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1935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보리스 포돌스키, 네이선 로젠이 발표한 논문 「물리적 실재에 대한 양자역학적 기술이 완전하다고 여길 수 있는가?」[1]에서 제시된 역설. 양자역학만으로는 실재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고실험에 의존한다. 흔히 양자역학의 해석에 관하여 숨은 변수 가설의 한 형태를 옹호하기 위해 제시된 논변이라고 간주된다. 저자들 이름(Einstein, Podolsky, Rosen)의 머릿글자를 따서 흔히들 "EPR 역설"이라고 줄여서 부른다.[2]닐스 보어 등 코펜하겐 해석을 지지하는 물리학자는 이런 EPR 역설에 반대하였으나, EPR의 핵심 중 하나인 비국소성은 간과되었다. 데이빗 보옴의 파일럿파 이론을 염두에 두고 일찍이 존 폰 노이만의 <숨은 변수 가설은 아예 불가능하다>는 증명을 반박했던 존 벨은 1964년 벨의 부등식을 발견함으로써 오직 파일럿파 이론 같은 비국소적 숨은 변수 가설만이 가능함을 밝혀냈다. 이로써 EPR이 본래 옹호하고자 했던 국소적 숨은 변수 가설은 논박되었다.
2. 비형식적 설명
기본 골자는 양자적으로 얽힌 두 입자들이 있을 때, EPR이 제안하는 "실재성의 기준"과 특수 상대성 이론을 가정하는 한, 양자역학이 설명할 수 없는 실재적인 요소가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다는 역설.스핀 홑겹 상태를 이루고 있는 전자 a와 b가 있다고 하자.[3] 양자역학의 발견에 따르면, 이 중 전자 a의 스핀을 z축에서 측정했을 때 그 값이 +z인 경우 그 다음 다른 전자 b의 스핀값을 측정해보면 반드시 -z이다. 또한 그 역도 성립한다. 즉 두 전자 a와 b를 z축에서 측정했을 때의 스핀값("z-스핀값")은 완벽한 음의 상관관계를 이룬다. 이러한 두 전자 a, b를 두고 이르길 "얽혀있다(entangled)"고 말한다.
EPR은 "어떤 물리량이 실재한다"의 기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해당 기준에 따르면 두 번째로 측정된 전자 b의 z-스핀값은 실재한다. 왜냐면 위 시나리오에서 b의 z-스핀값은 정확히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때 전자 a의 측정이 b를 교란한다는 문제제기가 있을 수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 a와 b가 1광년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하자.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의 속도보다 빠른 인과적 작용은 불가능하므로, a에 조작을 가하는 것이 즉각적으로 b에도 영향을 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a와 b가 공간상 떨어져있다고 가정하는 한 b가 교란된다는 문제제기는 막을 수 있다. 그러므로 전자 b의 스핀값이 실재한다고 보는 추론은 타당하다.
그런데 위 실험을 z축이 아니라 x축에 대해서도 시행한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a의 스핀값은 +x나 -x 중 하나로 정확히 측정될 것이며, 곧 b의 x-스핀값도 실재한다는 귀결이 동등하게 도출된다. 즉 앞에서의 귀결과 결합될 경우, 전자 b는 실재하는 z-스핀값과 동시에 실재하는 x-스핀값을 갖는다. 하지만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양자역학에서 z-스핀값과 함께 x-스핀값을 정확히 측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b의 z-스핀값과 x-스핀값 모두가 실재함에도 말이다.
따라서 이렇듯 " 실재"하는 전자 b의 특성을 양자역학에서는 원리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양자역학은 물리적 실재를 포착하는 데 완전하지 않다는 게 EPR 역설의 결론이다.
3. EPR에 대한 반응
말 그대로 역설이기 때문에 코펜하겐 파는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을 아인슈타인은 "숨은 변수"라고 지칭하였고, 숨은 변수 이론이 되었다.당시 닐스 보어는 EPR이 " 실재"라는 말을 중의적으로 사용함을 문제삼았으나[5], 매우 모호하게 쓰여진 탓에 약 15년 후 본인이 직접 그에 대해 사과하기도 했다. # 이처럼 실험 결과나 수식 이전에 "실재(reality)" 같은 과학철학 및 형이상학적 개념을 두고 논쟁이 발생했다는 점 때문에 과학적 실재론 논쟁과 깊이 얽혀있다.
시간이 흘러 존 스튜어트 벨은 만약에 숨은 변수 이론이 존재한다고 가정한다면 EPR에 따른 관측값이 만족시켜야 하는 벨의 부등식은 양자역학의 예측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벨의 부등식 참조. 이후 알랭 아스페를 비롯하여 많은 실험 물리학자들은 이런 양자역학의 예측을 실험적으로 검증했다. 쉽게 말해 이 부분은 EPR의 전제였던 국소성의 원리는 잘못되었고 자연은 비국소적이었다는 뜻
이처럼 EPR 역설과 벨의 부등식은 이후 양자역학의 해석에 관한 연구를 보다 풍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으며, 이러한 논쟁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4. 더 읽어볼 만한 글
5. 각종 매체에서의 EPR
EPR 역설이라는 개념은 그 신박한 난해함 때문에 오랫동안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로 묻혀 있었으나, 20세기 후반~21세기 들어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SF소설이나 애니, 영화등에 자주 등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고찰은 거의 없고, 주로 광속의 벽을 인류가 깨뜨릴 수 있다는 미래의 희망(?)으로서 언급되는 듯하다. 몇 광년 거리가 떨어져 있을 때 "동시에" 통화할 수 있는 통신수단 이름으로 EPR을 사용하면 꽤 그럴 듯해 보인다고 할까, 좌우간 이 세 글자를 쓰면 작가가 아주 무식해보이지는 않는다는 장점이 있는 것 같다.5.1. EPR 명칭이 매체에 사용된 사례
- EVE 온라인: 게임 공식 설정에서 초광속 통신이 가능한 근거로써 들고 있음. 본 설정에 따르면, 초광속 여행이 가능해진 후에도 한동안 엔진을 사용 중인 함선과의 통신은 불가능했지만, EPR 역설에 근거하여(유사 물리학이 길게 나열되지만 생략) 초광속 통신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이 '고대 역설'의 이름이 왜 EPR인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 총몽: 2부인 라스트오더에서 처음으로 언급된다. 라스트오더 시점에서는 이미 인류가 여러 행성에 식민지를 건설했으며 명왕성의 공명 카이퍼 벨트대까지 진출한 상황이라 EPR통신이 중요한 안건으로 대두된다. 작품의 흑막인 아가 음바디는 아예 물질 자체를 EPR통신과 노바교수의 카르마트론, 그리고 나노머신을 이용해서 현실화 하려고 한다. 그리고 또 다른 등장인물 중 하나인 돈파는 보디 내에 있는 D-리퍼라는 동력원을 통해 설명할 수 없는 원리로 웜홀과 블랙홀까지 생성하며 양자역학을 마음대로 주물러 개인이 신에 가까워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음바디는 그를 제거하려 든다.
[1]
A. Einstein, B. Podolsky, and N. Rosen,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 Rev. 47 777 (1935)
[2]
참고로 아인슈타인은 논문 발표 후, 보어의 반응이 나오기 전에 슈뢰딩거에게 보낸 편지(1935년 6월 17일)에서 자신이 생각한 핵심이 제대로 쓰여지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했다. "...언어의 이유 때문에 이는 토론을 거친 후 포돌스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 논문은 내가 본래 원했던 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자면 박식함 때문에 핵심이 질식되었다..." Fine, A.,1986, The Shaky Game: Einstein, Realism and Quantum Theory
[3]
원래 EPR 논문에서 따지는 물리량은
운동량과 위치지만, 그 대신
스핀을 기준으로 설명하는 편이 더 간단해서 일반적으로 소개된다. 이러한 형식화를 최초로 제기한 것은
양자역학의 해석으로도 유명한 데이빗 보옴으로 알려져있다.
[4]
"If, without in any way disturbing a system, we can predict with certainty (i.e., with probability equal to unity) the value of a physical quantity, then there exists an element of reality corresponding to that quantity."
[5]
Niels Bohr, "Can quantum-mechanical description of physical reality be considered complete?." Physical review 48.8 (1935): 6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