 이들에게 구해진다. [64] 수양대군은 물론 호주의 넓이를 알고 있었지만 미래 지식을 꺼내는 게 꺼려져서 원래 넓이보다 훨씬 조그맣다는 예상을 내놓았고, 이를 철석같이 믿은 한명회는 '섬이 커봤자 얼마나 크겠어'라고 생각했다가 상상을 초월하는 넓이에 개고생한다. 수양대군 본인도 여기에 대해서는 좀 미안하게 생각했는지, 돌아온 한명회가 수양대군에게 소리지르면서 화내는데도 아무 말도 못한다. 종친 아니었으면 폭락 면직락 질식투 역차돌리기 다 당했을 수준 [65] 단, 무작정 퍼준 건 아니고 농작물의 경우 현지의 환경을 잘 아는 원주민들에게 주어 호주의 환경에서 제대로 자라는지 시험하기 위한 계산도 깔려있었다. [66] 작가의 말에 따르면 원래 역사대로 토끼 박멸로 고생하는 전개를 구상했으나 100억이나 되는 토끼를 해결할 방도가 도저히 생각나질 않아 전개를 바꿨다고 한다. 실제로도 현재 호주의 토끼는 자연 생태계로는 감당이 안 될 수준이고, 호주 정부에서 바이러스까지 뿌렸으나 살아남은 0.2%의 토끼가 다시 수십 억으로 불어난 상황이다. 영국이 차지한 태즈메이니아 섬은 원 역사에서처럼 토끼를 들여오는 바람에 급속도로 불어난 토끼로 인해 생태계가 망가졌다고 언급되었다. 원 역사에서처럼 세균전까지 동원하였지만 병을 극복한 뒤 5천만 마리 넘게 불어났다 한다. [67] 야생동물이 인간을 피하는 것은 인류가 정착하는 지역마다 야생 동물을 사냥해대어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본능에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호주는 인간의 수가 많지 않고 그나마도 하루 사냥해서 하루 먹고 사는 원시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야생동물들이 인간을 경계하지 않았다. [68] 영국 시세의 1/8 수준이다. [69] 일본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소수의 일본인들이 마사이족의 목화농장에 노예로 넘겨졌다. [70] 캥거루와 싸우면 웬만한 헬창도 이긴다는 보장이 없을뿐더러, 내수린을 해서 이긴다해도 캥거루 발톱에 다칠 확률이 높은데다 이기면 짐승보다 더한 놈, 지면 짐승만도 못한 놈 취급받는다고. [71] 그나마도 대한 제국 시점에서 황밀레를 견디지 못한 황제가 미국을 포함한 대한제국령 속주들을 독립시키려 하지만 대한 제국이 자금과 행정업무를 다 처리해 줘서 그랬는지 독립을 거부하다가 마지못해 독립한 것으로 보인다. [72] 콜로라도 산맥과 리오그란데 강, 미시시피 강을 기준으로 동부는 스페인 영향권으로, 서부는 조선 영향권으로 편입하는 것으로 결정짓게 된다. 원래는 이보다 조선의 영향권이 좁았으나, 유성룡이 국경의 기준이 강이라는 걸 이용해 ‘너무 작고 다 말라붙어서 강인 줄 몰랐다.’는 핑계로 동쪽으로 더 진출해버린다. 그래서 대충 멕시코 만의 휴스턴부터 시작해 10시 방향으로 빗금을 긋는 형태의 영토가 형성되는데, 현대인 유성룡의 사기로 석유가 풍부한 알래스카와 텍사스가 조선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73] 사람은 물론 온갖 동물에게도 전염된다는 우두의 특성을 알려주니 예방효과와는 별개로 쿠거, 버팔로 등 매개체가 되는 동물의 힘을 이어받는다는 주술적 의미에서 각 부족별로 매개체가 되는 동물을 골라 우두를 자체 생산하고 있다. [74] 유성룡이 임시로 설치한 도개교를 보고 감탄하여 먼저 찾아와 복속을 청한 부족도 생겼으며, 땅을 일구어 모두가 먹고도 남아돌 정도의 식량을 생산해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만나는 부족 모두가 자진해서 복속을 청하는 상태이다. [75] 실제 역사에서도 지금과 같은 요리법이 개발되어 고급 식재료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전엔 국물에 푹 삶아먹었는데, 갑각류는 이렇게 조리하면 맛을 내는 성분이 국물로 다 빠져나가 지독하게 맛이 없어진다. 이러니 너무 맛이 없어서 근로계약서에 식사로 랍스터를 제공하지 말 것을 명시했을 정도이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밭에 비료로 줄 정도였다. [76] 그 유명한 우크라이나의 초르노젬과도 비교될만한 사기 토양으로, 미국에서는 지력을 미친듯이 빨아먹는 목화 농사를 200년 동안 지었는데 그 자리에서 또 지력 빨아먹는 작물인 옥수수를 키우고 있다. 그런데도 생산량이 너무 많아 감당이 안 돼 적당히 갈아엎으면서도 잉여분을 어떻게든 타국에 팔기 위해 외교적 강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77] 해당 지역은 유타주의 빙햄 광산으로 100여 년간 채굴했음에도 그 매장량의 끝이 안 보이는 구리광산의 끝판왕 같은 곳이다. 워낙 깊고 넓게 파내서 우주에서도 보일 정도라고 한다. [78] 상어를 어떻게든 먹어보려고 노력하였지만 도저히 답이 없어서 식재료로 사용하는 걸 포기하고 체내에 암모니아가 많다는 특성을 이용해 초석 생산용 재료로 쏟아붓고 있는 상황이다. [79] 천명대전 당시 미국의 대통령은 대한제국에 파병을 원했으나 아메리카를 견제하느라 물자 지원이 고작이었다고 나온다. 미국도 보복으로 세계대전 때 유럽에 파병하려는 아메리카를 견제하면서 서로서로 상대를 엿먹이려고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80] 근육조선 세계관에서는 대한 공화국이 미국의 포지션을 가져갔다. 1부 에필로그 시점에서 언급된 것만 봐도 현재의 미국에 꿀리지 않는 수준이며 단련된 근력을 바탕으로 타국에선 엄두도 못 내는 고화력 병기를 마음껏 운용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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