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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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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
Weezer
1994.5.10
Pinkerton
1996.9.24
Weezer
2001.5.15
Maladroit
2002.5.14
Make Believe
2005.5.10
Weezer
2008.6.3
Raditude
2009.10.30
Hurley
2010.9.10
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
2014.10.7
Weezer
2016.4.1
Pacific Daydream
2017.10.27
Weezer
2019.1.24
Weezer
2019.3.1
OK Human
2021.1.29
Van Weezer
2021.5.7
}}}}}}}}}}}}}}}}}} ||

<colbgcolor=#000000><colcolor=#ffffff> 위저
Weezer
파일:weezer2020.jpg
멤버 왼쪽부터 : 브라이언 벨, 리버스 쿼모, 패트릭 윌슨(뒷줄), 스콧 슈라이너
결성 1992년

[[미국|]][[틀:국기|]][[틀:국기|]]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장르 얼터너티브 록, 파워 팝, 팝 펑크
소속 파일:애틀랜틱 레코드 로고.png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파일:X Corp 아이콘(블랙).svg 파일:인스타그램 아이콘.svg 파일:페이스북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유튜브 VEVO)

1. 소개2. 역사
2.1. 90년대 초반: 밴드의 결성과 데뷔2.2. 90년대 후반: 2집의 실패와 휴식기2.3. 2000년대: 3집~7집2.4. 2010년대: 8집~13집2.5. 2020년대: 14집~
3. 멤버
3.1. 현재 멤버
4. 와패니즈5. 내한6. 앨범 목록
6.1. 스튜디오 앨범6.2. EP
7. 기타
[clearfix]

1. 소개

위저(Weezer)는 1992년 얼터너티브 열풍을 타고 기타 중심의 록에 대해 다시 관심이 집중되었을 무렵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에서 결성된 록 밴드이다. '위저'라는 이름은 프론트맨 리버스 쿼모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 아들에게 붙여준 별명에서 유래했다.[1]

일상적 가사와 비치 보이즈 같은 건강한 팝적 감수성과 서프락 스타일이지만 어딘가 찐따같은 우울한 분위기가 섞여있는 멜로디 위로 헤비한 기타 드라이브가 결합된 팝 펑크 계열의 기타 팝을 선보이며 평단의 지지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2]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어리숙한 감정의 격정적인 표출을 누구보다 잘 표현하는 밴드이며, 이러한 위저의 음악적 성향은 후대의 이모코어 밴드들에 큰 영감을 준 밴드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2021년까지 15장의 정규 앨범, 6장의 EP, 37장의 싱글과 1장의 DVD[3]를 발매하였다. 위저는 여태까지 미국에서 1020만장을, 전세계적으로는 3500만장의 앨범을 판매하였다.

칼 코크(Karl Koch)의 기록물을 바탕으로 한 역사서급 분량의 위키인 weezerpedia가 있다. 별의별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출처[4]까지 명기되어 있어서 팬페이지로만이 아니라 기록물 그 자체로서도 가치가 있을 정도...

2. 역사

2.1. 90년대 초반: 밴드의 결성과 데뷔

위저의 프론트맨 리버스 쿼모는 코네티컷에서 친구들과 만든 메탈밴드 아방가르드[5] 의 기타리스트로서 LA로 이사한 후 드러머 패트릭 윌슨을 만났다. 이들은 1991년에 퍼즈(Fuzz), 식스티 롱 소시지스(60 Wrong Sausages) 등의 밴드를 만들어 활동하다가 밴드가 해체한 후 본인들만의 노래를 만드는 데 집중하고자 50개의 데모곡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50곡 데모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들의 친구였던 맷 샤프는 쿼모의 재능을 알아보고 새 밴드의 베이시스트이자 매니저를 자처, 밴드가 음반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데모곡을 가지고 PR을 하는 역할을 맡았다.

쿼모, 윌슨과 샤프는 60WS의 멤버였던 기타리스트 제이슨 크로퍼와 함께 쿼모를 프론트맨이자 리드 기타리스트, 그리고 메인 송라이터로 하는 밴드를 결성하고 1992년 2월 14일 첫 리허설을 진행했다. 이들은 LA의 공연장에 설 기회를 얻고자 동분서주하던 중 마침내 같은 해 3월 19일에 키아누 리브스의 밴드 도그스타(Dogstar)가 공연한 후 클로징 밴드로 무대에 서게 되었다.[6] 갑작스럽게 첫 공연 일정이 잡히면서 멤버들은 밴드 이름을 급하게 만들어야 했는데, 결국 밴드 이름이 결정되기 전에 이미 데모 테이프에 쓴 적이 있었던 쿼모의 어린 시절 별명 '위저(Weezer)'로 결정되었다.

이듬해인 1993년에 위저는 마침내 게펜 레코즈와 계약을 맺고 데뷔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7] 멤버들은 원래 앨범을 직접 프로듀싱하길 원했으나 당연히 갓 데뷔하는 신인 밴드에게 셀프 프로듀싱을 맡길 리가 없었고, 결국 더 카스의 릭 오케이섹이 프로듀서로 참여했다.[8]

이후 위저 멤버들은 LA를 떠나 뉴욕의 스튜디오에서 1집 녹음을 시작했는데, 한창 녹음을 진행하던 중 멤버 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밴드에게 매우 중요한 시기인데도 불구하고 기타리스트 제이슨 크로퍼가 여자친구의 임신으로 인해 밴드 활동에 전념하지 못한다고 판단한 쿼모가 그를 내보냈기 때문이다.[9] 결국 LA에서 카니발 아트(Carnival Art), 스페이스 트윈스(Space Twins) 등으로 활동하던 기타리스트[10] 브라이언 벨이 급하게 새로운 리듬 기타 담당 멤버로 영입됐다.[11]

마침내 1994년 5월 10일 Weezer(블루 앨범)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데뷔했다. 싱글곡들의 차트 성적도 좋았고, 앨범 자체도 이듬해에 트리플 플래티넘 인증을 받을 정도로 상업적으로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까지도 90년대 최고의 앨범을 꼽을 때 거론될 정도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2.2. 90년대 후반: 2집의 실패와 휴식기

메인 송라이터인 쿼모는 1집 발매 후 투어를 돌면서 바로 2집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행성 구조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우주를 여행하는 다섯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 스페이스 오페라 앨범 Songs from the Black Hole을 기획했지만 샤프는 자신이 만든 밴드 더 렌탈스(The Rentals)의 앨범을 녹음하러 영국으로 떠나고, 쿼모는 클래식 작곡을 공부하기 위해 하버드에 편입하면서[12] 해당 프로젝트는 폐기됐다.

이후 쿼모는 Songs from the Black Hole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곡들과 하버드 생활 중 작곡한 곡들을 합쳐 1996년 자코모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 영감을 받은 2집 Pinkerton을 새롭게 구상해 1996년 9월 24일에 발매했다. 1집 발매 후 받은 다리 수술로 인해 신체적으로 큰 고통에 시달리는 동시에[13] 상상한 것과는 다른 락스타로서의 삶에도 회의감을 느끼던 쿼모의 부정적인 감정을 있는 그대로 담은 앨범이었으며, 멤버들이 직접 프로듀싱을 맡아 가사뿐만 아니라 사운드도 1집에 비해 훨씬 거칠고 어두웠다.

하지만 쿼모가 멤버들에게 앨범에 기여한 정도에 따라 수익을 배분하는 정책을 펼치면서까지 야심차게 준비한 2집 앨범은 평단과 대중 모두의 외면을 받았다. 2집의 실패에 충격을 받은 쿼모는 하버드를 자퇴한 후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 창문을 검게 칠하고 전화선도 끊은 골방에서 외부와 단절된 채 각종 유명한 팝 음악을 분석해가며 작곡에 몰두했다. 한편 다른 멤버들은 더 렌탈스(샤프), 더 스페셜 굿니스(윌슨), 스페이스 트윈스(벨) 등 각자의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특히 위저의 창립 멤버인 샤프는 더 렌탈스에 전념하고자 1998년 위저를 탈퇴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당시에는 2집 발매 및 투어 이후 별다른 소식 없이 휴식기가 길어진 데다 샤프까지 떠나면서 위저의 존속이 불투명하다는 추측도 많았다.

2.3. 2000년대: 3집~7집

하지만 이런 우려와는 달리 샤프가 떠난 후 쿼모는 보스턴에서 만난 베이시스트 마이키 웰시를 새 멤버로 영입해 활동을 재개했다.[14] 1998년에는 '고트 퍼니쉬먼트(Goat Punishment)'[15]라는 이름으로 너바나 오아시스의 노래들을 커버하는 공연을 진행했으며, 이후에도 무대에서 1, 2집 곡은 물론 휴식기 동안 만든 다양한 데모곡들을 선보였다.

위저는 마침내 2집이 나온 후 약 5년이 지난 2001년 5월 15일에 3집 Weezer (Green Album)을 발매했다. 1집의 프로듀서인 릭 오케이섹과 다시 함께 작업한 3집에서는 개인적인 가사를 거의 배제하고 차트 흥행을 의식한 듯 2집에 비해 더 정갈한 사운드, 중독성 있는 리프와 멜로디를 선보였다. 3집의 첫 싱글곡 Hash Pipe는 차트 성적이 매우 좋았으며 앨범 자체도 발매 후 4달도 안 돼 플래티넘 인증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메타크리틱을 비롯한 평단의 반응도 긍정적이었다. Island in the Sun 역시 현재까지도 위저의 대표곡으로 꼽히는 유명한 노래다.

2001년 8월에는 베이시스트 웰시가 갑자기 밴드 멤버들과 연락이 두절되면서[16] 스콧 슈라이너가 임시 베이시스트로 영입됐다. 처음에는 3집 투어를 함께할 대타 멤버로 가입했던 슈라이너는 곧 위저의 정식 멤버로서 4집 작업에도 참여했다.[17]

쿼모는 3집 발매 이후 투어를 돌면서도 데모곡을 끊임없이 작곡했고, 투어 중간에 여유가 생길 때마다 멤버들과 스튜디오에서 4집에 수록될 가능성이 있는 후보곡들을 녹음했다. 그 결과 3집 발매 1주년이 되기 하루 전인 2002년 5월 14일에는 4집 Maladroit가 발매됐다. 2집에 이어 또 다시 위저 멤버들이 프로듀싱을 맡아 거친 사운드와 매우 헤비한 기타 리프를 선보였으며, 팬들과 평단의 반응은 전체적으로 긍정적이었다. 수록곡 Slob은 위저의 다른 유명한 노래들을 제치고 1001 시리즈인 <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팝송 1001>에 실렸을 정도. 하지만 상업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현재까지도 팬들은 사랑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위저의 숨은 명반 취급을 받고 있다.

쿼모는 Maladroit 작업 기간 동안 매니지먼트 회사와 계약을 파기하고, 레코드 레이블과의 협의 없이 데모곡들을 인터넷에서 공개하거나 프로모션 CD를 만들어 라디오 방송국들에 보내는 등 밴드 리더로서 상당히 거침 없는 모습을 보였다. 3장의 음반을 발매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위저 멤버들이 가진 경험과 자본만으로도 충분히 음반을 만들고 배급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라고.

특히 4집 작업의 가장 큰 특징은 팬들과의 소통이었다. 리버스는 밴드 웹사이트에 팬들과 의견을 교환하는 채팅 페이지를 만들고 데모곡들을 계속해서 업로드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곡의 작업 방향이나 앨범 트랙리스트 등에 팬들의 의견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앞서 언급한 Slob도 리버스는 거의 잊어버리고 있던 데모곡이지만 팬들의 요청으로 앨범에 실리게 되었으며, Maladroit라는 앨범 이름도 팬이 제안한 것이었다.

하지만 팬들과 활발하게 소통하는 만큼 갈등도 꽤 많았다. 2000년 무렵에는 처음에 실패작 취급을 받았던 2집 Pinkerton이 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엄청난 명반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쿼모는 팬들과는 달리 아쉬운 흥행 성적, 그리고 매우 어둡고 개인적인 가사 때문에 2집 앨범에 대해 부정적인 편이었고, 불과 몇 년만에 갑자기 앨범에 대한 평가가 180도 반전된 것이 혼란스럽고 이해하기 힘들다고 느꼈다. 따라서 채팅을 통해 계속해서 2집과 비슷한 노래를 만들어달라고 요구하는 팬들과 쿼모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기도 했다.

쿼모는 2003년에 프로듀서 릭 루빈의 권유로 위빠사나 명상을 시작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고 불안을 이겨내고자 했다.[18] 뿐만 아니라 삶의 균형을 찾으려는 목적으로 금욕 선언을 하거나, 위저의 창립 멤버인 제이슨 크로퍼를 비롯해 과거에 사이가 틀어졌던 사람들에게 연락해 사과하고 관계를 회복하기도 했다.

2005년 5월 10일에는 루빈이 프로듀싱한 5집 앨범 Make Believe가 발매됐다. 쿼모가 명상을 통해 스스로를 돌아본 결과 3집, 4집에 비해 가사에 비교적 개인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는 편이다. 싱글곡인 Beverly Hills는 위저 커리어 사상 가장 히트한 노래들 중 하나였고, 앨범 자체도 차트 성적이 좋았다. 하지만 반대로 팬들의 반응은 대체로 부정적이었으며, 피치포크에서는 무려 10점 만점에 0.4점(...)이라는 무시무시한 점수를 매겼다.

2005년 9월에는 푸 파이터스와 함께 투어를 돌았다. 일명 'foozer' 투어라고 불리는데, 위저는 이때 푸 파이터스의 Big Me를 커버하기도 했다. 푸저 투어 당시 푸 파이터스의 프론트맨 데이브 그롤은 위저 멤버들을 상대로 장난을 자주 쳤다. Island In The Sun을 연주하는 동안 하와이안 댄서들이 무대에 난입한다든지, Undone - The Sweater Song에서 관객 중 한 명을 무대로 올라오게 해서 함께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부르는데 그롤이 자원해서 올라온다든지...

2008년 6월 3일에는 6집 레드 앨범이 발매됐다. 당시 쿼모는 기존의 위저 스타일을 반복하는 대신 다양한 장르의 곡을 만들고 새로운 도전을 하려는 의지가 강했다. 따라서 레드 앨범에는 클래식 작곡법을 도입해 6분 동안 하나의 테마를 다양한 방식으로 변주하는 The Greateste Man That Ever Lived를 비롯해 기존 위저 곡과는 다른 느낌의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Pork and Beans는 위저 노래 중에 최초로 기타 솔로가 없는 싱글곡이다. 또한 레드 앨범은 최초로 쿼모가 아닌 다른 멤버들이 만들고 보컬을 맡은 노래가 수록된 앨범이기도 하다. Thought I Knew는 벨, Automatic은 윌슨이 작곡하고 보컬을 맡았으며 Cold Dark World는 슈라이너가 쿼모와 공동 작곡하고 함께 불렀다. 이외에도 Dreamin', Everybody Get Dangerous는 쿼모와 벨이 공동으로 보컬을 맡았으며, 딜럭스 버전에 수록된 King과 The Weight에서는 슈라이너가 보컬을 맡았다.

2008년에도 팬들과 소통하려는 시도가 많았는데, 우선 팬들과 함께 노래를 연주하는 소규모 투어인 Hootenanny Tour를 진행했다. 팬들이 기타나 바이올린, 우쿨렐레 등은 물론 색소폰, 하모니카, 실로폰, 캐스터네츠 등 각자 원하는 악기를 가지고 와서 위저 멤버들과 함께 연주하거나 노래하는 컨셉이었다. 레드 앨범 발매 후 진행된 2008년의 Troublemaker Tour에서도 공연 중간에 팬들과 악기를 연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2008년 3월에는 쿼모가 유튜브에서 팬들과 함께 노래를 만드는 'Let's Write a Sawng'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쿼모가 제시하는 조건에 따라 팬들이 멜로디, 리프, 가사 등을 만들면 그중 가장 좋은 것을 고르고 또 다음 과제를 내주는 식이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 만들어진 노래 Turning Up the Radio는 이후 컴필레이션 앨범 Death to False Metal의 첫 트랙으로 사용됐다. 또 레드 앨범부터 10집 Hurley 시기까지는 밴드 공식 유튜브 계정을 통해 위저의 일상과 투어 생활 등을 다룬 'webisode' 시리즈를 제작해 공개하기도 했다.

바로 이듬해인 2009년 11월 3일에는 7집 Raditude가 발매됐다. 2008년의 트러블메이커 투어가 끝나고 불과 일주일만에 Raditude 세션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Raditude는 레드 앨범에 이어 기존 위저 스타일과 다른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한 앨범이다. 첫 싱글인 (If You're Wondering If I Want You to) I Want You to는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 사운드로 유명한 기존 위저 스타일에서 벗어나 주로 어쿠스틱 기타로 진행되며, 신시사이저가 들어간 노래도 많다. 힌디어 가사가 나오는 인도풍 노래 Love Is the Answer, 릴 웨인이 피처링한 그리고 팬들 사이에서는 거의 밈처럼 까이는 노래 Can't Stop Partying도 수록되어 있다.

레드 앨범에 이어 Raditude에도 메인 송라이터가 아닌 드러머 패트릭 윌슨이 작곡한 노래가 수록되었다.[19] 또 Raditude에서는 다른 아티스트와의 콜라보 곡이 많은데, 윌슨이 만든 In the Mall, 쿼모가 단독으로 만든 Trippin' Down the Freeway를 제외한 모든 트랙들은 쿼모가 위저 멤버가 아닌 다른 아티스트들과 공동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쫄딱 망했다

2.4. 2010년대: 8집~13집

2010년 9월 14일 8집 에피타프 레코드를 통해[20] '헐리(Hurley)'가 발매됐는데, 앨범커버가 좀 충공깽이었다.

파일:external/ecx.images-amazon.com/51ltgFiDm5L.jpg
바로 그 로스트의 헐리(호르헤 가르시아)가 맞다. 헐리하고 마이끌한테 어떻게 질 수고 이써! 심지어 앨범 제목이나 가수 이름도 없고 단지 '헐리'밖에 없는 앨범에 많은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다. 로스트에서 헐리 역을 맡았던 이 사람이 앨범 커버에 등장하게 된 이유는 보컬인 리버스 쿼모가 이 사람을 직접 만났는데 사람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고... 사람이 정말 좋아보이긴 한다[21] 이후 호르헤 가르시아는 위저의 라이브에 등장하여 듀엣을 하기도 했다.

2010년 11월 2일에는 정규 앨범에 수록되지 못한 노래들을 모은 컴필레이션 앨범 Death to False Metal을 발매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팬들과 함께 만든 노래 Turning Up the Radio가 여기에 수록됐으며 토니 브랙스턴의 Unbreak My Heart를 커버한 버전도 들어볼 수 있다.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크루즈 여객선을 타고 팬들과 함께 항해하며 공연을 하는 '위저 크루즈'를 진행했다. 크루즈에서는 위저 및 다른 밴드들의 공연뿐만 아니라 팬들의 사랑을 받는 2집 Pinkerton의 노래들을 연주하거나 팬들과 함께 퀴즈쇼, Q&A 등 다양한 행사도 이루어졌다. 쿼모는 이를 통해 팬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4집부터 위저의 과거 음악 스타일과 쿼모가 지향하는 새로운 스타일에 대한 의견 불일치로 마찰을 빚던 팬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파일:external/www.weezerpedia.com/Wcposter.png
8집이 나오고 약 4년 후인[22] 2014년 10월 7일에 리퍼블릭 레코드를 통해 9집 Everything Will Be Alright in the End가 발매됐다. EWBAITE는 디 애스트로너츠(The Astronauts)라는 밴드의 보컬 세바스찬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컨셉 앨범으로, 앨범 발매 전에 유튜브 공식 계정을 통해 세바스찬, 조 래폴리, 클레오, 벨라 등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티저 영상을 순차적으로 공개하기도 했다.

EWBAITE에서 위저는 1집 블루 앨범과 3집 그린 앨범의 프로듀싱을 맡은 릭 오케이섹과 다시 만나 작업했으며, 이전 앨범들과 달리 신디사이저의 비중을 줄이고 위저의 트레이드 마크라고 할 수 있는 디스토션이 걸린 파워풀한 기타 사운드를 내세우는 등 초창기의 폼으로 돌아갔다는 호평을 받았다. 싱글곡인 Back to the Shack에서는 아예 팬들한테 대놓고 '지금까지 너희 말 무시하고 마음대로 해서 미안해'라는 메시지를 전했을 정도로 초심으로 돌아가고자 노력한 앨범이었다. 하지만 팬들의 긍정적인 반응과는 달리 상업적으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다.

2016년 4월 1일에는 크러쉬 매니지먼트와 새로 계약을 맺고 크러쉬 뮤직을 통해 4번째 셀프 타이틀 앨범인 화이트 앨범을 발매했다. 새로운 프로듀서 제이크 싱클레어와 함께 작업했는데, 싱클레어는 과거에 위저 커버 밴드를 결성했을 정도로 엄청난 팬이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를 시도하고자 하는 쿼모에게 위저의 1~2집에서 보여준 보컬과 사운드를 요구했다고 한다. 이렇게 서로 다른 방향성을 추구한 쿼모와 싱클레어의 협업의 결과로 탄생한 화이트 앨범은 위저 초기의 사운드와 새로운 사운드가 조화롭게 섞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쿼모를 비롯한 위저 멤버들이 20대 때부터 살고 있는 캘리포니아에 영감을 받은 앨범으로, 실제로 산타 모니카에 살고 있는 쿼모는 화이트 앨범의 노래들을 만들 때 산타 모니카 비치와 베니스 비치에서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앨범의 확고한 컨셉 때문에 10집을 캘리포니아의 한 소년이 어떤 소녀를 만나서 겪은 일을 다룬 컨셉 앨범으로 보기도 한다. 9집과 마찬가지로 10집 화이트 앨범 역시 평단과 팬들 모두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고, 그래미 락 앨범 부문에 최초로 후보로 오른 위저 앨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화이트 앨범 역시 상업적으로는 기대 이하의 결과를 거뒀다.

2016년 여름에는 패닉! 앳 더 디스코와 함께 북미 투어를 진행했다. 각각 화이트 앨범과 Death of a Bachelor를 홍보하기 위한 투어였는데, 브렌든 유리는 어린 시절 위저의 팬이었기 때문에 함께 투어를 하게 된 것이 매우 기뻤다고 한다.

위저 초창기의 색깔을 다시 가져온 9집과 10집이 크게 성공하지 못하자 크게 실망한 쿼모는 프로듀서 부치 워커와 함께 원래 구상대로 팝 음악의 요소를 적극 수용한 새로운 스타일의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 그 결과 2017년 10월 27일 발매된 11집 Pacific Daydream은 상당히 팝 음악스러운 사운드를 들려줬는데, 10집에 이어 그래미 락 앨범 부문에 후보로 올랐지만 전통적인 위저 스타일을 좋아하는 팬들에게는 대체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2018년 초에는 푸 파이터스의 Concrete and Gold 투어에서 오프닝 무대를 맡아서 오랜만에 푸 파이터스와 무대에서 재회했다. 쿼모는 함께 무대에 올라 키스의 Detroit Rock City를 커버하기도 했다.

2018년 5월 말에는 미국의 락 밴드 토토의 곡인 Rosanna와 Africa를 커버하여 싱글로 발매하였다. 위저가 Africa를 커버해주기를 바라던 한 소녀팬이 2017년 12월부터 트위터에서 캠페인을 벌였고, 리버스 쿼모와 밴드가 소원을 들어준 것. 처음에는 토토와 위저의 로고를 합성한 사진을 통해 팬들의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다가 토토의 다른 곡인 Rosanna를 커버하였지만, 본격 팬들을 상대로 어그로 끄는 밴드 5일 후 Africa를 커버하여 내놓았다. Africa는 빌보드 핫 100의 89위에 위치하며 위저에게 오랜만에[23] 빌보드 100 차트 인을 안겨주었으며, iTunes 차트에서는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TOTO 스티브 루카서는 트위터로 위저의 곡을 커버할 생각이 있다고 밝혔으며, 약속대로 2018년 8월 10일 위저의 Hash Pipe를 리메이크 하였다.

2018년 여름과 2019년 봄에는 픽시즈와 함께 북미 투어를 진행했다. 픽시즈는 위저 멤버들이 한창 LA에서 락스타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 미국 밴드씬에 큰 영향을 준 밴드였기 때문에 감회가 새로웠다고. 특히 프론트맨 쿼모는 20대 초반에 타워 레코드에 일하면서 너바나 픽시즈의 노래를 들은 것이 메탈 대신 얼터너티브 음악에 관심을 가지면서 위저 1집 노래들을 만드는 데도 영향을 줬다고 말했다. 픽시즈 투어 중에는 이미 화제가 된 Africa 외에도 Take On Me, Happy Together, Paranoid 등의 다양한 커버곡을 선보였다.

2019년 1월 14일에는 2018~2019 투어에서 선보인 노래들을 포함한 다양한 커버곡이 담긴 12집 틸 앨범을 깜짝 발매하였다. Africa의 큰 성공에 힘입어 커버앨범을 발매하게 되었다고. 토토뿐만 아니라 마이클 잭슨, 유리드믹스, TLC, 티어스 포 피어스, A-ha 등의 잘 알려진 명곡들을 커버했는데, 노래를 새롭게 편곡하기보다는 사실상 원곡을 위저 느낌으로 연주한 쪽에 가까웠기 때문에 지나치게 게으른 커버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블랙 사바스의 Paranoid는 브라이언 벨이 불렀기 때문에 6집 레드 앨범 이후로 오랜만에 쿼모가 아닌 다른 멤버가 메인 보컬을 맡은 곡이 수록된 앨범이기도 하다.

틸 앨범이 나온 지 불과 2개월도 안 된 2019년 3월 1일에는 13집 블랙 앨범이 발매됐다. 3년 전에 발매된 10집 화이트 앨범을 만들 때부터 이미 화이트 앨범과 정반대의 분위기를 가진 흑화한 비치 보이스 같은 느낌의 블랙 앨범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한다.[24] 블랙 앨범은 11집과 마찬가지로 디스토션 걸린 기타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팝이나 힙합에 가까운 사운드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제로 카니예 웨스트를 비롯해 힙합, 슈게이징 등 다양한 장르의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화이트 앨범이 낮의 캘리포니아 바닷가를 묘사했다면 블랙 앨범은 반대로 밤의 LA 도심 분위기를 담아내려고 했는데, 가사 역시 어두운 편이라 위저 정규앨범 중 최초로 보컬 쿼모가 f**k 욕설을 사용하는 앨범이기도 하다.[25]

2019년 9월 10일에는 그린 데이, 폴 아웃 보이와 함께 스태디움 투어인 '헬라 메가 투어'를 진행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린 데이의 프론트맨 빌리 조 암스트롱은 갈수록 음악계에서 록 음악이 설 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롤링 스톤즈 로큰롤 서커스처럼 여러 록밴드들이 함께 대규모 투어를 진행하고 싶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고 한다. 마침 그린 데이와 폴 아웃 보이, 위저가 모두 같은 매니지먼트 회사 소속이었기 때문에 크러쉬 매니지먼트의 주도로 세 밴드가 함께하는 투어가 기획되었다. 세 밴드는 9월 10일에 각각 신곡을 공개하고 새 앨범을 발매하겠다는 예고와 함께 이듬해부터 헬라 메가 투어를 진행한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린 데이는 Father of All...을 공개하고 13집 Father of All Motherfuckers를 예고했으며, 폴 아웃 보이는 Dear Future Self를 공개하고 두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인 Greatest Hits: Believers Never Die – Volume Two를 예고했다. 위저는 The End of the Game을 싱글로 발표하면서 14집 Van Weezer를 발매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2.5. 2020년대: 14집~

하지만 2019년 연말부터 시작된 코로나 19 사태로 인해 2020년으로 예정되어 있던 헬라 메가 투어의 진행 여부가 불투명해졌다. 이런 상황에서 위저는 2021년 1월 29일에 원래 예고했던 앨범 Van Weezer 대신 오케스트라 앨범인 OK Human을 14집으로 발매했다.[26] OK Human도 Van Weezer와 거의 동시에 준비한 앨범이었는데, 공연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스태디움 투어를 염두에 두고 만든 Van Weezer를 발매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신 OK Human의 작업을 먼저 마무리한 것이다. OK Human에 대해 디스토션이 걸린 일렉 기타 사운드로 유명한 록밴드 위저가 일렉 기타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및 클래식 음악에 사용되는 각종 관현악기만 사용한 것이 의외라는 반응도 있었지만, 팬들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이었다.[27] 앨범 발매 후 LA 필하모닉, LA 유스 오케스트라(Youth Orchestra Los Angeles)와 함께 LA의 월트 디즈니 콘서트 홀에서 앨범 수록곡을 처음부터 끝까지 라이브로 선보였다.

하지만 헬라 메가 투어가 2021년 여름에 미국에서 막을 올리는 것으로 결정되면서 위저는 14집을 내놓고 불과 4개월도 안 된 5월 7일에 15집 Van Weezer를 발매했다. OK Human이 소프트 록에 가깝다면, 이번 음반은 쿼모가 어릴 때부터 사랑하던 메탈에 영향을 받아 얼터너티브/하드 록에 가까운 사운드를 들려주었다.[28]

2021년 여름에는 그린 데이, 폴 아웃 보이와 함께 스태디움 투어인 헬라 메가 투어를 진행했다. 2021년에는 미국 전역에서 공연했고, 2022년에는 유럽 투어를 진행했다. 위저는 오프닝 밴드인 디 인터럽터스(The Interrupters)에 이어 세 밴드 중 첫번째로 무대에 올랐는데, 그린 데이와 함께하는 투어라서 그런지 셋리스트에 꼬박꼬박 2집의 El Scorcho를 포함시켰다.[29]

투어 도중 폴 아웃 보이 관계자 중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서 밴드가 무대에 서지 못하는 기간 동안에는 쿼모가 혼자서 폴 아웃 보이의 Sugar, We're Going Down을 어쿠스틱 버전으로 짧게 부르기도 했다. 다만 쿼모가 이 노래를 잘 모르기 때문인지[30] 정식으로 커버했다기보다는 폴 아웃 보이를 보러 온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다 함께 떼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한 쪽에 가까웠다. 미국 투어의 마지막 날에는 Surf Wax America를 부르는 동안 그린 데이 멤버들이 분장을 하고 위저 무대에 난입하기도 했다.

2022년 초에는 이미 쿼모가 인스타그램과 디스코드 등을 통해 여러 차례 언급한 '시즌스' 프로젝트를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원래는 각 계절의 첫날에 EP가 공개될 예정이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춘분, 하지, 추분, 동지날이 발매일로 확정됐고, SZNS에서 SZNZ로 정식 명칭이 바뀌었다. 각 EP는 7곡으로 구성되어 있고, 바이닐 한정으로 1곡의 보너스 트랙이 수록될 예정이라고 한다. 즉 1년 동안 총 32곡이 공개되는 것이다.

미국 기준 2022년 3월 20일에 시즌스의 네 EP 중 첫 번째인 SZNZ: Spring이 발매됐다. '3집 그린 앨범의 Island in the Sun과 14집 OK Human의 콜라보'라는 설명에 걸맞게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의 곡들을 담았으며, 만돌린, 멜로디카 등의 악기가 사용되었다. 스프링 앨범의 컨셉은 '숲속의 켈트풍 전설'이라 프로모 사진이나 라이브 무대 등에서 쿼모가 뾰족한 엘프 귀 분장을 하고 중세풍 옷을 입은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첫 트랙 Opening Night은 안토니오 비발디의 사계 중 '봄' 멜로디를 가져왔고, 셰익스피어 연극 속 인물들이 언급된다.

3. 멤버

3.1. 현재 멤버


===# 이전 멤버 #===

4. 와패니즈

위저 대부분의 곡을 작사, 작곡하는 보컬 리버스 쿼모는 자타공인 와패니즈이다. 힌두교 수행원인 아슈람에서 자란 쿼모는 어릴 때부터 동양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중학생 때 친구와 함께 가라테를 배울 정도로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큰 편이었다. 또 아시아계 여자가 이상형이라고 밝혔는데, 20대 초반에는 제니퍼 치바와 교제했었고[40] 2집 Pinkerton의 첫 싱글곡 'El Scorcho'는 'God damn you half Japanese girls, do it to me every time'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41] 같은 앨범의 'Across the Sea'는 일본의 한 소녀에게 받은 편지가 계기가 되어 만들어진 노래이며, 2008년엔 Perfume의 앨범을 그 해 발매된 앨범 중 최고로 꼽기도 했다. 일본어로만 트윗하는 개인계정이 따로 있다.[42]
파일:external/lh5.googleusercontent.com/weezer_pinkerton.png
1996년 발매된 2집 Pinkerton의 앨범커버에 우키요에 판화를 가져다 쓰는 대담함을 보여줬다.[43]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44701_troublemaker.jpg
2008년 발매된 'Troublemaker' 디지털 싱글 커버. 트러블메이커로 읽는 것이 아니라 토라부루메이카아 라고 읽는다(...).
虎武留芽威華啞

또한, Hash Pipe M/V에서는 스모 경기를 집어넣기도 했다. 참고로 리버스 쿼모는 일본인이랑 결혼했다.

심지어 Allister와 MONOEYES의 스콧 머피와 Scott&Rivers라는 프로젝트를 결성해서 일본어로 앨범을 내기도 했다!! 무려 12곡짜리 풀앨범이다!!



그러나, 기미가요를 불러 논란이 되기도 했다.

5. 내한

2009년 7월 24일에 한국에서 개최된 지산 밸리록 페스티벌에 첫째 날 헤드라이너로 참여, 결성 17년만의 첫 내한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렀다. 당시 지산 밸리 록 페스티벌에서는 크라켄에서 리버스를 위해 제작해준 기타를 치며 붉은악마 응원을 하기도 했다.[44][45]
파일:Karlscorner-20090724a.jpg

2013년 8월2일에 두번째 내한공연을 열었다. 그날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져서 예정됐던 공연시간이 30분이나 줄어 1시간만 공연했으며 음향상태도 매우 안좋았다. 더불어 서브헤드로 내한한 나스의 공연시간과도 겹쳐지는 불상사도 발생했고, 모처럼 내한 온 나스에게 관객이 몰리는 바람에 관객수도 메인이 서브만도 못한 촌극(...)도 일어난 공연이라 여러모로 영 좋지 않은 공연. 2013년 지산 월드 록 페스티벌에서는 김광석의 먼지가 되어한국어로 부르기도 했다!
2016년 8월 13일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에 2일차 헤드라이너로 내한했다. 관객 수와 날씨 상태는 매우 좋았으나 음향이 가끔씩 끊기거나 볼륨이 갑자기 튀는 듯 사소한 문제가 좀 있었다. 공연은 훌륭했으며 리버스는 한국어로 캄사합뉘다! 코마워요! 촴 잘해써요! 를 외치며 팬서비스의 모범사례를 보여주었다. 앵콜곡으로 2013년 지산에 이어서 김광석 먼지가 되어를 또 불렀으며 FUN.의 We Are Young도 짧게 불렀다.

2019년 8월 11일 인천 펜타포트 락 페스티벌로 내한했다. 이 날 강풍과 비로 인해 공연장 상태가 말이 아니었는데, 공연 중간에 음향 문제가 발생하여 30분 정도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와 별개로, 멤버들의 공연평은 좋았으며 특히 리버스는 기존보다 조금 늘은 한국어로 팬들을 놀래켰다. 공연이 중단된 상황에서 팬들에게 직접 내려가기도 하였으며 공연 재개 후 '미안합니다'라고 사과를 했을 정도. 이번에도 먼지가 되어를 불렀는데 앵콜 전에 불렀다.

6. 앨범 목록

6.1. 스튜디오 앨범

6.2. EP

7. 기타


[1] 천식으로 숨을 쌕쌕거리며 쉬는 사람을 'wheezer'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쿼모가 어린 시절 천식을 앓았기 때문에 'wheezer'에서 'h'를 뺀 'weezer'라는 별명이 생겼다고 한다. [2] 1집인 셀프 타이틀 블루 앨범과 2집 Pinkerton은 90년대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힌다(2집은 Metacritics에서 100점 만점을 받기도 했다!). 물론, 메타크리틱이 생기기 전의 앨범이기 때문에 리이슈 앨범으로서 평가를 모은 것이고, 보통 리이슈 앨범들은 평가를 잘 받는다. 오히려 Pinkerton의 경우는 발매 당시 평단과 대중 양쪽의 처참한 외면을 받았다가 시간이 지나 재평가된 경우다. 여하튼 명반인 건 사실. [3] 1992년부터 2002년까지의 위저의 모습이 기록된 Weezer - Video Capture Device (이하 VCD)는 2004년 발매되었고 현재 유투브에서 볼 수 있다. VCD가 업로드된 해당 채널 [4] 리버스의 다리에 관해 리버스의 어머니가 쓴 편지가 원본스캔(...)되어 올라와있다. # [5] LA로 활동지를 옮긴 후에는 밴드 이름을 줌으로 바꿨다. [6] 도그스타의 공연이 끝난 후 키아누 리브스를 보러 온 관객들이 전부 떠나는 바람에 위저는 겨우 5명 정도의 관객 앞에서 연주했다고 한다. [7] 당시 계약을 체결한 게펜의 A&R 담당자 토드 설리번에 따르면 LA의 다른 레코드 레이블들도 대부분 위저의 음악을 듣고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무대에서도 티셔츠를 입고 뿔테안경을 쓰는 등 전혀 락스타스럽지 않은 멤버들의 모습을 보고 다들 계약을 단념했다고. 게펜에서도 같은 이유로 밴드가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해 위저와 계약하는 것에 의구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8] 원하는 프로듀서 후보를 알려달라는 말에 이왕이면 좋은 노래를 만드는 송라이터가 프로듀싱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멤버들이 반쯤 농담으로 릭 오케이섹을 이야기했는데, 오케이섹이 위저의 데모곡을 마음에 들어했기 때문에 실제로 성사될 수 있었다. 마침 일 때문에 LA에 있었던 오케이섹은 프로듀서 역할을 수락하기 전에 위저 멤버들을 방문해서 연주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기도 했다. 이때 게펜 레코드 측에서 오케이섹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전했지만 위저 멤버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가 드러머인 윌슨이 인근 기타 판매점에서 오케이섹을 목격한 이후에야 진짜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그때부터 급하게 카스의 Just What I Needed를 연습해 오케이섹 앞에서 연주했는데, 오케이섹은 급조된 커버가 꽤 귀여웠다고 평가했다. 출처. 위저 멤버들, 특히 쿼모는 오케이섹과 개인적으로도 굉장히 잘 맞았다고 한다. 오케이섹이 펑크 록과 뉴웨이브을 추구했던 뮤지션이라 밴드로서는 번지수를 잘 찾아간 셈이었고, 위저 1집은 오케이섹 프로듀싱 대표작 중 하나로도 꼽힌다. [9] 쿼모는 이미 고등학생 때부터 밴드에 집중하지 못하는 멤버를 자를 정도로 엄격한 밴드 리더였는데, 위저 1집 녹음 당시에도 철저한 no girlfriend policy를 고수했다고 한다. 그런데 크로퍼의 여자친구가 갑자기 뉴욕을 방문하기도 했고, 또 크로퍼 역시 다른 멤버들의 걱정에 괜찮다고 대답했다가 얼마 후 스튜디오 옥상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고 있을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멤버 교체를 진행하기로 마음먹은 듯. 한편 미국 동부 출신이지만 10대 후반~20대 초반에 LA로 이사한 다른 멤버들과 달리 유일한 캘리포니아 토박이인 크로퍼의 성격이 다른 멤버들과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측도 존재한다. 여러모로 리버풀의 어떤 밴드가 떠오르는 일화인데, 이 때문에 크로퍼를 '위저의 피트 베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10] 단 카니발 아트에서는 처음에 베이스 담당이었다가 나중에 기타로 포지션을 바꿨다. [11] 하지만 앨범 작업 막바지에 합류한 벨이 크로퍼가 연주한 리듬 기타 파트를 전부 익혀서 재녹음할 시간적 여유가 부족했기 때문에 1집의 기타는 리드 기타리스트인 쿼모가 모두 녹음하고 벨은 백보컬로만 참여했다. [12] 쿼모는 본격적으로 위저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 특히 1992년 에사페카 살로넨이 음악감독으로 취임했을 당시 LA 필하모닉의 공연을 본 것을 2021년 인터뷰에서도 이야기할 정도로 특별한 경험으로 여기고 있다. 1집 발매 후 Buddy Holly의 뮤직비디오가 화제가 되면서 쿼모는 위저의 노래 가사에 담긴 의미는 잊히고 그냥 가벼운 팝 그룹으로 인식될지도 모른다는 고민이 컸고, 팝 음악의 단순한 진행에 한계를 느껴 클래식 작곡을 공부하고자 했다. [13] 선천적인 허벅지뼈 문제로 인해 성장 과정에서 양쪽 다리 길이가 4.4cm 정도 차이 나던 쿼모는 1집 발매 후 오른쪽 허벅지뼈를 절단해 늘리는 일리자로프 수술을 받았다. 따라서 하버드 재학 당시는 물론 1집 투어 중에도 오른쪽 허벅지에 부착한 금속 외고정기 때문에 매우 통이 넓은 바지를 입고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했다. [14] 하버드 재학 당시 쿼모는 보스턴 지역 뮤지션들과 교류하며 작곡, 공연 등을 포함한 다양한 솔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특히 호미(Homie)라는 이름의 밴드를 통해 20대 초반에 작곡했지만 위저 앨범에 어울리지 않았거나, 2집 Pinkerton 제작 당시 만들었지만 어두운 테마의 Pinkerton에 수록하기에는 너무 밝은 느낌의 노래들을 선보이기도 했다. 샤프 역시 위저 탈퇴 전에 호미 프로젝트에 참여한 바 있다. [15] 택시 기사가 멤버들에게 밴드 이름이 뭐냐고 묻자 웰시가 농담 삼아 '고트 퍼니쉬먼트'라고 대답한 데서 가져온 이름이다. 다만 이 이름은 웰시가 떠올린 것은 아니고, 이전에 웰시와 함께 밴드 활동을 했던 다른 뮤지션이 제안한 이름 후보들 중 하나였다고. [16] 웰시는 오랫동안 조울증, 경계선 성격장애 등을 앓아왔는데, 이런 심리적 문제들을 진단받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방치한 결과 위저 활동 시기에는 정신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여기에 약물 복용과 긴 투어 일정으로 인한 육체적·심리적 과로까지 겹치면서 웰시는 2001년 약물 과다복용을 통해 자살을 기도하기에 이르렀다. 웰시의 가족들은 기적적으로 살아난 웰시를 정신병원의 폐쇄병동에 입원시켰는데, 이 사실이 위저 측에 전달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 위저 멤버들도 며칠 동안 마이키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17] 그런데 아무도 슈라이너에게 정식 멤버가 됐다는 말을 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슈라이너 본인은 계속 언젠가 떠나야 할 임시 멤버라고 생각하고 있다가 4집 Maladroit 녹음 세션을 시작하고 나서야 '아 나도 위저 멤버가 된 거구나'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18] 쿼모는 어린 시절 힌두교 수행원인 아쉬람에서 자랐기 때문에 이미 초등학생 때 학교에서 매일 명상을 한 경험이 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명상을 하지 않다가 2003년에 다시 시작한 이후로는 교통사고로 입원했을 때를 제외하면 매일 아침 명상을 한다고 한다. [19]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벨 역시 윌슨과 마찬가지로 작곡 활동을 하는 편이지만, 벨은 당시에 본인 밴드인 더 릴레이션십(The Relationship) 앨범을 만드는 중이었기 때문에 Raditude에는 곡을 제공하지 않았다. Raditude 앨범 전체와 윌슨의 In the Mall이 팬들에게 대차게 까인 걸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20] 7집을 끝으로 게펜 레코즈와 맺었던 계약이 만료되었고, 쿼모와 위저 멤버들은 4집 Maladroit에서 구상했던 것처럼 레코드사의 도움 없이 위저가 단독으로 앨범을 내겠다는 구상을 밝히기도 했지만 결국 8집은 에피타프 레코드를 통해 발매됐다. [21] 쿼모는 우연히 한 프로그램에서 가르시아를 만나 함께 사진을 찍었는데, 이 사진에서 가르시아의 모습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꼭 8집의 앨범 아트로 쓰고 싶었다고 한다. 원래 8집 역시 셀프 타이틀 앨범으로 만들 생각이 있었지만 어차피 사람들이 이 앨범을 보면 '헐리 앨범'이라고 부를 게 뻔했기 때문에 그냥 앨범 이름을 '헐리'로 지었다. 벨은 인터뷰에서 이 앨범이 의류 브랜드 헐리의 협찬을 받아 만들어졌기 때문에 '헐리'가 되었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이후 헐리와 협업을 하긴 했는데, 벨이 이 일의 선후 관계를 헷갈렸던 건지 아니면 일부러 거짓말을 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 원래 쿼모를 제외한 위저 멤버들은 1집 때부터 곡 제목이나 가사, 뮤직비디오 등에 얽힌 온갖 이상한 거짓말을 하고 다닌 전적이 있다 [22] 위저 커리어에서 1996년의 2집과 2001년의 3집 다음으로 가장 긴 정규앨범 간 공백기다. [23] 2009년 (If You're Wondering) If I Want You To이 마지막 빌보드 핫 100 차트 인. [24] 쿼모는 블랙 앨범을 염두에 두고 곡 작업을 하다가 블랙 앨범에 수록하기에는 너무 밝은 분위기의 노래는 'beach(해변)'라는 이름의 드랍박스 폴더에 따로 분류했는데, 만들다 보니 블랙 앨범 폴더의 곡보다 beach 폴더의 곡이 더 많아졌기 때문에 이쪽을 먼저 발매하게 되었다고 한다. beach 폴더를 묶어서 발매한 것이 바로 11집 Pacific Daydream. [25] 7집 Raditude에서 릴 웨인의 파트에 욕이 나왔고, 10집 화이트 앨범 딜럭스 버전에 수록된 I Love the USA에도 f**k이 나온다. 하지만 정규 앨범 수록곡 중에는 블랙 앨범의 Can't Knock the Hustle에서 'motherf**ker'가 첫 f-word 욕설이다. [26] 제목은 라디오헤드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3집 OK Computer를 패러디한 것이다. [27] 1집 블루앨범, 2집 Pinkerton, 9집 EWBAITE, 10집 화이트앨범과 함께 팬들로부터 위저의 Top 5 앨범 중 하나로 자주 거론된다고 한다. [28] 프론트맨 리버스 쿼모는 어린 시절 키스의 음악을 듣고 락스타가 되겠다는 꿈을 가졌을 정도로 메탈 음악을 좋아했지만 위저가 데뷔한 90년대는 메탈이 침체기를 맞고 그런지 록을 필두로 얼터너티브 장르가 부상하던 시기였다. 따라서 메탈 테크닉은 더 이상 '쿨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에 쿼모는 오랫동안 기타 슈레딩과 속주를 비롯한 메탈 테크닉을 선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가끔 무대에서 자기도 모르게 기타 속주를 했더니 관객들이 열성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이제 메탈이 다시 쿨해졌나본데?'라는 생각이 들어서 메탈 앨범을 만들기로 했다고. [29] El Scorcho에는 '난 너에게 함께 그린 데이 콘서트를 가자고 했어(I asked you to go to the Green Day concert)'라는 가사가 나온다. 이 때문에 헬라 메가 투어 소식이 발표되자마자 많은 위저 팬들이 'El Scorcho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조로 말했는데 실제로 실행에 옮긴 것이다. [30] 헬라 메가 투어가 정식으로 시작되기 전에 인터뷰에서 쿼모에게 폴 아웃 보이의 노래를 좋아하는지 물었는데, Uma Thurman은 좋아하지만 믹솔리디안 선법을 싫어하기 때문에 Sugar, We're Going Down은 안 들어봤다고 대답했다. [31] 찰리 윌슨은 레드 앨범~헐리 시기에 촬영된 위저 webisode에서 아버지와 함께 기타를 치거나 기타 센터에 쇼핑을 가는 등 모습을 비췄다. [32] 신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188cm인 2대 베이시스트 마이키 웰시보다 더 큰 걸로 보인다. 그래서 그런지 공연 후에 인사할 때 169cm인 쿼모가 윌슨에게 어깨동무하는 게 조금 힘들어보인다... [33] 훗날 자식을 낳고 정식으로 결혼하게 되어 초퍼 원으로 활동했지만 2004년경 이혼했다. [34] 녹음 중에 계속 멍하니 있다가 다른 멤버들이 괜찮냐고 물으면 괜찮다고 대답했다가 갑자기 혼자 건물 옥상에 올라가서 소리를 지를 정도로 심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였다고 한다. 이때 샤프와 쿼모는 체념하고 내보내기로 마음 먹었다고. 탈퇴 자체는 큰 충돌 없이 조용히 이뤄졌다고 한다. [35] 탈퇴 당시에도 쿼모는 '널 좋아하지만 중요한 시기에 이렇게 행동하는 건 무리다. 네가 잘 따라오는 것 같진 않다.'라며 나름 존중하는 태도로 내보냈기에 회복할 여지가 있었고 2014년 위저 1집 제작 관련 대담에서 크로퍼 역시, 쿼모가 자신을 내보낸 건 옳은 결정이었다고 밝혔다. [36] 나중에 다른 지역으로 이사가면서 이 자리는 윌슨에게 물려줬다. [37] 쿼모가 수줍음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음반사 관계자와 면담을 하면 쿼모는 대화 내내 아무 말 없이 앉아있기만 하고 샤프가 모든 설명을 다 했다고 한다. [38] 그런데 공부 안 했다. 자신의 꿈인 시집을 출판하기 위하여 시를 쓰고, 보스턴 지역의 음악가들과 꾸준히 교류하며 그냥 평범한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고(...) 공부는 뒷전이었다.(?) [39] 웰시는 사망 약 일주일 전에 '내가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꿈을 꿨다'는 트윗을 남겼다. [40] 제니퍼 치바는 엘리엇 스미스의 사망 당시 그와 교제 중이었는데, 쿼모는 5집의 The Other Way를 통해 엘리엇 스미스가 세상을 떠난 후 옛 여자친구인 제니퍼 치바에 대한 자신의 복잡한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다. [41] 실제로 하버드에서 어떤 아시아계 여학생을 보고 만든 노래인데, 사실 그 학생은 일본계가 아니라 한국계였다고 한다. [42] https://twitter.com/RiversCuomoJPN [43] 정확히는 1833년에 우타가와 히로시게가 그린 도카이도 53역의 풍경(東海道五拾三次) 중 간바라(蒲原) <한밤중에 내린 눈> 이다. [44] 크라켄 직원이 기타 제작기를 올렸다. 재밌으니까 팬이라면 읽어보자 링크 [45] 사실 공연전에 위저가 불러줬으면 하는 한국 노래를 투표했는데 델리스파이스의 차우차우가 1등을 했지만 준비할 시간 부족으로 붉은악마 응원가를 불러줬다는 이야기가 있다. [46] 커버곡으로만 이루어진 앨범이다. Black Album이 나오기 직전에 깜짝 공개된 앨범. [47] 화이트 앨범의 커버에는 멤버 전원의 모습이 있지만 멀리서 찍혀있으며 블랙 앨범의 커버는 페인트를 뒤집어 쓴 멤버들의 모습이다. 나머지 앨범은 앨범 커버 전면에 멤버들의 모습만이 있다. [48] 플라토닉 러브였음을 밝혔다. [49] 리버스 쿼모는 일본에서 인기곡이었던 메리크리를 일본인 아내의 추천으로 듣고 커버를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50] [[https://youtu.be/hqi2Jy0UMiA]|윈도우 95에서 Buddy Holly 뮤직 비디오를 재생시키는 영상] [51] Clock Work와 Dancig Gi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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