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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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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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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ttle( Siege) of Constantinopolis

1. 개요2. 콘스탄티노폴리스
2.1. 도시의 특징과 중요성2.2. 구조 변화2.3. 방어시설
2.3.1. 테오도시우스 성벽: 재래식 성곽의 황제2.3.2. 블라케나에 성벽2.3.3. 동쪽 해안 성벽2.3.4. 금각만 성벽2.3.5. 프로폰티스 성벽2.3.6. 주변부2.3.7. 갈라타2.3.8. 종합
3. 전투 연표4. 정리

1. 개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서기 330년 5월 11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은 이래, 1,100년 넘게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였다. 그 번영과 로마 제국 황제 타이틀을 노리고 수많은 세력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전하였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노리던 이들은 도시를 지켜주는 테오도시우스 성벽 앞에 번번히 막혔다. 1204년 4월 8일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면서 무적 신화는 깨졌다. 총 20차례 또는 그 이상의 공방전이 있었으며, 1453년 5월 29일 최종적으로 성벽을 돌파한 오스만 베이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기나긴 공방전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 콘스탄티노폴리스

파일:external/az616578.vo.msecnd.net/6360794513233694721004192386_greco-romain-constantinople-vue-generale-1.jpg
파일:pdPjJHD.png
현재 이스탄불 지도 위에 표시한 콘스탄티노폴리스. 파란색 선 안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의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늘날 이스탄불의 파티흐(Fatih) 구이다. 검은색 선 안은 금각만(골든 혼)이다.[출처]

2.1. 도시의 특징과 중요성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옛날부터 경제적, 정치적 중심지로서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아주 중요한 통로였다. 보스포루스 해협(노란색 구역)은 폭이 1㎞ 가량 밖에 되지 않는 데다가 가장 좁은 폭은 750m 밖에 되지 않아 사람과 물자를 손쉽게 옮길 수 있었다. 지중해를 통한 해운으로 물건을 수송하는 상인들로서는 최대의 경쟁자이면서, 넘을 수 없는 장벽이나 다름없었다. 동방의 비단들도 흑해에서 이곳을 거쳐 들어왔으므로 대 아시아 교역에도 중요한 관문이었다.

군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다. 해협을 강 건너듯 건너갈 수 있어 군대를 옮기기도 쉬웠고, 흑해와 지중해가 만나는 유일한 지점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제권을 쥐고 있다면 흑해를 장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치적으로도 중요했다. 로마 제국의 황제는 이후 유럽에서 다시 없을 대제국의 주인이었다. 중동부터 스페인까지 로마 제국의 황제 직함이 먹히지 않는 곳은 없었고, 유럽의 모든 국왕들보다 더 높은 직위였다. 서로마를 멸망시킨 오도아케르 서로마 제국의 황제를 폐위시킨 뒤 그 자리를 계승하지 않고, 황위와 명목상의 황제로서의 권한을 모두 동로마 황제에게 넘겼다. 그러면서 서한에다가 "로마 제국 황제 폐하께"라고 버젓이 써붙이기까지 했다. 따라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지위는 진정한 로마 제국 황제였다. 애시당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정식 명칭은 노바 로마, 즉, 새로운 로마였다.[2] 따라서 당시의 군주들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입맛 다시게 하는 도시였다.

물론 그 중요성 때문에 콘스탄티노폴리스 건설 이후 계속 침략이 있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배후지인 트라키아는 대부분이 평지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입구 하드리아노폴리스을 지나고 나면 콘스탄티노폴리스 코앞까지는 쉽게 다다를 수 있었다.[3]

그러나 본격적인 문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코 앞에 당도한 뒤부터였는데, 위의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적이 접근할 수 있는 서쪽 통로에는 험준한 산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악명 높은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파란색 선)이 있었다. 아무리 좁다 한들,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것은 굉장한 도전이 필요한 일이다. 게다가 건너편에는 한 겹뿐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가장 단단한 성벽이 기다리고 있으며 남쪽(빨간색 선 안의 구역 : 마르마라 해)은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나오는 강한 해류의 영향을 받았고, 변변찮은 항구 시설도 없어, 거대한 도시를 점령할 만한 군대를 배치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북쪽의 금각만(검은색 선 안의 구역)이 가장 만만했는데, 방어군도 그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어서, 그곳에는 항상 동로마 해군이 상주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천혜의 요새이자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2.2. 구조 변화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구조는 많은 변화를 거쳤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에 계획적인 로마식 재건축을 시작했다. 우선 동쪽 도시 중심부에 대형 광장을 만들었고 그 동쪽에 원로원 의원들의 주택을, 남쪽에는 황궁을 건설했다. 빵과 서커스를 제공해야 하므로 광장 근처에는 8만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전차경기장을 만들었다. 또한 광장 서쪽에는 기준점을 만들어 이곳으로 통하는 로마 가도들의 이정표가 되도록 했다.

이 광장에서 뻗어나간 넓은 중앙 가도는 첫번째 언덕과 두번째 언덕을 지나 법원을 왼쪽으로 통과하고 콘스탄티누스 광장을 지나 두번째 원로원 주택과 콘스탄티누스 열주를 통과한뒤 7번째 언덕을 지나 콘스탄티누스 성벽의 황금문까지 이어지며, 5세기 초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신축된 뒤에는 다시 그곳까지 이어져 총 7 로마 마일 길이의 거리로 완성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수도관을 연결하고 기반시설을 강화한 발렌스 황제는 황금문 근처 프로폰티스 해변에 헵도몬 궁을 건축하고 이곳에서 군사 사열을 했는데 378년에 그가 이끄는 로마군이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로 궤멸당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테오도시우스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서쪽, 콘스탄티누스 성벽 밖에 난공불락의 3중 성벽을 건축하기로 한다.

한편 니카 반란으로 광장 북부의 하기아 소피아가 파괴되자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를 완전히 새로 건축하도록 하고 황실 가족들이 거리를 지나지 않고도 갈 수 있도록 통로도 만들게 했다.

시간이 흐른 뒤 10세기의 상업적 번영에 힘입어 동로마 제국은 블라케나에 궁을 새로 만들고 새로운 예술품들로 채웠다. 급격히 성장한 지중해 무역망은 이탈리아 계 상인들과 이슬람 상인들이 빈번하게 이곳을 왕래하게 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북쪽 건너편 갈라타에는 베네치아 인들의 공장을 비롯해 수많은 외국인 거주지가 생겨났다.

이후 제국이 쇠락해 가면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시설들은 보수조차 어려운 지경에 빠졌으며 상당 부분을 방치하게 되었다.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한 뒤 과거의 황궁은 거의 폐쇄되고 북서부의 블라케나에가 황궁으로 기능했다.

2.3. 방어시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입지조건부터 방어에 최적화되어 있었는데,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침입자들은 서쪽 방면으로 밖에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천혜의 입지조건에, 기존의 공성법으로는 공략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크고 높은 성벽까지 쌓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재래식 성곽 요새의 극치를 자랑하게 되었다.

2.3.1. 테오도시우스 성벽: 재래식 성곽의 황제

파일:iQgKMtv.jpg
[출처]
파일:attachment/Theodosian_walls.jpg

기존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 밖으로 도시가 팽창하자 테오도시우스 2세는 새로 성벽을 쌓았고, 이는 도시의 제1 방어선이 됐다.[5] 총 6㎞ 길이의 성곽은 지형의 영향을 많이 받아 각 구역마다 특징이 있었다.

성벽의 가장 안쪽에 내벽(inner wall, mega teichos, "great wall"), 그 바깥에 조금 낮은 외벽(outer wall, mikron teichos, "small wall")이 있었으며, 이 외벽과 해자 사이에는 parateichion라고 불리는 흉벽(胸壁)이 자리했다.[6] 각 벽 사이에는 페리볼로스라는 병력이 기동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성벽 사이는 방어용 탑의 샛문으로 출입할 수 있었다.

내벽의 높이는 무려 12m에 달했으며 두께는 4.5~6m정도였다. 벽의 안쪽은 모르타르로 채워졌고 잦은 지진에 대한 보강도 이뤄졌다. 총 96개의 탑들이 20~70m마다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탑들은 높이가 15~20m, 폭이 10m 가량이었다. 막벽으로 외벽과 내벽이 50m 간격으로 엇갈려 있었다.

탑의 최상부, 즉 옥상에는 전투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탑 내부는 2개의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 탑의 아래층은 도시 쪽으로 열려 있었고 창고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위층에서는 바깥쪽으로 난 창문으로 적에게 사격도 가능했으나, 이후 보수 과정에서 창문과 총안이 사라져 최상부만이 유일한 전투 공간이 되었다.

두께 2m 가량의 외벽은 내벽보다 조금 낮은 8~9m 높이었으며, 페리볼로스 쪽으로 아치형 출입구가 있어 도시 쪽에서 정문으로 들어가거나 안쪽 방어탑에 있는 샛문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한 높이 12~14m, 폭 4m의 외벽 방어탑이 내벽의 탑과 탑 사이에 배치되어 있었다. 내벽은 최후의 저항, 흉벽은 일차 저지라는 의미가 있던 만큼 본격적인 방어는 외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결과 외벽은 가공할만한 방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외벽은 활용 가능한 공간(페리볼로스)의 양도 적지 않았고, 성벽의 다른 부분과 크게 연계되어 있었던 만큼 성곽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해자는 외벽에서 20m 떨어진 곳에 20m의 폭으로 파여있었다. 10m 깊이의 해자 안쪽에는 총안이 갖추어진 1.5m 높이의 흉벽(parateichion)이 있어 일차 방어의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막벽이 해자를 가로지르고 있었는데, 이 막벽 안쪽에는 수도관이 있어 해자에 물을 채우는 송수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자는 성 로마누스 성문 방면에서 급한 경사로 인해 유지 보수에 막대한 어려움이 있었고, 이 때문에 성 로마누스 방면부터 하드리아노폴리스 성문 방면까지는 해자가 끊겨 있다.
파일:external/classconnection.s3.amazonaws.com/theo_walls1335987296121.jpg
해자의 모습. 해자를 가로지르는 막벽이 보인다.

성문은 총 9개였지만, 왜인지 전해지는 이름은 더욱 많다. 오랜 기간 이어져 온 벽이니 시대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수도 있고, 개보수 과정에서 원래 있던 성벽을 폐쇄했을 수도 있다. 또한 본성문 이외에도 군사용 문이 따로 있었고, 수 없이 많은 샛문들을 통해 성벽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닐 수 있게 하였다. 6㎞에 달하는 긴 성벽이니 당연히 필요한 조치다.

2.3.2. 블라케나에 성벽

블라케나에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북서쪽을 방어한다.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연결되어 있으며 금각만 쪽 성벽에 위치한 포르피로제니투스 궁과 같은 높이다. 이 성벽은 서로 다른 시기에 건축된 벽을 연결한 단일 성벽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북서쪽 수원지에 발렌스 수도관과 연결되는 블라케나에를 방어하기 위한 방벽이다.

높이 12~15m 정도의 단일성벽이지만 그 자체는 테오도시안 성벽보다 두꺼우며 감시탑도 조밀하게 위치하고 금각만으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해자가 추가된다.

정확한 건축시기나 최초의 구조는 기록 부족으로 불분명하지만 추정하면 포르피로게니투스 왕궁에서 출발해 아네마스 감옥을 거쳐 성 드미트리오스 카나보스 교회를 찍고 다시 왕궁으로 돌아오는 삼각형 요새를 만든데서 이 성벽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테오도시우스 성벽보다 오래된 4세기 경에 건설된 것이므로 나중에 서쪽 성벽과 연결된 것으로 보인다.

2.3.3. 동쪽 해안 성벽

동쪽의 하기아 소피아 방면 해안 성벽은 평범한 단일 구조로 달랑 성벽 한 겹만 있었다. 그러나 이 한 겹의 성벽도 다른 성의 일반적인 성벽보다 튼튼한 데다가, 이곳은 고대부터 동로마의 신전이 있었던 곳으로, 고도가 가장 높고 노출된 면이 적었다. 또 동쪽과 남쪽을 감싸는 마르마라 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밀려오는 강력한 해류의 영향으로 평시에도 항해술을 제대로 익힌 승조원이 있는 튼튼한 선박만 근접이 가능하였고, 항구시설 또한 충분하지 않아 배를 접안하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성벽을 건설한 이래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 여기서 적군이 성벽을 넘은 사례는 전혀 없었다.

다만,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던 시기에 바다쪽 성벽은 베네치아의 공세 앞에 약점을 드러내었다. 이에 미하일 8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자 이 성벽을 강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당시 베네치아 제노바 등이 재차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 해군전력이 열세인 동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바다쪽 방벽의 강화가 필수였으며 금각만 건너편의 갈라타에 제노바인의 방어시설이 있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미하일 8세는 시간에 쫓겨 우선 성벽 위에 2m 높이로 목재 구조물을 쌓고 천으로 덮어두었고 10년 뒤에는 제2의 성벽을 안쪽에 건설했다. 이후로도 팔레이올로고스 왕조는 해안쪽 방벽을 계속 보강하고 부분적으로 해자까지 추가했다.

2.3.4. 금각만 성벽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북서부는 국제 교역향으로 발달하였기에 이곳에는 맞은편의 갈라타 지구는 물론이고 무슬림과 이탈리아계 무역상 거주지도 북서부에 존재했다.

따라서 이곳은 교역상에게서 충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는데 지리로 보아도 북쪽의 금각만 방면은 해류의 영향도 없고 만의 폭이 좁아 건너편 육지에서의 지원사격도 가능한 확실한 성곽의 취약점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도 성벽을 세웠는데 5.6km를 뻗어 육지쪽 장벽과 연결되며 해변에서 10m 정도 거리를 두고 한때는 성문 14개에 감시탑 110개가 있었다고 한다.

1200년의 제4차 십자군 때는 베네치아인들이 이곳을 집중 타격하였고, 끝내 버틸 수가 없었다. 물론 당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황제가 반대파에게 끔살되어 교체될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그 덕에 방어력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빈약한 상태이긴 했다. 결정적으로 내통자 때문에 성문이 열렸다. 이처럼 제국이 해군력에서 압도당할 때는 이쪽 성벽이 주요 공격로가 되었다.

당연히 동로마 제국도 이러한 약점을 알고 있었기에, 국가가 멸망하는 순간까지 금각만에 해군을 배치하고 프로스포리온 항으로 통하는 금각만 마지막 관문인 유제니우스 탑에 거대한 철쇄를 연결해 이곳을 드나드는 함선을 통제하게 했다.

결국 약점이라고 섣불리 공격했다간 성벽의 수비군과 바다의 해군에게 협공을 받게 되고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한 그리스의 불 세례도 각오해야 했다. 그리스의 불은 일종의 화염방사기라서 사용하려면 몇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는데 이곳의 잠잠한 해면에서 상대의 행동이 제약받는 동안에는 맹위를 펼쳤다. 따라서 먼저 동로마 해군부터 무력화하고 제해권을 쥐어야 봉쇄나 본격적인 공성이 가능했다.

다만 오스만의 마지막 공격에서는 오히려 압도적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잘 방어했다.

2.3.5. 프로폰티스 성벽

마르마라 해의 급류 덕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동쪽과 남족 해안은 대체로 공격에 안전했다. 하지만 대신에 장벽은 바다로부터 도시를 보호해야 하므로 구조적으로 매우 강력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남쪽에도 성벽이 있는데 이 지역의 장벽은 기반을 대리석으로 하고 높이 12~15m 정도에 188개의 감시탑과 13개 관문을 가진, 총연장 8,460m의 성벽이다.

2.3.6. 주변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3중 성벽 밖에는 징하게도 추가 요새와 성벽들이 있었다.

5세기 중엽 건설된 아나스타시우스 성벽은 콘스탄티노폴리스 65km 서쪽에 위치한 두께 3.3m, 높이 5m의 장벽인데 실용성이 문제되어 7세기 경에는 대부분 버려진채 초소 정도로만 활용되었고 이후 몇세기에 걸쳐 장벽의 대부분은 건축자재로 전용되었다.

아나스타시우스 성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사이에는 전략적으로 요새와 도시가 있어서 수도 방어 체계의 일부로 기능했으며 셀림브리아 같은 경우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될 때까지도 버텨내었다.[7] 해협 건너 소아시아에도 니카이아 니코메디아 등도 이런 역할을 했다.

2.3.7. 갈라타

이곳은 방어의 일부이면서 동시에 위협이 되는 곳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북쪽 강 건너편에 위치한 갈라타 지구에는 5세기부터 요새화된 성벽이 존재했으나 7세기에는 이곳의 방어탑과 건너편 금각만 성벽의 유제니우스 탑 사이에 철쇄가 연결되어 도시 방어의 일부로 기능했다.

그런데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북서쪽이 갖는 교역항으로의 중요성 때문에 건너편의 갈라타 지구에도 많은 유대인, 이탈리아인, 이슬람 상인 등 수많은 무역상들이 거주했다.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된 이후 갈라타는 베네치아 거주지가 되었으며 이후에는 제노바의 조차지처럼 되어 동로마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반 요새화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통제하는 역할을 맡았다.

2.3.8. 종합

침입자들의 공격 방향은, 금각만의 동로마 해군을 궤멸 상태로 만들고 이쪽 방면을 공략하거나 쌩으로 바다쪽 성벽을 기어오르지 않는다면 서쪽 방면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었다. 즉 공격자 입장에서는, 공격을 가장 방어가 탄탄한 곳으로 할 수밖에 없는 불리함을 감수해야 했다.

3. 전투 연표

다음에 나오는 각 공방전의 n차 표시는 단순히 구분을 쉽게 하기 위해서 임의로 붙여둔 것뿐 공식적인 용어가 아니다. 다시 말해, 해외에서도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라 나무위키식 분류법에 가깝다.[8]

3.1. 로마-페르시아 전쟁

3.2. 로마-아라비아 전쟁

3.3. 로마-불가리아 전쟁

3.4. 로마 내전

3.5. 로마-루스 전쟁

3.6. 로마 내전

3.7. 십자군 전쟁

3.8. 니케아 제국 VS 라틴 제국

3.9. 로마-튀르크 전쟁


위에 존재하는 20번의 공방전 외에도 1248년 니케아 제국의 군인 요르요스 아크로폴리티스[17]가 시도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 시도를 공방전 목록에 넣기도 한다. 이것까지 포함하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두고 벌인 공방전은 총 21번의 공방전이 존재한다. 다만 1248년의 공방전에 대해서는 그냥 "있었다"는 존재만 알려져 있고 그 이상의 내막은 알 수 없다고 한다.

4. 정리

오스만이 4번, 키예프 공국이 3번, 니케아 제국도 각각 3번, 내전으로도 3번, 우마이야 왕조가 2번, 십자군도 2번, 불가리아 제국이 1번, 사산 페르시아도 1번, 그리고 쿠트리구르 족도 1번씩 시도했다. 성공은 3번이며 그중 정공법은 1번(당연히 오스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강력한 요새였음은 부정할 수 없다.[18] 이 중에서 내전과 니케아는 애매하니까 제외하고, 공격해온 외적의 방향으로 분류하면, 역시 동쪽이 7번(오스만+우마이야+페르시아)으로 가장 많고, 북쪽이 5번(불가리아+키예프+쿠트리구르), 서쪽이 2번(십자군)이다. 여기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위치 선정을 찬양할 만한 것이, 그의 선택이 아니었더라면 동방의 수도가 이미 인프라가 갖춰진 니코메디아로 그대로 갈 가능성도 꽤나 높았는데, 그렇다면 동쪽 방향의 외적에게 우리가 알고 있는 1453년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일찍 로마 제국이 멸망했을 확률이 매우 높고, 그랬다면 세계사의 향방이 크게 바뀌었을 것이기 때문이다.거기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원래는 현 불가리아 소피아인 세르디카로 가려고 했는데 이 경우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이스탄불'이 된 후에는 이러한 공방전이 벌어지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 말기인 1912년 1차 발칸 전쟁 때 불가리아군이 코스탄티니예 인근인 차탈자(Çatalca)까지 진격해서 위협한 적은 있으나 공방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만 1차세계대전 종전 후 1918년 영국군이 잠시 무혈입성하여 이스탄불에 주둔하기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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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구글맵. [2] 교통 통신에 비해 지나치게 영토가 넓어진 로마가 스스로 4명의 황제를 뽑아야 했던 사두정치 기준으로 동방 정제가 선임 황제였고, 서방에 비해 압도적인 제국 동부의 경제력 및 군사력과 비할 바는 아니었기에 상납한 거나 다름 없었다. [3] 이런 이유로 하드리아노폴리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는 마지막 관문이자 동로마 제국의 중심 도시 중 하나였다. [출처] 위키피다아 영문판. [5] 그 뒤 867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성벽은 지진으로 붕괴되어 흔적만 남게 된다. [6] 때문에 이른바 '삼중성벽'이라고도 불렸다. [7] 물론 이런 곳은 수도가 함락되면 어차피 항복할 테니 경계병만 배치하고 버려둬서 버틸 수 있었다. [8]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수도 위협이나 반란 시도까지 다 합치면 이 공방전은 애초에 서른 번을 넘어간다. 무엇이 n차인지 정확히 표기하기가 애매한 만큼, 가장 유명했던 오스만 제국에 의한 함락도 해외에서는 '20차'라 하지 않고 보통 '1453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혹은 그냥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이라 부른다. [9] 성모 마리아께서 지켜 주신다면서 성모 이콘을 수비 전면에 내세웠다. [10] 동로마 제국군이 더 유리한 상태에서 싸웠고 아나톨리아군은 항상 강군이었기에 물러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크룸이 지휘하는 불가르군은 불리한 상황에서 정면대결하기 보다는 유인해서 기습하는 방법을 선호하였고 확실한 승산 없이 전투에 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정황증거로 미루어 보면 레온 5세는 미리 크룸과 밀약을 맺어두었을 가능성이 크다. [11] 이후 수세기 동안 루스인들을 다스리는 류리크 왕조의 시조이다. [12] 중간에 수도를 탈출했다. 그리고 4세의 큰아버지로서 애초에 제위계승을 둘러싼 숙질간 집안 내전이었다. 항목 참조. [13] 3세의 조카이자, 공략 자체는 전술적인 의미에서 실패했으나, 결국 즉위. [14] 선임황제로는 형식상 4세의 부친이자 3세의 동생인 이사키오스 2세를 복위시켰으나, 3세가 뺏으면서 동생 이사키오스의 눈을 실명시키고, 사실상 통치력이 없으므로, 아들인 4세로 기재한다. [15] 이 시기는 분립기이나, 굳이 따질 때는 니케아를 정통으로 간주한다. [16] 그나마도 아나톨리아 상실 이후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던 상태였다. [17] 역사가이기도 해서, 역사서를 썼는데 그 제목은 Ruth Macrides가 번역한 영문판으로는 The history로서 아주 정직하다. [18] 니케아 제국의 탈환은 빼기도 한다(함락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