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06:36

가필(서진)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賈疋
(?~312)

서진 말의 무장으로 젊은 시절 높은 뜻과 재능, 야심이 있었다. 양주 무위군 고장현 사람으로 는 언도(彥度)다. 조위의 관원이자 조조의 모사로 유명한 가후의 증손자다.

안정태수로 안정의 노수호를 토벌해 팽탕중(彭蕩仲)등의 항복을 받았다. 311년 전조에 항복하려는 팽탕중을 죽여 북서부 이민족 세력의 이반을 막으려고 했다. 312년 민제 사마업을 도와 5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장안을 공격하여 유총을 몰아내고 장안을 탈환했다. 가을에 서진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정서대장군, 옹주자사로 승진했다. 하지만 그해 팽탕중의 아들 팽천호(彭天護)에게 피살되었고,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아쉬워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필은 사마업 정권의 제일 큰 기둥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나머지 사람들도 다 끝장났다는 것을 의미했다. 실제로 그가 죽자 더 이상 장안의 수비에는 뼈아픈 타격을 입게 되어 국윤과 색침의 분투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를 상대로 대부분 패배하였다. [1] 다만, 자기에게 나라의 운명이 달려 있는데도 별로 중요하지 않은 팽천호와 싸우러 나간 것을 보면 조상님만큼의 조심성은 없었던 듯하다.

그래도 충성심이라고는 일절 없던 조상님과는 달리, 이미 멸망이 확정된 서진의 명을 몇 년이라도 더 이어준 큰 충신인데, 원래 서진, 동진 자체가 워낙 처참했기 때문에 그나 수많은 진나라의 충신들의 사적은 묻혀버린 면이 크다. 실제로 진서에서도 그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하며 그의 죽음을 사람들이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고 했으니 확실히 보신주의자인 조상님과는 다른 인물이었다.


[1] 당시에는 장군 자체가 군대였으므로 장군이 죽으면 군대는 저절로 흩어졌다. 가필의 5만 병력이 살아남아 있었으면 장안 정권이 얼마 후 허무하게 나가떨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28
, 3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28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