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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2:54:05

제14대 대통령 선거

1992년 대선에서 넘어옴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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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3월 15일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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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 제6차
1987년 10월 27일
시행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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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파일:external/i3.ruliweb.com/15a0dfc03fa3459e3.jpg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wiki style="margin: -7px -12px"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선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
}}}
투표율 81.89% ▼ 7.26%p
선거 결과
후보 [[민주자유당|
민주자유당
]]
김영삼
[[민주당(1991년)|
민주당
]]
김대중
[[통일국민당|
통일국민당
]]
정주영
득표율
41.96% 33.82% 16.31%
득표수 9,977,332 8,041,284 3,880,067
대통령 당선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1. 개요2. 배경3. 과정4. 본선5. 예측 조사6. 투표율7. 개표 결과
7.1. 지역별 개표 결과7.2. 격전 지역
8. 여담

[clearfix]

1. 개요

파일:김영삼-당선-인사.jpg
기뻐하는 김영삼 대통령 당선인 내외
파일:92김영삼당선_조선일보.png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
대한민국 제14대 김영삼 대통령 취임식 영상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2년 11월 20일 관보에 공고. (대통령공고 제129호)[1][2],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되었으며 기호 1번 김영삼 후보가 기호 2번 김대중 후보를 득표율 8.14%p, 표차 193만 6,048표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노태우를 끝으로 군사 정권이 완전히 종식된 이후 치러지는 첫 대통령 선거이다.

2. 배경

1987년 개헌 이후 두 번째로 시행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이자 제6공화국 이후 실시된 최초의 선거이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쳐 비대해진 거대 여당을 이끄는 김영삼 통합 야당을 이끄는 김대중이 경쟁하였다. 특이한 점은 1960년대부터 줄곧 보여왔던 여당 군인 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출신 후보끼리 벌인 대결이라는 것이다. 즉,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거대 여당 제1야당과의 대결이었다.

한편,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재력을 바탕으로 통일국민당을 결성, 대통령 선거에 앞선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1석을 획득하며 제3당으로 부상했다. 마지막으로 꼬마 민주당 출신의 정치인 박찬종 역시 신정치개혁당 깃발 아래 출마하게 된다.

3. 과정

3.1. 후보자 경선

후보자 경선

3.1.1. 민주자유당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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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민주자유당 심볼.svg 민주자유당 김영삼 당선
- 파일:민주자유당 심볼.svg - - 민주자유당- - 이종찬- 사퇴
}}}}}}}}}}}}

노태우 민주정의당, 김영삼 통일민주당, 김종필 신민주공화당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민주자유당은 대선 후보 선출을 놓고 계파 갈등으로 진통을 겪었다.

김영삼 대표최고위원은 합당 이후 꾸준히 노태우 대통령 측에 차기 대권 후보직을 요구했으나, 노태우는 물밑에서 박철언 의원을 자신의 후계자로 밀었다. 이에 반발한 민주계가 집단 탈당까지 불사하겠다고 위협해 결국 철회를 받아냈지만[3], 이후로도 김영삼은 민정계가 자신에게 대권을 양보하지 않을 것을 우려할 수밖에 없었다.

전당대회 대의원 중 과반이 민정계 소속인 만큼 자유 경선을 시행하면 패배가 확실하다고 판단한 김영삼은 경선 없이 단독 합의 추대 방식으로 자신을 선출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노태우가 확실하게 표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하자 그제서야 경선에 동의했다. 박태준 최고위원이 민정계의 유력 대권 주자로 떠오르자 역시 민주계는 박태준이 출마할 시 경선을 거부하고 탈당하겠다고 압박했다. 결국 4월 14일 김종필 최고위원이 박태준을 만나 당의 화합을 위해 불출마하라고 강권햇으며, 청와대는 4월 16일 이상연 안기부장을, 17일 정해창 대통령비서실장을 박태준에게 보내 불출마를 종용했다.

4월 17일 박태준 최고위원은 역시 출마를 준비 중인 이종찬 의원과 이한동 의원이 단일화에 합의한다면 자신은 입후보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결국 민정계 대권 주자 및 중진 의원 7명[4]은 17일 오후 3시부터 18일 0시 40분까지 9시간 40분의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이종찬 의원을 민정계 단일 후보로 추대했다. [5]

4월 19일부터 25일까지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김영삼 대표최고위원과 이종찬 의원이 입후보했다. 기호는 배정되지 않았으나 추첨을 통해 이종찬의 이름이 투표용지 왼쪽, 김영삼의 이름이 오른쪽에 인쇄되도록 결정되었다.

김영삼은 민주계의 영수인 데다가 공화계의 영수인 김종필 전 총리, 민정계의 영수인 노태우 전 대통령의 지원을 받아 사실상 승리가 확정적이었다.[6] 5월 14일 당무회의에서 최종확정된 대의원 6,882명 중 2,631명의 당연직 대의원을 제외하고 약 4천 명의 선출직 대의원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지구당 위원장들의 지지가 중요했는데, 237명의 지구당 위원장 중 177명이 김영삼을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가운데 이종찬은 5월 17일 청와대가 선거전에 개입해 불공정 경선을 자행하고 있다며 경선 보이콧을 선언했다. 하지만 공식적인 후보 사퇴는 하지 않아 투표용지에는 그대로 이름이 올라갔다.

5월 19일 전당대회는 양 후보 지지자들 간에 야유가 터져 나오는 험악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김영삼 4,418표, 이종찬 2,214표로 당선 요건인 재적 대의원 6,882명의 과반을 얻은 김영삼이 후보로 확정되었다.

경선을 보이콧하고도 유의미한 득표율을 올렸다고 판단한 이종찬은 5월 22일 '민자당 새정치모임' 발기인대회를 열고 신당 창당을 시사했다. 김영삼 측으로부터 모종의 약속을 받고 당에 잔류하는 쪽으로 선회하는가 싶더니 8월 17일 탈당하고 9월 3일 새정치국민연합을 결성, 신당 창당을 본격화했다. 결국 새한국당을 창당했으며, 김영삼에 대항할 '국민 후보'를 출마시켜 맞서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후보 영입에 실패하자 이종찬 본인이 출마했으며,[7] 이후 정주영과 단일화했다.

3.1.2. 민주당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svg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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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5,#aaa
<rowcolor=#003990,#0070BB> 기호 정당 이름 비고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타입.svg 민주당 김대중 당선
파일:민주당(1991년) 로고타입.svg 민주당 이기택 낙선
민주자유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새정치국민회의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통일국민당 제14대 대통령 후보 경선
자유민주연합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신한국당 제15대 대통령 후보 경선 }}}}}}}}}}}}}}}

김대중 신민주연합당 이기택 민주당이 합당해 출범한 민주당은 민주당계 정당으로는 1970년 이후 처음으로 경선을 시행해 대선 후보를 선출했다.

5월 15일부터 22일까지 후보 등록을 받은 결과 김대중 공동대표와 이기택 공동대표가 나란히 입후보했다.

전당대회에 참여할 대의원을 선출하기 위해 각 시도 지부에서 대의원 대회를 열었는데, 이 과정에서 각자 대의원직을 더 많이 확보하려는 신민계와 민주계 사이에 경쟁이 과열되어 한때 민주계가 전대 보이콧을 고려하기도 했다.

민주당은 5월 25일부터 26일까지 이틀 동안 전당대회를 개최했으며, 그중 26일 대통령 후보 경선을 시행한 결과 김대중 1,413표, 이기택 925표로 재적 대의원 2,426명의 과반을 얻은 김대중이 후보로 선출되었다.

3.1.3. 통일국민당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22B14C,#0070BB> 기호 정당 이름 비고
파일:통일국민당 심볼.svg 통일국민당 정주영 당선
파일:통일국민당 심볼.svg 통일국민당 김동길 낙선
}}}}}}}}}}}}

정주영 대표가 유일하게 입후보했으며, 따라서 경선 대신 찬반 투표로 후보 선출을 진행했다.

탄반 투표 방식은 기립 표결로 정해졌는데, 이에 정주일 국회의원 당선인이 비민주적 투표라고 항의해 소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재적 대의원 1,796명 중 1,738명이 투표한 결과 찬성 1,727표, 반대 7표, 기권 4표로 선출 요건인 재석 대의원 과반을 훌쩍 넘는 99.4%의 지지율로 정주영 대표가 후보에 당선되었다.

통일국민당 창당의 주역 중 하나였던 김동길 전 의원은 훗날 "창당할 때만 해도 정주영이 나에게 대선 후보직을 약속했었는데, 총선 이후 말을 바꾸어 자신이 나가겠다고 했다"는 취지의 후일담을 밝혔다. # 정주일이 전당대회에서 소란을 일으킨 것도 사실 이 일에 대한 불만의 표시였다고.

4. 본선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4대 대통령 선거 후보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민주자유당 김영삼 당선
2 민주당 김대중
3 통일국민당 정주영
4 새한국당 이종찬 사퇴
5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6 대한정의당 이병호
7 무소속 김옥선
8 백기완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
파일:attachment/14thelectionmascot.png
각 정당의 마스코트. 왼쪽부터 신정치개혁당의 종돌이, 통일국민당의 호돌이, 민주당의 토끼와 거북이, 민주자유당의 곰돌이
당초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자유당의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김영삼의 입지에 큰 타격이 온 상태였으나, 민주자유당내에서 김영삼을 위협하는 대권 주자가 없어서 역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압박하여 당권을 장악하였고, 결국 대통령 후보가 되는데에 성공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각 후보의 지역을 기반으로 4개로 나눠진 모양인데 반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대체로 영남 호남의 대결 구도였다. 김영삼 후보의 지지 기반은 3당 합당으로 인해 전통적 지지기반이었던 부산직할시 경상남도( PK)에서 대구직할시 경상북도( TK)까지 연고범위가 넓어졌다. 우리가 남이가 김대중 후보는 지지기반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편 정주영은 자신의 연고지인 강원도와 더불어 충청도에서 지지를 보탰다.[8]

'신한국 창조'를 기치로 내세운 김영삼 후보 진영의 광고. '상도동의 새벽' 광고 깨알 같은 전두환 빈손으로 돌아와.

'금요일엔 바꿉시다'를 기치로 내세운 김대중 후보 진영의 광고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을 기치로 내세운 정주영 후보 진영의 광고 훗날 아주 유명한 현대그룹 임원도 경제 대통령을 꺼내든다

1992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자유당 김영삼 후보에 맞선 민주당 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여당 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김대중은 민주당은 제13대 국회에서 수세·농지세 감면, 농어가 부채의 상환연기, 농·수·축협 조합장 직선제 도입 등 농민을 위해 일한 유일한 정당이라면서 3백64일 야당하다가 선거날에만 여당하는 농촌 유권자들은 이제 반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30여년간의 군정 기간중 가장 많은 차별과 천대를 받은 계층이 바로 여러분 농민들입니다. 그런데도 여러분은 뭐가 좋다고 선거때만 되면 여당을 찍고 선거가 끝나면 후회를 하곤 합니까라고 주장했다. 이미 30년 전인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 김대중 후보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 강조

예전 선거에 비해 선거 기간 중 북한의 도발 등의 큰 사건은 없었지만, 이 때 지금도 지역 갈등의 악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초원복집 사건이 있다. 해당항목 참조. 또한 민주자유당 측에서는 끊임없이 김대중 후보에게 용공론을 펼쳤고, 민주당 측에서는 김영삼 후보의 3당 합당을 비난하는 등 네거티브 선거 양상이 짙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 운동 기간 내내 의외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초접전을 벌이고 정주영과 박찬종이 3위~4위를 다투던 구도였지만 부동층이 위낙에 많아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으로 영남권의 표가 김영삼으로 쏠리면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8.14% 차이로 여유있게 제치고 당선되었다.
파일:KakaoTalk_20170503_204709624.png
다음날 오전 8시 5분, 개표 92.7% 상황에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한편, 남장 정치인으로 유명해진 김옥선무공약이 공약을 내세우며 출마했다. 지키지 않을 바에는 안 하는게 낫다는 취지. 사실 정치적 경력으로 볼 때 황당한 후보, 황당한 대통령 선거 공약이라고 까고 보긴 어렵지만 결국 입에 오르내려지는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결국 김옥선 후보는 86,292표, 득표율 0.36%에 그쳐 6위로 낙선했다.[9] 심지어 자신의 연고지이자 과거 지역구였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조차 처참히 발렸다. 이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3위 낙선했던 상태.

5. 예측 조사

한국갤럽 1992년 대통령 선거 예측 조사
출처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기타 후보
전체 39.5% 31.1% 15.7% 12.4% 1.2%
실제 결과 +2.5%p +2.7%p +0.6%p -6.0%p -
세대별 20대 22.2% 37.3% 20.7% 16.8% 3.0%
30대 31.5% 26.4% 22.4% 18.8% 0.9%
40대 49.0% 30.0% 10.5% 9.7% 0.7%
50대 이상 55.9% 30.9% 8.5% 4.4% 0.3%
성별 남성 34.2% 32.1% 17.8% 14.4% 1.5%
여성 44.5% 30.2% 13.8% 10.5% 1.0%
권역별 서울 31.3% 32.4% 19.0% 16.1% 1.3%
인천/경기 35.6% 28.2% 19.9% 14.8% 1.5%
강원 38.8% 22.4% 24.3% 14.5% 0.0%
대전/충청 39.5% 26.3% 21.5% 11.7% 1.0%
광주/전라 3.2% 88.1% 1.7% 5.7% 1.3%
대구/경북 66.4% 5.0% 17.7% 9.4% 1.4%
부산/경남 64.1% 12.3% 10.2% 12.4% 1.0%
제주 41.7% 28.9% 16.7% 10.6% 2.2%
지역크기별 대도시 40.2% 26.7% 16.7% 15.1% 1.3%
중소도시 32.5% 33.8% 18.5% 13.9% 1.4%
읍/면 45.7% 36.5% 10.9% 5.9% 1.0%
학력별 초졸 이하 56.8% 31.8% 6.6% 4.5% 0.3%
중졸 47.8% 31.7% 11.7% 8.3% 0.5%
고졸 30.8% 31.5% 21.0% 15.6% 1.2%
대재 이상 26.7% 29.0% 20.8% 20.2% 3.3%
직업별 농/임/어업 44.0% 42.5% 7.2% 5.9% 0.3%
자영업 37.6% 27.5% 19.6% 14.8% 0.5%
블루칼라 33.5% 31.8% 18.7% 15.2% 0.8%
화이트칼라 27.6% 30.2% 24.1% 16.4% 1.7%
가정주부 47.8% 26.6% 14.2% 10.3% 1.1%
학생 11.0% 37.2% 14.7% 29.8% 7.3%
무직/기타 41.9% 30.3% 14.2% 11.4% 2.2%
87년대선투표별 노태우 55.4% 17.5% 17.5% 8.9% 0.7%
김영삼 52.0% 16.0% 14.5% 16.1% 1.3%
김대중 10.3% 68.2% 10.1% 10.4% 0.9%
김종필 38.1% 16.4% 30.2% 13.4% 1.9%
1992년 당시에는 전체 선거 기간(28일) 동안에는 여론조사 공표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1992년 11월 17일 여론조사를 끝으로 변화 양상을 알 수가 없었다. 갤럽에 따르면 이후 기간 동안에는 김영삼 김대중의 격차가 점점 좁혀졌고, 1992년 12월 15일 조사에서는 0.5%의 차이를 보였으나, 이날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면서 지지율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15일 조사 당시까지 30%를 넘었던 의견유보층의 표심을 예측해야했기 때문에 갤럽은 그날 면접 조사를 기반으로한 판별 분석을 통해 MBC에 예상 득표율을 전달했고, 실제 득표율을 맞추는데 거의 성공했다.

다만 박찬종 후보는 예측치보다 실제 득표율이 6%p나 떨어졌는데, 당시 갤럽리포트에 따르면 사표방지 심리의 작용과 당시 부산기관장회의 파동으로 인해 영남지역의 표심이 김영삼 지지로 선회했다고 분석했다.

6. 투표율

성별 투표율
남성 82.6% 여성 80.9%
종합 연령별
20대 전반 69.8% 20대 후반 73.3%
30대 전반 82.1% 30대 후반 85.9%
40대 88.8% 50대 89.8%
60대 이상 83.2%

7.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colcolor=#fff> 1 김영삼(金泳三) 9,977,332 1위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41.96% 당선
2 김대중(金大中) 8,041,284 2위


33.82% 낙선
3 정주영(鄭周永) 3,880,067 3위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16.31% 낙선
4 이종찬(李鍾贊) 사퇴[10]


5 박찬종(朴燦鍾) 1,516,047 4위


[[신정치개혁당|
파일:신정치개혁당 글자.svg
]]
6.37% 낙선
6 이병호(李炳浩) 35,739 7위

파일:대한정의당글자.png
0.15% 낙선
7 김옥선(金玉仙) 86,292 6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0.36% 낙선
8 백기완(白基琓) 238,648 5위


[[무소속(정치)|
무소속
]]
1.00% 낙선
선거인 수 29,422,658 투표율
81.89%
투표 수 24,095,170
무효표 수 319,761

7.1. 지역별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11]
파일:800px-14대_대선_1555778182260.jpg
<colbgcolor=#eeeeee,#26282c> 정당

[[민주자유당|
파일:민주자유당 글자.svg
]]




[[통일국민당|
파일:통일국민당 글자.svg
]]


[[신정치개혁당|
파일:신정치개혁당 글자.svg
]]
후보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전국 9,977,332
(41.96%)
8,041,284
(33.82%)
3,880,067
(16.31%)
1,516,047
(6.37%)
서울 2,167,298
(36.41%)
2,246,636
(37.74%)
1,070,629
(17.98%)
381,535
(6.41%)
부산 1,551,473
(73.34%)
265,055
(12.52%)
133,907
(6.33%)
139,004
(6.57%)
대구 690,245
(59.59%)
90,641
(7.82%)
224,642
(19.39%)
136,037
(11.74%)
인천 397,361
(37.26%)
338,538
(31.74%)
228,505
(21.42%)
84,211
(7.89%)
광주 14,504
(2.13%)
652,337
(95.84%)
8,085
(1.18%)
2,827
(0.41%)
대전 202,137
(35.19%)
165,067
(28.73%)
133,646
(23.26%)
64,526
(11.23%)
경기 1,254,025
(36.33%)
1,103,498
(31.97%)
798,356
(23.13%)
239,140
(6.92%)
강원 340,528
(41.51%)
127,265
(15.51%)
279,610
(34.08%)
56,199
(6.85%)
충북 281,678
(38.26%)
191,743
(26.04%)
175,767
(23.87%)
68,900
(9.35%)
충남 351,789
(36.93%)
271,921
(28.54%)
240,400
(25.24%)
64,117
(6.73%)
전북 63,175
(5.67%)
991,483
(89.13%)
35,923
(3.22%)
9,320
(0.83%)
전남 53,360
(4.20%)
1,170,398
(92.15%)
26,686
(2.10%)
7,210
(0.56%)
경북 991,424
(64.72%)
147,440
(9.62%)
240,646
(15.71%)
124,858
(8.15%)
경남 1,514,043
(72.31%)
193,373
(9.23%)
241,135
(11.51%)
115,086
(5.49%)
제주 104,292
(39.97%)
85,889
(32.92%)
42,130
(16.14%)
23,077
(8.84%)
파일: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투표 결과.png
대부분의 지역에서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김대중 후보는 호남 지역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으며, 서울특별시에서는 1.33% 차이로 신승했으나 나머지 지역에서는 김영삼 후보에게 패배했는데 양김의 우세 지역은 5년 전 대통령 선거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 결과로 나왔다.

서울특별시의 경우, 근소한 표차로 김대중이 이긴 것은 맞지만, 서울특별시의 각 자치구별로는 표심이 매우 엇갈렸다. 중산층 이상이 많이 거주하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 용산구 등에서는 김영삼이 넉넉한 표차로 앞섰고[12], 호남 출신 노동자와 서민층이 많이 거주하는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등 서울특별시 서남부 지역과 변두리 권역들은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 때 당시는 강서구, 양천구, 노원구가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다. 한편 제3지대 보수 정당 후보인 정주영 후보와 박찬종 후보의 표를 김영삼과 합치면 서울특별시에서도 보수 진영이 민주당계 진영을 앞서는 결과가 나왔다.

또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PK)의 김영삼 득표율이 대구광역시· 경상북도( TK)의 보수 정당 득표율보다 높았다.[13][14] 이는 김영삼의 지역 기반이 부산광역시· 경상남도이었기 때문이다. 부산광역시·경상남도의 인구가 대구광역시·경상북도의 인구보다 많기 때문에, 김영삼 후보가 193만표라는 꽤 큰 표차로 승리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대구광역시·경상북도도 다른 선거만은 못했을 뿐이지[15] 어찌되었든 김영삼이 큰 격차로 승리했다. 이러한 영호남의 인구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승리해야 했지만, 김대중은 제13대 대통령 선거와 마찬가지로 서울특별시에서만 신승하는데 그쳤고 영호남의 표를 제외한 수도권+충청권+강원도+제주도 합산에서도 패배했다.[16]

이는 20년 뒤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지역별 결과와 비슷하다. 광역자치단체 표심 뿐만 아니라 시, 군, 구 등 기초자치단체들의 표심 또한 상당히 유사하다. 두 선거 모두 보수 정당 vs 민주당계 정당의 양강 구도를 띤 것이 두 선거의 지역별 결과가 유사하게 나온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17][18] 즉, 양측 진영에서 여러 후보가 나와 지지층이 분열되고, 이로 인해 지역별 1위 후보가 뒤바뀌는 일이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7.2. 격전 지역

각 지방을 대표하는 맹주 간 대결답게 지역구도가 확고했지만 이런 지역주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수도권 지역과 충청도 지방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또 정주영 후보의 연고지였던 강원도에서는 김영삼, 정주영 후보의 접전지가 많았다. 시, 군, 구 단위에서 1위, 2위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각주가 없는 곳들은 양김의 접전 지역이다. 이상 19곳이 이번 대선 격전지였으며, 그 중 양김 사이의 접전지 13곳 중 7곳에서 김영삼 후보가 6곳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며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지역주의 구도에서 인구가 더 많은 영남에서 몰표를 받은 김영삼 후보가 인구가 적은 호남에서 몰표를 받은 김대중 후보를 앞서게 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28]

8. 여담


[1] 파일:제14대 대통령 선거 공고.jpg [2] 참고로 대한민국 제6공화국 체제에서 관보에 공고된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될 뻔 했는데, 그 이유는 이후에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대통령 선거의 시행이 법정화가 되어 굳이 공고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 박근혜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의해 파면 당하고, 이후에 시행한 궐위로 인한 선거의 날짜를 공고하기 위해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같은 해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25년 만에 공고하였다.(대통령공고 제271호) [3] 박철언은 계속해서 대선 출마를 추진하다가 4월 15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4] 박태준, 박철언, 이한동, 심명보, 박준병, 양창식, 이종찬 [5] 민주계가 김영삼으로 결집한 것과 달리 민정계는 대권 주자들이 난립해서 이전부터 꾸준히 내부적으로 단일화의 필요성이 대두되던 터였다. [6] 김종필은 4월 27일 김영삼 지지를 선언하고 김영삼 후보 추대위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7] 일각에서는 처음부터 이종찬이 출마하기 위해 일부러 영입 노력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시각도 있었다. [8] 하지만, 정주영 후보가 강원와 충청권에서 상대적으로 강세였다는 뜻이지, 강원도와 충청권의 1위는 김영삼이었다. 선거 당시에는 김종필 민주자유당에서 나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기 전이라 충청도 지역 정당은 없었다. 다만 통일국민당은 훗날 신정치개혁당과 합쳐져 신민당이 되었다가 이후 자유민주연합으로 흡수되었다. [9] 그래도 제19대 대통령 선거 조원진(42,949표)보다는 2배 가까운 득표를 했다. [10] 통일국민당 정주영 후보 지지. [11] 해당 지도에는 오류가 존재한다. 충청북도 진천군 충청남도 논산시(당시 논산군)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승리했다. 또한 충청남도 서산시 경상남도 울산시 동구 정주영 후보가 승리했다. [12] 용산구를 제외한 4곳은 5년 전에도 김영삼이 1위를 차지했는데, 3당 합당으로 보수층은 표심이 대거 몰리면서 일부 동들은 3자구도에서 50%를 넘겼다. 만약 정주영의 독자 출마가 없었다면 70% 득표율도 가능했을 수준. [13] 대구광역시·경상북도의 이러한 줄어든 득표율은 김대중이 아닌 정주영과 박찬종 쪽으로 분산되었다. [14] 김영삼 후보는 그의 고향인 거제군 장목면 제4투표소에서 전체 283표중 283표를 득표하여 득표율 100%를 기록하기도 했다. [15] 더블 스코어로 이기기는 했지만 과반도 못 얻은 제19대 대통령 선거 홍준표는 제외. 이 때는 김영삼의 경우와는 달리 보수 정당 자체가 궤멸 위기에 처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16] 이때의 패배를 바탕으로 김대중은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DJP연합을 결성, 충청도의 표심을 확보하는 전략을 세우게 된다. [17] 물론 정주영 후보가 16%라는 상당한 득표율을 올리긴 했지만 어느 한 쪽의 진영에 속한다기보다는 성공신화를 가진 기업인 출신으로서 기존 정치를 불신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받은 것에 가까웠다. 이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안철수랑 비슷하다. [18] 다만 정주영과 안철수를 비교해보면 공통점도 있지만 차이점도 있는데 정주영 통일국민당은 제3지대이지만 엄연히 보수 정당에 가까웠고 통일국민당의 구성원도 대부분 보수 정당 출신이 많았고 보수 정당 출신이 아닌 경우에도 나중에는 보수 지지 성향을 띄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상당수는 나중에 제1보수정당인 민주자유당으로 복당했고 잔류파 역시 충청계 보수 정당인 자유민주연합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당시 안철수 국민의당은 당시에 제3지대이면서도 민주당계 정당에 가까운 느낌이 났고 당시 국민의당의 구성원은 민주당계 정당 출신들이 많았으며 상당수는 나중에 다시 더불어민주당으로 가거나 민주당계 정당에 가까운 제3지대 정당인 민주평화당을 차려서 독립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점에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과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제법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14대 대통령 선거 당시의 정주영 후보는 충청권에서 득표율이 꽤 되었는데 나중에 통일국민당의 잔여 기반을 나름 흡수한 자유민주연합은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에 충청권을 석권하고 TK에서 선전했지만, 이와 반대로 안철수는 호남에서 꽤 득표를 했지만 이후 안철수는 호남에서 지지율을 확 잃었고, 게다가 국민의당의 구성원들은 나중에 바른정당과의 합당을 둘러싸고 사분오열이 되었으며 일부는 민주평화당으로 가게 된다. 연이어서 민주평화당, 바른미래당 제7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거의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연이어서 바른정당과 합당해서 생긴 바른미래당의 구성원들도 손학규계, 당권파, 안철수계로 나뉘어서 사분오열이 되었고 손학규계, 대안신당, 민주평화당을 합당해서 생긴 민생당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멸했는데 이 역시 정주영의 통일국민당과 안철수의 국민의당은 차이가 꽤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19]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20] 현재 춘천시의 읍면지역. [21]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22]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부개동, 일신동, 십정동. [23]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24] 현재의 서울특별시 광진구 일원. [25]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26] 2위는 김영삼 후보였으며 3위 김대중 후보 또한 1위와 4% 남짓 차이였던 접전지역이었다. [27] 2위는 정주영 후보였다. [28] 물론 상술했듯 영호남을 제외한 지역에서의 총합도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다만 두 후보의 정치적 연고지가 정반대였으면, 인구가 더 많은 영남을 차지한 후보가 수도권+충청권+강원도+제주도의 표 차이를 모두 상쇄하고 승리할 수 있었다. [29] 참고로 민주당계의 텃밭인 호남의 경우 대체로 광주전남이 전북보다 민주당 지지가 더 강하긴 하나, 전북의 주류 민주당계 득표율이 전남보다 더 나오는 경우도 생각보다는 자주 나온다. 대선의 경우 이러한 사례가 8번 중 2번 있었다. ( 17대 대선, 19대 대선) [30] 1992년 대선 결과에 대한 북한의 노동신문 논평. 북한, 대통령선거 결과 비난